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 [사사기 7:15-25]
미디안 보초병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한 기드온이 담대하게 공격하여 미디안 군대가 흩어진다. 이에 다른 지파들을 소집하여 추격전에 나서고, 에브라임 지파까지 참전한 끝에 전쟁은 승리로 끝난다. 7년간 이어진 미디안의 폭압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는 어떤 것일까?
1. 칼과 창이 없다?! 하지만!!(15~18절)
황당하고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 무기 자체가 없는 군대, 거기에 횃불과 빈 항아리 전술이라니…… 세계 전쟁사에서 이런 유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병력이나 첨단 무기, 손자도 생각하지 못할 탁월한 전략과 전술에 의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능력을 발휘하신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싸우는 것이다. 이렇게 승리한 기적의 전쟁이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장 큰 특징은 황당하리만치 적은 병력, 그리고 그에 이은 “무기 없는 군대”이다. 기드온은 이들과 함께 미디안 급습을 준비하며 100명씩 세 대로 나누었다. 그들의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횃불을 들려 감추게 하고 조용히 이동했다. 빈 항아리 속에서 횃불은 계속 타올라야 하면서도 불빛은 새어 나가지 않아야 했기에 만만치 않은 급습이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무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철저히 “기도비닉”을 유지하고 암호를 숙지시켜 일제히 급습할 수 있게 준비했다. 무엇보다 서로 떨어진 곳에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려야 했다. 그것도 이경 초(고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이니, 이경 초는 밤 10시경)에 개시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오늘날처럼 전기 조명이 아예 없던 시대였기에 상당히 깊은 밤이었다.
*칼과 창 없는 야간 급습…… 300명이지만 호흡을 맞추어 일제히 급습해야 하는 조직력이 이제 막 소집된 군사들에게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럼에도 기드온은 미디안 보초병들의 대화에서 확신을 얻고 지체하지 않고 결행한다.
*300명의 군사들의 손에는 무기 대신 “나팔, 빈 항아리, 횃불”이 들려 있다. 하나님의 군사는 지금 자기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전투의 현장이 이미 승리의 현장이 되었음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최신 무기 대신 손에 든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은 하나님의 훌륭한 승리의 도구가 되었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서 이끄신 전쟁이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말도 되지 않는 상황,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믿음이라는 비상식적인 확신만 손에 쥐고 있다. 그런데도 인생의 전장에서 승리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바로 등 뒤에서 안전하게 이 전장을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2. 자중지란, 아비규환, 멈춤 없는 후퇴(19~25절)
마치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내디디며 치렀던 여리고성 전투가 생각난다. 그때의 이스라엘도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나팔과 외침’뿐이었다. 기드온은 밤 이경 초(10~12시), 파수꾼들이 막 교대를 끝낸 그때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서로 부딪쳐 깨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무엇보다 기드온과 300명은 “각기 제자리에서” 그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며,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며 소리를 질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미디안 군대가 “자중지란”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자기편끼리 칼을 빼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들은 그저 각각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들은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긴 전쟁을 참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전쟁을 지켜볼 뿐이었다.
미디안은 자신들의 군사력, 곧 숫자만 의지했다. 삿 8:10에 따르면 13만 5천 명의 군사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급습한 군사가 겨우 300명이었다는 사실을, 서로 칼로 치고 죽어 가면서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상대가, 자신들의 신인 바알이나 아세라는 그저 나무 땔감에 불과함을 깨우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간과하였다. 전쟁은 규모나 무기, 전략과 전술이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 섰느냐 서지 않았느냐가 승리를 판가름한다.
*아쉽게도 세상은 여전히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분명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 기록해 놓았는데도,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판타지 소설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게는 더 비이성적인 방법도 용납하며 자기 욕망과 자기 능력, 자기 세력을 의지한다.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승리를 맛볼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인생의 전장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의지하던 것에 뒤통수를 맞고, 자중지란이 언제든 일어나며, 아비규환과 같은 고통이 멈추지 않는 것은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임을 기드온의 이야기가 분명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
3. 그런데!
기드온의 자세가 불안하다! 보초병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하나님보다 자신의 이름이 더 도드라지게 행동하는 듯한 모습이 불안하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싸워야 할 싸움에 자신의 이름을 살짝 얹는다. “너희는 나를 보고 있다가, 내가 하는 대로 하여라. 내가 적진의 끝으로 가서 하는 대로 따라 하여라. 나와 우리 부대가 함께 나팔을 불면, 너희도 적진의 사방에서 나팔을 불면서 ‘주님 만세! 기드온 만세!’ 하고 외쳐라”(새번역 17~18절).
기드온의 미묘한 변화가 꺼림칙하다.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전쟁에서 기드온 자신의 행동에 무게를 두고 집중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이런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삿 8:22에서는 사사의 직을 세습하게 해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결정적인 오해로 나타난다. “그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하였다.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새번역). 또 9장 17절에서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이복형제들을 몰살하는 현장에서 살아남은 요담의 항변 속에 담긴 고백으로 나타난다. “나의 아버지가 여러분을 살리려고 싸웠으며,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분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지 않았습니까?”(새번역)
가장 긴박한 순간, 결정적인 한마디에 자신의 이름을 부각시킨 일의 영향이 이토록 커질 줄 기드온이 알았을까? 300명으로 나팔과 빈 항아리, 횃불 작전을 주도한 탁월한 영웅으로만 인식하는 후손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승리를 이끄셨다는 고백은 찾아볼 수 없다.
*오늘 내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의 전장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분명한 교훈을 준다. 불가능한 상황일수록, 비상식적인 상황일수록 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하게 선언되고 드러나도록 늘 주의해야겠다.
*특히 목회의 현장이 그렇다! 나의 이름을 끼워 넣고 싶은 유혹이 늘 있다. 내가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저 “말씀하신 대로”, “감동 주셔서 인도하신 대로”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인 양 포장하려는 유혹을 늘 분별하고, 나의 이름을 높이려는 공명심을 경계해야겠다.
나는?
*기드온은 이 전쟁을 그의 손에 붙이신(14절) 하나님께 ‘경배’하고 진격을 명령한다.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출정 준비를 마친 것이다. 승리의 유일한 조건은 ‘군대의 역량’이 아니라 ‘믿음의 역량’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그에게 상식을 넘어선 상상력(창의적 전술)을 불러일으키고, 막강한 전력의 틈을 보게 한다. 어떤 싸움이든 눈에 보이는 ‘전력’을 비교하는 것이 필요한 절차일 수 있으나,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자기 ‘믿음’을 점검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기드온은 미디안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전쟁 준비를 명령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지나치게 “나”, 즉 기드온 자신을 여호와보다 앞세운다. 자기 말만 따르면 된다는 식이다. 우려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여호와께서만 온전히 영광을 받으신다는 생각이 없고, 자신도 얼마간은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긴 듯하다. “기드온을 위하라”고 외치라는 그에게 전쟁은 “오직 여호와께 속한 것”이 아닌 듯하다.
*군사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항아리, 횃불, 나팔’이 전부였다. 신호가 떨어지면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흔들며 나팔을 부는 것이 전술의 전부다(15~18절). ‘무기’치고는 너무 엉뚱하고, ‘작전’치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잊지 않았다. 수적 열세가 확실했으나 그들의 믿음만은 밀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지 정말 근심해야 할 것은 불리한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연약한 ‘믿음’이 아닐까…… 한편 기드온은 단지 제자리에 서서 이 명령만 했을 뿐인데, 적들은 혼란에 빠지고 그들 스스로 자기 동족을 친다. 대적들의 월등한 군사력이 도리어 자신들을 자멸시킨다. 이 어찌 기드온이 예측이나 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도 ‘기드온을 위하여’라니……
*미디안 연합군을 자멸하게 한 것은 ‘기드온의 칼(군대)’이 아니라 ‘여호와의 칼'(20절)이었다. 기드온과 그의 군대는 적진 주변에 ‘서서’ 진을 ‘에워싸고’ 나팔만 ‘불었을’ 뿐, 적군이 서로 칼을 겨누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19~23절). 수적 열세인지 전략적 우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것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뿐, 위경에 처한 우리를 건져 내지 못한다. 인생의 수많은 변수 속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상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전쟁이 또 다른 전쟁(기드온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제 여호와가 아니라 기드온이 전쟁을 주도한다(23~25절). 이미 해산된 지파의 군사들(6:35)이 다시 돌아오고, 기드온이 ‘사자를 보내’ 에브라임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전쟁'(2~4절)과 동떨어져 보인다. 이는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의 승리를 자신들의 공으로 내세우는 모습(8:1~3)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우려(2절)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로 미디안 군사들은 패주하기 시작한다. 이에 기드온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급히 전령을 보내 잔당을 추격하여 섬멸해 줄 것을 요청한다. 납달리와 아셀, 므낫세 지파의 군사들이 이에 응답하여 그들을 뒤쫓는다.
*아마도 300명에서 제외된 군사들이 즉각 응답했을 것이다. 특히 납달리, 아셀, 므낫세라고 특정하여 곧바로 응했다고 한 것은, 이들이 전장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주력 선봉대에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전장 근처를 지킨 이들에게 대미를 장식하는 기회가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300명의 군사들은 정말 한 것이 없구나!
*또 기드온은 미디안의 패잔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건너야 할 벧 바라와 요단강에 이르는 물길(요단 나루터)을 에브라임 지파에게 부탁하여 먼저 차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려는 패잔병들을 남김없이 처단하였다. 더 나아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동편까지 쫓아가서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까마귀)과 스엡(늑대)을 처단하여 전쟁을 마무리한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이미 승리가 결정된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누릴 뿐이었다. 칼과 창이 없어도, 군사적 전술이나 행동이 변변치 않아도, 심지어 기드온이 없어도 하나님은 승리하실 수 있다. 기드온은 순종했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하나님의 영광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지는 못했다. 기드온의 모습 속에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함정이 보인다. 나의 순종으로 빛나는 것이 나 자신이라면, 순종의 의미는 퇴색하고 승리는 반쪽짜리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는 어떤 것일까?
1. 칼과 창이 없다?! 하지만!!(15~18절)
황당하고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 무기 자체가 없는 군대, 거기에 횃불과 빈 항아리 전술이라니…… 세계 전쟁사에서 이런 유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병력이나 첨단 무기, 손자도 생각하지 못할 탁월한 전략과 전술에 의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능력을 발휘하신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싸우는 것이다. 이렇게 승리한 기적의 전쟁이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장 큰 특징은 황당하리만치 적은 병력, 그리고 그에 이은 “무기 없는 군대”이다. 기드온은 이들과 함께 미디안 급습을 준비하며 100명씩 세 대로 나누었다. 그들의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횃불을 들려 감추게 하고 조용히 이동했다. 빈 항아리 속에서 횃불은 계속 타올라야 하면서도 불빛은 새어 나가지 않아야 했기에 만만치 않은 급습이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무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철저히 “기도비닉”을 유지하고 암호를 숙지시켜 일제히 급습할 수 있게 준비했다. 무엇보다 서로 떨어진 곳에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려야 했다. 그것도 이경 초(고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이니, 이경 초는 밤 10시경)에 개시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오늘날처럼 전기 조명이 아예 없던 시대였기에 상당히 깊은 밤이었다.
*칼과 창 없는 야간 급습…… 300명이지만 호흡을 맞추어 일제히 급습해야 하는 조직력이 이제 막 소집된 군사들에게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럼에도 기드온은 미디안 보초병들의 대화에서 확신을 얻고 지체하지 않고 결행한다.
*300명의 군사들의 손에는 무기 대신 “나팔, 빈 항아리, 횃불”이 들려 있다. 하나님의 군사는 지금 자기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전투의 현장이 이미 승리의 현장이 되었음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최신 무기 대신 손에 든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은 하나님의 훌륭한 승리의 도구가 되었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서 이끄신 전쟁이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말도 되지 않는 상황,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믿음이라는 비상식적인 확신만 손에 쥐고 있다. 그런데도 인생의 전장에서 승리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바로 등 뒤에서 안전하게 이 전장을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2. 자중지란, 아비규환, 멈춤 없는 후퇴(19~25절)
마치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내디디며 치렀던 여리고성 전투가 생각난다. 그때의 이스라엘도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나팔과 외침’뿐이었다. 기드온은 밤 이경 초(10~12시), 파수꾼들이 막 교대를 끝낸 그때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서로 부딪쳐 깨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무엇보다 기드온과 300명은 “각기 제자리에서” 그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며,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며 소리를 질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미디안 군대가 “자중지란”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자기편끼리 칼을 빼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들은 그저 각각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들은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긴 전쟁을 참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전쟁을 지켜볼 뿐이었다.
미디안은 자신들의 군사력, 곧 숫자만 의지했다. 삿 8:10에 따르면 13만 5천 명의 군사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급습한 군사가 겨우 300명이었다는 사실을, 서로 칼로 치고 죽어 가면서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상대가, 자신들의 신인 바알이나 아세라는 그저 나무 땔감에 불과함을 깨우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간과하였다. 전쟁은 규모나 무기, 전략과 전술이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 섰느냐 서지 않았느냐가 승리를 판가름한다.
*아쉽게도 세상은 여전히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분명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 기록해 놓았는데도,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판타지 소설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게는 더 비이성적인 방법도 용납하며 자기 욕망과 자기 능력, 자기 세력을 의지한다.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승리를 맛볼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인생의 전장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의지하던 것에 뒤통수를 맞고, 자중지란이 언제든 일어나며, 아비규환과 같은 고통이 멈추지 않는 것은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임을 기드온의 이야기가 분명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
3. 그런데!
기드온의 자세가 불안하다! 보초병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하나님보다 자신의 이름이 더 도드라지게 행동하는 듯한 모습이 불안하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싸워야 할 싸움에 자신의 이름을 살짝 얹는다. “너희는 나를 보고 있다가, 내가 하는 대로 하여라. 내가 적진의 끝으로 가서 하는 대로 따라 하여라. 나와 우리 부대가 함께 나팔을 불면, 너희도 적진의 사방에서 나팔을 불면서 ‘주님 만세! 기드온 만세!’ 하고 외쳐라”(새번역 17~18절).
기드온의 미묘한 변화가 꺼림칙하다.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전쟁에서 기드온 자신의 행동에 무게를 두고 집중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이런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삿 8:22에서는 사사의 직을 세습하게 해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결정적인 오해로 나타난다. “그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하였다.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새번역). 또 9장 17절에서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이복형제들을 몰살하는 현장에서 살아남은 요담의 항변 속에 담긴 고백으로 나타난다. “나의 아버지가 여러분을 살리려고 싸웠으며,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분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지 않았습니까?”(새번역)
가장 긴박한 순간, 결정적인 한마디에 자신의 이름을 부각시킨 일의 영향이 이토록 커질 줄 기드온이 알았을까? 300명으로 나팔과 빈 항아리, 횃불 작전을 주도한 탁월한 영웅으로만 인식하는 후손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승리를 이끄셨다는 고백은 찾아볼 수 없다.
*오늘 내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의 전장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분명한 교훈을 준다. 불가능한 상황일수록, 비상식적인 상황일수록 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하게 선언되고 드러나도록 늘 주의해야겠다.
*특히 목회의 현장이 그렇다! 나의 이름을 끼워 넣고 싶은 유혹이 늘 있다. 내가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저 “말씀하신 대로”, “감동 주셔서 인도하신 대로”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인 양 포장하려는 유혹을 늘 분별하고, 나의 이름을 높이려는 공명심을 경계해야겠다.
나는?
*기드온은 이 전쟁을 그의 손에 붙이신(14절) 하나님께 ‘경배’하고 진격을 명령한다.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출정 준비를 마친 것이다. 승리의 유일한 조건은 ‘군대의 역량’이 아니라 ‘믿음의 역량’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그에게 상식을 넘어선 상상력(창의적 전술)을 불러일으키고, 막강한 전력의 틈을 보게 한다. 어떤 싸움이든 눈에 보이는 ‘전력’을 비교하는 것이 필요한 절차일 수 있으나,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자기 ‘믿음’을 점검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기드온은 미디안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전쟁 준비를 명령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지나치게 “나”, 즉 기드온 자신을 여호와보다 앞세운다. 자기 말만 따르면 된다는 식이다. 우려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여호와께서만 온전히 영광을 받으신다는 생각이 없고, 자신도 얼마간은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긴 듯하다. “기드온을 위하라”고 외치라는 그에게 전쟁은 “오직 여호와께 속한 것”이 아닌 듯하다.
