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1. 형제 차별과 믿음의 삶(1~4절)
본 단락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과 믿음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다룬다. 이어지는 2:14~26의 믿음과 행함 논의로 연결되는 중요한 단락이다. 새로운 주제이지만, 본문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앞부분과 연결하여 읽는 것이 좋다.
먼저 사람을 외모로 대하는 태도, 특히 가난한 자를 대하는 태도는 신자의 참 경건에 속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1:27)과 대조된다. 또한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은 믿지 않는 부자들(6~7절)과 다름없는 태도로,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명령(1:27)과도 어긋난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자들이며(1:18), 믿음의 형제자매들이다(1:19; 2:1).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볼 때, 본 단락은 율법의 핵심 정신과 대조되는 모습을 지적하여 새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저자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새 언약 안에 들어가는 입문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를 대하는 모습을 통해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요청이다.
차별의 예는 2~4절에서 소개된다. 본문은 조건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상황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들어올 때 ‘너희’가 말로 다르게 응대하는 모습을 지적하며 시작한다(2~3절). 금반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가 들어오면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지만,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자가 들어오면 거기 서 있든지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말한다.
4절은 이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너희끼리’라는 표현을 통해 언급된 모든 사람이 신자임을 밝힌다. 둘째, ‘판단하는 자(심판자)’라는 표현은 외모로 하나님의 자녀를 차별하는 것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임을 뜻한다. 이는 이웃 사랑의 계명뿐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계명까지 어긴 것임을 시사한다. 셋째, 수사적 질문으로 독자의 대답을 유도하여, 독자 스스로 사람을 차별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었음을 시인하게 한다.
2.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해(5~7절)
5절은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의 관계를 언급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자들이다(7절). 그런데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가난한 자를 차별하여 업신여기고 수치스럽게 했다.
여기서 부자는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들은 신자들을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이며, 신자들이 귀하게 여기는 주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야고보는 가난한 자를 차별하여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 세상의 믿지 않는 부자들의 악행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지 않은 일임을 깨닫게 한다.
3. 형제 차별과 율법 순종의 연관성(8~11절)
이 단락은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것과 믿음에 합당한 의로운 삶의 관계를 율법 순종의 차원에서 부연한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는 서로에 대한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언약의 상대인 사람을 사랑하시고 언약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무에 충실하시다. 문제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계시한 율법을 주셨고, 사람이 그 법을 지키는 것이 언약의 의무다. 율법은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 곧 가르침이다. 그래서 헬라어 번역이 ‘노모스'(법)로 옮긴 것과 달리, 히브리어로는 방향과 가르침을 뜻하는 ‘토라’라고 부른다.
율법의 핵심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신 6:5)과 수평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레 19:18)이다. 사람이 율법을 통해 주어진 이 두 가르침에 순종하면 언약 관계가 유지되며, 그 상태를 ‘의’라고 부른다(신 6:25). 그러므로 믿음에 합당한 의로운 삶은 율법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것과 율법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야고보는 8~9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며, 율법이 그를 범법자로 정죄한다.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은 단순히 사회적 관습의 문제가 아니다. 언약 백성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의 문제, 곧 순종의 문제다. 차별은 언약의 의무를 저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이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그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어서 야고보는 10~11절에서 설명을 더한다.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하나에 걸려 넘어지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간음과 살인을 모두 금하셨기에(출 20:13~14), 간음하지 않았더라도 살인을 했다면 율법을 범한 것이다. 당연한 논리다. 율법은 전체로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신자의 삶에 통일성과 일관성을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참된 경건과 의로움이 마음과, 그 마음을 표현하는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듯이(1:26~27), 율법의 두 가지 핵심 정신도 신자의 마음과 모든 행위에 담겨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외모로 대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의 삶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
4. 결론적 명령(12~13절)
야고보는 ‘그러므로’ 자유의 율법으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지만,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신자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고 심판도 없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를 믿는 자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킨 것은 맞지만(갈 3:13; 롬 8:3),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어 언약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므로 새 언약에서도 유효하다(롬 13:8~10). 또한 율법의 핵심 정신은 모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므로 신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벧전 1:17).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외모로 대하는 것은 긍휼을 행하지 않는 것이며 율법의 정신에 위배된다. 당연히 그에 대한 평가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긍휼을 베풀면 심판을 이기게 될 것이다.
결국 야고보의 결론은 세 가지다. 첫째, 율법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라. 둘째, 믿음의 고백과 일치하는 행위로 의로움을 드러내라. 셋째, 가난한 자를 외모로 대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나는?
-바울이 서신에서 이방 교회 성도들에게 강조한 ‘이신칭의’는 초대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원을 얻는 데 어떤 행위도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오해하여 ‘믿음 안에서 마땅히 드러나야 할 변화된 행위’를 가볍게 여기는 이들에게 야고보서는 좋은 균형을 제공한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강조하며, 믿음은 반드시 삶의 행함으로 드러나야 함을 일깨운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1절)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차별하지 않는 행동을 하나로 묶는다. 이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한 구약(신 10:17~19)과 바울의 가르침(롬 2:10~11)과도 통한다. 외모를 보고 차별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임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다. 야고보는 왜 이렇게 했을까?
-당시 초대교회 안에 차별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주님을 예배하러 모이는 자리에서, 성도들을 맞이하는 이들에게서 공공연히 드러났다(2~4절). 이에 야고보는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분이심을 분명히 가르친다(5절). 그리고 외모를 보고 우대하던 부자들의 악행을 고발한다(6~7절). 이어서 교회 안에서 회복해야 할 ‘이웃 사랑’을 ‘차별하지 말라’는 명령에 구체적으로 순종함으로 실천하라고 요청한다. 이토록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심판대 앞에서 ‘차별 없는 긍휼과 사랑의 법(율법)’을 잘 지켜 심판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긍휼의 삶에 순종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심판을 이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이라는 최고의 율법을 구체적으로 지키는 일은 공동체 안의 ‘차별’을 없애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이 가진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의적인 기준으로 사랑할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임의로 나누는 악한 태도다. 그런 태도는 형제 사랑이 아니며,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는 방식도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는지 보라. 세상에서 가난한 자인가, 부한 자인가? 하나님의 기준은 돈인가, 사랑인가?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셨다. 그런데 신자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주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자를 두둔한다면, 그것은 차별 없는 사랑을 받은 자의 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이웃 사랑을 최고의 법으로 여긴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다면, 그는 율법을 범하는 범법자가 된다. 다른 모든 법을 잘 지키더라도 이웃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하면 율법 전체를 어긴 자가 된다.
