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부르짖음 없는 절망 속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사사기 13:1-14]
13-16장까지는 삼손 이야기이다. 8번째 사사 입다에 이어 입산, 엘론, 압돈이 다스린 31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몹시 상하셨다. 무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넘기셨다. 사사기의 압제 기간 중 가장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고통을 당했다.
삼손의 이야기에는 “부르짖음”이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지조차 않을 정도로 상태가 약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고질병이다. 입다와 입산, 엘론과 압돈이 사사로 통치하던 31년간의 평화는 속으로 하나님을 떠날 대로 떠난 “썩은 평화”였다. 사사들부터 많은 부인을 두고, 사치를 누리며, 이방 결혼에 익숙했던 이스라엘에는 소망이 없었다. 블레셋이 압제하기 전에 이미 평화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 ‘죄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고 있었다.
죄의 지배를 받으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거룩함은 사라졌고,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찾을 줄 몰랐다. 죄에 대한 내성이 가져온 심각한 위기였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위기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을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직 잉태되지도 않은 이를 사사로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1. 마노아와 아내에게서 삼손이 태어날 것(1~14절)
1절은 삼손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다시 악을 행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년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 40년은 한 세대를 꽉 채운 기간으로, 다른 사사 시대에 비해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런데 삼손의 프롤로그가 다른 사사들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로 고통받는 중에도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만 않으면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며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블레셋에 순종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게 된 것이다.
2~14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마노아의 아내에게 삼손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는 부분으로, 삼손 서사의 서론이다. 사사기에서는 기드온부터 사사에 대한 인물 설명이 길어지는데, 그중 삼손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중요한 특징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먼저 사사를 선택하신다는 점이다. 이 단락은 ‘마노아’가 삼손 서사의 시작인 13:2에 등장하고 16:31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인클루지오 구조를 보여 준다.
삼손의 고향은 단 지파의 소라 땅으로, 블레셋 지역 바로 옆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마노아의 아내’였다. 그녀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2절). “임신하지 못하는”이라는 단어는 “임신할 수 없어서, 임신하지 않아서”로도 번역된다. 이는 블레셋이 지배했던 40년의 삶이 얼마나 소망 없는 절망의 시간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불임의 원인이 몸에 있을 수도 있고, 외부 환경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소망 없는 절망적인 사회였다. 3포 세대를 지나 7포 세대라고 스스로 칭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장래의 꿈을 품고 현재를 살아 내기가 너무도 벅찬 환경이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포기하는 세대라는 의미다. 마노아의 때가 그런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른바 수태고지(출생과 사명을 고지함)를 행한다(3-4절). 놀란 아내는 마노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마노아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했다(8절).” 놀랍게도 그의 기도는 이 수태고지의 진위를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고지받아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지 알려 달라는 기도였다(8절). 주님께서는 마노아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셔서 다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주셨다(9-11절). 마노아는 동일하게 “지난번에 한 그 말이 이루어질 때에 그 아이가 지켜야 할 규칙은 무엇이며, 또 그 아이가 할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12절).
마노아와 그 아내의 태도가 놀랍다. 하나님의 사자의 고지를 믿는 것을 전제로 행동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아들을 잉태하여 낳게 될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두지 않고,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천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언행이다.
2.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잉태할 마노아의 아내에게 어떻게 출산을 준비하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4-5절). 임신 기간에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고 한다. 아이를 잉태한 임산부라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 아닐까? 평소 음주와 흡연을 즐겼더라도 적어도 임신 중에는 삼가려고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출산 후에는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신다. 분명히 마노아의 아내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런데 아내는 이를 마노아에게 전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을 쏘옥 뺀다(7절). 그리고 마노아는 임신 중에 어떻게 준비할지는 알겠는데, 출산한 이후에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여호와의 사자에게 물어보겠다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8절).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주셔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셨고,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묻는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 중에 지키라고 한 것을 “잘 지키고”, 태어난 아이도 “마노아의 아내에게 일러 준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중요한 것은 마노아가 하나님께 재차 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 자녀를 주님께 물어 가며 양육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꼭 기억해야 할 가치이다.
나는?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완전히 메마른 것은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이름 모를 민초들이 분명 존재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들은 하나님을 구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어도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늘 존재하는 법이다.
*이전보다 더 길어진 압제 기간(40년)은 이스라엘의 패역과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1절). 죄악에 언제까지나 눈감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도 무탈한 죄나 역사는 없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묵인이나 방관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불임의 태를 여시듯,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리라 약속하신다(2~5절). 마노아 아내의 불임은 미래도 희망도 없고, 제 힘으로는 대적의 압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암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대변한다. 나아가 ‘삼손의 출생’은 압제받던 이스라엘의 미래를 여는 구원의 시작을 예고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시간에 희망의 미래를 열어 주신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소망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기댈 것도 오로지 이스라엘을 배반과 망각에서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약속이 아닐까?
*사자의 고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를 묻는 믿음은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절)”
*태어날 이 아이를 위해 독주와 포도주와 모든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게 함으로써 아이가 ‘태중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늘 기억하게 하신다. 앞으로 살게 될 가나안의 우상 숭배 문화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선민으로 자부하기 전에 먼저 성민으로 자라 가기를 바라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와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힘 있는 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세상을 닮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바라신다.
*마노아는 아내를 통해 아이의 출생과 사명을 들었지만, 직접 들려 달라고 구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노아의 열정이 새삼 그립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일방적인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면서도, 재차 묻는 자녀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놀랍다.
*더구나 블레셋에게 40년간 압제를 받으면서도 이것이 압제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준비하심이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다.
*하지만 본문의 안타까운 점은, 이제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를 압제로 여기지 않을 만큼(15:11) ‘가나안화’되어 더 이상 ‘부르짖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할지 잊었는지도 모른다. 은혜에 대한 망각, 가나안이 주는 풍요와 오랜 압제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영적 감수성’을 무디게 하고, 거듭 악을 자행할 만큼 영적인 만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삼손의 이야기에는 “부르짖음”이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지조차 않을 정도로 상태가 약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고질병이다. 입다와 입산, 엘론과 압돈이 사사로 통치하던 31년간의 평화는 속으로 하나님을 떠날 대로 떠난 “썩은 평화”였다. 사사들부터 많은 부인을 두고, 사치를 누리며, 이방 결혼에 익숙했던 이스라엘에는 소망이 없었다. 블레셋이 압제하기 전에 이미 평화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 ‘죄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고 있었다.
죄의 지배를 받으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거룩함은 사라졌고,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찾을 줄 몰랐다. 죄에 대한 내성이 가져온 심각한 위기였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위기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을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직 잉태되지도 않은 이를 사사로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1. 마노아와 아내에게서 삼손이 태어날 것(1~14절)
1절은 삼손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다시 악을 행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년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 40년은 한 세대를 꽉 채운 기간으로, 다른 사사 시대에 비해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런데 삼손의 프롤로그가 다른 사사들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로 고통받는 중에도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만 않으면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며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블레셋에 순종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게 된 것이다.
2~14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마노아의 아내에게 삼손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는 부분으로, 삼손 서사의 서론이다. 사사기에서는 기드온부터 사사에 대한 인물 설명이 길어지는데, 그중 삼손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중요한 특징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먼저 사사를 선택하신다는 점이다. 이 단락은 ‘마노아’가 삼손 서사의 시작인 13:2에 등장하고 16:31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인클루지오 구조를 보여 준다.
삼손의 고향은 단 지파의 소라 땅으로, 블레셋 지역 바로 옆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마노아의 아내’였다. 그녀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2절). “임신하지 못하는”이라는 단어는 “임신할 수 없어서, 임신하지 않아서”로도 번역된다. 이는 블레셋이 지배했던 40년의 삶이 얼마나 소망 없는 절망의 시간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불임의 원인이 몸에 있을 수도 있고, 외부 환경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소망 없는 절망적인 사회였다. 3포 세대를 지나 7포 세대라고 스스로 칭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장래의 꿈을 품고 현재를 살아 내기가 너무도 벅찬 환경이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포기하는 세대라는 의미다. 마노아의 때가 그런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른바 수태고지(출생과 사명을 고지함)를 행한다(3-4절). 놀란 아내는 마노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마노아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했다(8절).” 놀랍게도 그의 기도는 이 수태고지의 진위를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고지받아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지 알려 달라는 기도였다(8절). 주님께서는 마노아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셔서 다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주셨다(9-11절). 마노아는 동일하게 “지난번에 한 그 말이 이루어질 때에 그 아이가 지켜야 할 규칙은 무엇이며, 또 그 아이가 할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12절).
마노아와 그 아내의 태도가 놀랍다. 하나님의 사자의 고지를 믿는 것을 전제로 행동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아들을 잉태하여 낳게 될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두지 않고,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천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언행이다.
2.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잉태할 마노아의 아내에게 어떻게 출산을 준비하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4-5절). 임신 기간에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고 한다. 아이를 잉태한 임산부라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 아닐까? 평소 음주와 흡연을 즐겼더라도 적어도 임신 중에는 삼가려고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출산 후에는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신다. 분명히 마노아의 아내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런데 아내는 이를 마노아에게 전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을 쏘옥 뺀다(7절). 그리고 마노아는 임신 중에 어떻게 준비할지는 알겠는데, 출산한 이후에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여호와의 사자에게 물어보겠다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8절).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주셔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셨고,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묻는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 중에 지키라고 한 것을 “잘 지키고”, 태어난 아이도 “마노아의 아내에게 일러 준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중요한 것은 마노아가 하나님께 재차 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 자녀를 주님께 물어 가며 양육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꼭 기억해야 할 가치이다.
나는?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완전히 메마른 것은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이름 모를 민초들이 분명 존재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들은 하나님을 구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어도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늘 존재하는 법이다.
*이전보다 더 길어진 압제 기간(40년)은 이스라엘의 패역과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1절). 죄악에 언제까지나 눈감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도 무탈한 죄나 역사는 없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묵인이나 방관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불임의 태를 여시듯,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리라 약속하신다(2~5절). 마노아 아내의 불임은 미래도 희망도 없고, 제 힘으로는 대적의 압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암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대변한다. 나아가 ‘삼손의 출생’은 압제받던 이스라엘의 미래를 여는 구원의 시작을 예고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시간에 희망의 미래를 열어 주신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소망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기댈 것도 오로지 이스라엘을 배반과 망각에서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약속이 아닐까?
*사자의 고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를 묻는 믿음은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절)”
*태어날 이 아이를 위해 독주와 포도주와 모든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게 함으로써 아이가 ‘태중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늘 기억하게 하신다. 앞으로 살게 될 가나안의 우상 숭배 문화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선민으로 자부하기 전에 먼저 성민으로 자라 가기를 바라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와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힘 있는 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세상을 닮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바라신다.
*마노아는 아내를 통해 아이의 출생과 사명을 들었지만, 직접 들려 달라고 구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노아의 열정이 새삼 그립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일방적인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면서도, 재차 묻는 자녀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놀랍다.
*더구나 블레셋에게 40년간 압제를 받으면서도 이것이 압제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준비하심이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다.
*하지만 본문의 안타까운 점은, 이제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를 압제로 여기지 않을 만큼(15:11) ‘가나안화’되어 더 이상 ‘부르짖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할지 잊었는지도 모른다. 은혜에 대한 망각, 가나안이 주는 풍요와 오랜 압제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영적 감수성’을 무디게 하고, 거듭 악을 자행할 만큼 영적인 만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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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의 교만과 입다의 내전 그리고 불안한 평화 [사사기 12:1-15]
암몬과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동족과의 전쟁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또다시 교만하게 시기와 질투를 부린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억지를 부리며 요단강을 건너와 협박했다. “…. 너는 왜 암몬 자손을 치러 건너갈 때에 우리를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을 같이 불태워 버리겠다(새번역_1절).” 이 황당한 작태 앞에 입다는 단호하게 반응한다. 암몬과의 싸움을 준비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은 점(2절)을 지적하고, 자신과 길르앗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이겼는데 어찌하여 전리품을 나누자고 하느냐고 반문한다(3절).
말로만 반박하지 않고, 위협하러 올라온 그들의 모습을 명분 삼아 길르앗 사람들과 함께 에브라임을 무찔러 버렸다. 평소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고 무시당했던(4절) 울분까지 터져서 파죽지세로 에브라임을 평정해 버렸다.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건너려는 자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하게 하여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4만 2천 명이나 되었다(6절). 에브라임 지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은 길르앗의 입다 이후 베들레헴의 입산과 스불론의 엘론, 비라돈 사람 압돈이 차례로 뒤를 이어 사사가 되었다.
1. 에브라임 지파의 오만함(1절)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 전에 온 지파에 공문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었다(2절). 하지만 에브라임 지파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다가 뜻밖의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의 사사로 우뚝 서자 시기심이 발동했다. 이전에 기드온에게도 에브라임은 “네가 전쟁하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8:1-2)”라고 윽박질렀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을 치켜세워 분노를 누그러뜨렸지만, 입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매우 잘 꿰뚫고 있었기에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입다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파병도 하지 않았으면서 전리품을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1절)”라고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더구나 입다는 자신의 딸을 인신 제사로 바친 상황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동족들 앞에서, 더구나 입다의 잘못된 서원에 따른 비극에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심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에브라임 지파가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며 부린 오만한 추태에 대하여, 입다는 “여호와께서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셨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에야) 내게(이곳에)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며 분노한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내부의 갈등이 시작된다.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후,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서 자신들을 소외시킨 입다와 그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했다. 딸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발언(불)을 하며,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입다의 지도력을 위협한다. 암몬이 ‘땅’을 탐내어 공격한 것이라면, 에브라임은 ‘권력’에 눈이 멀어 질시하고 시비를 건 것이다. 시기가 죄로 자라나 화를 불러왔다.
2. 입다의 결행(2-7절)
입다는 기드온과 달랐다. 그는 “큰 용사(힘의 용사)”였다. 기드온처럼 상대를 치켜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하며 길르앗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길르앗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평소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며 무시당했던 울분을 더해 싸워 그들을 무찔러 버렸다.