*군사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항아리, 횃불, 나팔’이 전부였다. 신호가 떨어지면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흔들며 나팔을 부는 것이 전술의 전부다(15~18절). ‘무기’치고는 너무 엉뚱하고, ‘작전’치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잊지 않았다. 수적 열세가 확실했으나 그들의 믿음만은 밀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지 정말 근심해야 할 것은 불리한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연약한 ‘믿음’이 아닐까…… 한편 기드온은 단지 제자리에 서서 이 명령만 했을 뿐인데, 적들은 혼란에 빠지고 그들 스스로 자기 동족을 친다. 대적들의 월등한 군사력이 도리어 자신들을 자멸시킨다. 이 어찌 기드온이 예측이나 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도 ‘기드온을 위하여’라니……
*미디안 연합군을 자멸하게 한 것은 ‘기드온의 칼(군대)’이 아니라 ‘여호와의 칼'(20절)이었다. 기드온과 그의 군대는 적진 주변에 ‘서서’ 진을 ‘에워싸고’ 나팔만 ‘불었을’ 뿐, 적군이 서로 칼을 겨누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19~23절). 수적 열세인지 전략적 우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것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뿐, 위경에 처한 우리를 건져 내지 못한다. 인생의 수많은 변수 속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상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전쟁이 또 다른 전쟁(기드온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제 여호와가 아니라 기드온이 전쟁을 주도한다(23~25절). 이미 해산된 지파의 군사들(6:35)이 다시 돌아오고, 기드온이 ‘사자를 보내’ 에브라임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전쟁'(2~4절)과 동떨어져 보인다. 이는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의 승리를 자신들의 공으로 내세우는 모습(8:1~3)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우려(2절)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로 미디안 군사들은 패주하기 시작한다. 이에 기드온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급히 전령을 보내 잔당을 추격하여 섬멸해 줄 것을 요청한다. 납달리와 아셀, 므낫세 지파의 군사들이 이에 응답하여 그들을 뒤쫓는다.
*아마도 300명에서 제외된 군사들이 즉각 응답했을 것이다. 특히 납달리, 아셀, 므낫세라고 특정하여 곧바로 응했다고 한 것은, 이들이 전장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주력 선봉대에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전장 근처를 지킨 이들에게 대미를 장식하는 기회가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300명의 군사들은 정말 한 것이 없구나!
*또 기드온은 미디안의 패잔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건너야 할 벧 바라와 요단강에 이르는 물길(요단 나루터)을 에브라임 지파에게 부탁하여 먼저 차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려는 패잔병들을 남김없이 처단하였다. 더 나아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동편까지 쫓아가서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까마귀)과 스엡(늑대)을 처단하여 전쟁을 마무리한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이미 승리가 결정된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누릴 뿐이었다. 칼과 창이 없어도, 군사적 전술이나 행동이 변변치 않아도, 심지어 기드온이 없어도 하나님은 승리하실 수 있다. 기드온은 순종했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하나님의 영광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지는 못했다. 기드온의 모습 속에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함정이 보인다. 나의 순종으로 빛나는 것이 나 자신이라면, 순종의 의미는 퇴색하고 승리는 반쪽짜리가 될 것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다! [사사기 7:1-14]
양털 시험 끝에 기드온과 3만 2천의 군사들은 하롯 샘 곁에 진을 친다. 미디안은 북서쪽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은 요단강 쪽으로 퇴로가 막힌 형세가 되었다. 즉, 퇴로를 확보하지 않은 채 진을 친 것이다. 이스라엘을 얕잡아 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군사의 수를 3만 2천 명에서 100분의 1 수준인 300명으로 줄이신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1. 숫자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1~8절)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기드온은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길보아 산기슭에 있는 하롯 샘에 진을 친다. 미디안은 반대편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쳤다. 미디안이 북쪽 이스르엘 골짜기까지 왔다는 것은, 남쪽 지역인 가사 지역부터 점점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마침내 북쪽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진을 친 ‘하롯 샘’은 ‘떨림의 샘’이라는 뜻이다.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의 두려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렇게 전쟁을 준비한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적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 이유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스스로 자랑할까 봐”(2절)라고 밝히신다. 이는 6장 36절에서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이라고 한 말에 대한 응답이다. 기드온과 그 백성이 자신의 손으로 승리하였다고 여기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에게 돌릴까 봐 이렇게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1~3절을 통해 먼저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내셨고, 4~8절을 통해 남은 자들 중에서 300명만 남기셨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모인 군대가 3만 2천 명이었으니 꽤 많이 모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의기양양할 만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달랐다. “그들이 너무 많다”(2절) 그리고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하시니 2만 2천 명이 빠져나간다. 1만 명이 남았지만 그 또한 많다고 하시면서, 하롯 샘으로 데리고 가서 물 마시는 태도를 보고 더 줄이라고 하셨다.
개가 핥는 것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 무릎을 꿇고 입으로 물을 마시는 자,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로 나눈 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는 자를 구별하셨다. 이렇게 구별하신 이유는 단순하다. 숫자가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 숫자가 300명이었다. 왜 이들 300명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다. 그중에서 전통적으로, 머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전사로서 좋은 자세이기에 선택되었다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본문은 그들의 자질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이 더 좋은 전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메뚜기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은 미디안 연합군에 비하면 이기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 300명을 남기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소수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아 줄이신 것이다. 좋은 전사를 선발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이렇게 삼만 이천 명의 약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300명이 남겨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전쟁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를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는 300명으로 충분했다. 세상은 숫자에 더 중심을 둔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미디안 족속이 메뚜기 떼같이 밀려왔다고 표현했다(6:5). 이번에 올라온 미디안도 다르지 않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6:33) 올라왔다고 했다. 그들에 비하면 300명은 전쟁하기에 턱없는 숫자였다.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숫자”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된다. 사람들은 숫자의 힘을 맹신한다. 규모의 경제를 더 신뢰한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자기 세력을 더 많이 불리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자.
2. 하나님과 함께이기에!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3절) 하시니 2만 2천 명이 돌아갔다. 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7년간의 미디안의 압제는 두려움을 쉬이 떨쳐 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했고, 자신들은 약하고 초라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들은 전장에서 돌려보내야 했다. 두려움이 팽배해진 군대는 백전백패다. 그런데 이런 용기만으로는 전쟁에 나설 수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겨우 남은 300명……. 미디안의 군대 숫자와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병력이 거대한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300명에게 하나님의 군대로서 사기를 진작시키시려고, 기드온과 그의 부하 부라를 몰래 미디안 군영에 보내 보초 서는 자의 말을 엿듣게 하신다. 놀라운 대화가 오갔는데, 결국 미디안 군대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한 병사가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보리빵 한 덩이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에 이르러서 그 장막을 쳐서 뒤엎으니, 그만 장막이 쓰러지고 말았다네’ 하고 말하니까, 꿈 이야기를 들은 그 친구가 말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의 칼이 틀림없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을 그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일세'”(새번역 13~14절).
두려움에 떤 군대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미디안 군대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겨우 300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으로 이미 전쟁의 결론이 나 있는 상태였다. 미디안은 이미 싸워 보기도 전에 패배하였다.
*하나님과 함께이기에 이길 수 있다. 우리가 갖춘 숫자가 많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3. 승리보다 중요한 것!(9~14절)
미디안의 압제, 우상 숭배에 물든 민족…….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시대였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3만 2천 명이 응답했다. 물론 미디안 연합군에 비하면 턱없는 숫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이번 전쟁의 핵심은 승리보다 “어떻게 이기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규모, 무기, 전략, 전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전쟁,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싶으셨다. 그래서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새번역 2절)라고 하신 것이다.
전쟁의 승리가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기를 원하셨다. 7년 동안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느끼고 동행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깨닫게 해 주고 싶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리 강력하게 여겨지는 미디안의 연합군이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리시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에게서 “여호와 샬롬”의 은혜를 경험하고, 집안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찍어 내고’, 양털 시험을 거쳐 출정한 전쟁에서 정작 자기 힘으로 이룬 것으로 여기고,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과 기드온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여겨 오히려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것을 차단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비상식적인 소수만 남기셨다. 아예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소수만 남기셨다. 또, 이런 소수를 선발하여 훈련시킨 자들로 세우지도 않으셨다. 조금이라도 자기 힘을 과신할 여지 자체를 없애고, 오직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끄신 전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황당한 소수”까지 줄이셨다.
*혹자는 물을 마시는 방법(태도)을 가지고 준비된 자를 선발하셨다고 하지만 아니다. 오직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까지 그저 걸러 내신 것이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떠서 핥는 자가 가장 적은 300명이어서 그들만 남기신 것이 분명하다. 더 적은 숫자를 선택하신 것뿐이다.
*또한 “준비된 용사가 되자”라는 말은 본문과 맞지 않는다. “준비된”에 초점을 맞추면 나팔을 불 때 올라온 3만 2천 명이어야 한다. 준비가 되었어도 개전 직전에 두렵고 떨리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기드온에게 남은 인원은 300명이다. 처음 소집에 응한 3만 2천 명 중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다 돌려보내라고 하셨을 때, 기드온은 두렵고 떨지 않았다. 하지만 300명이 남았을 때 기드온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300명만 남은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야밤 기습을 명하신다(9절).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은 이렇다. “네가 쳐내려가기가 두려우면, 너의 부하 부라와 함께 먼저 적진으로 내려가 보아라”(새번역 10절). 이제는 기드온이 두려운 것이다. 3만 2천 명은 사기가 출중할 숫자였다.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할 숫자였다. 그런데 300명까지 줄이신 하나님 앞에서, 기드온은 하나님보다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에 먼저 사로잡혀 두려워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에서 들은 말은 그를 “숫자 강박”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했다. 오히려 더욱 용기를 내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의 칼이 틀림없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을 그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일세”(새번역 14절).
-기드온은 보초병들의 말을 듣고서야 “비상식적이고 황당하며 초라한 숫자”까지 줄이신 하나님의 권능을 비로소 깨닫는다. “기드온의 칼”을 쥔 자신이 아니라, “기드온의 칼”을 쥐어 주신 하나님을 확신하게 된다. 두렵고 떨리는 자신의 손에 하나님께서 권능의 칼을 쥐어 주신 것을 알았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절실히 깨닫고 확신하게 하시려고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상황)”로 인도하신 적이 꽤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용기를 잃을 수도 있었던 나에게,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들을 부어 주신 것을 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선하게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오늘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장 과정이 그랬고, 사역의 현장에서 큰 위기를 경험했던 청년 시절도 그랬다. 세상 기준으로 한없이 부족함에도 오늘 이 자리에 세우신 것도 그렇다. 내가 의지하려 했던 숫자(상황, 규모, 여건, 재정 등등)를 맥없이 무너뜨리시고 나서야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가 보였다.
*숫자(여건, 재정, 관계 등)는 내가 의지하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승리를 이루어 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다. 내가 미련스럽게 의지하던 “숫자”를 버리니 하나님의 권능, 은혜, 사랑, 긍휼이 보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권능, 그것이 승리를 가져올 뿐이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드실 때 승리를 누릴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이 늘 나를 붙잡아 주시기만 바라고 바랄 뿐이다.
*숫자가 줄어드니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더 커(풍성해)졌다! 내 힘과 의지의 한계가 드러나니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보이기 시작했다!
1. 숫자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1~8절)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기드온은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길보아 산기슭에 있는 하롯 샘에 진을 친다. 미디안은 반대편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쳤다. 미디안이 북쪽 이스르엘 골짜기까지 왔다는 것은, 남쪽 지역인 가사 지역부터 점점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마침내 북쪽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진을 친 ‘하롯 샘’은 ‘떨림의 샘’이라는 뜻이다.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의 두려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렇게 전쟁을 준비한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적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 이유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스스로 자랑할까 봐”(2절)라고 밝히신다. 이는 6장 36절에서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이라고 한 말에 대한 응답이다. 기드온과 그 백성이 자신의 손으로 승리하였다고 여기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에게 돌릴까 봐 이렇게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1~3절을 통해 먼저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내셨고, 4~8절을 통해 남은 자들 중에서 300명만 남기셨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모인 군대가 3만 2천 명이었으니 꽤 많이 모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의기양양할 만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달랐다. “그들이 너무 많다”(2절) 그리고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하시니 2만 2천 명이 빠져나간다. 1만 명이 남았지만 그 또한 많다고 하시면서, 하롯 샘으로 데리고 가서 물 마시는 태도를 보고 더 줄이라고 하셨다.
개가 핥는 것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 무릎을 꿇고 입으로 물을 마시는 자,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로 나눈 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는 자를 구별하셨다. 이렇게 구별하신 이유는 단순하다. 숫자가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 숫자가 300명이었다. 왜 이들 300명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다. 그중에서 전통적으로, 머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전사로서 좋은 자세이기에 선택되었다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본문은 그들의 자질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이 더 좋은 전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메뚜기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은 미디안 연합군에 비하면 이기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 300명을 남기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소수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아 줄이신 것이다. 좋은 전사를 선발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이렇게 삼만 이천 명의 약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300명이 남겨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전쟁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를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는 300명으로 충분했다. 세상은 숫자에 더 중심을 둔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미디안 족속이 메뚜기 떼같이 밀려왔다고 표현했다(6:5). 이번에 올라온 미디안도 다르지 않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6:33) 올라왔다고 했다. 그들에 비하면 300명은 전쟁하기에 턱없는 숫자였다.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숫자”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된다. 사람들은 숫자의 힘을 맹신한다. 규모의 경제를 더 신뢰한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자기 세력을 더 많이 불리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자.
2. 하나님과 함께이기에!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3절) 하시니 2만 2천 명이 돌아갔다. 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7년간의 미디안의 압제는 두려움을 쉬이 떨쳐 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했고, 자신들은 약하고 초라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들은 전장에서 돌려보내야 했다. 두려움이 팽배해진 군대는 백전백패다. 그런데 이런 용기만으로는 전쟁에 나설 수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겨우 남은 300명……. 미디안의 군대 숫자와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병력이 거대한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300명에게 하나님의 군대로서 사기를 진작시키시려고, 기드온과 그의 부하 부라를 몰래 미디안 군영에 보내 보초 서는 자의 말을 엿듣게 하신다. 놀라운 대화가 오갔는데, 결국 미디안 군대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한 병사가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보리빵 한 덩이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에 이르러서 그 장막을 쳐서 뒤엎으니, 그만 장막이 쓰러지고 말았다네’ 하고 말하니까, 꿈 이야기를 들은 그 친구가 말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의 칼이 틀림없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을 그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일세'”(새번역 13~14절).
두려움에 떤 군대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미디안 군대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겨우 300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으로 이미 전쟁의 결론이 나 있는 상태였다. 미디안은 이미 싸워 보기도 전에 패배하였다.
*하나님과 함께이기에 이길 수 있다. 우리가 갖춘 숫자가 많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3. 승리보다 중요한 것!(9~14절)
미디안의 압제, 우상 숭배에 물든 민족…….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시대였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3만 2천 명이 응답했다. 물론 미디안 연합군에 비하면 턱없는 숫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이번 전쟁의 핵심은 승리보다 “어떻게 이기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규모, 무기, 전략, 전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전쟁,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싶으셨다. 그래서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새번역 2절)라고 하신 것이다.
전쟁의 승리가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기를 원하셨다. 7년 동안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느끼고 동행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깨닫게 해 주고 싶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리 강력하게 여겨지는 미디안의 연합군이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리시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에게서 “여호와 샬롬”의 은혜를 경험하고, 집안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찍어 내고’, 양털 시험을 거쳐 출정한 전쟁에서 정작 자기 힘으로 이룬 것으로 여기고,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과 기드온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여겨 오히려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것을 차단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비상식적인 소수만 남기셨다. 아예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소수만 남기셨다. 또, 이런 소수를 선발하여 훈련시킨 자들로 세우지도 않으셨다. 조금이라도 자기 힘을 과신할 여지 자체를 없애고, 오직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끄신 전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황당한 소수”까지 줄이셨다.
*혹자는 물을 마시는 방법(태도)을 가지고 준비된 자를 선발하셨다고 하지만 아니다. 오직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까지 그저 걸러 내신 것이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떠서 핥는 자가 가장 적은 300명이어서 그들만 남기신 것이 분명하다. 더 적은 숫자를 선택하신 것뿐이다.
*또한 “준비된 용사가 되자”라는 말은 본문과 맞지 않는다. “준비된”에 초점을 맞추면 나팔을 불 때 올라온 3만 2천 명이어야 한다. 준비가 되었어도 개전 직전에 두렵고 떨리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기드온에게 남은 인원은 300명이다. 처음 소집에 응한 3만 2천 명 중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다 돌려보내라고 하셨을 때, 기드온은 두렵고 떨지 않았다. 하지만 300명이 남았을 때 기드온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300명만 남은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야밤 기습을 명하신다(9절).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은 이렇다. “네가 쳐내려가기가 두려우면, 너의 부하 부라와 함께 먼저 적진으로 내려가 보아라”(새번역 10절). 이제는 기드온이 두려운 것이다. 3만 2천 명은 사기가 출중할 숫자였다.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할 숫자였다. 그런데 300명까지 줄이신 하나님 앞에서, 기드온은 하나님보다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에 먼저 사로잡혀 두려워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에서 들은 말은 그를 “숫자 강박”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했다. 오히려 더욱 용기를 내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의 칼이 틀림없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을 그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일세”(새번역 14절).
-기드온은 보초병들의 말을 듣고서야 “비상식적이고 황당하며 초라한 숫자”까지 줄이신 하나님의 권능을 비로소 깨닫는다. “기드온의 칼”을 쥔 자신이 아니라, “기드온의 칼”을 쥐어 주신 하나님을 확신하게 된다. 두렵고 떨리는 자신의 손에 하나님께서 권능의 칼을 쥐어 주신 것을 알았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절실히 깨닫고 확신하게 하시려고 “비상식적이고 초라하며 황당한 숫자(상황)”로 인도하신 적이 꽤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용기를 잃을 수도 있었던 나에게,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들을 부어 주신 것을 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선하게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오늘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장 과정이 그랬고, 사역의 현장에서 큰 위기를 경험했던 청년 시절도 그랬다. 세상 기준으로 한없이 부족함에도 오늘 이 자리에 세우신 것도 그렇다. 내가 의지하려 했던 숫자(상황, 규모, 여건, 재정 등등)를 맥없이 무너뜨리시고 나서야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가 보였다.
