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레위인의 왜곡된 증언과 이스라엘의 분열 [사사기 20:1-7]
레위인 첩의 토막 난 시신을 받아 본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격분하여 미스바에 모였다. 그리고 레위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라고 한다. 이에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고 자신의 첩을 욕보여 죽게 하였으며,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토막 난 시신의 일부와 함께 들려온 기브아의 소식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둘러 미스바로 모인 백성들 앞에서 레위인은 자신의 잘못은 쏙 빼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언만 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격동하게 되고, 결국 베냐민 지파는 육백 명만 남는 멸절 직전의 참극에 이른다(20:47). 이렇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한 레위인의 일방적인 진술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다.
1. 참으로 오랜만에 모였다!(1~2절)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신을 받아 든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총회로 모였다. 성경은 그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고 증언한다(1절). 가나안 땅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까지 나아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한마음이 되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이다.
모인 수는 칼을 빼는 보병만 자그마치 40만 명이었다(2절). 각 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미처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저마다 싸워 왔지만, 이렇게 “일제히” 모인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밖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화합보다 분열이 더 많았다. 특히 사사 입다 때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독선에 분개한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을 죽였다(12:1-6). 기드온 때에는 에브라임의 트집을 부드럽게 받아 주어 그나마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8:1-3).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 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일에는 저마다 한달음에 미스바로 모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19:30)”라며 이 일을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마음으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가 하나가 된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는 하나가 되지 못했으면서, 자기 동족을 응징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당혹스럽기도 하다.
2. 그런데 그 레위인이…(3~7절)
이렇게 한달음에 모인 백성들이 레위인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레위인은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기 입장에서 들려준다. 그런데 이 레위인의 증언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
레위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낸” 일(19:25)을 꽁꽁 감춘다. 또 불량배들은 본래 레위인과 “관계하려” 하였는데(19:22), 그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다고 말을 바꾼다(5절).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짓도 충격이지만, 이를 이스라엘에 고발하면서 시신을 토막 내어 보낸 엽기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아무런 돌이킴이 없다. 자극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증언이었다. 선동하기 위해 저지른 그의 행동은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말의 돌이킴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베냐민 지파 전체의 책임으로 부풀린다. 본문은 가해자를 “불량배들”(19:22)이라고 하는데, 레위인은 이를 “기브아 사람들”(5절)이라고 뭉뚱그려 말한다. 무엇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직접 당사자인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채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3절). 레위인은 당사자가 빠진 자리에서 그들의 해명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술한다. 베냐민 지파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증언이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 말로 하면 가짜 뉴스다.
*자신이 당한 수치를 갚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여 과장하고, 자신이 했던 행동은 증언에서 쏙 빼는 비열함이 그에게서 보인다. “그 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 내가 나의 첩의 주검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이 유산으로 받은 모든 지역으로 보낸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5-6절)”
*이기적인 비열함이 결국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비극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합당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부르짖는 레위인의 가식에 화가 난다. 자신이 직접 첩을 “붙들어 끌어내어” 능욕을 당하게 했고,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진 그녀를 차갑게 나귀에 싣고 돌아와,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19:28) 토막 내어 이스라엘에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일을 마치 정당한 것인 양,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듯이 말한다.
*자신의 비열한 행동은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기브아 불량배들이 한 짓은 마치 베냐민 지파 전체가 저지른 것인 양 매도하는 그의 언어가 큰 화를 앞당겼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이렇다면 그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 그저 참담한 심정으로 베냐민 지파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고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에둘러 이스라엘 지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위선적인 언행에 분노와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이스라엘 전역에서 ‘일제히’ 미스바로 모인다(1~2절). 무려 40만 명이 모인다. 사사기에서 온 이스라엘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레위인이 메시지를 전달한 방식은 충격적이고 기괴하였다. 무엇보다 이처럼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는 여호와 앞에 서지 않던 자들이 당시 이스라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강한 자극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웃에게로 시야를 넓히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기브아 사건’은 온 이스라엘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사건을 조사하고 방안을 숙의하며 잘못을 가려 징벌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성찰 없이 희생양 찾기에만 급급하다면, 참혹한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참담한 일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기도와 대안” 없는 날 선 비난과 정죄에 함몰되기보다, 근본 원인을 묻고 개선 방안을 찾을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런데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다(3절). 이해당사자인 그들은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 듯하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 먼저 나서서 진상을 조사하고 잘못한 자들을 처벌해야 했지만,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의를 외면하고 공동체의 연합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후 이스라엘이 불량배들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을 때도 그들은 끝내 듣지 않았다(13절). 이런 베냐민 지파의 모습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뜻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사적인 관계나 이익을 앞세워 진실을 왜곡한다면 공의와 정의는 세워질 수 없고, 공동체도 와해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실하면 불편하다. 정직하면 손해 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은 늘 모든 일에 그릇됨 없이 공평하고 진실해야 할 것이다.
-레위인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며 억울함을 토로한다(4~6절). 그의 설명은 대체로 사건의 전말에 부합하지만, 곳곳에 자기중심적인 왜곡과 과장이 섞여 있다. 첩을 무책임하게 내어 준 일은 숨기고 자신이 받은 피해만 강조한다. 죽은 첩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기브아 사람들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는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무엇보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문제로 과장한다. 마땅히 응징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이 전쟁으로까지 비화할 일인지는 좀처럼 수긍이 되지 않는다. 또한 훼손된 시신을 보내 분노를 일으키고 전쟁을 유발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판단도 회피한다. 정의로운 판단을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살피고 악한 자기중심성부터 회개해야 했다. 죄악을 고발하는 자기 행동의 정당성도 살펴야 했다.
-레위인은 의견과 대책을 내놓으라고 다그친다(7절). 그러나 그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동의하기 어렵다. 속된 말로, 자기가 말한 것이 진실의 전부라고 믿으라는 꼴이다. 사태가 심각할수록 진상을 신중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입장에 따라 보는 관점도 다르고, 대책도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40만 명이 모인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전쟁을 결의하고(8~11절), 하나님께는 누가 먼저 올라갈지만 물었다(18절). 자기 소견만 난무하는 사회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미스바 결집이었다.
-사태가 심각하고 다급할지라도 사안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대처했다면, 동족 간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공분에 차 있을 때는 누구도 현명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심 없이 공동체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모두가 공범이다. 그날 밤 레위인의 첩이 밤새 능욕당한 일을 기브아 주민들은 정말 몰랐을까?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19:22)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외쳐 대던 그 소리를 기브아 주민들이 과연 몰랐을까? 다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악행을 이전부터 겪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저 숨죽이고 있었다. 기브아 사람들은 철저히 범죄의 현장을 외면했다. 자기만 피해를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사사 시대는 이렇게 공동체성이 철저히 파괴된 시대였다.
-레위인은 자신이 욕볼까 두려워 힘없는 첩을 붙잡아 불량배들에게 끌어내 주었다(19:25). 첩이 당한 능욕은 자기 안전을 위해 저지른 비겁한 짓의 결과였다. 진정한 주범은 레위인이다.
-또 이스라엘 지파들은 어떠한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을 받는 지파에게는 무관심하더니(5:15-17), 율법을 거스른 불량배들의 죄는 심판하겠다며 득달같이 달려든다. 마치 자기는 의인이고 그들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말이다. 자신들은 의인이고 그들은 악인이라는 지극히 위험한 이분법적 시각으로 모여든다.
-자기 의견만이 정도와 진리가 되던(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17:6; 21:25) 사사 시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조차 형식적인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시킨 이들에게 기브아 불량배들의 범죄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었을 뿐, 자신들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서 철저히 멀어져 있었다.
-오늘날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과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문제는 우리의 모습이, 스스로 판단자(judge)가 되어 힘을 모아 동족을 멸하는 결정을 서슴없이 내렸던 사사 시대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없는 뉴스까지 만들어 저마다 judge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더 이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참담하다.
-어쩌면 한국 교회의 모습일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연대하여 내세우는 것들이 진리의 말씀의 가치에서 한참 벗어난 분열과 폭력이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둔갑시켜 휘두른다. 아, 사사기 묵상이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묵상하는 내내 마음이 체한 듯하다.
-레위인의 비열함이 이 시대 지도자들의 비열함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 비열함에 휘둘리는 무지한 백성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토막 난 시신의 일부와 함께 들려온 기브아의 소식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둘러 미스바로 모인 백성들 앞에서 레위인은 자신의 잘못은 쏙 빼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언만 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격동하게 되고, 결국 베냐민 지파는 육백 명만 남는 멸절 직전의 참극에 이른다(20:47). 이렇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한 레위인의 일방적인 진술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다.
1. 참으로 오랜만에 모였다!(1~2절)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신을 받아 든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총회로 모였다. 성경은 그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고 증언한다(1절). 가나안 땅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까지 나아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한마음이 되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이다.
모인 수는 칼을 빼는 보병만 자그마치 40만 명이었다(2절). 각 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미처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저마다 싸워 왔지만, 이렇게 “일제히” 모인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밖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화합보다 분열이 더 많았다. 특히 사사 입다 때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독선에 분개한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을 죽였다(12:1-6). 기드온 때에는 에브라임의 트집을 부드럽게 받아 주어 그나마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8:1-3).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 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일에는 저마다 한달음에 미스바로 모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19:30)”라며 이 일을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마음으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가 하나가 된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는 하나가 되지 못했으면서, 자기 동족을 응징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당혹스럽기도 하다.
2. 그런데 그 레위인이…(3~7절)
이렇게 한달음에 모인 백성들이 레위인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레위인은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기 입장에서 들려준다. 그런데 이 레위인의 증언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
레위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낸” 일(19:25)을 꽁꽁 감춘다. 또 불량배들은 본래 레위인과 “관계하려” 하였는데(19:22), 그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다고 말을 바꾼다(5절).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짓도 충격이지만, 이를 이스라엘에 고발하면서 시신을 토막 내어 보낸 엽기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아무런 돌이킴이 없다. 자극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증언이었다. 선동하기 위해 저지른 그의 행동은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말의 돌이킴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베냐민 지파 전체의 책임으로 부풀린다. 본문은 가해자를 “불량배들”(19:22)이라고 하는데, 레위인은 이를 “기브아 사람들”(5절)이라고 뭉뚱그려 말한다. 무엇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직접 당사자인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채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3절). 레위인은 당사자가 빠진 자리에서 그들의 해명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술한다. 베냐민 지파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증언이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 말로 하면 가짜 뉴스다.
*자신이 당한 수치를 갚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여 과장하고, 자신이 했던 행동은 증언에서 쏙 빼는 비열함이 그에게서 보인다. “그 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 내가 나의 첩의 주검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이 유산으로 받은 모든 지역으로 보낸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5-6절)”
*이기적인 비열함이 결국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비극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합당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부르짖는 레위인의 가식에 화가 난다. 자신이 직접 첩을 “붙들어 끌어내어” 능욕을 당하게 했고,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진 그녀를 차갑게 나귀에 싣고 돌아와,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19:28) 토막 내어 이스라엘에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일을 마치 정당한 것인 양,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듯이 말한다.
*자신의 비열한 행동은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기브아 불량배들이 한 짓은 마치 베냐민 지파 전체가 저지른 것인 양 매도하는 그의 언어가 큰 화를 앞당겼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이렇다면 그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 그저 참담한 심정으로 베냐민 지파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고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에둘러 이스라엘 지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위선적인 언행에 분노와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이스라엘 전역에서 ‘일제히’ 미스바로 모인다(1~2절). 무려 40만 명이 모인다. 사사기에서 온 이스라엘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레위인이 메시지를 전달한 방식은 충격적이고 기괴하였다. 무엇보다 이처럼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는 여호와 앞에 서지 않던 자들이 당시 이스라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강한 자극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웃에게로 시야를 넓히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기브아 사건’은 온 이스라엘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사건을 조사하고 방안을 숙의하며 잘못을 가려 징벌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성찰 없이 희생양 찾기에만 급급하다면, 참혹한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참담한 일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기도와 대안” 없는 날 선 비난과 정죄에 함몰되기보다, 근본 원인을 묻고 개선 방안을 찾을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런데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다(3절). 이해당사자인 그들은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 듯하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 먼저 나서서 진상을 조사하고 잘못한 자들을 처벌해야 했지만,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의를 외면하고 공동체의 연합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후 이스라엘이 불량배들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을 때도 그들은 끝내 듣지 않았다(13절). 이런 베냐민 지파의 모습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뜻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사적인 관계나 이익을 앞세워 진실을 왜곡한다면 공의와 정의는 세워질 수 없고, 공동체도 와해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실하면 불편하다. 정직하면 손해 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은 늘 모든 일에 그릇됨 없이 공평하고 진실해야 할 것이다.
-레위인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며 억울함을 토로한다(4~6절). 그의 설명은 대체로 사건의 전말에 부합하지만, 곳곳에 자기중심적인 왜곡과 과장이 섞여 있다. 첩을 무책임하게 내어 준 일은 숨기고 자신이 받은 피해만 강조한다. 죽은 첩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기브아 사람들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는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무엇보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문제로 과장한다. 마땅히 응징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이 전쟁으로까지 비화할 일인지는 좀처럼 수긍이 되지 않는다. 또한 훼손된 시신을 보내 분노를 일으키고 전쟁을 유발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판단도 회피한다. 정의로운 판단을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살피고 악한 자기중심성부터 회개해야 했다. 죄악을 고발하는 자기 행동의 정당성도 살펴야 했다.
-레위인은 의견과 대책을 내놓으라고 다그친다(7절). 그러나 그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동의하기 어렵다. 속된 말로, 자기가 말한 것이 진실의 전부라고 믿으라는 꼴이다. 사태가 심각할수록 진상을 신중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입장에 따라 보는 관점도 다르고, 대책도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40만 명이 모인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전쟁을 결의하고(8~11절), 하나님께는 누가 먼저 올라갈지만 물었다(18절). 자기 소견만 난무하는 사회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미스바 결집이었다.
