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라맛레히에서 엔학고레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사사기 15:1-20]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지게 된 “라맛레히와 엔학고레” 사건이다. 결혼식 이후 삼손은 다시 처가를 방문하여 아내를 찾지만, 장인은 딸을 삼손의 친구에게 주었으니 그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한다. 이에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에 풀어 놓는다. 이로 인해 이미 거두어 쌓은 곡식 단을 비롯해 베지 않은 곡식, 포도원과 감람나무까지 불에 탔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은 화가 나서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인다. 이를 빌미로 삼손은 다시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찌르고 에담 바위 동굴에서 쉰다(새번역_8절).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삼손의 행동에 화가 나서 유다를 침공하여 ‘레히(턱뼈)’에 진을 친다. 이를 알게 된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동굴로 몰려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긴다. 그때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쥐고 천 명을 죽인다. 그리고 그곳을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부른다.
삼손이 몹시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삼손을 구원해 주신다. 삼손은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부르짖는 사람의 샘)”라고 불렀다. 이 사건 이후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낸다.
1. 혼자서? 하나님께서 함께!!
삼손은 철저히 홀로 움직인다. 이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연합하여 함께 싸웠지만, 삼손은 홀로였다. 외롭게 블레셋과의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원인은 개인적인 복수였다.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 장인은 이미 딸을 다른 친구에게 시집보내 놓고 천연덕스럽게 아내의 동생을 소개했다. 삼손은 이런 장인의 처사에 화가 나서 복수했고, 이 복수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이자 이를 빌미로 또 복수하여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블레셋은 이런 삼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유다를 침공했고, 유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 버린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배신을 불러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삼손은 홀로 싸웠다. 블레셋의 40년 압제에 눌려 있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삼손과 연합하여 블레셋에 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삼손을 붙잡아 넘긴다.
*삼손 한 명을 붙잡기 위해 무려 3천 명이 동원됐다. 그 마음으로 블레셋에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족 한 명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기는 데 쓸데없는 힘을 모았다.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화되어 버린 것이다.
*삼손은 그렇게 홀로 싸웠다. 그런데 정말 홀로였을까? 아니다. 개인적인 복수로 개인적인 싸움을 했던 그였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14절). 새 밧줄 둘로 단단히 묶여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찰나에 임한 여호와의 영은 삼손의 눈에 “나귀의 새 턱뼈”(15절)가 보이게 하시고, 그것을 집어 들게 하셔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그 자리에서 죽이게 하신다.
*너무도 맹렬하게 싸웠기에, 삼손은 천 명을 죽이고 나서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심히 목이 말라” 탈진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삼손이 홀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있을 때, 삼손을 붙잡아 간 삼천 명의 유다 지파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며 홀로 싸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했어도 “여호와의 영”은 함께 계셨다.
*삼천 명은 삼손의 싸움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셨다.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삼손의 손을 들어 쓰셨다! 레히(턱뼈)가 라맛레히(턱뼈 언덕)가 되기까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시며 멈추지 않으셨다.
*동족들은 삼손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서 소외되어 홀로 싸웠지만,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함께 싸웠다!
2. 라맛레히가 엔학고레로!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이를 기념하여 ‘라맛레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감격적인 승리를 선포했지만, 이내 심한 갈증과 탈진이 찾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깨닫는다. 자신이 천 명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한계이며,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즉,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극심한 탈진과 함께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들고 나서야, 삼손은 이 싸움을 자신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고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새번역_18절)
천 명을 나귀 턱뼈 하나로 죽였지만, 자신의 목마름(갈증)조차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수를 터뜨려 주시지 않으면, 대적들을 죽였어도 결국 대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의지하고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삼손은 지체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그의 갈증을 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늘 함께 계셨기에, 삼손이 외롭게 싸운 후 곤란한 상황 가운데 부르짖을 때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고 외친 신앙의 고백이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가 버려지는 순간에도 함께 계셨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도, 목이 말라 탈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삼손과 함께 계셨다. 함께 계셨기에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들게 하셨고, 그것을 휘두를 때 블레셋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게 하셨다. 또 갈증이 극에 달하여 부르짖을 때 즉각 응답하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이에게 응답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하셨음을 증명하는 샘이 된 것이다.
*삼손이 이제껏 홀로 힘겹게 싸워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걷는 삶의 길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하여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이다.
*특히 “부르짖는 사람의 샘”이라는 뜻의 “엔학고레”가 의미심장하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받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블레셋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과 교류하며 통혼까지 자연스럽게 했기에, 그들에게 압제받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 오히려 블레셋의 압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여, 고통을 주는 존재를 블레셋이 아닌 삼손으로 여기고 장정 3천 명을 모아 그를 붙잡아 넘기기까지 했다. 철저히 블레셋화된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이를 만큼 고통스러운 갈증이 비로소 삼손을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즉각 응답해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다스리게 되었다. 즉,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승리의 샘물을 터져 나오게 하셔서 지독한 죽음의 갈증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셨다.
*사사기의 구원 사이클이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 범죄-심판-부르짖음-구원-평화의 사이클에서, 40년 동안 압제(심판)를 당하고도 부르짖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엔학고레”에서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증거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삼손은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지 않는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새번역_20절). 삼손만 홀로 부르짖고 말았다. “엔학고레”는 삼손의 부르짖음에 머물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지 않는다. 그래서 삼손이 골칫덩이이기는 했지만, 블레셋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홀로 싸운 삼손, 함께 싸워 주신 하나님, 부르짖는 삼손,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화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다. 엔학고레가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기막힌 현실이 마지막 사사 삼손의 시대가 시작된 이스라엘의 현주소였다.
나는?
-급하고 무모해 보이는 삼손의 분노와 사사로운 보복을 통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를 흔들어 놓을 틈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1~19절). 아내를 잃은 삼손은 장인의 궁색한 변명과 제안을 거절하고, 그에 대한 분노를 블레셋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들의 야비한 보복(6절)은 블레셋을 향한 삼손의 증오와 복수심을 더욱 자극한다. 그런데 블레셋과 공존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갈등하지도, 싸우지도 않고, 심지어 하나님께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주도하셔서 그들의 부정한 연합을 깨뜨리신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들의 구원자인 삼손을 대적의 손에 넘기는 굴욕을 보인다. 심지어 블레셋의 압제를 두둔하기까지 한다(9~13절). 가장 먼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 승리한(1:1~3) 유다 지파가 지금은 그 전의(戰意)는 온데간데없고, 오랜 압제에 체념한 듯 거짓 평화와 안전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삼손이 싸워야 할 대상은 블레셋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안에 내재된 집요하고 끈질긴 ‘노예근성’ 혹은 ‘사대주의’가 아닐까 싶다.
-여호와의 영으로 대승을 거둔 삼손의 노래에는 하나님은 없고 내가 했다는 자랑만 보인다(14~17절). 그는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갈증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 이 전쟁이 지도자 위에 지도자가 계신 거룩한 전쟁임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렇듯 보이는 대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있는 자만과 허영이 아닐까?
-대승을 거둔 삼손이 극심한 목마름으로 부르짖자, 그를 살리기 위해 샘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갈증을 통해 자기 한계를 깨닫게 된 삼손은 비로소 승리의 공을 하나님께 돌린다. ‘라맛레히’를 자랑하는 삼손에게 하나님은 ‘엔학고레’를 허락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고, 승리할 수도, 사명을 이룰 수도 없음을 깨우치신다. 큰 승리의 개가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오늘의 내가 없고 내일도 보장할 수 없다는 나의 고백이다.
*”엔학고레”가 필요한 시대다. 나는 특히 더온누리교회가 “엔학고레”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사 시대와 다름없는 이 시대 속에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나아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의 샘물이 터져 나오는 바로 그곳이 우리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삶의 거처가 어디든 그곳이 “엔학고레”가 되기를 바란다. “부르짖음”이 쇠퇴해 버린 시대다. 오히려 “부르짖음”이 더욱 간절하게 터져 나와야 할 시대이기도 하다. 사회 전반에 드러나는 분열과 혼란, 직접 체감하는 기후 위기, 양극화의 그림자, 교회 공동체의 쇠락 등 지금이 부르짖어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스스로 입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부르짖음”이 회복되기를 갈망한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당하면서 도리어 블레셋화되어 버린 나머지,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었던 삼손조차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블레셋 여인과 자연스레 결혼할 정도였다. 이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하여 마음이 고통스럽다.
*한편 “부르짖음”을 잊어버렸을 때 “부르짖음”을 일깨워 주셔서 구원을 갈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삼손을 살렸듯이, 하나님의 제한 없는 사랑의 은혜가 우리로 “부르짖음”을 토해 내게 하셔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
*화려한 승리의 장소인 라맛레히보다 부르짖어 응답받은 샘인 엔학고레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화려한 승리의 라맛레히에 취해, 부르짖을 때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엔학고레”를 간과한다면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삶을 “엔학고레”에서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라맛레히처럼 홀로 자기 힘에 취해 살았겠지만, 엔학고레를 통해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비로소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섬길 수 있었다. 그에게 엔학고레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는가!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삼손의 행동에 화가 나서 유다를 침공하여 ‘레히(턱뼈)’에 진을 친다. 이를 알게 된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동굴로 몰려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긴다. 그때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쥐고 천 명을 죽인다. 그리고 그곳을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부른다.
삼손이 몹시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삼손을 구원해 주신다. 삼손은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부르짖는 사람의 샘)”라고 불렀다. 이 사건 이후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낸다.
1. 혼자서? 하나님께서 함께!!
삼손은 철저히 홀로 움직인다. 이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연합하여 함께 싸웠지만, 삼손은 홀로였다. 외롭게 블레셋과의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원인은 개인적인 복수였다.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 장인은 이미 딸을 다른 친구에게 시집보내 놓고 천연덕스럽게 아내의 동생을 소개했다. 삼손은 이런 장인의 처사에 화가 나서 복수했고, 이 복수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이자 이를 빌미로 또 복수하여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블레셋은 이런 삼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유다를 침공했고, 유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 버린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배신을 불러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삼손은 홀로 싸웠다. 블레셋의 40년 압제에 눌려 있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삼손과 연합하여 블레셋에 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삼손을 붙잡아 넘긴다.
*삼손 한 명을 붙잡기 위해 무려 3천 명이 동원됐다. 그 마음으로 블레셋에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족 한 명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기는 데 쓸데없는 힘을 모았다.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화되어 버린 것이다.
*삼손은 그렇게 홀로 싸웠다. 그런데 정말 홀로였을까? 아니다. 개인적인 복수로 개인적인 싸움을 했던 그였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14절). 새 밧줄 둘로 단단히 묶여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찰나에 임한 여호와의 영은 삼손의 눈에 “나귀의 새 턱뼈”(15절)가 보이게 하시고, 그것을 집어 들게 하셔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그 자리에서 죽이게 하신다.
*너무도 맹렬하게 싸웠기에, 삼손은 천 명을 죽이고 나서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심히 목이 말라” 탈진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삼손이 홀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있을 때, 삼손을 붙잡아 간 삼천 명의 유다 지파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며 홀로 싸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했어도 “여호와의 영”은 함께 계셨다.
*삼천 명은 삼손의 싸움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셨다.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삼손의 손을 들어 쓰셨다! 레히(턱뼈)가 라맛레히(턱뼈 언덕)가 되기까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하시며 멈추지 않으셨다.
*동족들은 삼손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서 소외되어 홀로 싸웠지만,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함께 싸웠다!
2. 라맛레히가 엔학고레로!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이를 기념하여 ‘라맛레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감격적인 승리를 선포했지만, 이내 심한 갈증과 탈진이 찾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깨닫는다. 자신이 천 명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한계이며,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즉,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극심한 탈진과 함께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들고 나서야, 삼손은 이 싸움을 자신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고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새번역_18절)
천 명을 나귀 턱뼈 하나로 죽였지만, 자신의 목마름(갈증)조차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수를 터뜨려 주시지 않으면, 대적들을 죽였어도 결국 대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의지하고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삼손은 지체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그의 갈증을 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늘 함께 계셨기에, 삼손이 외롭게 싸운 후 곤란한 상황 가운데 부르짖을 때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고 외친 신앙의 고백이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가 버려지는 순간에도 함께 계셨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도, 목이 말라 탈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삼손과 함께 계셨다. 함께 계셨기에 나귀의 새 턱뼈를 손에 들게 하셨고, 그것을 휘두를 때 블레셋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게 하셨다. 또 갈증이 극에 달하여 부르짖을 때 즉각 응답하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이에게 응답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하셨음을 증명하는 샘이 된 것이다.