*숫자(여건, 재정, 관계 등)는 내가 의지하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승리를 이루어 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다. 내가 미련스럽게 의지하던 “숫자”를 버리니 하나님의 권능, 은혜, 사랑, 긍휼이 보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권능, 그것이 승리를 가져올 뿐이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드실 때 승리를 누릴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이 늘 나를 붙잡아 주시기만 바라고 바랄 뿐이다.
*숫자가 줄어드니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더 커(풍성해)졌다! 내 힘과 의지의 한계가 드러나니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드온의 밤중 순종과 우상 파괴, 그리고 양털 시험 [사사기 6:25-40]
기드온이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고 “여호와 샬롬”의 제단을 쌓은 그날 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요아스의 집에 있는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고 와서, 아버지의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제단을 쌓고 둘째 수소를 잡아 그 찍은 아세라 상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이었다(25~26절). 그런데 기드온은 이 일을 대낮에 행하지 못한다. 온 동네와 아버지를 거스를 수 없었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에 하지 못하고 밤중에 나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자기 이름의 뜻대로 “찍어 냈다.”
*지금 행해야 할 일을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으로 받아들여, 아무리 많은 도전과 위협과 압박이 밀려와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여호와의 샬롬을 경험한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내며, 미디안 연합군에 맞설 순종의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데…….
1. 밤중에 순종(25~32절)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 요아스가 두려워 한밤중에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찍어 내어 버린 기드온……. 그리고 새로 쌓은 단 위에 둘째 수소를 드렸다. 하지만 아침이 되니 얼마 가지 못하고 들통나고 만다.
동네 주민들은 노발대발하며 이런 일을 행한 자를 색출하였고, 급기야 기드온의 소행임을 알게 된다. 성읍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기드온을 죽이려 한다. 그러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담대하게 선포한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하여 다툴 것이니라.”(31절) 이렇게 위기를 넘긴 기드온을 사람들은 “여룹바알(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다)”이라 불렀다.
*바알과 아세라가 살아 있는 신이라면 기드온의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그 찍어 냄을 당하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드온의 순종이 눈물겹다. “…… 밤에 행하니라.”(27절) 집안사람들도 무서웠고, 동네 주민들도 무서웠다. 하지만 여호와 샬롬의 은혜의 힘이 주저하던 그를 결행하게 했다. 낮이 아닌 밤에…….
*기드온이 낮에 명령을 준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밤에라도 순종한 것이 대견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의 장벽이 너무나 강력한데도 순종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하고 대견스럽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 낸다는 것이 갈수록 어려운 시대이지만, 낮에 하지 못하면 밤에라도 순종하는 기드온이 고맙다. 나도 그리할 수 있겠다!
2.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니(33~40절)
기드온은 밤에 순종한 후 마을 주민들의 거센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 요아스는 침착하다. 오히려 바알의 단을 허물었으니 바알이 판단하겠지 하며 주민들의 분노를 잠재운다. 그렇게 사사로 세움을 받고 첫 관문을 통과한 기드온에게 미디안 연합군의 침략 소식이 들려오고(33절), 이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였다”(34절). 그리고 나팔을 불었는데, 집안사람들(아비에셀 족속)이 반응하여 나온다.
참 희한하다! 집안의 바알의 단을 허무는 사고를 친 아들의 나팔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 가족이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결과다! 기드온의 말과 행동에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고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팔을 부니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려 3만 2천 명이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렇게 모여든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장으로 나가지 않는다. “양털 시험”을 진행한다. 여호와 샬롬까지 경험했고 바알과 아세라 신상까지 찍어 내어 버렸는데, 출정은 미룬다. 그러고는 하나님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는지 다시 증거를 구한 것이다.
*사실 기드온처럼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고 나서 사사로 세움을 받은 이는 없다. 다른 사사들은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사사가 되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날 때도 미적거리더니, 이번에도 미적거린다. 양털 시험의 목적은 “증표”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원하는 대로 증표를 주셨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변함이 없다. 인간의 불평과 불순종이라는 변수도 그 계획을 막아 낼 수 없다.
*기드온의 소심한 마음이 여전히 온전한 순종, 곧 즉각적인 순종을 어렵게 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는 것이 맞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순종하고 싶어서 시험한 것이다. 두려움 없이 즉시, 머뭇거리지 않고 나아가 순종하는 것이 참 보기에도 좋겠지만, 기드온은 스스로를 확신하기에는 너무 경험이 적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받들어 순종하기에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설익었고, 맞서야 할 도전은 너무나 막강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제발 순종할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순종하기 위한 기드온의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나도 그래야 한다!
나는?
-기드온은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아버지 밑에서 살았다. 그도 우상 숭배에 참여했을 것이 당연하다. 사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전에, 또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우상을 꼭 제거해야 했다. 땔감밖에 안 되는 나무를 우상으로 섬긴 것이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오브라 성읍 높은 곳에서 칠 년 된 수소로 제사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밤에 한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도 두려워했지만, 사람들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은 그날 밤(24절),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신다(25~27절). 이 땅의 주인이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우상으로 얼룩진 이 땅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상 숭배의 허망함을 드러내어,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경각심을 주신다. 우상의 허위를 폭로하고 우상이 주는 혜택을 거부하며 우상을 파괴하는 일은 ‘예배의 회복(24절)’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현현을 대면한 기드온이었지만, 오랫동안 믿어 온 바알의 단을 허무는 일은 두려웠을 것이다. 훼파된 바알의 단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은 그의 목숨을 요구한다(27~30절). 그들은 ‘왜’보다 ‘누가’ 이 일을 행했는지만 추궁한다. 압제의 고통을 초래한 자신들의 패역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다. ‘우상 척결’의 주범은 찾아냈지만, 정작 자신들이 ‘우상 숭배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렇다. 눈에 보이는 우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 기만이다.
-기드온의 우상 제거 사실을 확인한 백성들은 그를 죽이려 한다. 하나님보다 아모리 사람들의 신, 곧 우상을 더 두려워한 것이다. 이에 기드온의 아버지이자 우상 숭배자인 요아스는 바알이 알아서 심판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만류한다. 그런데 이 발언이 스스로 자기 신을 조롱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자기 동족까지 조롱하는 말이 될 줄은 몰랐다.
-바알의 ‘무능’이 폭로된다. 자신을 위해 변론할 수도,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는 거짓 신임이 드러난다(31~32절). 지금도 우상과 그 세력이 늘 우세할 것 같고, 이미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우상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시’이자 ‘착각’일 뿐이다. 우상은 철저히 무능하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한다.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여 그는 사사로 부름받는다. 그러나 기드온은 또 주저한다. 두 번의 시험을 통해, 꼭 자신이 가야 한다면 확증해 달라고 요청한다. 자기 자신도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시험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들어주신다. 이처럼 기드온을 용맹하게 만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내였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기드온이 거듭 군대를 소집한다(33~35절).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은데도, 자기 힘(‘내 손’)을 의지하려는 불신앙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번의 징집은 결국 두 번의 해산(7:2, 4)으로 끝나고 만다. 내게도 하나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인간적인 힘을 모으는 데 몰두한 적은 없었을까? 겸손하게 돌아볼 일이다.
-기드온은 거듭 요청한다. 앞서 바알과 쟁론하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시험한다(3:1). 시험의 의도는 감춘 채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 기다린다(36~40절). 내 신중함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불순종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 말씀이 감사하다. 밤에라도 순종해야지……. 증거를 구하더라도 순종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순종하고 싶어서 확신을 더 구해야지…….
*지금 행해야 할 일을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으로 받아들여, 아무리 많은 도전과 위협과 압박이 밀려와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여호와의 샬롬을 경험한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내며, 미디안 연합군에 맞설 순종의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데…….
1. 밤중에 순종(25~32절)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 요아스가 두려워 한밤중에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찍어 내어 버린 기드온……. 그리고 새로 쌓은 단 위에 둘째 수소를 드렸다. 하지만 아침이 되니 얼마 가지 못하고 들통나고 만다.
동네 주민들은 노발대발하며 이런 일을 행한 자를 색출하였고, 급기야 기드온의 소행임을 알게 된다. 성읍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기드온을 죽이려 한다. 그러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담대하게 선포한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하여 다툴 것이니라.”(31절) 이렇게 위기를 넘긴 기드온을 사람들은 “여룹바알(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다)”이라 불렀다.
*바알과 아세라가 살아 있는 신이라면 기드온의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그 찍어 냄을 당하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드온의 순종이 눈물겹다. “…… 밤에 행하니라.”(27절) 집안사람들도 무서웠고, 동네 주민들도 무서웠다. 하지만 여호와 샬롬의 은혜의 힘이 주저하던 그를 결행하게 했다. 낮이 아닌 밤에…….
*기드온이 낮에 명령을 준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밤에라도 순종한 것이 대견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의 장벽이 너무나 강력한데도 순종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하고 대견스럽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 낸다는 것이 갈수록 어려운 시대이지만, 낮에 하지 못하면 밤에라도 순종하는 기드온이 고맙다. 나도 그리할 수 있겠다!
2.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니(33~40절)
기드온은 밤에 순종한 후 마을 주민들의 거센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 요아스는 침착하다. 오히려 바알의 단을 허물었으니 바알이 판단하겠지 하며 주민들의 분노를 잠재운다. 그렇게 사사로 세움을 받고 첫 관문을 통과한 기드온에게 미디안 연합군의 침략 소식이 들려오고(33절), 이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였다”(34절). 그리고 나팔을 불었는데, 집안사람들(아비에셀 족속)이 반응하여 나온다.
참 희한하다! 집안의 바알의 단을 허무는 사고를 친 아들의 나팔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 가족이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결과다! 기드온의 말과 행동에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고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팔을 부니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려 3만 2천 명이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렇게 모여든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장으로 나가지 않는다. “양털 시험”을 진행한다. 여호와 샬롬까지 경험했고 바알과 아세라 신상까지 찍어 내어 버렸는데, 출정은 미룬다. 그러고는 하나님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는지 다시 증거를 구한 것이다.
*사실 기드온처럼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고 나서 사사로 세움을 받은 이는 없다. 다른 사사들은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사사가 되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날 때도 미적거리더니, 이번에도 미적거린다. 양털 시험의 목적은 “증표”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원하는 대로 증표를 주셨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변함이 없다. 인간의 불평과 불순종이라는 변수도 그 계획을 막아 낼 수 없다.
*기드온의 소심한 마음이 여전히 온전한 순종, 곧 즉각적인 순종을 어렵게 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는 것이 맞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순종하고 싶어서 시험한 것이다. 두려움 없이 즉시, 머뭇거리지 않고 나아가 순종하는 것이 참 보기에도 좋겠지만, 기드온은 스스로를 확신하기에는 너무 경험이 적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받들어 순종하기에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설익었고, 맞서야 할 도전은 너무나 막강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제발 순종할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순종하기 위한 기드온의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나도 그래야 한다!
나는?
-기드온은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아버지 밑에서 살았다. 그도 우상 숭배에 참여했을 것이 당연하다. 사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전에, 또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우상을 꼭 제거해야 했다. 땔감밖에 안 되는 나무를 우상으로 섬긴 것이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오브라 성읍 높은 곳에서 칠 년 된 수소로 제사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밤에 한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도 두려워했지만, 사람들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은 그날 밤(24절),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신다(25~27절). 이 땅의 주인이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우상으로 얼룩진 이 땅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상 숭배의 허망함을 드러내어,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경각심을 주신다. 우상의 허위를 폭로하고 우상이 주는 혜택을 거부하며 우상을 파괴하는 일은 ‘예배의 회복(24절)’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현현을 대면한 기드온이었지만, 오랫동안 믿어 온 바알의 단을 허무는 일은 두려웠을 것이다. 훼파된 바알의 단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은 그의 목숨을 요구한다(27~30절). 그들은 ‘왜’보다 ‘누가’ 이 일을 행했는지만 추궁한다. 압제의 고통을 초래한 자신들의 패역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다. ‘우상 척결’의 주범은 찾아냈지만, 정작 자신들이 ‘우상 숭배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렇다. 눈에 보이는 우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 기만이다.
-기드온의 우상 제거 사실을 확인한 백성들은 그를 죽이려 한다. 하나님보다 아모리 사람들의 신, 곧 우상을 더 두려워한 것이다. 이에 기드온의 아버지이자 우상 숭배자인 요아스는 바알이 알아서 심판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만류한다. 그런데 이 발언이 스스로 자기 신을 조롱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자기 동족까지 조롱하는 말이 될 줄은 몰랐다.
-바알의 ‘무능’이 폭로된다. 자신을 위해 변론할 수도,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는 거짓 신임이 드러난다(31~32절). 지금도 우상과 그 세력이 늘 우세할 것 같고, 이미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우상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시’이자 ‘착각’일 뿐이다. 우상은 철저히 무능하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한다.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여 그는 사사로 부름받는다. 그러나 기드온은 또 주저한다. 두 번의 시험을 통해, 꼭 자신이 가야 한다면 확증해 달라고 요청한다. 자기 자신도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시험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들어주신다. 이처럼 기드온을 용맹하게 만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내였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기드온이 거듭 군대를 소집한다(33~35절).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은데도, 자기 힘(‘내 손’)을 의지하려는 불신앙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번의 징집은 결국 두 번의 해산(7:2, 4)으로 끝나고 만다. 내게도 하나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인간적인 힘을 모으는 데 몰두한 적은 없었을까? 겸손하게 돌아볼 일이다.
-기드온은 거듭 요청한다. 앞서 바알과 쟁론하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시험한다(3:1). 시험의 의도는 감춘 채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 기다린다(36~40절). 내 신중함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불순종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 말씀이 감사하다. 밤에라도 순종해야지……. 증거를 구하더라도 순종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순종하고 싶어서 확신을 더 구해야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큰 용사 기드온 [사사기 6:11-24]
한 선지자의 외침이 웅덩이와 굴과 산성에 칩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울부짖는 백성들의 음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사사 기드온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사자(천사)는 기드온을 찾아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명령한다. 기드온은 믿기지 않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하려 하고 표적을 구한다. 하지만 결국 “여호와 샬롬”의 고백이 터져 나온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가 사사로 등장할 때는 그 과정이 매우 짧게 언급되었다. “한 구원자(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는 과정은 매우 자세하게 소개된다. 아마도 다른 사사들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흔쾌히 사사로 나서는 이가 과연 있을까? 사명에 대한 부담과 불안이 확신과 담대함으로 변화되기까지 기드온에게 나타나는 이 과정이 모든 사사에게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신 끝에 출현하는 것이다. 기드온과 대화하시고, 반문하는 그의 말에 대답하시며, 때로 표징도 보이신다. 지난한 설득의 과정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기드온을 통해서 보니, 지금껏 세워진 거의 모든 사사를 이렇게 세우셨을 것이다.
1. 기드온은 누구인가?(11절)
이스라엘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온 미디안 족속에게 7년 동안 압제를 받았다(1절). 이런 압제 속에서 그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산지에 굴을 파고 계곡 사이에 숨어서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에게 나타나신다.
기드온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아들이다(11절). 그는 므낫세 지파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처음 만난 장소는 그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곳이었다(11절). 밀을 타작하는 곳은 탁 트인 타작마당이어야 했다. 하지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포도주를 짜는 틀에서 조금씩 가만가만 타작했다는 것이다. 미디안 사람이 두려워서, 때가 때인지라 포도주를 밟는 구덩이에서 가만가만 타작해야 했다(11절). 이런 기드온이 과연 이스라엘의 사사가 될 수 있을까?
2. 큰 용사여(12절)
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잊어버린(순종하지 않은)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그리고 기드온을 찾아오신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사명자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기드온 역시 그 한 선지자의 말씀에 반응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듣게 하신 후, 맡기실 사명을 선언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히브리어 어순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큰 용사여”다. 미디안의 폭거에 숨죽이며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는 기드온에게 어떤 탁월한 능력과 힘이 숨겨져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에” “큰 용사”인 것이다.
“큰 용사(기보르 헤하일)”를 직역하면 “그 군대의 영웅”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하나님 나라 군대의 영웅이 된다. 사람의 능력으로 “큰 용사”를 가늠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이 곧 큰 용사 됨의 척도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겁쟁이를 큰 용사라고 하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치에 맞지 않아도” 큰 용사라고 선언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디안 족속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기드온이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터이니 이보다 더 큰 용사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선언의 연속이다. 출애굽 때 애굽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이 그러셨고, 광야 40년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행하시며 백성들을 지키셨다. 가나안의 왕들을 물리친 것도 역시 말도 안 되는,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들이 모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었다.
*인간 세상의 이치를 초월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상식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이것이 곧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이라는 세계의 모습이다. 기드온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의 마음(뜻)을 따라 선언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세상 이치의 굴레를 뛰어넘어 “큰 용사(그 군대의 영웅)”로 세움 받는다. 그가 아무리 “므낫세 지파(동과 서로 나뉜 약한 지파)”에 속했고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사람(보잘것없는 영향력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가장 큰 용사다.
