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와 승리의 찬양 [사사기 5:1-18]
4장 24절은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라고 기록한다. 드보라와 바락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승리의 전장에 울려 퍼지는 환호의 찬양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높여진다. 드보라와 바락의 호소에 부응하여 참전한 지파들은 승리의 감격 속에서 찬양을 드리지만, 참전의 나팔 소리를 외면한 지파들을 향한 책망의 소리도 주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노래는 드보라와 바락이 전쟁의 선두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를 맛본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군사(18절) 일만 명의 헌신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사실 이 전쟁은 중과부적이 확실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막강한 시스라의 철 병거 구백 승과 싸워야 하는 것을 알고도 자원했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임하는 그들의 각오가 고스란히 드러난 일이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분명한 믿음과 단호한 통솔력을 발휘하였고, 바락은 전선의 선봉에 섰다. 스불론과 납달리의 일만 군사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들의 헌신이 승리로 이어지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찬송하는 기념비적인 노래이다.
1. 여호와를 찬송하라! 왜?(1~3절)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쉬르, sing_1, 3절)’한다. 그 노래의 내용은 여호와를 찬송하고(2절_바라크_축복하다), 찬송하라(3절_자마르_찬양하다, 노래하다, 연주하다)는 것이다. 곧 기손 강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하솔 왕 야빈을 ‘진멸’하게 하신 하나님을 “축복하고 노래하라”고 명령한다.
*찬송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특히 찬송의 내용이 “하나님을 축복”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노래”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를 찬송해야 할까? 2절은 이 전쟁에 참여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기꺼이” 헌신한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찬양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그 찬양의 표현을 “축복”을 비는 것으로 한다. 하나님께서 시스라와 철 병거 구백 승을 물리치시려고 행하신 모든 일뿐 아니라, “기꺼이” 헌신하여 전장으로 달려오도록 마음에 동기를 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십 년 동안 야빈에게 “심한 학대”를 받았다. 그 정도를 가늠하게 하는 구절이 6~8절이다. “대로가 비었고… 오솔길로 다녔다”,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용사가 끊어졌다_새번역)”,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등의 표현이 그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대로가 비었다는 것은 무역상들의 발길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무역로가 철저히 막혔다는 의미다. 오솔길(뒷길)로 다녔다는 것은 심한 학대의 여파로 하솔 왕의 군사들을 피해 다녔다는 뜻이다. 또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용사가 끊어졌다)는 것은 철저한 군사적 박해로 인해 군사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하는 표현은 군사 무기조차 변변치 않았던 현실을 보여 준다.
*이런 상황, 곧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막막하며 변변한 군사력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싸워 이겨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기준과 조건에 턱없이 열악한 환경이 낙심의 조건일 수 없다. 진정 낙심해야 할 것은 “전능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면서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또 “전능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조건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승리의 감격을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삶이기를 소망해 본다. 무엇보다 승리의 현장에서 마음껏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꿈꿔 본다.
2. 무엇을 어떻게 찬양할까?(4~14절)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4~5절). 저마다 하나님께 기꺼이 헌신하여 전장에 나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9절). 백성의 지도자들부터 흰 나귀를 탄 귀족, 양탄자에 앉은 부자, 길을 걸어 다니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출정 명령 앞에 하나 된 마음으로 즐겁게 헌신하여 나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
이렇게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자원하여 결전의 전장에 나오기만 하면 승리가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려고(자원하여 헌신함으로 전장에 내려온 지도자와 백성들을 도우시려고) 용사들 가운데 내려오셨다!”(새번역, 13절) 그렇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이 이 노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 나아와 동참하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시스라와의 전쟁에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많은 방백이 죽음을 각오한 헌신으로 최전선에 섰다(18절). 이렇게 한마음으로 헌신한 이들을 통해 승리를 가져오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 그 나라가 견고하게 서 간다.
*이를 깨달은 드보라와 바락은 주저 없이 “노래”한다. 사사 시대 민초들 사이에서 불리던 국민 찬송이 지금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쉬르_1, 3절)뿐 아니라 악기와 함께 부르는 노래(자마르_3절)도 함께 부른다. “쉬르와 자마르”로 하나님을 노래(sing)한다. 훗날 시편 저자가 노래하듯, 비파와 수금(하프)과 소고(탬버린) 등으로 연주하며 노래(쉬르)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맛보았다면 어찌 주저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는 것만으로도 목소리로 노래하고(쉬르),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한다(자마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송하여도 다함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찬양해야 한다.
3. 찬송의 자리에 동참하지 못한 지파들과 그 이유(15절 하반절~17절)
시스라와 야빈 왕과의 전투에 동참하지 않은 지파들과 그들의 형편을 정확하게 언급한다. 르우벤, 길르앗, 아셀, 단 지파였다.
르우벤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거주한 지파다. 전쟁에 참전한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의 장남),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는 하솔 왕 야빈의 철 병거에 직접 “심한 학대”를 받고 있던 지파들이었다. 이들은 드보라와 바락의 부름에 선뜻 일어나 전쟁에 동참하였다. 특히 본문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일만 명이 기손 강 전투에 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기록한다(18절).
그런데 요단 서편(가나안 땅)에서는 단 지파와 아셀 지파가 불참하였고, 요단 동편에서 땅을 분배받은 길르앗(갓과 므낫세 반 지파)과 르우벤 지파도 이 전쟁을 외면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가나안 입성 전에 땅을 분배받으면서 요단 서편의 전투에 참전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민 32:25~27). 그런데 이들은 선조들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물과 초지가 풍성한 르우벤 지파는 토론만 벌이다 참전의 기회를 놓쳤고, 길르앗과 단 지파와 아셀 지파에게는 고민한 흔적조차 없다. 가나안 왕 야빈의 혹독한 학대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 고난이 실감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고난과 동떨어진 자기 일상을 살아가느라 민족의 전쟁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공동체의 관심사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모르겠다.
나는?
-전쟁의 승리 후에 드보라와 바락은 여호와를 찬양한다. 이스라엘 영솔자들의 지휘와 백성의 즐거운 헌신이 이루어 낸 승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스라엘의 역사 내내 약속을 지키시는 행동으로 그 역사를 일구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그 권능으로 이루신 승리였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홍해와 광야와 시내산을 그 앞에서 잠잠하게 하시고 진동하게 하셨던 하나님을 인정할 때, 이스라엘은 승리를 지속적으로 누릴 것이다. 또한 그 능력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믿을 때 약속해 주신 가나안의 복을 누릴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그 말씀(약속)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드보라는 승리의 날에 이스라엘을 찬양의 자리로 초대한다. 오랜 압제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던 방백과 백성에게, 이날의 감격을 잊지 말고 참전하도록 이끄신 하나님을 자원하여 송축하자고 말한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전쟁터든 우물 곁이든,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승리와 구원)을 만방에 전하라고 명령한다(1~3, 9~12절). 하나님 백성의 예배와 찬양은 그분의 살아 계심과 능력에 대한 산 증거(증인)이며, 세상을 향한 선교적 메시지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과 지금도 내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노래와 고백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시려고 백성 앞에 서서 나아가실 때(4:14), 땅과 산들은 흔들리고 하늘은 비를 쏟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용사(사사)’로 강림하시자, 불리하던 전력과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4, 5, 13절). 힘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세력(용사)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악이 준동하는 이 세상도 의와 공평과 진실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심판의 주님이 오실 것이기에, 이 땅의 악에 동조하지 말고 시련의 때를 타협 없이 잘 인내하여 살아 내야 하리라.
-하나님이 강림하시고(13절) 드보라가 일어나기 전까지(7절), 이스라엘 백성은 대로를 두고도 샛길로 숨어 다닐 만큼 숨죽여 살아야 했다. 막강한 대적과 싸울 무기도, 지켜 줄 보호자도 없었다(6~8절).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배신한 죄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미래를 버리는 일이요, 고통과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다.
-모든 지파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드보라의 참전 요구에 헌신적으로 응한 지파도 있었지만, 거리가 멀고 바쁘다는 이유로 공동체의 위기를 외면한 지파도 있었다(14~18절). 하지만 명백한 말씀을 굴복시킬 만큼 떳떳한 불순종은 없다. 헌신이 광신처럼 호도되고 철저하게 이기적인 세상에서, 나와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라고 부르심 받은 그 소명을 감당하며 시련을 견뎌 내고 있을까?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가나안과 전쟁하시려고 그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오신다. 하나님의 등장에 땅이 흔들리고 산이 진동하며 폭우와 비구름이 쏟아진다. 자식의 어려움을 알고 득달같이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 폭우로 시스라의 철 병거는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하나님의 달려오심……. 자녀들이 당하는 고난을 외면할 수 없어 민감하게 반응하여 달려오신 그 폭풍우가 백성을 살렸다.
-대로에 다니는 사람 없고 모두 오솔길로 피해 다니던 때에,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날지어다” 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드보라 자신과 바락이 이 전쟁의 선봉에 선다. 지도력의 무게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말로만이 아닌 ‘행동과 현장’에 거하는 모습이 곧 지도력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내게 맡겨 주신 목양의 터 안에서, 순종의 행함으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과 함께하기를 결심해 본다.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는 철 병거에 의해 핍박을 많이 받던 지역이었다. 그들은 드보라의 요청에 선뜻 일어나 전쟁에 참여한다. 스불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가장 용맹하게 나선다. 반면에 철 병거의 영향을 적게 받은 요단 동편의 르우벤과 길르앗, 해변의 아셀 지파와 북쪽의 단 지파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고난이 없으니 전의(戰意)도 없었다.’ 자신만 안전하면 그만이었다. 형제의 고통에 침묵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 앞에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스불론처럼 주님의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영적 전투의 현장을 누볐으면 좋겠다. 우리는 괜찮다는 안주함에 영적 기개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 되어 치른 전쟁은 아니었지만, 드보라와 바락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로 마음이 분열되어 오합지졸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한 것은 정말 훌륭하다. 그래서인지 본문은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어머니”(5:7)라고 부른다. 그녀의 조언과 지휘와 격려로 나약한 남자들이 깨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데까지 양육하였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모두가 나서게 하는 사람임을, 드보라가 선명하게 보여 준다. 나는 어떤가?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렇게 포용하고 연합하여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어머니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도자들이 늘 양극단에 치우쳐 국민과 그 삶을 바라보기보다 경쟁과 정쟁만 일삼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해 주셔서, “드보라”와 같이 연합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으로 교회 공동체들이 다시 한번 회복의 길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드보라의 리더십은 분열을 넘어 연합으로 이끄는 리더십이다. 직면한 각종 문제를 넉넉히 이기며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행하실 승리를 기대하며 지금 흩어져 있는 마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 리더십을 잘 닦아야 하겠다.
-사사 드보라의 시대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기억하고 전하는 공동체로 회복한 시대였다.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전하는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승리의 하나님을 만나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우리도 세상에서 얻은 부와 영광을 자랑하는 이야기보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꽃피우는 공동체로 빚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얻는다고 교회가 강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공동체, 능력의 공동체로 설 수 있는 것은 위용 넘치는 건물의 소유에 있지 않다. 교회의 힘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무리에게서 나오고, 다수가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드러난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로 생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드보라의 요청에 반응하여 참여한 지파와 참여하지 않은 지파를 선명하게 기록해 놓았다. 형제들이 나가서 피 흘릴 때, 어떤 이들은 편히 앉아 바라만 보았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치열하게 살아 내는데, 몇몇은 안일과 편안함에 묻혀 욕망만 좇았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쟁의 현장에 방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방관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무너지기보다, 함께 싸우는 지체들과 단단히 항오를 짜고 마음과 힘을 모아 전진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찌하든, 함께한 이들과 더불어 주님의 용맹하고 신실한 용사가 되어 싸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는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나라 이야기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공동체다. 돈과 힘이 정의라는 세상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따라 살지 않고,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좇아 사는 공동체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 공동체도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며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 단단히 세워 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노래는 드보라와 바락이 전쟁의 선두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를 맛본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군사(18절) 일만 명의 헌신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사실 이 전쟁은 중과부적이 확실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막강한 시스라의 철 병거 구백 승과 싸워야 하는 것을 알고도 자원했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임하는 그들의 각오가 고스란히 드러난 일이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분명한 믿음과 단호한 통솔력을 발휘하였고, 바락은 전선의 선봉에 섰다. 스불론과 납달리의 일만 군사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들의 헌신이 승리로 이어지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찬송하는 기념비적인 노래이다.
1. 여호와를 찬송하라! 왜?(1~3절)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쉬르, sing_1, 3절)’한다. 그 노래의 내용은 여호와를 찬송하고(2절_바라크_축복하다), 찬송하라(3절_자마르_찬양하다, 노래하다, 연주하다)는 것이다. 곧 기손 강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하솔 왕 야빈을 ‘진멸’하게 하신 하나님을 “축복하고 노래하라”고 명령한다.
*찬송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특히 찬송의 내용이 “하나님을 축복”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노래”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를 찬송해야 할까? 2절은 이 전쟁에 참여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기꺼이” 헌신한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찬양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그 찬양의 표현을 “축복”을 비는 것으로 한다. 하나님께서 시스라와 철 병거 구백 승을 물리치시려고 행하신 모든 일뿐 아니라, “기꺼이” 헌신하여 전장으로 달려오도록 마음에 동기를 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십 년 동안 야빈에게 “심한 학대”를 받았다. 그 정도를 가늠하게 하는 구절이 6~8절이다. “대로가 비었고… 오솔길로 다녔다”,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용사가 끊어졌다_새번역)”,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등의 표현이 그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대로가 비었다는 것은 무역상들의 발길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무역로가 철저히 막혔다는 의미다. 오솔길(뒷길)로 다녔다는 것은 심한 학대의 여파로 하솔 왕의 군사들을 피해 다녔다는 뜻이다. 또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용사가 끊어졌다)는 것은 철저한 군사적 박해로 인해 군사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하는 표현은 군사 무기조차 변변치 않았던 현실을 보여 준다.
*이런 상황, 곧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막막하며 변변한 군사력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싸워 이겨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기준과 조건에 턱없이 열악한 환경이 낙심의 조건일 수 없다. 진정 낙심해야 할 것은 “전능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면서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또 “전능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조건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승리의 감격을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삶이기를 소망해 본다. 무엇보다 승리의 현장에서 마음껏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꿈꿔 본다.
2. 무엇을 어떻게 찬양할까?(4~14절)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4~5절). 저마다 하나님께 기꺼이 헌신하여 전장에 나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9절). 백성의 지도자들부터 흰 나귀를 탄 귀족, 양탄자에 앉은 부자, 길을 걸어 다니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출정 명령 앞에 하나 된 마음으로 즐겁게 헌신하여 나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다.
이렇게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자원하여 결전의 전장에 나오기만 하면 승리가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려고(자원하여 헌신함으로 전장에 내려온 지도자와 백성들을 도우시려고) 용사들 가운데 내려오셨다!”(새번역, 13절) 그렇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이 이 노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 나아와 동참하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시스라와의 전쟁에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많은 방백이 죽음을 각오한 헌신으로 최전선에 섰다(18절). 이렇게 한마음으로 헌신한 이들을 통해 승리를 가져오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 그 나라가 견고하게 서 간다.
*이를 깨달은 드보라와 바락은 주저 없이 “노래”한다. 사사 시대 민초들 사이에서 불리던 국민 찬송이 지금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쉬르_1, 3절)뿐 아니라 악기와 함께 부르는 노래(자마르_3절)도 함께 부른다. “쉬르와 자마르”로 하나님을 노래(sing)한다. 훗날 시편 저자가 노래하듯, 비파와 수금(하프)과 소고(탬버린) 등으로 연주하며 노래(쉬르)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맛보았다면 어찌 주저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는 것만으로도 목소리로 노래하고(쉬르),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한다(자마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송하여도 다함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찬양해야 한다.
3. 찬송의 자리에 동참하지 못한 지파들과 그 이유(15절 하반절~17절)
시스라와 야빈 왕과의 전투에 동참하지 않은 지파들과 그들의 형편을 정확하게 언급한다. 르우벤, 길르앗, 아셀, 단 지파였다.
르우벤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거주한 지파다. 전쟁에 참전한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의 장남),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는 하솔 왕 야빈의 철 병거에 직접 “심한 학대”를 받고 있던 지파들이었다. 이들은 드보라와 바락의 부름에 선뜻 일어나 전쟁에 동참하였다. 특히 본문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일만 명이 기손 강 전투에 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기록한다(18절).
그런데 요단 서편(가나안 땅)에서는 단 지파와 아셀 지파가 불참하였고, 요단 동편에서 땅을 분배받은 길르앗(갓과 므낫세 반 지파)과 르우벤 지파도 이 전쟁을 외면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가나안 입성 전에 땅을 분배받으면서 요단 서편의 전투에 참전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민 32:25~27). 그런데 이들은 선조들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물과 초지가 풍성한 르우벤 지파는 토론만 벌이다 참전의 기회를 놓쳤고, 길르앗과 단 지파와 아셀 지파에게는 고민한 흔적조차 없다. 가나안 왕 야빈의 혹독한 학대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 고난이 실감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고난과 동떨어진 자기 일상을 살아가느라 민족의 전쟁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공동체의 관심사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모르겠다.
나는?