*삼손이 이제껏 홀로 힘겹게 싸워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걷는 삶의 길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하여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이다.
*특히 “부르짖는 사람의 샘”이라는 뜻의 “엔학고레”가 의미심장하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받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블레셋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과 교류하며 통혼까지 자연스럽게 했기에, 그들에게 압제받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 오히려 블레셋의 압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여, 고통을 주는 존재를 블레셋이 아닌 삼손으로 여기고 장정 3천 명을 모아 그를 붙잡아 넘기기까지 했다. 철저히 블레셋화된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이를 만큼 고통스러운 갈증이 비로소 삼손을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즉각 응답해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다스리게 되었다. 즉,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승리의 샘물을 터져 나오게 하셔서 지독한 죽음의 갈증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셨다.
*사사기의 구원 사이클이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 범죄-심판-부르짖음-구원-평화의 사이클에서, 40년 동안 압제(심판)를 당하고도 부르짖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엔학고레”에서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증거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삼손은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지 않는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새번역_20절). 삼손만 홀로 부르짖고 말았다. “엔학고레”는 삼손의 부르짖음에 머물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지 않는다. 그래서 삼손이 골칫덩이이기는 했지만, 블레셋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홀로 싸운 삼손, 함께 싸워 주신 하나님, 부르짖는 삼손,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화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다. 엔학고레가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기막힌 현실이 마지막 사사 삼손의 시대가 시작된 이스라엘의 현주소였다.
나는?
-급하고 무모해 보이는 삼손의 분노와 사사로운 보복을 통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를 흔들어 놓을 틈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1~19절). 아내를 잃은 삼손은 장인의 궁색한 변명과 제안을 거절하고, 그에 대한 분노를 블레셋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들의 야비한 보복(6절)은 블레셋을 향한 삼손의 증오와 복수심을 더욱 자극한다. 그런데 블레셋과 공존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갈등하지도, 싸우지도 않고, 심지어 하나님께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주도하셔서 그들의 부정한 연합을 깨뜨리신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들의 구원자인 삼손을 대적의 손에 넘기는 굴욕을 보인다. 심지어 블레셋의 압제를 두둔하기까지 한다(9~13절). 가장 먼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 승리한(1:1~3) 유다 지파가 지금은 그 전의(戰意)는 온데간데없고, 오랜 압제에 체념한 듯 거짓 평화와 안전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삼손이 싸워야 할 대상은 블레셋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안에 내재된 집요하고 끈질긴 ‘노예근성’ 혹은 ‘사대주의’가 아닐까 싶다.
-여호와의 영으로 대승을 거둔 삼손의 노래에는 하나님은 없고 내가 했다는 자랑만 보인다(14~17절). 그는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갈증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 이 전쟁이 지도자 위에 지도자가 계신 거룩한 전쟁임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렇듯 보이는 대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있는 자만과 허영이 아닐까?
-대승을 거둔 삼손이 극심한 목마름으로 부르짖자, 그를 살리기 위해 샘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갈증을 통해 자기 한계를 깨닫게 된 삼손은 비로소 승리의 공을 하나님께 돌린다. ‘라맛레히’를 자랑하는 삼손에게 하나님은 ‘엔학고레’를 허락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고, 승리할 수도, 사명을 이룰 수도 없음을 깨우치신다. 큰 승리의 개가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오늘의 내가 없고 내일도 보장할 수 없다는 나의 고백이다.
*”엔학고레”가 필요한 시대다. 나는 특히 더온누리교회가 “엔학고레”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사 시대와 다름없는 이 시대 속에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나아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의 샘물이 터져 나오는 바로 그곳이 우리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삶의 거처가 어디든 그곳이 “엔학고레”가 되기를 바란다. “부르짖음”이 쇠퇴해 버린 시대다. 오히려 “부르짖음”이 더욱 간절하게 터져 나와야 할 시대이기도 하다. 사회 전반에 드러나는 분열과 혼란, 직접 체감하는 기후 위기, 양극화의 그림자, 교회 공동체의 쇠락 등 지금이 부르짖어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스스로 입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부르짖음”이 회복되기를 갈망한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당하면서 도리어 블레셋화되어 버린 나머지,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었던 삼손조차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블레셋 여인과 자연스레 결혼할 정도였다. 이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하여 마음이 고통스럽다.
*한편 “부르짖음”을 잊어버렸을 때 “부르짖음”을 일깨워 주셔서 구원을 갈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삼손을 살렸듯이, 하나님의 제한 없는 사랑의 은혜가 우리로 “부르짖음”을 토해 내게 하셔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
*화려한 승리의 장소인 라맛레히보다 부르짖어 응답받은 샘인 엔학고레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화려한 승리의 라맛레히에 취해, 부르짖을 때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엔학고레”를 간과한다면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삶을 “엔학고레”에서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라맛레히처럼 홀로 자기 힘에 취해 살았겠지만, 엔학고레를 통해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비로소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섬길 수 있었다. 그에게 엔학고레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는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삼손의 제멋대로인 삶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 [사사기 14:1-20]
삼손이 블레셋의 딤나에 사는 한 여인과 결혼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자란 삼손, 여호와의 영이 움직이시던(13:24-25) 삼손의 모습이 맞나 싶다. 참담한 것은 블레셋의 40년 통치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1. 삼손에게서 보이는 이스라엘의 상태(1-4절)
삼손의 부모는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는 아들의 말에 낙담한다(2-3절). 삼손은 부모의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조른다. 그러고서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 ‘상견례’를 한다.
딤나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 한 마리가 달려들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세차게 내리덮치자 그는 아무런 도구 없이 맨손으로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어 죽인다. 하지만 이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다(5-6절). 삼손은 딤나의 여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7절).
시간이 지나 결혼식을 하기 위해 다시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자신이 찢어 죽인 사자의 주검에 벌 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었는데(8절), 삼손은 이를 떠먹는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도 가져다준다(9절).
*삼손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다. 하지만 삼손도 피 끓는 청춘이다. 이성에 대한 마음도 감출 수 없다. 문제는 블레셋 여인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하려는 이방 결혼을 부모님께 끝까지 고집한다. 당시 세계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도 부모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삼손은 사사로 부름받은 과정이 앞의 11명과 다르다. 그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을 때 세워졌지만, 삼손은 잉태되기도 전에 부모의 특별한 준비로 구별된 나실인으로 길러졌다. 그런데 실망스럽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따라 결정하고 움직였다. 나실인의 본분은 저버리고 정욕을 따라 행동한다. 딤나의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그 지역으로 들어가 7일 동안 잔치까지 벌이며 그 지역 청년들과 어울렸다. 사사로서의 구별된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 자랐지만, 경건의 모양은 몸에 배어 있지 않다. 나실인으로서의 가치와 철학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기분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사사였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함께 연대하지 않았고, 그저 홀로 기분 따라 움직였다. 이런 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라니…
*그런데 40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는 온데간데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별됨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결정하고 추구한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과연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 떼쓰며 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블레셋 여인을 좋아해서 딤나까지 가서 결혼하는 삼손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유구무언이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나나…
2. 그런데…(4절)
그런데 성경은 삼손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한 것”이라고 했다. 이 구절만 본다면 삼손은 블레셋을 치기 위해 결혼식을 가장하여 블레셋 땅 딤나로 내려간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삼손은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럭비공처럼 톡톡 튀는 삼손의 삶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진행하셨다는 의미다. 만약 삼손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결혼식을 이용해 틈을 만들었다면, 아내로 맞이한 여인을 이스라엘의 가족으로 데리고 왔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옳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처럼 말이다. 이런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삼손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자신과 결혼한 여인은 “…그의 친구에게”(20절) 주어지고 만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삼손의 됨됨이는 결코 경건하지 않다. *그렇다면 삼손의 이런 막무가내 됨됨이를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사조차 이처럼 엉망인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구원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삼손이 엉망진창인 삶을 살고 있어도, 그러한 삶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거나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지만 흔들림 없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또 삼손은 철없이 딤나 여인과 결혼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실 것이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작당에 이리저리 몰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에게 배신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블레셋에게 보복하신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이스라엘의 블레셋화, 그 상징과도 같은 삼손의 이방 결혼이라는 제멋대로의 계획을 오히려 블레셋을 깨뜨리시는 “틈”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제멋대로인 삼손의 럭비공 같은 삶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나는?
-삼손은 사사로서의 첫 사역을 딤나의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결혼식에서 낸 수수께끼 때문에 잔치 내내 아내와 갈등하다가, 마침내 아내의 배신으로 내기에 지고 만다. 그는 사사로서, 그리고 나실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연달아 벌이고 있다.
-이방 블레셋 여인에게 사로잡힌 그는 자신이 언약 백성이라는 것도, 자신의 사명도, 이방인과의 통혼이 결국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수용하는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도 모두 잊은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눈에 좋은 대로(3, 7절)’ 행동하는 삼손은 ‘자기 소견(소욕)에 옳은 대로(21:25)’ 살아가는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 본분을 잊는 순간, 나도 이 세상에 쉽게 동화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자란 삼손,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살아간 삼손… 그런데 그 삶은 나실인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분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애굽에서 탈출했다.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으로 세워졌지만, 지금은 제멋대로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삼손이 포도원을 찾고, 사체를 만져서 꿀을 먹은 것은 ‘나실인’ 서약을 어기는 일이었다(5-9절). 그는 사자보다 강했지만, 꿀에는 약했다. 대적들은 물리쳤으나 이방 여인의 유혹은 이기지 못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꿀에 약한’ 삼손의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이방인처럼 살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삼손처럼 “제멋대로”다. 거룩하게 구별되는 데 마음을 쏟기보다, “내 마음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 더 심취한다. 삼손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런 제멋대로의 삶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사랑이 놀랍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자, 블레셋 사람들은 내기에 질까 두려워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답을 알아낸다. 블레셋의 기만적인 행동에 분노한 삼손은 ‘그 틈을 타서(4절)’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 죽인다. 그는 힘을 과시하려다가 아내를 잃고, 블레셋은 손해를 두려워하다가 동족을 잃는다. 죄를 더하는 관계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황당하고 어이없기는 나의 삶도 매한가지 아니겠나… 한량없는 은혜로 부름받아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제멋대로 살아가니, 삼손을 뭐라 할 수 없다. 삼손처럼 “틈”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황당하고 어이없는 “틈”을 놀라운 은혜로 메우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신다!
*삼손의 이야기는 그의 제멋대로인 삶을 감상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제멋대로의 “틈”을 “기묘하게(신비스럽게)” 메우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신 약속(13:5)을 이제 하나하나 이루어 가신다. 적의 여인을 사랑한 삼손, 그 삼손을 통해 적을 궤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제 앞으로 펼쳐질 삼손의 생애 한 장면 한 장면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각본과 연출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대 위의 그 누구도 그 기이한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4절). 하나님은 결국 신자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통제하고 경영하실 것이다. 신앙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담는 신비의 그릇을 마련하는 일이다.
1. 삼손에게서 보이는 이스라엘의 상태(1-4절)
삼손의 부모는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는 아들의 말에 낙담한다(2-3절). 삼손은 부모의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조른다. 그러고서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 ‘상견례’를 한다.
딤나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 한 마리가 달려들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세차게 내리덮치자 그는 아무런 도구 없이 맨손으로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어 죽인다. 하지만 이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다(5-6절). 삼손은 딤나의 여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7절).
시간이 지나 결혼식을 하기 위해 다시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자신이 찢어 죽인 사자의 주검에 벌 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었는데(8절), 삼손은 이를 떠먹는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도 가져다준다(9절).