-심판받을 때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율법’이다. 내 자유만 주장하며 긍휼 없이 냉정하게 타인을 대하는 자에게 돌아갈 긍휼은 없다. 이기적인 우리가 심판을 이기고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긍휼 어린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 속에서 ‘다름’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지 않고 세상과 똑같은 가치와 자세, 말과 행동을 따른다면 어찌 하나님 나라 백성답다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다름’으로 사는 것은 크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웃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데서부터가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신분과 계급의 구별이 당연했던 그 시대에 이런 모습은 분명 ‘다름’이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이런 ‘다름’을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련다. 차별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련다. 외모에 치중하지 않도록 정욕을 다스리련다. 내 기준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차별부터 고쳐 보련다. 영적인 수준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다름’이 아니라, 그 차이를 신앙이 살아 있다는 생명력으로 바라보는 ‘다름’으로 살아 보련다. 살아 있으니 차이가 있고, 살아 있으니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련다.
-하나님 나라와 다른 이 세상에서, 세상의 방식과 ‘다름’으로 살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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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불리 화를 내지 말고,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받아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할 때 시험을 이길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혀를 다스리고 진실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다운 경건한 삶은 어떤 삶일까?
1. 노하기도 더디 하라(19-21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표새_19절)” 경건하게 살려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성급하게 말하기보다 충분히 듣고 말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당부하는 것이 “노하기도(개역_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이다. ‘더디 한다(브라뒤스)’는 ‘반응이 느리다’는 뜻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말하기는 빨리(많이) 하고, 듣기는 더디 하며, 노하기는 빨리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복음(말씀)에는 반응이 빠르고, 노하는 데에는 반응이 느리다. 이 말은 노하는 것에 더디 반응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복음(말씀)에 확실히 반응하며 그 말씀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야고보는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사람의 성냄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표새_20절)” 아무리 정당해 보이는 분노라도 사람의 성냄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온갖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버리고,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표새_21절)” 성냄의 자리를 비우고, 이미 우리 안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다스린다.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것은 화를 참으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바탕에 말씀(복음)에 먼저 반응하는 태도가 있음을 보여준다. 말씀에 빨리 반응하는 성도는 노할 만한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찾고 말씀으로 분노를 이겨내려고 노력하기에, 분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이 붙드는 말씀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이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에 가장 먼저 반응하여, 그 말씀 때문에 밀려오는 노기에는 더디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말씀은 질풍처럼 밀려오는 노기를 제어하는 훌륭한 브레이크다!
*결정해야 할 무언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 요동친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맞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왜 그랬을까 안타까워 마음이 끓는다. 아! 무엇이 말씀의 뜻에 더 맞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성령께서 속히 깨닫게(들리게) 해 주시기를 구할 뿐이다.
2. 말씀을 행하라(22-25절)
그렇다면 말씀(듣기)에 빨리 반응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 이는 행함과 관련이 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표새_22절)” ‘행하는 자(포이에타이)’는 ‘만드는 자, 실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손과 발로 직접 움직이는 것이다. 말씀 듣는 것에 빨리 반응한다는 것은 듣고 나서 손과 발로 직접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경건은 말씀으로 손과 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일깨우며, 이는 마치 거울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하고 자기 모습을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23-24절) 말한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진정으로 들여다보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행(실천)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25절).
“말씀을 행하는 것”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것이다.
*말씀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에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나 자신에게도 그렇고, 공동체에 대해서도 그렇다… 상황을 살피고 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칫 합리화할 수 있고, 세워져야 할 말씀의 뜻이 상황의 안타까움으로 포장될 수 있다…
3. 세속에 물들지 마라(26-27절)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은 먼저 ‘혀’를 다스리며 ‘마음’을 진실하게 가꾸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감동을 주시고 결정하게 하신 일에 순종하는 행동이 경건이다. 경건은 의식에 얽매여 절차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성전과 회당 안에서 입술로만 부르짖는 외적인 형태도 아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경건, 곧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27절). “세속(코스모스)”은 흔히 세상이나 우주를 나타내지만, 본문에서는 신앙적이고 거룩한 것의 반대 개념임이 틀림없다. 곧 세상적이고 육신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고아와 과부(약자들)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의무였다. 말씀의 뜻을 행하는 일은 섬김과 나눔, 희생을 수반한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집스럽게 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 간절히 필요한 이들에게 선선히 흘려보내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거저 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 그리고 전하는 과정에서의 대가 없는 섬김과 나눔은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소한 것들이다. 하늘의 큰 은혜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말씀의 지식이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 도움 없이는 제대로 설 수 없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말씀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섬기는 삶이 곧 경건이다.
나는?
*믿음의 사람은 속히 듣고 더디 말하도록 힘써야 한다. 지혜 없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든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려고 한다. 너무 속단하며,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급히 화를 낸다. 그는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인 듯 행세하는 오만한 사람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 그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의는 없다. 그는 시험에 빠진 사람이다.
*야고보는 당시의 격언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뜻을 살피기 전에 성급히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탓하고 성내는 것은 그 시련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했다. 내게 닥친 시련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급하고 성급하게 내가 그 의미를 정하려 하지 말고, 그 의미가 드러날 때까지 말씀에서 귀를 떼지 말아야 한다.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한다.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말씀이 온전히 들리려면 내 마음속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동기와 목적을 걷어내야 한다. 세속적인 영향을 점검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를 낳으실(구원하실) 때 심어두신 진리의 말씀(1:18)을 삶 속에 적용해야 한다. 그때 필요한 태도가 지독한 자기중심성을 벗은 ‘온유함’이다. 이것이 시험을 이기는 지혜다.
*말씀을 순전하게 받으려면 버려야 할 것과 준비할 것이 있다.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버리고, 온유한 마음 밭을 준비해야 한다. 그때 우리 영혼을 구원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분의 뜻이 깨달아지며, 경솔하게 하나님께 성내지 않을 수 있다. 말씀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수선해서 어렵게 들리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가난한 마음, 간절하고 곡진한 마음이면 말씀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깊고 풍성한 의미를 보여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말씀을 정보로만 소유하지 말고 그 말씀이 나를 새롭게 빚어 가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욕망을 재조정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어져 간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은 물질로 사람을 평가하려는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삶은 없으면서 오만하게 자기 경건을 말로 자랑하려는 유혹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실천적으로 돌봄으로써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세속 문화를 거스르며 사는 것이다. 말로 치장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말씀은 죽은 정보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이기에, 청종과 순종과 실천으로 그 말씀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의 참뜻과 의도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실천하지 않고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은 말씀의 내용일 뿐,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아닐 때가 많다. 토를 달지 않고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할 때 진리가 주는 자유가 찾아오며,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복이 하는 일마다 임할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참된 묵상은 머리와 마음의 묵상에서 더 나아가 손과 발의 묵상, 곧 전인격적인 묵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경건이다. 경건은 자신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평가하신다. 그것은 절제된 말과 약자를 돌보는 실천적인 섬김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룩한 삶을 통해 드러난다. 저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행위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율법을 알고 고백하는 것보다 시험당한(환난 중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율법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며, 말보다 삶을 앞세우는 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정결하고 더러움 없는 경건이다.