그리고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유일한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선점하여, 강을 건너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특유의 발음을 확인해 가려내고 그 자리에서 처형해 버린다. 그 수가 4만 2천 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가장 기름진 땅을 분배받고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에브라임 지파는 괴멸되다시피 했다. 이 모든 것이 “우월감에서 오는 교만과 욕심에 눈이 먼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입다는 에브라임의 항의와 위협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주도권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2~4절).
지혜롭게 대응한 기드온의 처신(8:2)이나, 일전에 평화롭게 해결하려던 협상가의 면모(11:12)와는 다른 모습이다. ‘용사’의 위용만 있을 뿐 ‘사사’의 위엄은 없다. 큰 용사인 그는 결국 인간이 세운 지도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퇴장한다. 그의 시대는 ‘짧았고’, ‘샬롬’도 없었다. 입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탁월하지만 교만하여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기보다 부족하나 겸손하여 지혜로운 신자가 되기를 더 원하심을 깨닫게 된다.
한편 과거의 영광(지위)에 취해 권력을 행사하는 에브라임 지파는 ‘본래 도망자였다’라는 말로 길르앗 사람들을 조롱하고, 동족에게서 쫓겨났던(11:3) 입다를 자극한다. 이 같은 지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질시가 ‘십볼렛’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다(4~7절). 시기와 분노는 모두 자기 욕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태도다. 오늘 내 자랑과 자부심의 근거가 하나님과 공동체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는 영적 어둠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3. 평화가 이어지지만(8-15절)
사사 입다의 시대를 포함하여 31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지속된다. 암몬을 물리친 입다 이후 가나안 민족들의 침략이 없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 세워진 사사들의 면면은 참담하다. 입산은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기라도 한 듯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다. 그런데 특히 결혼에 있어 딸들을 “밖으로(개역개정)”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해 “밖에서(개역개정)” 여자 30명을 데려왔다고 기록한다(9절). 개역한글은 이 “밖에서(후츠)”를 “타국에서”로, 새번역은 “다른”으로 번역했다. 기본 의미는 “외부, 바깥쪽”이지만, 신 25:5와 삿 12:9에서는 “후츠”라는 단어를 친족이나 동족이 아닌 “타인”의 뜻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사사 입산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들과 결혼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고 있다.
엘론은 별다른 언급 없이 스불론 사람이라는 기록만 남긴다. 가장 연약한 지파 중에서 나온 사사였다. 그의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사사가 되었다. ‘비라돈’이라는 지명이 두 번 언급되는데, 이 지역은 아말렉 사람의 산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압돈은 아말렉 남자와 에브라임 지파 여인 사이에서 난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압돈도 이방 결혼의 열매였다. 압돈에게는 아들이 40명, 손자가 30명이나 있었고, 그들은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다.
*평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도리어 사사들은 연약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른 이방 민족의 왕들처럼 부인을 많이 두어 자녀를 많이 낳았다. 향락에 취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방 결혼을 서슴지 않았다. 솔로몬보다 훨씬 먼저 결혼을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으로 얻은 평화임에 틀림없다. 또한 사치도 문제다. 아들과 손자들에게 ‘어린 나귀’를 태울 정도로 재물이 넘쳐났다. 더구나 가나안 족속과의 사이에서 난 이도 사사가 되었다.
*지도자가 향락을 탐닉하고, 적극적인 이방 결혼을 통해 평화를 구걸하고, 아들들과 손자들에게까지 어린 나귀를 타게 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다는 인신 제사, 입산은 축첩과 이방 결혼, 압돈은 사치와 지나친 부를 지닌 사사였다. 이들이 다스린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 평화가 진정한 평안일까? 그저 일시적인 “평온”이 아닐까?
*기드온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입다는 인신 제사 서원을 이행하여 딸을 죽였으며, 입산은 여러 부인에게서 자녀 60명을 낳았다. 그리고 이 자녀들을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과 결혼시켰다. 솔로몬의 외교 정책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압돈은 사치와 부를 누린 부자였다. 이들이 사사로 활동한 31년 동안 이스라엘의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오히려 영적으로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추락하고 쇠망하고 있음에도 겉으로 평화롭다 하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평화롭기에 음욕대로 살고,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이방 민족들과의 결혼을 평화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당혹스럽다. 평화로운 시대인데, 불안한 평화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도자가 이렇게 형편없음에도 평화는 지속되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심으로 살아낼 때 누리는 평화와는 다른,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와 함께 요셉 지파에 속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자신의 이름으로 지파를 형성하지 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지파를 이루었다. 에브라임은 아우였지만 형보다 나았고,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지파였던 유다 지파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한 지파였다. 이 두 지파는 모두 요단강 양쪽의 비옥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다.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마땅히 실천해야 할 힘이 있는 명문 지파였다.
*하지만 같은 민족끼리 쉽게 딴지를 거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힘을 알기에 자세를 낮추어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입다는 달랐다. 에브라임의 딴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더 나아가 암몬 전투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였고 자신이 사사가 된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에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에브라임이 잘못 건드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정이 앞선 입다의 결행이 아쉽기만 하다. 같은 민족 안에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사사로 세움 받은 이들 가운데 평화로운 이스라엘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사사가 되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전으로 인해 그의 사사로서의 통치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입다의 분노를 보면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순간을 참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성급함에서 오는 나의 분노를 읽게 된다. 나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입다의 분노에 찬 내전은 아쉽기만 하다.
*입다를 묵상하면서 일상의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에브라임의 근거 없는 비방에 화가 났겠지만, 내전으로 비화되어 4만 2천 명의 장정을 죽인 것은 학살과 다름없다. 요단 나루터에서 지역 방언을 도구로 일일이 확인하며 처단한 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학살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잔인한 학살이 이어진다. 순간의 분노를 절제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참혹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사사 시대가 혼란의 시대였던 것은 확실하다. 말씀을 알아 가는 데 게을러 말씀을 멀리하고,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의 모습이나 입다의 모습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도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사사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말씀에 관심 없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데 게으른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기에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더구나 입다의 뒤를 이은 사사들은 반전을 만들지 못했다. 도리어 사사로서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삶이 혼탁해졌다.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이나,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사는 것이나, 이방 결혼을 통해 눈에 보이는 평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나… 말씀에서 떠난 삶이 어떤 것인지 그 예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사사들이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보여 주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세워 나가야 함에도, 말씀을 떠난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서 사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참담하다. 나의 사역의 자리가 이처럼 참담하게 되지 않도록 말씀 안에서 더욱 중심을 지켜야 하겠다!
*말씀에서 떠나 있지만 세상에 구현되는 평화, 겉으로는 평화이지만 이미 썩어 가는 소망 없는 평화여서 괴롭다. 썩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삶을 말씀으로 정비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안타깝다. 하기야 평화로울 때 자신을 돌아보기가 더 어렵다. 불안불안한 평화가 30여 년 동안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또다시 우상 숭배의 길로 미끄러질 것이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시대다. 분노가 가득한 세상이다. 겉으로는 평화로운데 말씀을 지키는 평화가 아니다. 불안한 평화가 사람들의 영적 무장마저 해제시켜 버린다.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뜻에 노골적으로 불순종하며 분명히 금하신 명령을 어기면서 “불안한 평화”를 이어 간다.
말로만 반박하지 않고, 위협하러 올라온 그들의 모습을 명분 삼아 길르앗 사람들과 함께 에브라임을 무찔러 버렸다. 평소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고 무시당했던(4절) 울분까지 터져서 파죽지세로 에브라임을 평정해 버렸다.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건너려는 자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하게 하여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4만 2천 명이나 되었다(6절). 에브라임 지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은 길르앗의 입다 이후 베들레헴의 입산과 스불론의 엘론, 비라돈 사람 압돈이 차례로 뒤를 이어 사사가 되었다.
1. 에브라임 지파의 오만함(1절)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 전에 온 지파에 공문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었다(2절). 하지만 에브라임 지파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다가 뜻밖의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의 사사로 우뚝 서자 시기심이 발동했다. 이전에 기드온에게도 에브라임은 “네가 전쟁하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8:1-2)”라고 윽박질렀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을 치켜세워 분노를 누그러뜨렸지만, 입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매우 잘 꿰뚫고 있었기에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입다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파병도 하지 않았으면서 전리품을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1절)”라고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더구나 입다는 자신의 딸을 인신 제사로 바친 상황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동족들 앞에서, 더구나 입다의 잘못된 서원에 따른 비극에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심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에브라임 지파가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며 부린 오만한 추태에 대하여, 입다는 “여호와께서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셨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에야) 내게(이곳에)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며 분노한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내부의 갈등이 시작된다.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후,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서 자신들을 소외시킨 입다와 그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했다. 딸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발언(불)을 하며,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입다의 지도력을 위협한다. 암몬이 ‘땅’을 탐내어 공격한 것이라면, 에브라임은 ‘권력’에 눈이 멀어 질시하고 시비를 건 것이다. 시기가 죄로 자라나 화를 불러왔다.
2. 입다의 결행(2-7절)
입다는 기드온과 달랐다. 그는 “큰 용사(힘의 용사)”였다. 기드온처럼 상대를 치켜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하며 길르앗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길르앗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평소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며 무시당했던 울분을 더해 싸워 그들을 무찔러 버렸다.
그리고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유일한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선점하여, 강을 건너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특유의 발음을 확인해 가려내고 그 자리에서 처형해 버린다. 그 수가 4만 2천 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가장 기름진 땅을 분배받고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에브라임 지파는 괴멸되다시피 했다. 이 모든 것이 “우월감에서 오는 교만과 욕심에 눈이 먼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입다는 에브라임의 항의와 위협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주도권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2~4절).
지혜롭게 대응한 기드온의 처신(8:2)이나, 일전에 평화롭게 해결하려던 협상가의 면모(11:12)와는 다른 모습이다. ‘용사’의 위용만 있을 뿐 ‘사사’의 위엄은 없다. 큰 용사인 그는 결국 인간이 세운 지도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퇴장한다. 그의 시대는 ‘짧았고’, ‘샬롬’도 없었다. 입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탁월하지만 교만하여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기보다 부족하나 겸손하여 지혜로운 신자가 되기를 더 원하심을 깨닫게 된다.
한편 과거의 영광(지위)에 취해 권력을 행사하는 에브라임 지파는 ‘본래 도망자였다’라는 말로 길르앗 사람들을 조롱하고, 동족에게서 쫓겨났던(11:3) 입다를 자극한다. 이 같은 지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질시가 ‘십볼렛’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다(4~7절). 시기와 분노는 모두 자기 욕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태도다. 오늘 내 자랑과 자부심의 근거가 하나님과 공동체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는 영적 어둠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3. 평화가 이어지지만(8-15절)
사사 입다의 시대를 포함하여 31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지속된다. 암몬을 물리친 입다 이후 가나안 민족들의 침략이 없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 세워진 사사들의 면면은 참담하다. 입산은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기라도 한 듯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다. 그런데 특히 결혼에 있어 딸들을 “밖으로(개역개정)”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해 “밖에서(개역개정)” 여자 30명을 데려왔다고 기록한다(9절). 개역한글은 이 “밖에서(후츠)”를 “타국에서”로, 새번역은 “다른”으로 번역했다. 기본 의미는 “외부, 바깥쪽”이지만, 신 25:5와 삿 12:9에서는 “후츠”라는 단어를 친족이나 동족이 아닌 “타인”의 뜻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사사 입산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들과 결혼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고 있다.
엘론은 별다른 언급 없이 스불론 사람이라는 기록만 남긴다. 가장 연약한 지파 중에서 나온 사사였다. 그의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사사가 되었다. ‘비라돈’이라는 지명이 두 번 언급되는데, 이 지역은 아말렉 사람의 산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압돈은 아말렉 남자와 에브라임 지파 여인 사이에서 난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압돈도 이방 결혼의 열매였다. 압돈에게는 아들이 40명, 손자가 30명이나 있었고, 그들은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다.
*평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도리어 사사들은 연약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른 이방 민족의 왕들처럼 부인을 많이 두어 자녀를 많이 낳았다. 향락에 취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방 결혼을 서슴지 않았다. 솔로몬보다 훨씬 먼저 결혼을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으로 얻은 평화임에 틀림없다. 또한 사치도 문제다. 아들과 손자들에게 ‘어린 나귀’를 태울 정도로 재물이 넘쳐났다. 더구나 가나안 족속과의 사이에서 난 이도 사사가 되었다.
*지도자가 향락을 탐닉하고, 적극적인 이방 결혼을 통해 평화를 구걸하고, 아들들과 손자들에게까지 어린 나귀를 타게 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다는 인신 제사, 입산은 축첩과 이방 결혼, 압돈은 사치와 지나친 부를 지닌 사사였다. 이들이 다스린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 평화가 진정한 평안일까? 그저 일시적인 “평온”이 아닐까?
*기드온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입다는 인신 제사 서원을 이행하여 딸을 죽였으며, 입산은 여러 부인에게서 자녀 60명을 낳았다. 그리고 이 자녀들을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과 결혼시켰다. 솔로몬의 외교 정책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압돈은 사치와 부를 누린 부자였다. 이들이 사사로 활동한 31년 동안 이스라엘의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오히려 영적으로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추락하고 쇠망하고 있음에도 겉으로 평화롭다 하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평화롭기에 음욕대로 살고,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이방 민족들과의 결혼을 평화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당혹스럽다. 평화로운 시대인데, 불안한 평화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도자가 이렇게 형편없음에도 평화는 지속되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심으로 살아낼 때 누리는 평화와는 다른,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와 함께 요셉 지파에 속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자신의 이름으로 지파를 형성하지 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지파를 이루었다. 에브라임은 아우였지만 형보다 나았고,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지파였던 유다 지파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한 지파였다. 이 두 지파는 모두 요단강 양쪽의 비옥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다.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마땅히 실천해야 할 힘이 있는 명문 지파였다.