*삼손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다. 하지만 삼손도 피 끓는 청춘이다. 이성에 대한 마음도 감출 수 없다. 문제는 블레셋 여인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하려는 이방 결혼을 부모님께 끝까지 고집한다. 당시 세계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도 부모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삼손은 사사로 부름받은 과정이 앞의 11명과 다르다. 그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을 때 세워졌지만, 삼손은 잉태되기도 전에 부모의 특별한 준비로 구별된 나실인으로 길러졌다. 그런데 실망스럽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따라 결정하고 움직였다. 나실인의 본분은 저버리고 정욕을 따라 행동한다. 딤나의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그 지역으로 들어가 7일 동안 잔치까지 벌이며 그 지역 청년들과 어울렸다. 사사로서의 구별된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 자랐지만, 경건의 모양은 몸에 배어 있지 않다. 나실인으로서의 가치와 철학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기분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사사였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함께 연대하지 않았고, 그저 홀로 기분 따라 움직였다. 이런 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라니…
*그런데 40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는 온데간데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별됨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결정하고 추구한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과연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 떼쓰며 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블레셋 여인을 좋아해서 딤나까지 가서 결혼하는 삼손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유구무언이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나나…
2. 그런데…(4절)
그런데 성경은 삼손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한 것”이라고 했다. 이 구절만 본다면 삼손은 블레셋을 치기 위해 결혼식을 가장하여 블레셋 땅 딤나로 내려간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삼손은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럭비공처럼 톡톡 튀는 삼손의 삶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진행하셨다는 의미다. 만약 삼손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결혼식을 이용해 틈을 만들었다면, 아내로 맞이한 여인을 이스라엘의 가족으로 데리고 왔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옳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처럼 말이다. 이런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삼손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자신과 결혼한 여인은 “…그의 친구에게”(20절) 주어지고 만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삼손의 됨됨이는 결코 경건하지 않다. *그렇다면 삼손의 이런 막무가내 됨됨이를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사조차 이처럼 엉망인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구원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삼손이 엉망진창인 삶을 살고 있어도, 그러한 삶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거나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지만 흔들림 없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또 삼손은 철없이 딤나 여인과 결혼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실 것이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작당에 이리저리 몰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에게 배신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블레셋에게 보복하신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이스라엘의 블레셋화, 그 상징과도 같은 삼손의 이방 결혼이라는 제멋대로의 계획을 오히려 블레셋을 깨뜨리시는 “틈”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제멋대로인 삼손의 럭비공 같은 삶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나는?
-삼손은 사사로서의 첫 사역을 딤나의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결혼식에서 낸 수수께끼 때문에 잔치 내내 아내와 갈등하다가, 마침내 아내의 배신으로 내기에 지고 만다. 그는 사사로서, 그리고 나실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연달아 벌이고 있다.
-이방 블레셋 여인에게 사로잡힌 그는 자신이 언약 백성이라는 것도, 자신의 사명도, 이방인과의 통혼이 결국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수용하는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도 모두 잊은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눈에 좋은 대로(3, 7절)’ 행동하는 삼손은 ‘자기 소견(소욕)에 옳은 대로(21:25)’ 살아가는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 본분을 잊는 순간, 나도 이 세상에 쉽게 동화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자란 삼손,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살아간 삼손… 그런데 그 삶은 나실인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분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애굽에서 탈출했다.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으로 세워졌지만, 지금은 제멋대로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삼손이 포도원을 찾고, 사체를 만져서 꿀을 먹은 것은 ‘나실인’ 서약을 어기는 일이었다(5-9절). 그는 사자보다 강했지만, 꿀에는 약했다. 대적들은 물리쳤으나 이방 여인의 유혹은 이기지 못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꿀에 약한’ 삼손의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이방인처럼 살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삼손처럼 “제멋대로”다. 거룩하게 구별되는 데 마음을 쏟기보다, “내 마음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 더 심취한다. 삼손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런 제멋대로의 삶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사랑이 놀랍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자, 블레셋 사람들은 내기에 질까 두려워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답을 알아낸다. 블레셋의 기만적인 행동에 분노한 삼손은 ‘그 틈을 타서(4절)’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 죽인다. 그는 힘을 과시하려다가 아내를 잃고, 블레셋은 손해를 두려워하다가 동족을 잃는다. 죄를 더하는 관계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황당하고 어이없기는 나의 삶도 매한가지 아니겠나… 한량없는 은혜로 부름받아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제멋대로 살아가니, 삼손을 뭐라 할 수 없다. 삼손처럼 “틈”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황당하고 어이없는 “틈”을 놀라운 은혜로 메우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신다!
*삼손의 이야기는 그의 제멋대로인 삶을 감상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제멋대로의 “틈”을 “기묘하게(신비스럽게)” 메우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신 약속(13:5)을 이제 하나하나 이루어 가신다. 적의 여인을 사랑한 삼손, 그 삼손을 통해 적을 궤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제 앞으로 펼쳐질 삼손의 생애 한 장면 한 장면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각본과 연출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대 위의 그 누구도 그 기이한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4절). 하나님은 결국 신자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통제하고 경영하실 것이다. 신앙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담는 신비의 그릇을 마련하는 일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삼손의 출생과 기묘하신 하나님 [사사기 13:15-25]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음식을 준비하지만, 사자는 이를 거절한다. 마노아는 또 그의 이름을 묻지만, 사자는 ‘어찌하여’ 이름을 묻느냐며 ‘기묘자’라고 대답한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가 준비한 음식은 거절하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번제물을 드리자,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고 여호와의 사자는 그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다. 이를 본 부부는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깨닫는다. 마노아는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아내는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렇게 삼손을 출산하고,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의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였다.
1. 기묘자(신비로우신) 하나님
고대인들은 인간이 신의 이름을 알면 그 신을 자유자재로 부르면서 그가 가진 힘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당시 가나안 종교들에서 흔한 사고방식이었다. 블레셋의 40년 압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이방인과 다름없이 변모시켜 놓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묘자”라고 표현한다. 이는 실제 이름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속성”을 표현한 것이 틀림없다. “비밀, 신비”라는 뜻을 가진 기묘자(필리)는 “비밀스럽고 놀라운 것”을 뜻한다.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쓰인 것으로,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사 9:6). 결국 하나님의 이름은 알려 주지 않았지만, 인간의 이해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지금 일어나는 일을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신다.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준비하시는 신비로운 하나님이시다. 당장 상황을 반전시킬 기적을 행하시거나 인물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잉태될 아기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어 반응할 수 없지만, 구원의 계획을 착착 진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인간의 이해 능력으로 모두 받아들이기가 벅찬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묘자”이시다. 인간의 상식과 이해를 넘어서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렇다. 인간의 상식과 이해로는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위대한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은 마노아의 신앙보다 그의 아내의 신앙을 도드라지게, 자세히 묘사한다. 자신이 구하여 만난 이가 하나님의 천사였음을 깨달은 마노아는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하지만, 정작 그의 아내는 “만약 하나님께서 죽이려 하셨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더욱 담대해진다(23절). 마노아보다 아내가 훨씬 성숙하다.
2. 아이의 이름은 삼손(빛나는!)
삼손이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태양”이다. 직역하면 “빛나는”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 수태고지까지 했지만, 이름을 어떻게 지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름은 마노아가 지었을 것이다. 아마도 제단의 제물에서 불꽃이 일어나고 그 불꽃을 타고 올라간 천사의 모습을 본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천사가 알려 준 이 아이의 사명, 곧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5절)”는 말씀을 기억하고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블레셋의 압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소망의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이름의 의미가 “작은 태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죄의 영향 아래 묶여 있고 이로 인해 블레셋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린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마노아 부부는 소라 땅에 살았다(2절). 삼손은 구원의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도록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으면서 잘 자랐다(새번역 24절).”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다”라는 말은 “휘젓다, 소란케 하다”라는 뜻이다. 삼손이 자라면서 블레셋의 압제에 눌려 굳어진 이스라엘의 마음을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도록 소란케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겉으로 보기에 평탄한(?) 삶을 흔드는 격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죄에 무감각해진 마음을 흔들고,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깨뜨려 생동하는 말씀을 집어넣으신다. “여호와의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구원의 여명을 비추실 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편안하다고 여기는 일상에서 마음이 격동되고 삶이 소란해지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그 “소동”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나아가야 한다.
나는?
-여호와의 사자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묘’라고 밝힌다. 이를 통해 이제부터 일어날 모든 일(이적, 출생, 구원)이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을 예고하신다(15~18절). 그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기대하게 하신다. 믿음은 모든 것이 다 해명되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23절). 신비와 여백을 품고 신뢰 속에서 주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마노아가 드린 제물을 제단에서 나온 불로 태우는 이적을 통해 자신이 ‘기묘(18절)’임을 증명하시고, 그분이 주신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19~23절). 이를 통해 흔들리는 그의 믿음을 세워 주신다. 그러니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자기 백성을 돌이키고 새롭게 하실 그분의 지혜를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결심을 아무도 꺾지 못할 것이다.
-약속대로 아들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움직이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라게 하신다(24~25절). 이름(작은 태양, 빛나는)처럼, 태어날 아이는 암울한 한 가정과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펼칠 ‘희망의 빛’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으로 이 땅에 오신 ‘참 빛’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흑암과 사망 가운데 살던 우리도 생명의 빛으로 나아와 참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이 은혜를 망각한 채 옛 삶을 넘나들기도 하지만, 오늘도 말씀 앞에 이렇게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것도 이 자비로운 은총의 빛 때문이다.
-아이에게 ‘복을’ 더하셨다는 것은 이 아이의 인생 주도권이 부모나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한 삼손은 부모와 이스라엘의 기대 속에서 성장한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주의 복과 영이 임하여, 그들을 통해 교회와 세상에 이루실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임인 아내가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고, 그 아이가 나실인으로 부름받았다고 했는데도 마노아는 그렇게 말한 이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몰라본다. 그만큼 하나님 신앙이 약화된 시대였음을 보여 준다. 마노아는 그를 대접하고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 드리고 싶은 좋은 마음으로 그의 정체를 알려고 했으나 좀처럼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어둡고 어두운 시대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가고 다시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지 않자, 비로소 마노아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기드온 시대가 떠오른다. 하지만 마노아의 아내는 침착한 말로 남편을 안정시킨다. 죽이실 것이었다면 번제와 소제도 받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 모든 일을 보이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한다. 마노아의 아내는 어둠의 시대에 ‘작은 태양’ 삼손을 낳을 만한 믿음의 여인이었지 싶다.
1. 기묘자(신비로우신) 하나님
고대인들은 인간이 신의 이름을 알면 그 신을 자유자재로 부르면서 그가 가진 힘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당시 가나안 종교들에서 흔한 사고방식이었다. 블레셋의 40년 압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이방인과 다름없이 변모시켜 놓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묘자”라고 표현한다. 이는 실제 이름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속성”을 표현한 것이 틀림없다. “비밀, 신비”라는 뜻을 가진 기묘자(필리)는 “비밀스럽고 놀라운 것”을 뜻한다.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쓰인 것으로,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사 9:6). 결국 하나님의 이름은 알려 주지 않았지만, 인간의 이해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지금 일어나는 일을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신다.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준비하시는 신비로운 하나님이시다. 당장 상황을 반전시킬 기적을 행하시거나 인물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잉태될 아기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어 반응할 수 없지만, 구원의 계획을 착착 진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인간의 이해 능력으로 모두 받아들이기가 벅찬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묘자”이시다. 인간의 상식과 이해를 넘어서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렇다. 인간의 상식과 이해로는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위대한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은 마노아의 신앙보다 그의 아내의 신앙을 도드라지게, 자세히 묘사한다. 자신이 구하여 만난 이가 하나님의 천사였음을 깨달은 마노아는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하지만, 정작 그의 아내는 “만약 하나님께서 죽이려 하셨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더욱 담대해진다(23절). 마노아보다 아내가 훨씬 성숙하다.
2. 아이의 이름은 삼손(빛나는!)
삼손이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태양”이다. 직역하면 “빛나는”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 수태고지까지 했지만, 이름을 어떻게 지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름은 마노아가 지었을 것이다. 아마도 제단의 제물에서 불꽃이 일어나고 그 불꽃을 타고 올라간 천사의 모습을 본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천사가 알려 준 이 아이의 사명, 곧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5절)”는 말씀을 기억하고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블레셋의 압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소망의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이름의 의미가 “작은 태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죄의 영향 아래 묶여 있고 이로 인해 블레셋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린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마노아 부부는 소라 땅에 살았다(2절). 삼손은 구원의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도록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으면서 잘 자랐다(새번역 24절).”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다”라는 말은 “휘젓다, 소란케 하다”라는 뜻이다. 삼손이 자라면서 블레셋의 압제에 눌려 굳어진 이스라엘의 마음을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도록 소란케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겉으로 보기에 평탄한(?) 삶을 흔드는 격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죄에 무감각해진 마음을 흔들고,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깨뜨려 생동하는 말씀을 집어넣으신다. “여호와의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구원의 여명을 비추실 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편안하다고 여기는 일상에서 마음이 격동되고 삶이 소란해지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그 “소동”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나아가야 한다.