-사태가 심각하고 다급할지라도 사안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대처했다면, 동족 간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공분에 차 있을 때는 누구도 현명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심 없이 공동체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모두가 공범이다. 그날 밤 레위인의 첩이 밤새 능욕당한 일을 기브아 주민들은 정말 몰랐을까?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19:22)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외쳐 대던 그 소리를 기브아 주민들이 과연 몰랐을까? 다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악행을 이전부터 겪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저 숨죽이고 있었다. 기브아 사람들은 철저히 범죄의 현장을 외면했다. 자기만 피해를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사사 시대는 이렇게 공동체성이 철저히 파괴된 시대였다.
-레위인은 자신이 욕볼까 두려워 힘없는 첩을 붙잡아 불량배들에게 끌어내 주었다(19:25). 첩이 당한 능욕은 자기 안전을 위해 저지른 비겁한 짓의 결과였다. 진정한 주범은 레위인이다.
-또 이스라엘 지파들은 어떠한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을 받는 지파에게는 무관심하더니(5:15-17), 율법을 거스른 불량배들의 죄는 심판하겠다며 득달같이 달려든다. 마치 자기는 의인이고 그들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말이다. 자신들은 의인이고 그들은 악인이라는 지극히 위험한 이분법적 시각으로 모여든다.
-자기 의견만이 정도와 진리가 되던(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17:6; 21:25) 사사 시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조차 형식적인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시킨 이들에게 기브아 불량배들의 범죄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었을 뿐, 자신들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서 철저히 멀어져 있었다.
-오늘날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과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문제는 우리의 모습이, 스스로 판단자(judge)가 되어 힘을 모아 동족을 멸하는 결정을 서슴없이 내렸던 사사 시대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없는 뉴스까지 만들어 저마다 judge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더 이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참담하다.
-어쩌면 한국 교회의 모습일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연대하여 내세우는 것들이 진리의 말씀의 가치에서 한참 벗어난 분열과 폭력이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둔갑시켜 휘두른다. 아, 사사기 묵상이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묵상하는 내내 마음이 체한 듯하다.
-레위인의 비열함이 이 시대 지도자들의 비열함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 비열함에 휘둘리는 무지한 백성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브아의 비극과 노인과 레위인의 잔혹함 [사사기 19:22-30]
17-19장은 왕이 없던 무정부 상태에서 일어난 비극적 일화를 연이어 소개한다. 17-18장이 제사장의 사유화, 곧 생계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는 제사장의 영적 탈선을 고발했다면, 19장은 레위인 제사장의 도덕적 탈선과 잔혹함을 고발한다. 레위인의 도덕적 탈선은 19장 초반부에서 다루었고, 본문은 그의 잔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친절한 노인의 환대로 즐거운 저녁을 보내던 레위인 일행에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친다. 입에 담기조차 충격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레위인이 이방인의 성읍 여부스에서 밤을 지내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안전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동족의 따뜻한 환대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했다. 환대하는 동족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충격적인 고통을 당했다.
레위인에게 극한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의 진면목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보다 못한 도덕적 수준이 드러난다. 그의 민낯이 드러날수록 마음이 불편하다. 수준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도덕적 수준뿐 아니라 그의 심성도 여지없이 까발려진다. 그의 마음이 이토록 차갑다니. 냉대한 기브아 주민들이나 몹쓸 짓을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레위인의 도덕 수준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오늘날 나와 같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이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그 성읍의 불량배들(22절)
‘불량배’는 흔히 무엇에도 속박되기 싫어하여 제멋대로 사는 자들, 곧 무가치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모습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시대는 이처럼 속절없이 타락한다. 기브아의 타락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심판밖에 남은 것이 없지 않은가?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환대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뿐 아니라, 죽음으로 다스리라고 하신 ‘동성 간의 성관계'(레 18:22; 20:13), 그리고 잔인한 집단 성폭력이다. 이들의 죄악상을 설명이라도 하듯, 히브리어 원문의 ‘그 성읍의 불량배들’은 ‘그 성읍의 사람들, 곧 벨리알의 아들들인 사람들’로 직역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번 반복된 ‘사람’은 ‘이쉬’의 복수형인 ‘안셰’인데, 이 단어를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을 뜻하는 ‘에노쉬’와 같은 어근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은 이 불량배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방탕한 무리인지를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다.
모세는 ‘제멋대로’ 살며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다른 신들에게 돌리게 하는 이런 ‘불량배'(벨리알의 아들들)가 일어나거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신 13:13-16).
2. 노인과 레위인(23-29절)
기브아 성문 광장에서 레위인 일행을 맞아들인 노인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나마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치자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는 레위인을 ‘상관’하겠다며 거칠게 위협하는 무리를 먼저 점잖게 타이른다(23절).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덧붙인다. 레위인 대신 자기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줄 테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24절)는 것이다.
레위인은 한술 더 뜬다. 노인의 제안에도 불량배들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25절), 첩을 강제로 불량배들에게 넘겨 버린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몹쓸 짓을 하다가 새벽 미명이 되어서야 악행을 멈춘다.
노인과 레위인은 모두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 딸과 첩을 소유물처럼 거래하듯 넘기려 했고, 레위인은 실제로 강제로 넘겼다. “붙잡아…끌어내매”(25절). 노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당시 세계관에 따라 자기 집에 든 손님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다고 치더라도, 자기가 살겠다고 첩을 붙잡아 문밖으로 끌어낸 레위인의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의지해야 할 아버지, 의지해야 할 남편에게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그 시대 여인들의 삶이 참으로 고달프기 그지없다. 이런 기막힌 일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시대에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비극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 통치를 온전히 따르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극이다.
레위인은 율법을 누구보다 해박하게 알았고, 그 말씀의 가치를 가르치며 살아온 선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과 무력 앞에서 너무도 무력했다. 그의 무력함은 자신의 체면과 명예와 안위를 위해 첩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비열함이었다. 노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마저 기꺼이 희생시키려 한 왜곡된 ‘환대법’에는 생명 존중도, 여성의 인권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명예만 있을 뿐이었다.
가장 극악한 이기심을 보게 되는 사건이다.
3. 악몽의 밤이 지나고… 더 큰 악몽이 시작되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본문을 읽어 내려가지만, 분노는 더욱 끓어오른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몽 같은 밤을 보낸 가련한 여인은, 강제로 “붙잡혀 끌려나간” 그 밤이 지나고 새벽 미명에야 풀려났다. 완전히 탈진한 몸을 겨우 끌고 노인의 집 앞까지 왔지만, 감히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음은 치욕스러워 레위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첩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하는 동안 레위인은 ‘편히’ 잠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나려 했다. 어디에서도 자신이 강제로 내어 준 첩에 대한 걱정을 찾아볼 수 없다. 첩을 내어 주고 확보한 안전 속에서 그가 편히 자는 동안, 그의 첩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음이 먹먹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밤새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 겨우 집 앞에 이르러 날이 밝기까지 엎드러져 있었다고 증언한다(26절).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려던 레위인은 문을 열고 나와 그녀를 보고도 너무나 차갑게 “일어나라 가자”라고 말했고, 아무 대답이 없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갔다고 기록한다(28절). 그리고 그녀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다(29절).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의 시체’로 번역된 부분에 ‘시체’라는 단어가 없다. 원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로 끝날 뿐, 그녀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헬라어 70인역이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덧붙였고, 개역개정도 이 해석을 따라 ‘시체’로 번역한 것이다. 충격적이다. 사사기 저자는 레위인의 첩이 겪은 악몽이 날이 밝으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비극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을 감추지 않는다. 그녀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을 그대로 열어 둔다.
더구나 29절에서 “거두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하자크)는 25절에서 첩을 “붙잡아”로 번역된 단어와 똑같다. 이 가련한 여인은 지난밤 남편에게 강제로 붙들려 내팽개쳐진 채 불량배들에게 능욕을 당했고, 날이 밝아 가장 안전해야 할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남편에게 붙들려 그의 손에 능욕의 대상이 되고 만다.
원문을 따라 읽으면, 레위인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해 탈진한 그녀를 죽이고 열두 덩이로 나누어 온 이스라엘에 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지난밤 당한 불명예를 복수하려 한다. 겉으로는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을 알려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레위인이 원한 것은 기브아 불량배들뿐 아니라 베냐민 지파 전체에 대한 복수였다.
가련한 여인은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과 즐거움도 잠시,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쳐 레위인을 요구한다(22절). 그들에게 레위인 일행은 섬겨야 할 ‘나그네’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채울 ‘대상’에 불과했다. 레위인은 ‘환대’를 기대한 곳에서 ‘폭행’을 당한다. 이방 성읍을 피해 이스라엘 지경으로 왔는데, 그곳은 소돔과 다를 바 없었다. 부정한 가나안 백성의 삶을 답습하는, 이방인보다 더 악한 이스라엘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지만(12절), 그에 걸맞은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불량배들의 요구에 노인은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대신 내주겠다고 제안한다(23-24절). 손님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고육지책이지만, 악을 악으로 막으려는 어리석은 타협에 불과하다. 또한 이는 기브아에 우거하는 노인마저 그 성읍의 가치관에 얼마나 물들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체제가 무너지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21:25). 말씀의 부재가 ‘가치의 혼돈’과 ‘윤리의 실종’을 낳았다. 기브아 사건이 보여 주는 실태를 바라보며, 나에게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불의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노인의 시각과 태도도 무너진 이스라엘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비류들의 악행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남자들이 보호해야 할 딸과 아내가 이 노인에게는 남자들의 안전을 지켜 주는 희생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정도의 차이나 양상만 다를 뿐, 불량배나 노인 모두 강자의 횡포와 갑질을 정당화하는 가나안 문화에 젖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레위인은 강제로 자신의 첩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아 버린다. 기브아의 비류들은 밤새 레위인의 첩을 폭행했고, 그녀는 간신히 집까지 이르렀지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문지방에 손을 걸친 채 쓰러진다.
-밤새 성적으로 유린당한 여인은 새벽에야 악한 무리에게서 놓인다. 첩을 비류들에게 넘겨주고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레위인은 첩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도 태연히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25-28절). 비겁하고 비정하며 비열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을 통해 그가 속한 땅이 정결해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는 도리어 이 참극의 방관자이자 주범이 되었다. 이 비극적 결말은 언약을 배반하고 망령된 행위도 서슴지 않은 가증한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경종일 것이다.
-레위인은 첩의 몸을 쪼개(삼상 11:7 참조) 이스라엘 전역에 보내 이 잔혹한 사건을 알린다(29-30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적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신앙의 타락(17-18장)에 이어 윤리의 추락까지, 어느 것 하나 성한 것 없이 총체적으로 망가진 이스라엘의 가련한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철저히 자기 이익에 몰두해 행동하는 레위인의 비열한 모습이 충격적이다. 그는 냉혈한이었다. 그러니 비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깨닫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약자 중의 약자를 사지로 내모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모양만 다를 뿐 무수한 예가 이미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 자기 본능을 채우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도 이미 넘치고 넘친다. 이런 세상 속에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런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라는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사명에 게으르지 말아야겠다.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일이 기브아에서 벌어졌다. 가나안 땅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땅이 아니라, 이미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 버렸다. 차이가 있다면 찾아온 이가 천사가 아니라 레위인 일행이었기에 이 잔악한 일이 멈추지 않았고, 결국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기브아를 찾은 레위인에게는 전대미문의 일이었겠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도 그랬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악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기브아는 이미 소돔이었고, 고모라였다.
-노인과 레위인, 불량배들은 역할만 다를 뿐 모두 악했다. 레위인의 첩이 비극적으로 죽은 책임은 불량배들에게만 있지 않다. 노인과 레위인에게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 기브아의 악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할 때 그 책임을 불량배들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 노인은 겉으로는 환대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롯이 두 딸을 내어 주겠다고 흥정한 것처럼 그의 마음에는 이미 자신의 체면을 위해 딸의 안전마저 서슴없이 내버리는 악함이 있었다. 레위인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넘겼다. 불량배들은 동성 간의 관계를 요구하다가 집단 성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밤새 능욕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악이 얼마나 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레위인이 기브아에서 일어난 일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인의 몸을 열두 덩이로 훼손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를 촉구하는 행동도,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고통당하는 자의 절규도 아니다. 자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 손에 죽었을지도 모를 가련한 여인의 몸을 훼손한 극악한 행동일 뿐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보다 더 악한 이가 바로 레위인이다!
-이 참담한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권이 철저히 짓밟히고, 자신의 이익과 체면과 명분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며 그것을 합리화하는 사사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누구보다 잔혹한 악인인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친절한 노인의 환대로 즐거운 저녁을 보내던 레위인 일행에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친다. 입에 담기조차 충격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레위인이 이방인의 성읍 여부스에서 밤을 지내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안전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동족의 따뜻한 환대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했다. 환대하는 동족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충격적인 고통을 당했다.
레위인에게 극한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의 진면목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보다 못한 도덕적 수준이 드러난다. 그의 민낯이 드러날수록 마음이 불편하다. 수준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도덕적 수준뿐 아니라 그의 심성도 여지없이 까발려진다. 그의 마음이 이토록 차갑다니. 냉대한 기브아 주민들이나 몹쓸 짓을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레위인의 도덕 수준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오늘날 나와 같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이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그 성읍의 불량배들(22절)
‘불량배’는 흔히 무엇에도 속박되기 싫어하여 제멋대로 사는 자들, 곧 무가치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모습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시대는 이처럼 속절없이 타락한다. 기브아의 타락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심판밖에 남은 것이 없지 않은가?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환대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뿐 아니라, 죽음으로 다스리라고 하신 ‘동성 간의 성관계'(레 18:22; 20:13), 그리고 잔인한 집단 성폭력이다. 이들의 죄악상을 설명이라도 하듯, 히브리어 원문의 ‘그 성읍의 불량배들’은 ‘그 성읍의 사람들, 곧 벨리알의 아들들인 사람들’로 직역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번 반복된 ‘사람’은 ‘이쉬’의 복수형인 ‘안셰’인데, 이 단어를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을 뜻하는 ‘에노쉬’와 같은 어근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은 이 불량배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방탕한 무리인지를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다.