-전쟁의 승리 후에 드보라와 바락은 여호와를 찬양한다. 이스라엘 영솔자들의 지휘와 백성의 즐거운 헌신이 이루어 낸 승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스라엘의 역사 내내 약속을 지키시는 행동으로 그 역사를 일구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그 권능으로 이루신 승리였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홍해와 광야와 시내산을 그 앞에서 잠잠하게 하시고 진동하게 하셨던 하나님을 인정할 때, 이스라엘은 승리를 지속적으로 누릴 것이다. 또한 그 능력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믿을 때 약속해 주신 가나안의 복을 누릴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그 말씀(약속)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드보라는 승리의 날에 이스라엘을 찬양의 자리로 초대한다. 오랜 압제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던 방백과 백성에게, 이날의 감격을 잊지 말고 참전하도록 이끄신 하나님을 자원하여 송축하자고 말한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전쟁터든 우물 곁이든,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승리와 구원)을 만방에 전하라고 명령한다(1~3, 9~12절). 하나님 백성의 예배와 찬양은 그분의 살아 계심과 능력에 대한 산 증거(증인)이며, 세상을 향한 선교적 메시지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과 지금도 내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노래와 고백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시려고 백성 앞에 서서 나아가실 때(4:14), 땅과 산들은 흔들리고 하늘은 비를 쏟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용사(사사)’로 강림하시자, 불리하던 전력과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4, 5, 13절). 힘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세력(용사)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악이 준동하는 이 세상도 의와 공평과 진실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심판의 주님이 오실 것이기에, 이 땅의 악에 동조하지 말고 시련의 때를 타협 없이 잘 인내하여 살아 내야 하리라.
-하나님이 강림하시고(13절) 드보라가 일어나기 전까지(7절), 이스라엘 백성은 대로를 두고도 샛길로 숨어 다닐 만큼 숨죽여 살아야 했다. 막강한 대적과 싸울 무기도, 지켜 줄 보호자도 없었다(6~8절).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배신한 죄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미래를 버리는 일이요, 고통과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다.
-모든 지파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드보라의 참전 요구에 헌신적으로 응한 지파도 있었지만, 거리가 멀고 바쁘다는 이유로 공동체의 위기를 외면한 지파도 있었다(14~18절). 하지만 명백한 말씀을 굴복시킬 만큼 떳떳한 불순종은 없다. 헌신이 광신처럼 호도되고 철저하게 이기적인 세상에서, 나와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라고 부르심 받은 그 소명을 감당하며 시련을 견뎌 내고 있을까?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가나안과 전쟁하시려고 그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오신다. 하나님의 등장에 땅이 흔들리고 산이 진동하며 폭우와 비구름이 쏟아진다. 자식의 어려움을 알고 득달같이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 폭우로 시스라의 철 병거는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하나님의 달려오심……. 자녀들이 당하는 고난을 외면할 수 없어 민감하게 반응하여 달려오신 그 폭풍우가 백성을 살렸다.
-대로에 다니는 사람 없고 모두 오솔길로 피해 다니던 때에,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날지어다” 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드보라 자신과 바락이 이 전쟁의 선봉에 선다. 지도력의 무게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말로만이 아닌 ‘행동과 현장’에 거하는 모습이 곧 지도력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내게 맡겨 주신 목양의 터 안에서, 순종의 행함으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과 함께하기를 결심해 본다.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는 철 병거에 의해 핍박을 많이 받던 지역이었다. 그들은 드보라의 요청에 선뜻 일어나 전쟁에 참여한다. 스불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가장 용맹하게 나선다. 반면에 철 병거의 영향을 적게 받은 요단 동편의 르우벤과 길르앗, 해변의 아셀 지파와 북쪽의 단 지파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고난이 없으니 전의(戰意)도 없었다.’ 자신만 안전하면 그만이었다. 형제의 고통에 침묵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 앞에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스불론처럼 주님의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영적 전투의 현장을 누볐으면 좋겠다. 우리는 괜찮다는 안주함에 영적 기개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 되어 치른 전쟁은 아니었지만, 드보라와 바락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로 마음이 분열되어 오합지졸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한 것은 정말 훌륭하다. 그래서인지 본문은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어머니”(5:7)라고 부른다. 그녀의 조언과 지휘와 격려로 나약한 남자들이 깨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데까지 양육하였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모두가 나서게 하는 사람임을, 드보라가 선명하게 보여 준다. 나는 어떤가?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렇게 포용하고 연합하여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어머니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도자들이 늘 양극단에 치우쳐 국민과 그 삶을 바라보기보다 경쟁과 정쟁만 일삼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해 주셔서, “드보라”와 같이 연합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으로 교회 공동체들이 다시 한번 회복의 길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드보라의 리더십은 분열을 넘어 연합으로 이끄는 리더십이다. 직면한 각종 문제를 넉넉히 이기며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행하실 승리를 기대하며 지금 흩어져 있는 마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 리더십을 잘 닦아야 하겠다.
-사사 드보라의 시대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기억하고 전하는 공동체로 회복한 시대였다.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전하는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승리의 하나님을 만나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우리도 세상에서 얻은 부와 영광을 자랑하는 이야기보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꽃피우는 공동체로 빚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얻는다고 교회가 강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공동체, 능력의 공동체로 설 수 있는 것은 위용 넘치는 건물의 소유에 있지 않다. 교회의 힘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무리에게서 나오고, 다수가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드러난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로 생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드보라의 요청에 반응하여 참여한 지파와 참여하지 않은 지파를 선명하게 기록해 놓았다. 형제들이 나가서 피 흘릴 때, 어떤 이들은 편히 앉아 바라만 보았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치열하게 살아 내는데, 몇몇은 안일과 편안함에 묻혀 욕망만 좇았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쟁의 현장에 방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방관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무너지기보다, 함께 싸우는 지체들과 단단히 항오를 짜고 마음과 힘을 모아 전진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찌하든, 함께한 이들과 더불어 주님의 용맹하고 신실한 용사가 되어 싸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는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나라 이야기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공동체다. 돈과 힘이 정의라는 세상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따라 살지 않고,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좇아 사는 공동체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 공동체도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며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 단단히 세워 가야 할 것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꿀벌과 염소가 되찾다! [사사기 4:11-24]
하나님께서는 기손 강에서 시스라와 그의 병거를 넘겨주시겠다는 말씀대로(7절) 앞서 행하시며, 시스라와 그의 온 병거와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셨다(14~16절). 또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시겠다는(9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는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서 죽임을 당한다(21~22절). 말씀하신 대로 ‘여인’ 야엘의 담대한 행동이 이스라엘을 구한 것이다.
11~16절은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17~22절은 야엘(염소)이 시스라를 죽이는 장면을, 23~24절은 마침내 당시 가장 강력했던 가나안 왕 야빈을 이기는 이스라엘을 보여 준다. 이 서사를 통해 되짚어 볼 하나님의 메시지를 생각해 보자.
1. 바락의 헛다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그리고 바락은 전쟁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이에 드보라가 함께 동행하지 않으면 결코 올라가지 않겠노라 말했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의 과정에서 이런 바락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패주하는 시스라의 패잔병들을 처리하는 데 몰두할 뿐이다. 그는 드보라의 예고와 상관없이 끝까지 시스라를 추격하여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스라가 “여인”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드보라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가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출정하지 않겠노라 어깃장을 놓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었다(9절). 한창 패잔병들을 추격하며 시스라를 찾으려는 그의 머릿속에는 이 말씀이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고 난 후 ‘나가서'(22절) 이를 알리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추격했을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야엘의 장막에서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힌 시스라를 바라본 바락의 마음은 어땠을까?
*온전하지 못한 순종에도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말씀하신 대로 완벽한 승리를 주셨다. 바락은 그 승리를 겉돌며 거두었을 뿐이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은혜가 이와 같다. “온전히 믿고 순종하면 드보라와 야엘처럼 승리의 현장에서 당당하다.” 하지만 스스로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는 불안한 믿음에는 승리의 현장에서도 개운치 못한 후회만 남을 뿐이다.
2. 겐 사람 헤벨과 야엘
드보라와 바락의 출정과 시스라와의 개전 사이에,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데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가운데 헤벨이라고 하는 겐 사람이 동족을 떠나, 게데스 부근에 있는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장막을 치고 살았다.”(새번역, 11절)
‘모세의 장인’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장인(하탄)이라는 단어에는 “장인”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사위, 아들, 처남”이라는 뜻도 있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모세의 장인(아내의 아버지)은 출애굽기 2장 21절에서 “르우엘”로, 18장에서는 “이드로”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민수기 10장 29절에 “호밥”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를 “르우엘(이드로)의 아들”로 소개한다. 그렇다면 “모세의 장인 호밥”이 아니라 “모세의 처남인 호밥의 자손 헤벨”로 이해해야 한다.
또 사사기 1장 16절에는 모세의 장인의 후손인 겐 사람들이 가나안 남부 지역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과 연관된 정보를 알려 준다. 헤벨은 이들 가운데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정착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이어지는 12절에는 바락의 군대가 다볼산에 모인 것을 “사람들”이 시스라에게 알렸다는 기록이 나오고, 17절에서는 시스라가 패주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다고 기록하면서 그 이유를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충 설명한다. 그리고 18절에서 야엘은 시스라를 영접하면서 “나의 주여(아돈)”라고 부른다. ‘아돈’에는 주, 주님(Lord), 주인(master), 소유주(owner)라는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유추하면, 겐 사람 헤벨은 이중 스파이였다.
납달리 지파 바락의 거주지 게데스에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이들의 근황을 하솔 왕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모세의 간청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된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하솔 왕에게도 충성하는 배신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주소를 잘 대변해 준다. 하나님을 배신한 그들을 헤벨도 배신한다. 그런데 그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그 배신의 삶에서 돌이킨다. 그녀의 돌이킴은 가나안 전쟁 초기 여리고성의 라합을 생각나게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삶을 익히 듣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고자 결단한 믿음의 결연한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야엘은 시스라의 행색을 보고 단박에, 예상을 뒤엎고 이스라엘이 승리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이중 스파이의 삶을 끝낼 결단을 내린다. 헤벨에게서 이런 결단의 모습이 보였다면 어땠을까?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헤벨은 아예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또 야엘이 시스라를 해치우는 과정은 바락과도 비교가 된다. 주저하던 바락과 달리, 야엘은 결심하고 결행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당연하게도 승전의 주역은 야엘이 된다!
3.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여성 리더십의 부각은 그만큼 남성 리더십의 쇠락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 뭐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인가 싶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성별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리더십이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곳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남성 중심적인 리더십을 당연하게 여기던 고대 사회의 모습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장면이었다.
드보라(꿀벌)와 야엘(염소)의 이름의 뜻으로만 보자면, 이 여인들의 순종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회복이 꿀벌(드보라)과 염소(야엘)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전통에 얽매인 관습이나 편파적으로 안착된 제도에 매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이를 통해 이루어져 간다.
*하나님께서는 바락과 헤벨처럼 나약하고 배신하는, 시대정신에 젖은 남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행하실 “승리하는 전쟁”을 확신했던 두 여인을 통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전쟁은 그치지 않을 텐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믿음으로 이 전장에 설 자는 누구일까! 바로 내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나님의 백성 안에 머물기를 포기한 헤벨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도 주저하는 나약한 바락의 모습이 아니라, 알려 주신 대로 순종하며 기꺼이 다볼산에 동행한 드보라나, 자기 장막에 피신한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고 다시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복권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야엘과 같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시스라에게는 당대의 최첨단 무기인 철 병거가 구백 승이나 있었다.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기손 강에 집결한다(12~14절).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상상해 보라. 그들 일만 명이 가진 것이라고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넘겨주신 날’이라는 드보라의 예언뿐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영적 전투의 무기라고 믿지 않는 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당해 낼 재간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바락 ‘앞에서’ 싸워 승리를 주신다. 건기의 기손 강에 폭우를 내리시고 마른 땅을 진흙탕으로 바꾸심으로, 강력한 철 병거를 무용지물이 되게 하신다. 이스라엘이 한 일은 패주하는 잔당들을 치는 일이었다(15~16절). 홍해에서 애굽의 정예 부대를 수장하신 사건이 재현된 것이다. 또한 약속하신 대로 시스라를 넘겨주신다.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철 병거 구백 승처럼 아무리 탁월한 성취와 재능이라도 쓸모없게 되고 도리어 나를 망하게 하는 자원이 될 것이다.
*야엘은 도망치는 시스라에게 간곡히 요청하여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하고, 극진한 대접으로 그의 마음을 안심시킨다. 말로 평안을 주고, 이불로 감싸 주고, 따스한 우유로 곤한 잠에 빠지게 한다(17~20절). 그가 전쟁에서 패하여 쫓기고 있는 처지임을 직감한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용기 있는 한 여인 앞에서, 오만한 시스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염소’라는 뜻의 야엘이 시스라에게 ‘우유(젖)’를 먹여 잠들게 한 후 그를 죽인다(21~24절). 그의 죽음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20년간 학대당한 이들에게 고통을 잊게 만들 만큼 통쾌했을 것이다. 겁쟁이 바락이 포기한 영광을 용기 있는 여인 야엘이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시대를 원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대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꿀벌(드보라)”을 보내 주시고 “염소(야엘)”를 예비시켜 주셨다. 그녀들의 결단과 결행의 순종을 통해 20년간의 고통을 끝내게 하셨다.
*드보라 앞의 바락이나, 야엘의 손에 황당하게 죽어 간 시스라의 모습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감동) 앞에 온전히 순종하여 결행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된다. 사사 시대는 청동기 시대 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청동기에 머물러 있었지만, 하솔 왕 야빈은 이미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리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이라도, 하나님께서 휘두르시는 자연의 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힘이 세다고 이기는 것도, 약하다고 하여 무조건 패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논리에 잠식된 영성 안에 뿌리박힌 패배주의부터 걷어 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 철기 문명도 견뎌 낼 재간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야말로, 문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사는 지혜로운 삶인 것이 틀림없다.
*바락의 헛다리,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버스 떠난 뒤에 손을 흔드는 것 같은 머쓱함과 부끄러움이 왜 내 몫처럼 느껴질까? 왜 오늘날 교회의 모습처럼 다가올까! 코로나와 함께 일상을 점진적으로 회복해 나가는 이 중요한 시기에, 바락의 헛다리를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바락은 다볼산에 집결하고도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기손 강에 시스라의 철 병거 900대가 몰려드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을 것이다. 반면 가장 두려워질 수 있는 그때, 오히려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네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14절)라고 외치는 드보라의 음성에 그제야 진격했다!
*꿀의 여인 드보라와 젖의 여인 야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신다. 이 한 번의 승리가 전부는 아니다. 이어서 약화된 가나안 왕 야빈을 굴복하게 하신 후, 결국 진멸하신다. 모든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 하나님의 전쟁은 멈추지 않는다. 드보라와 야엘의 서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도전은 이것이다. ‘누가 이 여인들처럼 믿음으로 나설 것인가?’
*드보라가 바라보는 하나님을 나도 바라보기를 사모한다! 나를 앞서 나가시는 하나님의 등을 보며 목회하고 싶다! 주님의 등을 보고 싶다!
11~16절은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17~22절은 야엘(염소)이 시스라를 죽이는 장면을, 23~24절은 마침내 당시 가장 강력했던 가나안 왕 야빈을 이기는 이스라엘을 보여 준다. 이 서사를 통해 되짚어 볼 하나님의 메시지를 생각해 보자.
1. 바락의 헛다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그리고 바락은 전쟁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이에 드보라가 함께 동행하지 않으면 결코 올라가지 않겠노라 말했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의 과정에서 이런 바락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패주하는 시스라의 패잔병들을 처리하는 데 몰두할 뿐이다. 그는 드보라의 예고와 상관없이 끝까지 시스라를 추격하여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스라가 “여인”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드보라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가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출정하지 않겠노라 어깃장을 놓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었다(9절). 한창 패잔병들을 추격하며 시스라를 찾으려는 그의 머릿속에는 이 말씀이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고 난 후 ‘나가서'(22절) 이를 알리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추격했을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야엘의 장막에서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힌 시스라를 바라본 바락의 마음은 어땠을까?
*온전하지 못한 순종에도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말씀하신 대로 완벽한 승리를 주셨다. 바락은 그 승리를 겉돌며 거두었을 뿐이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은혜가 이와 같다. “온전히 믿고 순종하면 드보라와 야엘처럼 승리의 현장에서 당당하다.” 하지만 스스로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는 불안한 믿음에는 승리의 현장에서도 개운치 못한 후회만 남을 뿐이다.
2. 겐 사람 헤벨과 야엘
드보라와 바락의 출정과 시스라와의 개전 사이에,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데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가운데 헤벨이라고 하는 겐 사람이 동족을 떠나, 게데스 부근에 있는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장막을 치고 살았다.”(새번역, 11절)
‘모세의 장인’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장인(하탄)이라는 단어에는 “장인”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사위, 아들, 처남”이라는 뜻도 있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모세의 장인(아내의 아버지)은 출애굽기 2장 21절에서 “르우엘”로, 18장에서는 “이드로”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민수기 10장 29절에 “호밥”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를 “르우엘(이드로)의 아들”로 소개한다. 그렇다면 “모세의 장인 호밥”이 아니라 “모세의 처남인 호밥의 자손 헤벨”로 이해해야 한다.
또 사사기 1장 16절에는 모세의 장인의 후손인 겐 사람들이 가나안 남부 지역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과 연관된 정보를 알려 준다. 헤벨은 이들 가운데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정착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이어지는 12절에는 바락의 군대가 다볼산에 모인 것을 “사람들”이 시스라에게 알렸다는 기록이 나오고, 17절에서는 시스라가 패주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다고 기록하면서 그 이유를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충 설명한다. 그리고 18절에서 야엘은 시스라를 영접하면서 “나의 주여(아돈)”라고 부른다. ‘아돈’에는 주, 주님(Lord), 주인(master), 소유주(owner)라는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유추하면, 겐 사람 헤벨은 이중 스파이였다.