나는?
-여호와의 사자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묘’라고 밝힌다. 이를 통해 이제부터 일어날 모든 일(이적, 출생, 구원)이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을 예고하신다(15~18절). 그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기대하게 하신다. 믿음은 모든 것이 다 해명되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23절). 신비와 여백을 품고 신뢰 속에서 주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마노아가 드린 제물을 제단에서 나온 불로 태우는 이적을 통해 자신이 ‘기묘(18절)’임을 증명하시고, 그분이 주신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19~23절). 이를 통해 흔들리는 그의 믿음을 세워 주신다. 그러니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자기 백성을 돌이키고 새롭게 하실 그분의 지혜를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결심을 아무도 꺾지 못할 것이다.
-약속대로 아들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움직이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라게 하신다(24~25절). 이름(작은 태양, 빛나는)처럼, 태어날 아이는 암울한 한 가정과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펼칠 ‘희망의 빛’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으로 이 땅에 오신 ‘참 빛’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흑암과 사망 가운데 살던 우리도 생명의 빛으로 나아와 참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이 은혜를 망각한 채 옛 삶을 넘나들기도 하지만, 오늘도 말씀 앞에 이렇게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것도 이 자비로운 은총의 빛 때문이다.
-아이에게 ‘복을’ 더하셨다는 것은 이 아이의 인생 주도권이 부모나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한 삼손은 부모와 이스라엘의 기대 속에서 성장한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주의 복과 영이 임하여, 그들을 통해 교회와 세상에 이루실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임인 아내가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고, 그 아이가 나실인으로 부름받았다고 했는데도 마노아는 그렇게 말한 이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몰라본다. 그만큼 하나님 신앙이 약화된 시대였음을 보여 준다. 마노아는 그를 대접하고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 드리고 싶은 좋은 마음으로 그의 정체를 알려고 했으나 좀처럼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어둡고 어두운 시대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가고 다시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지 않자, 비로소 마노아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기드온 시대가 떠오른다. 하지만 마노아의 아내는 침착한 말로 남편을 안정시킨다. 죽이실 것이었다면 번제와 소제도 받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 모든 일을 보이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한다. 마노아의 아내는 어둠의 시대에 ‘작은 태양’ 삼손을 낳을 만한 믿음의 여인이었지 싶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부르짖음 없는 절망 속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사사기 13:1-14]
13-16장까지는 삼손 이야기이다. 8번째 사사 입다에 이어 입산, 엘론, 압돈이 다스린 31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몹시 상하셨다. 무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넘기셨다. 사사기의 압제 기간 중 가장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고통을 당했다.
삼손의 이야기에는 “부르짖음”이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지조차 않을 정도로 상태가 약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고질병이다. 입다와 입산, 엘론과 압돈이 사사로 통치하던 31년간의 평화는 속으로 하나님을 떠날 대로 떠난 “썩은 평화”였다. 사사들부터 많은 부인을 두고, 사치를 누리며, 이방 결혼에 익숙했던 이스라엘에는 소망이 없었다. 블레셋이 압제하기 전에 이미 평화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 ‘죄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고 있었다.
죄의 지배를 받으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거룩함은 사라졌고,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찾을 줄 몰랐다. 죄에 대한 내성이 가져온 심각한 위기였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위기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을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직 잉태되지도 않은 이를 사사로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1. 마노아와 아내에게서 삼손이 태어날 것(1~14절)
1절은 삼손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다시 악을 행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년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 40년은 한 세대를 꽉 채운 기간으로, 다른 사사 시대에 비해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런데 삼손의 프롤로그가 다른 사사들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로 고통받는 중에도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만 않으면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며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블레셋에 순종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게 된 것이다.
2~14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마노아의 아내에게 삼손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는 부분으로, 삼손 서사의 서론이다. 사사기에서는 기드온부터 사사에 대한 인물 설명이 길어지는데, 그중 삼손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중요한 특징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먼저 사사를 선택하신다는 점이다. 이 단락은 ‘마노아’가 삼손 서사의 시작인 13:2에 등장하고 16:31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인클루지오 구조를 보여 준다.
삼손의 고향은 단 지파의 소라 땅으로, 블레셋 지역 바로 옆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마노아의 아내’였다. 그녀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2절). “임신하지 못하는”이라는 단어는 “임신할 수 없어서, 임신하지 않아서”로도 번역된다. 이는 블레셋이 지배했던 40년의 삶이 얼마나 소망 없는 절망의 시간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불임의 원인이 몸에 있을 수도 있고, 외부 환경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소망 없는 절망적인 사회였다. 3포 세대를 지나 7포 세대라고 스스로 칭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장래의 꿈을 품고 현재를 살아 내기가 너무도 벅찬 환경이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포기하는 세대라는 의미다. 마노아의 때가 그런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른바 수태고지(출생과 사명을 고지함)를 행한다(3-4절). 놀란 아내는 마노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마노아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했다(8절).” 놀랍게도 그의 기도는 이 수태고지의 진위를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고지받아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지 알려 달라는 기도였다(8절). 주님께서는 마노아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셔서 다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주셨다(9-11절). 마노아는 동일하게 “지난번에 한 그 말이 이루어질 때에 그 아이가 지켜야 할 규칙은 무엇이며, 또 그 아이가 할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12절).
마노아와 그 아내의 태도가 놀랍다. 하나님의 사자의 고지를 믿는 것을 전제로 행동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아들을 잉태하여 낳게 될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두지 않고,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천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언행이다.
2.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잉태할 마노아의 아내에게 어떻게 출산을 준비하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4-5절). 임신 기간에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고 한다. 아이를 잉태한 임산부라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 아닐까? 평소 음주와 흡연을 즐겼더라도 적어도 임신 중에는 삼가려고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출산 후에는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신다. 분명히 마노아의 아내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런데 아내는 이를 마노아에게 전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을 쏘옥 뺀다(7절). 그리고 마노아는 임신 중에 어떻게 준비할지는 알겠는데, 출산한 이후에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여호와의 사자에게 물어보겠다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8절).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주셔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셨고,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묻는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 중에 지키라고 한 것을 “잘 지키고”, 태어난 아이도 “마노아의 아내에게 일러 준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중요한 것은 마노아가 하나님께 재차 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 자녀를 주님께 물어 가며 양육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꼭 기억해야 할 가치이다.
나는?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완전히 메마른 것은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이름 모를 민초들이 분명 존재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들은 하나님을 구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어도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늘 존재하는 법이다.
*이전보다 더 길어진 압제 기간(40년)은 이스라엘의 패역과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1절). 죄악에 언제까지나 눈감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도 무탈한 죄나 역사는 없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묵인이나 방관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불임의 태를 여시듯,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리라 약속하신다(2~5절). 마노아 아내의 불임은 미래도 희망도 없고, 제 힘으로는 대적의 압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암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대변한다. 나아가 ‘삼손의 출생’은 압제받던 이스라엘의 미래를 여는 구원의 시작을 예고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시간에 희망의 미래를 열어 주신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소망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기댈 것도 오로지 이스라엘을 배반과 망각에서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약속이 아닐까?
*사자의 고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를 묻는 믿음은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절)”
*태어날 이 아이를 위해 독주와 포도주와 모든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게 함으로써 아이가 ‘태중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늘 기억하게 하신다. 앞으로 살게 될 가나안의 우상 숭배 문화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선민으로 자부하기 전에 먼저 성민으로 자라 가기를 바라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와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힘 있는 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세상을 닮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바라신다.
*마노아는 아내를 통해 아이의 출생과 사명을 들었지만, 직접 들려 달라고 구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노아의 열정이 새삼 그립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일방적인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면서도, 재차 묻는 자녀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놀랍다.
*더구나 블레셋에게 40년간 압제를 받으면서도 이것이 압제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준비하심이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다.
*하지만 본문의 안타까운 점은, 이제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를 압제로 여기지 않을 만큼(15:11) ‘가나안화’되어 더 이상 ‘부르짖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할지 잊었는지도 모른다. 은혜에 대한 망각, 가나안이 주는 풍요와 오랜 압제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영적 감수성’을 무디게 하고, 거듭 악을 자행할 만큼 영적인 만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삼손의 이야기에는 “부르짖음”이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지조차 않을 정도로 상태가 약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고질병이다. 입다와 입산, 엘론과 압돈이 사사로 통치하던 31년간의 평화는 속으로 하나님을 떠날 대로 떠난 “썩은 평화”였다. 사사들부터 많은 부인을 두고, 사치를 누리며, 이방 결혼에 익숙했던 이스라엘에는 소망이 없었다. 블레셋이 압제하기 전에 이미 평화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 ‘죄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고 있었다.
죄의 지배를 받으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거룩함은 사라졌고,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찾을 줄 몰랐다. 죄에 대한 내성이 가져온 심각한 위기였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위기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을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직 잉태되지도 않은 이를 사사로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1. 마노아와 아내에게서 삼손이 태어날 것(1~14절)
1절은 삼손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다시 악을 행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년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 40년은 한 세대를 꽉 채운 기간으로, 다른 사사 시대에 비해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런데 삼손의 프롤로그가 다른 사사들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로 고통받는 중에도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만 않으면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며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블레셋에 순종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게 된 것이다.
2~14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마노아의 아내에게 삼손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는 부분으로, 삼손 서사의 서론이다. 사사기에서는 기드온부터 사사에 대한 인물 설명이 길어지는데, 그중 삼손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중요한 특징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먼저 사사를 선택하신다는 점이다. 이 단락은 ‘마노아’가 삼손 서사의 시작인 13:2에 등장하고 16:31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인클루지오 구조를 보여 준다.
삼손의 고향은 단 지파의 소라 땅으로, 블레셋 지역 바로 옆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마노아의 아내’였다. 그녀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2절). “임신하지 못하는”이라는 단어는 “임신할 수 없어서, 임신하지 않아서”로도 번역된다. 이는 블레셋이 지배했던 40년의 삶이 얼마나 소망 없는 절망의 시간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불임의 원인이 몸에 있을 수도 있고, 외부 환경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소망 없는 절망적인 사회였다. 3포 세대를 지나 7포 세대라고 스스로 칭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장래의 꿈을 품고 현재를 살아 내기가 너무도 벅찬 환경이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포기하는 세대라는 의미다. 마노아의 때가 그런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른바 수태고지(출생과 사명을 고지함)를 행한다(3-4절). 놀란 아내는 마노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마노아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했다(8절).” 놀랍게도 그의 기도는 이 수태고지의 진위를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고지받아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지 알려 달라는 기도였다(8절). 주님께서는 마노아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셔서 다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주셨다(9-11절). 마노아는 동일하게 “지난번에 한 그 말이 이루어질 때에 그 아이가 지켜야 할 규칙은 무엇이며, 또 그 아이가 할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12절).
마노아와 그 아내의 태도가 놀랍다. 하나님의 사자의 고지를 믿는 것을 전제로 행동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아들을 잉태하여 낳게 될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두지 않고,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천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언행이다.
2.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잉태할 마노아의 아내에게 어떻게 출산을 준비하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4-5절). 임신 기간에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고 한다. 아이를 잉태한 임산부라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 아닐까? 평소 음주와 흡연을 즐겼더라도 적어도 임신 중에는 삼가려고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출산 후에는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신다. 분명히 마노아의 아내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런데 아내는 이를 마노아에게 전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을 쏘옥 뺀다(7절). 그리고 마노아는 임신 중에 어떻게 준비할지는 알겠는데, 출산한 이후에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여호와의 사자에게 물어보겠다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8절).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주셔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셨고,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묻는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 중에 지키라고 한 것을 “잘 지키고”, 태어난 아이도 “마노아의 아내에게 일러 준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중요한 것은 마노아가 하나님께 재차 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 자녀를 주님께 물어 가며 양육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꼭 기억해야 할 가치이다.
나는?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40년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완전히 메마른 것은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이름 모를 민초들이 분명 존재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들은 하나님을 구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어도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늘 존재하는 법이다.