*하지만 같은 민족끼리 쉽게 딴지를 거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힘을 알기에 자세를 낮추어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입다는 달랐다. 에브라임의 딴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더 나아가 암몬 전투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였고 자신이 사사가 된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에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에브라임이 잘못 건드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정이 앞선 입다의 결행이 아쉽기만 하다. 같은 민족 안에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사사로 세움 받은 이들 가운데 평화로운 이스라엘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사사가 되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전으로 인해 그의 사사로서의 통치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입다의 분노를 보면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순간을 참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성급함에서 오는 나의 분노를 읽게 된다. 나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입다의 분노에 찬 내전은 아쉽기만 하다.
*입다를 묵상하면서 일상의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에브라임의 근거 없는 비방에 화가 났겠지만, 내전으로 비화되어 4만 2천 명의 장정을 죽인 것은 학살과 다름없다. 요단 나루터에서 지역 방언을 도구로 일일이 확인하며 처단한 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학살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잔인한 학살이 이어진다. 순간의 분노를 절제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참혹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사사 시대가 혼란의 시대였던 것은 확실하다. 말씀을 알아 가는 데 게을러 말씀을 멀리하고,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의 모습이나 입다의 모습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도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사사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말씀에 관심 없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데 게으른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기에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더구나 입다의 뒤를 이은 사사들은 반전을 만들지 못했다. 도리어 사사로서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삶이 혼탁해졌다.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이나,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사는 것이나, 이방 결혼을 통해 눈에 보이는 평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나… 말씀에서 떠난 삶이 어떤 것인지 그 예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사사들이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보여 주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세워 나가야 함에도, 말씀을 떠난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서 사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참담하다. 나의 사역의 자리가 이처럼 참담하게 되지 않도록 말씀 안에서 더욱 중심을 지켜야 하겠다!
*말씀에서 떠나 있지만 세상에 구현되는 평화, 겉으로는 평화이지만 이미 썩어 가는 소망 없는 평화여서 괴롭다. 썩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삶을 말씀으로 정비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안타깝다. 하기야 평화로울 때 자신을 돌아보기가 더 어렵다. 불안불안한 평화가 30여 년 동안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또다시 우상 숭배의 길로 미끄러질 것이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시대다. 분노가 가득한 세상이다. 겉으로는 평화로운데 말씀을 지키는 평화가 아니다. 불안한 평화가 사람들의 영적 무장마저 해제시켜 버린다.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뜻에 노골적으로 불순종하며 분명히 금하신 명령을 어기면서 “불안한 평화”를 이어 간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_ 입다의 잘못된 서원과 비극적인 희생 [사사기 11:29-40]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암몬의 억지는 대단했다.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개전에 앞서 입다는 경솔한 약속을 한다. 아무리 승리에 대한 열망이 컸다 하더라도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인신 제사를 서원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라도 반드시 승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서원은 비극으로 치닫고 말았고, 성경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서원은 원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약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입다는 ‘어떤 것을 얻을 목적으로 하나님께 약속’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중요한 이유를 본문이 제시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혹시 하나님의 법과 정면으로 배치될 때에는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시급하고 절실하더라도 함부로 서원해서는 안 된다.
1. 하나님의 영이 임하다(29절)
입다는 암몬 왕의 억지를 노련하게 제압했다. 하지만 암몬 왕은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약탈이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출애굽 때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암몬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고 하셨기에 암몬 왕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내버려 두셨을 것이다. 그리고 치열했던 외교전을 마무리하자마자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 입다는 이미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역사에 정통했고,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판결(판단)하실 것을 선언하였기에(27절),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 그러나(30~31절)
그러나 입다는 쓸데없는 서원을 한다. 출정하면서 여호와의 영이 임했지만, 승리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있었다면 다시 하나님께 승리의 확신을 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입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입다는 300년 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 해박하게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인신 제사”를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하고 금지하시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상식적인 시각으로 암몬과 담판했던 그가, 승전하고 돌아올 때 가장 먼저 영접하러 나오는 이가 가족일 수 있다는 판단을 왜 하지 못했을까? 또 그는 ‘돕’ 땅에서 “큰 용사”로 맹위를 떨친 인물이다. 크고 작은 분쟁의 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누가 열렬히 환영하며 나올지 과연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당장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다가 결국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입다는 인신 제사라는 서원을 통해 여호와의 전쟁조차 그 의미를 퇴색시켰고, 하나님을 조건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분으로 만들고 말았다. 여호와의 전쟁에서 주인공은 원래 여호와이시고 인간은 보조자일 뿐이다. 그런데 입다는 서원을 통해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보조자로 전락시키고 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고, 서원을 통해 마치 보험이라도 드는 듯이 행동한 셈이다.
3. 일단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32~33절)
입다의 전쟁 장면은 매우 간략하게 묘사된다. 입다 이야기에서 전쟁 장면이 중심이 아니라, 다음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승패가 가장 중요할 텐데, 이 단락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여호와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소개하고, 입다가 차지한 성읍의 명단을 제시하는 것으로 전쟁 이야기를 갈음한다. 하지만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입다가 서원한 것에 대한 복잡한 문제가 도드라진다. 서원의 내용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4. 입다 딸의 죽음(34~40절)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딸이 가장 먼저 마중 나온다. 그녀는 입다의 무남독녀였다. 저자는 ‘나와서 영접하다’를 반복하여 이 딸이 입다의 서원을 충족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입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딸이 영문도 모른 채 즐겁게 소고 치고 춤추며 아버지를 마중 나온 것이다. 입다는 자기의 무남독녀가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한탄한다. 이 장면은 그의 서원이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왜 하필 네가 나왔느냐며 원망한다. 이 답답한 입다는 서원한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오롯이 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결국 그가 이 전쟁을 온전히 하나님의 전쟁으로 드리지 않았기에, 그의 승리도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자기 딸을 죽이는 비극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 아버지가 말한 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이인칭 남성형 ‘당신’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며, 이 상황의 책임이 아버지 입다에게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주셨으니 아버지도 자신의 서원을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신실하셨기에 인간도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전혀 신실하지 못한 입다나 길르앗 사람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앙고백은 무지에서 비롯된 순진함이다. 그녀와 입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입다의 서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으나, 이 전쟁은 입다의 서원과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입다의 딸은 두 달만 말미를 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이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기 위해 친구들과 산에 가겠다고 말한다. 이는 입다에게 더 이상 후손이 없게 된다는 의미다. 입다는 이를 허락했고, 그녀는 정말로 두 달 뒤에 돌아와 아버지가 서원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입다의 딸을 기리기 위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나흘씩 애곡하는 풍습이 생긴다.
하지만 레위기 27:2~8에 따르면 잘못된 서원은 돌이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으며, 서원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된다면 서원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더 정직한 방법이다. 그런데 입다와 그의 딸이 이 규정을 몰랐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딸의 희생에 눈을 감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입다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이 원하던 길르앗의 머리 자리를 얻었다.
한편 입다의 딸은 사사기에서 최초로 희생된 여성이다. 이전까지 여성들은 축복받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입다의 딸은 본인은 신실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기에 어이없게 희생되고 말았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타락할수록 여성들의 처지도 점점 열악해진다. 1장에서 갈렙은 자신의 딸 악사를 보호하고 풍성하게 해 줄 샘을 주는 보호자로서의 아버지였지만, 입다는 자신의 딸을 죽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 나타난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가족 관계도 깨지고, 보호자여야 할 아버지가 자식을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암몬과의 전쟁은 비천한 출신인 입다에게 ‘바닥에서 머리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승리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욱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은 무모한 서원으로 이어진다(29~31절). 그의 서원은 믿음을 가장한 불신의 표현이었고,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한 또 하나의 협상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거래가 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다는 서원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말씀마저 번복하시는데, 그는 자기 딸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릇된 서원을 끝까지 고집한다(34~35절). 무지하고 무모한 그의 서원은 훗날 무고한 희생과 동족상잔의 참극을 불러온 기브아 사건(21장)에서 재현된다.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몰랐을 리 없을 텐데, 그는 목적 성취를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한다. 원인 제공은 아비인 입다가 했는데, 그 결과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승전하고 돌아오는 아비를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었던 순수한 딸이 져야 하는 이 기막힌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경우가 우리의 삶에 비일비재하다. 원인은 기성세대가 제공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다음 세대가 지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기성세대의 변은 하나같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승리를 주신다면 자신을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대로, 입다는 자신을 반기던 딸에게 그것을 이행한다(36~40절). 하지만 승리를 위한 그의 서원은 풍요를 위해 인신 제사도 서슴지 않았던 이방의 가증한 제사와 다를 바 없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정통했던 그가 정작 율법에는 무지했다. 비록 그가 큰 용사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 하더라도, 말씀보다는 우상 문화에 더 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의 신앙과 공동체 안에 계시(말씀)와 역사에 뿌리를 둔 신앙이 아닌 ‘미신적, 무속적, 우상적, 세속적’ 요소는 없는지 세밀하게 돌아볼 일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곤고함(10:9)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사사(심판하시는, 27절)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어 암몬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0:13)”고 하신 말씀마저 ‘번복’하신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배반에도, 위기 때만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아시면서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받아 주시고 다시 살려 주신다.
*현실의 한계를 넘기 위해 “이것을 위해서라면…”이라는 목적 중심 사고가 가져오는 무수한 삶의 위기는 본인뿐 아니라 가정 구성원들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위험 요소가 된다. 인간관계의 일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지금은 적합하게 결정한 듯하나 후손들이 고통받게 될 정책들이 왜 없겠는가! 지금 살아가는 세대는 편리할 수 있지만 후손들은 고통받으며 살아야 할 일들이 왜 없겠는가! 기후 재앙, 원자력, 빈곤 문제, 빈익빈 부익부 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기후 재앙이나 원자력의 위험은 이미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통해 우리 세대에서도 실감하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은 더욱 고통받을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입다의 서원과, 그 결과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딸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존재한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입다 딸의 인신 제사를 왜 막지 않으셨는지… 마음이 고통스럽다. 또 인신 제사를 금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레위인들이나 제사장 계층의 거센 만류가 왜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통스럽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있으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색한 시대였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시대였음이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서원”이라는 형식이 중요해서,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조차 “서원”이라는 형식이 씌워졌으니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해석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이런 딜레마가 내가 목회하는 동안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무리한 서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약속에 천착하여 삶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입다의 사례가 있음에도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 인생의 죄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원은 원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약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입다는 ‘어떤 것을 얻을 목적으로 하나님께 약속’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중요한 이유를 본문이 제시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혹시 하나님의 법과 정면으로 배치될 때에는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시급하고 절실하더라도 함부로 서원해서는 안 된다.
1. 하나님의 영이 임하다(29절)
입다는 암몬 왕의 억지를 노련하게 제압했다. 하지만 암몬 왕은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약탈이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출애굽 때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암몬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고 하셨기에 암몬 왕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내버려 두셨을 것이다. 그리고 치열했던 외교전을 마무리하자마자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 입다는 이미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역사에 정통했고,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판결(판단)하실 것을 선언하였기에(27절),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 그러나(30~31절)
그러나 입다는 쓸데없는 서원을 한다. 출정하면서 여호와의 영이 임했지만, 승리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있었다면 다시 하나님께 승리의 확신을 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입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입다는 300년 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 해박하게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인신 제사”를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하고 금지하시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상식적인 시각으로 암몬과 담판했던 그가, 승전하고 돌아올 때 가장 먼저 영접하러 나오는 이가 가족일 수 있다는 판단을 왜 하지 못했을까? 또 그는 ‘돕’ 땅에서 “큰 용사”로 맹위를 떨친 인물이다. 크고 작은 분쟁의 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누가 열렬히 환영하며 나올지 과연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당장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다가 결국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입다는 인신 제사라는 서원을 통해 여호와의 전쟁조차 그 의미를 퇴색시켰고, 하나님을 조건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분으로 만들고 말았다. 여호와의 전쟁에서 주인공은 원래 여호와이시고 인간은 보조자일 뿐이다. 그런데 입다는 서원을 통해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보조자로 전락시키고 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고, 서원을 통해 마치 보험이라도 드는 듯이 행동한 셈이다.
3. 일단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32~33절)
입다의 전쟁 장면은 매우 간략하게 묘사된다. 입다 이야기에서 전쟁 장면이 중심이 아니라, 다음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승패가 가장 중요할 텐데, 이 단락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여호와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소개하고, 입다가 차지한 성읍의 명단을 제시하는 것으로 전쟁 이야기를 갈음한다. 하지만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입다가 서원한 것에 대한 복잡한 문제가 도드라진다. 서원의 내용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4. 입다 딸의 죽음(34~40절)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딸이 가장 먼저 마중 나온다. 그녀는 입다의 무남독녀였다. 저자는 ‘나와서 영접하다’를 반복하여 이 딸이 입다의 서원을 충족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입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딸이 영문도 모른 채 즐겁게 소고 치고 춤추며 아버지를 마중 나온 것이다. 입다는 자기의 무남독녀가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한탄한다. 이 장면은 그의 서원이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왜 하필 네가 나왔느냐며 원망한다. 이 답답한 입다는 서원한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오롯이 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결국 그가 이 전쟁을 온전히 하나님의 전쟁으로 드리지 않았기에, 그의 승리도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자기 딸을 죽이는 비극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 아버지가 말한 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이인칭 남성형 ‘당신’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며, 이 상황의 책임이 아버지 입다에게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주셨으니 아버지도 자신의 서원을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신실하셨기에 인간도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전혀 신실하지 못한 입다나 길르앗 사람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앙고백은 무지에서 비롯된 순진함이다. 그녀와 입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입다의 서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으나, 이 전쟁은 입다의 서원과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입다의 딸은 두 달만 말미를 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이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기 위해 친구들과 산에 가겠다고 말한다. 이는 입다에게 더 이상 후손이 없게 된다는 의미다. 입다는 이를 허락했고, 그녀는 정말로 두 달 뒤에 돌아와 아버지가 서원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입다의 딸을 기리기 위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나흘씩 애곡하는 풍습이 생긴다.