모세는 ‘제멋대로’ 살며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다른 신들에게 돌리게 하는 이런 ‘불량배'(벨리알의 아들들)가 일어나거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신 13:13-16).
2. 노인과 레위인(23-29절)
기브아 성문 광장에서 레위인 일행을 맞아들인 노인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나마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치자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는 레위인을 ‘상관’하겠다며 거칠게 위협하는 무리를 먼저 점잖게 타이른다(23절).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덧붙인다. 레위인 대신 자기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줄 테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24절)는 것이다.
레위인은 한술 더 뜬다. 노인의 제안에도 불량배들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25절), 첩을 강제로 불량배들에게 넘겨 버린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몹쓸 짓을 하다가 새벽 미명이 되어서야 악행을 멈춘다.
노인과 레위인은 모두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 딸과 첩을 소유물처럼 거래하듯 넘기려 했고, 레위인은 실제로 강제로 넘겼다. “붙잡아…끌어내매”(25절). 노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당시 세계관에 따라 자기 집에 든 손님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다고 치더라도, 자기가 살겠다고 첩을 붙잡아 문밖으로 끌어낸 레위인의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의지해야 할 아버지, 의지해야 할 남편에게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그 시대 여인들의 삶이 참으로 고달프기 그지없다. 이런 기막힌 일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시대에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비극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 통치를 온전히 따르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극이다.
레위인은 율법을 누구보다 해박하게 알았고, 그 말씀의 가치를 가르치며 살아온 선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과 무력 앞에서 너무도 무력했다. 그의 무력함은 자신의 체면과 명예와 안위를 위해 첩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비열함이었다. 노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마저 기꺼이 희생시키려 한 왜곡된 ‘환대법’에는 생명 존중도, 여성의 인권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명예만 있을 뿐이었다.
가장 극악한 이기심을 보게 되는 사건이다.
3. 악몽의 밤이 지나고… 더 큰 악몽이 시작되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본문을 읽어 내려가지만, 분노는 더욱 끓어오른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몽 같은 밤을 보낸 가련한 여인은, 강제로 “붙잡혀 끌려나간” 그 밤이 지나고 새벽 미명에야 풀려났다. 완전히 탈진한 몸을 겨우 끌고 노인의 집 앞까지 왔지만, 감히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음은 치욕스러워 레위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첩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하는 동안 레위인은 ‘편히’ 잠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나려 했다. 어디에서도 자신이 강제로 내어 준 첩에 대한 걱정을 찾아볼 수 없다. 첩을 내어 주고 확보한 안전 속에서 그가 편히 자는 동안, 그의 첩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음이 먹먹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밤새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 겨우 집 앞에 이르러 날이 밝기까지 엎드러져 있었다고 증언한다(26절).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려던 레위인은 문을 열고 나와 그녀를 보고도 너무나 차갑게 “일어나라 가자”라고 말했고, 아무 대답이 없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갔다고 기록한다(28절). 그리고 그녀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다(29절).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의 시체’로 번역된 부분에 ‘시체’라는 단어가 없다. 원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로 끝날 뿐, 그녀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헬라어 70인역이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덧붙였고, 개역개정도 이 해석을 따라 ‘시체’로 번역한 것이다. 충격적이다. 사사기 저자는 레위인의 첩이 겪은 악몽이 날이 밝으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비극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을 감추지 않는다. 그녀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을 그대로 열어 둔다.
더구나 29절에서 “거두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하자크)는 25절에서 첩을 “붙잡아”로 번역된 단어와 똑같다. 이 가련한 여인은 지난밤 남편에게 강제로 붙들려 내팽개쳐진 채 불량배들에게 능욕을 당했고, 날이 밝아 가장 안전해야 할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남편에게 붙들려 그의 손에 능욕의 대상이 되고 만다.
원문을 따라 읽으면, 레위인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해 탈진한 그녀를 죽이고 열두 덩이로 나누어 온 이스라엘에 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지난밤 당한 불명예를 복수하려 한다. 겉으로는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을 알려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레위인이 원한 것은 기브아 불량배들뿐 아니라 베냐민 지파 전체에 대한 복수였다.
가련한 여인은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과 즐거움도 잠시,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쳐 레위인을 요구한다(22절). 그들에게 레위인 일행은 섬겨야 할 ‘나그네’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채울 ‘대상’에 불과했다. 레위인은 ‘환대’를 기대한 곳에서 ‘폭행’을 당한다. 이방 성읍을 피해 이스라엘 지경으로 왔는데, 그곳은 소돔과 다를 바 없었다. 부정한 가나안 백성의 삶을 답습하는, 이방인보다 더 악한 이스라엘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지만(12절), 그에 걸맞은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불량배들의 요구에 노인은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대신 내주겠다고 제안한다(23-24절). 손님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고육지책이지만, 악을 악으로 막으려는 어리석은 타협에 불과하다. 또한 이는 기브아에 우거하는 노인마저 그 성읍의 가치관에 얼마나 물들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체제가 무너지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21:25). 말씀의 부재가 ‘가치의 혼돈’과 ‘윤리의 실종’을 낳았다. 기브아 사건이 보여 주는 실태를 바라보며, 나에게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불의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노인의 시각과 태도도 무너진 이스라엘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비류들의 악행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남자들이 보호해야 할 딸과 아내가 이 노인에게는 남자들의 안전을 지켜 주는 희생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정도의 차이나 양상만 다를 뿐, 불량배나 노인 모두 강자의 횡포와 갑질을 정당화하는 가나안 문화에 젖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레위인은 강제로 자신의 첩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아 버린다. 기브아의 비류들은 밤새 레위인의 첩을 폭행했고, 그녀는 간신히 집까지 이르렀지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문지방에 손을 걸친 채 쓰러진다.
-밤새 성적으로 유린당한 여인은 새벽에야 악한 무리에게서 놓인다. 첩을 비류들에게 넘겨주고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레위인은 첩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도 태연히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25-28절). 비겁하고 비정하며 비열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을 통해 그가 속한 땅이 정결해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는 도리어 이 참극의 방관자이자 주범이 되었다. 이 비극적 결말은 언약을 배반하고 망령된 행위도 서슴지 않은 가증한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경종일 것이다.
-레위인은 첩의 몸을 쪼개(삼상 11:7 참조) 이스라엘 전역에 보내 이 잔혹한 사건을 알린다(29-30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적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신앙의 타락(17-18장)에 이어 윤리의 추락까지, 어느 것 하나 성한 것 없이 총체적으로 망가진 이스라엘의 가련한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철저히 자기 이익에 몰두해 행동하는 레위인의 비열한 모습이 충격적이다. 그는 냉혈한이었다. 그러니 비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깨닫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약자 중의 약자를 사지로 내모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모양만 다를 뿐 무수한 예가 이미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 자기 본능을 채우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도 이미 넘치고 넘친다. 이런 세상 속에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런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라는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사명에 게으르지 말아야겠다.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일이 기브아에서 벌어졌다. 가나안 땅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땅이 아니라, 이미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 버렸다. 차이가 있다면 찾아온 이가 천사가 아니라 레위인 일행이었기에 이 잔악한 일이 멈추지 않았고, 결국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기브아를 찾은 레위인에게는 전대미문의 일이었겠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도 그랬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악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기브아는 이미 소돔이었고, 고모라였다.
-노인과 레위인, 불량배들은 역할만 다를 뿐 모두 악했다. 레위인의 첩이 비극적으로 죽은 책임은 불량배들에게만 있지 않다. 노인과 레위인에게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 기브아의 악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할 때 그 책임을 불량배들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 노인은 겉으로는 환대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롯이 두 딸을 내어 주겠다고 흥정한 것처럼 그의 마음에는 이미 자신의 체면을 위해 딸의 안전마저 서슴없이 내버리는 악함이 있었다. 레위인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넘겼다. 불량배들은 동성 간의 관계를 요구하다가 집단 성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밤새 능욕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악이 얼마나 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레위인이 기브아에서 일어난 일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인의 몸을 열두 덩이로 훼손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를 촉구하는 행동도,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고통당하는 자의 절규도 아니다. 자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 손에 죽었을지도 모를 가련한 여인의 몸을 훼손한 극악한 행동일 뿐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보다 더 악한 이가 바로 레위인이다!
-이 참담한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권이 철저히 짓밟히고, 자신의 이익과 체면과 명분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며 그것을 합리화하는 사사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누구보다 잔혹한 악인인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브아의 노인과 레위인의 대조적인 삶 [사사기 19:11-21]
닷새 만에, 그것도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에 길을 나선 레위인은, 곧 해가 질 것을 우려한 종이 여부스에서 하룻밤을 묵자고 제안하자 이를 거절하고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서 유숙하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기브아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져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나그네를 대접할 이를 기다렸지만,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다(11-15절).
하지만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한 노인의 눈에 띄어, 노인이 레위인 일행을 맞아들인다. 그 노인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이었지만, 베냐민 자손들이 사는 기브아에 거류하고 있었다(16절).
1. 나그네였기에 나그네를 돌아보아야…
나그네를 돌아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 22:21)” 하나님께서는 동족뿐 아니라 이방인 나그네까지 돌보라고 하셨다.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15절)” 기브아 사람들은 이방인도 아닌 같은 동족조차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그들은 ‘나그네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노인만이 밖에서 노숙할 위기에 놓인 레위인을 영접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2. 헛똑똑이 레위인…
그는 장인에게 5일 동안 대접만 받았다. 그러고는 기어이 오후에 출발하여 길을 가다가, 유숙할 곳을 정할 때 여부스는 거절하고 기브아나 라마를 선택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12절)” 레위인으로서 엉망인 삶을 살면서도 이방인의 땅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이 자세는 무엇일까? 행음한 첩을 곁에 두는 일에는 열심이면서 이방 땅은 부정하다며 멀리하고, 장인의 접대에 5일이나 머무를 만큼 섬기기보다 대접받는 데 익숙한 그는, 이방인보다 동족에게 더 융숭한 영접을 받으리라 기대하며 여부스를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땅보다 자기 민족의 땅이 더 안전하리라는 생각은 이내 함정이 되고 만다. 기브아에는 레위인 일행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늦게라도 밭에서 일하다 들어오는 노인의 환대를 받았지만, 그마저도 자기가 거류하던 에브라임 산지에서 온 노인이었다. 기브아 주민들은 냉담했다. 자신의 삶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하는 일에 게을렀던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무관심과 냉대로 되돌려 준다. 레위인은 겉만 번드르르한 헛똑똑이다.
3. 환대한 노인…
이스라엘은 공동체였다. 무수한 위기와 어려움이 있었어도 이스라엘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약자에 대한 보호와 긍휼의 의무”를 꿋꿋이 감당했기 때문이었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중요한 지침이었다.
그런데 사사 시대는 이 가치가 여지없이 허물어진 시대였다. 그 많은 기브아 사람 중에 성문 앞 넓은 광장에 앉아 환대를 기다리는 레위인 일행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본문의 노인은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들을 발견한다. 그는 에브라임 사람으로 베냐민 땅 기브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유야 어찌 됐든 레위인 일행은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노인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 중 하나인 ‘나그네를 영접하고 섬기는 일’을, 변질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속에서도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도 꿋꿋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치를 지키는 이는 어느 곳에나 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내가 이곳에서 이 가치를 지키며 살아 내기를 소망한다.
나는?
*레위인은 오후 늦게 장인의 집에서 출발하였기에 결국 에브라임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하룻밤 머물기 위해 동족 베냐민 자손이 사는 기브아에 들어갔으나 냉대를 당했다. 하지만 다행히 에브라임 출신으로 그곳에 거류하던 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레위인은 가까운 예루살렘 성읍에서 유하자는 종의 제안을 거절한다(11~13절). 선민이 이방 성읍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방인을 부정하다며 멀리하면서 행음한 여인을 곁에 두는 것은 그의 위선적인 신앙을 부각할 뿐이다. 또한 그의 편견은 합리적인 제안마저 묵살하게 만든다. 정치적 이유든, 종교적 편견이든, 교육과 성장 배경 때문이든, 선입견과 배타심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나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지나치게 엄격할 때, 누구든지 ‘편협한 위선자’가 될 것이다.
*여부스 사람들이 사는 예루살렘이 아닌 기브아로, 신앙적 소신에 따라 무리하여 도착했지만 그들의 냉대는 밤공기만큼이나 차갑기만 했다. 자신들을 반겨 주리라는 레위인의 기대는 무너지고, 동족을 믿었던 그의 마음에는 당혹감이 물밀듯 밀려왔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언약 규정은 이미 퇴색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레위인 일행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에브라임 출신의 한 노인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씻을 물과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한다(16~21절). 타향살이에 대한 동병상련이기도 하겠으나, 그의 남다른 관심(‘눈을 들어’)과 호의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언약 백성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는 치열한 생존과 경쟁 속에서 이웃과 지체를 향한 무관심과 이기심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내게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도움이 필요하기에 곁에 있어 주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레위인의 결정과 삶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반면 노인의 삶은 기브아 사람들이나 레위인의 삶과 달랐다.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 가치에서 급속히 떠나가도 꿋꿋이 “환대법”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이 감사하다. 모두가 냉대하는 그 현장에서 그는 따뜻한 환대와 섬김의 손길을 내민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환대와 포용의 순종을 통해 세상에 소망을 주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하리라.
하지만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한 노인의 눈에 띄어, 노인이 레위인 일행을 맞아들인다. 그 노인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이었지만, 베냐민 자손들이 사는 기브아에 거류하고 있었다(16절).