*이전보다 더 길어진 압제 기간(40년)은 이스라엘의 패역과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1절). 죄악에 언제까지나 눈감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도 무탈한 죄나 역사는 없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묵인이나 방관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불임의 태를 여시듯,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리라 약속하신다(2~5절). 마노아 아내의 불임은 미래도 희망도 없고, 제 힘으로는 대적의 압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암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대변한다. 나아가 ‘삼손의 출생’은 압제받던 이스라엘의 미래를 여는 구원의 시작을 예고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시간에 희망의 미래를 열어 주신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소망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기댈 것도 오로지 이스라엘을 배반과 망각에서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약속이 아닐까?
*사자의 고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를 묻는 믿음은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절)”
*태어날 이 아이를 위해 독주와 포도주와 모든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게 함으로써 아이가 ‘태중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늘 기억하게 하신다. 앞으로 살게 될 가나안의 우상 숭배 문화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선민으로 자부하기 전에 먼저 성민으로 자라 가기를 바라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와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힘 있는 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세상을 닮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바라신다.
*마노아는 아내를 통해 아이의 출생과 사명을 들었지만, 직접 들려 달라고 구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노아의 열정이 새삼 그립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일방적인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면서도, 재차 묻는 자녀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놀랍다.
*더구나 블레셋에게 40년간 압제를 받으면서도 이것이 압제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준비하심이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다.
*하지만 본문의 안타까운 점은, 이제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를 압제로 여기지 않을 만큼(15:11) ‘가나안화’되어 더 이상 ‘부르짖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할지 잊었는지도 모른다. 은혜에 대한 망각, 가나안이 주는 풍요와 오랜 압제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영적 감수성’을 무디게 하고, 거듭 악을 자행할 만큼 영적인 만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에브라임의 교만과 입다의 내전 그리고 불안한 평화 [사사기 12:1-15]
암몬과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동족과의 전쟁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또다시 교만하게 시기와 질투를 부린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억지를 부리며 요단강을 건너와 협박했다. “…. 너는 왜 암몬 자손을 치러 건너갈 때에 우리를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을 같이 불태워 버리겠다(새번역_1절).” 이 황당한 작태 앞에 입다는 단호하게 반응한다. 암몬과의 싸움을 준비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은 점(2절)을 지적하고, 자신과 길르앗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이겼는데 어찌하여 전리품을 나누자고 하느냐고 반문한다(3절).
말로만 반박하지 않고, 위협하러 올라온 그들의 모습을 명분 삼아 길르앗 사람들과 함께 에브라임을 무찔러 버렸다. 평소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고 무시당했던(4절) 울분까지 터져서 파죽지세로 에브라임을 평정해 버렸다.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건너려는 자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하게 하여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4만 2천 명이나 되었다(6절). 에브라임 지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은 길르앗의 입다 이후 베들레헴의 입산과 스불론의 엘론, 비라돈 사람 압돈이 차례로 뒤를 이어 사사가 되었다.
1. 에브라임 지파의 오만함(1절)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 전에 온 지파에 공문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었다(2절). 하지만 에브라임 지파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다가 뜻밖의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의 사사로 우뚝 서자 시기심이 발동했다. 이전에 기드온에게도 에브라임은 “네가 전쟁하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8:1-2)”라고 윽박질렀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을 치켜세워 분노를 누그러뜨렸지만, 입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매우 잘 꿰뚫고 있었기에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입다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파병도 하지 않았으면서 전리품을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1절)”라고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더구나 입다는 자신의 딸을 인신 제사로 바친 상황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동족들 앞에서, 더구나 입다의 잘못된 서원에 따른 비극에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심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에브라임 지파가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며 부린 오만한 추태에 대하여, 입다는 “여호와께서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셨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에야) 내게(이곳에)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며 분노한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내부의 갈등이 시작된다.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후,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서 자신들을 소외시킨 입다와 그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했다. 딸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발언(불)을 하며,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입다의 지도력을 위협한다. 암몬이 ‘땅’을 탐내어 공격한 것이라면, 에브라임은 ‘권력’에 눈이 멀어 질시하고 시비를 건 것이다. 시기가 죄로 자라나 화를 불러왔다.
2. 입다의 결행(2-7절)
입다는 기드온과 달랐다. 그는 “큰 용사(힘의 용사)”였다. 기드온처럼 상대를 치켜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하며 길르앗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길르앗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평소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며 무시당했던 울분을 더해 싸워 그들을 무찔러 버렸다.
그리고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유일한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선점하여, 강을 건너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특유의 발음을 확인해 가려내고 그 자리에서 처형해 버린다. 그 수가 4만 2천 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가장 기름진 땅을 분배받고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에브라임 지파는 괴멸되다시피 했다. 이 모든 것이 “우월감에서 오는 교만과 욕심에 눈이 먼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입다는 에브라임의 항의와 위협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주도권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2~4절).
지혜롭게 대응한 기드온의 처신(8:2)이나, 일전에 평화롭게 해결하려던 협상가의 면모(11:12)와는 다른 모습이다. ‘용사’의 위용만 있을 뿐 ‘사사’의 위엄은 없다. 큰 용사인 그는 결국 인간이 세운 지도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퇴장한다. 그의 시대는 ‘짧았고’, ‘샬롬’도 없었다. 입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탁월하지만 교만하여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기보다 부족하나 겸손하여 지혜로운 신자가 되기를 더 원하심을 깨닫게 된다.
한편 과거의 영광(지위)에 취해 권력을 행사하는 에브라임 지파는 ‘본래 도망자였다’라는 말로 길르앗 사람들을 조롱하고, 동족에게서 쫓겨났던(11:3) 입다를 자극한다. 이 같은 지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질시가 ‘십볼렛’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다(4~7절). 시기와 분노는 모두 자기 욕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태도다. 오늘 내 자랑과 자부심의 근거가 하나님과 공동체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는 영적 어둠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3. 평화가 이어지지만(8-15절)
사사 입다의 시대를 포함하여 31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지속된다. 암몬을 물리친 입다 이후 가나안 민족들의 침략이 없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 세워진 사사들의 면면은 참담하다. 입산은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기라도 한 듯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다. 그런데 특히 결혼에 있어 딸들을 “밖으로(개역개정)”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해 “밖에서(개역개정)” 여자 30명을 데려왔다고 기록한다(9절). 개역한글은 이 “밖에서(후츠)”를 “타국에서”로, 새번역은 “다른”으로 번역했다. 기본 의미는 “외부, 바깥쪽”이지만, 신 25:5와 삿 12:9에서는 “후츠”라는 단어를 친족이나 동족이 아닌 “타인”의 뜻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사사 입산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들과 결혼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고 있다.
엘론은 별다른 언급 없이 스불론 사람이라는 기록만 남긴다. 가장 연약한 지파 중에서 나온 사사였다. 그의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사사가 되었다. ‘비라돈’이라는 지명이 두 번 언급되는데, 이 지역은 아말렉 사람의 산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압돈은 아말렉 남자와 에브라임 지파 여인 사이에서 난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압돈도 이방 결혼의 열매였다. 압돈에게는 아들이 40명, 손자가 30명이나 있었고, 그들은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다.
*평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도리어 사사들은 연약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른 이방 민족의 왕들처럼 부인을 많이 두어 자녀를 많이 낳았다. 향락에 취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방 결혼을 서슴지 않았다. 솔로몬보다 훨씬 먼저 결혼을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으로 얻은 평화임에 틀림없다. 또한 사치도 문제다. 아들과 손자들에게 ‘어린 나귀’를 태울 정도로 재물이 넘쳐났다. 더구나 가나안 족속과의 사이에서 난 이도 사사가 되었다.
*지도자가 향락을 탐닉하고, 적극적인 이방 결혼을 통해 평화를 구걸하고, 아들들과 손자들에게까지 어린 나귀를 타게 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다는 인신 제사, 입산은 축첩과 이방 결혼, 압돈은 사치와 지나친 부를 지닌 사사였다. 이들이 다스린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 평화가 진정한 평안일까? 그저 일시적인 “평온”이 아닐까?
*기드온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입다는 인신 제사 서원을 이행하여 딸을 죽였으며, 입산은 여러 부인에게서 자녀 60명을 낳았다. 그리고 이 자녀들을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과 결혼시켰다. 솔로몬의 외교 정책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압돈은 사치와 부를 누린 부자였다. 이들이 사사로 활동한 31년 동안 이스라엘의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오히려 영적으로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추락하고 쇠망하고 있음에도 겉으로 평화롭다 하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평화롭기에 음욕대로 살고,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이방 민족들과의 결혼을 평화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당혹스럽다. 평화로운 시대인데, 불안한 평화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도자가 이렇게 형편없음에도 평화는 지속되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심으로 살아낼 때 누리는 평화와는 다른,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와 함께 요셉 지파에 속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자신의 이름으로 지파를 형성하지 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지파를 이루었다. 에브라임은 아우였지만 형보다 나았고,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지파였던 유다 지파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한 지파였다. 이 두 지파는 모두 요단강 양쪽의 비옥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다.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마땅히 실천해야 할 힘이 있는 명문 지파였다.
*하지만 같은 민족끼리 쉽게 딴지를 거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힘을 알기에 자세를 낮추어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입다는 달랐다. 에브라임의 딴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더 나아가 암몬 전투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였고 자신이 사사가 된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에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에브라임이 잘못 건드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정이 앞선 입다의 결행이 아쉽기만 하다. 같은 민족 안에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사사로 세움 받은 이들 가운데 평화로운 이스라엘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사사가 되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전으로 인해 그의 사사로서의 통치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입다의 분노를 보면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순간을 참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성급함에서 오는 나의 분노를 읽게 된다. 나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입다의 분노에 찬 내전은 아쉽기만 하다.
*입다를 묵상하면서 일상의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에브라임의 근거 없는 비방에 화가 났겠지만, 내전으로 비화되어 4만 2천 명의 장정을 죽인 것은 학살과 다름없다. 요단 나루터에서 지역 방언을 도구로 일일이 확인하며 처단한 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학살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잔인한 학살이 이어진다. 순간의 분노를 절제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참혹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사사 시대가 혼란의 시대였던 것은 확실하다. 말씀을 알아 가는 데 게을러 말씀을 멀리하고,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의 모습이나 입다의 모습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도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사사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말씀에 관심 없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데 게으른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기에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더구나 입다의 뒤를 이은 사사들은 반전을 만들지 못했다. 도리어 사사로서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삶이 혼탁해졌다.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이나,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사는 것이나, 이방 결혼을 통해 눈에 보이는 평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나… 말씀에서 떠난 삶이 어떤 것인지 그 예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사사들이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보여 주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세워 나가야 함에도, 말씀을 떠난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서 사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참담하다. 나의 사역의 자리가 이처럼 참담하게 되지 않도록 말씀 안에서 더욱 중심을 지켜야 하겠다!
*말씀에서 떠나 있지만 세상에 구현되는 평화, 겉으로는 평화이지만 이미 썩어 가는 소망 없는 평화여서 괴롭다. 썩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삶을 말씀으로 정비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안타깝다. 하기야 평화로울 때 자신을 돌아보기가 더 어렵다. 불안불안한 평화가 30여 년 동안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또다시 우상 숭배의 길로 미끄러질 것이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시대다. 분노가 가득한 세상이다. 겉으로는 평화로운데 말씀을 지키는 평화가 아니다. 불안한 평화가 사람들의 영적 무장마저 해제시켜 버린다.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뜻에 노골적으로 불순종하며 분명히 금하신 명령을 어기면서 “불안한 평화”를 이어 간다.
말로만 반박하지 않고, 위협하러 올라온 그들의 모습을 명분 삼아 길르앗 사람들과 함께 에브라임을 무찔러 버렸다. 평소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고 무시당했던(4절) 울분까지 터져서 파죽지세로 에브라임을 평정해 버렸다.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건너려는 자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하게 하여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4만 2천 명이나 되었다(6절). 에브라임 지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은 길르앗의 입다 이후 베들레헴의 입산과 스불론의 엘론, 비라돈 사람 압돈이 차례로 뒤를 이어 사사가 되었다.