하지만 레위기 27:2~8에 따르면 잘못된 서원은 돌이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으며, 서원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된다면 서원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더 정직한 방법이다. 그런데 입다와 그의 딸이 이 규정을 몰랐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딸의 희생에 눈을 감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입다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이 원하던 길르앗의 머리 자리를 얻었다.
한편 입다의 딸은 사사기에서 최초로 희생된 여성이다. 이전까지 여성들은 축복받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입다의 딸은 본인은 신실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기에 어이없게 희생되고 말았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타락할수록 여성들의 처지도 점점 열악해진다. 1장에서 갈렙은 자신의 딸 악사를 보호하고 풍성하게 해 줄 샘을 주는 보호자로서의 아버지였지만, 입다는 자신의 딸을 죽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 나타난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가족 관계도 깨지고, 보호자여야 할 아버지가 자식을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암몬과의 전쟁은 비천한 출신인 입다에게 ‘바닥에서 머리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승리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욱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은 무모한 서원으로 이어진다(29~31절). 그의 서원은 믿음을 가장한 불신의 표현이었고,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한 또 하나의 협상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거래가 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다는 서원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말씀마저 번복하시는데, 그는 자기 딸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릇된 서원을 끝까지 고집한다(34~35절). 무지하고 무모한 그의 서원은 훗날 무고한 희생과 동족상잔의 참극을 불러온 기브아 사건(21장)에서 재현된다.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몰랐을 리 없을 텐데, 그는 목적 성취를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한다. 원인 제공은 아비인 입다가 했는데, 그 결과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승전하고 돌아오는 아비를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었던 순수한 딸이 져야 하는 이 기막힌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경우가 우리의 삶에 비일비재하다. 원인은 기성세대가 제공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다음 세대가 지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기성세대의 변은 하나같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승리를 주신다면 자신을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대로, 입다는 자신을 반기던 딸에게 그것을 이행한다(36~40절). 하지만 승리를 위한 그의 서원은 풍요를 위해 인신 제사도 서슴지 않았던 이방의 가증한 제사와 다를 바 없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정통했던 그가 정작 율법에는 무지했다. 비록 그가 큰 용사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 하더라도, 말씀보다는 우상 문화에 더 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의 신앙과 공동체 안에 계시(말씀)와 역사에 뿌리를 둔 신앙이 아닌 ‘미신적, 무속적, 우상적, 세속적’ 요소는 없는지 세밀하게 돌아볼 일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곤고함(10:9)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사사(심판하시는, 27절)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어 암몬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0:13)”고 하신 말씀마저 ‘번복’하신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배반에도, 위기 때만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아시면서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받아 주시고 다시 살려 주신다.
*현실의 한계를 넘기 위해 “이것을 위해서라면…”이라는 목적 중심 사고가 가져오는 무수한 삶의 위기는 본인뿐 아니라 가정 구성원들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위험 요소가 된다. 인간관계의 일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지금은 적합하게 결정한 듯하나 후손들이 고통받게 될 정책들이 왜 없겠는가! 지금 살아가는 세대는 편리할 수 있지만 후손들은 고통받으며 살아야 할 일들이 왜 없겠는가! 기후 재앙, 원자력, 빈곤 문제, 빈익빈 부익부 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기후 재앙이나 원자력의 위험은 이미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통해 우리 세대에서도 실감하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은 더욱 고통받을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입다의 서원과, 그 결과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딸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존재한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입다 딸의 인신 제사를 왜 막지 않으셨는지… 마음이 고통스럽다. 또 인신 제사를 금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레위인들이나 제사장 계층의 거센 만류가 왜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통스럽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있으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색한 시대였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시대였음이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서원”이라는 형식이 중요해서,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조차 “서원”이라는 형식이 씌워졌으니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해석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이런 딜레마가 내가 목회하는 동안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무리한 서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약속에 천착하여 삶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입다의 사례가 있음에도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 인생의 죄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입다와 암몬 왕과의 설전 [사사기 11:12-28]
입다와 암몬 왕은 전쟁을 하기 전에 ‘설전’을 벌인다. 암몬 왕이 길르앗은 원래 암몬 족속의 땅이어서 되찾으러 왔다고 말하자, 입다는 이 땅이 암몬의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이며, 전에는 아모리 족속이 살았던 땅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입다는 이 땅에 대한 분명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길르앗의 지도자가 된 입다는 곧바로 암몬과의 전투에 임하지 않는다. 먼저 그들의 도발을 단념시키려고,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암몬 족속에게 정확한 역사 지식에 근거하여 반박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을 선언한다.
1. 땅을 돌려 달라는 암몬 왕(12~13절)
고대 전쟁에서는 개전 전에 서로 사자들을 보내어 먼저 말싸움을 한다. 이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다. 입다는 전쟁을 하기 전에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쳐들어왔느냐고 묻는다.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면서 ‘내 땅’이라는 표현을 써서 왕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입다는 사자를 먼저 보내 암몬 왕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전쟁의 원인이 암몬에게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에 암몬 왕은 길르앗, 즉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는 원래 암몬 땅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점령하였으니, 이제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요구한다. 이곳이 원래 자기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로가 자기 땅이라고 고수하는 상황이다.
2. 길르앗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입다(14~27절)
14~18절은 암몬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는 입다의 항변이다. 입다는 암몬 왕의 주장 가운데 왜곡된 부분을 지적하며,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스라엘의 길르앗 소유권을 주장한다.
이 단락이 첫 번째 이유인데, 입다는 암몬 왕에게 이스라엘은 암몬과 모압의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출애굽 여정을 통해 제시한다. 자신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홍해까지 왔고, 거기서 다시 가데스까지 왔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에돔과 모압 땅으로 지나가려고 사자를 보냈으나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가데스 광야에 머물다가 모압 동편 경계인 아르논에 진을 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입다는 아르논을 모압의 경계라고 분명하게 표현하며, 자신들의 조상이 모압 땅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한편, 신명기나 민수기는 이 여정에서 암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이 길은 에돔과 모압을 통과하지만 암몬은 통과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신명기 2:37은 암몬 땅에는 가지 않았음을 특별히 언급하며 이를 증명한다. 이와 같은 역사를 근거로 입다는 암몬뿐만 아니라 에돔, 모압과도 싸운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19~22절은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이 원래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는 점을 확인해 주며, 이 땅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압이나 에돔에게 한 것처럼 아모리에도 사자를 보내 땅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아모리는 모압, 에돔과 달리 지나가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왕 시혼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겨주셨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이겨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점령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아르논(아모리 땅의 최남단)에서 얍복(최북단 경계)까지, 광야(동편 경계)에서 요단(서편 경계)까지의 땅을 얻게 된다.
23~27절은 아모리 땅 점령의 정당성을 기술한다. 입다는 길르앗이 암몬 자손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한 후, 아모리 땅을 계속 점유하는 것의 정당성을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한다. 둘째, 당신(암몬 자손)이 모압 왕 발락보다 더 잘났느냐고 묻는다.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땅을 차지하자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 매우 유명한 선지자로 알려진 미디안 사람 발람을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저주 대신 축복을 하게 하셨다. 이로 인해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과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재의 암몬 왕보다 훌륭한 발락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전쟁도 하지 못하였는데, 암몬 왕이 감히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성읍들에 거주한 지 이미 300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곳이 암몬 사람들의 땅이었다면, 그동안 왜 이 땅을 다시 차지하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다는 이런 암몬 자손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판결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때 입다는 여호와를 ‘사사’로 부른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과 세상의 사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3. 암몬 왕의 거부(28절)
이런 입다의 주장을 들은 암몬 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싸움(설전)에서는 일단 입다가 승리했다. 암몬 왕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28절에서 암몬 왕은 막무가내로 입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반면 입다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아는, 부드러운 화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다음 단락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나는?
*입다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큰 용사”인 입다는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큰 용사”됨이 무력에 의지한 것이 아님이 본문을 통해 밝혀진다. 길르앗의 머리가 되어 암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한 입다의 첫걸음은 “외교”였다. 전쟁은 싸우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외교를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담판”을 지을 자질이 있었다. 한낱 “돕” 땅의 비류들을 이끈 입다에게 이런 놀라운 모습이라니…
*먼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었다. 억지에 가까운 암몬 왕의 길르앗 땅 반환 요구를 정확한 역사적 사실로 반박한다. 원래 자신들의 땅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이 땅은 오히려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음을 분명하게 반박한다(15~22절). 당시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할 때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에 따라 에돔과 모압과 암몬 땅을 우회했다. 처음에는 그 땅의 통과를 부탁했지만 그들이 승인하지 않아, 이스라엘은 더 먼 길로 “돌아서” 진행했다. 그들의 땅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았다. 에돔, 모압, 암몬이 이스라엘의 먼 친족이기 때문이었다. 아모리 족속에게도 동일한 제안을 했지만, 그 왕 시혼은 도리어 거절하고 백성들을 모아 이스라엘을 쳤다(민 21:23). 그리하여 아모리 족속의 침공에 맞서 그들을 정복하게 된 것이다. 암몬이 주장하는 그들의 땅을 점령한 일은 없다. 길르앗 사람들에게 쫓겨나 암몬 족속의 땅 “돕” 땅에 정착하며 살았던 입다에게 이런 정확하고 해박한 지식이라니…
*그리고 이런 역사적 지식에 근거하여 분명한 신학적 근거도 제시한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신 땅(23절)”이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을 정복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인도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암몬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 ‘그모스’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이야기한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다는 매우 상식적으로 말한다. 만약 이 땅이 암몬 자손의 땅이었다면,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주변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주변 마을들과, 아르논 강변의 모든 성읍에 삼백 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왜 당신은 그 동안에 이 지역들을 되찾지 않았습니까?(새번역_26절)”라고 했다. 거짓된 역사에 기대어 살아왔더라도, 지난 300년 동안 도대체 뭘 한 거냐는 의미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도발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나로서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당신이 나를 해치려고 쳐들어왔으니,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를 판가름해 주실 것입니다(새번역_27절).” 이것이 결론이다.
*입다는 “큰 용사”가 맞다. 단지 힘만 쓰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역사적 지식, 믿음, 상식에 근거한 판단… 이런 모습이 있다니…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정체성이 없다면 결국 자기주장에 함몰된다. 정확한 역사적 지식이 없으면 감정 대립과 억지가 심해진다. 건강한 상식이 없으면 광신 집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암몬 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입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확고하게 행하는 사람이었다. 암몬 왕은 역사적 사실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자기 고집만 부린다. 상식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암몬의 땅이었다면 300년 동안 무얼 했느냐는 질문에 “… 말을 듣지 않는다(28절).” 약탈이 목적인 이들에게 “전쟁의 명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공동체에 도발한다. 그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며 난동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똑같이 하면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지혜를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내어,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더욱더 선명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이다.
1. 땅을 돌려 달라는 암몬 왕(12~13절)
고대 전쟁에서는 개전 전에 서로 사자들을 보내어 먼저 말싸움을 한다. 이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다. 입다는 전쟁을 하기 전에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쳐들어왔느냐고 묻는다.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면서 ‘내 땅’이라는 표현을 써서 왕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입다는 사자를 먼저 보내 암몬 왕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전쟁의 원인이 암몬에게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에 암몬 왕은 길르앗, 즉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는 원래 암몬 땅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점령하였으니, 이제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요구한다. 이곳이 원래 자기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로가 자기 땅이라고 고수하는 상황이다.
2. 길르앗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입다(14~27절)
14~18절은 암몬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는 입다의 항변이다. 입다는 암몬 왕의 주장 가운데 왜곡된 부분을 지적하며,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스라엘의 길르앗 소유권을 주장한다.
이 단락이 첫 번째 이유인데, 입다는 암몬 왕에게 이스라엘은 암몬과 모압의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출애굽 여정을 통해 제시한다. 자신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홍해까지 왔고, 거기서 다시 가데스까지 왔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에돔과 모압 땅으로 지나가려고 사자를 보냈으나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가데스 광야에 머물다가 모압 동편 경계인 아르논에 진을 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입다는 아르논을 모압의 경계라고 분명하게 표현하며, 자신들의 조상이 모압 땅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한편, 신명기나 민수기는 이 여정에서 암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이 길은 에돔과 모압을 통과하지만 암몬은 통과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신명기 2:37은 암몬 땅에는 가지 않았음을 특별히 언급하며 이를 증명한다. 이와 같은 역사를 근거로 입다는 암몬뿐만 아니라 에돔, 모압과도 싸운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19~22절은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이 원래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는 점을 확인해 주며, 이 땅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압이나 에돔에게 한 것처럼 아모리에도 사자를 보내 땅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아모리는 모압, 에돔과 달리 지나가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왕 시혼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겨주셨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이겨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점령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아르논(아모리 땅의 최남단)에서 얍복(최북단 경계)까지, 광야(동편 경계)에서 요단(서편 경계)까지의 땅을 얻게 된다.
23~27절은 아모리 땅 점령의 정당성을 기술한다. 입다는 길르앗이 암몬 자손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한 후, 아모리 땅을 계속 점유하는 것의 정당성을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한다. 둘째, 당신(암몬 자손)이 모압 왕 발락보다 더 잘났느냐고 묻는다.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땅을 차지하자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 매우 유명한 선지자로 알려진 미디안 사람 발람을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저주 대신 축복을 하게 하셨다. 이로 인해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과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재의 암몬 왕보다 훌륭한 발락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전쟁도 하지 못하였는데, 암몬 왕이 감히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성읍들에 거주한 지 이미 300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곳이 암몬 사람들의 땅이었다면, 그동안 왜 이 땅을 다시 차지하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다는 이런 암몬 자손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판결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때 입다는 여호와를 ‘사사’로 부른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과 세상의 사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3. 암몬 왕의 거부(28절)
이런 입다의 주장을 들은 암몬 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싸움(설전)에서는 일단 입다가 승리했다. 암몬 왕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28절에서 암몬 왕은 막무가내로 입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반면 입다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아는, 부드러운 화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다음 단락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나는?