1. 나그네였기에 나그네를 돌아보아야…
나그네를 돌아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 22:21)” 하나님께서는 동족뿐 아니라 이방인 나그네까지 돌보라고 하셨다.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15절)” 기브아 사람들은 이방인도 아닌 같은 동족조차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그들은 ‘나그네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노인만이 밖에서 노숙할 위기에 놓인 레위인을 영접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2. 헛똑똑이 레위인…
그는 장인에게 5일 동안 대접만 받았다. 그러고는 기어이 오후에 출발하여 길을 가다가, 유숙할 곳을 정할 때 여부스는 거절하고 기브아나 라마를 선택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12절)” 레위인으로서 엉망인 삶을 살면서도 이방인의 땅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이 자세는 무엇일까? 행음한 첩을 곁에 두는 일에는 열심이면서 이방 땅은 부정하다며 멀리하고, 장인의 접대에 5일이나 머무를 만큼 섬기기보다 대접받는 데 익숙한 그는, 이방인보다 동족에게 더 융숭한 영접을 받으리라 기대하며 여부스를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땅보다 자기 민족의 땅이 더 안전하리라는 생각은 이내 함정이 되고 만다. 기브아에는 레위인 일행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늦게라도 밭에서 일하다 들어오는 노인의 환대를 받았지만, 그마저도 자기가 거류하던 에브라임 산지에서 온 노인이었다. 기브아 주민들은 냉담했다. 자신의 삶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하는 일에 게을렀던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무관심과 냉대로 되돌려 준다. 레위인은 겉만 번드르르한 헛똑똑이다.
3. 환대한 노인…
이스라엘은 공동체였다. 무수한 위기와 어려움이 있었어도 이스라엘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약자에 대한 보호와 긍휼의 의무”를 꿋꿋이 감당했기 때문이었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중요한 지침이었다.
그런데 사사 시대는 이 가치가 여지없이 허물어진 시대였다. 그 많은 기브아 사람 중에 성문 앞 넓은 광장에 앉아 환대를 기다리는 레위인 일행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본문의 노인은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들을 발견한다. 그는 에브라임 사람으로 베냐민 땅 기브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유야 어찌 됐든 레위인 일행은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노인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 중 하나인 ‘나그네를 영접하고 섬기는 일’을, 변질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속에서도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도 꿋꿋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치를 지키는 이는 어느 곳에나 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내가 이곳에서 이 가치를 지키며 살아 내기를 소망한다.
나는?
*레위인은 오후 늦게 장인의 집에서 출발하였기에 결국 에브라임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하룻밤 머물기 위해 동족 베냐민 자손이 사는 기브아에 들어갔으나 냉대를 당했다. 하지만 다행히 에브라임 출신으로 그곳에 거류하던 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레위인은 가까운 예루살렘 성읍에서 유하자는 종의 제안을 거절한다(11~13절). 선민이 이방 성읍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방인을 부정하다며 멀리하면서 행음한 여인을 곁에 두는 것은 그의 위선적인 신앙을 부각할 뿐이다. 또한 그의 편견은 합리적인 제안마저 묵살하게 만든다. 정치적 이유든, 종교적 편견이든, 교육과 성장 배경 때문이든, 선입견과 배타심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나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지나치게 엄격할 때, 누구든지 ‘편협한 위선자’가 될 것이다.
*여부스 사람들이 사는 예루살렘이 아닌 기브아로, 신앙적 소신에 따라 무리하여 도착했지만 그들의 냉대는 밤공기만큼이나 차갑기만 했다. 자신들을 반겨 주리라는 레위인의 기대는 무너지고, 동족을 믿었던 그의 마음에는 당혹감이 물밀듯 밀려왔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언약 규정은 이미 퇴색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레위인 일행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에브라임 출신의 한 노인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씻을 물과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한다(16~21절). 타향살이에 대한 동병상련이기도 하겠으나, 그의 남다른 관심(‘눈을 들어’)과 호의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언약 백성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는 치열한 생존과 경쟁 속에서 이웃과 지체를 향한 무관심과 이기심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내게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도움이 필요하기에 곁에 있어 주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레위인의 결정과 삶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반면 노인의 삶은 기브아 사람들이나 레위인의 삶과 달랐다.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 가치에서 급속히 떠나가도 꿋꿋이 “환대법”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이 감사하다. 모두가 냉대하는 그 현장에서 그는 따뜻한 환대와 섬김의 손길을 내민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환대와 포용의 순종을 통해 세상에 소망을 주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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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무언 _ 레위인과 첩의 타락과 공동체의 붕괴 [사사기 19:1-10]
19장부터 21장까지는 기브아 거민들이 레위인의 첩에게 저지른 몹쓸 짓에서 비롯된 동족상잔과, 그로 인한 베냐민 지파의 붕괴를 다룬다. 18장에서 단 지파가 하나님만 섬기는 삶과 분배받은 땅을 스스로 버리고 고립을 선택한 모습,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붕괴는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이 얼마나 급속히 무너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상실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역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1절)”로 시작하는 본문은, 18장에서 모세의 손자로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 준 데 이어, 특히 당시 레위인들이 그 사명과 본분을 얼마나 잊어버렸는지를 가감 없이 고발한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이끄시고 모든 초태생에 대한 소유권을 말씀하셨다(민 3:13). 그런데 혈통으로 보면 이스라엘 지파의 장자는 당연히 르우벤이 되어야 했지만, 그는 빌하와의 간통으로 인해 장자의 권리를 상실했다(창 35:22, 49:1-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장자 역할을 하게 하셨다(민 3:12). 그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에게는 제사장의 직임을, 나머지 자손들에게는 제사장을 도와 거룩한 제사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셨다. 이는 제사를 준비하는 일, 성막을 돌보는 일, 그리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성막이 자리 잡은 실로와 함께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가나안 땅 전역의 48개 성읍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이 율법대로 살아가도록 지도하며 돕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의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제물과 십일조로 유지되도록 하셨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1절)” 그런데 본문은 이 레위인이 어느 성읍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거류(게르)”는 “머무르다, 체류하다”라는 기본 의미가 있지만, 주로 ‘혈족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즉, 이 레위인은 자기 가족이 있는 곳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치열한 분쟁이 여전한 가운데 스스로 산지로 숨어들었는지, 아니면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아무튼 레위인으로서 백성의 본이 되고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본문에서 ‘첩’으로 번역된 단어는 “필레게쉬”인데, “지위는 낮지만 정식 아내”로 인식되었다. 두 번째 아내인지, 그 이상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대 가나안 지역에서 첩을 얻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삶을 살아야 할 레위인이 ‘첩’을 맞이했다는 것은, 그가 거룩함으로 구별된 삶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넉 달 동안 지냈다(2절).” 개역개정이 “행음”으로 번역한 단어 “자나”는 “간음하다, 매춘하다, 창녀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화를 내다, 싫어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다정하게 말하여 데려오고자 하여(3절)’라는 본문의 문맥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한편 전통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첩의 행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뜻이 된다. 더구나 이런 첩에게 가서 “다정히 데려오고자(3절)” 했다는 것은 레위인 또한 어느 정도 첩의 행음에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어찌 되었든, 레위인의 구별되지 못한 삶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살아야 할 이 레위인은 웬일인지 에브라임 산지, 그것도 구석에 “거류”하고 있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사는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미가의 제사장이었다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도 “거류”할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미가의 집에 채용되었고, 이후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착하라고 주신 성읍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성읍에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었다.
*산지 구석에서 행음을 했다면 이미 지역 사회에 알려질 대로 알려졌을 것이다. 더구나 레위인의 첩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이런 행음을 즐겼다면, 이는 그의 삶이 레위인의 정체성에서 얼마나 변질되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냈다. 죄가 관영할수록 죄에 대한 마음은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더 대담하게 죄의 유혹을 즐기기 마련이다. 이는 산지 구석 공동체의 삶도 결코 거룩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회 전체가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나는?
-‘레위인과 첩의 이야기’는 신앙과 윤리가 실종된 이스라엘의 민낯을 보여 준다(1절). 첩을 취하는 것은 단지 성적 타락일 뿐 아니라, 당시 ‘부와 지위(8:31)’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언약 규정에 깨어 있어야 할 지도자가 안일과 방종에 묻혀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 시대의 절망을 엿볼 수 있다.
-레위인은 베들레헴에 가 있는 여인의 마음을 달래어 집으로 데려오려고 길을 떠났다(1~3절). 첩의 마음을 되돌리려 조바심 내는 것도 문제지만, 행음하고 떠난 첩을 다시 데려오는 레위인의 태도는 더 큰 문제로 보인다. 최소한의 분별력조차 상실한 불순종이기 때문이다(레 21:7~9). 하나님의 요구보다 자신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말씀을 떠나 소욕을 따라 살고, 의로운 판단 대신 부정한 감정에 매여 있다면 이미 분별력을 잃은 것이다. 내 선택과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의 기준을 낮추려 하기보다 나의 완악한 마음을 분별하고 낮추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당시 첩을 두는 것은 아내가 불임인 경우 암묵적으로 용인되었지만, 이 레위인은 성적 만족을 위해 첩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첩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아서, 첩이 친정으로 돌아가 넉 달이나 소식을 끊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보아 이 레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사 시대의 전형이 아닐까?
-첩의 집에 도착한 레위인은 장인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4절). 이런 환대는 딸의 허물을 물질적 보상으로 무마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장인의 음흉한 동기를 모르는지 레위인은 먹고 마시며 정신없이 사흘을 보낸다. 기독교가 세상의 환영을 받는 것은 감탄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서로 다른 왕을 섬기고 서로 다른 가치 체계를 가진 세상이 호의와 환대를 보일 때는 그 의도가 불순할 가능성이 크다. 세상이 주는 거짓의 잔에 취해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나친 접대에는 반드시 부당한 요구가 따르기 마련이다.
-장인은 딸을 데리러 온 사위를 극진히 환대했다. 그 환대는 무려 5일 동안 이어졌다(5~10절). 이 과정에서 레위인에게서는 단호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장인의 강권을 물리치지 못해 체류를 늘려 갔다.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레위인의 사명보다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는 장인의 말에 더 마음을 주었다. 이런 레위인의 모습이 오늘날 나와 같은 목사의 모습은 아닐까?
-여지를 주는 순간 세상은 신앙의 발목을 잡는다. 의지를 굽히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주면 거절할 수 없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타락과 방종, 무지와 무감각의 세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명의 삶에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레위인은 다섯째 날이 되어도 보내 주지 않을 기세인 장인의 무리한 환대를 마침내 거절하고, 오후가 되었는데도 무리하여 출발한다. 이 시간에 출발하면 날이 밝을 때 에브라임에 도착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일단 출발한 것이다. 뭔가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사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들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먼저 배경이 에브라임 산지이다. 또 주인공이 레위 사람이고, 베들레헴과도 연관이 있다. 모세의 손자 요나단은 베들레헴에 살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갔고, 이 레위인은 에브라임에서 베들레헴으로 이동했다. 또 모두 범죄와 관련이 있는데, 요나단은 “우상 숭배”, 이 레위인은 “음행”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에브라임 산지는 가나안 땅의 중심부이다. 이 사건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중심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장자 역할을 맡은 레위 지파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모두 레위인 본연의 삶과 상관없는 데서 출발했다. 배치받은 곳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고 싶은 곳에 살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즐기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본문에서 주목해 볼 레위인의 모습은 “우유부단함”이다. 행음하고 처가로 피신한 첩을 데려오려고, 첩이 떠난 지 넉 달 만에야 베들레헴으로 내려간 일이 그렇다. 또 장인과 나흘이 넘도록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아침에는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오후까지 즐기다가 다시 미루는 일이 무려 4일 동안 반복되었다. 5일째에도 역시 아침에 출발하려다 미루었고, 저녁이 다 되어서야 굳이 출발했다. 첩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미루다 미루다 결국 화를 당한 것이다. 사사 시대의 핵심을 보는 듯하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며 그 길에서 돌아서기를 미루다 미루다 결국 “기브아의 밤”을 만난다.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다. 지금 누리는 재미에 마음이 붙잡혀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마음의 외침에도 돌이키기를 미루다 미루다 결국 화를 당한다. 애초에 무너진 거룩의 삶도 문제지만, 박차고 일어날 때를 미루고 미루면 결국 기브아의 비극적인 밤이 엄습한다. 이것이 사사 시대이다.
*레위인의 모습에 “유구무언”이다. 이 참담한 모습에 도무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이런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추악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재미있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써 갈 때, 세상은 그런 공동체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역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1절)”로 시작하는 본문은, 18장에서 모세의 손자로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 준 데 이어, 특히 당시 레위인들이 그 사명과 본분을 얼마나 잊어버렸는지를 가감 없이 고발한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이끄시고 모든 초태생에 대한 소유권을 말씀하셨다(민 3:13). 그런데 혈통으로 보면 이스라엘 지파의 장자는 당연히 르우벤이 되어야 했지만, 그는 빌하와의 간통으로 인해 장자의 권리를 상실했다(창 35:22, 49:1-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장자 역할을 하게 하셨다(민 3:12). 그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에게는 제사장의 직임을, 나머지 자손들에게는 제사장을 도와 거룩한 제사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셨다. 이는 제사를 준비하는 일, 성막을 돌보는 일, 그리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성막이 자리 잡은 실로와 함께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가나안 땅 전역의 48개 성읍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이 율법대로 살아가도록 지도하며 돕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의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제물과 십일조로 유지되도록 하셨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1절)” 그런데 본문은 이 레위인이 어느 성읍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거류(게르)”는 “머무르다, 체류하다”라는 기본 의미가 있지만, 주로 ‘혈족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즉, 이 레위인은 자기 가족이 있는 곳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치열한 분쟁이 여전한 가운데 스스로 산지로 숨어들었는지, 아니면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아무튼 레위인으로서 백성의 본이 되고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본문에서 ‘첩’으로 번역된 단어는 “필레게쉬”인데, “지위는 낮지만 정식 아내”로 인식되었다. 두 번째 아내인지, 그 이상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대 가나안 지역에서 첩을 얻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삶을 살아야 할 레위인이 ‘첩’을 맞이했다는 것은, 그가 거룩함으로 구별된 삶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넉 달 동안 지냈다(2절).” 개역개정이 “행음”으로 번역한 단어 “자나”는 “간음하다, 매춘하다, 창녀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화를 내다, 싫어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다정하게 말하여 데려오고자 하여(3절)’라는 본문의 문맥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한편 전통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첩의 행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뜻이 된다. 더구나 이런 첩에게 가서 “다정히 데려오고자(3절)” 했다는 것은 레위인 또한 어느 정도 첩의 행음에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어찌 되었든, 레위인의 구별되지 못한 삶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살아야 할 이 레위인은 웬일인지 에브라임 산지, 그것도 구석에 “거류”하고 있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사는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미가의 제사장이었다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도 “거류”할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미가의 집에 채용되었고, 이후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착하라고 주신 성읍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성읍에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었다.