*본문을 크게 나누어 묵상하면 “들음”과 “행함”이다. 말씀을 들었다면 말씀이 가리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특히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이에 대하여 23절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표새_23절)”라고 했다. 거울을 보고서도 자기 모습을 정비하지 않는 사람, 거울을 왜 보는지 모르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말씀을 왜 들을까?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듣는 것이다. 말씀의 거울이 내 삶에서 고쳐야 할 매무새를 보여주면 털어내고, 가지런히 하고, 단정하게 정비하면 된다. 거울을 보기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나를 비춰 보며 말씀의 뜻을 따라 그렇게 행하면 될 일이다.
*말씀이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보여주면 닦으면 되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음을 보여주면 단정하게 고쳐 입으면 된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배우면서도 말씀이 보여주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그저 거울만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체 거울은 왜 보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말씀을 귀로 듣고 입으로 잘 시인하는데도(소위 ‘아멘, 아멘’은 잘 하는데…)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지식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행함으로는 도무지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는 경우 말이다.
*신앙(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구체화되는 것, 그것이 곧 참된 경건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삶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경건이다.
*미가 선지자의 외침이 생각난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이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새번역_미가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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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야고보 뿐 아니라 베드로도 주님의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벧전 3:14)” 야고보나 베드로나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동일한 말씀으로 “여러 가지 시험”속에 있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변화를 낳고 변화된 이들이 또 다른 이들을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다. 말씀이 사람을 변화 시키고, 세상을 변화 시킨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이 이렇게 변화 된 것은 아니었다.
1. 오해….(12-15절)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례없는 가뭄과 기근이 지속되고 있었다. 오죽하면 바울도 기근과 박해의 위험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복음이 전해져 세워진 교회들마다 구제 헌금을 요청하고 있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주변으로 흩어진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의 삶의 곤고함, 궁핍함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가뭄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몸부림이 계속 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부한 자들에게 대한 부러움과 부자가 되려는 갈망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9-11절의 부에 대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권면은 이런 배경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새번역_12절)”이라고 먼저 격려하고 본문을 이어간다.
*시험은 생명의 면류관을 주기 위해 허락된 것인데, ‘여러 가지 시험’에 처해 있는 이들 가운데 ‘우리를 죽이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헛된 마음을 품는 이들이 있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한편으로 당시 세상이 섬기던 우상들은 하나같이 엄격하고 무서운 신으로 여기고 이런 신들의 노여움을 푸는 것을 신앙행위임을 강조하였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하나님도 노여움에 시험을 주는 것이라는 오해를 쉽게 할 수 있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새번역_13절)”
*가뭄과 기근이라는 자연현상에다, 당시 종교문화의 인식이 더해져 “하나님도 세상 신과 다름 없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여긴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발현이 가뭄과 기근이며, 여기에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라도 이런 유혹이 없을까….얼마나 힘들었으면….
*야고보는 이런 왜곡된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먼저 바로 잡는다. 외부적인 삶의 환경이 악화 되는 상황이 지속되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른 지식이 없어서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악에게도, 악으로 시험받거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성도가 시험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14절)”라고 말한다. “욕심”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어떤 학자들은 욕심을 일종의 “자기애(自己愛)”라고 했다. 자기 욕심대로 되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시험 주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야고보의 권면은 더 직접적이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새번역_15절)” 욕심을 분별하지 못하고 죄에 이르면 죄로 인해 죽는다는 것이다.
2. 속지 말라(16-18절)
자기애, 욕심에 이끌리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오해하고 그것 때문에 시험(temptation_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새번역_17절)”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절망적인 예루살렘의 패망을 선포하면서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하나님은 평안과 미래, 희망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오고 오는 세대에 펼치시려고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의 저주 아래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려 오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를 (구원자로) 믿기만 하면” 사망, 저주, 고통이 아닌 생명, 평안의 자리로 옮겨 주신다. 지금 야고보의 편지를 받고 있는 성도들이 증거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지역, 환경, 상황등에 의해 누릴 때와 누리지 못하는 때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분명히 말한다.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새번역_18절)”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의와 평강과 미래와 희망을 주신 것이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하여 주셨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혜가 어찌 자연현상이나,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
나는?
-믿음은 “견디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삶과 나뉠 수 없어서 믿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믿음이다. 삶이 믿음이라 할 때 그 삶은 신실한 삶, 견디는 삶을 뜻한다. 믿음이 견디는 믿음인 것처럼 인생도 견디는 인생이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교회도 역시 견디는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사역을 맡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견디는 힘’이다. 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일 자체로도 지치고 때로는 사람 때문에 지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 자체로 견디는 교회다. 견디는 믿음이 이기는 믿음이 된다(약 1:12).
-또한 믿음은 시험받는 일이다. 시험이 견딤으로 통과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 면류관을 준비해 두신다. 그런데 시험이 다 하나님께로 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시험이 ‘자기/나’로부터 온다. 나로부터 난 시험은 욕심의 시험이다. 욕심은 함정이고 수렁이다.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욕심의 수렁이다. 자기가 수렁을 만들고 그 수렁에 자기가 빠진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왜 나를 시험하느냐고 따져 묻는다. 하나님의 시험은 수렁이 아니다. 샘물과 같아서 견디는 자들을 살아나게 하는 시험이다. 욕심의 시험은 견딜 수가 없다. 견딜 힘이 없다. 견뎌도 면류관이 없다. 외려 죄를 낳고 결국 사망에 이른다.
-끝까지 시험을 참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복이 주어진다. 그것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서(4절) 주와 교제하며 영생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모든 시험은 사랑의 시험이다. 시험을 참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나오며, 동시에 시험을 참았을 때 형성되는 성품이 사랑이다.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시험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라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욕심이 시험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이 악에게 시험을 받아 자신을 유혹한 것이라고 핑계하겠지만, 실상은 자기 욕심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여 결국 제 발로 사망에 이르는 길을 간 것이다. 자기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 밖에서 이유와 핑계거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 찾아가 지혜를 구할 분이다. 그에게 핑계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을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하늘에 속한 은사와 선물을 지금도 공급하고 계신다. 어둠에서 빛을 이끌어주시는 분이다. 상황과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 은혜와 보살핌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 분이 어찌 우리를 유혹하여 악에 빠지게 하겠는가?