3. 밀당 끝에 여호와 샬롬(12~24절)
기드온은 자신을 큰 용사라고 부르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먼저 솔직하게 고백한다. 한 선지자를 통해 하셨던 말씀들(8~10절)을 복기하면서, 그런 하나님이 왜 자신들을 미디안의 손에 버리셨냐고 항변한다(새번역 13절). (한 선지자의 외침을 꼼꼼히 들으며 기억했던 것이다.) 기드온은 이미 한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강한 불평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미디안에게 버리셨습니까?”
*통상적으로 선지자의 신랄한 회개의 외침을 들었다면 회개하기 마련인데, 기드온은 도리어 화를 낸다. 특히 지금 이 상황의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임을 분명히 알려 주었는데도, 회개가 아니라 강한 불평이다. 하나님께 사사로 부름을 받는 이의 반응치고는 상당히 예상에 못 미친다. 회개가 아니고 반항이라니……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는 그런 기드온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언하신다. 여호와의 사자는 친히 너를 세워 그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새번역 14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쯤에서 무릎을 꿇고 받아들일 법도 한데, 기드온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직접적으로(핑계하며, 혹은 따져) 묻는다. 자신이 속한 가문(므낫세)과 상황(가장 약함),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형제 중 가장 약한데(새번역 15절)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 용사의 조건에 맞지도 않는 자신은 그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새번역 16절)라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구한다(17절). 그러면서 막연하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올리는 제물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집으로 돌아가 제물을 준비하여 돌아왔다. 사자는 제물을 바위 위에 진설하게 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 끝을 내밀어 불을 내어 제물을 태웠다. 동시에 사자가 사라진다(17~21절). 그러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음을 깨닫고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에게 맡기실 사사의 사명을 생각하기보다 지금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했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드온의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지시면서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죽지 않는다”(새번역 23절)라는 삼중의 말씀으로 안전을 확증해 주신다. 이 말씀을 들은 기드온은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른다.
나는?
-대적의 눈을 피해 포도즙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소심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큰 용사(사사)’로 부르신다(11~12절). 지금 그의 행동에서는 결코 용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에게서 큰 용사의 얼굴을 그려내신다. 어떤가? 오늘의 내 모습보다 주님께서 빚어 가실 나의 내일을 기대하며 소명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내리라.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나도, 우리가 체념한 그 사람도 주님은 달리 보고 계실지 모른다. 순종할 때 헛된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에 흥분하기보다, 이스라엘의 참담한 상황을 알리며 울분을 토한다. 그는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증거라고 속단하고, 그 책임을 백성(10절)이 아닌 하나님께 묻는다(13~14절). 뼈아픈 현실은 인지했으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자신이 그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대안(응답)’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의 자격 없음(미약함)을 내세워 거절하는 기드온에게 동행과 승리를 약속하신다. 주저하는 기드온 앞에는 ‘하나님의 동행’이 아니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과, 또 이룰 수 없는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15~16절). 부족하다고 물러서는 소극성이 항상 믿음은 아니다. 힘겨운 싸움이 기다릴지라도, 부르시고 맡기시고 보내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다른 어떤 자격 요건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기드온은 거듭되는 약속(12, 16절)에도 눈에 보이는 표징 없이는 믿을 수 없다며 뒷걸음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랜 기다림과 함께 그의 제물에 ‘불’로 응답하셔서 그를 설복하시고 ‘평안’을 주신다. 이에 화답하여 기드온은 우상을 숭배하던 자리에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는다(17~24절). 믿음의 길을 걸으며 가시적인 증거들을 찾기보다, 성경 갈피갈피마다 새겨 두신 신실한 동행의 약속에 주목하여 순종을 회피하지 말고 짙은 의심도 걷어내야 한다. 혹시 주님의 뜻이 분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싫어서 주저하는 것은 아닌가?
*기드온은 끊임없이 “증거, 증표” 등을 구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이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기록된 말씀을 따라 확신하는 것보다 온몸으로 느껴야 더 확신이 된다. 기드온이나 우리나 매한가지다. 말씀에서 멀어져 있을수록 표징을 더 찾기 마련이다. 기록된 말씀, 들려지는 말씀을 신뢰하기보다 기적을 더 바란다. 기드온이나 나나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의 질문은 단순한 불평불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우리를 버리신 것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배경도 능력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여 주지 않으면 못 믿겠다!”는 식으로 개선(?)되어 간다. 급기야 이런 모든 회의와 의심, 반문의 결론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이렇게 깨닫고 난 후에는 “여호와 샬롬”, “여호와께서 평안을 이루신다”는 고백을 마침내 드렸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그분의 말씀에 비아냥거렸지만, 그 모든 과정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이 되살아났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조상들의 가르침이 생각난 것이다. 즉, 말씀이 되살아났다!
*말씀이 되살아나니 “샬롬”이 찾아왔다. 그의 마음에 가득하던 불평과 불만, 의심과 반항의 어수선함과 격동, 7년 동안 미디안의 폭거로 쌓인 “화”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화”가 스며든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무디어지고 무디어진 하나님에 대한 감각들을 일깨우시고, 잊혔던 말씀들이 실제가 되게 하시며, 마침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거룩한 용기가 솟아나게 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지금 이스라엘의 삶에 가득 찬 분노와 고통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고 자신에게 나타나셨음을 깨달아, “평화와 소망”, “용기”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반응하여 일어서게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나에게 말씀을 통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며 반응하기를 결심한다. 이렇게 설득하시고, 기다리시며, 보여 주시고, 증명(증거)하여 자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를 그렇게 지금 이 자리에 세워 주신 것이다.
*새파랗던 고등학교 2학년 무더운 여름, 고흥 녹동의 바닷가에서 하나님께 철없이 부르짖으며 드렸던 철부지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고, 기드온에게 하셨던 것처럼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다. 무엇보다 “늘 함께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사명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지난한 밀당의 시간을 받아 주시며 세워 주신 것이다. 내가 잘났고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하도록 능력을 부어 주시며, 무엇보다 “여기까지 함께하여 주셨기에, 앞으로도 함께하여 주실 것이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기드온의 한없이 철없는 밀당을 받아 주신 것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어 “큰 용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향해 밀당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뜻 안에서 밀당을 하신 것이다. “큰 용사”는 세상이 인정하는 조건이 채워진 사람이 아니라,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큰 용사임을 세세하게 깨닫게 하신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가 사사로 등장할 때는 그 과정이 매우 짧게 언급되었다. “한 구원자(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는 과정은 매우 자세하게 소개된다. 아마도 다른 사사들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흔쾌히 사사로 나서는 이가 과연 있을까? 사명에 대한 부담과 불안이 확신과 담대함으로 변화되기까지 기드온에게 나타나는 이 과정이 모든 사사에게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신 끝에 출현하는 것이다. 기드온과 대화하시고, 반문하는 그의 말에 대답하시며, 때로 표징도 보이신다. 지난한 설득의 과정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쉽게 세워지지 않는다. 기드온을 통해서 보니, 지금껏 세워진 거의 모든 사사를 이렇게 세우셨을 것이다.
1. 기드온은 누구인가?(11절)
이스라엘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온 미디안 족속에게 7년 동안 압제를 받았다(1절). 이런 압제 속에서 그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산지에 굴을 파고 계곡 사이에 숨어서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에게 나타나신다.
기드온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아들이다(11절). 그는 므낫세 지파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처음 만난 장소는 그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곳이었다(11절). 밀을 타작하는 곳은 탁 트인 타작마당이어야 했다. 하지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포도주를 짜는 틀에서 조금씩 가만가만 타작했다는 것이다. 미디안 사람이 두려워서, 때가 때인지라 포도주를 밟는 구덩이에서 가만가만 타작해야 했다(11절). 이런 기드온이 과연 이스라엘의 사사가 될 수 있을까?
2. 큰 용사여(12절)
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잊어버린(순종하지 않은)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그리고 기드온을 찾아오신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사명자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기드온 역시 그 한 선지자의 말씀에 반응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듣게 하신 후, 맡기실 사명을 선언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히브리어 어순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큰 용사여”다. 미디안의 폭거에 숨죽이며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는 기드온에게 어떤 탁월한 능력과 힘이 숨겨져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에” “큰 용사”인 것이다.
“큰 용사(기보르 헤하일)”를 직역하면 “그 군대의 영웅”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하나님 나라 군대의 영웅이 된다. 사람의 능력으로 “큰 용사”를 가늠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이 곧 큰 용사 됨의 척도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겁쟁이를 큰 용사라고 하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치에 맞지 않아도” 큰 용사라고 선언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디안 족속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기드온이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터이니 이보다 더 큰 용사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선언의 연속이다. 출애굽 때 애굽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이 그러셨고, 광야 40년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행하시며 백성들을 지키셨다. 가나안의 왕들을 물리친 것도 역시 말도 안 되는,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들이 모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었다.
*인간 세상의 이치를 초월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상식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이것이 곧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이라는 세계의 모습이다. 기드온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의 마음(뜻)을 따라 선언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세상 이치의 굴레를 뛰어넘어 “큰 용사(그 군대의 영웅)”로 세움 받는다. 그가 아무리 “므낫세 지파(동과 서로 나뉜 약한 지파)”에 속했고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사람(보잘것없는 영향력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가장 큰 용사다.
3. 밀당 끝에 여호와 샬롬(12~24절)
기드온은 자신을 큰 용사라고 부르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먼저 솔직하게 고백한다. 한 선지자를 통해 하셨던 말씀들(8~10절)을 복기하면서, 그런 하나님이 왜 자신들을 미디안의 손에 버리셨냐고 항변한다(새번역 13절). (한 선지자의 외침을 꼼꼼히 들으며 기억했던 것이다.) 기드온은 이미 한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강한 불평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미디안에게 버리셨습니까?”
*통상적으로 선지자의 신랄한 회개의 외침을 들었다면 회개하기 마련인데, 기드온은 도리어 화를 낸다. 특히 지금 이 상황의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임을 분명히 알려 주었는데도, 회개가 아니라 강한 불평이다. 하나님께 사사로 부름을 받는 이의 반응치고는 상당히 예상에 못 미친다. 회개가 아니고 반항이라니……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는 그런 기드온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언하신다. 여호와의 사자는 친히 너를 세워 그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새번역 14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쯤에서 무릎을 꿇고 받아들일 법도 한데, 기드온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직접적으로(핑계하며, 혹은 따져) 묻는다. 자신이 속한 가문(므낫세)과 상황(가장 약함),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형제 중 가장 약한데(새번역 15절)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 용사의 조건에 맞지도 않는 자신은 그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새번역 16절)라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구한다(17절). 그러면서 막연하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올리는 제물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집으로 돌아가 제물을 준비하여 돌아왔다. 사자는 제물을 바위 위에 진설하게 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 끝을 내밀어 불을 내어 제물을 태웠다. 동시에 사자가 사라진다(17~21절). 그러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음을 깨닫고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에게 맡기실 사사의 사명을 생각하기보다 지금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했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드온의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지시면서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죽지 않는다”(새번역 23절)라는 삼중의 말씀으로 안전을 확증해 주신다. 이 말씀을 들은 기드온은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른다.
나는?
-대적의 눈을 피해 포도즙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소심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큰 용사(사사)’로 부르신다(11~12절). 지금 그의 행동에서는 결코 용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에게서 큰 용사의 얼굴을 그려내신다. 어떤가? 오늘의 내 모습보다 주님께서 빚어 가실 나의 내일을 기대하며 소명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내리라.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나도, 우리가 체념한 그 사람도 주님은 달리 보고 계실지 모른다. 순종할 때 헛된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에 흥분하기보다, 이스라엘의 참담한 상황을 알리며 울분을 토한다. 그는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증거라고 속단하고, 그 책임을 백성(10절)이 아닌 하나님께 묻는다(13~14절). 뼈아픈 현실은 인지했으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자신이 그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대안(응답)’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의 자격 없음(미약함)을 내세워 거절하는 기드온에게 동행과 승리를 약속하신다. 주저하는 기드온 앞에는 ‘하나님의 동행’이 아니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과, 또 이룰 수 없는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15~16절). 부족하다고 물러서는 소극성이 항상 믿음은 아니다. 힘겨운 싸움이 기다릴지라도, 부르시고 맡기시고 보내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다른 어떤 자격 요건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기드온은 거듭되는 약속(12, 16절)에도 눈에 보이는 표징 없이는 믿을 수 없다며 뒷걸음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랜 기다림과 함께 그의 제물에 ‘불’로 응답하셔서 그를 설복하시고 ‘평안’을 주신다. 이에 화답하여 기드온은 우상을 숭배하던 자리에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는다(17~24절). 믿음의 길을 걸으며 가시적인 증거들을 찾기보다, 성경 갈피갈피마다 새겨 두신 신실한 동행의 약속에 주목하여 순종을 회피하지 말고 짙은 의심도 걷어내야 한다. 혹시 주님의 뜻이 분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싫어서 주저하는 것은 아닌가?
*기드온은 끊임없이 “증거, 증표” 등을 구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이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기록된 말씀을 따라 확신하는 것보다 온몸으로 느껴야 더 확신이 된다. 기드온이나 우리나 매한가지다. 말씀에서 멀어져 있을수록 표징을 더 찾기 마련이다. 기록된 말씀, 들려지는 말씀을 신뢰하기보다 기적을 더 바란다. 기드온이나 나나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의 질문은 단순한 불평불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우리를 버리신 것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배경도 능력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여 주지 않으면 못 믿겠다!”는 식으로 개선(?)되어 간다. 급기야 이런 모든 회의와 의심, 반문의 결론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이렇게 깨닫고 난 후에는 “여호와 샬롬”, “여호와께서 평안을 이루신다”는 고백을 마침내 드렸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그분의 말씀에 비아냥거렸지만, 그 모든 과정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이 되살아났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조상들의 가르침이 생각난 것이다. 즉, 말씀이 되살아났다!
*말씀이 되살아나니 “샬롬”이 찾아왔다. 그의 마음에 가득하던 불평과 불만, 의심과 반항의 어수선함과 격동, 7년 동안 미디안의 폭거로 쌓인 “화”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화”가 스며든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무디어지고 무디어진 하나님에 대한 감각들을 일깨우시고, 잊혔던 말씀들이 실제가 되게 하시며, 마침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거룩한 용기가 솟아나게 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지금 이스라엘의 삶에 가득 찬 분노와 고통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려고 자신에게 나타나셨음을 깨달아, “평화와 소망”, “용기”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반응하여 일어서게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나에게 말씀을 통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며 반응하기를 결심한다. 이렇게 설득하시고, 기다리시며, 보여 주시고, 증명(증거)하여 자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를 그렇게 지금 이 자리에 세워 주신 것이다.
*새파랗던 고등학교 2학년 무더운 여름, 고흥 녹동의 바닷가에서 하나님께 철없이 부르짖으며 드렸던 철부지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고, 기드온에게 하셨던 것처럼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다. 무엇보다 “늘 함께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사명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지난한 밀당의 시간을 받아 주시며 세워 주신 것이다. 내가 잘났고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하도록 능력을 부어 주시며, 무엇보다 “여기까지 함께하여 주셨기에, 앞으로도 함께하여 주실 것이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기드온의 한없이 철없는 밀당을 받아 주신 것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어 “큰 용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향해 밀당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뜻 안에서 밀당을 하신 것이다. “큰 용사”는 세상이 인정하는 조건이 채워진 사람이 아니라,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큰 용사임을 세세하게 깨닫게 하신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벌써 다섯 번째 “또”, 이번에는 말씀을 먼저 주시는 하나님 [사사기 6:1-10]
기드온 이야기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8장까지 이어지고, 아들 아비멜렉의 이야기까지 합하면 9장까지 쭉 이어진다. 사사들의 이야기 중 가장 많은 분량이다. 그만큼 기드온의 이야기에는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나 “또”이다. 사사 드보라 이후 평안의 시대를 지나,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1절) 고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지독한 “또”의 망령은 왜 이리 질긴 것일까? 이것이 인간을 깊이 오염시킨 죄의 본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범죄한 “또”가 고통의 시대라는 “또”를 다시 불러왔다.
1. 미디안은 누구?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로 맞이한 그두라를 통해 낳은 여섯 명의 자녀 중 넷째 아들이다(창 25:1-2). 아브라함은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 훗날 이삭과 심각한 갈등을 빚을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재산을 떼어 주며 모두 요단강 동쪽 땅으로 보냈다. 혈통을 따진다면 이스라엘과 미디안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렇게 싸우기보다 서로 협력해야 하는데, 미디안은 아말렉, 동방 사람들과까지 연대하여 침략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뿐 아니라, 미디안은 출애굽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큰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가나안 땅 진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을, 그때에도 모압과 연대하여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 했고(민 22:4), 싯딤에서는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다(민 25장). 이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응징하여 씨를 말리기까지 했다(민 31:1-18). 미디안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통쾌하게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들은 주로 요단강 동편 남부에 거주하며, 시내 반도에서 요단강 동편 북부를 오가는 반유목 생활과 대상(장사)을 하던 부족이다. 한편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 족속이었고, 사사 옷니엘과 드보라 시대에 미디안 족속이던 겐 사람의 자손들이 정착한 일(삿 1장)과 시스라를 죽인 야엘의 이야기(삿 4-5장)도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일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함께 생활하였지만, 대부분의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빼앗긴 삶의 터전 일부를 회복하기 위해 힘을 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간이 흘러 미디안의 후손은, 그때 진멸당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밀고 들어왔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그 복을 누리던 중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 대적이 더 많은 무리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에서 그들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 조상을 가졌다는 것보다, 민족의 수가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서 늘 순종하며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압제하는 미디안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위드 코로나를 지나면서, 정부와 세상이 교회를 자신들의 삶의 연대로부터 자꾸 밀어내려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절제 없는 태도로 압박하고 있다. 지금은 확실히 영적으로 사사 시대가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압박하는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문제라고 하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아니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악을 행하는 것”을 과연 묵과하시겠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하실 수 없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다! 나 자신이다!