*입다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큰 용사”인 입다는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큰 용사”됨이 무력에 의지한 것이 아님이 본문을 통해 밝혀진다. 길르앗의 머리가 되어 암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한 입다의 첫걸음은 “외교”였다. 전쟁은 싸우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외교를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담판”을 지을 자질이 있었다. 한낱 “돕” 땅의 비류들을 이끈 입다에게 이런 놀라운 모습이라니…
*먼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었다. 억지에 가까운 암몬 왕의 길르앗 땅 반환 요구를 정확한 역사적 사실로 반박한다. 원래 자신들의 땅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이 땅은 오히려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음을 분명하게 반박한다(15~22절). 당시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할 때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에 따라 에돔과 모압과 암몬 땅을 우회했다. 처음에는 그 땅의 통과를 부탁했지만 그들이 승인하지 않아, 이스라엘은 더 먼 길로 “돌아서” 진행했다. 그들의 땅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았다. 에돔, 모압, 암몬이 이스라엘의 먼 친족이기 때문이었다. 아모리 족속에게도 동일한 제안을 했지만, 그 왕 시혼은 도리어 거절하고 백성들을 모아 이스라엘을 쳤다(민 21:23). 그리하여 아모리 족속의 침공에 맞서 그들을 정복하게 된 것이다. 암몬이 주장하는 그들의 땅을 점령한 일은 없다. 길르앗 사람들에게 쫓겨나 암몬 족속의 땅 “돕” 땅에 정착하며 살았던 입다에게 이런 정확하고 해박한 지식이라니…
*그리고 이런 역사적 지식에 근거하여 분명한 신학적 근거도 제시한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신 땅(23절)”이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을 정복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인도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암몬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 ‘그모스’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이야기한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다는 매우 상식적으로 말한다. 만약 이 땅이 암몬 자손의 땅이었다면,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주변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주변 마을들과, 아르논 강변의 모든 성읍에 삼백 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왜 당신은 그 동안에 이 지역들을 되찾지 않았습니까?(새번역_26절)”라고 했다. 거짓된 역사에 기대어 살아왔더라도, 지난 300년 동안 도대체 뭘 한 거냐는 의미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도발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나로서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당신이 나를 해치려고 쳐들어왔으니,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를 판가름해 주실 것입니다(새번역_27절).” 이것이 결론이다.
*입다는 “큰 용사”가 맞다. 단지 힘만 쓰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역사적 지식, 믿음, 상식에 근거한 판단… 이런 모습이 있다니…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정체성이 없다면 결국 자기주장에 함몰된다. 정확한 역사적 지식이 없으면 감정 대립과 억지가 심해진다. 건강한 상식이 없으면 광신 집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암몬 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입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확고하게 행하는 사람이었다. 암몬 왕은 역사적 사실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자기 고집만 부린다. 상식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암몬의 땅이었다면 300년 동안 무얼 했느냐는 질문에 “… 말을 듣지 않는다(28절).” 약탈이 목적인 이들에게 “전쟁의 명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공동체에 도발한다. 그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며 난동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똑같이 하면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지혜를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내어,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더욱더 선명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입다의 등장과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 [사사기 11:1-11]
10:18에서 암몬 족속과의 전투에 선봉으로 설 자를 찾는 장면에 이어, 갑자기 입다에 대한 소개가 등장한다. 여덟 번째 사사인 입다를 ‘큰 용사’, ‘기생이 낳은 아들’, ‘잡류(건달류)의 우두머리’ 등으로 소개할 수 있겠다. 그는 큰 용사로 불렸지만 기생의 아들이어서, 기업을 잇지 못하게 하려는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 시간이 흘러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올 때(10:18) 길르앗 사람들이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강성한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길르앗 사람들은 입다를 세우는 데 모두 동의할 정도였다. “큰 용사(힘의 용사)”라는 소개는 천사가 기드온을 부를 때 쓴 표현과 같다(6:12). 그가 누가 봐도 탁월한 용사였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1. 입다라는 인물
당시 사회적 관습의 시선으로 볼 때 입다의 약점은 ‘기생의 아들'(1절)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여인의 아들’이기에 상속 자격을 운운하며 쫓겨났다. 또 하나는 ‘잡류(건달류)’의 우두머리였다는 점이다(3절). 형제들에게 쫓겨나 정착한 “돕” 땅에 거주하면서 “힘”으로 살았을 것이다. 자연스레 “비류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그가 “힘”, “주먹”, “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큰 용사”로서의 자질이 단단히 잘못 쓰이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길르앗의 장로들이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게 된 원인은 “힘의 용사”로서 입다가 가진 명성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리더를 세우지 않는다. 족벌, 학벌, 혈연, 지연 등 인간적인 조건으로 리더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곧 리더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은 사라지고, 입다의 이복형제들처럼 인간적인 조건으로 편을 가른다.
*입다는 하나님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족과 공동체에게 버림받았다는 깊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길르앗 장로들은 처음에 입다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이끌 “장관”이 되어 달라고 제의한다(6절). 하지만 입다는 자신이 길르앗의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일을 언급하며 “쫓아낼 때는 언제고, 환난을 당하니 찾아왔느냐”며 거절한다(7절). 이에 장로들은 자신들과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면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될 것이라며 다시 요청한다(8절). 그러자 입다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면 나를 길르앗의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라고 확인한다(9절).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입다 사이에 맺은 약속의 증인”이심을 고백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다(10절). 이렇게 거래는 끝났다. 입다는 길르앗의 머리와 장관이 되었다(11절).
*그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은 지긋지긋한 18년의 압제를 끊는 하나님의 전쟁이기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전쟁이었다. 적어도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 초반에는 그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면 길르앗의 지도자로 삼겠다고 약속하는 장로들의 말에 요청을 수락한다. “수치스럽게 쫓겨난” 자신이 이 일로 “명예롭게” 귀향하기를 마음에 품은 듯하다.
암몬과의 전쟁에 맞서기 위해 미스바에 도착한 입다는 가장 먼저 “(돕에서 장로들과 나눈) 모든 말을 주님께 아뢰었다(새번역_11절 하).” 협상의 과정과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공증했다는 것이다. 추방당하고 이방 땅에서 비류들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그를 이처럼 치밀한 사람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하나님께 아뢴 모든 말이 “암몬 족속과의 전쟁 계획”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12절부터 펼쳐지는 전면전에 앞서 암몬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고증을 앞세운 외교전의 모습을 보면, 입다가 결코 힘만 앞세우는 장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암몬의 침략이 얼마나 명분 없는 억지인지를 치밀하게, 조목조목 전달한다.
2. 그런데…
입다나 길르앗 장로들이나,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지 않는다. 그것참 희한하다. 암몬의 18년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우상까지 제거하며 배수의 진을 치고 매달렸는데, 정작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자 그토록 부르짖던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 전쟁을 이끌 적임자가 누구인가? 누가 우리의 머리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탁상공론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전혀 안중에도 없던 인물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가 “큰 용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 이력과 집안 내력, 심지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그를 추방한 일도 상관없었다. 출중한 “큰 용사”로서의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회의 탁자에서 이미 결론을 내리고 행동한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더니… 이게 웬… 허허허
나는?
-입다는 ‘버림받은’ 사생자, 추방자, 유랑자였다. ‘큰 용사’로 불리기에는 그의 태생과 신분이 매우 비천했다. 기생의 아들이기에 유산도 받지 못하고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비참한 신세였다. 하지만 그는 버림받은 곳에서 시대적 요청(10:18)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을 버린 자들의 ‘구원자’로 준비된다(1~3절). 마치 오늘날의 사회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기독교를 향한 세상의 태생적인 혐오 앞에서, 교회가 비난과 비방의 대상이 아닌 ‘대안’이 되도록 준비시키시고 이끄신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암몬의 침략에 속수무책이던 장로들은 돕 땅의 입다를 찾아가 ‘장관직(비상임 통솔자)’을 제안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입다가 그들이 찾아온 동기를 의심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이번에는 길르앗의 ‘머리(상임 통치자)’로 추대하겠다며 한 걸음 더 다가간다(4~8절). 정치적 약자인 입다를 충분히 이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 처분하려던 장로들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사 시대의 어두운 단면이자 비정한 이 세상의 민낯이 아니겠나! 자기 유익을 따라 속보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세상 풍조를 담대하게 거슬러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어야 하겠다.
-한편, 동족에게서 ‘버림’받은 입다가 동족에게 ‘부름’을 받는 모습에는 묘한 통쾌함이 있다. 아버지의 기업을 잇기에도 ‘부적격자’였던 그가 곤경에 빠진 동족을 구원할 ‘적임자’로 인정받은 것 자체가 역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세상에서 받는 거절과 소외가 내가 걷는 인생길의 결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 내 삶의 주권이 있음을 알고 믿는다면, 남모를 상처와 상실도 또 다른 보복을 낳는 ‘가시(9:15)’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향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다의 협상력이 대단하다. 이전에는 버림받았지만, 이번에는 이용당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의 심각한 상황을 출세의 기회로 역이용한다. 승리 이후의 지위를 법적으로, 신적으로 재가받는 데만 여념이 없어 보인다. 이기적인 야망만 보일 뿐, 동족에 대한 일말의 동정도, 하나님을 향한 한 줌의 믿음도 보이지 않는다. 협상에는 능했으나 야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입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에 대한 열정보다 마음의 동기를 먼저 살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입다의 등장 에피소드에 담긴 당시 사회상이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시대에 더하면 더했지, 결코 생소하지 않은 모습들이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임에도 공정하지 않다. 출생 이력, 혈연, 지연의 고리가 견고하다. 특히 입다가 본처 소생의 형제들에게 추방당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입다에게 몰려들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달들”이었지만…
-사사 시대이기에 그러려니 하면 곤란하다. 이와 비슷한 불공정한 모습이 현대에도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태도와 가치, 익숙한 관습에 직면할 때 쉽게 예전의 방식대로 선택하고 결정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인지 먼저 묻고 확인해야 할 것이다.
-입다 아버지의 문란한 삶으로 인해 그의 자녀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입다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이복형제들은 옛 가치, 세상의 가치대로 출신을 따지고 자신들의 유익을 먼저 따졌다.
-한편, 입다를 찾아온 장로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힘을 겨루며 계산하는 모습은, 모양과 내용이 달랐을 뿐 입다의 이복형제들과 다를 바가 없다. 입다와 장로들의 협의 속에 하나님은 아예 없고,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 반복될 뿐이다.
*피택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 공동체에게 본문은 매우 중요한 점을 깨우친다. 길르앗의 장로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찾아 다니는 조건은 오로지 “힘”이었다. 그 힘이 어떤 힘이든 상관 없었다. 비류들의 힘이라도 암몬 자손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 ‘힘’있는 일꾼이 아니라,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철저히 의뢰하는 일꾼을 분별하는 영적 감수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투표라는 제도는 개인이 한 표만을 행사하지만,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성령께서 분별하고 깨우쳐 주시는 은햬를 따라 행사하면 겉으로 보이는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당한 일꾼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본이 되어야 할 교단 선거에서조차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추잡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현실은 어쩌면 입다를 찾은 길르앗 장로들과 같은 수준의 지도자들이 세워진 것이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여 세우는 지도자여야 하리라.
*길르앗의 장로들만 이런 모습인가? 아니다. 사사로 세움받는 입다 또한 그의 저급한 사명의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다는 장로들이 자기와 맺은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확증하려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넘겨 주시면”이라는 그의 고백이 왜 이리 낯설까? 그의 걸어온 삶의 흔적이 이런 고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서슴치 않는다.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마음보다, 자기 야망을 실현하는 것에 더 비중을 보인 것이다.
*이런 입다의 모습에서 나도 역시 ‘주님의 뜻, 사명, 비전’ 등등의 종교적 언어로 포장하여 결국 나의 욕심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여 채워가려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목사라는 이미지를 십분활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이 땅의 거짓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지 혼란스러운 사회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내 자신조차 혹하는 종교적 언어에 무조건적으로 종속하지 않고, 길고된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분별하며 나아가리라.
*지금 한국 사회가 몇몇 언론과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 여기에 야합하는 정치인들의 콜레버가 한창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극심한 혼란이다. 실망과 분노가 판을 친다. 이런 시대일수록 진실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일수록 더욱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그저 혼탁해진 흙탕물이 맑은 물로 정화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무성한 말들이 오히려 더 혼탁을 부를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언어가 절제되는 지혜로운 시기여야 할 것이다.
*안식년 선교지 방문 마지막 일정으로 일본에 들어와 있다. 임장백 선교사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섬세한 손길을 만끽 중이다. 어제는 후쿠오카에서 “노조미가 오카 그리스도 교회(직역하면 소망의 언덕 교회)”를 섬기시는 김민구 선교사님 사역지를 방문하고 교제했다. 교토에서 후쿠오카를 오가며, 좀 더 치밀하게 동선을 구성했었더라면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김민구(김수경) 선교사님을 처음뵙고 교제하며 이렇게라도 만나뵐 수 있는 감사가 넘쳤다. 주님을 위하여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곳에서 묵묵히 섬기시는 선교사님들의 성실함이 나의 달려갈 목회 여정에도 큰 빛이 되었다. 여정과 비용에 큰 부담이 되었고 몸은 피곤하지만 참으로 후쿠오카를 방문한 것은 잘한 결정이라고 내 자신에게 칭찬해주었다.