-시험(test)은 내게 주신 믿음으로 인내하며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욕심이 반응하는 시험(temptation)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temptation)을 이기신 주님의 방법으로 이겨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이었다(마 4:1-11). 말씀으로 시험(temptation)을 이길 수 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오해하며 스스로 시험에 든다. 지나고 보면 나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서운함의 마음이었다. 그러니 시험(temptation)은 깨어 있어 분별하여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요즘 나의 욕심과 하나님의 마음 사이에 갈등이 내 마음에 있다. 여러 상황 속에서 나의 욕심대로 되어지지 않음에서 오는 서운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내게 은혜가 된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새번역_17절)”
-온갖 좋은,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빛의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그 빛을 비추어 주실 것을 갈망한다. 변함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기에 눈 앞으로 다가온 일들이 어두움이 아니라 빛 안에 있음을 믿음으로 선포한다.
-과정과 순간에 따라 마음이 좌불안석하는 나의 연약하기 그지 없는 마음이 주님의 변함없는 빛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은혜가 된다. 감사가 된다.
-앞으로 나에게 올 시험이 temptation(유혹)이 되지 않고 검증(test)이 되도록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자기애”를 버려야 한다. 쑤욱 쑤욱 올라오는 욕심과 자기애의 싹들을 늘 벌초 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야고보는 자기의 형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부르고 자신을 그의 종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독자들을 영적인 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이자, 광야를 사는 ‘흩어진 자’로 부른다(1절).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믿음을 지켜온 구약 열두 지파의 영적인 후손들이다. 그렇기에 참 본향을 소망하며 이 땅을 광야로 여기면서 나그네로 흩어져 사는 자들이다(벧전 1:1). 이 땅에 천착하여 오로지 땅의 자원으로 안전을 추구하려는 마음으로는 믿음도 지킬 수 없고 본향에 닿을 수도 없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광야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반응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본문은 특히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 이것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선명하게 권면한다.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시험(페이라스모스)”은 “test(시험)”과 “temptation(유혹)”의 의미가 함께 있다. 본문은 “시험(test)”의 의미가 더 적합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음을 전제하고 그 “믿음의 수준”을 확인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차원에서 시험이 오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담대한 선언이 나온 것이다.
학창 시절 시험 준비가 잘 된 날은(거의 없었지만) 시험아 빨리 내게 오라 하며 오히려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날은 빨리 이 시험들이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시험을 치르고 나서 “어! 내 실력이 이 정도였구나!”라고 스스로 확인하고 놀라는 경우가 있었다. 본문은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내가 믿음이 있을까? 의심하고, 항상 난 믿음대로 살고 있나? 자문하는 이들이 “시험”을 통해 “아… 내가 믿음으로 살고 있었구나!”를 확인하는 것이다. 희한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더 강렬해진다. 좌절하고 낙망하여 삶의 의지가 꺾일 듯한 상황에서 도리어,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희한한 경험들이 일어난다. 이런 믿음을 확인해 줄 ‘시험(test)’을 만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1. 기뻐하며 온전한 인내를 이루라(1-4절)
삶에서 시험이 반갑고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야고보는 한 가지도 아니라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새번역_2절)” 가당키나 한가? 당장 시험이라는 상처에 더 생채기를 내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3절 말씀이 왜 기쁘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 준다.
“믿음의 시련을 받으면 인내력이 생긴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공동번역_3절)” ‘시련(도키미온)’은 시험(test)이라는 뜻이다. 좀 더 풀이하자면 “검증의 과정이나 결과, 상태”를 가리킨다. 시험을 성도의 믿음을 검증하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믿음의 테스트를 통해 생겨난 “인내”가 웬만한 시련이나 어려움은 쉽게 이겨낼 힘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새번역_4절)”
야고보의 가르침에 따르면 시험은 가능한 한 빨리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다양한 형태로 예외 없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시험이 검증된 믿음과 인내를 만들어내고, 결국엔 우리를 부족함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한다.
지금 당하는 시험은 잠깐이다. 이 시험을 인내를 기르는 기회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너무너무 어렵더라도 말이다. 또 인내해야 할 상황이 기다린다. 그런데 때에 맞춰 주님께서 이 말씀으로 마음을 가다듬게 하신다. 믿음을 더 주시려고, 가려져 있던 믿음을 확인시켜 주시려고, 믿음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하시려고 나에게 “인내”를 주실 것이다.
여기서 ‘인내(휘포모네)’는 단순히 참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 아래 머물러 끝까지 견디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놓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도가 시험 속에서 인내하는 그 자리에,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을 이끌어가시는 “견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험의 과정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심을 확인할 때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니 여러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것을 확인할 뿐더러 이를 확인할 때까지 우리의 마음을 지긋이 인내하도록 도와주셔서 인내의 레벨을 올려 주신다! 웬만한 시련이나 어려움을 쉽게 이겨낼 힘을 길러주는 “여러 가지 시험”… 힘들고 어렵더라도 부딪혀 봐야 하리라.
2. 참 믿음으로 지혜를 구하라(5-8절)
그런데 시험을 당하다 보면 자신의 한계가 분명히 느껴진다. 이 시험을 대처하는 나의 지혜가 왜 이리 부족한지 절감한다. 이렇게 부족함을 느끼고 지혜로움을 찾을 때 누구에게 이 지혜를 빌려야 하는지 구분을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인생은 가까운 사람, 의지할 만한 사람, 시험 당하는 분야의 전문가에게 지혜를 구한다. 또, 요즘은 인터넷을 뒤지면서 지혜를 구한다.
하지만 순서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새번역_5절)”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런 다음 이런저런 것들을 살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시험을 하나님의 안목, 영원의 안목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구하는 것에도 중요한 태도가 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새번역_6-8절)”
의심하지 말고 구해야 한다(6절). 의심하며 구하는 것은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7절). 야고보 사도는 이런 사람의 특징을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늘 두 마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기에 그의 삶에 “안정감”은 없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란, 시험을 만난 상황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보다 더 크게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자신의 믿음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믿음을 구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그러니 시험의 때에 구하는 ‘지혜로운’ 반응은 의심하지 말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정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구하고, 이 시험을 통해 나의 혼돈을 질서로 바꾸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구하라는 의미다.
시험을 만날 때 사람들의 지혜를 얻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지 않는가? 그러느라고 정작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 것 아닌가?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우선이다.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기도부터 해보자! 후히 주시고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임한다!
3. 성도가 자랑해야 할 것_물질에 대한 시험(9-11절)
이 단락에서 갑작스럽게 ‘부와 가난’이라는 주제로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어지는 12절에서 다시 시험의 주제를 다루는 문맥으로 보아 이 부분도 역시 시험과 관련이 있다. 재물이 시험의 원인이 된 상황, 구체적으로는 부유한 불신자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가난한 성도의 상황으로 보인다.