2. “또”(1~6절)
드보라 사사 다음으로 등장하는 사사는 기드온이다. 본문은 6~8장에 걸쳐 이어지는 기드온 서사의 프롤로그로, 사사기의 반복적인 상황 패턴이 재현된다. 이스라엘 자손은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다.
2~5절은 이스라엘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다른 사사들의 서사에 비해 상당히 길고 상세하게 소개한다. 미디안은 본래 요단 동편 남쪽에 거주하였지만, 요단 서편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살고 있던 비옥한 평야에서 밀려나 산지로 쫓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굴을 파고 산성을 만들어 미디안의 침입에 대비하며 사는 비참한 상황에 놓였음을 드러낸다. 게다가 미디안 사람들뿐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까지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데 합세한다.
이들의 모습을 5절에서는 “메뚜기 떼”와 같다고 묘사한다.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확물뿐 아니라 양과 소와 나귀 등 가축들까지 모두 가져가, 이스라엘은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된다. 이는 경제적 기반이 무너져 급격히 쇠락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좀 더 배부르게 잘 살기 위해 가나안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여호와를 버렸지만, 그 신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재앙과 배고픔과 비참함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배고픔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게 되었다.
이렇게 “또” 여호와를 떠난 이스라엘이 “또다시” 억압과 배고픔에 직면했는데, 이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염치없고 부끄러울지라도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 때문에 전혀 기를 펴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었다.”(새번역, 6절) 부르짖기는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혹은 어쩔 수 없이 부르짖은 것처럼 기록했다. 개역개정이 “궁핍함(달랄)”으로 번역한 이 단어는 “고갈되다”라는 뜻뿐 아니라 “낮아지다, 천하다(보잘것없게 되다)”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육체적인 굶주림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음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고통의 원인을 “미디안으로 말미암아”(7절)라고 하여 미디안에게 돌렸다. 그래서 6~7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회개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아우성이었다. “회개 없는 부르짖음”이 애처롭다. 고통 속에서 아우성치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2절) 산(하르: 산지, 산, 언덕)에서 웅덩이(민하라: 깊은 계곡, 갈라진 틈)와 굴(메하라: 동굴)과 산성(메차드: 요새, 성채, 보루)을 만들었다고 기록한다. 빈번한 침입으로 가나안 땅의 평원을 빼앗긴 채 눈치를 봐 가며 겨우겨우 농사를 짓다가, 이마저도 수확물을 빼앗기기를 무려 7년이나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파종할 때”(3절) 침입했다고 기록하는데, 이스라엘은 건기가 지나 이른 비가 내리는 10, 11월에 파종하고, 우기를 지나 3, 4월에 겨울 보리 수확을 시작한다. 미디안이 유목민임을 고려한다면, 파종할 때 침입했다는 것은 곡식이 싹을 틔워 새순이 자라나는 시기에 자신들의 짐승들을 밭에 풀어 놓았다는 의미다. 아주 악랄하다. 이와 함께 창고에 저장해 두었던 양식도 약탈했을 것이다. 유목민들이었기에 장막을 치고 오래 머물면서 지속적으로 약탈했다는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가사(블레셋 성읍)에까지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게 괴롭혔다.
*”또”가 반복될수록 “또”의 고통은 더 광범위해지고, 평화의 기간은 점점 줄어든다. 문제는 고통의 환경이 아니라 고통이 찾아온 원인이다. 사사기는 이것을 통찰하라고 도전한다.
*무엇보다 “메뚜기 떼 같이 많이” 올라왔다는 기록은, 미디안의 침략이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그대로 임한 것임을 보게 한다. “…… 집을 지어도 그 집에서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것을 따먹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소를 당신들이 눈 앞에서 잡아도 당신들이 먹지 못할 것이요, 당신들의 나귀가 당신들의 눈 앞에서 강탈을 당해도 도로 찾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양 떼를 당신들의 원수에게 빼앗겨도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땅에서 거둔 곡식과 당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것을,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백성이 다 먹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사는 날 동안 압제를 받으며, 짓밟히기만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눈으로 보는 일 때문에 미치고 말 것입니다.”(신 28:30-31, 33-34)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이 생각나야 했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회개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고통스러운 삶을 토로하는 데 그친다. 아, 이 백성을 어찌할까!
3. 하나님의 반응(7~10절)
앞선 네 명의 사사(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때에는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즉시 사사를 보내 주셨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사사부터 세워 주지 않으신다. “한 선지자”를 먼저 보내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일깨워 주신 말씀이 압권이다. “……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10절)
선지자는 남북 분열 왕국 때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드보라를 여선지자로 칭했다. 이스라엘에게서 출애굽과 가나안 땅 정복 때의 승리의 기운이 이미 마를 대로 말라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여 전하는 선지자의 출현은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씀이 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에게는 늘 말씀이 들리고 있을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서 일어난 고통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해결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려주신다. 상황의 호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호전임을 일깨우시는 것이다. 여전히 죄를 짓는 나에게 날마다, 아침마다 말씀을 주시는 은혜가 어쩌면 이들에게 “한 선지자”를 주신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죄에 젖어 있는 삶을 타격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죄를 타격할 때, 고통스러운 상황 이전에 하나님과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깨닫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시기 전에 “말씀”을 주신 것은, 고통에 울부짖기보다 죄에 울부짖어야 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내 삶 속에서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범죄의 타성을 말씀으로 타격하시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상황과 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이 먼저가 아니다. 말씀을 알아듣고 기억하며 따라가는 “말씀 회복”이 먼저다!
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또다시 악을 행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압제 아래 두신다(1~2절).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언약에 충실하지 않은(10절) 그들의 패역에 대한 보응이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를 망각하고 죄와 세상에 흠뻑 취해 있는 나를 일깨우기 위해 때로 강한 채찍을 드신다. 내 삶의 방식과 목적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스라엘은 평안할 때 악을 즐기다가 곤경에 처하자 다급하게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회개-용서’라는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양심의 가책을 달래며 압제에서 벗어나려고만 한다(1, 6, 7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인생의 주권자가 아니라 아쉬울 때만 찾는 편의적인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와 공동체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오늘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진실할까? 진실한 회개의 눈물은 내일의 두려움과 통곡을 막아 줄 것이다.
-한때 승리의 노래(5장)를 부르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대적들 때문에 샛길(5:6)로도 다니지 못하고 산에 숨어 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다. 대적들은 ‘메뚜기 떼와 같이’ 몰려와 토지 소산을 약탈하여 생계를 위협한다(2~6절). 이 참혹한 곤궁은 죄악과 말씀을 ‘가볍게’ 여긴 결과였다(10절).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위기가 인생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예전처럼 ‘즉시’ 사사를 세워 구원하지 않으신다. ‘먼저’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다. ‘압제의 고통’에서 건지시기 전에 ‘압제의 원인’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7~10절).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보다 가나안 신들을 더 두려워하고 가나안 사람들을 부러워하다가, 구원의 역사와 사명을 망각한 그들을 일깨우신다. 그들에게 죄의 자백과 함께 ‘자각’이 필요했듯이, 나 역시 징계의 시간이 어서 ‘끝나게’ 해 달라고 구하기 전에 어서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확신하게 된다. 이런 자세가 내 삶 속의 “영적 악순환을 영적 선순환으로” 바꾸는 길일 것이다.
*이스라엘만 “또”일까? 답답하고 짜증이 나려는 순간, 그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또”를 얼마나 반복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어서 입술을 굳게 깨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시작된 고통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분배받아 삶의 터를 일구던 곳에서 압제를 받아 괴로움을 당했다면, 이제는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2절) 만들어 피할 정도다. 아니, 쫓겨난 것이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편리함과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쫓아내라”에 불순종하여, “쫓아내지 않고” 함께 거주한 민족들에게 핍박과 고통을 당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미디안 족속”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난 것”이다.
*사사기 저자는 미디안 족속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파종할 때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블레셋 성 중의 하나)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멸하려 하니”(3~5절)라는 표현들로 그 심각성을 드러낸다.
*미디안 족속은 이렇게 하기 위해 주변 민족들(아말렉과 동방 사람)과 연합하고, 남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블레셋 족속의 성읍 가사 근처까지 “진을 넓게 쳐서” 아예 점령한 것이다. 그들의 약탈은 마치 후일을 기약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않았고 가축들도 남김없이 약탈하였다”라고 기록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5절)라고 했다. 아예 정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려 한 것이 분명했다.
*결국 고통 때문에 울부짖더라도, 그 울부짖음이 있어야 “말씀”이 비로소 들림을 깨닫는다. 내 삶에 고통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늘 울 수밖에 없는 것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아! 고통과 울음이 은혜의 시작이요 통로로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들려야 산다! 그래야 울음(통곡)이 물러가고 웃음이 함께 찾아온다.
*벌써 다섯 번째이다. 한 사사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어김없이 “또”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진노도 “또” 임하고, 고통도 “또” 시작된다. 지금 내가 “또”를 끊지 못하면 “또”, “또”, “또”가 이어진다. 하나님의 진노가 “또” 임할 것을 알면서도 죄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노하실 것을 알면서도 패역의 길을 끊지 못했다. 인간의 한계다. 이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다. 알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
*또 돌아선 이스라엘, 또 당하는 이스라엘, 그러나 또 구원하신 하나님…… 그것 참……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하나님은 주님을 또 떠난 이스라엘을 고난에 넘겨 고통받게 하시고, 그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게 하시며, 하나님을 찾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현상을 개선하기보다 원인을 바라보게 하셔서 진정한 회개(돌이킴)를 기대하시는 분이다.
*고통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바울은 환난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했다(롬 5:3).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러 가시는 방편이다(히 12:7). 고난으로 연단받는 자는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 고난이 “또” 하나님을 떠나 자처한 꼴의 고난이라면 곤란하다. 신실하게 약속의 말씀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다 받는 세상의 질시와 무시, 곤란과 억압이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처하는 고난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에 세상이 주는 고난이라면 받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그 고난의 현장을 꿋꿋이 견디고 이겨 낼 수 있는 말씀의 은혜를 주실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1. 미디안은 누구?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로 맞이한 그두라를 통해 낳은 여섯 명의 자녀 중 넷째 아들이다(창 25:1-2). 아브라함은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 훗날 이삭과 심각한 갈등을 빚을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재산을 떼어 주며 모두 요단강 동쪽 땅으로 보냈다. 혈통을 따진다면 이스라엘과 미디안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렇게 싸우기보다 서로 협력해야 하는데, 미디안은 아말렉, 동방 사람들과까지 연대하여 침략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뿐 아니라, 미디안은 출애굽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큰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가나안 땅 진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을, 그때에도 모압과 연대하여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 했고(민 22:4), 싯딤에서는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다(민 25장). 이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응징하여 씨를 말리기까지 했다(민 31:1-18). 미디안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통쾌하게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들은 주로 요단강 동편 남부에 거주하며, 시내 반도에서 요단강 동편 북부를 오가는 반유목 생활과 대상(장사)을 하던 부족이다. 한편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 족속이었고, 사사 옷니엘과 드보라 시대에 미디안 족속이던 겐 사람의 자손들이 정착한 일(삿 1장)과 시스라를 죽인 야엘의 이야기(삿 4-5장)도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일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함께 생활하였지만, 대부분의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빼앗긴 삶의 터전 일부를 회복하기 위해 힘을 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간이 흘러 미디안의 후손은, 그때 진멸당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밀고 들어왔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그 복을 누리던 중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 대적이 더 많은 무리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에서 그들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 조상을 가졌다는 것보다, 민족의 수가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서 늘 순종하며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압제하는 미디안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위드 코로나를 지나면서, 정부와 세상이 교회를 자신들의 삶의 연대로부터 자꾸 밀어내려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절제 없는 태도로 압박하고 있다. 지금은 확실히 영적으로 사사 시대가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압박하는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문제라고 하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아니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악을 행하는 것”을 과연 묵과하시겠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하실 수 없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다! 나 자신이다!
2. “또”(1~6절)
드보라 사사 다음으로 등장하는 사사는 기드온이다. 본문은 6~8장에 걸쳐 이어지는 기드온 서사의 프롤로그로, 사사기의 반복적인 상황 패턴이 재현된다. 이스라엘 자손은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다.
2~5절은 이스라엘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다른 사사들의 서사에 비해 상당히 길고 상세하게 소개한다. 미디안은 본래 요단 동편 남쪽에 거주하였지만, 요단 서편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살고 있던 비옥한 평야에서 밀려나 산지로 쫓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굴을 파고 산성을 만들어 미디안의 침입에 대비하며 사는 비참한 상황에 놓였음을 드러낸다. 게다가 미디안 사람들뿐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까지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데 합세한다.
이들의 모습을 5절에서는 “메뚜기 떼”와 같다고 묘사한다.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확물뿐 아니라 양과 소와 나귀 등 가축들까지 모두 가져가, 이스라엘은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된다. 이는 경제적 기반이 무너져 급격히 쇠락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좀 더 배부르게 잘 살기 위해 가나안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여호와를 버렸지만, 그 신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재앙과 배고픔과 비참함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배고픔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게 되었다.
이렇게 “또” 여호와를 떠난 이스라엘이 “또다시” 억압과 배고픔에 직면했는데, 이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염치없고 부끄러울지라도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 때문에 전혀 기를 펴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었다.”(새번역, 6절) 부르짖기는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혹은 어쩔 수 없이 부르짖은 것처럼 기록했다. 개역개정이 “궁핍함(달랄)”으로 번역한 이 단어는 “고갈되다”라는 뜻뿐 아니라 “낮아지다, 천하다(보잘것없게 되다)”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육체적인 굶주림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음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고통의 원인을 “미디안으로 말미암아”(7절)라고 하여 미디안에게 돌렸다. 그래서 6~7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회개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아우성이었다. “회개 없는 부르짖음”이 애처롭다. 고통 속에서 아우성치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2절) 산(하르: 산지, 산, 언덕)에서 웅덩이(민하라: 깊은 계곡, 갈라진 틈)와 굴(메하라: 동굴)과 산성(메차드: 요새, 성채, 보루)을 만들었다고 기록한다. 빈번한 침입으로 가나안 땅의 평원을 빼앗긴 채 눈치를 봐 가며 겨우겨우 농사를 짓다가, 이마저도 수확물을 빼앗기기를 무려 7년이나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파종할 때”(3절) 침입했다고 기록하는데, 이스라엘은 건기가 지나 이른 비가 내리는 10, 11월에 파종하고, 우기를 지나 3, 4월에 겨울 보리 수확을 시작한다. 미디안이 유목민임을 고려한다면, 파종할 때 침입했다는 것은 곡식이 싹을 틔워 새순이 자라나는 시기에 자신들의 짐승들을 밭에 풀어 놓았다는 의미다. 아주 악랄하다. 이와 함께 창고에 저장해 두었던 양식도 약탈했을 것이다. 유목민들이었기에 장막을 치고 오래 머물면서 지속적으로 약탈했다는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가사(블레셋 성읍)에까지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게 괴롭혔다.
*”또”가 반복될수록 “또”의 고통은 더 광범위해지고, 평화의 기간은 점점 줄어든다. 문제는 고통의 환경이 아니라 고통이 찾아온 원인이다. 사사기는 이것을 통찰하라고 도전한다.
*무엇보다 “메뚜기 떼 같이 많이” 올라왔다는 기록은, 미디안의 침략이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그대로 임한 것임을 보게 한다. “…… 집을 지어도 그 집에서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것을 따먹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소를 당신들이 눈 앞에서 잡아도 당신들이 먹지 못할 것이요, 당신들의 나귀가 당신들의 눈 앞에서 강탈을 당해도 도로 찾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양 떼를 당신들의 원수에게 빼앗겨도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땅에서 거둔 곡식과 당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것을,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백성이 다 먹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사는 날 동안 압제를 받으며, 짓밟히기만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눈으로 보는 일 때문에 미치고 말 것입니다.”(신 28:30-31, 33-34)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이 생각나야 했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회개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고통스러운 삶을 토로하는 데 그친다. 아, 이 백성을 어찌할까!
3. 하나님의 반응(7~10절)
앞선 네 명의 사사(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때에는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즉시 사사를 보내 주셨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사사부터 세워 주지 않으신다. “한 선지자”를 먼저 보내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일깨워 주신 말씀이 압권이다. “……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10절)
선지자는 남북 분열 왕국 때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드보라를 여선지자로 칭했다. 이스라엘에게서 출애굽과 가나안 땅 정복 때의 승리의 기운이 이미 마를 대로 말라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여 전하는 선지자의 출현은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씀이 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에게는 늘 말씀이 들리고 있을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서 일어난 고통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해결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려주신다. 상황의 호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호전임을 일깨우시는 것이다. 여전히 죄를 짓는 나에게 날마다, 아침마다 말씀을 주시는 은혜가 어쩌면 이들에게 “한 선지자”를 주신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죄에 젖어 있는 삶을 타격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죄를 타격할 때, 고통스러운 상황 이전에 하나님과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깨닫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시기 전에 “말씀”을 주신 것은, 고통에 울부짖기보다 죄에 울부짖어야 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내 삶 속에서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범죄의 타성을 말씀으로 타격하시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다. 상황과 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이 먼저가 아니다. 말씀을 알아듣고 기억하며 따라가는 “말씀 회복”이 먼저다!