*산지 구석에서 행음을 했다면 이미 지역 사회에 알려질 대로 알려졌을 것이다. 더구나 레위인의 첩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이런 행음을 즐겼다면, 이는 그의 삶이 레위인의 정체성에서 얼마나 변질되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냈다. 죄가 관영할수록 죄에 대한 마음은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더 대담하게 죄의 유혹을 즐기기 마련이다. 이는 산지 구석 공동체의 삶도 결코 거룩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회 전체가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나는?
-‘레위인과 첩의 이야기’는 신앙과 윤리가 실종된 이스라엘의 민낯을 보여 준다(1절). 첩을 취하는 것은 단지 성적 타락일 뿐 아니라, 당시 ‘부와 지위(8:31)’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언약 규정에 깨어 있어야 할 지도자가 안일과 방종에 묻혀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 시대의 절망을 엿볼 수 있다.
-레위인은 베들레헴에 가 있는 여인의 마음을 달래어 집으로 데려오려고 길을 떠났다(1~3절). 첩의 마음을 되돌리려 조바심 내는 것도 문제지만, 행음하고 떠난 첩을 다시 데려오는 레위인의 태도는 더 큰 문제로 보인다. 최소한의 분별력조차 상실한 불순종이기 때문이다(레 21:7~9). 하나님의 요구보다 자신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말씀을 떠나 소욕을 따라 살고, 의로운 판단 대신 부정한 감정에 매여 있다면 이미 분별력을 잃은 것이다. 내 선택과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의 기준을 낮추려 하기보다 나의 완악한 마음을 분별하고 낮추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당시 첩을 두는 것은 아내가 불임인 경우 암묵적으로 용인되었지만, 이 레위인은 성적 만족을 위해 첩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첩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아서, 첩이 친정으로 돌아가 넉 달이나 소식을 끊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보아 이 레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사 시대의 전형이 아닐까?
-첩의 집에 도착한 레위인은 장인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4절). 이런 환대는 딸의 허물을 물질적 보상으로 무마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장인의 음흉한 동기를 모르는지 레위인은 먹고 마시며 정신없이 사흘을 보낸다. 기독교가 세상의 환영을 받는 것은 감탄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서로 다른 왕을 섬기고 서로 다른 가치 체계를 가진 세상이 호의와 환대를 보일 때는 그 의도가 불순할 가능성이 크다. 세상이 주는 거짓의 잔에 취해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나친 접대에는 반드시 부당한 요구가 따르기 마련이다.
-장인은 딸을 데리러 온 사위를 극진히 환대했다. 그 환대는 무려 5일 동안 이어졌다(5~10절). 이 과정에서 레위인에게서는 단호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장인의 강권을 물리치지 못해 체류를 늘려 갔다.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레위인의 사명보다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는 장인의 말에 더 마음을 주었다. 이런 레위인의 모습이 오늘날 나와 같은 목사의 모습은 아닐까?
-여지를 주는 순간 세상은 신앙의 발목을 잡는다. 의지를 굽히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주면 거절할 수 없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타락과 방종, 무지와 무감각의 세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명의 삶에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레위인은 다섯째 날이 되어도 보내 주지 않을 기세인 장인의 무리한 환대를 마침내 거절하고, 오후가 되었는데도 무리하여 출발한다. 이 시간에 출발하면 날이 밝을 때 에브라임에 도착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일단 출발한 것이다. 뭔가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사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들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먼저 배경이 에브라임 산지이다. 또 주인공이 레위 사람이고, 베들레헴과도 연관이 있다. 모세의 손자 요나단은 베들레헴에 살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갔고, 이 레위인은 에브라임에서 베들레헴으로 이동했다. 또 모두 범죄와 관련이 있는데, 요나단은 “우상 숭배”, 이 레위인은 “음행”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에브라임 산지는 가나안 땅의 중심부이다. 이 사건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중심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장자 역할을 맡은 레위 지파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모두 레위인 본연의 삶과 상관없는 데서 출발했다. 배치받은 곳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고 싶은 곳에 살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즐기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본문에서 주목해 볼 레위인의 모습은 “우유부단함”이다. 행음하고 처가로 피신한 첩을 데려오려고, 첩이 떠난 지 넉 달 만에야 베들레헴으로 내려간 일이 그렇다. 또 장인과 나흘이 넘도록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아침에는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오후까지 즐기다가 다시 미루는 일이 무려 4일 동안 반복되었다. 5일째에도 역시 아침에 출발하려다 미루었고, 저녁이 다 되어서야 굳이 출발했다. 첩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미루다 미루다 결국 화를 당한 것이다. 사사 시대의 핵심을 보는 듯하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며 그 길에서 돌아서기를 미루다 미루다 결국 “기브아의 밤”을 만난다.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다. 지금 누리는 재미에 마음이 붙잡혀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마음의 외침에도 돌이키기를 미루다 미루다 결국 화를 당한다. 애초에 무너진 거룩의 삶도 문제지만, 박차고 일어날 때를 미루고 미루면 결국 기브아의 비극적인 밤이 엄습한다. 이것이 사사 시대이다.
*레위인의 모습에 “유구무언”이다. 이 참담한 모습에 도무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이런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추악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재미있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써 갈 때, 세상은 그런 공동체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과 우상숭배의 비극 [사사기 18:21-31]
하나님의 법은 온데간데없고 동물의 세계만 남았다. 단 지파는 다섯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라이스를 향해 출정한다. 가는 길에 미가의 집에 있던 신상과 에봉, 드라빔을 레위인 제사장과 함께 힘으로 빼앗는다. 항의하는 미가와 이웃들에게는 죽음을 언급하며 협박한다(25절). 더 나아가 평화롭게 살던 힘없는 라이스 사람들을 학살하고 성을 불사른다(27절). 그리고 그곳을 ‘단’이라 부르며 미가의 우상을 세운다. 그 우상은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 내내 섬기는 대상이 된다(31절).
한 개인(미가)에서 시작한 타락이 한 가정으로, 이제 한 지파 전체로 번졌다. 이 본문에서 타락한 믿음의 세 가지 모습이 보인다.
1. 힘의 법: 약육강식을 따른 백성
단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뿐 아니라 양심까지 쉽게 저버렸다. 레위인의 입을 다그치듯 막았고, 자기 신상을 찾으러 온 미가에게는 “우리 힘을 보고도 덤빌 테면 덤비라”는 식으로 죽음을 위협했다(25–26절). 하나님의 백성이 순종 대신 자기 힘에 기대자, 공동체는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로 변해 버렸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비겁함이다. 단 지파는 자기 기업의 아모리 족속에게는 꼼짝도 못하고 산지로 밀려났다(삿 1:34). 그러면서 도울 이웃도 없는 라이스는 무참하게 짓밟았다. 자기가 원하는 땅을 찾는 데 쏟은 그 포기하지 않는 열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땅의 아모리와 블레셋을 몰아냈다면 어땠을까.
협상은 한 번도 없었다. 신명기 20:10–15는 분배받은 땅 밖의 먼 성읍을 칠 때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고 명령한다. 라이스는 시돈 사람의 성읍으로 단의 기업 밖에 있었다. 그러니 이 학살은 비겁했을 뿐 아니라 율법을 정면으로 어긴 일이다.
단 지파의 야비한 행동은 자비가 사라지고 힘과 폭력만 난무한 사사 시대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힘의 논리가 진리처럼 통용되는 세상에서 부와 권력은 누구도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하지만 교회와 성도의 실추된 위상은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질 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살 때 회복될 것이다.
2. 고립된 안정: 샬롬이 아닌 안주
단 지파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스스로 고립을 택해 “안정”을 얻었다. 라이스가 학살당할 때 아무도 돕지 못한 것은 시돈과 멀고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7, 28절). 그 고립을 이제 단 지파가 물려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분배하신 땅은 서쪽으로 지중해, 동쪽으로 에브라임·베냐민·유다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반면 스스로 찾아 빼앗은 땅은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헤르몬산 자락이다. 물이 풍부하고 곡식이 잘 되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환경이 안주하게 해 주는, 싸움을 포기하기 좋은 곳이었다.
실로에 엄연히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는데도 단 지파는 그리로 나아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미가에게서 빼앗은 우상을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 내내 섬겼다(31절).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이 아니라, 아무 일 없이 잘 살면 된다는 육신의 안주를 택한 것이다.
그 결과는 길었다. 데려간 제사장의 자손은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힐 때까지” 그 일을 맡았다(30절). 훗날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 예루살렘 성전 대신 섬기게 했다(왕상 12:28–30). 단이 그 자리로 선택된 데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아도” 아무 일이 없었던 이 오랜 전통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야곱의 예언이 기막히다. “단은 길섭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17).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이스라엘 12지파 명단에는 단 지파가 없다(계 7:5–8).
3. 가면 쓴 신앙: 믿음처럼 보이는 악행
타락한 믿음은 가면을 쓴다. 단 지파는 라이스의 이름을 지우고 자기 조상의 이름을 따 ‘단’이라 부른다(29절). ‘단’은 ‘심판’이라는 뜻이다. 마치 하나님이 이방인을 심판하신 믿음의 싸움에서 이긴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낳는다.
거기에 모세의 손자,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을 제사장으로 세운다(30절). 겉으로는 철저히 신앙의 행동이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는 가면이다. 모세의 직계 후손까지 우상숭배의 한가운데 있을 만큼 사사 시대는 혼탁했다.
미가의 하소연에 이미 답이 있다.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24절). 도둑맞을 수 있는 신은 나를 지켜 줄 수 없다. 미가는 복을 받으려고 만든 신상 때문에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단 지파의 앞날도 같은 우상으로 인해 곤란이 기다린다.
아무리 화려한 신상과 명망 있는 제사장을 세워도, 실로의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사로잡힘을 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번영을 축복으로 착각하고 불의를 일삼는 ‘자기만족의 종교’를 향해 분노하신다. 단 지파 이야기는 죄와 함께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를 남긴 오만한 인생의 이야기다.
나는?
-단 지파가 신상을 훔쳐간 것을 안 미가는 이웃들을 모아 단 지파를 찾아가 추궁한다. 그러나 단 지파는 좀전에 레위인의 입을 폭력적인 언사로 닫게 한 것처럼 미가에게도 죽음의 위협을 서슴치 않는다. 이로써 물러가게 만든다. 미가는 축복을 받으려고 만든 신상으로 인해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단 지파의 앞 날은 이 신상으로 인해 곤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상을 손에 쥐고서 형통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미가는 단 지파에게 신상들과 제사장을 빼앗기자 자신의 전부를 잃은 것과 다름없다고 하소연한다(21~24절). 미가의 배교가 심판을 부른 것이다. 내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버림받을 수 있다.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것에 마음을 뺴앗기지 말고 거기에 우리 자신과 자녀를 맡기면 안 된다. 나와 세상이 만든 숱한 ‘우상’으로 내 가치를 입증하려 하지 말고 왕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단 지파는 무력을 이용하여 미가의 신상들과 제사장을 빼앗더니 이제는 억울하고 부당하다며 항의하는 미가를 협박하여 돌려보낸다(25~26절). 단 지파의 야비한 행위는 자비가 사라지고 힘과 폭력만 난무한 사시 시대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힘의 논리’가 진리인 것처럼 통요되는 세상에서 부와 구너력은 누구도 떨칠 수 없는 유혹이다. 하지만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질 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살 때 실추된 교회와 성도의 위상은 이내 회복 되지 않을까!
-단 지파는 무방비 상태로 평화롭게 사는(7, 10, 27절) 라이스를 침공하여 백성을 죽이고 그 이름마저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곳을 ‘단’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 미가의 우상을 세우고 레위인을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는다. 참 씁쓸하기 짝이 없다.
-단은 미가의 신상을 폭력으로 빼앗은 것처럼 라이스도 무력으로 뺴앗은 것이다. 도우심은 거절한 채 아모리 족속에게는 꼼짝도 못하던 그들은 자기 힘만으로 이길 수 있었던 만만하기 짝이 없는 라이스를 무참하게 짓밟은 것이다.
-이렇게 라이스를 정복한 단 지파는 신상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운다. 그 제사장은 놀랍게도 모세의 손자,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이다. 참담하기 짝이 없다. 사사시대는 모세의 직계 후손들까지 우상숭배의 핵심에 자리잡고 참여하고 있을 만큼 혼탁하기 짝이 없는 시대였다.
-단 지파가 새로 정착한 지역은 훗날 결국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된다. 이를 통해 한 가정에서 한 지파로 그리고 장차 이스라엘 전체가 배교의 길을 걷게 되는 화근이 된다. 성경은 그들이 조장하고 방관하고 주도한 우상숭베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해 예고한다. 아무리 화려한 신상과 명망있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운다 할지라도 실로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한 ‘사로잡힘(추방)’을 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번영을 축복으로 착각하고 불의를 일삼는 ‘자기만족의 종교’를 향해 분노하신다.