*8만이 넘는 우상의 나라, 겉으로 보이게 친절하나, 철저히 메뉴얼로 움직이기에 일말의 유연성도 허락하지 않는 일종의 차가움이 공존하는 나라…어제 하루를 보내며 이런 저런 체감이 확연하게 드는 시간들이었다. 확실히 선교지는 “가보면 안다”
*한편으로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교통비였다. 교토에서 후쿠오카 왕복 신칸센 운임은 상식을 초월했다. 웬만한 거리의 항공료를 뛰어넘었다. 말이 안되는 금액이었다. 선교사님과 대화중에 그렇게 오래도록 일본에서 사역했으나 현재 주거지 근처에만 주로 계셨다는 이유가 교통비 때문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제 하루 톡톡히 실감됐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고분분투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사역이 참으로 도전되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통체계와 비용이 참 감사했다. 철도, 대중교통은 절대로 민영화 하면 안되는 것을 실감했다.
1. 입다라는 인물
당시 사회적 관습의 시선으로 볼 때 입다의 약점은 ‘기생의 아들'(1절)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여인의 아들’이기에 상속 자격을 운운하며 쫓겨났다. 또 하나는 ‘잡류(건달류)’의 우두머리였다는 점이다(3절). 형제들에게 쫓겨나 정착한 “돕” 땅에 거주하면서 “힘”으로 살았을 것이다. 자연스레 “비류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그가 “힘”, “주먹”, “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큰 용사”로서의 자질이 단단히 잘못 쓰이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길르앗의 장로들이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게 된 원인은 “힘의 용사”로서 입다가 가진 명성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리더를 세우지 않는다. 족벌, 학벌, 혈연, 지연 등 인간적인 조건으로 리더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곧 리더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은 사라지고, 입다의 이복형제들처럼 인간적인 조건으로 편을 가른다.
*입다는 하나님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족과 공동체에게 버림받았다는 깊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길르앗 장로들은 처음에 입다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이끌 “장관”이 되어 달라고 제의한다(6절). 하지만 입다는 자신이 길르앗의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일을 언급하며 “쫓아낼 때는 언제고, 환난을 당하니 찾아왔느냐”며 거절한다(7절). 이에 장로들은 자신들과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면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될 것이라며 다시 요청한다(8절). 그러자 입다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면 나를 길르앗의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라고 확인한다(9절).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입다 사이에 맺은 약속의 증인”이심을 고백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다(10절). 이렇게 거래는 끝났다. 입다는 길르앗의 머리와 장관이 되었다(11절).
*그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은 지긋지긋한 18년의 압제를 끊는 하나님의 전쟁이기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전쟁이었다. 적어도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 초반에는 그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면 길르앗의 지도자로 삼겠다고 약속하는 장로들의 말에 요청을 수락한다. “수치스럽게 쫓겨난” 자신이 이 일로 “명예롭게” 귀향하기를 마음에 품은 듯하다.
암몬과의 전쟁에 맞서기 위해 미스바에 도착한 입다는 가장 먼저 “(돕에서 장로들과 나눈) 모든 말을 주님께 아뢰었다(새번역_11절 하).” 협상의 과정과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공증했다는 것이다. 추방당하고 이방 땅에서 비류들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그를 이처럼 치밀한 사람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하나님께 아뢴 모든 말이 “암몬 족속과의 전쟁 계획”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12절부터 펼쳐지는 전면전에 앞서 암몬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고증을 앞세운 외교전의 모습을 보면, 입다가 결코 힘만 앞세우는 장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암몬의 침략이 얼마나 명분 없는 억지인지를 치밀하게, 조목조목 전달한다.
2. 그런데…
입다나 길르앗 장로들이나,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지 않는다. 그것참 희한하다. 암몬의 18년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우상까지 제거하며 배수의 진을 치고 매달렸는데, 정작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자 그토록 부르짖던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 전쟁을 이끌 적임자가 누구인가? 누가 우리의 머리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탁상공론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전혀 안중에도 없던 인물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가 “큰 용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 이력과 집안 내력, 심지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그를 추방한 일도 상관없었다. 출중한 “큰 용사”로서의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회의 탁자에서 이미 결론을 내리고 행동한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더니… 이게 웬… 허허허
나는?
-입다는 ‘버림받은’ 사생자, 추방자, 유랑자였다. ‘큰 용사’로 불리기에는 그의 태생과 신분이 매우 비천했다. 기생의 아들이기에 유산도 받지 못하고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비참한 신세였다. 하지만 그는 버림받은 곳에서 시대적 요청(10:18)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을 버린 자들의 ‘구원자’로 준비된다(1~3절). 마치 오늘날의 사회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기독교를 향한 세상의 태생적인 혐오 앞에서, 교회가 비난과 비방의 대상이 아닌 ‘대안’이 되도록 준비시키시고 이끄신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암몬의 침략에 속수무책이던 장로들은 돕 땅의 입다를 찾아가 ‘장관직(비상임 통솔자)’을 제안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입다가 그들이 찾아온 동기를 의심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이번에는 길르앗의 ‘머리(상임 통치자)’로 추대하겠다며 한 걸음 더 다가간다(4~8절). 정치적 약자인 입다를 충분히 이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 처분하려던 장로들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사 시대의 어두운 단면이자 비정한 이 세상의 민낯이 아니겠나! 자기 유익을 따라 속보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세상 풍조를 담대하게 거슬러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어야 하겠다.
-한편, 동족에게서 ‘버림’받은 입다가 동족에게 ‘부름’을 받는 모습에는 묘한 통쾌함이 있다. 아버지의 기업을 잇기에도 ‘부적격자’였던 그가 곤경에 빠진 동족을 구원할 ‘적임자’로 인정받은 것 자체가 역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세상에서 받는 거절과 소외가 내가 걷는 인생길의 결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 내 삶의 주권이 있음을 알고 믿는다면, 남모를 상처와 상실도 또 다른 보복을 낳는 ‘가시(9:15)’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향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다의 협상력이 대단하다. 이전에는 버림받았지만, 이번에는 이용당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의 심각한 상황을 출세의 기회로 역이용한다. 승리 이후의 지위를 법적으로, 신적으로 재가받는 데만 여념이 없어 보인다. 이기적인 야망만 보일 뿐, 동족에 대한 일말의 동정도, 하나님을 향한 한 줌의 믿음도 보이지 않는다. 협상에는 능했으나 야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입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에 대한 열정보다 마음의 동기를 먼저 살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입다의 등장 에피소드에 담긴 당시 사회상이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시대에 더하면 더했지, 결코 생소하지 않은 모습들이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임에도 공정하지 않다. 출생 이력, 혈연, 지연의 고리가 견고하다. 특히 입다가 본처 소생의 형제들에게 추방당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입다에게 몰려들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달들”이었지만…
-사사 시대이기에 그러려니 하면 곤란하다. 이와 비슷한 불공정한 모습이 현대에도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태도와 가치, 익숙한 관습에 직면할 때 쉽게 예전의 방식대로 선택하고 결정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인지 먼저 묻고 확인해야 할 것이다.
-입다 아버지의 문란한 삶으로 인해 그의 자녀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입다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이복형제들은 옛 가치, 세상의 가치대로 출신을 따지고 자신들의 유익을 먼저 따졌다.
-한편, 입다를 찾아온 장로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힘을 겨루며 계산하는 모습은, 모양과 내용이 달랐을 뿐 입다의 이복형제들과 다를 바가 없다. 입다와 장로들의 협의 속에 하나님은 아예 없고,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 반복될 뿐이다.
*피택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 공동체에게 본문은 매우 중요한 점을 깨우친다. 길르앗의 장로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찾아 다니는 조건은 오로지 “힘”이었다. 그 힘이 어떤 힘이든 상관 없었다. 비류들의 힘이라도 암몬 자손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 ‘힘’있는 일꾼이 아니라,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철저히 의뢰하는 일꾼을 분별하는 영적 감수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투표라는 제도는 개인이 한 표만을 행사하지만,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성령께서 분별하고 깨우쳐 주시는 은햬를 따라 행사하면 겉으로 보이는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당한 일꾼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본이 되어야 할 교단 선거에서조차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추잡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현실은 어쩌면 입다를 찾은 길르앗 장로들과 같은 수준의 지도자들이 세워진 것이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여 세우는 지도자여야 하리라.
*길르앗의 장로들만 이런 모습인가? 아니다. 사사로 세움받는 입다 또한 그의 저급한 사명의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다는 장로들이 자기와 맺은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확증하려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넘겨 주시면”이라는 그의 고백이 왜 이리 낯설까? 그의 걸어온 삶의 흔적이 이런 고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서슴치 않는다.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마음보다, 자기 야망을 실현하는 것에 더 비중을 보인 것이다.
*이런 입다의 모습에서 나도 역시 ‘주님의 뜻, 사명, 비전’ 등등의 종교적 언어로 포장하여 결국 나의 욕심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여 채워가려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목사라는 이미지를 십분활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이 땅의 거짓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지 혼란스러운 사회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내 자신조차 혹하는 종교적 언어에 무조건적으로 종속하지 않고, 길고된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분별하며 나아가리라.
*지금 한국 사회가 몇몇 언론과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 여기에 야합하는 정치인들의 콜레버가 한창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극심한 혼란이다. 실망과 분노가 판을 친다. 이런 시대일수록 진실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일수록 더욱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그저 혼탁해진 흙탕물이 맑은 물로 정화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무성한 말들이 오히려 더 혼탁을 부를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언어가 절제되는 지혜로운 시기여야 할 것이다.
*안식년 선교지 방문 마지막 일정으로 일본에 들어와 있다. 임장백 선교사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섬세한 손길을 만끽 중이다. 어제는 후쿠오카에서 “노조미가 오카 그리스도 교회(직역하면 소망의 언덕 교회)”를 섬기시는 김민구 선교사님 사역지를 방문하고 교제했다. 교토에서 후쿠오카를 오가며, 좀 더 치밀하게 동선을 구성했었더라면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김민구(김수경) 선교사님을 처음뵙고 교제하며 이렇게라도 만나뵐 수 있는 감사가 넘쳤다. 주님을 위하여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곳에서 묵묵히 섬기시는 선교사님들의 성실함이 나의 달려갈 목회 여정에도 큰 빛이 되었다. 여정과 비용에 큰 부담이 되었고 몸은 피곤하지만 참으로 후쿠오카를 방문한 것은 잘한 결정이라고 내 자신에게 칭찬해주었다.
*8만이 넘는 우상의 나라, 겉으로 보이게 친절하나, 철저히 메뉴얼로 움직이기에 일말의 유연성도 허락하지 않는 일종의 차가움이 공존하는 나라…어제 하루를 보내며 이런 저런 체감이 확연하게 드는 시간들이었다. 확실히 선교지는 “가보면 안다”
*한편으로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교통비였다. 교토에서 후쿠오카 왕복 신칸센 운임은 상식을 초월했다. 웬만한 거리의 항공료를 뛰어넘었다. 말이 안되는 금액이었다. 선교사님과 대화중에 그렇게 오래도록 일본에서 사역했으나 현재 주거지 근처에만 주로 계셨다는 이유가 교통비 때문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제 하루 톡톡히 실감됐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고분분투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사역이 참으로 도전되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통체계와 비용이 참 감사했다. 철도, 대중교통은 절대로 민영화 하면 안되는 것을 실감했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사사 돌라와 야일 그리고 입다의 등장 배경 [사사기 10:1-18]
아비멜렉 사후에 ‘돌라(잇사갈 지파)’가 사사로 세워져 에브라임 산간지방 사밀에서 23년 동안 활동했다. ‘야일(길르앗 사람/므낫세 지파)’은 22년 동안 사사로 활동했고, 길르앗에 ‘하봇야일(야일의 촌락들)’을 형성하며 살았다.
그리고 입다가 사사로 세워지기 전, 그의 출현 배경을 먼저 설명한다. 극심한 종교적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에서 시작된 암몬 족속의 억압이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역까지 확대된다. 무려 18년 동안의 압제였다. “그때에야(새번역_10절)”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며, 자신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백성에게 신물이 나셨음을 드러내신다. “지금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부르짖고 구원해 달라고 하라(13-14절)”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며 “그러나 오늘만은 우리를 구출하여 주십시오(새번역_15절)”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주님만 섬기겠노라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새번역_16절).
하지만 겉모습은 그렇게 변했을지 몰라도,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누가 먼저 암몬과 싸우겠는가? 그 사람이 길르앗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17-18절).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으나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계획으로 암몬을 물리치려 한다. 이처럼 변화는 참 어려운 것이다.
1. 점점 더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1-5절)
돌라와 야일에 대한 기록은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무난하게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역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로서 과연 합당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먼저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분명한 업적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음에도 ‘에브라임 지파의 산지 사밀’에서 거주하다 그곳에 묻힌다(1-2절). 각기 지파별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는 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그것도 산지에서 살았을까?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분배받은 땅을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하다.
반면 ‘야일’은 사사로서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지 아들 30명을 두었고, 그들이 어린 나귀 30마리를 탔으며, 30개의 성읍(하봇야일_야일의 마을들)을 가졌다고 기록한다. 마치 기드온처럼 많은 부인을 두고, 왕이 누릴 법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암시한다. 특히 사사들 중에서 성읍을 소유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돌라는 분배받은 기업을 떠나 살았고, 야일은 하나님의 땅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하고 축재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사”였다. 혹자는 이들의 사사로서의 업적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그들의 삶을 축약하면서 사사로서의 업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에 더 초점을 두었을 수도 있겠다. 돌라와 야일은 사사로서 특출한 업적이 없다. 그만큼 평안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장 성실하게 지켜져야 할 “가나안 땅” 분배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시며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따라 살겠노라 선언하였던 가나안 땅 정복 전쟁 초입의 “세겜 언약”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맞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지위(직분)에 걸맞은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삶의 열매를 남겼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맺힌 열매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산다!
1. 사사 ‘입다’의 등장 배경(6-18절)
입다가 등장하는 시대는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활동하던 시기와 비교하여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사사기의 전형적인, 하나님을 떠난 징조인 “다시(또)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는 고발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의 대상인 우상이 바알과 아스다롯에 국한되지 않고 확대되었다. 죄는 반드시 전염되고 불어난다. 영향력은 축소되지 않는다. 확대 재생산된다.