1. 에브라임 지파의 오만함(1절)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 전에 온 지파에 공문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었다(2절). 하지만 에브라임 지파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다가 뜻밖의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의 사사로 우뚝 서자 시기심이 발동했다. 이전에 기드온에게도 에브라임은 “네가 전쟁하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8:1-2)”라고 윽박질렀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을 치켜세워 분노를 누그러뜨렸지만, 입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매우 잘 꿰뚫고 있었기에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입다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파병도 하지 않았으면서 전리품을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1절)”라고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더구나 입다는 자신의 딸을 인신 제사로 바친 상황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동족들 앞에서, 더구나 입다의 잘못된 서원에 따른 비극에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심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에브라임 지파가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며 부린 오만한 추태에 대하여, 입다는 “여호와께서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셨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에야) 내게(이곳에)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며 분노한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내부의 갈등이 시작된다.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후,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서 자신들을 소외시킨 입다와 그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했다. 딸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발언(불)을 하며,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입다의 지도력을 위협한다. 암몬이 ‘땅’을 탐내어 공격한 것이라면, 에브라임은 ‘권력’에 눈이 멀어 질시하고 시비를 건 것이다. 시기가 죄로 자라나 화를 불러왔다.
2. 입다의 결행(2-7절)
입다는 기드온과 달랐다. 그는 “큰 용사(힘의 용사)”였다. 기드온처럼 상대를 치켜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하며 길르앗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길르앗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평소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며 무시당했던 울분을 더해 싸워 그들을 무찔러 버렸다.
그리고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유일한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선점하여, 강을 건너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특유의 발음을 확인해 가려내고 그 자리에서 처형해 버린다. 그 수가 4만 2천 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가장 기름진 땅을 분배받고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에브라임 지파는 괴멸되다시피 했다. 이 모든 것이 “우월감에서 오는 교만과 욕심에 눈이 먼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입다는 에브라임의 항의와 위협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주도권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2~4절).
지혜롭게 대응한 기드온의 처신(8:2)이나, 일전에 평화롭게 해결하려던 협상가의 면모(11:12)와는 다른 모습이다. ‘용사’의 위용만 있을 뿐 ‘사사’의 위엄은 없다. 큰 용사인 그는 결국 인간이 세운 지도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퇴장한다. 그의 시대는 ‘짧았고’, ‘샬롬’도 없었다. 입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탁월하지만 교만하여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기보다 부족하나 겸손하여 지혜로운 신자가 되기를 더 원하심을 깨닫게 된다.
한편 과거의 영광(지위)에 취해 권력을 행사하는 에브라임 지파는 ‘본래 도망자였다’라는 말로 길르앗 사람들을 조롱하고, 동족에게서 쫓겨났던(11:3) 입다를 자극한다. 이 같은 지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질시가 ‘십볼렛’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다(4~7절). 시기와 분노는 모두 자기 욕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태도다. 오늘 내 자랑과 자부심의 근거가 하나님과 공동체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는 영적 어둠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3. 평화가 이어지지만(8-15절)
사사 입다의 시대를 포함하여 31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지속된다. 암몬을 물리친 입다 이후 가나안 민족들의 침략이 없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 세워진 사사들의 면면은 참담하다. 입산은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기라도 한 듯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다. 그런데 특히 결혼에 있어 딸들을 “밖으로(개역개정)”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해 “밖에서(개역개정)” 여자 30명을 데려왔다고 기록한다(9절). 개역한글은 이 “밖에서(후츠)”를 “타국에서”로, 새번역은 “다른”으로 번역했다. 기본 의미는 “외부, 바깥쪽”이지만, 신 25:5와 삿 12:9에서는 “후츠”라는 단어를 친족이나 동족이 아닌 “타인”의 뜻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사사 입산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들과 결혼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고 있다.
엘론은 별다른 언급 없이 스불론 사람이라는 기록만 남긴다. 가장 연약한 지파 중에서 나온 사사였다. 그의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사사가 되었다. ‘비라돈’이라는 지명이 두 번 언급되는데, 이 지역은 아말렉 사람의 산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압돈은 아말렉 남자와 에브라임 지파 여인 사이에서 난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압돈도 이방 결혼의 열매였다. 압돈에게는 아들이 40명, 손자가 30명이나 있었고, 그들은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다.
*평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도리어 사사들은 연약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른 이방 민족의 왕들처럼 부인을 많이 두어 자녀를 많이 낳았다. 향락에 취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방 결혼을 서슴지 않았다. 솔로몬보다 훨씬 먼저 결혼을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으로 얻은 평화임에 틀림없다. 또한 사치도 문제다. 아들과 손자들에게 ‘어린 나귀’를 태울 정도로 재물이 넘쳐났다. 더구나 가나안 족속과의 사이에서 난 이도 사사가 되었다.
*지도자가 향락을 탐닉하고, 적극적인 이방 결혼을 통해 평화를 구걸하고, 아들들과 손자들에게까지 어린 나귀를 타게 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다는 인신 제사, 입산은 축첩과 이방 결혼, 압돈은 사치와 지나친 부를 지닌 사사였다. 이들이 다스린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 평화가 진정한 평안일까? 그저 일시적인 “평온”이 아닐까?
*기드온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입다는 인신 제사 서원을 이행하여 딸을 죽였으며, 입산은 여러 부인에게서 자녀 60명을 낳았다. 그리고 이 자녀들을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과 결혼시켰다. 솔로몬의 외교 정책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압돈은 사치와 부를 누린 부자였다. 이들이 사사로 활동한 31년 동안 이스라엘의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오히려 영적으로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추락하고 쇠망하고 있음에도 겉으로 평화롭다 하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평화롭기에 음욕대로 살고,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이방 민족들과의 결혼을 평화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당혹스럽다. 평화로운 시대인데, 불안한 평화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도자가 이렇게 형편없음에도 평화는 지속되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심으로 살아낼 때 누리는 평화와는 다른,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와 함께 요셉 지파에 속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자신의 이름으로 지파를 형성하지 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지파를 이루었다. 에브라임은 아우였지만 형보다 나았고,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지파였던 유다 지파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한 지파였다. 이 두 지파는 모두 요단강 양쪽의 비옥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다.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마땅히 실천해야 할 힘이 있는 명문 지파였다.
*하지만 같은 민족끼리 쉽게 딴지를 거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힘을 알기에 자세를 낮추어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입다는 달랐다. 에브라임의 딴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더 나아가 암몬 전투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였고 자신이 사사가 된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에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에브라임이 잘못 건드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정이 앞선 입다의 결행이 아쉽기만 하다. 같은 민족 안에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사사로 세움 받은 이들 가운데 평화로운 이스라엘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사사가 되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전으로 인해 그의 사사로서의 통치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입다의 분노를 보면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순간을 참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성급함에서 오는 나의 분노를 읽게 된다. 나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입다의 분노에 찬 내전은 아쉽기만 하다.
*입다를 묵상하면서 일상의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에브라임의 근거 없는 비방에 화가 났겠지만, 내전으로 비화되어 4만 2천 명의 장정을 죽인 것은 학살과 다름없다. 요단 나루터에서 지역 방언을 도구로 일일이 확인하며 처단한 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학살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잔인한 학살이 이어진다. 순간의 분노를 절제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참혹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사사 시대가 혼란의 시대였던 것은 확실하다. 말씀을 알아 가는 데 게을러 말씀을 멀리하고,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의 모습이나 입다의 모습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도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사사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말씀에 관심 없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데 게으른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기에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더구나 입다의 뒤를 이은 사사들은 반전을 만들지 못했다. 도리어 사사로서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삶이 혼탁해졌다.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이나,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사는 것이나, 이방 결혼을 통해 눈에 보이는 평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나… 말씀에서 떠난 삶이 어떤 것인지 그 예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사사들이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보여 주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세워 나가야 함에도, 말씀을 떠난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서 사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참담하다. 나의 사역의 자리가 이처럼 참담하게 되지 않도록 말씀 안에서 더욱 중심을 지켜야 하겠다!
*말씀에서 떠나 있지만 세상에 구현되는 평화, 겉으로는 평화이지만 이미 썩어 가는 소망 없는 평화여서 괴롭다. 썩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삶을 말씀으로 정비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안타깝다. 하기야 평화로울 때 자신을 돌아보기가 더 어렵다. 불안불안한 평화가 30여 년 동안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또다시 우상 숭배의 길로 미끄러질 것이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시대다. 분노가 가득한 세상이다. 겉으로는 평화로운데 말씀을 지키는 평화가 아니다. 불안한 평화가 사람들의 영적 무장마저 해제시켜 버린다.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뜻에 노골적으로 불순종하며 분명히 금하신 명령을 어기면서 “불안한 평화”를 이어 간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_ 입다의 잘못된 서원과 비극적인 희생 [사사기 11:29-40]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암몬의 억지는 대단했다.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개전에 앞서 입다는 경솔한 약속을 한다. 아무리 승리에 대한 열망이 컸다 하더라도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인신 제사를 서원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라도 반드시 승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서원은 비극으로 치닫고 말았고, 성경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서원은 원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약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입다는 ‘어떤 것을 얻을 목적으로 하나님께 약속’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중요한 이유를 본문이 제시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혹시 하나님의 법과 정면으로 배치될 때에는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시급하고 절실하더라도 함부로 서원해서는 안 된다.
1. 하나님의 영이 임하다(29절)
입다는 암몬 왕의 억지를 노련하게 제압했다. 하지만 암몬 왕은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약탈이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출애굽 때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암몬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고 하셨기에 암몬 왕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내버려 두셨을 것이다. 그리고 치열했던 외교전을 마무리하자마자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 입다는 이미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역사에 정통했고,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판결(판단)하실 것을 선언하였기에(27절),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 그러나(30~31절)
그러나 입다는 쓸데없는 서원을 한다. 출정하면서 여호와의 영이 임했지만, 승리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있었다면 다시 하나님께 승리의 확신을 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입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입다는 300년 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 해박하게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인신 제사”를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하고 금지하시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상식적인 시각으로 암몬과 담판했던 그가, 승전하고 돌아올 때 가장 먼저 영접하러 나오는 이가 가족일 수 있다는 판단을 왜 하지 못했을까? 또 그는 ‘돕’ 땅에서 “큰 용사”로 맹위를 떨친 인물이다. 크고 작은 분쟁의 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누가 열렬히 환영하며 나올지 과연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당장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다가 결국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입다는 인신 제사라는 서원을 통해 여호와의 전쟁조차 그 의미를 퇴색시켰고, 하나님을 조건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분으로 만들고 말았다. 여호와의 전쟁에서 주인공은 원래 여호와이시고 인간은 보조자일 뿐이다. 그런데 입다는 서원을 통해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보조자로 전락시키고 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고, 서원을 통해 마치 보험이라도 드는 듯이 행동한 셈이다.
3. 일단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32~33절)
입다의 전쟁 장면은 매우 간략하게 묘사된다. 입다 이야기에서 전쟁 장면이 중심이 아니라, 다음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승패가 가장 중요할 텐데, 이 단락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여호와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소개하고, 입다가 차지한 성읍의 명단을 제시하는 것으로 전쟁 이야기를 갈음한다. 하지만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입다가 서원한 것에 대한 복잡한 문제가 도드라진다. 서원의 내용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4. 입다 딸의 죽음(34~40절)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딸이 가장 먼저 마중 나온다. 그녀는 입다의 무남독녀였다. 저자는 ‘나와서 영접하다’를 반복하여 이 딸이 입다의 서원을 충족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입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딸이 영문도 모른 채 즐겁게 소고 치고 춤추며 아버지를 마중 나온 것이다. 입다는 자기의 무남독녀가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한탄한다. 이 장면은 그의 서원이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왜 하필 네가 나왔느냐며 원망한다. 이 답답한 입다는 서원한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오롯이 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결국 그가 이 전쟁을 온전히 하나님의 전쟁으로 드리지 않았기에, 그의 승리도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자기 딸을 죽이는 비극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 아버지가 말한 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이인칭 남성형 ‘당신’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며, 이 상황의 책임이 아버지 입다에게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주셨으니 아버지도 자신의 서원을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신실하셨기에 인간도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전혀 신실하지 못한 입다나 길르앗 사람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앙고백은 무지에서 비롯된 순진함이다. 그녀와 입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입다의 서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으나, 이 전쟁은 입다의 서원과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입다의 딸은 두 달만 말미를 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이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기 위해 친구들과 산에 가겠다고 말한다. 이는 입다에게 더 이상 후손이 없게 된다는 의미다. 입다는 이를 허락했고, 그녀는 정말로 두 달 뒤에 돌아와 아버지가 서원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입다의 딸을 기리기 위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나흘씩 애곡하는 풍습이 생긴다.