납달리 지파 바락의 거주지 게데스에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이들의 근황을 하솔 왕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모세의 간청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된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하솔 왕에게도 충성하는 배신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주소를 잘 대변해 준다. 하나님을 배신한 그들을 헤벨도 배신한다. 그런데 그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그 배신의 삶에서 돌이킨다. 그녀의 돌이킴은 가나안 전쟁 초기 여리고성의 라합을 생각나게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삶을 익히 듣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고자 결단한 믿음의 결연한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야엘은 시스라의 행색을 보고 단박에, 예상을 뒤엎고 이스라엘이 승리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이중 스파이의 삶을 끝낼 결단을 내린다. 헤벨에게서 이런 결단의 모습이 보였다면 어땠을까?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헤벨은 아예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또 야엘이 시스라를 해치우는 과정은 바락과도 비교가 된다. 주저하던 바락과 달리, 야엘은 결심하고 결행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당연하게도 승전의 주역은 야엘이 된다!
3.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여성 리더십의 부각은 그만큼 남성 리더십의 쇠락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 뭐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인가 싶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성별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리더십이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곳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남성 중심적인 리더십을 당연하게 여기던 고대 사회의 모습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장면이었다.
드보라(꿀벌)와 야엘(염소)의 이름의 뜻으로만 보자면, 이 여인들의 순종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회복이 꿀벌(드보라)과 염소(야엘)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전통에 얽매인 관습이나 편파적으로 안착된 제도에 매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이를 통해 이루어져 간다.
*하나님께서는 바락과 헤벨처럼 나약하고 배신하는, 시대정신에 젖은 남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행하실 “승리하는 전쟁”을 확신했던 두 여인을 통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전쟁은 그치지 않을 텐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믿음으로 이 전장에 설 자는 누구일까! 바로 내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나님의 백성 안에 머물기를 포기한 헤벨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도 주저하는 나약한 바락의 모습이 아니라, 알려 주신 대로 순종하며 기꺼이 다볼산에 동행한 드보라나, 자기 장막에 피신한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고 다시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복권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야엘과 같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시스라에게는 당대의 최첨단 무기인 철 병거가 구백 승이나 있었다.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기손 강에 집결한다(12~14절).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상상해 보라. 그들 일만 명이 가진 것이라고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넘겨주신 날’이라는 드보라의 예언뿐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영적 전투의 무기라고 믿지 않는 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당해 낼 재간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바락 ‘앞에서’ 싸워 승리를 주신다. 건기의 기손 강에 폭우를 내리시고 마른 땅을 진흙탕으로 바꾸심으로, 강력한 철 병거를 무용지물이 되게 하신다. 이스라엘이 한 일은 패주하는 잔당들을 치는 일이었다(15~16절). 홍해에서 애굽의 정예 부대를 수장하신 사건이 재현된 것이다. 또한 약속하신 대로 시스라를 넘겨주신다.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철 병거 구백 승처럼 아무리 탁월한 성취와 재능이라도 쓸모없게 되고 도리어 나를 망하게 하는 자원이 될 것이다.
*야엘은 도망치는 시스라에게 간곡히 요청하여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하고, 극진한 대접으로 그의 마음을 안심시킨다. 말로 평안을 주고, 이불로 감싸 주고, 따스한 우유로 곤한 잠에 빠지게 한다(17~20절). 그가 전쟁에서 패하여 쫓기고 있는 처지임을 직감한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용기 있는 한 여인 앞에서, 오만한 시스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염소’라는 뜻의 야엘이 시스라에게 ‘우유(젖)’를 먹여 잠들게 한 후 그를 죽인다(21~24절). 그의 죽음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20년간 학대당한 이들에게 고통을 잊게 만들 만큼 통쾌했을 것이다. 겁쟁이 바락이 포기한 영광을 용기 있는 여인 야엘이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시대를 원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대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꿀벌(드보라)”을 보내 주시고 “염소(야엘)”를 예비시켜 주셨다. 그녀들의 결단과 결행의 순종을 통해 20년간의 고통을 끝내게 하셨다.
*드보라 앞의 바락이나, 야엘의 손에 황당하게 죽어 간 시스라의 모습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감동) 앞에 온전히 순종하여 결행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된다. 사사 시대는 청동기 시대 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청동기에 머물러 있었지만, 하솔 왕 야빈은 이미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리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이라도, 하나님께서 휘두르시는 자연의 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힘이 세다고 이기는 것도, 약하다고 하여 무조건 패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논리에 잠식된 영성 안에 뿌리박힌 패배주의부터 걷어 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 철기 문명도 견뎌 낼 재간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야말로, 문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사는 지혜로운 삶인 것이 틀림없다.
*바락의 헛다리,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버스 떠난 뒤에 손을 흔드는 것 같은 머쓱함과 부끄러움이 왜 내 몫처럼 느껴질까? 왜 오늘날 교회의 모습처럼 다가올까! 코로나와 함께 일상을 점진적으로 회복해 나가는 이 중요한 시기에, 바락의 헛다리를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바락은 다볼산에 집결하고도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기손 강에 시스라의 철 병거 900대가 몰려드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을 것이다. 반면 가장 두려워질 수 있는 그때, 오히려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네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14절)라고 외치는 드보라의 음성에 그제야 진격했다!
*꿀의 여인 드보라와 젖의 여인 야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신다. 이 한 번의 승리가 전부는 아니다. 이어서 약화된 가나안 왕 야빈을 굴복하게 하신 후, 결국 진멸하신다. 모든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 하나님의 전쟁은 멈추지 않는다. 드보라와 야엘의 서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도전은 이것이다. ‘누가 이 여인들처럼 믿음으로 나설 것인가?’
*드보라가 바라보는 하나님을 나도 바라보기를 사모한다! 나를 앞서 나가시는 하나님의 등을 보며 목회하고 싶다! 주님의 등을 보고 싶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꿀벌이지만 번개처럼, 횃불처럼, 등불처럼 [사사기 4:1-10]
사사기 4~5장은 드보라 사사와 므깃도 전투에 관한 사건을 언급한다. 4장은 내러티브 형식으로, 5장은 시 형식으로 구성된다.
이스라엘이 다시 타락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신다.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는 가나안의 강력한 무기인 철 병거가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극도로 억압하였고,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자 사사 드보라를 보내 주시고, 그녀를 통해 바락을 불러 가나안과의 전쟁을 준비하신다.
여인천하의 시대가 열렸다! 아쉽게도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또” 악을 행한다(1절). 하솔 왕 야빈과 시스라는 철 병거 900대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심하게 억압”한다.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구한 사사는 “여선지자 드보라”였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시스라와 그의 철 병거를 넘겨주시겠다는 메시지를 바락에게 전했으나 그는 주저한다. 이에 드보라는 시스라가 여인의 손에 죽게 될 것을 예언한다.
1. 이스라엘의 타락과 드보라 사사 소개(1~5절)
1~3절은 드보라 서사의 프롤로그다. 에훗이 죽은 후에 나타난 다음 세대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잊고 악을 행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신다. 당시 가나안 지역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기에, ‘가나안 왕’이라고 불리는 야빈은 ‘하솔’ 지역만 다스리는 지도자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당대 최고의 무기인 철 병거 900대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아직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점령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이스라엘 자손을 20년 동안 심하게 학대하였다.
이 철 병거를 지휘하는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하는 시스라였다. 5장 6절을 보면, 그들은 사람들이 대로로 다니지 못하고 꼬불꼬불한 산길로 몰래몰래 다닐 정도로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힘들어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들이 섬기던 가나안의 신들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5절은 드보라 사사를 소개한다. 드보라라는 이름의 뜻은 “꿀벌”이다. 저자는 “랍비돗의 아내(에쉐트 랍비돗)”로 그녀를 소개하는데, 랍비돗에는 번개, 횃불, 등불이라는 의미가 있다. “~의 아내”로 번역된 “에쉐트”는 “~의 여자”라는 의미도 있다. 직역하면 “횃불의 여자(아내)”이다. 드보라(꿀벌)는 “번개(횃불, 등불)의 여자”인 것이다. 앞서 사사들의 이름을 소개하는 히브리어 어순과 비교하면, “랍비돗의 아내”는 남편 랍비돗의 여자라는 의미보다 드보라의 별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더구나 드보라를 소개하는 문장(4절)의 단어들은 모두 여성형으로 기록되었다. 드보라는 여성 중의 여성이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여성상이다. 에훗이나 삼갈과 같이 의외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하신 듯하다. 그럼에도 여선지자 드보라는 라마와 벧엘 사이에 거주하며 구원자뿐 아니라 재판관의 역할까지 감당하였다. 그 영향력은 상당하여, 바락의 경우는 드보라가 함께 출정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8절).
2. 어? 이번에도 이렇게?(6~10절)
에훗과 삼갈은 각각 훈련받은 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두었던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니, 이스라엘을 모압과 블레셋에서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드보라도 마찬가지다. 당시 세계관에서 ‘여인’의 위치는 매우 열악했고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통해 구원의 사역을 진행하셨다. 당시 여성 비하적인 문화 가운데 있었지만, 적어도 여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창조 때부터 변함없이 “하나님의 형상”(창 1:27)으로 동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바울은 갈라디아에 보낸 서신을 통해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밝혔다(갈 3:28).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리더십으로는 모세와 함께 출애굽의 역사를 동역했던 미리암(출 15:20~21), 남 유다 요시야 왕 때의 훌다(왕하 22:14~20), 예수님께서 출생하시기 전 성전에서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한 안나(눅 2:36) 등을 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자리에 최적의 사람을 세우셔서 그 뜻을 펼치신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드보라가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이기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드보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하겠다. 하나님의 세워 주심은 성별과 관련이 없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선택되고 진행된다. 남자인가, 여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순종하는가의 문제다!
*구약성경의 여성 리더십은 여러 면에서 제약되었지만, 드보라처럼 여성 지도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끼치는 리더십의 영향력이 어떠한가일 것이다. 놀랍게도 드보라의 리더십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5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납달리 지파의 유명한 장수인 바락이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나도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8절)라고 말한 장면을 통해 그녀의 탁월함과 권위를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세우시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세우신다.
3. 드보라와 바락의 차이
드보라를 소개할 때 “랍비돗의 아내”(4절)라고 했다. 랍비돗이 ‘번개, 횃불, 등불’ 등의 의미라는 것도 앞서 살펴보았다. 드보라는 철 병거 900대를 앞세운 하솔 왕 야빈의 “심한 학대”(3절)가 가나안 땅 북부 지역을 뒤덮은 상황에서,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4~6km)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판결하며 “하나님의 뜻(진리)의 횃불”을 든 여인이었다.
하솔 왕의 ‘심한(호즈카: 무력, 폭력, 강압, 세력)’ 학대(라하츠: 압착하다, 압박하다) 속에서, 그녀는 말씀의 횃불을 치켜들고 어둡기만 한 가나안 북부 지역을 밝히고 있었다. 때로 ‘번개’처럼 이스라엘의 주눅 들고 나약한 믿음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때로는 ‘등불’처럼 잔잔하게 위축된 마음속을 밝혀 주기도 했을 것이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번개, 횃불, 등불을 비추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시내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드보라를 통해 엿보인다. ‘번개, 불(횃불, 등불)’은 시내산 꼭대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모습이며, 광야 40년 동안 추운 밤을 따뜻하게 덮어 주었던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20년간 하솔 왕 야빈의 극악한 무력 아래 짓밟히고 눌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종려나무 아래에서 전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판단은 “번개였고, 횃불이었으며, 등불이었다!”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이와 같은 말씀의 은사를 주시기를 갈망하게 된다. 때로 번개처럼, 때로 횃불처럼, 때로 등불처럼 나를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 주시기를 갈망한다. 나를 통해 전하는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이 때로 번개처럼, 횃불처럼, 등불처럼 받아들이도록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갈망해 본다. 주님, 행하시옵소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드보라를 통해, 야빈과 시스라를 심판하실 장수로 ‘바락’을 부르셨다. 드보라는 평소에 거하던 라마와 벧엘 사이에서, 납달리 게데스에 거주하던 바락을 부른다. 바락은 드보라의 부름에 한걸음에 갈릴리 동북쪽에서부터 그 먼 거리를 달려왔다. 그리고 납달리와 스불론 지파에서 1만 명을 모아 다볼산으로 출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바락은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7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번개의 여인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8절) 어깃장을 놓는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그만큼 하솔 왕 야빈의 무력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보다 더 컸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특히 사사기 저자는 3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동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야빈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3절). 원문의 어순에 따르면, 철 병거가 두려워서 부르짖은 편에 더 가깝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것을 이제 기손 강에서 직면해야 한다.
당연한 두려움이 바락을 덮쳤다. 철 병거의 위용을 알고 있는 데다, 기손 강의 드넓은 평야는 철 병거가 활약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어서 더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그러니 “번개의 여인, 횃불의 여인, 등불의 여인”인 드보라라도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드보라를 세우신 하나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려고 이미 결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다. 철 병거 900대와 악명 높은 시스라와 야빈 왕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무려 20년을 그렇게 짓눌려 살았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로서,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분별하여 판결하는 사사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횃불이었고 등불”이었다. 하지만 바락은 ‘천둥, 번개’라는 자기 이름의 뜻이 무색할 만큼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질적인 차이가, 삶의 태도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만들었다. 사람보다, 계획보다, 현실과 현장보다, 경험보다 결이 다른 말씀이 선포될 때 필요한 것은 “그 말씀을 선언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결국 그 믿음이 삶의 차이를 만든다.
나는?
-80년간의 샬롬은 에훗의 죽음과 함께 기울다가,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함과 동시에 끝나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하솔의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20년간이나 넘기셔서 ‘쥐어짜고 짓밟도록’ 허락하신다(1~3절). 150년 전 여호수아가 정복하여 불사른 하솔(수 11:10~15)을 다시 일으키셔서, 자기 백성이 도리어 정복당하게 하신 것이다. 순종하면 이스라엘을 살려 일으키시지만, 불순종하면 그들의 대적을 살려 징계하신다.
-20년의 학대 끝에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세우신 사사는 여선지자 드보라였다. 왼손잡이 에훗처럼 인간의 기대를 넘어선 선택이었다. 대로에 다니는 이가 없을 만큼 겁쟁이던(5:6~7)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드보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부름받았다. 꿀나무인 종려나무 밑에서 그녀가 베푼 공정한 재판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백성들에게 ‘꿀’과 같았을 것이다(4~5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의롭고 자비로운 한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의 눈물과 탄식을 위로하여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구원과 반역을 되풀이할수록 하나님의 심판도 거세진다. 구산 리사다임에게는 8년을, 에글론에게는 18년을 시달렸는데, 이번에는 이보다 더 긴 20년 동안 학대를 당한다(3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신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반역하는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어떤 영적 주기를 반복하고 있을까?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승리를 전하면서, 시스라와의 전쟁에 바락을 책임자로 보낸다. 하지만 바락은 드보라가 동행해야 가겠다고 고집한다. 드보라는 동행을 약속하지만, 시스라를 처단하는 영광은 바락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책망한다(6~10절). 드보라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본 것에 반해, 바락은 철 병거 구백 대를 먼저 보았기에 마음이 위축된 것이다. 나는 상황과 하나님 가운데 무엇을 먼저 보고 있을까?
*현실의 벽에 절망할 때가 있다. 사방의 적은 강력하고, 지금 시도하는 것들을 전망하면 좌절감만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믿음의 도전을 하라고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감동도 함께 온다. 이 딜레마를 어찌해야 하나……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앞일을 알지 못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다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의 간격을 믿음으로 메워야 한다.
*여선지자이자 사사인 드보라는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간격을 믿음으로 메워 선포하고, 바락과 함께 담대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바락은 연약한 믿음을 인간적인 의지 대상,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 메우며 나아가려 했다. 이것이 드보라와 바락의 결정적인 차이다. 그렇다면 고심할 필요가 없다. 드보라처럼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간격을 “믿음”으로 채워 내야지!
이스라엘이 다시 타락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신다.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는 가나안의 강력한 무기인 철 병거가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극도로 억압하였고,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자 사사 드보라를 보내 주시고, 그녀를 통해 바락을 불러 가나안과의 전쟁을 준비하신다.
여인천하의 시대가 열렸다! 아쉽게도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또” 악을 행한다(1절). 하솔 왕 야빈과 시스라는 철 병거 900대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심하게 억압”한다.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구한 사사는 “여선지자 드보라”였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시스라와 그의 철 병거를 넘겨주시겠다는 메시지를 바락에게 전했으나 그는 주저한다. 이에 드보라는 시스라가 여인의 손에 죽게 될 것을 예언한다.
1. 이스라엘의 타락과 드보라 사사 소개(1~5절)
1~3절은 드보라 서사의 프롤로그다. 에훗이 죽은 후에 나타난 다음 세대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잊고 악을 행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신다. 당시 가나안 지역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기에, ‘가나안 왕’이라고 불리는 야빈은 ‘하솔’ 지역만 다스리는 지도자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당대 최고의 무기인 철 병거 900대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아직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점령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이스라엘 자손을 20년 동안 심하게 학대하였다.
이 철 병거를 지휘하는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하는 시스라였다. 5장 6절을 보면, 그들은 사람들이 대로로 다니지 못하고 꼬불꼬불한 산길로 몰래몰래 다닐 정도로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힘들어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들이 섬기던 가나안의 신들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5절은 드보라 사사를 소개한다. 드보라라는 이름의 뜻은 “꿀벌”이다. 저자는 “랍비돗의 아내(에쉐트 랍비돗)”로 그녀를 소개하는데, 랍비돗에는 번개, 횃불, 등불이라는 의미가 있다. “~의 아내”로 번역된 “에쉐트”는 “~의 여자”라는 의미도 있다. 직역하면 “횃불의 여자(아내)”이다. 드보라(꿀벌)는 “번개(횃불, 등불)의 여자”인 것이다. 앞서 사사들의 이름을 소개하는 히브리어 어순과 비교하면, “랍비돗의 아내”는 남편 랍비돗의 여자라는 의미보다 드보라의 별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더구나 드보라를 소개하는 문장(4절)의 단어들은 모두 여성형으로 기록되었다. 드보라는 여성 중의 여성이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여성상이다. 에훗이나 삼갈과 같이 의외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하신 듯하다. 그럼에도 여선지자 드보라는 라마와 벧엘 사이에 거주하며 구원자뿐 아니라 재판관의 역할까지 감당하였다. 그 영향력은 상당하여, 바락의 경우는 드보라가 함께 출정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8절).