-‘단’은 ‘심판’이라는 의미다. 이름 자체만으로 탐욕의 끝이 심판인 것을 보여주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단’ 지파 이야기는 죄와 함께 쌓여 가는 모든 것은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 있음을 교훈하는 ‘수치를 남긴 오만한 인생의 이야기’이다.
-한 개인에서 시작한 타락이 한 가정으로, 이제 그것이 한 지파 전체로 확대되었다. 타락한 믿음이 가지는 특징이 있다. 먼저 하나님 자리에 다른 우상을 세우는 것이다.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과 정복 사명을 저버렸다. 이는 하나님을 버렸기에, 하나님이 주신 땅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정복 사명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여러 계명들을 범하며 탐욕의 길로 나선 것이다.
-그리고 타락한 믿음은 매우 폭력적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힘만을 의지하고 믿으면 그렇게 된다. 단 지파는 가나안 땅 분배를 받은 직후 자신들이 점령해야 할 그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과 싸우지도 못했다. 이디 그뿐인가? 본문에서는 힘이 약하고 도와 줄 수 있는 민족이 주변에 없는 ‘라이스’ 백성들에게 무자비하게 칼을 들이대고 살육하며 성읍을 불태웠다. 단 한 번의 협상 시도도 없었다.
-우리 자신도 혹시 가정에서, 내가 속한 작은 모임에서 말의 폭력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과도하기 짝이 없는 폭력 앞에서 혹 내 자신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믿음이 타락하면 ‘가면을 쓴다.” 매우 위선적인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단 지파는 지신들의 폭력을 감추려는 듯 혹은 자신들의 정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성읍의 이름을 ‘단’이라고 짓는다. ‘심판’을 뜻하는 이 이름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심판하셨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마치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삼는다. 단 지파가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파 이름을 따서 성읍의 이름을 짓는다. 거기에 더해 모세의 손자를 데려다 제사장으로 삼는다. 겉으로 보기에 철저히 믿음의 행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려는 가면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타락한 믿음으로 요령을 피우면 삶이 편해질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 심판을 면제받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나와 세상이 만든 우상으로 내 가치를 입증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허무하게 사라질 것에 나와 자녀를 맡기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다. 내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버림받을 수 있다.
*가정에서, 내가 속한 작은 모임에서 말의 폭력부터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과도한 폭력 앞에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편안함과 안정을 위해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스스로 고립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신앙의 모습이 악함을 감추는 가면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요령을 피우면 삶이 편해질 것 같아도,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 심판을 면제받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한 개인(미가)에서 시작한 타락이 한 가정으로, 이제 한 지파 전체로 번졌다. 이 본문에서 타락한 믿음의 세 가지 모습이 보인다.
1. 힘의 법: 약육강식을 따른 백성
단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뿐 아니라 양심까지 쉽게 저버렸다. 레위인의 입을 다그치듯 막았고, 자기 신상을 찾으러 온 미가에게는 “우리 힘을 보고도 덤빌 테면 덤비라”는 식으로 죽음을 위협했다(25–26절). 하나님의 백성이 순종 대신 자기 힘에 기대자, 공동체는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로 변해 버렸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비겁함이다. 단 지파는 자기 기업의 아모리 족속에게는 꼼짝도 못하고 산지로 밀려났다(삿 1:34). 그러면서 도울 이웃도 없는 라이스는 무참하게 짓밟았다. 자기가 원하는 땅을 찾는 데 쏟은 그 포기하지 않는 열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땅의 아모리와 블레셋을 몰아냈다면 어땠을까.
협상은 한 번도 없었다. 신명기 20:10–15는 분배받은 땅 밖의 먼 성읍을 칠 때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고 명령한다. 라이스는 시돈 사람의 성읍으로 단의 기업 밖에 있었다. 그러니 이 학살은 비겁했을 뿐 아니라 율법을 정면으로 어긴 일이다.
단 지파의 야비한 행동은 자비가 사라지고 힘과 폭력만 난무한 사사 시대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힘의 논리가 진리처럼 통용되는 세상에서 부와 권력은 누구도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하지만 교회와 성도의 실추된 위상은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질 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살 때 회복될 것이다.
2. 고립된 안정: 샬롬이 아닌 안주
단 지파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스스로 고립을 택해 “안정”을 얻었다. 라이스가 학살당할 때 아무도 돕지 못한 것은 시돈과 멀고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7, 28절). 그 고립을 이제 단 지파가 물려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분배하신 땅은 서쪽으로 지중해, 동쪽으로 에브라임·베냐민·유다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반면 스스로 찾아 빼앗은 땅은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헤르몬산 자락이다. 물이 풍부하고 곡식이 잘 되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환경이 안주하게 해 주는, 싸움을 포기하기 좋은 곳이었다.
실로에 엄연히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는데도 단 지파는 그리로 나아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미가에게서 빼앗은 우상을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 내내 섬겼다(31절).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이 아니라, 아무 일 없이 잘 살면 된다는 육신의 안주를 택한 것이다.
그 결과는 길었다. 데려간 제사장의 자손은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힐 때까지” 그 일을 맡았다(30절). 훗날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 예루살렘 성전 대신 섬기게 했다(왕상 12:28–30). 단이 그 자리로 선택된 데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아도” 아무 일이 없었던 이 오랜 전통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야곱의 예언이 기막히다. “단은 길섭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17).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이스라엘 12지파 명단에는 단 지파가 없다(계 7:5–8).
3. 가면 쓴 신앙: 믿음처럼 보이는 악행
타락한 믿음은 가면을 쓴다. 단 지파는 라이스의 이름을 지우고 자기 조상의 이름을 따 ‘단’이라 부른다(29절). ‘단’은 ‘심판’이라는 뜻이다. 마치 하나님이 이방인을 심판하신 믿음의 싸움에서 이긴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낳는다.
거기에 모세의 손자,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을 제사장으로 세운다(30절). 겉으로는 철저히 신앙의 행동이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는 가면이다. 모세의 직계 후손까지 우상숭배의 한가운데 있을 만큼 사사 시대는 혼탁했다.
미가의 하소연에 이미 답이 있다.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24절). 도둑맞을 수 있는 신은 나를 지켜 줄 수 없다. 미가는 복을 받으려고 만든 신상 때문에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단 지파의 앞날도 같은 우상으로 인해 곤란이 기다린다.
아무리 화려한 신상과 명망 있는 제사장을 세워도, 실로의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사로잡힘을 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번영을 축복으로 착각하고 불의를 일삼는 ‘자기만족의 종교’를 향해 분노하신다. 단 지파 이야기는 죄와 함께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를 남긴 오만한 인생의 이야기다.
나는?
-단 지파가 신상을 훔쳐간 것을 안 미가는 이웃들을 모아 단 지파를 찾아가 추궁한다. 그러나 단 지파는 좀전에 레위인의 입을 폭력적인 언사로 닫게 한 것처럼 미가에게도 죽음의 위협을 서슴치 않는다. 이로써 물러가게 만든다. 미가는 축복을 받으려고 만든 신상으로 인해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단 지파의 앞 날은 이 신상으로 인해 곤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상을 손에 쥐고서 형통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미가는 단 지파에게 신상들과 제사장을 빼앗기자 자신의 전부를 잃은 것과 다름없다고 하소연한다(21~24절). 미가의 배교가 심판을 부른 것이다. 내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버림받을 수 있다.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것에 마음을 뺴앗기지 말고 거기에 우리 자신과 자녀를 맡기면 안 된다. 나와 세상이 만든 숱한 ‘우상’으로 내 가치를 입증하려 하지 말고 왕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단 지파는 무력을 이용하여 미가의 신상들과 제사장을 빼앗더니 이제는 억울하고 부당하다며 항의하는 미가를 협박하여 돌려보낸다(25~26절). 단 지파의 야비한 행위는 자비가 사라지고 힘과 폭력만 난무한 사시 시대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힘의 논리’가 진리인 것처럼 통요되는 세상에서 부와 구너력은 누구도 떨칠 수 없는 유혹이다. 하지만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질 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살 때 실추된 교회와 성도의 위상은 이내 회복 되지 않을까!
-단 지파는 무방비 상태로 평화롭게 사는(7, 10, 27절) 라이스를 침공하여 백성을 죽이고 그 이름마저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곳을 ‘단’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 미가의 우상을 세우고 레위인을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는다. 참 씁쓸하기 짝이 없다.
-단은 미가의 신상을 폭력으로 빼앗은 것처럼 라이스도 무력으로 뺴앗은 것이다. 도우심은 거절한 채 아모리 족속에게는 꼼짝도 못하던 그들은 자기 힘만으로 이길 수 있었던 만만하기 짝이 없는 라이스를 무참하게 짓밟은 것이다.
-이렇게 라이스를 정복한 단 지파는 신상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운다. 그 제사장은 놀랍게도 모세의 손자,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이다. 참담하기 짝이 없다. 사사시대는 모세의 직계 후손들까지 우상숭배의 핵심에 자리잡고 참여하고 있을 만큼 혼탁하기 짝이 없는 시대였다.
-단 지파가 새로 정착한 지역은 훗날 결국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된다. 이를 통해 한 가정에서 한 지파로 그리고 장차 이스라엘 전체가 배교의 길을 걷게 되는 화근이 된다. 성경은 그들이 조장하고 방관하고 주도한 우상숭베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해 예고한다. 아무리 화려한 신상과 명망있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운다 할지라도 실로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한 ‘사로잡힘(추방)’을 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번영을 축복으로 착각하고 불의를 일삼는 ‘자기만족의 종교’를 향해 분노하신다.
-‘단’은 ‘심판’이라는 의미다. 이름 자체만으로 탐욕의 끝이 심판인 것을 보여주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단’ 지파 이야기는 죄와 함께 쌓여 가는 모든 것은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 있음을 교훈하는 ‘수치를 남긴 오만한 인생의 이야기’이다.
-한 개인에서 시작한 타락이 한 가정으로, 이제 그것이 한 지파 전체로 확대되었다. 타락한 믿음이 가지는 특징이 있다. 먼저 하나님 자리에 다른 우상을 세우는 것이다.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과 정복 사명을 저버렸다. 이는 하나님을 버렸기에, 하나님이 주신 땅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정복 사명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여러 계명들을 범하며 탐욕의 길로 나선 것이다.
-그리고 타락한 믿음은 매우 폭력적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힘만을 의지하고 믿으면 그렇게 된다. 단 지파는 가나안 땅 분배를 받은 직후 자신들이 점령해야 할 그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과 싸우지도 못했다. 이디 그뿐인가? 본문에서는 힘이 약하고 도와 줄 수 있는 민족이 주변에 없는 ‘라이스’ 백성들에게 무자비하게 칼을 들이대고 살육하며 성읍을 불태웠다. 단 한 번의 협상 시도도 없었다.
-우리 자신도 혹시 가정에서, 내가 속한 작은 모임에서 말의 폭력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과도하기 짝이 없는 폭력 앞에서 혹 내 자신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믿음이 타락하면 ‘가면을 쓴다.” 매우 위선적인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단 지파는 지신들의 폭력을 감추려는 듯 혹은 자신들의 정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성읍의 이름을 ‘단’이라고 짓는다. ‘심판’을 뜻하는 이 이름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심판하셨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마치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삼는다. 단 지파가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파 이름을 따서 성읍의 이름을 짓는다. 거기에 더해 모세의 손자를 데려다 제사장으로 삼는다. 겉으로 보기에 철저히 믿음의 행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려는 가면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타락한 믿음으로 요령을 피우면 삶이 편해질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 심판을 면제받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나와 세상이 만든 우상으로 내 가치를 입증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허무하게 사라질 것에 나와 자녀를 맡기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다. 내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버림받을 수 있다.
*가정에서, 내가 속한 작은 모임에서 말의 폭력부터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과도한 폭력 앞에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편안함과 안정을 위해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스스로 고립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신앙의 모습이 악함을 감추는 가면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요령을 피우면 삶이 편해질 것 같아도,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 심판을 면제받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단 지파와 레위 청년의 타락 [사사기 18:1-20]
18장은 단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이 아닌 라이스를 정복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기업을 정복하지 못하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을 정탐하러 다니다가 라이스를 발견하고 이곳을 정복하려고 출발한다. 이 과정에서 미가 집안의 신상들과 에봇과 드라빔을 무력을 빼앗고, 제사장 역할을 하던 레위인에게 단 지파의 제사장 자리를 제안하고 이 레위인은 기쁘게 단 지파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차지하라고 분배 받은 땅은 힘에 밀려 차지하지 않고 자신들보다 약한 한 집안과 평온하게 살고 있던 라이스 지역 사람들의 것은 빼앗는다.
단 지파의 신앙과 삶이 전혀 일치 되지 않는 이 당혹감을 어떻게 할까? 어쩌다 이렇게 무너졌을까?
1. 레위 청년
18:30에서는 이 청년을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이라고 소개한다. 기막힐 일이다. 모세의 손자라면 가나안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다. 이렇게 급속히 무너지다니…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레위 지파에게 분배되지 않은(민 35장, 수 21장) 베들레헴에서 살았다. 그나마 그곳에서 다시 살 곳을 찾아 나섰다. 레위인들의 삶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인 십일조와 예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니 레위인들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이에 레위인들은 사명 따라 살아가야 할 분배 받은 도시를 떠나 이곳 저곳을 방황하게 된 것이다.
‘요나단’은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의 집에 고용 되어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었다. 여기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단 지파를 따라 다시 이동한다(4, 20절). 레위인으로서 살아내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쉽게 무시하고, 만들어 놓은 우상을 섬기도록 방관하는 그의 모습이 고통스럽다. 이때 당시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안의 ‘실로’에 있었다. 같은 지파의 땅 안에 ‘성막’이 있었음에도 그곳까지 가는 것이 싫어서 미가는 집안에 제단을 만든 것이다. 레위 청년 요나단은 그 제단에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가의 제사장”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단 지파의 정탐꾼의 앞 길을 축복한다(6절).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완전히 저버리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 없는 삶을 살면서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이들과 다를 바 무었인가!