하지만 레위기 27:2~8에 따르면 잘못된 서원은 돌이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으며, 서원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된다면 서원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더 정직한 방법이다. 그런데 입다와 그의 딸이 이 규정을 몰랐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딸의 희생에 눈을 감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입다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이 원하던 길르앗의 머리 자리를 얻었다.
한편 입다의 딸은 사사기에서 최초로 희생된 여성이다. 이전까지 여성들은 축복받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입다의 딸은 본인은 신실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기에 어이없게 희생되고 말았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타락할수록 여성들의 처지도 점점 열악해진다. 1장에서 갈렙은 자신의 딸 악사를 보호하고 풍성하게 해 줄 샘을 주는 보호자로서의 아버지였지만, 입다는 자신의 딸을 죽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 나타난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가족 관계도 깨지고, 보호자여야 할 아버지가 자식을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암몬과의 전쟁은 비천한 출신인 입다에게 ‘바닥에서 머리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승리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욱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은 무모한 서원으로 이어진다(29~31절). 그의 서원은 믿음을 가장한 불신의 표현이었고,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한 또 하나의 협상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거래가 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다는 서원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말씀마저 번복하시는데, 그는 자기 딸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릇된 서원을 끝까지 고집한다(34~35절). 무지하고 무모한 그의 서원은 훗날 무고한 희생과 동족상잔의 참극을 불러온 기브아 사건(21장)에서 재현된다.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몰랐을 리 없을 텐데, 그는 목적 성취를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한다. 원인 제공은 아비인 입다가 했는데, 그 결과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승전하고 돌아오는 아비를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었던 순수한 딸이 져야 하는 이 기막힌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경우가 우리의 삶에 비일비재하다. 원인은 기성세대가 제공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다음 세대가 지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기성세대의 변은 하나같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승리를 주신다면 자신을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대로, 입다는 자신을 반기던 딸에게 그것을 이행한다(36~40절). 하지만 승리를 위한 그의 서원은 풍요를 위해 인신 제사도 서슴지 않았던 이방의 가증한 제사와 다를 바 없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정통했던 그가 정작 율법에는 무지했다. 비록 그가 큰 용사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 하더라도, 말씀보다는 우상 문화에 더 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의 신앙과 공동체 안에 계시(말씀)와 역사에 뿌리를 둔 신앙이 아닌 ‘미신적, 무속적, 우상적, 세속적’ 요소는 없는지 세밀하게 돌아볼 일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곤고함(10:9)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사사(심판하시는, 27절)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어 암몬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0:13)”고 하신 말씀마저 ‘번복’하신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배반에도, 위기 때만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아시면서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받아 주시고 다시 살려 주신다.
*현실의 한계를 넘기 위해 “이것을 위해서라면…”이라는 목적 중심 사고가 가져오는 무수한 삶의 위기는 본인뿐 아니라 가정 구성원들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위험 요소가 된다. 인간관계의 일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지금은 적합하게 결정한 듯하나 후손들이 고통받게 될 정책들이 왜 없겠는가! 지금 살아가는 세대는 편리할 수 있지만 후손들은 고통받으며 살아야 할 일들이 왜 없겠는가! 기후 재앙, 원자력, 빈곤 문제, 빈익빈 부익부 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기후 재앙이나 원자력의 위험은 이미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통해 우리 세대에서도 실감하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은 더욱 고통받을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입다의 서원과, 그 결과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딸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존재한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입다 딸의 인신 제사를 왜 막지 않으셨는지… 마음이 고통스럽다. 또 인신 제사를 금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레위인들이나 제사장 계층의 거센 만류가 왜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통스럽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있으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색한 시대였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시대였음이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서원”이라는 형식이 중요해서,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조차 “서원”이라는 형식이 씌워졌으니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해석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이런 딜레마가 내가 목회하는 동안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무리한 서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약속에 천착하여 삶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입다의 사례가 있음에도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 인생의 죄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원은 원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약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입다는 ‘어떤 것을 얻을 목적으로 하나님께 약속’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중요한 이유를 본문이 제시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혹시 하나님의 법과 정면으로 배치될 때에는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시급하고 절실하더라도 함부로 서원해서는 안 된다.
1. 하나님의 영이 임하다(29절)
입다는 암몬 왕의 억지를 노련하게 제압했다. 하지만 암몬 왕은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약탈이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출애굽 때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암몬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고 하셨기에 암몬 왕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내버려 두셨을 것이다. 그리고 치열했던 외교전을 마무리하자마자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 입다는 이미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역사에 정통했고,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판결(판단)하실 것을 선언하였기에(27절),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 그러나(30~31절)
그러나 입다는 쓸데없는 서원을 한다. 출정하면서 여호와의 영이 임했지만, 승리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있었다면 다시 하나님께 승리의 확신을 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입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입다는 300년 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 해박하게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인신 제사”를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하고 금지하시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상식적인 시각으로 암몬과 담판했던 그가, 승전하고 돌아올 때 가장 먼저 영접하러 나오는 이가 가족일 수 있다는 판단을 왜 하지 못했을까? 또 그는 ‘돕’ 땅에서 “큰 용사”로 맹위를 떨친 인물이다. 크고 작은 분쟁의 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누가 열렬히 환영하며 나올지 과연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당장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다가 결국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입다는 인신 제사라는 서원을 통해 여호와의 전쟁조차 그 의미를 퇴색시켰고, 하나님을 조건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분으로 만들고 말았다. 여호와의 전쟁에서 주인공은 원래 여호와이시고 인간은 보조자일 뿐이다. 그런데 입다는 서원을 통해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보조자로 전락시키고 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고, 서원을 통해 마치 보험이라도 드는 듯이 행동한 셈이다.
3. 일단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32~33절)
입다의 전쟁 장면은 매우 간략하게 묘사된다. 입다 이야기에서 전쟁 장면이 중심이 아니라, 다음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승패가 가장 중요할 텐데, 이 단락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여호와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소개하고, 입다가 차지한 성읍의 명단을 제시하는 것으로 전쟁 이야기를 갈음한다. 하지만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입다가 서원한 것에 대한 복잡한 문제가 도드라진다. 서원의 내용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4. 입다 딸의 죽음(34~40절)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딸이 가장 먼저 마중 나온다. 그녀는 입다의 무남독녀였다. 저자는 ‘나와서 영접하다’를 반복하여 이 딸이 입다의 서원을 충족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입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딸이 영문도 모른 채 즐겁게 소고 치고 춤추며 아버지를 마중 나온 것이다. 입다는 자기의 무남독녀가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한탄한다. 이 장면은 그의 서원이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왜 하필 네가 나왔느냐며 원망한다. 이 답답한 입다는 서원한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오롯이 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결국 그가 이 전쟁을 온전히 하나님의 전쟁으로 드리지 않았기에, 그의 승리도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자기 딸을 죽이는 비극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 아버지가 말한 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이인칭 남성형 ‘당신’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며, 이 상황의 책임이 아버지 입다에게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주셨으니 아버지도 자신의 서원을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신실하셨기에 인간도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전혀 신실하지 못한 입다나 길르앗 사람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앙고백은 무지에서 비롯된 순진함이다. 그녀와 입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입다의 서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으나, 이 전쟁은 입다의 서원과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입다의 딸은 두 달만 말미를 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이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기 위해 친구들과 산에 가겠다고 말한다. 이는 입다에게 더 이상 후손이 없게 된다는 의미다. 입다는 이를 허락했고, 그녀는 정말로 두 달 뒤에 돌아와 아버지가 서원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입다의 딸을 기리기 위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나흘씩 애곡하는 풍습이 생긴다.
하지만 레위기 27:2~8에 따르면 잘못된 서원은 돌이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으며, 서원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된다면 서원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더 정직한 방법이다. 그런데 입다와 그의 딸이 이 규정을 몰랐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딸의 희생에 눈을 감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입다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이 원하던 길르앗의 머리 자리를 얻었다.
한편 입다의 딸은 사사기에서 최초로 희생된 여성이다. 이전까지 여성들은 축복받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입다의 딸은 본인은 신실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기에 어이없게 희생되고 말았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타락할수록 여성들의 처지도 점점 열악해진다. 1장에서 갈렙은 자신의 딸 악사를 보호하고 풍성하게 해 줄 샘을 주는 보호자로서의 아버지였지만, 입다는 자신의 딸을 죽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 나타난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가족 관계도 깨지고, 보호자여야 할 아버지가 자식을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암몬과의 전쟁은 비천한 출신인 입다에게 ‘바닥에서 머리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승리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욱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은 무모한 서원으로 이어진다(29~31절). 그의 서원은 믿음을 가장한 불신의 표현이었고,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한 또 하나의 협상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거래가 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다는 서원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말씀마저 번복하시는데, 그는 자기 딸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릇된 서원을 끝까지 고집한다(34~35절). 무지하고 무모한 그의 서원은 훗날 무고한 희생과 동족상잔의 참극을 불러온 기브아 사건(21장)에서 재현된다.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몰랐을 리 없을 텐데, 그는 목적 성취를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한다. 원인 제공은 아비인 입다가 했는데, 그 결과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승전하고 돌아오는 아비를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었던 순수한 딸이 져야 하는 이 기막힌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경우가 우리의 삶에 비일비재하다. 원인은 기성세대가 제공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다음 세대가 지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기성세대의 변은 하나같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승리를 주신다면 자신을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대로, 입다는 자신을 반기던 딸에게 그것을 이행한다(36~40절). 하지만 승리를 위한 그의 서원은 풍요를 위해 인신 제사도 서슴지 않았던 이방의 가증한 제사와 다를 바 없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정통했던 그가 정작 율법에는 무지했다. 비록 그가 큰 용사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 하더라도, 말씀보다는 우상 문화에 더 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의 신앙과 공동체 안에 계시(말씀)와 역사에 뿌리를 둔 신앙이 아닌 ‘미신적, 무속적, 우상적, 세속적’ 요소는 없는지 세밀하게 돌아볼 일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곤고함(10:9)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사사(심판하시는, 27절)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어 암몬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0:13)”고 하신 말씀마저 ‘번복’하신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배반에도, 위기 때만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아시면서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받아 주시고 다시 살려 주신다.
*현실의 한계를 넘기 위해 “이것을 위해서라면…”이라는 목적 중심 사고가 가져오는 무수한 삶의 위기는 본인뿐 아니라 가정 구성원들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위험 요소가 된다. 인간관계의 일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지금은 적합하게 결정한 듯하나 후손들이 고통받게 될 정책들이 왜 없겠는가! 지금 살아가는 세대는 편리할 수 있지만 후손들은 고통받으며 살아야 할 일들이 왜 없겠는가! 기후 재앙, 원자력, 빈곤 문제, 빈익빈 부익부 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기후 재앙이나 원자력의 위험은 이미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통해 우리 세대에서도 실감하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은 더욱 고통받을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입다의 서원과, 그 결과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딸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존재한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입다 딸의 인신 제사를 왜 막지 않으셨는지… 마음이 고통스럽다. 또 인신 제사를 금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레위인들이나 제사장 계층의 거센 만류가 왜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통스럽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있으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색한 시대였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시대였음이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서원”이라는 형식이 중요해서,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조차 “서원”이라는 형식이 씌워졌으니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해석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이런 딜레마가 내가 목회하는 동안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무리한 서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약속에 천착하여 삶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입다의 사례가 있음에도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 인생의 죄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입다와 암몬 왕과의 설전 [사사기 11:12-28]
입다와 암몬 왕은 전쟁을 하기 전에 ‘설전’을 벌인다. 암몬 왕이 길르앗은 원래 암몬 족속의 땅이어서 되찾으러 왔다고 말하자, 입다는 이 땅이 암몬의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이며, 전에는 아모리 족속이 살았던 땅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입다는 이 땅에 대한 분명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길르앗의 지도자가 된 입다는 곧바로 암몬과의 전투에 임하지 않는다. 먼저 그들의 도발을 단념시키려고,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암몬 족속에게 정확한 역사 지식에 근거하여 반박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을 선언한다.