2. 어? 이번에도 이렇게?(6~10절)
에훗과 삼갈은 각각 훈련받은 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두었던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니, 이스라엘을 모압과 블레셋에서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드보라도 마찬가지다. 당시 세계관에서 ‘여인’의 위치는 매우 열악했고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통해 구원의 사역을 진행하셨다. 당시 여성 비하적인 문화 가운데 있었지만, 적어도 여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창조 때부터 변함없이 “하나님의 형상”(창 1:27)으로 동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바울은 갈라디아에 보낸 서신을 통해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밝혔다(갈 3:28).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리더십으로는 모세와 함께 출애굽의 역사를 동역했던 미리암(출 15:20~21), 남 유다 요시야 왕 때의 훌다(왕하 22:14~20), 예수님께서 출생하시기 전 성전에서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한 안나(눅 2:36) 등을 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자리에 최적의 사람을 세우셔서 그 뜻을 펼치신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드보라가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이기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드보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하겠다. 하나님의 세워 주심은 성별과 관련이 없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선택되고 진행된다. 남자인가, 여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순종하는가의 문제다!
*구약성경의 여성 리더십은 여러 면에서 제약되었지만, 드보라처럼 여성 지도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끼치는 리더십의 영향력이 어떠한가일 것이다. 놀랍게도 드보라의 리더십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5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납달리 지파의 유명한 장수인 바락이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나도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8절)라고 말한 장면을 통해 그녀의 탁월함과 권위를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세우시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세우신다.
3. 드보라와 바락의 차이
드보라를 소개할 때 “랍비돗의 아내”(4절)라고 했다. 랍비돗이 ‘번개, 횃불, 등불’ 등의 의미라는 것도 앞서 살펴보았다. 드보라는 철 병거 900대를 앞세운 하솔 왕 야빈의 “심한 학대”(3절)가 가나안 땅 북부 지역을 뒤덮은 상황에서,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4~6km)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판결하며 “하나님의 뜻(진리)의 횃불”을 든 여인이었다.
하솔 왕의 ‘심한(호즈카: 무력, 폭력, 강압, 세력)’ 학대(라하츠: 압착하다, 압박하다) 속에서, 그녀는 말씀의 횃불을 치켜들고 어둡기만 한 가나안 북부 지역을 밝히고 있었다. 때로 ‘번개’처럼 이스라엘의 주눅 들고 나약한 믿음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때로는 ‘등불’처럼 잔잔하게 위축된 마음속을 밝혀 주기도 했을 것이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번개, 횃불, 등불을 비추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시내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드보라를 통해 엿보인다. ‘번개, 불(횃불, 등불)’은 시내산 꼭대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모습이며, 광야 40년 동안 추운 밤을 따뜻하게 덮어 주었던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20년간 하솔 왕 야빈의 극악한 무력 아래 짓밟히고 눌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종려나무 아래에서 전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판단은 “번개였고, 횃불이었으며, 등불이었다!”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이와 같은 말씀의 은사를 주시기를 갈망하게 된다. 때로 번개처럼, 때로 횃불처럼, 때로 등불처럼 나를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 주시기를 갈망한다. 나를 통해 전하는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이 때로 번개처럼, 횃불처럼, 등불처럼 받아들이도록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갈망해 본다. 주님, 행하시옵소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드보라를 통해, 야빈과 시스라를 심판하실 장수로 ‘바락’을 부르셨다. 드보라는 평소에 거하던 라마와 벧엘 사이에서, 납달리 게데스에 거주하던 바락을 부른다. 바락은 드보라의 부름에 한걸음에 갈릴리 동북쪽에서부터 그 먼 거리를 달려왔다. 그리고 납달리와 스불론 지파에서 1만 명을 모아 다볼산으로 출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바락은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7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번개의 여인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8절) 어깃장을 놓는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그만큼 하솔 왕 야빈의 무력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보다 더 컸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특히 사사기 저자는 3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동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야빈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3절). 원문의 어순에 따르면, 철 병거가 두려워서 부르짖은 편에 더 가깝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것을 이제 기손 강에서 직면해야 한다.
당연한 두려움이 바락을 덮쳤다. 철 병거의 위용을 알고 있는 데다, 기손 강의 드넓은 평야는 철 병거가 활약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어서 더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그러니 “번개의 여인, 횃불의 여인, 등불의 여인”인 드보라라도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드보라를 세우신 하나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려고 이미 결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다. 철 병거 900대와 악명 높은 시스라와 야빈 왕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무려 20년을 그렇게 짓눌려 살았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로서,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분별하여 판결하는 사사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횃불이었고 등불”이었다. 하지만 바락은 ‘천둥, 번개’라는 자기 이름의 뜻이 무색할 만큼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질적인 차이가, 삶의 태도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만들었다. 사람보다, 계획보다, 현실과 현장보다, 경험보다 결이 다른 말씀이 선포될 때 필요한 것은 “그 말씀을 선언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결국 그 믿음이 삶의 차이를 만든다.
나는?
-80년간의 샬롬은 에훗의 죽음과 함께 기울다가,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함과 동시에 끝나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하솔의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20년간이나 넘기셔서 ‘쥐어짜고 짓밟도록’ 허락하신다(1~3절). 150년 전 여호수아가 정복하여 불사른 하솔(수 11:10~15)을 다시 일으키셔서, 자기 백성이 도리어 정복당하게 하신 것이다. 순종하면 이스라엘을 살려 일으키시지만, 불순종하면 그들의 대적을 살려 징계하신다.
-20년의 학대 끝에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세우신 사사는 여선지자 드보라였다. 왼손잡이 에훗처럼 인간의 기대를 넘어선 선택이었다. 대로에 다니는 이가 없을 만큼 겁쟁이던(5:6~7)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드보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부름받았다. 꿀나무인 종려나무 밑에서 그녀가 베푼 공정한 재판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백성들에게 ‘꿀’과 같았을 것이다(4~5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의롭고 자비로운 한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의 눈물과 탄식을 위로하여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구원과 반역을 되풀이할수록 하나님의 심판도 거세진다. 구산 리사다임에게는 8년을, 에글론에게는 18년을 시달렸는데, 이번에는 이보다 더 긴 20년 동안 학대를 당한다(3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신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반역하는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어떤 영적 주기를 반복하고 있을까?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승리를 전하면서, 시스라와의 전쟁에 바락을 책임자로 보낸다. 하지만 바락은 드보라가 동행해야 가겠다고 고집한다. 드보라는 동행을 약속하지만, 시스라를 처단하는 영광은 바락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책망한다(6~10절). 드보라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본 것에 반해, 바락은 철 병거 구백 대를 먼저 보았기에 마음이 위축된 것이다. 나는 상황과 하나님 가운데 무엇을 먼저 보고 있을까?
*현실의 벽에 절망할 때가 있다. 사방의 적은 강력하고, 지금 시도하는 것들을 전망하면 좌절감만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믿음의 도전을 하라고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감동도 함께 온다. 이 딜레마를 어찌해야 하나……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앞일을 알지 못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다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의 간격을 믿음으로 메워야 한다.
*여선지자이자 사사인 드보라는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간격을 믿음으로 메워 선포하고, 바락과 함께 담대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바락은 연약한 믿음을 인간적인 의지 대상,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 메우며 나아가려 했다. 이것이 드보라와 바락의 결정적인 차이다. 그렇다면 고심할 필요가 없다. 드보라처럼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간격을 “믿음”으로 채워 내야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사사 에훗과 삼갈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사기 3:12-31]
이스라엘이 또다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압 왕 에글론의 손에 그들을 넘기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왼손잡이 사사 에훗을 세우시고, 그가 단독으로 왕궁에 있는 에글론 왕을 암살한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아 모압과 전쟁을 하여 크게 승리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측량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또(다시)”(12절)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40년간의 평안이 지나고 또다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사용하셔서 18년 동안 이스라엘이 그를 섬기게 하셨다. 그 깊은 탄식의 시대를 끝낸 사사는 왼손잡이(오른손에 제약이 있는) 에훗이었다. 그는 모압 왕 에글론에게 조공을 바치는 척 접근하여 그를 해치웠다. 그러고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거병하여 요단강 나루를 점령하고, 여리고에서 도망치는 모압 군사 만 명을 죽인다. 모압 땅으로 건너간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후 80년 동안 이스라엘이 평안하였다. 사사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만으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쳐 죽이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1. 사사기 사이클 _ 에훗(12~30절)
12~14절은 에훗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이제 습관이 되었다. 서사에 등장하는 모압 왕 에글론의 이름은 그 뜻이 ‘송아지’다. 12절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모압 왕 에글론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 에글론을 강성하게 만드신다. 이런 서사에 담긴 분명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성을 의미하는데, 요단 동편과 서편 가나안 지역을 잇는 관문으로 예루살렘, 벧엘 등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와 매우 가깝게 연결된다. 이곳을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 동맹군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가나안 전체를 다시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임을 전제한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여리고성을 먼저 점령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강성해진 모압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조공을 바친다. 하나님께 악을 행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에글론을 섬기며 고난받게 하신 것이다. 이는 징벌의 의미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나 왕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15~23절은 에훗이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러 가서 그를 죽이는 이야기다. 모압 왕 에글론의 억압과 착취로 고통을 당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결국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에훗을 사사로 세우신다. 그는 ‘왼손잡이’였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것은 오른손보다 왼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왼손잡이를 뜻한다. 이렇게 묘사한 것은, 그가 공물을 바치는 사절단의 대표라는 점과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사로서 사명을 감당하였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는 왼손잡이만이 가능한 은폐(오른쪽 허벅지에 1규빗(약 45cm) 정도의 양날 검을 숨김)로 에글론을 제거한다. 즉, 에훗이 왼손잡이임을 밝힌 것은 장애나 부족함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에훗은 공물을 바친 후에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가게 한 뒤, 돌 뜨는 곳 곧 우상이 있는 곳에서 다시 돌아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겠다고 한다. 에훗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있는 에글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고, 에글론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일어났다. 이때 준비해 간 칼을 왼손으로 빼어, 망설임 없이 단번에 힘 있게 에글론의 몸을 찔러 죽인다. 이렇게 적의 심장부인 왕궁에서 적의 왕을 죽인 에훗은 유유히 방을 빠져나와 문을 걸어 잠근다. 22절에서 칼이 잠겼다고 번역된 ‘기름’은 ‘대변이나 대장의 찌꺼기’를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24절에서 신하들이 ‘왕이 발을 가린다’, 즉 볼일을 보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신하들이 기다리는 사이 에훗은 스이라로 도망친다. 결국 죽은 왕을 발견하는 것이 신하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왕의 수많은 신하들은 왕궁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지 못하였고, 그를 죽인 에훗은 이미 멀리 도망간 상태였다.
24~29절은 모압과의 전쟁 서사다.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자손을 모았고,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따라 에훗에게로 모였다. 에훗은 모인 자들에게 모압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앞장선다. 여호와께서 모압을 자신들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승리 선언을 통해, 이 전쟁이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임을 선포한다. 에훗과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나루를 점령하고, 요단 동편으로 건너가려는 용사들을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고 죽인다. 이는 여호와 전쟁의 특징 중 하나인 진멸 모티브를 드러낸다. 이렇게 에훗은 충실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여 이스라엘을 모압 왕 에글론의 손에서 구원하였다. 에훗은 사사요 구원자로서 단독으로 적의 왕을 죽이고 성공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한 영웅이었다.
30절은 에훗이 이끄는 이스라엘이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의 에필로그다. 모압이 이스라엘 땅에 복속되었고 80년간 평안하였다고 한 것을 볼 때, 두 세대 동안 이 위대한 여호와의 전쟁 이야기가 전해지며 여호와를 따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평안의 보고는 그들이 적어도 이 기간만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다. 사사기의 다른 사사보다 평안의 기간이 긴 것은, 에훗의 사건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만큼 에훗의 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크고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2. 삼갈(31절)
삼갈과 같이 사사로서 기록의 분량이 매우 적은 이들을 ‘소사사’로, 사사로서의 서사가 풍성하게 기록된 이들을 ‘대사사’로 구분하여 이해하면 된다. 소사사들은 대사사들 사이에 간단하게 소개된다. 하지만 이전 사사들의 특징은 그대로 이어받는다. 삼갈은 이스라엘의 영웅적 구원자인 에훗의 특징을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 소개된다.
‘아낫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갈릴리에 있는 벧아낫 지역 사람으로 해석하였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아낫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로 주로 해석한다. 삼갈은 이방인으로서 소 모는 막대기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 소개되는데, 소 모는 막대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의 직업이 목동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에 사용되는 사람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다고 하실 때 헌신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3. 뼈아픈 배신…… 그럼에도
옷니엘이 죽은 이후 40년간 누린 평안이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끝나 버렸다. 이제 다시 고통의 시대가 도래했다. 모압 왕 에글론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점령한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빼앗고 억압했다. 그리고 이전 압제 기간보다 더 긴 18년 동안 압제한다. 이스라엘의 이런 배신을 저자는 “또(야사프)”라는 단어로 요약한다. 야사프는 ‘반복하다, 추가하다, 다시 하다’라는 의미다. 에훗이 등장하게 된 배경, 곧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의 모습이 “반복되고” 있음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같은 배신을 반복하는 이스라엘은 점점 형식적인 회개의 덫에 빠져드는 듯하다. 40년 전 바알과 아세라에 빠져 구산 리사다임에게 고통을 받았던 것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12절).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사용하셔서 종려나무 성읍을 차지하고 이스라엘을 억압하게 하셨다. 그 후 하나님께서 에훗을 들어 이들을 구원하시고 80년 동안 평안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사 삼갈의 짤막한 기록은, “역시” “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고,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삼갈을 세워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압축된 것이다.
*결국 “형식적인 회개”가 반복된 “또”의 덫에 걸리게 만들었다. 완전한 변화의 회개가 아니라 그저 형식만 갖춘 회개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형식적인 회개가 가져오는 신앙의 매너리즘은 심각하다. 주일마다 형식적인 회개의 기도는 드리지만, 삶의 변화가 없다. 진실한 회개는 확연한 변화를 가져온다. 형식적 회개는 문제를 가릴 뿐이다.
4. 어? 이런 사람으로도?!
에훗과 삼갈은 옷니엘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옷니엘은 갈렙과 함께 아낙 자손을 물리친 역전의 용사다! 갈렙의 사위이기도 하다. 소위 모범생이다. 옷니엘의 활약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에훗과 삼갈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한다.
일단 에훗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안에서 정치적 대립 관계가 된다.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과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 왕의 대립이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베냐민 지파는 다윗에게 비협조적이었다. 또 ‘왼손잡이’는 원문을 직역하면 ‘오른손에 제약이 있는(오른손이 묶인)’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베냐민 사람'(15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문자적으로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는 점이다. 히브리어에 ‘왼손’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음에도 그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에 제약이 있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에훗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삿 20:15~16절에 등장하는 ‘왼손잡이’를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왼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에훗이 군사적인 능력이 특출한 특수부대원(?)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에도 그는 이 특출한 재능을 공물을 갖다 바치는 사소한 일에 활용했다. 훈련받은 대로 살지 못한 사람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는 했지만….
또 삼갈은 아낫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아낫’이 가나안 땅에서 섬기던 전쟁의 여신을 가리킨다면, 그는 이방 신을 섬기던 자다. 그렇다면 그는 심판의 대상이지 하나님의 심판자가 될 수 없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표현이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31절)에서 “그도”이다. 즉,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이는 “소 모는 막대기”로 행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전쟁의 여신 아낫”을 섬기는 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에훗이나 삼갈이나, 전혀 의외의 인물이 이스라엘을 모압과 블레셋에게서 구원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 안에 있는 선입견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을 자주 경험했다. 나 역시 ‘어떻게 그런 사람이……’라는 상황에 수없이 직면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역시 그럴 수 있다. 훈련받은 대로 살지 못하는 에훗을 들어 모압 왕 에글론을 해결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전쟁의 여신 아낫을 섬긴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삼갈이, 그것도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사용하신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하나님의 창의성이 놀랍다.
*”어? 이런 사람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은 막힘이 없다. 하나님은 역시 대단하시다.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을 왜 그리 배반하기만 할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언약이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다.
나는?
-사사 옷니엘 시대가 준 40년의 평화는 이스라엘의 악행으로 깨진다. 하나님은 모압의 에글론을 강성케 하셔서, 그가 암몬과 아말렉 연합군을 결성하여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점령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로부터 18년의 종살이가 시작된다(12~14절). 이스라엘이 자기 욕망의 편에 설 때, 하나님은 모압의 편을 들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다. 세상만큼 강해지려 하기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늘 돌아보아야 한다.
-18년의 고난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세우신 지도자는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지파의 왼손잡이 에훗이었다(15~20절). 그는 구원자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에글론도 조공을 바치러 온 그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심판하신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추구해야 할 것은 세상보다 더 강한 힘이 아니라, 약자를 통해서도 역사를 열어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아닐까?
-이스라엘을 18년이나 다스린 모압 왕 에글론은 굉장히 비둔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자들도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21~25절). 이처럼 그들이 크고 강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압제당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 백성의 삶을 버리면서 비둔해지고 아둔해졌기 때문에, 무력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영적으로 비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에훗이 사사가 되어 모압을 이기고 18년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왼손잡이 사사가 이끌었지만, 하나님이 도우시고 그가 믿음으로 앞장섰을 때, 힘센 장사요 용사인 모압 군사 만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80년의 평화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나로 인해 내 주변이 샬롬을 누리고 있는가?