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또다시 악을 행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압제 아래 두신다(1~2절).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언약에 충실하지 않은(10절) 그들의 패역에 대한 보응이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를 망각하고 죄와 세상에 흠뻑 취해 있는 나를 일깨우기 위해 때로 강한 채찍을 드신다. 내 삶의 방식과 목적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스라엘은 평안할 때 악을 즐기다가 곤경에 처하자 다급하게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회개-용서’라는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양심의 가책을 달래며 압제에서 벗어나려고만 한다(1, 6, 7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인생의 주권자가 아니라 아쉬울 때만 찾는 편의적인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와 공동체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오늘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진실할까? 진실한 회개의 눈물은 내일의 두려움과 통곡을 막아 줄 것이다.
-한때 승리의 노래(5장)를 부르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대적들 때문에 샛길(5:6)로도 다니지 못하고 산에 숨어 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다. 대적들은 ‘메뚜기 떼와 같이’ 몰려와 토지 소산을 약탈하여 생계를 위협한다(2~6절). 이 참혹한 곤궁은 죄악과 말씀을 ‘가볍게’ 여긴 결과였다(10절).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위기가 인생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예전처럼 ‘즉시’ 사사를 세워 구원하지 않으신다. ‘먼저’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다. ‘압제의 고통’에서 건지시기 전에 ‘압제의 원인’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7~10절).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보다 가나안 신들을 더 두려워하고 가나안 사람들을 부러워하다가, 구원의 역사와 사명을 망각한 그들을 일깨우신다. 그들에게 죄의 자백과 함께 ‘자각’이 필요했듯이, 나 역시 징계의 시간이 어서 ‘끝나게’ 해 달라고 구하기 전에 어서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확신하게 된다. 이런 자세가 내 삶 속의 “영적 악순환을 영적 선순환으로” 바꾸는 길일 것이다.
*이스라엘만 “또”일까? 답답하고 짜증이 나려는 순간, 그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또”를 얼마나 반복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어서 입술을 굳게 깨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시작된 고통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분배받아 삶의 터를 일구던 곳에서 압제를 받아 괴로움을 당했다면, 이제는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2절) 만들어 피할 정도다. 아니, 쫓겨난 것이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편리함과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쫓아내라”에 불순종하여, “쫓아내지 않고” 함께 거주한 민족들에게 핍박과 고통을 당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미디안 족속”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난 것”이다.
*사사기 저자는 미디안 족속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파종할 때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블레셋 성 중의 하나)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멸하려 하니”(3~5절)라는 표현들로 그 심각성을 드러낸다.
*미디안 족속은 이렇게 하기 위해 주변 민족들(아말렉과 동방 사람)과 연합하고, 남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블레셋 족속의 성읍 가사 근처까지 “진을 넓게 쳐서” 아예 점령한 것이다. 그들의 약탈은 마치 후일을 기약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않았고 가축들도 남김없이 약탈하였다”라고 기록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5절)라고 했다. 아예 정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려 한 것이 분명했다.
*결국 고통 때문에 울부짖더라도, 그 울부짖음이 있어야 “말씀”이 비로소 들림을 깨닫는다. 내 삶에 고통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늘 울 수밖에 없는 것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아! 고통과 울음이 은혜의 시작이요 통로로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들려야 산다! 그래야 울음(통곡)이 물러가고 웃음이 함께 찾아온다.
*벌써 다섯 번째이다. 한 사사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어김없이 “또”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진노도 “또” 임하고, 고통도 “또” 시작된다. 지금 내가 “또”를 끊지 못하면 “또”, “또”, “또”가 이어진다. 하나님의 진노가 “또” 임할 것을 알면서도 죄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노하실 것을 알면서도 패역의 길을 끊지 못했다. 인간의 한계다. 이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다. 알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
*또 돌아선 이스라엘, 또 당하는 이스라엘, 그러나 또 구원하신 하나님…… 그것 참……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하나님은 주님을 또 떠난 이스라엘을 고난에 넘겨 고통받게 하시고, 그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게 하시며, 하나님을 찾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현상을 개선하기보다 원인을 바라보게 하셔서 진정한 회개(돌이킴)를 기대하시는 분이다.
*고통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바울은 환난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했다(롬 5:3).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러 가시는 방편이다(히 12:7). 고난으로 연단받는 자는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 고난이 “또” 하나님을 떠나 자처한 꼴의 고난이라면 곤란하다. 신실하게 약속의 말씀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다 받는 세상의 질시와 무시, 곤란과 억압이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처하는 고난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에 세상이 주는 고난이라면 받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그 고난의 현장을 꿋꿋이 견디고 이겨 낼 수 있는 말씀의 은혜를 주실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드보라의 노래와 여호와의 승리 [사사기 5:19-31]
드보라의 노래 후반부다. 본문에서는 전쟁이 시작되고, 여호와께서 폭우를 내려 가나안 왕들을 단숨에 쓸어버리셨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야엘은 시스라를 죽인 일로 축복을 받는다. 시스라가 야엘에게 맞아 쓰러지는 장면은 반복을 통해 강조되며,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시스라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 준다.
승리의 노래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 승리는 단지 야빈 왕과의 싸움에서만 거둔 것이 아니었다. “여러 왕들이 와서 싸움을 돋우었다. 므깃도의 물가 다아낙에서 싸움을 돋우었으나, 그들은 탈취물이나 은을 가져가지 못했다”(새번역, 19절)라는 말씀을 보면, 야빈의 군대와 개전했다가 주변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으로 확전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확전된 전쟁에서도 역시 하나님께서 앞서 싸우셨다. “별들이 하늘에서…… 그 다니는 길에서”(새번역, 20절), “기손 강물이 그들을 휩쓸어 갔고……”(새번역, 21절)라는 표현들은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개입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께서 대신, 그리고 적극적으로 싸우셨으니 승리는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앞서 싸우시니 그 뒤를 따라 “힘차게 진군하는”(새번역, 21절)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하나님의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
1. 므깃도 전투의 승리와 메로스를 향한 저주(19~23절)
본문은 여호와와 인간 주인공들이 전쟁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전쟁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시(노래)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특이한 점은 이 전쟁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직 별들이 여호와의 시종으로서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는 가나안과의 전쟁이 철저히 ‘여호와의 전쟁’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19절은 전쟁의 결과(가나안 왕들이 탈취물을 얻지 못했다)를 소개하고, 20~22절은 전쟁의 상황을 묘사한다. 별들이 시스라와 싸울 때 엄청난 폭우를 그의 군대 위에 퍼부었고, 그 결과 기손 강이 범람하여 그의 병거와 군대를 쓸어 갔다고 묘사한다. 이런 통쾌한 여호와의 역사하심에 드보라는 ‘나의 영혼아, 힘차게 짓밟아라’ 하면서 승리의 함성을 포효한다. 압도적인 하나님의 힘 앞에서는 인간이 가진 힘과 능력(철 병거)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보잘것없음을 묘사한 것이다. 이 노래는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폭우와 기손 강의 범람’이 이스라엘의 승리 요인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혀 준다. 이스라엘의 능력으로 이긴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역사로 이긴 전쟁이었다.
23절에서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등장한다. 그는 전장에 인접한 “메로스”라는 마을과 그 주민들을 저주한다. 메로스는 다볼산 북쪽, 이스르엘 평야의 끝자락 어딘가에 위치한 성읍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그 저주의 강도가 무척 강하다. “저주하라…… 거듭거듭 저주할 것은……”(23절)이라고 했다. “사정없이 철저히”로도 번역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주님을 도우러 나오지 않았다. 주님을 돕지 않았다. 적의 용사들과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새번역, 23절) 전장 근처라면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곳 마을 주민들은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현장에 있었음에도 “나오지 않고, 돕지 않으며,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드보라의 승리의 노래 가운데 불릴 정도라면, 메로스는 전장의 판도를 결정지을 만한 무언가가 있는 성읍이었을 수 있다. 또는 격렬한 전쟁 속에서도 지형지물이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해 주는 성이었을 수도 있겠다. 메로스는 “피난처”라는 뜻이다. 스스로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전장을 외면한 이들은, 오히려 그 피난처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진정한 피난처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메로스(피난처)를 질책하셨기 때문이다.
*진정한 피난처는 싸움의 현장을 벗어나 안전하다고 여기는 장소가 아니다. 외면하여 편안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가 진정한 피난처다. 그곳이 아무리 창칼이 맞부딪치고 화살이 난무하는 전장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신 전장이 진정한 피난처이다. 하나님께서 피난처(안식처)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 있고, 그것을 직접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반응하지 않는” 지독한 보신주의를 간과하지 않으신다. 겸손하게 주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으로 나아와야 함에도, 그들은 그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이 폭풍이 지나가기만 바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치열한 순종의 현장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무관심하고 무반응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쩌면 가장 지독한 교만일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무반응과 무관심을 강하게 질책하신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에서 비열하게 외면하고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오히려 대적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부하여도, 무반응과 외면을 고수하는 그들을 대적으로 간주하셨다.
*나는 “메로스”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 어떻게 할까? 바람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자세로, 그저 나만 평안하면 된다며 성문을 걸어 잠글 것인가? 하나님의 전쟁에 기꺼이 헌신할 것인가? 곰곰이 되씹을수록 그리 호기롭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에둘러 일깨워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다. 이웃 사랑은 실제로 돕고 베푸는 사랑이어야 한다. 전쟁 중에 있는 민족과 함께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행동이 아니다. 마땅히 질책받아야 한다.
2. 야엘을 축복하다(24~27절)
“메로스”를 거듭거듭 저주한 것과 선명하게 대비되게, 시스라를 죽인 여인 야엘을 축복한다. 그녀의 지혜와 담대함, 단호함을 칭송한다. 무엇보다 결국 하나님의 예언대로(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찬양한다. 동족의 전쟁에, 그것도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문을 걸어 잠그고 동참하지 않은 비겁한 메로스를 비롯하여, 참전하지 않은 지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야엘은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어머니’ 드보라의 승리 찬가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 기록되었다. 이는 전쟁에 동참하지 않은 지파들과 메로스를 에둘러 거듭거듭 비판하는 것이다. 특히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는 장면을 4장에 비해 자세하게, 한 컷 한 컷 보여 주듯 설명한다. 연약한 여인 야엘의 발 앞에서 맞은 그의 죽음을 묘사하며, “꾸부러지며 엎드러져서”라는 표현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는 반드시 꾸부러지며 엎드러져서 망한다. 지금 잘나간다고 영원히 잘나가는 것은 아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지혜롭다. 인생의 참 지혜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 야엘처럼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되는 믿음의 결단과 행함이 있기를 사모해 본다. 하나님의 일에 마음으로 공감하고 몸으로 행동했으면 좋겠다. 메로스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처럼 자신의 삶에 안주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안일해진다면”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3. 시스라 어미의 시선(28~30절)
아들 시스라의 패전과 죽음을 알 턱이 없던 시스라의 어미는, 지난 20년간 늘 그랬던 것처럼 아들이 승전하여 전리품을 나누느라 돌아오는 것이 지체되는 것으로 여겼다(30절). 그러면서 아들이 언제 돌아올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시스라의 어미는 아들의 귀환이 늦어지는 것을 두고 “그들이 어찌 약탈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용사마다 한두 처녀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시스라가 약탈한 것은 채색한 옷감, 곧 수놓아 채색한 옷감이거나, 약탈한 사람의 목에 걸칠 수놓은 두 벌의 옷감일 것이다”(새번역, 30절)라고 이야기한다. 피로 흥건히 젖은 노략물에 대한 탐욕을 노골적으로, 또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스라엘의 눈물과 피를 쥐어짜서 자신들이 당연히 쟁취했으리라 생각하는 노략물에 대한 관심이, 아들 시스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이다.
승리하여 약탈물을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패전한 민족의 여인들을 마치 짐승이나 물건처럼 취급하던 가나안의 폭력적인 문화에 매우 익숙한 모습이다. 같은 여인이면서도 그 여인들이 당할 수치와 모욕은 안중에도 없다. 오히려 그런 악한 행동을 하는 아들과 자기 민족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제 곧 자신과 자기 딸들이 그 꼴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있다. 자신이 말한 대로 자신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아들과 자기 민족의 참담한 패배는 상상조차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자행한 폭력과 억압은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이런 죄악을 좌시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전혀 생각지도 못할 때 일어난다. 시스라의 어미에게 이 심판이 닥쳤다.
4.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31절)
하나님은 원수들을 결국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신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앞서 싸워 주심으로 40년간의 평화가 시작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감정이나 입의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전장에 동참하는 것이다. 대적 앞에서 단호하고 담대하게 장막 말뚝을 내리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편에 선 이는 그분을 사랑하기에 기꺼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
*아무리 밤이 깊어 흑암 가운데 있는 삶이라고 여겨져도, 그럴수록 “해를 힘 있게 돋게 하시는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의 편에 서는 일을 계산해서는 안 된다. 세상 계산으로 따지면 유익할 일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이미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는 인생이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무기(폭우)로 가나안 군대를 진멸하신다(19~22절). 갑작스러운 폭우로 기손 강이 불어나자 군대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철 병거는 무용지물이 된다. 첨단 무기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격멸하고 전리품을 약탈하려던 그들의 야욕은 급류와 함께 사라진다. 시스라의 군대는 그들이 상대할 대상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나서신 전쟁에서 가나안은 이길 수 없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비의 신 바알이 죽어 있다고(잠시 자리를 떠났다고) 여기는 건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폭우를 내려 기손 강을 범람하게 하여 시스라의 병거와 군대를 쓸어버리셨다. 땅에서 승리하기 전에 하늘에서 별들 간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다. 땅에서 들리는 것은 승리의 함성과 패잔병들의 말발굽 소리뿐이었다.
-여호와의 전쟁을 외면하고 형제를 돕지 않은 자들(메로스)을 향해 저주를 선언하신다(23절). 그들의 참전 회피는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언약적 저주’를 선고받은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지만,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자들을 대표한다.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소극적인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전혀 기대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야엘은 비록 이방인의 아내요 초야의 장막에 거주하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적장의 목숨을 전리품으로 취하고 약속된 영광(4장 9절)을 받는다. 메로스 주민들은 저주를 받고, 야엘은 영광을 받은 것이다. 메로스는 여호와의 용사들을 도와 적들을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을은 두려워 물러섰지만, 한 여인은 담대하게 나섰다. 전력의 차이가 아니라 믿음의 차이였음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하나님은 지금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소소해 보이는 일상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신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이스라엘의 어미(드보라)’가 승리의 노래를 부를 때, ‘가나안의 어미’는 개선장군이 아니라 노략물이 된 아들의 죽음을 모른 채, 어리석은 기대와 허망한 기다림 속에서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28~30절). 드보라는 시스라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패망을, 야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영광을 주시기를 청원한다(31절). 이처럼 최후의 승리와 구원은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이들의 몫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편에 섰던 야엘,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의 맏아들),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는 하나님의 승리의 찬가를 마음껏 부르고 누렸다. 하나님의 전쟁에 참전하여 하나님께서 부리신 별들과 강을 직접 목격했다.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하나님의 편에 섰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분명히 갈린다. 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담대하게 붙잡았다. 철저히 하나님의 편에 서서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아 버린다.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결국 이방인이든 이스라엘 민족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편”에 선 야엘에게는 축복을 받으리라는 칭송이 돌아오지만, 메로스처럼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의 편에 동참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돌아온다.
-나의 일생이 늘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 전쟁터를 외면하지 않고, 최후 승리를 바라보며 나아가리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힘을 얻는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처절하게 전투를 치러 내셨던 주님의 삶을 묵상하며, 지금 여기에서의 결전의 각오를 다진다. 나아가 다시 오실 주님께서 행하실 최후의 심판을 바라보며 최후의 승리를 소망한다. 지치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인내해야 하리라.