살다 보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대부분 자신의 부함, 성공, 명예, 힘을 자랑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도 똑같은 것을 자랑해야 할까? 아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자랑할 것은 세상에서의 처지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얻은 새로운 신분이라고 말하며 놀라운 반전을 선언한다.
“비천한 신도는 자기가 높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새번역_9절)” 세상의 부요함을 가진 것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계신 주 예수님의 부요함을 자랑해야 한다. 성도는 주 안에서 상속받은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과 자유함이 있기에 마땅히 그의 나라와 의를 자랑해야 한다.
반대로 “부자는 자기가 낮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새번역_10절)” 야고보는 이사야 40:6-7의 풀과 꽃의 비유를 통해 부한 자의 삶이 유한함을 일깨운다. 세상의 부요함은 뜨거운 바람에 잠시 피었다 지는 꽃과 같기에, 부한 자는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야고보의 실제 관심은 가난한 성도에게 있었다. 가난으로 인해 시험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인내로 견디며 성도의 삶을 지속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자랑하는 것이 무엇일까? 자랑하고픈 것이 무엇일까?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늘 세상적인 명예와 성공과 부함을 자랑하고 싶다. 그래서 성공하고 싶고, 명예를 얻고 싶으며, 부자가 되고 싶다. 목사의 길을 걷고 있어도 이런 유혹이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 그 시험의 순간, 우쭐하며 자랑하고 싶은 것이 세상의 성취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위대한 사랑, 그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내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이어야 한다.
나는?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시험은 무엇인가? 그 시험을 빨리 없어져야 할 장애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험이 내 믿음을 확인하고 인내를 길러 나를 온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믿고, 오늘 그것을 ‘기쁘게’ 여기는 연습을 해 보자.
*시험 앞에서 나는 누구에게 먼저 지혜를 구하는가? 사람과 인터넷을 찾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고 있는가? 의심과 두 마음이 있다면 그것부터 솔직히 고백하고 믿음을 구하자.
*돈은 많든 적든 시험이 될 수 있다. 재물은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지만, 자칫 사람보다 귀히 여기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체할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적다고 불평하고 많다고 안주해서도 안 된다. 가진 것이 없어도 주께 인정받아 높아진다면, 가진 것이 많아도 주를 향한 열망에 내 마음이 가난해진다면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백성 아니던가.
*가난해도 하나님 앞에서 받을 영광이 있으면 자랑거리가 되지만, 부자여도 하나님께 받을 영광이 없으면 수치가 될 것이다. 나는 유한한 돈의 영광과 쇠하지 않는 하늘의 영광 가운데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기도로 이 지혜를 얻는 것이 돈으로 영혼을 황폐하게 하는 이 시대를 이기는 길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이 절기는 초막절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대의 처녀들이 춤을 출 수 있었던 절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즐거이 외치며 춤추는 바로 그때, 실로의 여인들이 베냐민 청년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상식을 벗어난,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납치한 뒤에야 당사자들의 마음과 부모의 승인을 타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피하려고 마련한 극히 비상적인 방법이었기에 전례가 될 수는 없었다.
아무튼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어났다. 이방 민족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비상식이 상식처럼 여겨진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 시대는 몰상식마저 상식이 되는 시대였다.
한편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납치당한 여인들의 아버지들을 달랜다. 지파의 멸족은 막아야 하는데 자신들의 딸은 주지 않기로 맹세했으니, 이렇게 납치해서라도 멸족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공동체 전체의 짐을 몇몇 사람에게 떠넘기고 있다.
이렇게 멸족의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난 베냐민 지파는 각자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가족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고통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시작해야 했다. 놀랍게도 훗날 이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 에훗이 나온다(3:15).
1. 결혼으로 시작해 결혼으로 끝나는 책
사사기는 부모의 축복 속에 이루어진 옷니엘과 악사의 결혼으로 시작해, 무참한 폭력 속에서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으로 끝난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지 않을 때 한 사회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약자들에게 떠넘겨지고, 무엇보다 여성들이 가장 큰 희생을 당한다. 레위인의 첩에서 시작해 야베스 길르앗의 여인들과 실로의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타락한 사회가 만든 폭력의 희생자였다.
2. 누구를 위한 회복이었나 (13~18절)
이스라엘 회중은 베냐민 자손을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13~15절). 그러나 이것은 ‘열두 지파의 존속’이라는 명분일 뿐, 그들의 진의는 알 길이 없다. 언약 공동체를 보존하려는 신앙심에서 나온 것인지, 권력을 행사할 영역을 잃는 데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문제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신들의 과오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태도는 ‘만용’이 아니라 ‘수용’인 듯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불평하기보다, 내 죄가 자초한 결과로 여기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여인의 수가 아직 부족했지만, 장로들은 자신들의 딸은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그것을 어기면 화를 당할 것이라며 스스로를 변명한다(16~18절). 아니, 애초부터 그들에게는 희생할 의지가 없었다.
베냐민을 향한 이스라엘의 때늦은 행동들을 보라. 한 지파를 향한 사랑을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종족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강제로 잡아 온 처녀 400명을 베냐민에게 보내고 평화를 선포했다. 그 와중에 고통당한 수많은 여인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
베냐민을 지나치게 응징한 데 대한 후회는 있었지만, 야베스 길르앗에 가한 폭력에 대해서는 일말의 반성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무슨 평화 선포인가.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살육과 약탈을 저지르고도 책임지는 지도자는 하나도 없다. 회개와 반성은커녕, 수습한다며 하는 일이 또 다른 살육과 진멸, 납치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3. 절기를 이용한 납치 계획 (19~24절)
부족한 신부 200명을 구하려는 이스라엘의 묘안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첫 해결책이 실패하자 장로들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계획을 추진한다. 베냐민 남자들에게 실로의 처녀들을 납치하도록 한 것이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불법을 묵인하고 편법을 자행한다. 그들의 영적·도덕적 무감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들의 묘안을 이루려고 여호와의 절기까지 이용한다. 실로의 처녀들이 명절을 지키러 나올 때 납치하도록 사주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은혜를 베풀라”고 말하라고 일러 준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실로의 처녀들을 대속물로 내준 일은, 레위인이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자기 첩을 내준 일과 무엇이 다른가?