2. 단 지파
단 지파가 거주할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1절)고 이 에피소드는 시작되었다. 언뜻 이해하기로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본래 단 지파에게 분배된 땅에는 아모리 족속이 자리잡고 있었고 남서쪽으로는 블레셋 족속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을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차지 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용맹한 다섯명의 정탐꾼을 보내 아모리 복속과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찾던 단 지파는 마침내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라이스”라는 지역을 찾아 낸다. 이 지역은 “한가하고 평화롭게, 안전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권력을 쥐고 해치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시돈 사람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어느 누구와도 접촉이 없었다(새번역_7절).”
그야말로 “한가하고 평화로우며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발견한 것이다. 다섯명의 정탐꾼들은 지체하지 않고 돌아와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며, 망설이지 말고 빨리 쳐들어 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새번역_9절)”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그 땅을 하나님이 넘겨 주셨다(10절)고 주장한다.
이윽고 600명이 정탐 보고를 따라 라이스를 취하기 위해 출정한다. 그 길에 미가의 집에 있는 신상들과 우상 단지들을 취하여 간다. 레위 청년에게는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될 것인지, 지파의 제사장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라 한다.
단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매우 좋은 지역이었다(수 19:40-48). 하지만 남쪽으로 접해있는 블레셋과 싸우기를 꺼려하고 버거워 하여 그 좋은 땅을 포기하고 만 것이다. 또한 레위 지파 요나단을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을 때, 공식적으로 우상숭배를 채택하는 불명예를 감수한다. 사사시대의 종교적 혼합주의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단 지파의 폭력과 살인의 죄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600명의 군사가 미가의 집을 둘러 싸고 저지른 약탈과, 평화로운 라이스 성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살인의 죄를 반드시 물으실 것이다.
*단 지파는 제일 처음 우상숭배의 길에 들어선다(30-31절). 이 사회는 법, 기준, 사사, 장로,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정처 없이 떠돌며 거할 곳을 찾던 레위인(17:8)처럼, 기업을 받았으나 정복하는 데 실패하고 도리어 아모리인에게 쫓겨난(1:34) 단 지파도 자신들이 살 곳을 찾고 있다(1절). 어쩌면 단 지파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왕’어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방황의 종식’은 안전한 땅을 찾는 데서 끝나지 않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가의 집에 제사장으로 고용된 레위 청년은 단 지파 정탐꾼들의 질문에 자신이 미가에게 고용된 자임을 밝히며, 후한 보수를 따라 선택한 자신의 의도는 숨기고 더 나은 대우를 따라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속내를 비춘다(2~6절). 그리고 형통을 묻는 그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평안을 빌어준다. 신앙의 형식만 있을 뿐 모두 욕심과 야심으로 가득찼다. 사리사욕을 위해 진리를 이용하고 상업적 이득의 도구로 종교를 이용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든 어디서든 이런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단 지파는 기업으로 받은 땅을 되찾기보다 좀 더 안전한 땅을 넘보기 시작한다(2절).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성읍이 바로 ‘라이스’다. 레위 청년의 격려를 받고 길을 나선 그들은 세상과 고립된 채 염려 없이 사는 그곳을 ‘탐내며’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확신한다(7~10절). 그들은 그 땅을 점령하여 거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변조한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남의 평안을 짓밟는 그들에겐 언약 백성의 인자와 자비도 배려도 없고 오직 비열한 탐심만 가득 차 있었다.
-단 지파 600명의 군사들이 미가의 집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사이, 정탐꾼들은 종교 기물들을 약탈하고 레위 청년에게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될 것을 제안한다. 돈과 출세에 눈먼 그는 흔쾌히 수용한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이들의 직분과 직책이 거래의 대상이 되었고, 부름받은 사역자들은 돈과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매우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임에 틀림없었다.
-미가 집의 제사장인 레위 청년은 단 지파가 가는 길에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계신다고 축복의 말을 전해 주었다.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 준 것이다. 단 지파 정탐꾼들도 근거도 없는 이 말을 확신하고는 평화롭게 사는 동네 라이스를 침공하기로 한다. 하나님이 그 땅을 자기드 손에 넘겨주셨다고 맹목저긍로 믿고 전쟁을 감행하고 만다. 사사시대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듣고 싶은 대로 들었고,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미가는 훔친 돈으로 하나님 신상을 만들었고,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웠다. 단 지파는 그 신상을 다시 훔쳤고 그 레위인마저 위협과 회유를 통해 자기 제사장으로 영입한다. 레위인은 한 집안의 제사장에서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변신한다.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라, 돈이었다.
-총체적 난국이다. 사사기의 비극은 하나님을 떠난 사사들의 악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 지파도, 그를 따라나선 배신자 레위 사람도 그 악한 목적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단 지파의 신앙과 삶이 전혀 일치 되지 않는 이 당혹감을 어떻게 할까? 어쩌다 이렇게 무너졌을까?
1. 레위 청년
18:30에서는 이 청년을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이라고 소개한다. 기막힐 일이다. 모세의 손자라면 가나안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다. 이렇게 급속히 무너지다니…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레위 지파에게 분배되지 않은(민 35장, 수 21장) 베들레헴에서 살았다. 그나마 그곳에서 다시 살 곳을 찾아 나섰다. 레위인들의 삶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인 십일조와 예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니 레위인들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이에 레위인들은 사명 따라 살아가야 할 분배 받은 도시를 떠나 이곳 저곳을 방황하게 된 것이다.
‘요나단’은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의 집에 고용 되어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었다. 여기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단 지파를 따라 다시 이동한다(4, 20절). 레위인으로서 살아내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쉽게 무시하고, 만들어 놓은 우상을 섬기도록 방관하는 그의 모습이 고통스럽다. 이때 당시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안의 ‘실로’에 있었다. 같은 지파의 땅 안에 ‘성막’이 있었음에도 그곳까지 가는 것이 싫어서 미가는 집안에 제단을 만든 것이다. 레위 청년 요나단은 그 제단에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가의 제사장”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단 지파의 정탐꾼의 앞 길을 축복한다(6절).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완전히 저버리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 없는 삶을 살면서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이들과 다를 바 무었인가!
2. 단 지파
단 지파가 거주할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1절)고 이 에피소드는 시작되었다. 언뜻 이해하기로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본래 단 지파에게 분배된 땅에는 아모리 족속이 자리잡고 있었고 남서쪽으로는 블레셋 족속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을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차지 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용맹한 다섯명의 정탐꾼을 보내 아모리 복속과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찾던 단 지파는 마침내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라이스”라는 지역을 찾아 낸다. 이 지역은 “한가하고 평화롭게, 안전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권력을 쥐고 해치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시돈 사람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어느 누구와도 접촉이 없었다(새번역_7절).”
그야말로 “한가하고 평화로우며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발견한 것이다. 다섯명의 정탐꾼들은 지체하지 않고 돌아와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며, 망설이지 말고 빨리 쳐들어 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새번역_9절)”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그 땅을 하나님이 넘겨 주셨다(10절)고 주장한다.
이윽고 600명이 정탐 보고를 따라 라이스를 취하기 위해 출정한다. 그 길에 미가의 집에 있는 신상들과 우상 단지들을 취하여 간다. 레위 청년에게는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될 것인지, 지파의 제사장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라 한다.
단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매우 좋은 지역이었다(수 19:40-48). 하지만 남쪽으로 접해있는 블레셋과 싸우기를 꺼려하고 버거워 하여 그 좋은 땅을 포기하고 만 것이다. 또한 레위 지파 요나단을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을 때, 공식적으로 우상숭배를 채택하는 불명예를 감수한다. 사사시대의 종교적 혼합주의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단 지파의 폭력과 살인의 죄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600명의 군사가 미가의 집을 둘러 싸고 저지른 약탈과, 평화로운 라이스 성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살인의 죄를 반드시 물으실 것이다.
*단 지파는 제일 처음 우상숭배의 길에 들어선다(30-31절). 이 사회는 법, 기준, 사사, 장로,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정처 없이 떠돌며 거할 곳을 찾던 레위인(17:8)처럼, 기업을 받았으나 정복하는 데 실패하고 도리어 아모리인에게 쫓겨난(1:34) 단 지파도 자신들이 살 곳을 찾고 있다(1절). 어쩌면 단 지파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왕’어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방황의 종식’은 안전한 땅을 찾는 데서 끝나지 않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가의 집에 제사장으로 고용된 레위 청년은 단 지파 정탐꾼들의 질문에 자신이 미가에게 고용된 자임을 밝히며, 후한 보수를 따라 선택한 자신의 의도는 숨기고 더 나은 대우를 따라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속내를 비춘다(2~6절). 그리고 형통을 묻는 그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평안을 빌어준다. 신앙의 형식만 있을 뿐 모두 욕심과 야심으로 가득찼다. 사리사욕을 위해 진리를 이용하고 상업적 이득의 도구로 종교를 이용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든 어디서든 이런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단 지파는 기업으로 받은 땅을 되찾기보다 좀 더 안전한 땅을 넘보기 시작한다(2절).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성읍이 바로 ‘라이스’다. 레위 청년의 격려를 받고 길을 나선 그들은 세상과 고립된 채 염려 없이 사는 그곳을 ‘탐내며’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확신한다(7~10절). 그들은 그 땅을 점령하여 거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변조한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남의 평안을 짓밟는 그들에겐 언약 백성의 인자와 자비도 배려도 없고 오직 비열한 탐심만 가득 차 있었다.
-단 지파 600명의 군사들이 미가의 집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사이, 정탐꾼들은 종교 기물들을 약탈하고 레위 청년에게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될 것을 제안한다. 돈과 출세에 눈먼 그는 흔쾌히 수용한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이들의 직분과 직책이 거래의 대상이 되었고, 부름받은 사역자들은 돈과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매우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임에 틀림없었다.
-미가 집의 제사장인 레위 청년은 단 지파가 가는 길에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계신다고 축복의 말을 전해 주었다.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 준 것이다. 단 지파 정탐꾼들도 근거도 없는 이 말을 확신하고는 평화롭게 사는 동네 라이스를 침공하기로 한다. 하나님이 그 땅을 자기드 손에 넘겨주셨다고 맹목저긍로 믿고 전쟁을 감행하고 만다. 사사시대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듣고 싶은 대로 들었고,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미가는 훔친 돈으로 하나님 신상을 만들었고,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웠다. 단 지파는 그 신상을 다시 훔쳤고 그 레위인마저 위협과 회유를 통해 자기 제사장으로 영입한다. 레위인은 한 집안의 제사장에서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변신한다.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라, 돈이었다.
-총체적 난국이다. 사사기의 비극은 하나님을 떠난 사사들의 악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 지파도, 그를 따라나선 배신자 레위 사람도 그 악한 목적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사사 시대의 종교적 혼란과 미가의 집 이야기 [사사기 17:1-13]
17-21장은 사사기의 에필로그다. 그런데 배경은 사사시대 초기이다. 가나안 땅 분배가 이루어지고 여호수아가 죽은지 얼만 되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보여준다. 17~18장 미가의 집과 단 지파 이야기, 19~21장 레위인의 첩 이야기와 베냐민 지파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저마다 자기 뜻에 맞는 대로(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사사시대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배치 되어 있다. 참담하게도 모든 에피소드가 레위인과 관련되어 진행된다. 레위인다운 레위인의 부재가 불러온 사사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요지경 속 사사시대… 어느 정도 였을까?
미가는 어머니에게서 훔쳤다가 돌려드린 은으로 우상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까지 만들어서 집에 신당을 차리게 된다. 그런데 그때 마침 떠돌던 레위인이 미가으 ㅣ집에 오게 되었고 미가는 이 레위인을 자신의 집 제사장으로 삼는다. 미가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모두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1. 미신으로 전락한 여호와 신앙(1-6절)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는 사람의 한심한 집안 이야기로 시작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의 단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단 미가의 집은 매우 부자이다. 자신이 어머니의 거액의 돈을(은 1,100) 훔쳤다가 저주 받는 것이 두려워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훔쳤다가 솔직하게 돌려 주는 것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더 나아가 그 돌려받은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집에 둔다. 심지어 미가는 이미 집에 신당을 만들어 놓았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 신상도 있었다. 가관인 것은 레위인도 아닌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기도 했다.
가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은 어떤것이든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미 안중에도 없고 관심조차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만홀히(무심하고 소홀히, 문득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버릇 없이) 여기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 받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혼란스러워 지는지를 분명하게 경고한다. 미가의 삶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돈을 훔친 자녀를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고 여호와께 은을 바친다면서 신상을 만든다. 무엇보다 “내 아들을 위하여(3절, 나의 아들이 저주를 받지 않도록_새번역)”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내가 섬겨야 할 하나님”이 아닌 “나를 섬기는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런 모습을 미가는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미 집안에는 신당이 있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이 자리 잡고 있었다(5절). 내가 좋으면, 나에게 이익이 있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부르고 만날 수 있다고 여겨 에봇을,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도 나의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좋다고 여겨 드라빔을 만들어 함께 섬기고 있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형식은 갖추고 싶어서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이 감당해야 할 제사장의 자리에 아들을 않혔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섬겨주어야 한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가나안 땅에 이제 정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급속도로 나타난 황망하고 참담한 모습들 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2. 레위인의 방황, 이스라엘의 방황(7-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급속히 떠나간 원인을 두고 쫓아내지 못한(혹은 않은) 가나안 민족들의 농경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아서,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해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력의 부재로… 등등 여러가지 원인들을 거론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17장부터 21장의 에피소드를 전개하면서 “레위인” 혼란스러운 상황을 각각의 에피소드의 주요 소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레위인”의 타락한 삶을 사사시대의 혼란스러움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특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절)”는 해석을 언급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력이 백성들의 삶에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성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 백성이 살아내야 할 가치인 율법(말씀)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씀으로 살아내다 혹 실수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제사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율법)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고 오는 세대에게 가르쳐 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미가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선명하게 나타났듯 부모세대가 말씀을 따라 오롯이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은 부모의 입술의 말을 듣고 사는 것이 아니라 ‘등’을 보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분석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레위인”의 사명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살았던 한 레위인 청년의 방황이 언급된다. 그가 ‘거주할 곳을 찾아서’ 베들레헴을 떠났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 받아 각각 정착할 때, 가나안 주요 48개 성읍에 분산되어 배치 되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 성읍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율법을 따라 온전히 삶이 정비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레위인의 삶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48개 성읍에 속한 밭을 경작하며 살도록 정하여 주었다.