승리의 노래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 승리는 단지 야빈 왕과의 싸움에서만 거둔 것이 아니었다. “여러 왕들이 와서 싸움을 돋우었다. 므깃도의 물가 다아낙에서 싸움을 돋우었으나, 그들은 탈취물이나 은을 가져가지 못했다”(새번역, 19절)라는 말씀을 보면, 야빈의 군대와 개전했다가 주변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으로 확전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확전된 전쟁에서도 역시 하나님께서 앞서 싸우셨다. “별들이 하늘에서…… 그 다니는 길에서”(새번역, 20절), “기손 강물이 그들을 휩쓸어 갔고……”(새번역, 21절)라는 표현들은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개입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께서 대신, 그리고 적극적으로 싸우셨으니 승리는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앞서 싸우시니 그 뒤를 따라 “힘차게 진군하는”(새번역, 21절)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하나님의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
1. 므깃도 전투의 승리와 메로스를 향한 저주(19~23절)
본문은 여호와와 인간 주인공들이 전쟁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전쟁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시(노래)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특이한 점은 이 전쟁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직 별들이 여호와의 시종으로서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는 가나안과의 전쟁이 철저히 ‘여호와의 전쟁’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19절은 전쟁의 결과(가나안 왕들이 탈취물을 얻지 못했다)를 소개하고, 20~22절은 전쟁의 상황을 묘사한다. 별들이 시스라와 싸울 때 엄청난 폭우를 그의 군대 위에 퍼부었고, 그 결과 기손 강이 범람하여 그의 병거와 군대를 쓸어 갔다고 묘사한다. 이런 통쾌한 여호와의 역사하심에 드보라는 ‘나의 영혼아, 힘차게 짓밟아라’ 하면서 승리의 함성을 포효한다. 압도적인 하나님의 힘 앞에서는 인간이 가진 힘과 능력(철 병거)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보잘것없음을 묘사한 것이다. 이 노래는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폭우와 기손 강의 범람’이 이스라엘의 승리 요인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혀 준다. 이스라엘의 능력으로 이긴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역사로 이긴 전쟁이었다.
23절에서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등장한다. 그는 전장에 인접한 “메로스”라는 마을과 그 주민들을 저주한다. 메로스는 다볼산 북쪽, 이스르엘 평야의 끝자락 어딘가에 위치한 성읍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그 저주의 강도가 무척 강하다. “저주하라…… 거듭거듭 저주할 것은……”(23절)이라고 했다. “사정없이 철저히”로도 번역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주님을 도우러 나오지 않았다. 주님을 돕지 않았다. 적의 용사들과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새번역, 23절) 전장 근처라면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곳 마을 주민들은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현장에 있었음에도 “나오지 않고, 돕지 않으며,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드보라의 승리의 노래 가운데 불릴 정도라면, 메로스는 전장의 판도를 결정지을 만한 무언가가 있는 성읍이었을 수 있다. 또는 격렬한 전쟁 속에서도 지형지물이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해 주는 성이었을 수도 있겠다. 메로스는 “피난처”라는 뜻이다. 스스로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전장을 외면한 이들은, 오히려 그 피난처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진정한 피난처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메로스(피난처)를 질책하셨기 때문이다.
*진정한 피난처는 싸움의 현장을 벗어나 안전하다고 여기는 장소가 아니다. 외면하여 편안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가 진정한 피난처다. 그곳이 아무리 창칼이 맞부딪치고 화살이 난무하는 전장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신 전장이 진정한 피난처이다. 하나님께서 피난처(안식처)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 있고, 그것을 직접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반응하지 않는” 지독한 보신주의를 간과하지 않으신다. 겸손하게 주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으로 나아와야 함에도, 그들은 그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이 폭풍이 지나가기만 바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치열한 순종의 현장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무관심하고 무반응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쩌면 가장 지독한 교만일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무반응과 무관심을 강하게 질책하신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에서 비열하게 외면하고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오히려 대적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부하여도, 무반응과 외면을 고수하는 그들을 대적으로 간주하셨다.
*나는 “메로스”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 어떻게 할까? 바람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자세로, 그저 나만 평안하면 된다며 성문을 걸어 잠글 것인가? 하나님의 전쟁에 기꺼이 헌신할 것인가? 곰곰이 되씹을수록 그리 호기롭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에둘러 일깨워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다. 이웃 사랑은 실제로 돕고 베푸는 사랑이어야 한다. 전쟁 중에 있는 민족과 함께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행동이 아니다. 마땅히 질책받아야 한다.
2. 야엘을 축복하다(24~27절)
“메로스”를 거듭거듭 저주한 것과 선명하게 대비되게, 시스라를 죽인 여인 야엘을 축복한다. 그녀의 지혜와 담대함, 단호함을 칭송한다. 무엇보다 결국 하나님의 예언대로(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찬양한다. 동족의 전쟁에, 그것도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문을 걸어 잠그고 동참하지 않은 비겁한 메로스를 비롯하여, 참전하지 않은 지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야엘은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어머니’ 드보라의 승리 찬가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 기록되었다. 이는 전쟁에 동참하지 않은 지파들과 메로스를 에둘러 거듭거듭 비판하는 것이다. 특히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는 장면을 4장에 비해 자세하게, 한 컷 한 컷 보여 주듯 설명한다. 연약한 여인 야엘의 발 앞에서 맞은 그의 죽음을 묘사하며, “꾸부러지며 엎드러져서”라는 표현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는 반드시 꾸부러지며 엎드러져서 망한다. 지금 잘나간다고 영원히 잘나가는 것은 아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지혜롭다. 인생의 참 지혜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 야엘처럼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되는 믿음의 결단과 행함이 있기를 사모해 본다. 하나님의 일에 마음으로 공감하고 몸으로 행동했으면 좋겠다. 메로스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처럼 자신의 삶에 안주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안일해진다면”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3. 시스라 어미의 시선(28~30절)
아들 시스라의 패전과 죽음을 알 턱이 없던 시스라의 어미는, 지난 20년간 늘 그랬던 것처럼 아들이 승전하여 전리품을 나누느라 돌아오는 것이 지체되는 것으로 여겼다(30절). 그러면서 아들이 언제 돌아올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시스라의 어미는 아들의 귀환이 늦어지는 것을 두고 “그들이 어찌 약탈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용사마다 한두 처녀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시스라가 약탈한 것은 채색한 옷감, 곧 수놓아 채색한 옷감이거나, 약탈한 사람의 목에 걸칠 수놓은 두 벌의 옷감일 것이다”(새번역, 30절)라고 이야기한다. 피로 흥건히 젖은 노략물에 대한 탐욕을 노골적으로, 또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스라엘의 눈물과 피를 쥐어짜서 자신들이 당연히 쟁취했으리라 생각하는 노략물에 대한 관심이, 아들 시스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이다.
승리하여 약탈물을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패전한 민족의 여인들을 마치 짐승이나 물건처럼 취급하던 가나안의 폭력적인 문화에 매우 익숙한 모습이다. 같은 여인이면서도 그 여인들이 당할 수치와 모욕은 안중에도 없다. 오히려 그런 악한 행동을 하는 아들과 자기 민족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제 곧 자신과 자기 딸들이 그 꼴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있다. 자신이 말한 대로 자신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아들과 자기 민족의 참담한 패배는 상상조차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자행한 폭력과 억압은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이런 죄악을 좌시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전혀 생각지도 못할 때 일어난다. 시스라의 어미에게 이 심판이 닥쳤다.
4.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31절)
하나님은 원수들을 결국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신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앞서 싸워 주심으로 40년간의 평화가 시작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감정이나 입의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전장에 동참하는 것이다. 대적 앞에서 단호하고 담대하게 장막 말뚝을 내리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편에 선 이는 그분을 사랑하기에 기꺼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
*아무리 밤이 깊어 흑암 가운데 있는 삶이라고 여겨져도, 그럴수록 “해를 힘 있게 돋게 하시는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의 편에 서는 일을 계산해서는 안 된다. 세상 계산으로 따지면 유익할 일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이미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는 인생이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무기(폭우)로 가나안 군대를 진멸하신다(19~22절). 갑작스러운 폭우로 기손 강이 불어나자 군대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철 병거는 무용지물이 된다. 첨단 무기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격멸하고 전리품을 약탈하려던 그들의 야욕은 급류와 함께 사라진다. 시스라의 군대는 그들이 상대할 대상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나서신 전쟁에서 가나안은 이길 수 없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비의 신 바알이 죽어 있다고(잠시 자리를 떠났다고) 여기는 건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폭우를 내려 기손 강을 범람하게 하여 시스라의 병거와 군대를 쓸어버리셨다. 땅에서 승리하기 전에 하늘에서 별들 간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다. 땅에서 들리는 것은 승리의 함성과 패잔병들의 말발굽 소리뿐이었다.
-여호와의 전쟁을 외면하고 형제를 돕지 않은 자들(메로스)을 향해 저주를 선언하신다(23절). 그들의 참전 회피는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언약적 저주’를 선고받은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지만,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자들을 대표한다.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소극적인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전혀 기대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야엘은 비록 이방인의 아내요 초야의 장막에 거주하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적장의 목숨을 전리품으로 취하고 약속된 영광(4장 9절)을 받는다. 메로스 주민들은 저주를 받고, 야엘은 영광을 받은 것이다. 메로스는 여호와의 용사들을 도와 적들을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을은 두려워 물러섰지만, 한 여인은 담대하게 나섰다. 전력의 차이가 아니라 믿음의 차이였음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하나님은 지금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소소해 보이는 일상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신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이스라엘의 어미(드보라)’가 승리의 노래를 부를 때, ‘가나안의 어미’는 개선장군이 아니라 노략물이 된 아들의 죽음을 모른 채, 어리석은 기대와 허망한 기다림 속에서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28~30절). 드보라는 시스라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패망을, 야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영광을 주시기를 청원한다(31절). 이처럼 최후의 승리와 구원은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이들의 몫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편에 섰던 야엘,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의 맏아들),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는 하나님의 승리의 찬가를 마음껏 부르고 누렸다. 하나님의 전쟁에 참전하여 하나님께서 부리신 별들과 강을 직접 목격했다.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하나님의 편에 섰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분명히 갈린다. 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담대하게 붙잡았다. 철저히 하나님의 편에 서서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아 버린다.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결국 이방인이든 이스라엘 민족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편”에 선 야엘에게는 축복을 받으리라는 칭송이 돌아오지만, 메로스처럼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의 편에 동참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돌아온다.
-나의 일생이 늘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 전쟁터를 외면하지 않고, 최후 승리를 바라보며 나아가리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힘을 얻는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처절하게 전투를 치러 내셨던 주님의 삶을 묵상하며, 지금 여기에서의 결전의 각오를 다진다. 나아가 다시 오실 주님께서 행하실 최후의 심판을 바라보며 최후의 승리를 소망한다. 지치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인내해야 하리라.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와 승리의 찬양 [사사기 5:1-18]
4장 24절은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라고 기록한다. 드보라와 바락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승리의 전장에 울려 퍼지는 환호의 찬양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높여진다. 드보라와 바락의 호소에 부응하여 참전한 지파들은 승리의 감격 속에서 찬양을 드리지만, 참전의 나팔 소리를 외면한 지파들을 향한 책망의 소리도 주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노래는 드보라와 바락이 전쟁의 선두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를 맛본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군사(18절) 일만 명의 헌신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사실 이 전쟁은 중과부적이 확실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막강한 시스라의 철 병거 구백 승과 싸워야 하는 것을 알고도 자원했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임하는 그들의 각오가 고스란히 드러난 일이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분명한 믿음과 단호한 통솔력을 발휘하였고, 바락은 전선의 선봉에 섰다. 스불론과 납달리의 일만 군사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들의 헌신이 승리로 이어지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찬송하는 기념비적인 노래이다.
1. 여호와를 찬송하라! 왜?(1~3절)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쉬르, sing_1, 3절)’한다. 그 노래의 내용은 여호와를 찬송하고(2절_바라크_축복하다), 찬송하라(3절_자마르_찬양하다, 노래하다, 연주하다)는 것이다. 곧 기손 강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하솔 왕 야빈을 ‘진멸’하게 하신 하나님을 “축복하고 노래하라”고 명령한다.
*찬송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특히 찬송의 내용이 “하나님을 축복”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노래”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를 찬송해야 할까? 2절은 이 전쟁에 참여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기꺼이” 헌신한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찬양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그 찬양의 표현을 “축복”을 비는 것으로 한다. 하나님께서 시스라와 철 병거 구백 승을 물리치시려고 행하신 모든 일뿐 아니라, “기꺼이” 헌신하여 전장으로 달려오도록 마음에 동기를 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십 년 동안 야빈에게 “심한 학대”를 받았다. 그 정도를 가늠하게 하는 구절이 6~8절이다. “대로가 비었고… 오솔길로 다녔다”,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용사가 끊어졌다_새번역)”,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등의 표현이 그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대로가 비었다는 것은 무역상들의 발길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무역로가 철저히 막혔다는 의미다. 오솔길(뒷길)로 다녔다는 것은 심한 학대의 여파로 하솔 왕의 군사들을 피해 다녔다는 뜻이다. 또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용사가 끊어졌다)는 것은 철저한 군사적 박해로 인해 군사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하는 표현은 군사 무기조차 변변치 않았던 현실을 보여 준다.
*이런 상황, 곧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막막하며 변변한 군사력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싸워 이겨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기준과 조건에 턱없이 열악한 환경이 낙심의 조건일 수 없다. 진정 낙심해야 할 것은 “전능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면서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또 “전능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조건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승리의 감격을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삶이기를 소망해 본다. 무엇보다 승리의 현장에서 마음껏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꿈꿔 본다.
2. 무엇을 어떻게 찬양할까?(4~14절)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4~5절). 저마다 하나님께 기꺼이 헌신하여 전장에 나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9절). 백성의 지도자들부터 흰 나귀를 탄 귀족, 양탄자에 앉은 부자, 길을 걸어 다니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출정 명령 앞에 하나 된 마음으로 즐겁게 헌신하여 나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
이렇게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자원하여 결전의 전장에 나오기만 하면 승리가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려고(자원하여 헌신함으로 전장에 내려온 지도자와 백성들을 도우시려고) 용사들 가운데 내려오셨다!”(새번역, 13절) 그렇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이 이 노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 나아와 동참하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시스라와의 전쟁에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많은 방백이 죽음을 각오한 헌신으로 최전선에 섰다(18절). 이렇게 한마음으로 헌신한 이들을 통해 승리를 가져오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 그 나라가 견고하게 서 간다.
*이를 깨달은 드보라와 바락은 주저 없이 “노래”한다. 사사 시대 민초들 사이에서 불리던 국민 찬송이 지금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쉬르_1, 3절)뿐 아니라 악기와 함께 부르는 노래(자마르_3절)도 함께 부른다. “쉬르와 자마르”로 하나님을 노래(sing)한다. 훗날 시편 저자가 노래하듯, 비파와 수금(하프)과 소고(탬버린) 등으로 연주하며 노래(쉬르)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맛보았다면 어찌 주저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는 것만으로도 목소리로 노래하고(쉬르),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한다(자마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송하여도 다함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찬양해야 한다.
3. 찬송의 자리에 동참하지 못한 지파들과 그 이유(15절 하반절~17절)
시스라와 야빈 왕과의 전투에 동참하지 않은 지파들과 그들의 형편을 정확하게 언급한다. 르우벤, 길르앗, 아셀, 단 지파였다.
르우벤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거주한 지파다. 전쟁에 참전한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의 장남),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는 하솔 왕 야빈의 철 병거에 직접 “심한 학대”를 받고 있던 지파들이었다. 이들은 드보라와 바락의 부름에 선뜻 일어나 전쟁에 동참하였다. 특히 본문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일만 명이 기손 강 전투에 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기록한다(18절).
그런데 요단 서편(가나안 땅)에서는 단 지파와 아셀 지파가 불참하였고, 요단 동편에서 땅을 분배받은 길르앗(갓과 므낫세 반 지파)과 르우벤 지파도 이 전쟁을 외면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가나안 입성 전에 땅을 분배받으면서 요단 서편의 전투에 참전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민 32:25~27). 그런데 이들은 선조들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물과 초지가 풍성한 르우벤 지파는 토론만 벌이다 참전의 기회를 놓쳤고, 길르앗과 단 지파와 아셀 지파에게는 고민한 흔적조차 없다. 가나안 왕 야빈의 혹독한 학대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 고난이 실감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고난과 동떨어진 자기 일상을 살아가느라 민족의 전쟁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공동체의 관심사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모르겠다.
나는?
-전쟁의 승리 후에 드보라와 바락은 여호와를 찬양한다. 이스라엘 영솔자들의 지휘와 백성의 즐거운 헌신이 이루어 낸 승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스라엘의 역사 내내 약속을 지키시는 행동으로 그 역사를 일구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그 권능으로 이루신 승리였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홍해와 광야와 시내산을 그 앞에서 잠잠하게 하시고 진동하게 하셨던 하나님을 인정할 때, 이스라엘은 승리를 지속적으로 누릴 것이다. 또한 그 능력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믿을 때 약속해 주신 가나안의 복을 누릴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그 말씀(약속)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드보라는 승리의 날에 이스라엘을 찬양의 자리로 초대한다. 오랜 압제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던 방백과 백성에게, 이날의 감격을 잊지 말고 참전하도록 이끄신 하나님을 자원하여 송축하자고 말한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전쟁터든 우물 곁이든,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승리와 구원)을 만방에 전하라고 명령한다(1~3, 9~12절). 하나님 백성의 예배와 찬양은 그분의 살아 계심과 능력에 대한 산 증거(증인)이며, 세상을 향한 선교적 메시지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과 지금도 내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노래와 고백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시려고 백성 앞에 서서 나아가실 때(4:14), 땅과 산들은 흔들리고 하늘은 비를 쏟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용사(사사)’로 강림하시자, 불리하던 전력과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4, 5, 13절). 힘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세력(용사)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악이 준동하는 이 세상도 의와 공평과 진실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심판의 주님이 오실 것이기에, 이 땅의 악에 동조하지 말고 시련의 때를 타협 없이 잘 인내하여 살아 내야 하리라.