4. 사사기의 결론 (25절)
25절은 사사기의 결론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를 좀 더 정확하게 풀면 이렇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말씀이 없으면 죄는 실수로 바뀌고, 통회해야 할 일은 어쩔 수 없는 유감스러운 일로 변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았기에 자기 눈에 옳은 대로만 행했다. 누구도 남을 판단하거나 응징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죄악만 확대 재생산하고 죄질을 깊게 할 뿐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수록 상황은 더 꼬여 갔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내놓은 처방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몸부림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전통과 꾀로 해결하려 하니 자꾸 빈틈이 생겼다. 조금만 고민하고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생각과 계획을 다졌다면 금세 알아챘을 텐데, 꽉 막힌 생각과 시선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수렁에 빠졌다. 죄가 반복되고 가중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외면한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 소견이 난무하니 악영향이 그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선봉에 서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부대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기리시탄(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상당수가 루터교 성도였지만 나치의 광기를 막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는 조선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침묵했다. 도대체 왜 이런 모습이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가?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의 평범성”에 젖어 든다. 악은 몇몇 악인이 저지르는 것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눈앞의 악행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저항하지 않을 때, 그것은 “평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누구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거나 깨닫는 이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조차 하지 않으니, 총회에서 결정한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주저 없이 행한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악의 평범성”이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은 이스라엘에게, 꼬인 상황 속에서 내놓은 고육지책은 가장 합리적이고 탁월한 묘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기 그지없고, 후세에 부담을 가중시키는, 혜안 없는 고통의 결정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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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문제는 베냐민 지파가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분노가 잦아들고 난 뒤에야 이스라엘 총회에 뉘우침이 일어났다(6절). 어쩌면 베냐민 지파의 무장한 자들만 죽였어야 했고 농부들이나 목동, 부녀와 아이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가 없어지게 생겼다고 대성통곡한다(2-3절). 이런 이율배반적인 사람들이 어디 있나? 자신들이 결정하고 결행한 일의 결과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고 원망한다. 그렇게 하기 전에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먼저 아닐까?
어찌 되었든 그들은 림몬 바위에 피해 있는 베냐민 사람 6백 명을 통해 지파를 다시 세워야 했다(6-7절). 훗날 그들에게 평화를 공포하고 다시 형제로 받아들이지만(13절), 문제는 이들 6백 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하는데 이미 누구도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찾은 방법은 어처구니없게도,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을 칼날로 쳐서 “모든 남자와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고(11절)” 결혼할 수 있는 처녀 400명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2절). 기가 막히게도 이런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닥치는 대로 베냐민 지파를 멸절시킨 후 뒤늦게 정신 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자신들의 딸은 줄 수 없으니,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성읍을 전멸시키고 처녀만 남겨 두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하고 행한 삶에는 결국 “폭력의 악순환”만 남을 뿐이다.
*성급하게, 감정에 치우쳐 결정한 일 때문에 아픔과 상처만 남은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 다시 한번 묻는 지혜와 느긋함이 있어야 하겠다.
*한편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여전히 하나님과의 형식적인 관계가 드러나 씁쓸하다.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까지 드렸다(4절). 그러나 멸절에 가까운 베냐민 지파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앞선 전쟁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하다. 두 번째 패배 후 그들은 벧엘에서 울고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그 자리에서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는 물음을 하나님께 다시 올려 드려 승리의 약속을 받았다(20:26-28). 이번에도 같은 벧엘에서 울고 같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2-4절). 겉모습은 똑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는 원망만 있을 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이 없다. 전쟁을 마친 후 부르짖고 제단을 쌓는 “종교적인” 행위는 잘했지만, 정작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패배의 자리에서 잠시 회복되었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승리 후에는 다시 형식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묻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다리지도 않았다!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말만 주장하고, 자기들끼리 맹세하고 되새기며, 자기들의 해결책만 찾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또 다른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그것도 힘없고 연약한 성읍 하나를 주저 없이 진멸해 버린다(8-11절). 이런 말도 안 되는 폭력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안에서 버젓이 일어났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당황스러운 상황 앞에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릴 줄은 알아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전쟁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의 만행을 응징하는 데 성공하지만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다. 과도한 징벌로 베냐민 지파가 거의 멸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한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한 것 때문에 더욱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다(1, 7절). 그들의 과도한 징벌과 경솔한 맹세가 한 지파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었다. 부주의하고 사려 깊지 못한 약속이나 맹세는 때로 후회의 단초가 되고, 나와 공동체를 곤경에 빠뜨리는 올무가 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20:26) 벧엘에 모여 하나님 앞에서 통곡한다. 원망 섞인 그들의 비통한 항의에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번제와 화목제에도 여전히 침묵하신다(2~4절). 20장 28절에서 분명히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침묵하신다. 이는 ‘침묵’으로 그들을 징계하신 것이다. 진실한 참회와 순종 없이 종교적 의식만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곤경을 모면할 때만 필요한 편의적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도 않으시고, 이용당하지도 않으신다.
-명령하지도 않은 진멸을 묻지도 않은 채 자의적으로 단행했으면서도,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비열함이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들은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울었고 다음 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나, 정작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울지 않았고, 진심으로 회개한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지도 못했다. 그저 번제라는 형식에 기댄 채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몰락을 막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다가 또 하나의 맹세를 기억해 낸다. 그것은 미스바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리라는 맹세였다(5~9절).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맹세는 글자 그대로 지키는 척하며 피해 갈 길을 찾고, ‘유리한’ 맹세는 서둘러 실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이 찾은 방책은 또 한 번의 잔인한 살상을 예고한다. 전쟁을 앞두고 결의한 두 번의 성급한 맹세는, 소중한 딸을 잃은 입다의 뼈아픈 서원(11장)과 다를 바 없었다. 자기들의 과오를 더 큰 과오로 해결하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결국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응징(?)한다. 12,000명의 용사를 보내 젊은 처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살육한다(10~12절). 명분을 위해 동족을 살상하는 이 잔혹한 행동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방식이 아니었다. 철저히 가나안의 방식이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신념에 함몰된 데서 오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오만이었다.
-이 잔혹한 행동에 앞서 하나님은 철저히 외면되었다. 묻지도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고서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 살아남은 처녀의 수를 세어 보니 400명뿐이었다. 200명이 여전히 부족했다(14절).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했지만, 죄만 쌓고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열심은 전무하고, 오직 자기 뜻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음의 열매였다.
-베냐민 지파에게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전에 이 악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경위를 물었으나(20:12-13), 길르앗 야베스 성읍에게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정의로운 전쟁에 반대한 것으로 보았고, 이스라엘 총회에 대항하는 불순한 집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그들이 동참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당연히 응징하고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무지하고 무식하며 무도한 백성이라니…
-끊임없이 반복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교만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가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십자가를 담담히 감당하는 것이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것만이 반복되는 죄악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는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형식은 하나님과 함께한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들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막으려고 또 다른 동족을 살해하는 이 무도함이 사사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민낯이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일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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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동족끼리의 싸움인데 이스라엘 연합군의 전쟁 방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베냐민을 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35절), 그 심판의 도구였던 이스라엘의 전쟁 방식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운 격이다. 승리했으나 승리를 누리지 못한 전쟁이 되었다. 가장 막내 지파는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고, 나머지 지파들도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역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특히나 내전은 더더욱 그렇다.