-“또”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기란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 깊은 사랑의 언약을 따라 오늘도 나를 구원하여 주신다. 그 사랑 안에 내가 거하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의외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사람이기도 하고 몸에 장애가 있을 수도 있는 에훗, 그를 통한 구원 이야기는 통쾌하기 그지없다. 일제 36년을 책으로만 배웠지만, 해방의 기쁨의 현장에 마치 나도 있는 듯 흥분하고 열광할 수밖에 없는 영락없는 한국인인 나도 십분 공감되는 통쾌함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을 ‘에훗’을 통해 이루셨다. 삼갈은 어떤가? 사사기 저자조차도 “그도”라는 표현으로 기록할 만큼 의외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의외성의 도구로 이루어 낸 구원이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이리 된다. 아무리 스스로 엉망이라고 생각하고 제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루저처럼 여겨지는 이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18년의 고통을 끝내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된다. 아무리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마음에 끌리는 대로 다른 우상을 함께 섬기는 듯한 흐물흐물한 신앙을 가졌더라도, 그가 손에 쥔 것이 겨우 ‘소 모는 막대기’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블레셋을 물리치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어떤 것으로도, 무엇으로도 역사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측량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또(다시)”(12절)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40년간의 평안이 지나고 또다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사용하셔서 18년 동안 이스라엘이 그를 섬기게 하셨다. 그 깊은 탄식의 시대를 끝낸 사사는 왼손잡이(오른손에 제약이 있는) 에훗이었다. 그는 모압 왕 에글론에게 조공을 바치는 척 접근하여 그를 해치웠다. 그러고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거병하여 요단강 나루를 점령하고, 여리고에서 도망치는 모압 군사 만 명을 죽인다. 모압 땅으로 건너간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후 80년 동안 이스라엘이 평안하였다. 사사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만으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쳐 죽이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1. 사사기 사이클 _ 에훗(12~30절)
12~14절은 에훗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이제 습관이 되었다. 서사에 등장하는 모압 왕 에글론의 이름은 그 뜻이 ‘송아지’다. 12절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모압 왕 에글론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 에글론을 강성하게 만드신다. 이런 서사에 담긴 분명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성을 의미하는데, 요단 동편과 서편 가나안 지역을 잇는 관문으로 예루살렘, 벧엘 등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와 매우 가깝게 연결된다. 이곳을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 동맹군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가나안 전체를 다시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임을 전제한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여리고성을 먼저 점령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강성해진 모압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조공을 바친다. 하나님께 악을 행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에글론을 섬기며 고난받게 하신 것이다. 이는 징벌의 의미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나 왕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15~23절은 에훗이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러 가서 그를 죽이는 이야기다. 모압 왕 에글론의 억압과 착취로 고통을 당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결국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에훗을 사사로 세우신다. 그는 ‘왼손잡이’였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것은 오른손보다 왼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왼손잡이를 뜻한다. 이렇게 묘사한 것은, 그가 공물을 바치는 사절단의 대표라는 점과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사로서 사명을 감당하였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는 왼손잡이만이 가능한 은폐(오른쪽 허벅지에 1규빗(약 45cm) 정도의 양날 검을 숨김)로 에글론을 제거한다. 즉, 에훗이 왼손잡이임을 밝힌 것은 장애나 부족함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에훗은 공물을 바친 후에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가게 한 뒤, 돌 뜨는 곳 곧 우상이 있는 곳에서 다시 돌아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겠다고 한다. 에훗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있는 에글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고, 에글론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일어났다. 이때 준비해 간 칼을 왼손으로 빼어, 망설임 없이 단번에 힘 있게 에글론의 몸을 찔러 죽인다. 이렇게 적의 심장부인 왕궁에서 적의 왕을 죽인 에훗은 유유히 방을 빠져나와 문을 걸어 잠근다. 22절에서 칼이 잠겼다고 번역된 ‘기름’은 ‘대변이나 대장의 찌꺼기’를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24절에서 신하들이 ‘왕이 발을 가린다’, 즉 볼일을 보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신하들이 기다리는 사이 에훗은 스이라로 도망친다. 결국 죽은 왕을 발견하는 것이 신하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왕의 수많은 신하들은 왕궁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지 못하였고, 그를 죽인 에훗은 이미 멀리 도망간 상태였다.
24~29절은 모압과의 전쟁 서사다.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자손을 모았고,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따라 에훗에게로 모였다. 에훗은 모인 자들에게 모압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앞장선다. 여호와께서 모압을 자신들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승리 선언을 통해, 이 전쟁이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임을 선포한다. 에훗과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나루를 점령하고, 요단 동편으로 건너가려는 용사들을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고 죽인다. 이는 여호와 전쟁의 특징 중 하나인 진멸 모티브를 드러낸다. 이렇게 에훗은 충실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여 이스라엘을 모압 왕 에글론의 손에서 구원하였다. 에훗은 사사요 구원자로서 단독으로 적의 왕을 죽이고 성공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한 영웅이었다.
30절은 에훗이 이끄는 이스라엘이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의 에필로그다. 모압이 이스라엘 땅에 복속되었고 80년간 평안하였다고 한 것을 볼 때, 두 세대 동안 이 위대한 여호와의 전쟁 이야기가 전해지며 여호와를 따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평안의 보고는 그들이 적어도 이 기간만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다. 사사기의 다른 사사보다 평안의 기간이 긴 것은, 에훗의 사건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만큼 에훗의 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크고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2. 삼갈(31절)
삼갈과 같이 사사로서 기록의 분량이 매우 적은 이들을 ‘소사사’로, 사사로서의 서사가 풍성하게 기록된 이들을 ‘대사사’로 구분하여 이해하면 된다. 소사사들은 대사사들 사이에 간단하게 소개된다. 하지만 이전 사사들의 특징은 그대로 이어받는다. 삼갈은 이스라엘의 영웅적 구원자인 에훗의 특징을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 소개된다.
‘아낫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갈릴리에 있는 벧아낫 지역 사람으로 해석하였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아낫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로 주로 해석한다. 삼갈은 이방인으로서 소 모는 막대기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 소개되는데, 소 모는 막대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의 직업이 목동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에 사용되는 사람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다고 하실 때 헌신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3. 뼈아픈 배신…… 그럼에도
옷니엘이 죽은 이후 40년간 누린 평안이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끝나 버렸다. 이제 다시 고통의 시대가 도래했다. 모압 왕 에글론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점령한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빼앗고 억압했다. 그리고 이전 압제 기간보다 더 긴 18년 동안 압제한다. 이스라엘의 이런 배신을 저자는 “또(야사프)”라는 단어로 요약한다. 야사프는 ‘반복하다, 추가하다, 다시 하다’라는 의미다. 에훗이 등장하게 된 배경, 곧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의 모습이 “반복되고” 있음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같은 배신을 반복하는 이스라엘은 점점 형식적인 회개의 덫에 빠져드는 듯하다. 40년 전 바알과 아세라에 빠져 구산 리사다임에게 고통을 받았던 것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12절).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사용하셔서 종려나무 성읍을 차지하고 이스라엘을 억압하게 하셨다. 그 후 하나님께서 에훗을 들어 이들을 구원하시고 80년 동안 평안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사 삼갈의 짤막한 기록은, “역시” “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고,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삼갈을 세워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압축된 것이다.
*결국 “형식적인 회개”가 반복된 “또”의 덫에 걸리게 만들었다. 완전한 변화의 회개가 아니라 그저 형식만 갖춘 회개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형식적인 회개가 가져오는 신앙의 매너리즘은 심각하다. 주일마다 형식적인 회개의 기도는 드리지만, 삶의 변화가 없다. 진실한 회개는 확연한 변화를 가져온다. 형식적 회개는 문제를 가릴 뿐이다.
4. 어? 이런 사람으로도?!
에훗과 삼갈은 옷니엘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옷니엘은 갈렙과 함께 아낙 자손을 물리친 역전의 용사다! 갈렙의 사위이기도 하다. 소위 모범생이다. 옷니엘의 활약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에훗과 삼갈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한다.
일단 에훗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안에서 정치적 대립 관계가 된다.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과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 왕의 대립이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베냐민 지파는 다윗에게 비협조적이었다. 또 ‘왼손잡이’는 원문을 직역하면 ‘오른손에 제약이 있는(오른손이 묶인)’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베냐민 사람'(15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문자적으로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는 점이다. 히브리어에 ‘왼손’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음에도 그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에 제약이 있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에훗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삿 20:15~16절에 등장하는 ‘왼손잡이’를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왼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에훗이 군사적인 능력이 특출한 특수부대원(?)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에도 그는 이 특출한 재능을 공물을 갖다 바치는 사소한 일에 활용했다. 훈련받은 대로 살지 못한 사람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는 했지만….
또 삼갈은 아낫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아낫’이 가나안 땅에서 섬기던 전쟁의 여신을 가리킨다면, 그는 이방 신을 섬기던 자다. 그렇다면 그는 심판의 대상이지 하나님의 심판자가 될 수 없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표현이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31절)에서 “그도”이다. 즉,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이는 “소 모는 막대기”로 행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전쟁의 여신 아낫”을 섬기는 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에훗이나 삼갈이나, 전혀 의외의 인물이 이스라엘을 모압과 블레셋에게서 구원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 안에 있는 선입견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을 자주 경험했다. 나 역시 ‘어떻게 그런 사람이……’라는 상황에 수없이 직면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역시 그럴 수 있다. 훈련받은 대로 살지 못하는 에훗을 들어 모압 왕 에글론을 해결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전쟁의 여신 아낫을 섬긴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삼갈이, 그것도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사용하신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하나님의 창의성이 놀랍다.
*”어? 이런 사람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은 막힘이 없다. 하나님은 역시 대단하시다.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을 왜 그리 배반하기만 할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언약이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다.
나는?
-사사 옷니엘 시대가 준 40년의 평화는 이스라엘의 악행으로 깨진다. 하나님은 모압의 에글론을 강성케 하셔서, 그가 암몬과 아말렉 연합군을 결성하여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점령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로부터 18년의 종살이가 시작된다(12~14절). 이스라엘이 자기 욕망의 편에 설 때, 하나님은 모압의 편을 들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다. 세상만큼 강해지려 하기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늘 돌아보아야 한다.
-18년의 고난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세우신 지도자는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지파의 왼손잡이 에훗이었다(15~20절). 그는 구원자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에글론도 조공을 바치러 온 그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심판하신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추구해야 할 것은 세상보다 더 강한 힘이 아니라, 약자를 통해서도 역사를 열어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아닐까?
-이스라엘을 18년이나 다스린 모압 왕 에글론은 굉장히 비둔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자들도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21~25절). 이처럼 그들이 크고 강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압제당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 백성의 삶을 버리면서 비둔해지고 아둔해졌기 때문에, 무력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영적으로 비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에훗이 사사가 되어 모압을 이기고 18년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왼손잡이 사사가 이끌었지만, 하나님이 도우시고 그가 믿음으로 앞장섰을 때, 힘센 장사요 용사인 모압 군사 만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80년의 평화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나로 인해 내 주변이 샬롬을 누리고 있는가?
-“또”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기란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 깊은 사랑의 언약을 따라 오늘도 나를 구원하여 주신다. 그 사랑 안에 내가 거하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의외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사람이기도 하고 몸에 장애가 있을 수도 있는 에훗, 그를 통한 구원 이야기는 통쾌하기 그지없다. 일제 36년을 책으로만 배웠지만, 해방의 기쁨의 현장에 마치 나도 있는 듯 흥분하고 열광할 수밖에 없는 영락없는 한국인인 나도 십분 공감되는 통쾌함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을 ‘에훗’을 통해 이루셨다. 삼갈은 어떤가? 사사기 저자조차도 “그도”라는 표현으로 기록할 만큼 의외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의외성의 도구로 이루어 낸 구원이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이리 된다. 아무리 스스로 엉망이라고 생각하고 제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루저처럼 여겨지는 이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18년의 고통을 끝내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된다. 아무리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마음에 끌리는 대로 다른 우상을 함께 섬기는 듯한 흐물흐물한 신앙을 가졌더라도, 그가 손에 쥔 것이 겨우 ‘소 모는 막대기’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블레셋을 물리치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어떤 것으로도, 무엇으로도 역사를 이루신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신 목적과 첫 사사 옷니엘 [사사기 3:1-11]
사사기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이다. 본문은 왜 사사기에서도 전쟁을 계속 수행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뉜다. 1~6절은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이자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 사이클을 마무리하는 설명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 남겨 두신 이방 민족의 명단과 그들 가운데 거하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소개한다. 7~11절은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의 업적을 소개한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범죄와 심판, 부르짖음과 구원이라는 패턴 속에서 옷니엘이 사사로 세움을 받는다. 2장 22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 시험은 조상들이 지킨 것처럼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며(1, 4절), 첫 사사 옷니엘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본문의 시험은 ‘유혹, 미혹’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조상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이런 민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새번역_4절)이라고 선명하게 밝히신 것처럼, 현재의 상황 속에서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현재의 믿음의 상태와 수준을 보게 하고, 감사와 개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 만약 이 시험을 통해 교만해지거나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는 일을 회피한다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시험 방법은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분배받고도 아직 쫓아내지 못한 민족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을 핑계로 “쫓아내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게 한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쫓아내지 않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시험 도구로 사용하신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점차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하게 하심으로써 시험(test)하신다.
1. 하나님의 시험 목적(1~4절)
이렇게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들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시험하신다. 먼저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을 남겨 두신 것”(새번역_2절)이라고 밝히시며 “전쟁”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과연 모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순종”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이다(4절).
결과는 참담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쫓아내지 못한’ 그들에게 패배하여 도리어 섬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기는 전쟁을 잊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전쟁” 가운데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쫓아내야 할 민족들과의 전쟁이 남아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나안) 여러 민족의 딸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아내로 삼았고, 또 자기들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새번역_6절). 싸워 물리쳐야 할 상대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도 “……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새번역_7절)라는 기록을 통해, 전쟁도 순종도 모두 참패였음을 밝힌다. 이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고대 전쟁의 ‘국룰’대로 패배한 민족이 승리한 민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 왕인 “구산 리사다임(배나 악한 구산 사람)”에게 8년 동안 압제를 받아야 했다(8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 불순종이, 인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억지로 섬기는 처지로 이끌고 말았다.
3. 왜 이렇게 되었을까?(5~6절)
이렇게 된 것은 “제대로 싸울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전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전쟁을 직면할 때, “편리함과 유익함”의 유혹(시험, temptation)에 적당히 타협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족속만 남겨 둔 자기 꾀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들을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는 적당한 편리함과 유익 속에 감춰진 “전쟁 능력 상실(나태하여 준비를 소홀히 함)”이 가져올 “역전”을 가늠하지 못했다. 여기에 “남겨 둔 가나안 족속들과의 통혼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영적 타락이 더해져, 하나님조차 우상들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하나님에게서 오는 전쟁의 승리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전략과 지혜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결국 가나안 정복의 역사적인 환호가 채 가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빠르게 하나님을 떠나갔다”(새번역_2:17).
3. 옷니엘 사사 이야기(7~11절)
옷니엘 사사 이야기는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이야기다. 그에 관한 인물 묘사는 사사의 전형을 보여 준다. 사사기의 사사 소개에는 그의 성격, 인품,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그가 수행한 전쟁에도 구체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옷니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적의 손에 파시고, 이스라엘이 적을 섬기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평안이 임하였음을 묘사하는 문예적인 틀을 보여 주는 기능만 하고 있다. 이후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 틀을 기본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다른 요소들을 더해 구성된다.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다. 그를 갈렙과 연결시켜 소개한 것은 갈렙과 옷니엘의 세대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옷니엘은 갈렙의 후계자로서 여호수아 세대와 가나안 정착 세대를 연결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지만 갈렙처럼 유다 지파에 속하였으며, 1장에서 가나안과의 전쟁에 유다가 맨 먼저 올라간 것처럼 유다 지파 소속인 옷니엘이 첫 사사로 등장하고 있다.
7~8절은 사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가나안 땅 자체에 빠져서 그 땅에서 더욱 잘살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월절, 무교절, 만나, 성막”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장치들을 마련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기억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경험하고 말씀을 들어야 기억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은 하나님을 섬기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장치와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었고, 그 결과 눈에 보이는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이다. 바알은 신상 형태로 되어 있고 아세라 여신은 나무 기둥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알들과 아세라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신상과 제단이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이스라엘은 그를 8년 동안 섬겼다. 이스라엘이 다시 억압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애굽의 학정을 못 이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부르짖다(짜아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다. 이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 주셨다.
10절의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를 나타내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사가 전쟁을 치를 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신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은 영적 혹은 인격적인 변화를 나타내기보다 탁월한 군사적 힘과 능력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즉 전쟁을 치를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일 뿐, 인격적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입다나 삼손도 여호와의 영을 받았으나 인격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인물들이었다.
옷니엘의 서사에는 “손”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고, 10절에서는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겨주셨으며, 결국 옷니엘의 손이 그를 이겼다. 이런 ‘손 바뀜’을 통해 전쟁의 주권자가 오직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옷니엘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평안하였는데, 40년은 사사기에서 한 세대를 의미한다. 옷니엘의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섬겼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신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거나 진멸하지 않으시고 그 땅에 남겨 두신다. 그 이유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다(1~4절).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회피한 것’이 정착 실패의 이유였기 때문이다(1~2장).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용사이신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2:10). 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기 백성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안전과 풍요는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떠나지 않는 시련이나 가시 같은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넓혀 참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순종의 시험’에 실패한다. 그 땅 민족들 가운데 살면서 이방인과 통혼하며 그들이 믿던 신들까지 섬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을 행한다(5~7절). 이처럼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 그분의 역사를 지우고, 말씀의 권위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샬롬을 잃은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무려 8년 동안 넘기신다(8절). 애굽의 종노릇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을 배역한 그들을 다시 혹독한 통치자에게 넘기신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자초한 종살이다. 약속의 땅에서 자유 없는 속박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옷니엘에게 여호와의 영을 주셔서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게 하신다(9~11절).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는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부르짖자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기신다.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인 구산 리사다임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옷니엘도 모두 ‘하나님의 손(주권)’ 아래 있음을 옷니엘 서사를 통해 보여 주신다.