먼저 우상의 종류가 그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에 머문 것이 아니라, 아람(시리아)과 시돈(가나안 북부)의 신들, 모압과 암몬(가나안 동부), 블레셋(가나안 남서 해안) 사람의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한다. 가나안 땅을 중심에 놓고 사방의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거침없이 따라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새번역_7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신 것이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런데 18년 동안 억압하고 학대당한 일을, 암몬 족속이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방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다. 블레셋의 억압은 향후 삼손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13:1).
또 암몬 족속의 억압은 단지 요단 동편에 머문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가나안 중앙에서 남단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7-9절).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9절).” “곤고(야차르)”는 “매다, 갑갑하다, 비좁다, 곤란하다”라는 뜻이다. 매우 쓰라린 고통 중에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는 남서쪽의 블레셋과 요단 동편에서 침략하는 암몬 족속의 억압을 함께 받아 그 고통이 배나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0절은 ‘그때에야(새번역)’로 시작해도 무방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기간이 18년이나 지난 “그때에야” 부르짖었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 누린 45년의 평화 이후에 18년 동안 하나님 목전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암몬 족속에게 심한 곤고를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슬프셨다. 벌써 몇 번째인가? 너무도 괴로우셨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곧바로 구원을 행하시지 않는다. 출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여 주셨던 것을 먼저 상기시키신다(11-12절). 그리고는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13절). 너희가 그토록 섬긴 이방 신들에게 가서 구해 달라고 하라(14절)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18년 동안 섬겨 오던 이방 신상들을 깨뜨리며 “오직 주님만 우리를 구하실 수 있으니 구해 주십시오!” 매달리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근심(고심)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15-16절).
*염치 불고하고 이 길밖에 없음을 외치며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으로 둘러싼 이방 우상들을 애초에 쫓아냈어야 했다. 애초에 진멸했어야 했다. 자초한 곤고함에 하나님의 고민이 깊어 간다.
나는?
-사사 돌라와 야일은 아비멜렉의 폭정이 가져온 위기와 혼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45년 동안 안정된 통치를 이룬다(1~5절). 하지만 다른 사사들과 달리 3대에 걸쳐 돌라의 가문이 소개되고, 야일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를 타며 성읍을 소유하는 모습은, 기드온 가문에서 대두된 ‘통치 세습’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지도자임을 암시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조건에서도 자발적인 가난과 그로 인한 불편함을 자청하며, 물질이 우상이 된 이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사사 돌라가 다스릴 때 이스라엘이 누린 평화는 고작 23년이었다. 타락이 반복되고 심해질수록 그들이 누린 평화의 기간은 짧아졌다. 사사 야일은 아들 30명에 나귀 30마리, 성읍 30개를 가졌다. 그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치 기드온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권력 집중이었다.
-이스라엘의 고질병은 어김없이 터졌다. 여호와를 버리고 참 많은 신들을 섬겼다. 여호와는 그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그들을 파셨다. 18년 동안이나 그들의 고통에 침묵하셨다. 암몬은 강성해졌고 이스라엘은 악화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다(6~9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떠나 더 많은 우상들을 섬기면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더 비참한 이방의 노예가 되어 곤고함이 더할 뿐이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방의 헛된 우상들(신 7:4)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더욱 가중된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들의 구원자도, 성민이라는 신분도, 제사장 나라의 사명도 모두 망각한 그들을 향해 분노하신다(17~18절). 하지만 그 불타는 분노가 질투하시는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것이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다시” 악을 행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지만, 자기 백성이 처한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신다(10~16절). 번번이 잘못을 뉘우쳤다가 또다시 죄를 범하는 백성이지만, 못난 자식을 둔 아비처럼 또 받아 주시고 들어주신다. 하지만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용서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빠른 구원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더 진실한 회개를 바라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자신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구원을 호소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택한 신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방 신들을 제거한 후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에 근심하신다. 기억해야 한다. 회개 공식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만이 여호와를 움직인다.
-명백하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의 평화는, 하나님만 온전히 섬길 때 그 백성의 삶이 얼마나 평탄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는 왕이 없어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알게 하신다.
-돌라와 야일의 업적이 없는 것은 도리어 그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분명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돌라가 분배받은 땅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그 평화가 제한된 평화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야일의 “왕 같은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평화를 누리면서도 다시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 간 사사의 모습이어서 씁쓸하다. 기드온이 이렇게 살다가 아비멜렉이 출현하지 않았던가!
-자녀들에게 풍족한 삶을 남겨 주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남겨 주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넘치도록 풍성한 삶은 아비멜렉과 같은 이단아를 낳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다시 이방 우상들에게로 넘어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평화로움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누릴 때 변질되지 않는다.” 지키라 하신 명령을 꿋꿋하게 지켜 살아낼 때, 지금 누리는 평화가 다음 세대에게도 평화가 된다. 나의 자녀들에게 남겨 줄 세상이 지금 내가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가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입다가 사사로 세워지기 전, 그의 출현 배경을 먼저 설명한다. 극심한 종교적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에서 시작된 암몬 족속의 억압이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역까지 확대된다. 무려 18년 동안의 압제였다. “그때에야(새번역_10절)”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며, 자신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백성에게 신물이 나셨음을 드러내신다. “지금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부르짖고 구원해 달라고 하라(13-14절)”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며 “그러나 오늘만은 우리를 구출하여 주십시오(새번역_15절)”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주님만 섬기겠노라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새번역_16절).
하지만 겉모습은 그렇게 변했을지 몰라도,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누가 먼저 암몬과 싸우겠는가? 그 사람이 길르앗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17-18절).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으나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계획으로 암몬을 물리치려 한다. 이처럼 변화는 참 어려운 것이다.
1. 점점 더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1-5절)
돌라와 야일에 대한 기록은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무난하게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역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로서 과연 합당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먼저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분명한 업적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음에도 ‘에브라임 지파의 산지 사밀’에서 거주하다 그곳에 묻힌다(1-2절). 각기 지파별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는 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그것도 산지에서 살았을까?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분배받은 땅을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하다.
반면 ‘야일’은 사사로서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지 아들 30명을 두었고, 그들이 어린 나귀 30마리를 탔으며, 30개의 성읍(하봇야일_야일의 마을들)을 가졌다고 기록한다. 마치 기드온처럼 많은 부인을 두고, 왕이 누릴 법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암시한다. 특히 사사들 중에서 성읍을 소유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돌라는 분배받은 기업을 떠나 살았고, 야일은 하나님의 땅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하고 축재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사”였다. 혹자는 이들의 사사로서의 업적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그들의 삶을 축약하면서 사사로서의 업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에 더 초점을 두었을 수도 있겠다. 돌라와 야일은 사사로서 특출한 업적이 없다. 그만큼 평안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장 성실하게 지켜져야 할 “가나안 땅” 분배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시며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따라 살겠노라 선언하였던 가나안 땅 정복 전쟁 초입의 “세겜 언약”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맞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지위(직분)에 걸맞은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삶의 열매를 남겼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맺힌 열매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산다!
1. 사사 ‘입다’의 등장 배경(6-18절)
입다가 등장하는 시대는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활동하던 시기와 비교하여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사사기의 전형적인, 하나님을 떠난 징조인 “다시(또)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는 고발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의 대상인 우상이 바알과 아스다롯에 국한되지 않고 확대되었다. 죄는 반드시 전염되고 불어난다. 영향력은 축소되지 않는다. 확대 재생산된다.
먼저 우상의 종류가 그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에 머문 것이 아니라, 아람(시리아)과 시돈(가나안 북부)의 신들, 모압과 암몬(가나안 동부), 블레셋(가나안 남서 해안) 사람의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한다. 가나안 땅을 중심에 놓고 사방의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거침없이 따라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새번역_7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신 것이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런데 18년 동안 억압하고 학대당한 일을, 암몬 족속이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방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다. 블레셋의 억압은 향후 삼손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13:1).
또 암몬 족속의 억압은 단지 요단 동편에 머문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가나안 중앙에서 남단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7-9절).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9절).” “곤고(야차르)”는 “매다, 갑갑하다, 비좁다, 곤란하다”라는 뜻이다. 매우 쓰라린 고통 중에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는 남서쪽의 블레셋과 요단 동편에서 침략하는 암몬 족속의 억압을 함께 받아 그 고통이 배나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0절은 ‘그때에야(새번역)’로 시작해도 무방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기간이 18년이나 지난 “그때에야” 부르짖었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 누린 45년의 평화 이후에 18년 동안 하나님 목전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암몬 족속에게 심한 곤고를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슬프셨다. 벌써 몇 번째인가? 너무도 괴로우셨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곧바로 구원을 행하시지 않는다. 출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여 주셨던 것을 먼저 상기시키신다(11-12절). 그리고는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13절). 너희가 그토록 섬긴 이방 신들에게 가서 구해 달라고 하라(14절)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18년 동안 섬겨 오던 이방 신상들을 깨뜨리며 “오직 주님만 우리를 구하실 수 있으니 구해 주십시오!” 매달리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근심(고심)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15-16절).
*염치 불고하고 이 길밖에 없음을 외치며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으로 둘러싼 이방 우상들을 애초에 쫓아냈어야 했다. 애초에 진멸했어야 했다. 자초한 곤고함에 하나님의 고민이 깊어 간다.
나는?
-사사 돌라와 야일은 아비멜렉의 폭정이 가져온 위기와 혼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45년 동안 안정된 통치를 이룬다(1~5절). 하지만 다른 사사들과 달리 3대에 걸쳐 돌라의 가문이 소개되고, 야일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를 타며 성읍을 소유하는 모습은, 기드온 가문에서 대두된 ‘통치 세습’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지도자임을 암시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조건에서도 자발적인 가난과 그로 인한 불편함을 자청하며, 물질이 우상이 된 이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사사 돌라가 다스릴 때 이스라엘이 누린 평화는 고작 23년이었다. 타락이 반복되고 심해질수록 그들이 누린 평화의 기간은 짧아졌다. 사사 야일은 아들 30명에 나귀 30마리, 성읍 30개를 가졌다. 그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치 기드온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권력 집중이었다.
-이스라엘의 고질병은 어김없이 터졌다. 여호와를 버리고 참 많은 신들을 섬겼다. 여호와는 그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그들을 파셨다. 18년 동안이나 그들의 고통에 침묵하셨다. 암몬은 강성해졌고 이스라엘은 악화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다(6~9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떠나 더 많은 우상들을 섬기면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더 비참한 이방의 노예가 되어 곤고함이 더할 뿐이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방의 헛된 우상들(신 7:4)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더욱 가중된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들의 구원자도, 성민이라는 신분도, 제사장 나라의 사명도 모두 망각한 그들을 향해 분노하신다(17~18절). 하지만 그 불타는 분노가 질투하시는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것이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다시” 악을 행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지만, 자기 백성이 처한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신다(10~16절). 번번이 잘못을 뉘우쳤다가 또다시 죄를 범하는 백성이지만, 못난 자식을 둔 아비처럼 또 받아 주시고 들어주신다. 하지만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용서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빠른 구원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더 진실한 회개를 바라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자신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구원을 호소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택한 신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방 신들을 제거한 후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에 근심하신다. 기억해야 한다. 회개 공식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만이 여호와를 움직인다.
-명백하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의 평화는, 하나님만 온전히 섬길 때 그 백성의 삶이 얼마나 평탄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는 왕이 없어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알게 하신다.
-돌라와 야일의 업적이 없는 것은 도리어 그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분명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돌라가 분배받은 땅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그 평화가 제한된 평화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야일의 “왕 같은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평화를 누리면서도 다시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 간 사사의 모습이어서 씁쓸하다. 기드온이 이렇게 살다가 아비멜렉이 출현하지 않았던가!
-자녀들에게 풍족한 삶을 남겨 주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남겨 주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넘치도록 풍성한 삶은 아비멜렉과 같은 이단아를 낳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다시 이방 우상들에게로 넘어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평화로움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누릴 때 변질되지 않는다.” 지키라 하신 명령을 꿋꿋하게 지켜 살아낼 때, 지금 누리는 평화가 다음 세대에게도 평화가 된다. 나의 자녀들에게 남겨 줄 세상이 지금 내가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가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아비멜렉의 최후 [사사기 9:46-57]
요담의 저주가 성취되었다. 아비멜렉은 가알의 농간에 넘어간 세겜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다. 세겜 망대에 피해 있던 나머지 주민들은 엘브릿 신전의 보루(은밀한 곳)로 피신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그 보루의 입구에 불을 질러 천 명을 몰살시켰다. 이복형제 70명을 몰살시키며 왕에 오른 그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세겜 사람들마저 진멸한 것이다(46-49절).
세겜 사람들의 불의함에 대해 요담이 선포한 대로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20절)” 하신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비멜렉의 불이 세겜을 불살랐다.
아비멜렉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겜과 동맹 관계였던 데베스까지 공격한다. 데베스 주민들은 밀리고 밀려 “어느 견고한 망대”로 도망하여 결사 항전을 벌였다. 아비멜렉은 여기에서도 주민들이 가득 피신해 있는 망대를 불사르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두개골을 깨뜨린다.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 없어, 그는 무기를 든 청년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라고 하여 최후를 맞이했다. 아비멜렉을 따라 세겜을 몰살하고 데베스를 살육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기가 비로소 멈췄다(50-55절).
1. 갚으셨고, 갚으셨으니(56-57절)
사사기 저자는 이 일에 대하여 분명한 해석을 내린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자기 형제 일흔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의 값을 이렇게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죄악도 그들에게 모두 갚으셨다.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이렇게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새번역_56-57절).” “하나님께서 이같이 갚으셨고… 갚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갚으셨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나의 삶이 하나님의 때에 심판으로 갚음받는 인생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 은혜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기를 결심해 본다. 지금 당장의 명분과 이익을 따라 세겜 사람들처럼 “진실과 의로움”과는 상관없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이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붙들어야 산다!