-하나님이 강림하시고(13절) 드보라가 일어나기 전까지(7절), 이스라엘 백성은 대로를 두고도 샛길로 숨어 다닐 만큼 숨죽여 살아야 했다. 막강한 대적과 싸울 무기도, 지켜 줄 보호자도 없었다(6~8절).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배신한 죄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미래를 버리는 일이요, 고통과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다.
-모든 지파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드보라의 참전 요구에 헌신적으로 응한 지파도 있었지만, 거리가 멀고 바쁘다는 이유로 공동체의 위기를 외면한 지파도 있었다(14~18절). 하지만 명백한 말씀을 굴복시킬 만큼 떳떳한 불순종은 없다. 헌신이 광신처럼 호도되고 철저하게 이기적인 세상에서, 나와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라고 부르심 받은 그 소명을 감당하며 시련을 견뎌 내고 있을까?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가나안과 전쟁하시려고 그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오신다. 하나님의 등장에 땅이 흔들리고 산이 진동하며 폭우와 비구름이 쏟아진다. 자식의 어려움을 알고 득달같이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 폭우로 시스라의 철 병거는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하나님의 달려오심……. 자녀들이 당하는 고난을 외면할 수 없어 민감하게 반응하여 달려오신 그 폭풍우가 백성을 살렸다.
-대로에 다니는 사람 없고 모두 오솔길로 피해 다니던 때에,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날지어다” 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드보라 자신과 바락이 이 전쟁의 선봉에 선다. 지도력의 무게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말로만이 아닌 ‘행동과 현장’에 거하는 모습이 곧 지도력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내게 맡겨 주신 목양의 터 안에서, 순종의 행함으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과 함께하기를 결심해 본다.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는 철 병거에 의해 핍박을 많이 받던 지역이었다. 그들은 드보라의 요청에 선뜻 일어나 전쟁에 참여한다. 스불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가장 용맹하게 나선다. 반면에 철 병거의 영향을 적게 받은 요단 동편의 르우벤과 길르앗, 해변의 아셀 지파와 북쪽의 단 지파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고난이 없으니 전의(戰意)도 없었다.’ 자신만 안전하면 그만이었다. 형제의 고통에 침묵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 앞에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스불론처럼 주님의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영적 전투의 현장을 누볐으면 좋겠다. 우리는 괜찮다는 안주함에 영적 기개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 되어 치른 전쟁은 아니었지만, 드보라와 바락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로 마음이 분열되어 오합지졸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한 것은 정말 훌륭하다. 그래서인지 본문은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어머니”(5:7)라고 부른다. 그녀의 조언과 지휘와 격려로 나약한 남자들이 깨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데까지 양육하였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모두가 나서게 하는 사람임을, 드보라가 선명하게 보여 준다. 나는 어떤가?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렇게 포용하고 연합하여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어머니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도자들이 늘 양극단에 치우쳐 국민과 그 삶을 바라보기보다 경쟁과 정쟁만 일삼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해 주셔서, “드보라”와 같이 연합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으로 교회 공동체들이 다시 한번 회복의 길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드보라의 리더십은 분열을 넘어 연합으로 이끄는 리더십이다. 직면한 각종 문제를 넉넉히 이기며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행하실 승리를 기대하며 지금 흩어져 있는 마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 리더십을 잘 닦아야 하겠다.
-사사 드보라의 시대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기억하고 전하는 공동체로 회복한 시대였다.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전하는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승리의 하나님을 만나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우리도 세상에서 얻은 부와 영광을 자랑하는 이야기보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꽃피우는 공동체로 빚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얻는다고 교회가 강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공동체, 능력의 공동체로 설 수 있는 것은 위용 넘치는 건물의 소유에 있지 않다. 교회의 힘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무리에게서 나오고, 다수가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드러난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로 생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드보라의 요청에 반응하여 참여한 지파와 참여하지 않은 지파를 선명하게 기록해 놓았다. 형제들이 나가서 피 흘릴 때, 어떤 이들은 편히 앉아 바라만 보았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치열하게 살아 내는데, 몇몇은 안일과 편안함에 묻혀 욕망만 좇았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쟁의 현장에 방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방관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무너지기보다, 함께 싸우는 지체들과 단단히 항오를 짜고 마음과 힘을 모아 전진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찌하든, 함께한 이들과 더불어 주님의 용맹하고 신실한 용사가 되어 싸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는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나라 이야기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공동체다. 돈과 힘이 정의라는 세상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따라 살지 않고,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좇아 사는 공동체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 공동체도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며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 단단히 세워 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노래는 드보라와 바락이 전쟁의 선두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를 맛본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군사(18절) 일만 명의 헌신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사실 이 전쟁은 중과부적이 확실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막강한 시스라의 철 병거 구백 승과 싸워야 하는 것을 알고도 자원했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임하는 그들의 각오가 고스란히 드러난 일이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분명한 믿음과 단호한 통솔력을 발휘하였고, 바락은 전선의 선봉에 섰다. 스불론과 납달리의 일만 군사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들의 헌신이 승리로 이어지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찬송하는 기념비적인 노래이다.
1. 여호와를 찬송하라! 왜?(1~3절)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쉬르, sing_1, 3절)’한다. 그 노래의 내용은 여호와를 찬송하고(2절_바라크_축복하다), 찬송하라(3절_자마르_찬양하다, 노래하다, 연주하다)는 것이다. 곧 기손 강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하솔 왕 야빈을 ‘진멸’하게 하신 하나님을 “축복하고 노래하라”고 명령한다.
*찬송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특히 찬송의 내용이 “하나님을 축복”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노래”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를 찬송해야 할까? 2절은 이 전쟁에 참여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기꺼이” 헌신한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찬양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그 찬양의 표현을 “축복”을 비는 것으로 한다. 하나님께서 시스라와 철 병거 구백 승을 물리치시려고 행하신 모든 일뿐 아니라, “기꺼이” 헌신하여 전장으로 달려오도록 마음에 동기를 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십 년 동안 야빈에게 “심한 학대”를 받았다. 그 정도를 가늠하게 하는 구절이 6~8절이다. “대로가 비었고… 오솔길로 다녔다”,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용사가 끊어졌다_새번역)”,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등의 표현이 그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대로가 비었다는 것은 무역상들의 발길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무역로가 철저히 막혔다는 의미다. 오솔길(뒷길)로 다녔다는 것은 심한 학대의 여파로 하솔 왕의 군사들을 피해 다녔다는 뜻이다. 또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용사가 끊어졌다)는 것은 철저한 군사적 박해로 인해 군사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하는 표현은 군사 무기조차 변변치 않았던 현실을 보여 준다.
*이런 상황, 곧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막막하며 변변한 군사력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싸워 이겨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기준과 조건에 턱없이 열악한 환경이 낙심의 조건일 수 없다. 진정 낙심해야 할 것은 “전능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면서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또 “전능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조건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승리의 감격을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삶이기를 소망해 본다. 무엇보다 승리의 현장에서 마음껏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꿈꿔 본다.
2. 무엇을 어떻게 찬양할까?(4~14절)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4~5절). 저마다 하나님께 기꺼이 헌신하여 전장에 나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9절). 백성의 지도자들부터 흰 나귀를 탄 귀족, 양탄자에 앉은 부자, 길을 걸어 다니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출정 명령 앞에 하나 된 마음으로 즐겁게 헌신하여 나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
이렇게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자원하여 결전의 전장에 나오기만 하면 승리가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려고(자원하여 헌신함으로 전장에 내려온 지도자와 백성들을 도우시려고) 용사들 가운데 내려오셨다!”(새번역, 13절) 그렇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이 이 노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 나아와 동참하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시스라와의 전쟁에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많은 방백이 죽음을 각오한 헌신으로 최전선에 섰다(18절). 이렇게 한마음으로 헌신한 이들을 통해 승리를 가져오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 그 나라가 견고하게 서 간다.
*이를 깨달은 드보라와 바락은 주저 없이 “노래”한다. 사사 시대 민초들 사이에서 불리던 국민 찬송이 지금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쉬르_1, 3절)뿐 아니라 악기와 함께 부르는 노래(자마르_3절)도 함께 부른다. “쉬르와 자마르”로 하나님을 노래(sing)한다. 훗날 시편 저자가 노래하듯, 비파와 수금(하프)과 소고(탬버린) 등으로 연주하며 노래(쉬르)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맛보았다면 어찌 주저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는 것만으로도 목소리로 노래하고(쉬르),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한다(자마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송하여도 다함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찬양해야 한다.
3. 찬송의 자리에 동참하지 못한 지파들과 그 이유(15절 하반절~17절)
시스라와 야빈 왕과의 전투에 동참하지 않은 지파들과 그들의 형편을 정확하게 언급한다. 르우벤, 길르앗, 아셀, 단 지파였다.
르우벤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거주한 지파다. 전쟁에 참전한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의 장남),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는 하솔 왕 야빈의 철 병거에 직접 “심한 학대”를 받고 있던 지파들이었다. 이들은 드보라와 바락의 부름에 선뜻 일어나 전쟁에 동참하였다. 특히 본문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일만 명이 기손 강 전투에 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기록한다(18절).
그런데 요단 서편(가나안 땅)에서는 단 지파와 아셀 지파가 불참하였고, 요단 동편에서 땅을 분배받은 길르앗(갓과 므낫세 반 지파)과 르우벤 지파도 이 전쟁을 외면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가나안 입성 전에 땅을 분배받으면서 요단 서편의 전투에 참전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민 32:25~27). 그런데 이들은 선조들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물과 초지가 풍성한 르우벤 지파는 토론만 벌이다 참전의 기회를 놓쳤고, 길르앗과 단 지파와 아셀 지파에게는 고민한 흔적조차 없다. 가나안 왕 야빈의 혹독한 학대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 고난이 실감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고난과 동떨어진 자기 일상을 살아가느라 민족의 전쟁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공동체의 관심사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모르겠다.
나는?
-전쟁의 승리 후에 드보라와 바락은 여호와를 찬양한다. 이스라엘 영솔자들의 지휘와 백성의 즐거운 헌신이 이루어 낸 승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스라엘의 역사 내내 약속을 지키시는 행동으로 그 역사를 일구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그 권능으로 이루신 승리였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홍해와 광야와 시내산을 그 앞에서 잠잠하게 하시고 진동하게 하셨던 하나님을 인정할 때, 이스라엘은 승리를 지속적으로 누릴 것이다. 또한 그 능력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믿을 때 약속해 주신 가나안의 복을 누릴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그 말씀(약속)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드보라는 승리의 날에 이스라엘을 찬양의 자리로 초대한다. 오랜 압제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던 방백과 백성에게, 이날의 감격을 잊지 말고 참전하도록 이끄신 하나님을 자원하여 송축하자고 말한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전쟁터든 우물 곁이든,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승리와 구원)을 만방에 전하라고 명령한다(1~3, 9~12절). 하나님 백성의 예배와 찬양은 그분의 살아 계심과 능력에 대한 산 증거(증인)이며, 세상을 향한 선교적 메시지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과 지금도 내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노래와 고백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시려고 백성 앞에 서서 나아가실 때(4:14), 땅과 산들은 흔들리고 하늘은 비를 쏟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용사(사사)’로 강림하시자, 불리하던 전력과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4, 5, 13절). 힘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세력(용사)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악이 준동하는 이 세상도 의와 공평과 진실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심판의 주님이 오실 것이기에, 이 땅의 악에 동조하지 말고 시련의 때를 타협 없이 잘 인내하여 살아 내야 하리라.
-하나님이 강림하시고(13절) 드보라가 일어나기 전까지(7절), 이스라엘 백성은 대로를 두고도 샛길로 숨어 다닐 만큼 숨죽여 살아야 했다. 막강한 대적과 싸울 무기도, 지켜 줄 보호자도 없었다(6~8절).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배신한 죄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미래를 버리는 일이요, 고통과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다.
-모든 지파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드보라의 참전 요구에 헌신적으로 응한 지파도 있었지만, 거리가 멀고 바쁘다는 이유로 공동체의 위기를 외면한 지파도 있었다(14~18절). 하지만 명백한 말씀을 굴복시킬 만큼 떳떳한 불순종은 없다. 헌신이 광신처럼 호도되고 철저하게 이기적인 세상에서, 나와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라고 부르심 받은 그 소명을 감당하며 시련을 견뎌 내고 있을까?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가나안과 전쟁하시려고 그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오신다. 하나님의 등장에 땅이 흔들리고 산이 진동하며 폭우와 비구름이 쏟아진다. 자식의 어려움을 알고 득달같이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 폭우로 시스라의 철 병거는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하나님의 달려오심……. 자녀들이 당하는 고난을 외면할 수 없어 민감하게 반응하여 달려오신 그 폭풍우가 백성을 살렸다.
-대로에 다니는 사람 없고 모두 오솔길로 피해 다니던 때에,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날지어다” 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드보라 자신과 바락이 이 전쟁의 선봉에 선다. 지도력의 무게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말로만이 아닌 ‘행동과 현장’에 거하는 모습이 곧 지도력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내게 맡겨 주신 목양의 터 안에서, 순종의 행함으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과 함께하기를 결심해 본다.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는 철 병거에 의해 핍박을 많이 받던 지역이었다. 그들은 드보라의 요청에 선뜻 일어나 전쟁에 참여한다. 스불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가장 용맹하게 나선다. 반면에 철 병거의 영향을 적게 받은 요단 동편의 르우벤과 길르앗, 해변의 아셀 지파와 북쪽의 단 지파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고난이 없으니 전의(戰意)도 없었다.’ 자신만 안전하면 그만이었다. 형제의 고통에 침묵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 앞에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스불론처럼 주님의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영적 전투의 현장을 누볐으면 좋겠다. 우리는 괜찮다는 안주함에 영적 기개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 되어 치른 전쟁은 아니었지만, 드보라와 바락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로 마음이 분열되어 오합지졸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한 것은 정말 훌륭하다. 그래서인지 본문은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어머니”(5:7)라고 부른다. 그녀의 조언과 지휘와 격려로 나약한 남자들이 깨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데까지 양육하였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모두가 나서게 하는 사람임을, 드보라가 선명하게 보여 준다. 나는 어떤가?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렇게 포용하고 연합하여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어머니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도자들이 늘 양극단에 치우쳐 국민과 그 삶을 바라보기보다 경쟁과 정쟁만 일삼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해 주셔서, “드보라”와 같이 연합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으로 교회 공동체들이 다시 한번 회복의 길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드보라의 리더십은 분열을 넘어 연합으로 이끄는 리더십이다. 직면한 각종 문제를 넉넉히 이기며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행하실 승리를 기대하며 지금 흩어져 있는 마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 리더십을 잘 닦아야 하겠다.
-사사 드보라의 시대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기억하고 전하는 공동체로 회복한 시대였다.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전하는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승리의 하나님을 만나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우리도 세상에서 얻은 부와 영광을 자랑하는 이야기보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꽃피우는 공동체로 빚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얻는다고 교회가 강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공동체, 능력의 공동체로 설 수 있는 것은 위용 넘치는 건물의 소유에 있지 않다. 교회의 힘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무리에게서 나오고, 다수가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드러난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로 생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드보라의 요청에 반응하여 참여한 지파와 참여하지 않은 지파를 선명하게 기록해 놓았다. 형제들이 나가서 피 흘릴 때, 어떤 이들은 편히 앉아 바라만 보았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치열하게 살아 내는데, 몇몇은 안일과 편안함에 묻혀 욕망만 좇았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쟁의 현장에 방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방관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무너지기보다, 함께 싸우는 지체들과 단단히 항오를 짜고 마음과 힘을 모아 전진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찌하든, 함께한 이들과 더불어 주님의 용맹하고 신실한 용사가 되어 싸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는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나라 이야기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공동체다. 돈과 힘이 정의라는 세상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따라 살지 않고,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좇아 사는 공동체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 공동체도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며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 단단히 세워 가야 할 것이다.
선교편지 ㅣ
정동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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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N
2026년 05월 16일
“행운 대신 거룩한 은혜를”… 전주 더온누리교회, 다음 세대 위한 ‘홀리 빛키’ 페스티벌 성료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VERITAS-a
2025년 12월 24일
전주대, 더온누리교회로부터 발전기금 1,000만원 전달받아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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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2025년 10월 22일
전주필그림·밴쿠버합창단 자매결연, 더온누리교회서 연합공연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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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2025년 10월 22일
‘복음과 교사’ 주제 ‘넥스트교사컨퍼런스’ 더온누리교회에서 열려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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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일보
2025년 07월 03일
향기로운 제물, ‘보좌에 앉으신 주님’ 싱글 발매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기독일보
2025년 06월 26일
향기로운 제물, 열한 번째 앨범 ‘살아도 죽어도’ 발매
전주지역에서 목요모임을 이끌고 있는 ‘향기로운 제물’의 열한 번째 앨범 ‘살아도 죽어도’가 발매됐다….
2026년 9월 13일 주보
우리를 더온누리교회 공동체로 부르신 은혜를 지금 여기에서 순종할 때, 어찌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을까요? 분주할수록 기도는 가장

2026년 9월 6일 주보
우리를 더온누리교회 공동체로 부르신 은혜를 지금 여기에서 순종할 때, 어찌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을까요? 분주할수록 기도는 가장

2026년 8월 30일 주보
우리는 “더 예수님처럼, 더욱더 하나님 나라”를 꿈꿉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하나님 나라 진실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마음과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2026년 05월 23일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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