-나의 삶에 “세상 가치”를 남겨 두신 이유가 분명하다. 세상 속에서 세상 가치와 전쟁하는 법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살아내기 위해 싸워야 할 세상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전쟁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기는 전쟁이다.
-세상 속, 세상 가치의 영향력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정복해 나가도록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성도의 삶이 전쟁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전쟁을 모른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 어렵다. 전쟁을 외면하거나 어설픈 세상과의 평화에 속으면 안 된다. 구원받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합당하게, 그 나라 백성답게 이 세상 나라 속에서 오롯이 살아내야 한다. 이 전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모세는 신명기 8장 3절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새번역)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험한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은 먹는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인생을 광야라고 하고, 우리 삶의 모습을 광야 생활에 빗댄다. 삶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통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고 깨지는 자존감을 꼭 부여잡고 살아내는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살이가 광야살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는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세상살이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세상살이는 먹고살기 위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먹고 산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결국 떡을 쟁취하는 세상살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세상살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7절)…… 1928년 시리아의 우가릿(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법률, 경제생활이 담긴 점토판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연대 측정 결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의 시기로 밝혀지면서, 가나안 문명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점토판들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당시 사회상이 생생하게 드러났고,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적대시하셨는지, 그리고 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신 20:16~17)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은 우가릿이 매우 세련된 문화를 이루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가장 번성했던 주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들은 이미 문자 체계가 완성되어 고유 알파벳 30개를 갖추었고, 성별과 단수·복수·쌍수의 구별이 명확하며 문장 어순이 확립되어 있을 정도로 문명이 발전하였다. 이런 우가릿의 종교관은 건기와 우기의 뚜렷한 구분이 하늘의 변화에서 비롯되고, 그 하늘의 변화는 신들 간의 전쟁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아스다롯) 같은 가족신들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종교적인 제의를 정기적으로 치렀다. 문제는 그 제의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신전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가릿” 점토판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가나안의 문화를 이스라엘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딸들을 맞아들였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에게 주어 통혼하였다. 악의 영향력은 매우 빠르게 끼치는 법인데, “그러나 그들은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음란하게 다른 신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빠르게 떠나갔다. 그들은 조상처럼 살지 않았다”(새번역 2:17)라는 기록이 이를 대변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나안의 악함에 밀린 것이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이 너무도 쉽게 악의 영향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전쟁은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답게 가나안을 새롭게 세워야 할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오늘날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세상 가치에 빠르게 함몰되어 가는 힘없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적당히 세상살이와 타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영적 기개를 “나의 만족과 유익, 편리함”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이 땅의 교회가 세상에 억압받게 된 것은, 사사기의 외침에 무지했거나 세상살이와 적당히 타협하는 것에 맞선 전쟁을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무거운 아침이 되어 버렸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범죄와 심판, 부르짖음과 구원이라는 패턴 속에서 옷니엘이 사사로 세움을 받는다. 2장 22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 시험은 조상들이 지킨 것처럼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며(1, 4절), 첫 사사 옷니엘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본문의 시험은 ‘유혹, 미혹’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조상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이런 민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새번역_4절)이라고 선명하게 밝히신 것처럼, 현재의 상황 속에서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현재의 믿음의 상태와 수준을 보게 하고, 감사와 개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 만약 이 시험을 통해 교만해지거나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는 일을 회피한다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시험 방법은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분배받고도 아직 쫓아내지 못한 민족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을 핑계로 “쫓아내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게 한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쫓아내지 않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시험 도구로 사용하신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점차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하게 하심으로써 시험(test)하신다.
1. 하나님의 시험 목적(1~4절)
이렇게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들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시험하신다. 먼저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을 남겨 두신 것”(새번역_2절)이라고 밝히시며 “전쟁”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과연 모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순종”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이다(4절).
결과는 참담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쫓아내지 못한’ 그들에게 패배하여 도리어 섬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기는 전쟁을 잊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전쟁” 가운데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쫓아내야 할 민족들과의 전쟁이 남아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나안) 여러 민족의 딸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아내로 삼았고, 또 자기들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새번역_6절). 싸워 물리쳐야 할 상대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도 “……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새번역_7절)라는 기록을 통해, 전쟁도 순종도 모두 참패였음을 밝힌다. 이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고대 전쟁의 ‘국룰’대로 패배한 민족이 승리한 민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 왕인 “구산 리사다임(배나 악한 구산 사람)”에게 8년 동안 압제를 받아야 했다(8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 불순종이, 인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억지로 섬기는 처지로 이끌고 말았다.
3. 왜 이렇게 되었을까?(5~6절)
이렇게 된 것은 “제대로 싸울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전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전쟁을 직면할 때, “편리함과 유익함”의 유혹(시험, temptation)에 적당히 타협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족속만 남겨 둔 자기 꾀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들을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는 적당한 편리함과 유익 속에 감춰진 “전쟁 능력 상실(나태하여 준비를 소홀히 함)”이 가져올 “역전”을 가늠하지 못했다. 여기에 “남겨 둔 가나안 족속들과의 통혼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영적 타락이 더해져, 하나님조차 우상들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하나님에게서 오는 전쟁의 승리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전략과 지혜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결국 가나안 정복의 역사적인 환호가 채 가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빠르게 하나님을 떠나갔다”(새번역_2:17).
3. 옷니엘 사사 이야기(7~11절)
옷니엘 사사 이야기는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이야기다. 그에 관한 인물 묘사는 사사의 전형을 보여 준다. 사사기의 사사 소개에는 그의 성격, 인품,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그가 수행한 전쟁에도 구체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옷니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적의 손에 파시고, 이스라엘이 적을 섬기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평안이 임하였음을 묘사하는 문예적인 틀을 보여 주는 기능만 하고 있다. 이후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 틀을 기본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다른 요소들을 더해 구성된다.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다. 그를 갈렙과 연결시켜 소개한 것은 갈렙과 옷니엘의 세대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옷니엘은 갈렙의 후계자로서 여호수아 세대와 가나안 정착 세대를 연결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지만 갈렙처럼 유다 지파에 속하였으며, 1장에서 가나안과의 전쟁에 유다가 맨 먼저 올라간 것처럼 유다 지파 소속인 옷니엘이 첫 사사로 등장하고 있다.
7~8절은 사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가나안 땅 자체에 빠져서 그 땅에서 더욱 잘살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월절, 무교절, 만나, 성막”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장치들을 마련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기억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경험하고 말씀을 들어야 기억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은 하나님을 섬기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장치와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었고, 그 결과 눈에 보이는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이다. 바알은 신상 형태로 되어 있고 아세라 여신은 나무 기둥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알들과 아세라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신상과 제단이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이스라엘은 그를 8년 동안 섬겼다. 이스라엘이 다시 억압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애굽의 학정을 못 이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부르짖다(짜아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다. 이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 주셨다.
10절의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를 나타내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사가 전쟁을 치를 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신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은 영적 혹은 인격적인 변화를 나타내기보다 탁월한 군사적 힘과 능력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즉 전쟁을 치를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일 뿐, 인격적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입다나 삼손도 여호와의 영을 받았으나 인격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인물들이었다.
옷니엘의 서사에는 “손”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고, 10절에서는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겨주셨으며, 결국 옷니엘의 손이 그를 이겼다. 이런 ‘손 바뀜’을 통해 전쟁의 주권자가 오직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옷니엘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평안하였는데, 40년은 사사기에서 한 세대를 의미한다. 옷니엘의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섬겼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신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거나 진멸하지 않으시고 그 땅에 남겨 두신다. 그 이유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다(1~4절).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회피한 것’이 정착 실패의 이유였기 때문이다(1~2장).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용사이신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2:10). 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기 백성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안전과 풍요는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떠나지 않는 시련이나 가시 같은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넓혀 참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순종의 시험’에 실패한다. 그 땅 민족들 가운데 살면서 이방인과 통혼하며 그들이 믿던 신들까지 섬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을 행한다(5~7절). 이처럼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 그분의 역사를 지우고, 말씀의 권위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샬롬을 잃은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무려 8년 동안 넘기신다(8절). 애굽의 종노릇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을 배역한 그들을 다시 혹독한 통치자에게 넘기신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자초한 종살이다. 약속의 땅에서 자유 없는 속박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옷니엘에게 여호와의 영을 주셔서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게 하신다(9~11절).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는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부르짖자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기신다.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인 구산 리사다임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옷니엘도 모두 ‘하나님의 손(주권)’ 아래 있음을 옷니엘 서사를 통해 보여 주신다.
-나의 삶에 “세상 가치”를 남겨 두신 이유가 분명하다. 세상 속에서 세상 가치와 전쟁하는 법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살아내기 위해 싸워야 할 세상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전쟁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기는 전쟁이다.
-세상 속, 세상 가치의 영향력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정복해 나가도록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성도의 삶이 전쟁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전쟁을 모른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 어렵다. 전쟁을 외면하거나 어설픈 세상과의 평화에 속으면 안 된다. 구원받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합당하게, 그 나라 백성답게 이 세상 나라 속에서 오롯이 살아내야 한다. 이 전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모세는 신명기 8장 3절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새번역)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험한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은 먹는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인생을 광야라고 하고, 우리 삶의 모습을 광야 생활에 빗댄다. 삶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통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고 깨지는 자존감을 꼭 부여잡고 살아내는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살이가 광야살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는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세상살이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세상살이는 먹고살기 위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먹고 산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결국 떡을 쟁취하는 세상살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세상살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7절)…… 1928년 시리아의 우가릿(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법률, 경제생활이 담긴 점토판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연대 측정 결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의 시기로 밝혀지면서, 가나안 문명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점토판들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당시 사회상이 생생하게 드러났고,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적대시하셨는지, 그리고 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신 20:16~17)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은 우가릿이 매우 세련된 문화를 이루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가장 번성했던 주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들은 이미 문자 체계가 완성되어 고유 알파벳 30개를 갖추었고, 성별과 단수·복수·쌍수의 구별이 명확하며 문장 어순이 확립되어 있을 정도로 문명이 발전하였다. 이런 우가릿의 종교관은 건기와 우기의 뚜렷한 구분이 하늘의 변화에서 비롯되고, 그 하늘의 변화는 신들 간의 전쟁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아스다롯) 같은 가족신들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종교적인 제의를 정기적으로 치렀다. 문제는 그 제의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신전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가릿” 점토판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가나안의 문화를 이스라엘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딸들을 맞아들였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에게 주어 통혼하였다. 악의 영향력은 매우 빠르게 끼치는 법인데, “그러나 그들은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음란하게 다른 신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빠르게 떠나갔다. 그들은 조상처럼 살지 않았다”(새번역 2:17)라는 기록이 이를 대변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나안의 악함에 밀린 것이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이 너무도 쉽게 악의 영향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전쟁은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답게 가나안을 새롭게 세워야 할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오늘날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세상 가치에 빠르게 함몰되어 가는 힘없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적당히 세상살이와 타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영적 기개를 “나의 만족과 유익, 편리함”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이 땅의 교회가 세상에 억압받게 된 것은, 사사기의 외침에 무지했거나 세상살이와 적당히 타협하는 것에 맞선 전쟁을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무거운 아침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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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와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사사기 2:11-23]
본문은 사사기의 중심 이야기가 되는 틀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이스라엘의 배교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변국에 파심,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사사를 통한 구원, 그리고 다시 타락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요약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사기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와,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잘 보여 준다.
1. 이스라엘의 배교 역사(11~19절)
11~13절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고발한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 등 가나안 신들을 섬겼고, 그들의 진정한 신인 여호와를 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바알을 섬긴 일을 가리킨다. 12절은 이런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 이들에게 여호와는 조상들의 하나님일 뿐, 자신들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호와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10절).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모르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그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하여 그 신들을 섬기며 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호와도 조상의 신으로 섬기고 가나안의 신들도 함께 섬겨서 더 큰 풍요를 누리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분명한 배교였다. 가나안이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면서 가나안의 신들은 여호와께 완전히 패했다. 즉, 하나님과 비교하여 가나안의 신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무능하고 약한 존재들을 신으로 섬긴 것이다. 이런 모습에 하나님은 격분하셨고, 이런 태도를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멈춘 적이 없었다. 다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가나안의 신들도 섬긴 것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은 상호 배타적인 부부의 언약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다. 이 언약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십계명 제1계명)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삶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값싼 풍요를 더 누려 보겠다고 가나안 신을 섬긴 것이다.
14~15절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노략자들의 손에 넘겨주심을 보여 준다. ‘노략자들’은 가나안 족속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주변의 모든 적을 가리킨다. ‘손에 넘겨주다’라는 표현은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실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적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것이라는 데 사용하신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전쟁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5절에서는 여호와의 징계가 얼마나 심한지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는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광야와 가나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든지 보호하시던 여호와의 손이, 이제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손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재앙 또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28~29장의 저주나 31:16~21의 저주의 말씀들을 성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잘 따르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지만, 또한 공의롭고 신실한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신다.
16~19절은 여호와의 자비와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여 준다. 심판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극심한 괴로움에 빠졌을 때, 여호와께서는 구원할 사사를 보내 주셨다. ‘사사’는 당시 지파를 다스리던 지도자들로, 지파가 적들로 인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사사는 재판관이라기보다 영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셔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따라갔다. 다른 신을 따라 음행한다는 것은, 이방 신을 섬기는 것 자체가 음란할 뿐 아니라 이방 신전의 창녀들과 관계를 가지며 풍요를 비는 행위 역시 음란하였다는 뜻이다.
18절은 왜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의 핍박을 받으며 내는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마음이 약해지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다시 구원하기로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기계적으로 벌을 주고 잘하면 상을 주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가 잘못된 길로 치우치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징계하시지만, 징계를 받는 자녀가 너무 힘들어하면 그것마저 가슴이 아파 참지 못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주신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조금 살 만해지고 자신들을 인도하던 사사가 죽으면 또다시 타락의 길로 돌이키기를 반복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에 보답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배교하였으며, 19절이 이를 잘 요약한다.
2. 여호와의 분노(20~23절)
본문은 반복적인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므로,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하나도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신다. “하나도”라는 말로 강조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대응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 말씀만 지킨다면 다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23절은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신 이유가 하나님의 시험 때문이라고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마무리한다. 시험은 심판과 다르다. 이런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한 훈계의 방편이지 결코 심판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와 하나님의 반복적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살게 하시려는 넘치는 사랑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서사는 사사의 영웅담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3. 사사기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사랑 이야기다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섬기지 않으며 가나안의 우상(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인해 심판을 자초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서도 사사들을 보내 긍휼을 베푸신다. 사실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버리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기 백성의 배신에 진노하시지만,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하심을 사사들을 보내 주심으로 확인시켜 주신다. 왜 이렇게 하실까?
1) 여전히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며 배신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14절). 어디를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여호와의 손’이 재앙을 내리셨다(15절).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대로(출 23:33, 신 7:16, 민 33:55) 흘러갔고, 그 괴로움이 매우 컸다. “보김(통곡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신음 소리는(네아카_슬피 울부짖음) 깊어만 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경고하신 하나님이시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생활과 광야의 결핍된 생활에서, 오롯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탈출하고 그 은혜를 누린 백성들이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빠져들어 하나님을 외면하게 될 것을 우려하셨다. 이에 가나안에서의 복된 삶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재앙도 경고하셨던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복과 재앙”의 하나님은, 풍요로운 가나안의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에게서(불과 가나안 정착 두 세대 만에) 잊히고 말았다. 광야의 결핍된 환경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의 은혜는 가나안의 풍족함으로 인해 잊혔다. 두려운 것은 우리의 환경도 과거 모든 것이 결핍했던 시대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로 변했다는 점이다.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세대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하였던 간절함이,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서 사라졌다. 굳이 믿고 따르지 않고, 오히려 더 넘치는 풍요를 좇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구원의 하나님이 절실했던 세대는 지나갔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 하나님은 잊히고 말았다. 풍요로움을 맛보니 하나님보다 풍요를 더 간절히 좇는다. 이 시대가, 결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누리며 은혜를 붙잡았던 세대와 완전히 다른 세대가 된 것이다. 며칠 전 핼러윈데이에 거리에 넘쳐나던, 핼러윈 복장을 한 젊은이들을 보면서 “아…… 완전히 다른 세대로구나……”를 통감하며, 이 말씀 앞에 깊은 두려움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알고 계셔서 ‘사사’들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나안의 풍요에 빠져든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게 하시려고 쫓아내지 않은 대적들의 손에 넘겨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지만, 그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희망을 걸고 싶다.
*가나안의 풍요를 택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자기 백성의 배신에 대하여 심판하시지만, “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고 싶다.
2) 여전히 함께하기를 바라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11절).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이었다(13절).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배신하고 섬기던 우상들에게 도리어 배신(버림)당하게 하신다. 우상들을 섬기던 가나안 족속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배신하면서 좇아갔던 우상들은 백성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풍요를 노략당하게 하시고, 그들이 쫓아내지 않았던 족속들에게 도리어 복수(?)를 당하게 하신다(14절). 이 재앙은 피할 길이 없었다.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피해 숨어도 노략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제 필요 없다며 우상들에게 달려갔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우상들이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하여 괴로움이 심해지고 나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노와 재앙을 겪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배반하는 자기 백성을 내치지 않고 “여전히 함께” 하시면서 그 고통의 소리에 응답하신 것이다.
*사사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이다. 여전히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사들을 통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세대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18절).