2. 파멸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아비멜렉은 바알브릿 보루에 피신한 세겜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너희도 빨리 그대로 하여라(새번역_48절)” 말하며 나무를 찍어다 쌓았다. 백성들은 “아비멜렉을 따라” 나무를 찍어 쌓고 불을 질러 천 명을 죽인다. 형제 70명을 살해했던 아비멜렉은 이제 세겜 사람들을 몰살하는 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백성들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데베스를 점령할 때도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 주민들은 싸울 능력도 없었다. 그저 “견고한 망대”로 도망가 문만 걸어 잠글 뿐이었다. 어떤 군사적인 대항도 없었기에 아비멜렉은 망대 밑으로 직접 가서 불사르려고 했던 것이다. 방패를 든 자도 따르지 않았다. 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그의 두개골이 깨져 버렸다. 망대에서 던진 맷돌 위짝이었는데 즉사하지 않고 숨이 붙어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가 “한 여인”이었고, 여인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의식이 또렷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이 또렷했기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인의 손에 죽는 치욕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54절)” 이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병사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그저 “한 여인”에게 죽임당했다고 손가락질당할 자신뿐이었다.
그것이 치욕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어쩌면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졌어도 숨이 남아 있을 때, 도리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했다. 요담이 그리심산에서 외쳤던 그 저주를 되돌아봐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언하신 그 저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부끄러워도 “회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아비멜렉은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오직 자신의 이름과 명예만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력에만 집착하고, 그 권력이 여자에 의해 무너지는 것만 두려워하다니. 마지막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릴 정도로 자기 권력에 취한 사람의 말로가 이렇다. “너희도 보았으니… 빨리 따라 하라(48절)”며 자신을 보고 따르라 했던 백성들이 본 그의 최후는, 두개골이 깨진 비참한 시신뿐이었다.
나는?
-세겜 망대 사람들은 잔인한 아비멜렉을 피해 가장 안전하다고 믿은 ‘신전의 보루’에 몸을 숨기지만, 결국 불에 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6~49절). 그들이 세운 지도자에 의해 몰살당하고, 그들이 그토록 따르던 신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이것이 헛된 우상을 섬기고 불의한 자를 왕으로 옹립한 죄악에 대한 ‘참혹한 대가’였다. 이처럼 심판의 날에는 내가 의지하던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지켜 주지 못한다. 도리어 그것은 내 생명을 옭아매는 도구나 나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피해 선택한 최후의 장소는 엘브릿 신전의 보루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보호를 받으려고 신전의 은신처로 도망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보루에 불을 질러 그곳으로 피한 세겜 사람 약 천 명을 몰살한다. 세겜 사람들은 보호받으려고 들어간 신전 안에서,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세운 왕에게 불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긴 바알도, 기드온을 배신하고 세운 아비멜렉도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요담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저주였던 것이다.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은 그 여세를 몰아 ‘영토 확장’을 위해 데베스를 침공한다(50~55절).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데베스까지 침공한 것은 그의 잔학성과 야욕의 끝을 보게 한다. 하지만 자기 욕망 때문에 배반에 배반을, 살인에 살인을 거듭하던 아비멜렉이 무명의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허망하게 죽자, 그를 추종하던 무리도 뿔뿔이 흩어진다. 영원할 것 같던 악인의 위세와 철권통치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22절) 왕권에 취해 살다가 자기 가문과 함께 영원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가 추구하고 또 성공이라고 칭송받는 것들이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아비멜렉은 뚜렷한 이유와 명분 없이 전쟁을 확대했다. 세겜만이 아니라 주변의 데베스까지 점령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그의 폭력적인 본성 그대로였다. 데베스 사람들도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숨었지만, 아비멜렉은 세겜과 마찬가지로 불태워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망대를 불사르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던져 그 머리를 부순다. ‘한 바위’에서 형제 70명을 죽이고 세겜 사람들 천 명을 몰살한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진 ‘한 돌’에 맞아 죽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비멜렉을 심판하셨다.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56~57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의 배반과 반역, 전쟁과 죽음은 모두 그들이 행한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유예된 것일 뿐(3년, 22절) 철회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이 악에 대한 묵인은 아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인간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심판하신다. 이 땅에 여전히 악인이 득세하는 것도 즉각적인 보응이 없거나 용서를 경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죄에 눈감는다고 해서 하나님도 내 죄에 눈감으시는 것은 아니다. 축복이든 심판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고 외쳤던 요담의 질문에 답할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죽기 직전에라도 이 질문에 답했어야 했다. “내가 행한 것이 진실로 거짓되고 불의하다”고 고백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을 따르던 백성들은 요담의 호소가 어떻게 응답되는지 똑똑히 보았다. 세겜 사람들이 불과 연기에 죽어 가는 것도, 아비멜렉이 죽는 것도 보았다. 망대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은 이들도 보았고, 두개골이 깨지고 칼에 찔려 비참하게 죽은 아비멜렉의 시체도 보았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비참한 결말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과연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도 요담의 말대로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까?
*일어난 일을 보고 “무엇을 보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아침이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망대로 쫓기고 바알브릿의 보루로 쫓길 때, 요담의 저주가 생각나야 했고 그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 바알브릿의 보루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들은 끝까지 바알만 바라보았다. 요담의 선포를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말씀이 잊힌 그들에게 남은 건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세겜 사람들도 한 번에 무너지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주 짤막한 시간이 있었다. 아비멜렉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순간 직전에 아주 짧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은 “회개”의 기회였다. 염치없지만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순간이었다. 어쩌면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의 보루를 택했고, 아비멜렉은 자신의 명예를 택했다. 바알브릿이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 믿었고, 쓸데없는 명예에 집착하여 회개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행한 악행을 돌아보고, 자신이 저지른 죽음의 행보를 후회라도 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
*사사기 9장은 결국 배신을 공모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공멸로 끝났다. 이 모든 것은 요담의 저주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단호하시다. 왕이라도 악을 행하면 보응하신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고 끝까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떠나 치르는 싸움은 끝을 알 수도 없고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가족과 공동체도 바로 설 수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살리고 함께 사는 정결한 싸움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겜 사람들의 불의함에 대해 요담이 선포한 대로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20절)” 하신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비멜렉의 불이 세겜을 불살랐다.
아비멜렉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겜과 동맹 관계였던 데베스까지 공격한다. 데베스 주민들은 밀리고 밀려 “어느 견고한 망대”로 도망하여 결사 항전을 벌였다. 아비멜렉은 여기에서도 주민들이 가득 피신해 있는 망대를 불사르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두개골을 깨뜨린다.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 없어, 그는 무기를 든 청년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라고 하여 최후를 맞이했다. 아비멜렉을 따라 세겜을 몰살하고 데베스를 살육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기가 비로소 멈췄다(50-55절).
1. 갚으셨고, 갚으셨으니(56-57절)
사사기 저자는 이 일에 대하여 분명한 해석을 내린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자기 형제 일흔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의 값을 이렇게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죄악도 그들에게 모두 갚으셨다.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이렇게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새번역_56-57절).” “하나님께서 이같이 갚으셨고… 갚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갚으셨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나의 삶이 하나님의 때에 심판으로 갚음받는 인생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 은혜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기를 결심해 본다. 지금 당장의 명분과 이익을 따라 세겜 사람들처럼 “진실과 의로움”과는 상관없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이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붙들어야 산다!
2. 파멸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아비멜렉은 바알브릿 보루에 피신한 세겜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너희도 빨리 그대로 하여라(새번역_48절)” 말하며 나무를 찍어다 쌓았다. 백성들은 “아비멜렉을 따라” 나무를 찍어 쌓고 불을 질러 천 명을 죽인다. 형제 70명을 살해했던 아비멜렉은 이제 세겜 사람들을 몰살하는 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백성들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데베스를 점령할 때도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 주민들은 싸울 능력도 없었다. 그저 “견고한 망대”로 도망가 문만 걸어 잠글 뿐이었다. 어떤 군사적인 대항도 없었기에 아비멜렉은 망대 밑으로 직접 가서 불사르려고 했던 것이다. 방패를 든 자도 따르지 않았다. 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그의 두개골이 깨져 버렸다. 망대에서 던진 맷돌 위짝이었는데 즉사하지 않고 숨이 붙어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가 “한 여인”이었고, 여인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의식이 또렷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이 또렷했기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인의 손에 죽는 치욕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54절)” 이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병사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그저 “한 여인”에게 죽임당했다고 손가락질당할 자신뿐이었다.
그것이 치욕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어쩌면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졌어도 숨이 남아 있을 때, 도리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했다. 요담이 그리심산에서 외쳤던 그 저주를 되돌아봐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언하신 그 저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부끄러워도 “회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아비멜렉은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오직 자신의 이름과 명예만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력에만 집착하고, 그 권력이 여자에 의해 무너지는 것만 두려워하다니. 마지막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릴 정도로 자기 권력에 취한 사람의 말로가 이렇다. “너희도 보았으니… 빨리 따라 하라(48절)”며 자신을 보고 따르라 했던 백성들이 본 그의 최후는, 두개골이 깨진 비참한 시신뿐이었다.
나는?
-세겜 망대 사람들은 잔인한 아비멜렉을 피해 가장 안전하다고 믿은 ‘신전의 보루’에 몸을 숨기지만, 결국 불에 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6~49절). 그들이 세운 지도자에 의해 몰살당하고, 그들이 그토록 따르던 신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이것이 헛된 우상을 섬기고 불의한 자를 왕으로 옹립한 죄악에 대한 ‘참혹한 대가’였다. 이처럼 심판의 날에는 내가 의지하던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지켜 주지 못한다. 도리어 그것은 내 생명을 옭아매는 도구나 나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피해 선택한 최후의 장소는 엘브릿 신전의 보루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보호를 받으려고 신전의 은신처로 도망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보루에 불을 질러 그곳으로 피한 세겜 사람 약 천 명을 몰살한다. 세겜 사람들은 보호받으려고 들어간 신전 안에서,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세운 왕에게 불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긴 바알도, 기드온을 배신하고 세운 아비멜렉도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요담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저주였던 것이다.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은 그 여세를 몰아 ‘영토 확장’을 위해 데베스를 침공한다(50~55절).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데베스까지 침공한 것은 그의 잔학성과 야욕의 끝을 보게 한다. 하지만 자기 욕망 때문에 배반에 배반을, 살인에 살인을 거듭하던 아비멜렉이 무명의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허망하게 죽자, 그를 추종하던 무리도 뿔뿔이 흩어진다. 영원할 것 같던 악인의 위세와 철권통치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22절) 왕권에 취해 살다가 자기 가문과 함께 영원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가 추구하고 또 성공이라고 칭송받는 것들이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아비멜렉은 뚜렷한 이유와 명분 없이 전쟁을 확대했다. 세겜만이 아니라 주변의 데베스까지 점령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그의 폭력적인 본성 그대로였다. 데베스 사람들도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숨었지만, 아비멜렉은 세겜과 마찬가지로 불태워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망대를 불사르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던져 그 머리를 부순다. ‘한 바위’에서 형제 70명을 죽이고 세겜 사람들 천 명을 몰살한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진 ‘한 돌’에 맞아 죽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비멜렉을 심판하셨다.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56~57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의 배반과 반역, 전쟁과 죽음은 모두 그들이 행한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유예된 것일 뿐(3년, 22절) 철회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이 악에 대한 묵인은 아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인간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심판하신다. 이 땅에 여전히 악인이 득세하는 것도 즉각적인 보응이 없거나 용서를 경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죄에 눈감는다고 해서 하나님도 내 죄에 눈감으시는 것은 아니다. 축복이든 심판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고 외쳤던 요담의 질문에 답할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죽기 직전에라도 이 질문에 답했어야 했다. “내가 행한 것이 진실로 거짓되고 불의하다”고 고백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을 따르던 백성들은 요담의 호소가 어떻게 응답되는지 똑똑히 보았다. 세겜 사람들이 불과 연기에 죽어 가는 것도, 아비멜렉이 죽는 것도 보았다. 망대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은 이들도 보았고, 두개골이 깨지고 칼에 찔려 비참하게 죽은 아비멜렉의 시체도 보았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비참한 결말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과연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도 요담의 말대로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까?
*일어난 일을 보고 “무엇을 보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아침이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망대로 쫓기고 바알브릿의 보루로 쫓길 때, 요담의 저주가 생각나야 했고 그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 바알브릿의 보루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들은 끝까지 바알만 바라보았다. 요담의 선포를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말씀이 잊힌 그들에게 남은 건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세겜 사람들도 한 번에 무너지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주 짤막한 시간이 있었다. 아비멜렉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순간 직전에 아주 짧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은 “회개”의 기회였다. 염치없지만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순간이었다. 어쩌면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의 보루를 택했고, 아비멜렉은 자신의 명예를 택했다. 바알브릿이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 믿었고, 쓸데없는 명예에 집착하여 회개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행한 악행을 돌아보고, 자신이 저지른 죽음의 행보를 후회라도 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
*사사기 9장은 결국 배신을 공모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공멸로 끝났다. 이 모든 것은 요담의 저주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단호하시다. 왕이라도 악을 행하면 보응하신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고 끝까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떠나 치르는 싸움은 끝을 알 수도 없고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가족과 공동체도 바로 설 수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살리고 함께 사는 정결한 싸움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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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일보
2025년 06월 26일
향기로운 제물, 열한 번째 앨범 ‘살아도 죽어도’ 발매
전주지역에서 목요모임을 이끌고 있는 ‘향기로운 제물’의 열한 번째 앨범 ‘살아도 죽어도’가 발매됐다….
2026년 9월 27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9월 20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9월 13일 주보
우리를 더온누리교회 공동체로 부르신 은혜를 지금 여기에서 순종할 때, 어찌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을까요? 분주할수록 기도는 가장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2026년 05월 23일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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