1. 땅을 돌려 달라는 암몬 왕(12~13절)
고대 전쟁에서는 개전 전에 서로 사자들을 보내어 먼저 말싸움을 한다. 이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다. 입다는 전쟁을 하기 전에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쳐들어왔느냐고 묻는다.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면서 ‘내 땅’이라는 표현을 써서 왕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입다는 사자를 먼저 보내 암몬 왕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전쟁의 원인이 암몬에게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에 암몬 왕은 길르앗, 즉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는 원래 암몬 땅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점령하였으니, 이제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요구한다. 이곳이 원래 자기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로가 자기 땅이라고 고수하는 상황이다.
2. 길르앗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입다(14~27절)
14~18절은 암몬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는 입다의 항변이다. 입다는 암몬 왕의 주장 가운데 왜곡된 부분을 지적하며,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스라엘의 길르앗 소유권을 주장한다.
이 단락이 첫 번째 이유인데, 입다는 암몬 왕에게 이스라엘은 암몬과 모압의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출애굽 여정을 통해 제시한다. 자신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홍해까지 왔고, 거기서 다시 가데스까지 왔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에돔과 모압 땅으로 지나가려고 사자를 보냈으나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가데스 광야에 머물다가 모압 동편 경계인 아르논에 진을 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입다는 아르논을 모압의 경계라고 분명하게 표현하며, 자신들의 조상이 모압 땅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한편, 신명기나 민수기는 이 여정에서 암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이 길은 에돔과 모압을 통과하지만 암몬은 통과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신명기 2:37은 암몬 땅에는 가지 않았음을 특별히 언급하며 이를 증명한다. 이와 같은 역사를 근거로 입다는 암몬뿐만 아니라 에돔, 모압과도 싸운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19~22절은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이 원래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는 점을 확인해 주며, 이 땅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압이나 에돔에게 한 것처럼 아모리에도 사자를 보내 땅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아모리는 모압, 에돔과 달리 지나가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왕 시혼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겨주셨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이겨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점령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아르논(아모리 땅의 최남단)에서 얍복(최북단 경계)까지, 광야(동편 경계)에서 요단(서편 경계)까지의 땅을 얻게 된다.
23~27절은 아모리 땅 점령의 정당성을 기술한다. 입다는 길르앗이 암몬 자손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한 후, 아모리 땅을 계속 점유하는 것의 정당성을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한다. 둘째, 당신(암몬 자손)이 모압 왕 발락보다 더 잘났느냐고 묻는다.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땅을 차지하자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 매우 유명한 선지자로 알려진 미디안 사람 발람을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저주 대신 축복을 하게 하셨다. 이로 인해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과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재의 암몬 왕보다 훌륭한 발락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전쟁도 하지 못하였는데, 암몬 왕이 감히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성읍들에 거주한 지 이미 300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곳이 암몬 사람들의 땅이었다면, 그동안 왜 이 땅을 다시 차지하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다는 이런 암몬 자손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판결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때 입다는 여호와를 ‘사사’로 부른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과 세상의 사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3. 암몬 왕의 거부(28절)
이런 입다의 주장을 들은 암몬 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싸움(설전)에서는 일단 입다가 승리했다. 암몬 왕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28절에서 암몬 왕은 막무가내로 입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반면 입다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아는, 부드러운 화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다음 단락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나는?
*입다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큰 용사”인 입다는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큰 용사”됨이 무력에 의지한 것이 아님이 본문을 통해 밝혀진다. 길르앗의 머리가 되어 암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한 입다의 첫걸음은 “외교”였다. 전쟁은 싸우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외교를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담판”을 지을 자질이 있었다. 한낱 “돕” 땅의 비류들을 이끈 입다에게 이런 놀라운 모습이라니…
*먼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었다. 억지에 가까운 암몬 왕의 길르앗 땅 반환 요구를 정확한 역사적 사실로 반박한다. 원래 자신들의 땅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이 땅은 오히려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음을 분명하게 반박한다(15~22절). 당시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할 때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에 따라 에돔과 모압과 암몬 땅을 우회했다. 처음에는 그 땅의 통과를 부탁했지만 그들이 승인하지 않아, 이스라엘은 더 먼 길로 “돌아서” 진행했다. 그들의 땅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았다. 에돔, 모압, 암몬이 이스라엘의 먼 친족이기 때문이었다. 아모리 족속에게도 동일한 제안을 했지만, 그 왕 시혼은 도리어 거절하고 백성들을 모아 이스라엘을 쳤다(민 21:23). 그리하여 아모리 족속의 침공에 맞서 그들을 정복하게 된 것이다. 암몬이 주장하는 그들의 땅을 점령한 일은 없다. 길르앗 사람들에게 쫓겨나 암몬 족속의 땅 “돕” 땅에 정착하며 살았던 입다에게 이런 정확하고 해박한 지식이라니…
*그리고 이런 역사적 지식에 근거하여 분명한 신학적 근거도 제시한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신 땅(23절)”이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을 정복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인도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암몬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 ‘그모스’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이야기한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다는 매우 상식적으로 말한다. 만약 이 땅이 암몬 자손의 땅이었다면,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주변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주변 마을들과, 아르논 강변의 모든 성읍에 삼백 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왜 당신은 그 동안에 이 지역들을 되찾지 않았습니까?(새번역_26절)”라고 했다. 거짓된 역사에 기대어 살아왔더라도, 지난 300년 동안 도대체 뭘 한 거냐는 의미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도발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나로서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당신이 나를 해치려고 쳐들어왔으니,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를 판가름해 주실 것입니다(새번역_27절).” 이것이 결론이다.
*입다는 “큰 용사”가 맞다. 단지 힘만 쓰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역사적 지식, 믿음, 상식에 근거한 판단… 이런 모습이 있다니…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정체성이 없다면 결국 자기주장에 함몰된다. 정확한 역사적 지식이 없으면 감정 대립과 억지가 심해진다. 건강한 상식이 없으면 광신 집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암몬 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입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확고하게 행하는 사람이었다. 암몬 왕은 역사적 사실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자기 고집만 부린다. 상식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암몬의 땅이었다면 300년 동안 무얼 했느냐는 질문에 “… 말을 듣지 않는다(28절).” 약탈이 목적인 이들에게 “전쟁의 명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공동체에 도발한다. 그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며 난동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똑같이 하면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지혜를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내어,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더욱더 선명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이다.
1. 땅을 돌려 달라는 암몬 왕(12~13절)
고대 전쟁에서는 개전 전에 서로 사자들을 보내어 먼저 말싸움을 한다. 이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다. 입다는 전쟁을 하기 전에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쳐들어왔느냐고 묻는다.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면서 ‘내 땅’이라는 표현을 써서 왕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입다는 사자를 먼저 보내 암몬 왕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전쟁의 원인이 암몬에게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에 암몬 왕은 길르앗, 즉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는 원래 암몬 땅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점령하였으니, 이제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요구한다. 이곳이 원래 자기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로가 자기 땅이라고 고수하는 상황이다.
2. 길르앗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입다(14~27절)
14~18절은 암몬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는 입다의 항변이다. 입다는 암몬 왕의 주장 가운데 왜곡된 부분을 지적하며,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스라엘의 길르앗 소유권을 주장한다.
이 단락이 첫 번째 이유인데, 입다는 암몬 왕에게 이스라엘은 암몬과 모압의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출애굽 여정을 통해 제시한다. 자신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홍해까지 왔고, 거기서 다시 가데스까지 왔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에돔과 모압 땅으로 지나가려고 사자를 보냈으나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가데스 광야에 머물다가 모압 동편 경계인 아르논에 진을 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입다는 아르논을 모압의 경계라고 분명하게 표현하며, 자신들의 조상이 모압 땅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한편, 신명기나 민수기는 이 여정에서 암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이 길은 에돔과 모압을 통과하지만 암몬은 통과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신명기 2:37은 암몬 땅에는 가지 않았음을 특별히 언급하며 이를 증명한다. 이와 같은 역사를 근거로 입다는 암몬뿐만 아니라 에돔, 모압과도 싸운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19~22절은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이 원래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는 점을 확인해 주며, 이 땅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압이나 에돔에게 한 것처럼 아모리에도 사자를 보내 땅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아모리는 모압, 에돔과 달리 지나가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왕 시혼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겨주셨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이겨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점령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아르논(아모리 땅의 최남단)에서 얍복(최북단 경계)까지, 광야(동편 경계)에서 요단(서편 경계)까지의 땅을 얻게 된다.
23~27절은 아모리 땅 점령의 정당성을 기술한다. 입다는 길르앗이 암몬 자손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한 후, 아모리 땅을 계속 점유하는 것의 정당성을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한다. 둘째, 당신(암몬 자손)이 모압 왕 발락보다 더 잘났느냐고 묻는다.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땅을 차지하자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 매우 유명한 선지자로 알려진 미디안 사람 발람을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저주 대신 축복을 하게 하셨다. 이로 인해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과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재의 암몬 왕보다 훌륭한 발락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전쟁도 하지 못하였는데, 암몬 왕이 감히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성읍들에 거주한 지 이미 300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곳이 암몬 사람들의 땅이었다면, 그동안 왜 이 땅을 다시 차지하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다는 이런 암몬 자손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판결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때 입다는 여호와를 ‘사사’로 부른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과 세상의 사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3. 암몬 왕의 거부(28절)
이런 입다의 주장을 들은 암몬 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싸움(설전)에서는 일단 입다가 승리했다. 암몬 왕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28절에서 암몬 왕은 막무가내로 입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반면 입다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아는, 부드러운 화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다음 단락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나는?
*입다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큰 용사”인 입다는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큰 용사”됨이 무력에 의지한 것이 아님이 본문을 통해 밝혀진다. 길르앗의 머리가 되어 암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한 입다의 첫걸음은 “외교”였다. 전쟁은 싸우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외교를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담판”을 지을 자질이 있었다. 한낱 “돕” 땅의 비류들을 이끈 입다에게 이런 놀라운 모습이라니…
*먼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었다. 억지에 가까운 암몬 왕의 길르앗 땅 반환 요구를 정확한 역사적 사실로 반박한다. 원래 자신들의 땅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이 땅은 오히려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음을 분명하게 반박한다(15~22절). 당시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할 때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에 따라 에돔과 모압과 암몬 땅을 우회했다. 처음에는 그 땅의 통과를 부탁했지만 그들이 승인하지 않아, 이스라엘은 더 먼 길로 “돌아서” 진행했다. 그들의 땅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았다. 에돔, 모압, 암몬이 이스라엘의 먼 친족이기 때문이었다. 아모리 족속에게도 동일한 제안을 했지만, 그 왕 시혼은 도리어 거절하고 백성들을 모아 이스라엘을 쳤다(민 21:23). 그리하여 아모리 족속의 침공에 맞서 그들을 정복하게 된 것이다. 암몬이 주장하는 그들의 땅을 점령한 일은 없다. 길르앗 사람들에게 쫓겨나 암몬 족속의 땅 “돕” 땅에 정착하며 살았던 입다에게 이런 정확하고 해박한 지식이라니…
*그리고 이런 역사적 지식에 근거하여 분명한 신학적 근거도 제시한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신 땅(23절)”이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을 정복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인도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암몬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 ‘그모스’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이야기한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다는 매우 상식적으로 말한다. 만약 이 땅이 암몬 자손의 땅이었다면,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주변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주변 마을들과, 아르논 강변의 모든 성읍에 삼백 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왜 당신은 그 동안에 이 지역들을 되찾지 않았습니까?(새번역_26절)”라고 했다. 거짓된 역사에 기대어 살아왔더라도, 지난 300년 동안 도대체 뭘 한 거냐는 의미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도발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나로서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당신이 나를 해치려고 쳐들어왔으니,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를 판가름해 주실 것입니다(새번역_27절).” 이것이 결론이다.
*입다는 “큰 용사”가 맞다. 단지 힘만 쓰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역사적 지식, 믿음, 상식에 근거한 판단… 이런 모습이 있다니…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정체성이 없다면 결국 자기주장에 함몰된다. 정확한 역사적 지식이 없으면 감정 대립과 억지가 심해진다. 건강한 상식이 없으면 광신 집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암몬 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입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확고하게 행하는 사람이었다. 암몬 왕은 역사적 사실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자기 고집만 부린다. 상식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암몬의 땅이었다면 300년 동안 무얼 했느냐는 질문에 “… 말을 듣지 않는다(28절).” 약탈이 목적인 이들에게 “전쟁의 명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공동체에 도발한다. 그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며 난동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똑같이 하면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지혜를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내어,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더욱더 선명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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