3) 그러나…… 그러므로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돌아서서, 그들의 조상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악한 행위와 완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새번역_1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셨고(20절), “그러므로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21절)라고 선언하신다. 문장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저주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주위에 남아 있는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으신 마음이었다. 하나님과 이방 우상들의 확연한 차이를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다.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이 애굽과 광야를 지나며 경험하고 알았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공급받았던 일용할 은혜의 가치를 깨닫기 원하셨다. 아무리 비옥한 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경작하며 풍요로움을 일굴 수 있다고 착각했을지라도, 광야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전히 필요하며 그 은혜 안에 실제로 거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가나안의 풍요가 언제든지 “노략”당하게 될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깨닫기 바라셨다. 그렇게 깨닫고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22절) 시험하여 보시겠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일상의 “근심거리들”, “고통거리들”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서 자기 힘에 대한 과신과 탐욕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남겨 두신” 것임을 깨닫는다. 이 근심, 그 고통이 없다면 그나마 주님께 부르짖는 것마저 망각하고 “완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될 것을 더 잘 아시기에, 근심과 고통과 결핍을 남겨 두셨다.
*결핍이, 고통이, 근심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 백성의 배신은, 쫓아내라 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음으로” 시작되었다. 남겨진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라가면서 격화되었다.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다른 신들이 왜 이토록 매력적이었을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될 만큼 빠져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알과 아스다롯이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겨진 우상이었다는 데서 짐작할 만한 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한 가나안 땅은 농경 지대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유목하며 양을 치던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2세대가 경험한 광야가 아니었다. 광야는 매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하늘의 양식’이 아니고서는 살아 낼 수 없는 땅이었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물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광야의 땅에서 40년을 보내면서, 옷깃과 신발도 해어지지 않았던 기적을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달랐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며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땅으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광야의 결핍과 절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물줄기는 이어졌고, 뿌리는 씨는 풍성한 수확으로 이어졌다. 이런 풍요가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신들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상은 웅장하였으니, 그렇게 여겨질 법도 했다.
*그런 웅장한 우상들이 준다는 풍요와 다산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세상 신들이 약속한 “풍요로움”은 넘치고 넘쳐 쌓아 둘 수 있는 풍요였다. 더 많이 소유하기 원하는 “탐욕”의 마음은, “일용할 양식”의 풍성함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미덥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매일 아침 내려 주신 만나는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가나안에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그보다 더 많은 소출을 수확하여 “저장(축재)”하며 살 수 있었다. 창고가 부족하면 또 짓고 저장하는 “넘치는 풍요”의 유혹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기막힌 매력에(넘치고 넘치는) 이스라엘은 광야의 하나님을 버렸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했다. 날마다 필요한 것만큼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는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하나님의 공동체가) 골고루 나누어 갖는 풍요임을 간과한 것이다. 가나안의 풍요가 힘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들에게 몰려서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풍요라면, 하나님의 풍요는 모든 백성이 골고루 채워지는 만큼의 풍요였다.
*나무로 깎아 금으로 입힌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는, 썩어 내다 버려도 내 손에서 넘쳐나는 풍요였다. 이 유혹을 이겨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풍요로움이 가나안 땅의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와 다르지 않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즐겁게 누리려 한다. 풍요로움이 주는 넘치는 향락을 추구하고 또 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의 풍요는 “일용할 양식”의 풍요다.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는 풍요다. 매일 아침 거두러 나가는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풍요다. 무엇보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누릴 수 있는 풍요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 마음껏 움켜쥐고 싶고, 내 마음껏 쌓아 놓고 즐기고 싶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을 잊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풍요”의 추구가 노골적이다. 지도자를 뽑는 최우선의 조건은 “경제”이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한다. 그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성공에만 함몰된 세상에서, 실패는 가치를 찾아가고 회복하는 과정이 아닌 것이 된 지 오래다. 실패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다.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와 지금 겪고 있는 각종 이상 기후, 국제 정세의 혼란은, 어쩌면 이런 이기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며 스스로의 삶을 망치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 세상에 “삶의 참된 가치”를 되찾는 화두를 던지게 한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일 수도 있겠다. 하나님 나라 백성부터, 세상의 풍요로움에 함몰되어 보지 못한 하나님과 이웃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작년과 다른 여름을 해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또한 혼란스러워지는 국제 정세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리되고 완성된 세계는 이상일 뿐이다. 우리는 각종 혼란과 이상 기후 속에서 불안정함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상황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들이 지킨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시고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시는 은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도리어 이런 상황이 하나님을 더욱 멀어지게 하고 잊게 만드는 것이 된다면 소망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는? 예배당은? 믿음의 교제의 현장은? 기도의 자리는? 찬양의 자리는? 나눔과 섬김의 자리는? 사역과 헌신의 자리는? 하나님을 더욱 찾고 구하며 예배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내고 있는가?
1. 이스라엘의 배교 역사(11~19절)
11~13절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고발한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 등 가나안 신들을 섬겼고, 그들의 진정한 신인 여호와를 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바알을 섬긴 일을 가리킨다. 12절은 이런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 이들에게 여호와는 조상들의 하나님일 뿐, 자신들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호와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10절).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모르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그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하여 그 신들을 섬기며 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호와도 조상의 신으로 섬기고 가나안의 신들도 함께 섬겨서 더 큰 풍요를 누리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분명한 배교였다. 가나안이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면서 가나안의 신들은 여호와께 완전히 패했다. 즉, 하나님과 비교하여 가나안의 신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무능하고 약한 존재들을 신으로 섬긴 것이다. 이런 모습에 하나님은 격분하셨고, 이런 태도를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멈춘 적이 없었다. 다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가나안의 신들도 섬긴 것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은 상호 배타적인 부부의 언약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다. 이 언약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십계명 제1계명)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삶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값싼 풍요를 더 누려 보겠다고 가나안 신을 섬긴 것이다.
14~15절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노략자들의 손에 넘겨주심을 보여 준다. ‘노략자들’은 가나안 족속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주변의 모든 적을 가리킨다. ‘손에 넘겨주다’라는 표현은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실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적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것이라는 데 사용하신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전쟁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5절에서는 여호와의 징계가 얼마나 심한지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는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광야와 가나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든지 보호하시던 여호와의 손이, 이제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손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재앙 또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28~29장의 저주나 31:16~21의 저주의 말씀들을 성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잘 따르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지만, 또한 공의롭고 신실한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신다.
16~19절은 여호와의 자비와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여 준다. 심판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극심한 괴로움에 빠졌을 때, 여호와께서는 구원할 사사를 보내 주셨다. ‘사사’는 당시 지파를 다스리던 지도자들로, 지파가 적들로 인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사사는 재판관이라기보다 영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셔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따라갔다. 다른 신을 따라 음행한다는 것은, 이방 신을 섬기는 것 자체가 음란할 뿐 아니라 이방 신전의 창녀들과 관계를 가지며 풍요를 비는 행위 역시 음란하였다는 뜻이다.
18절은 왜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의 핍박을 받으며 내는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마음이 약해지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다시 구원하기로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기계적으로 벌을 주고 잘하면 상을 주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가 잘못된 길로 치우치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징계하시지만, 징계를 받는 자녀가 너무 힘들어하면 그것마저 가슴이 아파 참지 못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주신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조금 살 만해지고 자신들을 인도하던 사사가 죽으면 또다시 타락의 길로 돌이키기를 반복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에 보답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배교하였으며, 19절이 이를 잘 요약한다.
2. 여호와의 분노(20~23절)
본문은 반복적인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므로,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하나도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신다. “하나도”라는 말로 강조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대응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 말씀만 지킨다면 다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23절은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신 이유가 하나님의 시험 때문이라고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마무리한다. 시험은 심판과 다르다. 이런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한 훈계의 방편이지 결코 심판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와 하나님의 반복적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살게 하시려는 넘치는 사랑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서사는 사사의 영웅담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3. 사사기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사랑 이야기다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섬기지 않으며 가나안의 우상(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인해 심판을 자초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서도 사사들을 보내 긍휼을 베푸신다. 사실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버리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기 백성의 배신에 진노하시지만,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하심을 사사들을 보내 주심으로 확인시켜 주신다. 왜 이렇게 하실까?
1) 여전히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며 배신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14절). 어디를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여호와의 손’이 재앙을 내리셨다(15절).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대로(출 23:33, 신 7:16, 민 33:55) 흘러갔고, 그 괴로움이 매우 컸다. “보김(통곡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신음 소리는(네아카_슬피 울부짖음) 깊어만 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경고하신 하나님이시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생활과 광야의 결핍된 생활에서, 오롯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탈출하고 그 은혜를 누린 백성들이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빠져들어 하나님을 외면하게 될 것을 우려하셨다. 이에 가나안에서의 복된 삶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재앙도 경고하셨던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복과 재앙”의 하나님은, 풍요로운 가나안의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에게서(불과 가나안 정착 두 세대 만에) 잊히고 말았다. 광야의 결핍된 환경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의 은혜는 가나안의 풍족함으로 인해 잊혔다. 두려운 것은 우리의 환경도 과거 모든 것이 결핍했던 시대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로 변했다는 점이다.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세대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하였던 간절함이,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서 사라졌다. 굳이 믿고 따르지 않고, 오히려 더 넘치는 풍요를 좇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구원의 하나님이 절실했던 세대는 지나갔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 하나님은 잊히고 말았다. 풍요로움을 맛보니 하나님보다 풍요를 더 간절히 좇는다. 이 시대가, 결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누리며 은혜를 붙잡았던 세대와 완전히 다른 세대가 된 것이다. 며칠 전 핼러윈데이에 거리에 넘쳐나던, 핼러윈 복장을 한 젊은이들을 보면서 “아…… 완전히 다른 세대로구나……”를 통감하며, 이 말씀 앞에 깊은 두려움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알고 계셔서 ‘사사’들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나안의 풍요에 빠져든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게 하시려고 쫓아내지 않은 대적들의 손에 넘겨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지만, 그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희망을 걸고 싶다.
*가나안의 풍요를 택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자기 백성의 배신에 대하여 심판하시지만, “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고 싶다.
2) 여전히 함께하기를 바라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11절).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이었다(13절).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배신하고 섬기던 우상들에게 도리어 배신(버림)당하게 하신다. 우상들을 섬기던 가나안 족속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배신하면서 좇아갔던 우상들은 백성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풍요를 노략당하게 하시고, 그들이 쫓아내지 않았던 족속들에게 도리어 복수(?)를 당하게 하신다(14절). 이 재앙은 피할 길이 없었다.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피해 숨어도 노략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제 필요 없다며 우상들에게 달려갔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우상들이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하여 괴로움이 심해지고 나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노와 재앙을 겪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배반하는 자기 백성을 내치지 않고 “여전히 함께” 하시면서 그 고통의 소리에 응답하신 것이다.
*사사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이다. 여전히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사들을 통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세대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18절).
3) 그러나…… 그러므로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돌아서서, 그들의 조상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악한 행위와 완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새번역_1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셨고(20절), “그러므로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21절)라고 선언하신다. 문장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저주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주위에 남아 있는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으신 마음이었다. 하나님과 이방 우상들의 확연한 차이를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다.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이 애굽과 광야를 지나며 경험하고 알았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공급받았던 일용할 은혜의 가치를 깨닫기 원하셨다. 아무리 비옥한 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경작하며 풍요로움을 일굴 수 있다고 착각했을지라도, 광야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전히 필요하며 그 은혜 안에 실제로 거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가나안의 풍요가 언제든지 “노략”당하게 될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깨닫기 바라셨다. 그렇게 깨닫고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22절) 시험하여 보시겠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일상의 “근심거리들”, “고통거리들”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서 자기 힘에 대한 과신과 탐욕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남겨 두신” 것임을 깨닫는다. 이 근심, 그 고통이 없다면 그나마 주님께 부르짖는 것마저 망각하고 “완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될 것을 더 잘 아시기에, 근심과 고통과 결핍을 남겨 두셨다.
*결핍이, 고통이, 근심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 백성의 배신은, 쫓아내라 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음으로” 시작되었다. 남겨진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라가면서 격화되었다.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다른 신들이 왜 이토록 매력적이었을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될 만큼 빠져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알과 아스다롯이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겨진 우상이었다는 데서 짐작할 만한 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한 가나안 땅은 농경 지대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유목하며 양을 치던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2세대가 경험한 광야가 아니었다. 광야는 매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하늘의 양식’이 아니고서는 살아 낼 수 없는 땅이었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물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광야의 땅에서 40년을 보내면서, 옷깃과 신발도 해어지지 않았던 기적을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달랐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며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땅으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광야의 결핍과 절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물줄기는 이어졌고, 뿌리는 씨는 풍성한 수확으로 이어졌다. 이런 풍요가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신들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상은 웅장하였으니, 그렇게 여겨질 법도 했다.
*그런 웅장한 우상들이 준다는 풍요와 다산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세상 신들이 약속한 “풍요로움”은 넘치고 넘쳐 쌓아 둘 수 있는 풍요였다. 더 많이 소유하기 원하는 “탐욕”의 마음은, “일용할 양식”의 풍성함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미덥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매일 아침 내려 주신 만나는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가나안에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그보다 더 많은 소출을 수확하여 “저장(축재)”하며 살 수 있었다. 창고가 부족하면 또 짓고 저장하는 “넘치는 풍요”의 유혹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기막힌 매력에(넘치고 넘치는) 이스라엘은 광야의 하나님을 버렸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했다. 날마다 필요한 것만큼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는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하나님의 공동체가) 골고루 나누어 갖는 풍요임을 간과한 것이다. 가나안의 풍요가 힘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들에게 몰려서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풍요라면, 하나님의 풍요는 모든 백성이 골고루 채워지는 만큼의 풍요였다.
*나무로 깎아 금으로 입힌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는, 썩어 내다 버려도 내 손에서 넘쳐나는 풍요였다. 이 유혹을 이겨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풍요로움이 가나안 땅의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와 다르지 않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즐겁게 누리려 한다. 풍요로움이 주는 넘치는 향락을 추구하고 또 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의 풍요는 “일용할 양식”의 풍요다.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는 풍요다. 매일 아침 거두러 나가는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풍요다. 무엇보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누릴 수 있는 풍요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 마음껏 움켜쥐고 싶고, 내 마음껏 쌓아 놓고 즐기고 싶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을 잊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풍요”의 추구가 노골적이다. 지도자를 뽑는 최우선의 조건은 “경제”이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한다. 그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성공에만 함몰된 세상에서, 실패는 가치를 찾아가고 회복하는 과정이 아닌 것이 된 지 오래다. 실패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다.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와 지금 겪고 있는 각종 이상 기후, 국제 정세의 혼란은, 어쩌면 이런 이기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며 스스로의 삶을 망치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 세상에 “삶의 참된 가치”를 되찾는 화두를 던지게 한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일 수도 있겠다. 하나님 나라 백성부터, 세상의 풍요로움에 함몰되어 보지 못한 하나님과 이웃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작년과 다른 여름을 해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또한 혼란스러워지는 국제 정세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리되고 완성된 세계는 이상일 뿐이다. 우리는 각종 혼란과 이상 기후 속에서 불안정함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상황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들이 지킨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시고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시는 은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도리어 이런 상황이 하나님을 더욱 멀어지게 하고 잊게 만드는 것이 된다면 소망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는? 예배당은? 믿음의 교제의 현장은? 기도의 자리는? 찬양의 자리는? 나눔과 섬김의 자리는? 사역과 헌신의 자리는? 하나님을 더욱 찾고 구하며 예배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내고 있는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보김과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의 등장 [사사기 2:1-10]
가나안 정복 전쟁 말기에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스라엘의 모습은, 급기야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여호와의 사자의 선언은 가나안 땅에 적응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청천벽력과 같았다. 쫓아내야 할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도록 내버려 두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백성이 큰 소리로 울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끝이 났고, 출애굽 2세대는 가나안 정복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지만 그들도 역시 조상의 길로 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세대”였다는 것이다. 홍해, 광야의 메추라기와 만나, 시내 산 언약식,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공통의 체험에서 오는 일체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없는(여호와도,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은 후의 일이었다.
이처럼 본문은 1~5절의 보김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질책하는 내용을 전한다. 이어 6~10절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죽음,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보고한다.
1. 통곡의 땅(1~5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몇 가지 표현으로 불렸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등이다. 그런데 그 땅에 큰 울음소리가 터졌다. 이제껏 승리의 환호성이 더 많이 울려 퍼지던 백성에게서 깊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다(1절). 길갈은 여호수아 세대가 요단 강을 건넌 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열두 돌기둥을 세운 장소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자녀들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있는 성읍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었다. 성막도 가나안 땅에서 처음 세워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상기시키시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온 힘을 쏟아부어 정복 전쟁에 임하지 않았다. 적당히 현실적인 여건과 타협하며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한 순종으로 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남김없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 하셨지만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길갈에서 올려 보내신 사자를 통해 이런 불순종을 꾸짖으신다.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했던, 여호수아가 이끌던 시대를 회상하게 하신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던 것”(6~7절)을 돌아보게 하신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배신은 순식간이었다. 이에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벧엘)으로 올라와 이렇게 외쳤다.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그들은 결국 너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들은 너희에게,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도록 옭아매는 올무가 될 것이다.”(새번역_3절) 이에 백성이 큰 소리로 울었다! 언뜻 보기에는 진실한 회개의 모습인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진실한 회개에는 몇 가지 증표가 따른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전인격적인 변화의 표현이 나타난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격한 표현에서 멈추지 않는다. 분명한 변화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지 큰 소리로 울기만 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와 기도의 진정성은 반드시 그 후의 삶에서 드러난다. 기도와 예배 후의 모습에서 변화된 행동을 찾아볼 수 없고, 통곡 후에 의지에 찬 변화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보김(우는 자들)”일 뿐이다. “보김”은 회복이 완성된 곳이 아니다. 회복의 시작이어야 했다.