*베냐민 지파는 전쟁의 최대 피해를 자초했다. 자신들 지파 안에서 일어난 악행을 마땅히 책임지고 해결했어야 했다. 악행을 척결하여 정의를 세웠어야 했다. 하지만 이를 정치화하여 전쟁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어떤 명분이든, 어떤 정치적 이유이든 죄와 악을 두둔한 대가는 반드시 치를 수밖에 없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했다. 베냐민은 자신들의 잘남과 능력, 두 번의 승리라는 경험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더욱 키워 버렸다. 그야말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큰코다쳤다”. 나도 이를 잘 기억해야겠다.
*이스라엘 지파들도 잘한 것은 아니다. 레위인의 거짓 증언에 놀아났다. 좀 더 신중하게 문제에 접근했어야 했다. 분별없이 동족을 서둘러 응징했고, 또한 지나치게 응징했다. 과했다. 과해도 너무 과했다. 이런 치열한 전쟁 끝에 서로에게 남은 것은 슬픔과 고통뿐이었다. 어느 편에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 막을 내렸다…
나는?
-‘가나안화’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가 패자였다.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인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알 수 없게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과, 고의적인 반항으로 회개할 줄 모르는 베냐민 지파에게 채찍을 드신다. 가나안 족속을 멸하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 물론 심판 중에도 자비를 잃지 않으신다(47절). 앞선 두 사건(미가와 단 지파 이야기 17~18장, 레위인과 기브아 이야기 19~21장)이 교훈하듯이, 하나님은 언약이 요구하는 대로 다른 신을 곁에 두지 않고, 이웃에게 인자와 공의를 행하며, 약자와 나그네에게 관대할 때 비로소 자기 백성이라 인정해 주실 것이다.
-자만이 ‘화’를 불렀다. 두 번의 대승으로 기세등등한 베냐민 자손은 퇴각하는 상대를 보며 승기를 잡은 줄 알고 추격한다. 하지만 상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져 몰살당하고 존립 위기에 처한다(31~36절). 두 번의 승리가 그들에게는 독이 되었다. 이스라엘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유인하는 줄도 모르고 거침없이 성 밖으로 나가 추격했고 무모하게 성을 비워 두었다. 이것은 ‘화'(악, 34, 41절)를 통해 베냐민 지파의 ‘악'(12~13절)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본문은 같은 단어로 베냐민이 두둔한 ‘악’과 그들에게 닥친 ‘화’를 함께 말한다. 내 안의 악을 제거하지 않는 한 심판의 복병을 피할 안전지대는 없다.
-오만하게 전면전을 펼치다가 성을 이용해 싸우는 베냐민에게 두 차례 패했던 이스라엘 연합군은, 이번에는 매복과 유인을 함께 쓰는 양동 작전을 펴서 승리한다. 수적 우세만 믿고 섣불리 공격하던 이전과 달리, 적군의 심리(자만)를 이용하여 적을 끌어내는 전술이다. 교만이 패배를 불러왔다면,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낮아진 뒤(26절) 얻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28절)는 약속이 승리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베냐민을 치시매(35절)’라는 개입이 없었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싸움은 치열하고 맹렬했다(34절). 승리는 전술의 결과이기 전에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 그런데 승리한 이스라엘도 패배한 베냐민 자손도 이 전쟁의 의미(심판)를 알지 못한다. 한결같은 순종과 충성이 가나안에서의 승리와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과, 언약에 충실할 때 언약의 땅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 이후다. 하나님 앞에 낮아져 승리를 얻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도 않으셨는데 거의 전멸 수준으로 베냐민의 성읍과 가축과 사람을 쳤다(48절). 이처럼 사사 시대는 가장 선한 일을 하는 와중에도 악한 짓이 사라지지 않던 비극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되 진멸하지 않으신다. 이만 육천칠백 명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육백 명,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넉 달 동안 숨은 자들뿐이었다(47절). 그마저도 베냐민 지파 자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수였다. 심판 중에도 살아남았다면, 자기 죄로 인해 당한 곤경을 불평하기보다 살려 주신 주권자의 섭리를 묻고 회개해야 했다.
-이스라엘에게 두 번의 패배를 주신 분도 여호와시고, 베냐민에게 최후의 패배를 안기신 분도 여호와시다. 둘 모두 하나님께 심판을 당했다. 레위인의 악행, 그의 말에 무분별하게 동조하여 동족을 향해 과도한 응징을 시도한 이스라엘, 자기 지파의 죄악에 눈감고 전투력만 믿었던 베냐민,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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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입교·학습 신청 안내 믿음의 고백을 준비하는 시간. 11월 1일(주일), 더온누리교회에서 세례식이 있습니다. 세례·입교·학습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3층 로비에서 신청서를 작성해 주시고, 해당 문답 교육 일정에 꼭 참석해 주세요. 🤍 📖 문답 교육 안내 ▪️ 청장년 | 세례·입교·학습 1회차: 10월 22일(목) 저녁 7시 30분 2회차: 10월 29일(목) 저녁 7시 30분 ▪️ 청소년 | 세례·입교·학습 1회차: 10월 24일(토) 오후 3시 2회차: 10월 31일(토) 오후 3시 ▪️ 유아 세례 교육 10월 31일(토) 오후 3시 🕊 문답식 10월 31일(토) 오후 5시부터 세례식 참석자를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 세례식: 2026년 11월 1일(주일) 📝 신청: 교회 3층 로비에서 신청서 작성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의 고백을 함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더온누리교회 #세례신청 #세례식 #입교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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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워십데이 찬양집회 RE:WORSHIP DAY 다시, 예배의 자리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는 시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0월 25일 주일 3부 예배는 리워십 찬양팀과 김지혜 전도사님이 함께하는 찬양집회로 드립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 찬양하고, 말씀과 간증을 통해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 📅 2026년 10월 25일(주일) 🕧 낮 12시 30분 · 주일 3부 예배 📍 더온누리교회 🎙 찬양 인도·간증: 김지혜 전도사 (현 힐스워십팀 예배인도자) 🎶 리워십 찬양팀과 함께 소중한 분들과 함께 오셔서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더온누리교회 #리워십데이 #김지혜전도사 #찬양집회 #다시예배의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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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비기닝 선교학교 2주차. 더온누리교회의 단기선교 - 김종홍 목사. . . . #더온누리교회 #더비기닝선교학교 #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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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10월 11일 더원공동체 예배풍경입니다! 