문제는 이 레위인 청년이 베들레헴을 떠나 살 곳을 찾을 정도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사시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의 삶을 사는 레위인에 대한 율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먹고 살기 어려워 방황하다가 미가라는 부자를 만나 그 집안 제사장으로 취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할 레위인이 뒤죽 박죽 여러 신들을 섬기는 한 가정의 제사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재산을 훔친 미가가 저주가 두려워 실토하자 어머니는 아들의 죄를 책망하지 않고 축복하며 그를 위해 신상 둘을 만들어 준다(1~5절). 죄에 대한 참회도, 징계도 없다. 그 집에는 ‘복’을 위한 신당과 신상, 에봇과 드라빔만 가득하다. 참 신앙을 잃어버린 시대가 남긴 것은 이처럼 이기적이고 기복주의적인 ‘맹신’과 ‘미신’뿐이다. 빗나간 ‘자기 사랑과 자식 사랑’이 빚어낸, 욕망에 감춰진 허울뿐인 종교만 남았다. 우리가 귾임없이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하나님 ‘같은’ 것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잃어버린 은 천백, 잃어버린 참된 신앙… 미가의 어머니는 은 천백을 잃어버렸다. 범인은 아들이었다. 절도범에 대한 어머니의 무서운 저주를 듣고 아들이 실토한다. 그러자 곧 어머니는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아들에 대한 책망도 없다. 자신이 저주하면 하나님이 저주하고, 자신이 축복하면 하나님이 축복할 거라고 믿는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마저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인듯하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비단 그녀 뿐일까?
-‘왕’이 부재한 자리에 남는 것은 탐욕에 물든 ‘자아’밖에 없었다(6절). 미가가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던 사사 시대에는 ‘왕’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소견과 소욕’을 따라 행하던 시대다. 그리고 그 끝은 방호아과 방탕, 혼돈과 공허’뿐이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불편함을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만 치부하는 이 시대가 잃어버린 참된 권위와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
-미가 어머니의 자기 마음대로의 모습이 민망하다. 아들이 훔친 돈을 돌려 받아 아들을 위해 신상을 새기고는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린다고 고백한다. 자기 마음대로다. 하나님의 계명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쭌이다. 미가의 집에는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각각 자기 자신이 왕이었다. 자기 마음대로다!
-고향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이동하던 레위인은 미가가 제시한 조건에 만족하여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7~11절).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이 사람에게 고용되어 성전이 아닌 한 집안의 제사당이 된다. ‘어떻게든 복을 받으려는’ 미가와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레위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물질만능주의와 성공지상주의를 시대정신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이 시대의 자화상 아닐까? 욱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신앙과 양심, 신븐과 본분, 심지어 공동체와 하나님마저 저버리는 이들의 전철이 아쉽다.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의지하여 제사로 섬겨야 했다. 그런데 그 이름 모를 레위인은 자기 맘대로 여기저기를 다닌다. 미가는 자기 맘대로 그 레위인을 개인 산당의 제사장으로서 세운다. 그러고도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복 주실 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대로, 바라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줄로 안다. 제 멋대로 자기도취의 신앙이 아닐 수 없다.
-미가에게 레위인은 신앙을 가르쳐줄 영적 아비가 아니라 그저 복을 빌어주는 ‘우상지기’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은 절대의존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자기 만족과 행복을 위해 부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우상일 뿐이다. 자기 부정과 절대순종을 요구하는 신앙이 ‘욕심’ 때문에 자기 맘대로 하려는 기복주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6장부터 21장까지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은 부르지만, 나타나시지 않는다. 이 끔찍한 이야기들 속에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뜻 이런 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선택하여 결정하는 삶이 이어졌다. 하나님의 이름이 입술에 베여 있지만, 삶은 그 말씀과 상관 없이 살았다. 사사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시대가 아니었다. 다른 우상들의 이름도 함께 불렀다. 완연한 “종교놀음”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다른 우상들과 함께 ‘나를 위하여, 내게 복을 주실” 도구에 불과하다. 레위인은 이를 이루어 줄 고용된 종교인에 불과하다…
*참담한 사사시대의 모습이 깊은 함숨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때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놀음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사사시대의 미가의 집안과, 레위인의 모습에서 동일하게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화 하여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셔야 왜곡된 신앙이 나만을 위한 신상, 나만을 위한 제사장을 세우게 했다.
*신앙과 사역자를 사유화하여 우리만의 교회, 우리만의 제사장을 추구하려는 미가의 집과 다름 없는 유혹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겠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여야 하겠다. 종교놀음에 빠지지 말아야지…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한 증거가 본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징계와 회개가 없는 삶, 하나님처럼 되려는 삶, 물질적인 복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삶 등이다. 이 모든 모습 속에 담겨 있는 “복을 숭배하는 삶의 가치”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하나님 자체를 복으로 여기지 않고 손에 쥐고, 삶 속에서 누릴 그 어떤 것이 있어야 안심하는 저열한 복 의식이 언제나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까운 대적이 아니겠나!
미가는 어머니에게서 훔쳤다가 돌려드린 은으로 우상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까지 만들어서 집에 신당을 차리게 된다. 그런데 그때 마침 떠돌던 레위인이 미가으 ㅣ집에 오게 되었고 미가는 이 레위인을 자신의 집 제사장으로 삼는다. 미가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모두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1. 미신으로 전락한 여호와 신앙(1-6절)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는 사람의 한심한 집안 이야기로 시작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의 단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단 미가의 집은 매우 부자이다. 자신이 어머니의 거액의 돈을(은 1,100) 훔쳤다가 저주 받는 것이 두려워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훔쳤다가 솔직하게 돌려 주는 것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더 나아가 그 돌려받은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집에 둔다. 심지어 미가는 이미 집에 신당을 만들어 놓았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 신상도 있었다. 가관인 것은 레위인도 아닌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기도 했다.
가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은 어떤것이든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미 안중에도 없고 관심조차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만홀히(무심하고 소홀히, 문득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버릇 없이) 여기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 받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혼란스러워 지는지를 분명하게 경고한다. 미가의 삶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돈을 훔친 자녀를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고 여호와께 은을 바친다면서 신상을 만든다. 무엇보다 “내 아들을 위하여(3절, 나의 아들이 저주를 받지 않도록_새번역)”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내가 섬겨야 할 하나님”이 아닌 “나를 섬기는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런 모습을 미가는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미 집안에는 신당이 있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이 자리 잡고 있었다(5절). 내가 좋으면, 나에게 이익이 있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부르고 만날 수 있다고 여겨 에봇을,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도 나의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좋다고 여겨 드라빔을 만들어 함께 섬기고 있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형식은 갖추고 싶어서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이 감당해야 할 제사장의 자리에 아들을 않혔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섬겨주어야 한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가나안 땅에 이제 정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급속도로 나타난 황망하고 참담한 모습들 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2. 레위인의 방황, 이스라엘의 방황(7-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급속히 떠나간 원인을 두고 쫓아내지 못한(혹은 않은) 가나안 민족들의 농경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아서,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해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력의 부재로… 등등 여러가지 원인들을 거론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17장부터 21장의 에피소드를 전개하면서 “레위인” 혼란스러운 상황을 각각의 에피소드의 주요 소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레위인”의 타락한 삶을 사사시대의 혼란스러움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특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절)”는 해석을 언급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력이 백성들의 삶에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성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 백성이 살아내야 할 가치인 율법(말씀)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씀으로 살아내다 혹 실수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제사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율법)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고 오는 세대에게 가르쳐 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미가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선명하게 나타났듯 부모세대가 말씀을 따라 오롯이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은 부모의 입술의 말을 듣고 사는 것이 아니라 ‘등’을 보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분석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레위인”의 사명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살았던 한 레위인 청년의 방황이 언급된다. 그가 ‘거주할 곳을 찾아서’ 베들레헴을 떠났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 받아 각각 정착할 때, 가나안 주요 48개 성읍에 분산되어 배치 되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 성읍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율법을 따라 온전히 삶이 정비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레위인의 삶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48개 성읍에 속한 밭을 경작하며 살도록 정하여 주었다.
문제는 이 레위인 청년이 베들레헴을 떠나 살 곳을 찾을 정도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사시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의 삶을 사는 레위인에 대한 율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먹고 살기 어려워 방황하다가 미가라는 부자를 만나 그 집안 제사장으로 취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할 레위인이 뒤죽 박죽 여러 신들을 섬기는 한 가정의 제사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재산을 훔친 미가가 저주가 두려워 실토하자 어머니는 아들의 죄를 책망하지 않고 축복하며 그를 위해 신상 둘을 만들어 준다(1~5절). 죄에 대한 참회도, 징계도 없다. 그 집에는 ‘복’을 위한 신당과 신상, 에봇과 드라빔만 가득하다. 참 신앙을 잃어버린 시대가 남긴 것은 이처럼 이기적이고 기복주의적인 ‘맹신’과 ‘미신’뿐이다. 빗나간 ‘자기 사랑과 자식 사랑’이 빚어낸, 욕망에 감춰진 허울뿐인 종교만 남았다. 우리가 귾임없이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하나님 ‘같은’ 것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잃어버린 은 천백, 잃어버린 참된 신앙… 미가의 어머니는 은 천백을 잃어버렸다. 범인은 아들이었다. 절도범에 대한 어머니의 무서운 저주를 듣고 아들이 실토한다. 그러자 곧 어머니는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아들에 대한 책망도 없다. 자신이 저주하면 하나님이 저주하고, 자신이 축복하면 하나님이 축복할 거라고 믿는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마저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인듯하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비단 그녀 뿐일까?
-‘왕’이 부재한 자리에 남는 것은 탐욕에 물든 ‘자아’밖에 없었다(6절). 미가가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던 사사 시대에는 ‘왕’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소견과 소욕’을 따라 행하던 시대다. 그리고 그 끝은 방호아과 방탕, 혼돈과 공허’뿐이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불편함을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만 치부하는 이 시대가 잃어버린 참된 권위와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
-미가 어머니의 자기 마음대로의 모습이 민망하다. 아들이 훔친 돈을 돌려 받아 아들을 위해 신상을 새기고는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린다고 고백한다. 자기 마음대로다. 하나님의 계명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쭌이다. 미가의 집에는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각각 자기 자신이 왕이었다. 자기 마음대로다!
-고향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이동하던 레위인은 미가가 제시한 조건에 만족하여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7~11절).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이 사람에게 고용되어 성전이 아닌 한 집안의 제사당이 된다. ‘어떻게든 복을 받으려는’ 미가와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레위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물질만능주의와 성공지상주의를 시대정신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이 시대의 자화상 아닐까? 욱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신앙과 양심, 신븐과 본분, 심지어 공동체와 하나님마저 저버리는 이들의 전철이 아쉽다.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의지하여 제사로 섬겨야 했다. 그런데 그 이름 모를 레위인은 자기 맘대로 여기저기를 다닌다. 미가는 자기 맘대로 그 레위인을 개인 산당의 제사장으로서 세운다. 그러고도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복 주실 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대로, 바라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줄로 안다. 제 멋대로 자기도취의 신앙이 아닐 수 없다.
-미가에게 레위인은 신앙을 가르쳐줄 영적 아비가 아니라 그저 복을 빌어주는 ‘우상지기’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은 절대의존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자기 만족과 행복을 위해 부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우상일 뿐이다. 자기 부정과 절대순종을 요구하는 신앙이 ‘욕심’ 때문에 자기 맘대로 하려는 기복주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6장부터 21장까지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은 부르지만, 나타나시지 않는다. 이 끔찍한 이야기들 속에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뜻 이런 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선택하여 결정하는 삶이 이어졌다. 하나님의 이름이 입술에 베여 있지만, 삶은 그 말씀과 상관 없이 살았다. 사사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시대가 아니었다. 다른 우상들의 이름도 함께 불렀다. 완연한 “종교놀음”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다른 우상들과 함께 ‘나를 위하여, 내게 복을 주실” 도구에 불과하다. 레위인은 이를 이루어 줄 고용된 종교인에 불과하다…
*참담한 사사시대의 모습이 깊은 함숨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때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놀음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사사시대의 미가의 집안과, 레위인의 모습에서 동일하게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화 하여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셔야 왜곡된 신앙이 나만을 위한 신상, 나만을 위한 제사장을 세우게 했다.
*신앙과 사역자를 사유화하여 우리만의 교회, 우리만의 제사장을 추구하려는 미가의 집과 다름 없는 유혹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겠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여야 하겠다. 종교놀음에 빠지지 말아야지…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한 증거가 본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징계와 회개가 없는 삶, 하나님처럼 되려는 삶, 물질적인 복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삶 등이다. 이 모든 모습 속에 담겨 있는 “복을 숭배하는 삶의 가치”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하나님 자체를 복으로 여기지 않고 손에 쥐고, 삶 속에서 누릴 그 어떤 것이 있어야 안심하는 저열한 복 의식이 언제나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까운 대적이 아니겠나!
선교편지 ㅣ
정동준 선교사
정동준 우한나 선교사 기도편지(53)
안녕하세요? 더워지는 한국에서 기도편지를 보내면서 우간다 인사말이 아니라 한국말로 인사드립니다. 우리들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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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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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2026년 05월 23일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의 새로운 가족이 되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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