2.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회상(6~10절)
이 단락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여호수아 24:28~31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각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였고, 각 지파는 분배받은 기업으로 돌아가 그곳을 차지하는 전쟁을 수행한다.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그 후 여호수아와 함께한 1세대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큰일, 즉 요단 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한 일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한 전투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의 종으로 존경받던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는다. 본문은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종’으로 호칭하는데, 이는 그 이전에는 오직 모세에게만 붙여졌던 최고의 명예를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즉, 여호수아는 죽은 후에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여호수아가 모세처럼 여호와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는 호칭이었다.
여호수아는 죽은 후 그의 기업인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 헤레스’, 혹은 ‘딤낫 세라’로 불리는 곳에 묻힌다. 이 성읍은 그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자신의 성읍으로 선택하여 받은 곳이었다. 이런 모습을 통해, 그가 비록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왕처럼 이스라엘 땅 전체를 자기 소유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과 동일하게 자기 몫을 받는 데 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실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고, 그와 함께한 사람들도 죽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세대가 죽은 후, 뒤를 이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른 세대’였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7절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본 자들’이라는 표현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3. 다음 세대가 아니라 다른 세대(10절)
“보김(우는 자들)”의 땅이 되어 버릴 원인을, 여호수아 세대의 모습을 회상하게 하시면서 알려 주신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장로들(그 세대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 일어난 세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대였다. “……그들이 죽은 뒤에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새번역_10절)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아 주신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새로운 세대가 여호와와 그분이 하신 일을 알지 못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살필 수 있다. 첫째, 선조들이 다음 세대에게 여호와에 대해 제대로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다음 세대를 모아 놓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언급하면서, 새로운 세대와 언약을 갱신하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대대로 자손에게 잘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부모 세대에게 있다. 하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이런 교육은 점점 퇴색하기 마련이고, 그 결과 자식 세대는 하나님을 잘 모르게 될 수 있다. 둘째, 각 세대는 전해 들은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자식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식은 있어도 하나님을 삶 속에서 체험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신앙은 지식으로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각 세대와 각 개인이 하나님을 체험할 때 형성되기에 세대마다 새로운 하나님 체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던 이전 세대와 달리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이스라엘의 배교를 예고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어김없이 주셨다. 그렇게 받은 땅을 이스라엘 백성도 어김없이 그들의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려주지 못했다.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이다.
*신앙을 물려주지 못한(않은) 채 땅만 물려준 그들의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백성과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이 다른 세대가 물려받은 것은 그저 땅뿐이었다. 출애굽의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는 물려받지 못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에게,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는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기본 선택이었다. 여호수아 세대는 이 땅의 풍요함을 물려주기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물려주었어야 했다.
*결국 땅(물질)만 물려주면 안 된다. 부모와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공통된 경험은, 우리 자녀 세대가 우리와 다른 세대가 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과 세 절기, 곧 유월절(무교절)과 맥추절(오순절)과 수장절(초막절)을 모든 이스라엘이 지키라 하셨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앙 정서를 갖게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자녀와 함께 이를 잘 지키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기도의 자리를 함께하고, 찬양의 자리에서 함께 목청껏 마음을 다해 찬양하는지, 가정에서 혹은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이와 같은 심정으로 함께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미 한국 교회 안에서 다음 세대가 모이는 주일학교의 70퍼센트가 넘게 사라졌다는 보고가 절망하게 한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귀한 신앙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부터가, 다음 세대를 세우는 기초를 쌓는 일이다. 부모가 들려주는 하나님 이야기가 가랑비에 옷 젖듯 마음에 스며들어 있어야 “다음 세대”가 된다.
*모세의 세대가 여호수아의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광야”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함께 만나고 누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오롯이 그 세대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묶어 주었다. 하지만 여호수아 세대는 그토록 소망하던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은혜가 성취되었음에도, 여호수아를 알고 따르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죽자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나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나, 이스라엘은 변절하고 만다(1~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고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지만, 이스라엘은 약속을 어긴 채 가나안 민족을 용납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주민이 도리어 그들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그 사랑은 우리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하나님만 사랑하고 있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서도 가나안 주민과 또 다른 언약을 맺는다. 가나안 주민을 쫓아내지 않고 우상의 단도 헐지 않는다. 그들을 노역자로 삼아 함께 사는 길을 택한다(2~3절). 공존을 도모한 평화로운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불순종이요 그릇된 타협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것이라도 언제든 득이 아니라 독이 되고, 친구가 아니라 원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의 실천보다 실용을 택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선고되자, 이스라엘 자손은 소리 높여 운다(4~5절). 안식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통곡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그 자체로 안전하고 기쁨 가득한 땅은 없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간절히 요청하고 실현하는 곳에 안식과 평강과 희락이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잘못을 정죄하시고 심판을 선고하셨다. 최후통첩이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셨다. 영원히 그 언약을 지킬 태세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자 딴살림을 차려 버렸다. 우상을 용인했다. 가나안을 수용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초한 선택의 결과를 그대로 취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심판 선고를 듣고 보김에서 대성통곡한다. 축복의 땅, 안식의 땅, 번영의 땅 가나안이 슬픔과 통곡의 땅이 된다. 그 자체로 안전한 땅이 있을까? 어떤 곳도 없다. 안식과 기쁨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로부터만 나온다. 가나안은 가능성의 땅이다. 선택의 땅이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지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이중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하나님의 위대한 정복 역사를 경험한 세대와 그다음 세대가 달랐다. 여호수아가 죽고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여호와와 그분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출현한다. 땅은 전수되었으나 신앙은 계승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전수하고 계승해 주어야 할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 오늘 우리는 몸부림치고 있을까?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역사를 기억하던 사람들의 죽음은,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의 행적도 모르는 새로운 세대를 낳았다. 다음 세대는 자신들이 사는 땅이 자격 없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유도 희미해졌다. 다음 세대가 전혀 다른 세대가 되고 말았다.
-여호수아를 알았던 세대는 통곡은 무성한데, 하나님을 붙잡지 않는 땅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은 무성한데, 말씀대로 살아 내는 삶은 없는 자세를 물려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은 물려주었지만, 살아 내는 삶은 공유하지 못했다. 자신들도 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함께한 경험이 공유되지 않고 지식의 말만 무성한 계승은 전혀 다른 세대를 낳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맞은 위기의 진정한 핵심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기존 세대, 이들은 부모의 신앙을 보고 들으며 자라 왔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 아니라 경험의 지식, 정서의 지식을 포함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마음과 뜻과 정성”이 모두 버무려진 “삶의 경험”에서 오는 지식이다.
-다른 세대의 출현은 기록이 전수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땅이 전수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수되지 않아서 출현한다. 복음을 심으면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아는 세대가 하나님을 심지 않았으니, 전혀 다른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사실 나도 부모님에게는 다른 세대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정말 다른 세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부모님에게 내가 다른 세대이듯, 나의 자녀도 이미 다른 세대일 수밖에 없다. 삶의 철학이나 가치, 태도는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중심은 다르면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큼은 다른 세대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그래서 가족이 함께 공유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공통된 경험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기록된 말씀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정 예배로 자연스럽게 말씀을 읽고 묵상을 나누는 시간을 티타임과 곁들여 갖거나, 한창 아이들을 키울 때 잠재우기 전에 기도해 주거나, 함께 교회에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지금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공통 경험의 장”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일을 잘 지키는 일을 아이들과 함께 꿋꿋이 감당해 보는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라면 부모가 삶으로 보여 주고, 그 현장에 아이들과 함께하면 된다. 함께 경험한 신앙의 추억이 “다른 세대”가 되지 않게 한다.
*”보김(우는 자들)”은 나의 세대에서 멈춰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여 “보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모 세대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사사 시대의 특징은 “보김”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는 “보김의 세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늘은 보김이었더라도 내일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함께하시며 앞장서시며” 광야 길을 인도하셨던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김”의 세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호세아 선지자가 외쳤던 말씀에 순종의 걸음을 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끝이 났고, 출애굽 2세대는 가나안 정복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지만 그들도 역시 조상의 길로 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세대”였다는 것이다. 홍해, 광야의 메추라기와 만나, 시내 산 언약식,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공통의 체험에서 오는 일체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없는(여호와도,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은 후의 일이었다.
이처럼 본문은 1~5절의 보김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질책하는 내용을 전한다. 이어 6~10절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죽음,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보고한다.
1. 통곡의 땅(1~5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몇 가지 표현으로 불렸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등이다. 그런데 그 땅에 큰 울음소리가 터졌다. 이제껏 승리의 환호성이 더 많이 울려 퍼지던 백성에게서 깊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다(1절). 길갈은 여호수아 세대가 요단 강을 건넌 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열두 돌기둥을 세운 장소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자녀들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있는 성읍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었다. 성막도 가나안 땅에서 처음 세워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상기시키시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온 힘을 쏟아부어 정복 전쟁에 임하지 않았다. 적당히 현실적인 여건과 타협하며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한 순종으로 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남김없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 하셨지만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길갈에서 올려 보내신 사자를 통해 이런 불순종을 꾸짖으신다.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했던, 여호수아가 이끌던 시대를 회상하게 하신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던 것”(6~7절)을 돌아보게 하신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배신은 순식간이었다. 이에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벧엘)으로 올라와 이렇게 외쳤다.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그들은 결국 너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들은 너희에게,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도록 옭아매는 올무가 될 것이다.”(새번역_3절) 이에 백성이 큰 소리로 울었다! 언뜻 보기에는 진실한 회개의 모습인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진실한 회개에는 몇 가지 증표가 따른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전인격적인 변화의 표현이 나타난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격한 표현에서 멈추지 않는다. 분명한 변화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지 큰 소리로 울기만 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와 기도의 진정성은 반드시 그 후의 삶에서 드러난다. 기도와 예배 후의 모습에서 변화된 행동을 찾아볼 수 없고, 통곡 후에 의지에 찬 변화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보김(우는 자들)”일 뿐이다. “보김”은 회복이 완성된 곳이 아니다. 회복의 시작이어야 했다.
2.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회상(6~10절)
이 단락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여호수아 24:28~31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각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였고, 각 지파는 분배받은 기업으로 돌아가 그곳을 차지하는 전쟁을 수행한다.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그 후 여호수아와 함께한 1세대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큰일, 즉 요단 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한 일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한 전투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의 종으로 존경받던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는다. 본문은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종’으로 호칭하는데, 이는 그 이전에는 오직 모세에게만 붙여졌던 최고의 명예를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즉, 여호수아는 죽은 후에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여호수아가 모세처럼 여호와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는 호칭이었다.
여호수아는 죽은 후 그의 기업인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 헤레스’, 혹은 ‘딤낫 세라’로 불리는 곳에 묻힌다. 이 성읍은 그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자신의 성읍으로 선택하여 받은 곳이었다. 이런 모습을 통해, 그가 비록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왕처럼 이스라엘 땅 전체를 자기 소유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과 동일하게 자기 몫을 받는 데 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실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고, 그와 함께한 사람들도 죽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세대가 죽은 후, 뒤를 이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른 세대’였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7절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본 자들’이라는 표현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3. 다음 세대가 아니라 다른 세대(10절)
“보김(우는 자들)”의 땅이 되어 버릴 원인을, 여호수아 세대의 모습을 회상하게 하시면서 알려 주신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장로들(그 세대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 일어난 세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대였다. “……그들이 죽은 뒤에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새번역_10절)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아 주신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새로운 세대가 여호와와 그분이 하신 일을 알지 못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살필 수 있다. 첫째, 선조들이 다음 세대에게 여호와에 대해 제대로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다음 세대를 모아 놓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언급하면서, 새로운 세대와 언약을 갱신하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대대로 자손에게 잘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부모 세대에게 있다. 하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이런 교육은 점점 퇴색하기 마련이고, 그 결과 자식 세대는 하나님을 잘 모르게 될 수 있다. 둘째, 각 세대는 전해 들은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자식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식은 있어도 하나님을 삶 속에서 체험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신앙은 지식으로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각 세대와 각 개인이 하나님을 체험할 때 형성되기에 세대마다 새로운 하나님 체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던 이전 세대와 달리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이스라엘의 배교를 예고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어김없이 주셨다. 그렇게 받은 땅을 이스라엘 백성도 어김없이 그들의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려주지 못했다.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이다.
*신앙을 물려주지 못한(않은) 채 땅만 물려준 그들의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백성과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이 다른 세대가 물려받은 것은 그저 땅뿐이었다. 출애굽의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는 물려받지 못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에게,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는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기본 선택이었다. 여호수아 세대는 이 땅의 풍요함을 물려주기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물려주었어야 했다.
*결국 땅(물질)만 물려주면 안 된다. 부모와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공통된 경험은, 우리 자녀 세대가 우리와 다른 세대가 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과 세 절기, 곧 유월절(무교절)과 맥추절(오순절)과 수장절(초막절)을 모든 이스라엘이 지키라 하셨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앙 정서를 갖게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자녀와 함께 이를 잘 지키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기도의 자리를 함께하고, 찬양의 자리에서 함께 목청껏 마음을 다해 찬양하는지, 가정에서 혹은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이와 같은 심정으로 함께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미 한국 교회 안에서 다음 세대가 모이는 주일학교의 70퍼센트가 넘게 사라졌다는 보고가 절망하게 한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귀한 신앙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부터가, 다음 세대를 세우는 기초를 쌓는 일이다. 부모가 들려주는 하나님 이야기가 가랑비에 옷 젖듯 마음에 스며들어 있어야 “다음 세대”가 된다.
*모세의 세대가 여호수아의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광야”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함께 만나고 누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오롯이 그 세대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묶어 주었다. 하지만 여호수아 세대는 그토록 소망하던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은혜가 성취되었음에도, 여호수아를 알고 따르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죽자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나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나, 이스라엘은 변절하고 만다(1~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고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지만, 이스라엘은 약속을 어긴 채 가나안 민족을 용납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주민이 도리어 그들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그 사랑은 우리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하나님만 사랑하고 있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서도 가나안 주민과 또 다른 언약을 맺는다. 가나안 주민을 쫓아내지 않고 우상의 단도 헐지 않는다. 그들을 노역자로 삼아 함께 사는 길을 택한다(2~3절). 공존을 도모한 평화로운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불순종이요 그릇된 타협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것이라도 언제든 득이 아니라 독이 되고, 친구가 아니라 원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의 실천보다 실용을 택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선고되자, 이스라엘 자손은 소리 높여 운다(4~5절). 안식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통곡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그 자체로 안전하고 기쁨 가득한 땅은 없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간절히 요청하고 실현하는 곳에 안식과 평강과 희락이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잘못을 정죄하시고 심판을 선고하셨다. 최후통첩이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셨다. 영원히 그 언약을 지킬 태세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자 딴살림을 차려 버렸다. 우상을 용인했다. 가나안을 수용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초한 선택의 결과를 그대로 취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심판 선고를 듣고 보김에서 대성통곡한다. 축복의 땅, 안식의 땅, 번영의 땅 가나안이 슬픔과 통곡의 땅이 된다. 그 자체로 안전한 땅이 있을까? 어떤 곳도 없다. 안식과 기쁨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로부터만 나온다. 가나안은 가능성의 땅이다. 선택의 땅이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지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이중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하나님의 위대한 정복 역사를 경험한 세대와 그다음 세대가 달랐다. 여호수아가 죽고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여호와와 그분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출현한다. 땅은 전수되었으나 신앙은 계승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전수하고 계승해 주어야 할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 오늘 우리는 몸부림치고 있을까?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역사를 기억하던 사람들의 죽음은,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의 행적도 모르는 새로운 세대를 낳았다. 다음 세대는 자신들이 사는 땅이 자격 없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유도 희미해졌다. 다음 세대가 전혀 다른 세대가 되고 말았다.
-여호수아를 알았던 세대는 통곡은 무성한데, 하나님을 붙잡지 않는 땅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은 무성한데, 말씀대로 살아 내는 삶은 없는 자세를 물려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은 물려주었지만, 살아 내는 삶은 공유하지 못했다. 자신들도 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함께한 경험이 공유되지 않고 지식의 말만 무성한 계승은 전혀 다른 세대를 낳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맞은 위기의 진정한 핵심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기존 세대, 이들은 부모의 신앙을 보고 들으며 자라 왔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 아니라 경험의 지식, 정서의 지식을 포함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마음과 뜻과 정성”이 모두 버무려진 “삶의 경험”에서 오는 지식이다.
-다른 세대의 출현은 기록이 전수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땅이 전수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수되지 않아서 출현한다. 복음을 심으면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아는 세대가 하나님을 심지 않았으니, 전혀 다른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사실 나도 부모님에게는 다른 세대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정말 다른 세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부모님에게 내가 다른 세대이듯, 나의 자녀도 이미 다른 세대일 수밖에 없다. 삶의 철학이나 가치, 태도는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중심은 다르면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큼은 다른 세대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그래서 가족이 함께 공유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공통된 경험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기록된 말씀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정 예배로 자연스럽게 말씀을 읽고 묵상을 나누는 시간을 티타임과 곁들여 갖거나, 한창 아이들을 키울 때 잠재우기 전에 기도해 주거나, 함께 교회에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지금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공통 경험의 장”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일을 잘 지키는 일을 아이들과 함께 꿋꿋이 감당해 보는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라면 부모가 삶으로 보여 주고, 그 현장에 아이들과 함께하면 된다. 함께 경험한 신앙의 추억이 “다른 세대”가 되지 않게 한다.
*”보김(우는 자들)”은 나의 세대에서 멈춰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여 “보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모 세대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사사 시대의 특징은 “보김”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는 “보김의 세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늘은 보김이었더라도 내일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함께하시며 앞장서시며” 광야 길을 인도하셨던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김”의 세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호세아 선지자가 외쳤던 말씀에 순종의 걸음을 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선교편지 ㅣ
정동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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