망하는 지름길, 팀킬 [사사기 20:19-28] #더원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청년부 #더원공동체 #전주청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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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 더함공동체 주일 4부예배 💗 설교 : 이득근목사님 본문 : 사사기 20장 8-28절 제목 : 답. 정. 너 적용찬양 : 말씀 앞에서 기도 : 임윤섭 리더 🎉 블레싱 생일 : 13일 곽효승 부장 집사님 15일 조문기 16일 이유미 📢 광고 [더함 야외예배 안내] 시간: 2026.10.25(주일) 오후 3시 장소: 점점더(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반길 13) [더말씀으로 가을 사경회] 가을맞이 더말씀으로 사경회가 오는 10월 18일(주일)~21일(수)까지 진행됩니다. 김형국 목사 (하나복 대표)가 ”복합 위기의 시대, 어떻게 살까?“라는 주제로 요엘서를 강해합니다. 김형국 목사님이 사역하신 요엘서 본문을 교회 홈페이지와 교회앱을 통해 묵상하실 수 있습니다 사경회 전에 미리 묵상해보기를 권면드립니다. [LOVE is ONE 콘서트] 월드비전과 더온누리교회에서 함께 주관하는 ’조혜련의 LOVE is ONE 콘서트‘ 10월 23일(금) 저녁 8시에 더온누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여니엘, 리노, 이지훈, 폴송 사역자께서 함께 참여합니다. QR코드를 통해 참여신청을 해주시기바랍니다 [단기선교 신청] 2027년 2월에 캄보디아 깜퐁스프와 깜퐁츠낭(스쿤 포함)을 차례로 방문해 의료·미용·어린이 사역으로 섬깁니다. 현지 교회가 세워지고 공동체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선교를 목표로 합니다. 신청기간은 11월 30일 까지입니다. 큐알코드를 이용해서 신청해주세요. 일정 – 전일정 참가: 2/3(수)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1진(깜퐁스프): 2/3(수)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 2진: 2/6(토)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안과팀: 2/4(목)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문의 – 이홍기 목사 [세례 신청] 11월 1일 주일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아래의 문답 교육 시간에 꼭 참석 바랍니다. 신청은 3층 로비에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신청해주세요. [청장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2(목) 저녁 7시 30분 2회차 – 10/29(목) 저녁 7시 30분 [청소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4(토) 오후 3시 2회차 – 10/31(토) 오후 3시 [유아 세례] 교육 – 10/31(토) 오후 3시 * 문답식은 10월 31일(토) 오후 5시부터 세례식 참석자를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부부세움학교 캠프 스탭 모집] 2026년 11월 6일(금)~7일(토) 1박 2일 캠프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시간은 6일 오후 5시부터 7일 오후 5시입니다. 캠프를 진행할 때 미취학+초등학교 학생들을 섬겨주실 분을 찾고 있습니다. – 문의 : 천현수 목사 – 이건우 집사 – 김은실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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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10월 4일 더원공동체 예배풍경입니다! 끝없는 유혹, 어떻게 이기나요? [사사기 16:15-22] #더온누리교회 #더원공동체 #더원 #더온누리교회청년부 #전주청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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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더함공동체 4부 주일 예배 💕 설교 : 이득근목사님 본문 : 사사기 17장 1-13절 제목 : 하나님이 없는 예배 적용찬양 : 주님만이 왕이십니다 + 위대하신 주 기도 : 장영일 리더 🎉 블레싱 생일 : 7일 오가윤, 윤혜주, 최윤도 📢 광고 [더함 가정 분가안내] 윤섭네-정혜빈,박기원,오가윤,조문기,김선미,진영은,최윤도 승원네-심예은,박서현,윤봉민,채효인,양두리,임예지,신동석 [1달 1권, 더함책모임 멤버모집]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선포는 바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우리 더함공동체가 지향하는 하나님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김형국 목사의 [하나님나라의 도전]을 함께 읽으며, 깨진 세상 속 피상적인 신앙을 넘어 예수께서 전하신 온전한 복음과 우리의 삶의 방향을 깊이 있게 나누고자 합니다. *10월의 책 : 김형국, 하나님나라의 도전(이미아직) -주제 : ”맨날 말하는 하나님나라, 도대체 뭔데? 내 현실이랑 무슨 상관인데!“ (부제: 깨진 세상 속 모든 크리스천이 꿈꾸는 진짜 세계) -호스트 : 장영일 리더(영일이랑네) -일정/장소 : 10.11, 18 주일 오후 5시 30분 / 지하 더함공동체실 -신청/연락처 : 장영일 리더 [더함 야외예배 안내] 2026.10.25 야외예배예정 구체적인 시간과 일정은 추후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더말씀으로 가을 사경회] 가을맞이 더말씀으로 사경회가 오는 10월 18일(주일)~21일(수)까지 진행됩니다. 김형국 목사 (하나복 대표)가 ”복합 위기의 시대, 어떻게 살까?“라는 주제로 요엘서를 강해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말씀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LOVE is ONE 콘서트] 월드비전에서 주관하는 ’조혜련의 LOVE is ONE 콘서트‘ 10월 23일(금) 저녁 8시에 더온누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여니엘, 리노, 이지훈, 폴송 사역자께서 함께 참여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부부세움학교 스텝 모집] 2026년 11월 6일(금)~7일(토) 1박 2일 캠프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시간은 6일 오후 5시부터 7일 오후 5시입니다. 캠프를 진행할 때 미취학+초등학교 학생들을 섬겨주실 분을 찾고 있습니다. 신청은 QR코드로 신청해주세요. 문의: 천현수 목사 / 이건우 집사 / 김은실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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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더 말씀으로 가을 사경회 “복합위기의 시대, 어떻게 살까?”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김형국 목사님의 요엘서 강해를 통해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말씀 앞에서 돌아보는 시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 10월 18일(주일)~21일(수) 📍 더온누리교회 🎙 김형국 목사 · 하나복DNA네트워크 대표 ▪️ 10/18(주일) 우리가 사는 세상 괜찮은가? — 요엘 1장 ▪️ 10/19(월) 주님의 날 — 요엘 2:1–27 ▪️ 10/20(화) 전신자 선지자? — 요엘 2:28–32 ▪️ 10/21(수) 위기에도 소멸하지 않는 공동체 — 요엘 3장 소중한 분들과 함께 오셔서 말씀 안에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가을사경회 #김형국목사 #요엘서강해 #말씀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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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혜련의 LOVE is ONE 콘서트 월드비전과 더온누리교회가 함께하는 사랑과 은혜의 시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조혜련과 여니엘, 이지훈, 폴송, 리노 사역자가 함께합니다. 🎶 📅 10월 23일(금) 🕢 저녁 7시 30분 📍 더온누리교회 소중한 분들과 함께 오셔서 은혜를 나누는 귀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더온누리교회 #월드비전 #조혜련 #LOVEisONE콘서트 #전주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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