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사사 돌라와 야일 그리고 입다의 등장 배경 [사사기 10:1-18]
아비멜렉 사후에 ‘돌라(잇사갈 지파)’가 사사로 세워져 에브라임 산간지방 사밀에서 23년 동안 활동했다. ‘야일(길르앗 사람/므낫세 지파)’은 22년 동안 사사로 활동했고, 길르앗에 ‘하봇야일(야일의 촌락들)’을 형성하며 살았다.
그리고 입다가 사사로 세워지기 전, 그의 출현 배경을 먼저 설명한다. 극심한 종교적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에서 시작된 암몬 족속의 억압이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역까지 확대된다. 무려 18년 동안의 압제였다. “그때에야(새번역_10절)”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며, 자신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백성에게 신물이 나셨음을 드러내신다. “지금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부르짖고 구원해 달라고 하라(13-14절)”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며 “그러나 오늘만은 우리를 구출하여 주십시오(새번역_15절)”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주님만 섬기겠노라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새번역_16절).
하지만 겉모습은 그렇게 변했을지 몰라도,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누가 먼저 암몬과 싸우겠는가? 그 사람이 길르앗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17-18절).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으나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계획으로 암몬을 물리치려 한다. 이처럼 변화는 참 어려운 것이다.
1. 점점 더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1-5절)
돌라와 야일에 대한 기록은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무난하게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역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로서 과연 합당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먼저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분명한 업적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음에도 ‘에브라임 지파의 산지 사밀’에서 거주하다 그곳에 묻힌다(1-2절). 각기 지파별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는 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그것도 산지에서 살았을까?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분배받은 땅을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하다.
반면 ‘야일’은 사사로서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지 아들 30명을 두었고, 그들이 어린 나귀 30마리를 탔으며, 30개의 성읍(하봇야일_야일의 마을들)을 가졌다고 기록한다. 마치 기드온처럼 많은 부인을 두고, 왕이 누릴 법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암시한다. 특히 사사들 중에서 성읍을 소유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돌라는 분배받은 기업을 떠나 살았고, 야일은 하나님의 땅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하고 축재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사”였다. 혹자는 이들의 사사로서의 업적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그들의 삶을 축약하면서 사사로서의 업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에 더 초점을 두었을 수도 있겠다. 돌라와 야일은 사사로서 특출한 업적이 없다. 그만큼 평안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장 성실하게 지켜져야 할 “가나안 땅” 분배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시며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따라 살겠노라 선언하였던 가나안 땅 정복 전쟁 초입의 “세겜 언약”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맞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지위(직분)에 걸맞은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삶의 열매를 남겼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맺힌 열매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산다!
1. 사사 ‘입다’의 등장 배경(6-18절)
입다가 등장하는 시대는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활동하던 시기와 비교하여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사사기의 전형적인, 하나님을 떠난 징조인 “다시(또)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는 고발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의 대상인 우상이 바알과 아스다롯에 국한되지 않고 확대되었다. 죄는 반드시 전염되고 불어난다. 영향력은 축소되지 않는다. 확대 재생산된다.
먼저 우상의 종류가 그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에 머문 것이 아니라, 아람(시리아)과 시돈(가나안 북부)의 신들, 모압과 암몬(가나안 동부), 블레셋(가나안 남서 해안) 사람의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한다. 가나안 땅을 중심에 놓고 사방의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거침없이 따라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새번역_7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신 것이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런데 18년 동안 억압하고 학대당한 일을, 암몬 족속이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방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다. 블레셋의 억압은 향후 삼손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13:1).
또 암몬 족속의 억압은 단지 요단 동편에 머문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가나안 중앙에서 남단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7-9절).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9절).” “곤고(야차르)”는 “매다, 갑갑하다, 비좁다, 곤란하다”라는 뜻이다. 매우 쓰라린 고통 중에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는 남서쪽의 블레셋과 요단 동편에서 침략하는 암몬 족속의 억압을 함께 받아 그 고통이 배나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0절은 ‘그때에야(새번역)’로 시작해도 무방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기간이 18년이나 지난 “그때에야” 부르짖었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 누린 45년의 평화 이후에 18년 동안 하나님 목전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암몬 족속에게 심한 곤고를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슬프셨다. 벌써 몇 번째인가? 너무도 괴로우셨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곧바로 구원을 행하시지 않는다. 출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여 주셨던 것을 먼저 상기시키신다(11-12절). 그리고는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13절). 너희가 그토록 섬긴 이방 신들에게 가서 구해 달라고 하라(14절)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18년 동안 섬겨 오던 이방 신상들을 깨뜨리며 “오직 주님만 우리를 구하실 수 있으니 구해 주십시오!” 매달리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근심(고심)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15-16절).
*염치 불고하고 이 길밖에 없음을 외치며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으로 둘러싼 이방 우상들을 애초에 쫓아냈어야 했다. 애초에 진멸했어야 했다. 자초한 곤고함에 하나님의 고민이 깊어 간다.
나는?
-사사 돌라와 야일은 아비멜렉의 폭정이 가져온 위기와 혼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45년 동안 안정된 통치를 이룬다(1~5절). 하지만 다른 사사들과 달리 3대에 걸쳐 돌라의 가문이 소개되고, 야일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를 타며 성읍을 소유하는 모습은, 기드온 가문에서 대두된 ‘통치 세습’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지도자임을 암시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조건에서도 자발적인 가난과 그로 인한 불편함을 자청하며, 물질이 우상이 된 이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사사 돌라가 다스릴 때 이스라엘이 누린 평화는 고작 23년이었다. 타락이 반복되고 심해질수록 그들이 누린 평화의 기간은 짧아졌다. 사사 야일은 아들 30명에 나귀 30마리, 성읍 30개를 가졌다. 그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치 기드온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권력 집중이었다.
-이스라엘의 고질병은 어김없이 터졌다. 여호와를 버리고 참 많은 신들을 섬겼다. 여호와는 그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그들을 파셨다. 18년 동안이나 그들의 고통에 침묵하셨다. 암몬은 강성해졌고 이스라엘은 악화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다(6~9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떠나 더 많은 우상들을 섬기면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더 비참한 이방의 노예가 되어 곤고함이 더할 뿐이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방의 헛된 우상들(신 7:4)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더욱 가중된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들의 구원자도, 성민이라는 신분도, 제사장 나라의 사명도 모두 망각한 그들을 향해 분노하신다(17~18절). 하지만 그 불타는 분노가 질투하시는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것이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다시” 악을 행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지만, 자기 백성이 처한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신다(10~16절). 번번이 잘못을 뉘우쳤다가 또다시 죄를 범하는 백성이지만, 못난 자식을 둔 아비처럼 또 받아 주시고 들어주신다. 하지만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용서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빠른 구원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더 진실한 회개를 바라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자신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구원을 호소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택한 신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방 신들을 제거한 후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에 근심하신다. 기억해야 한다. 회개 공식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만이 여호와를 움직인다.
-명백하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의 평화는, 하나님만 온전히 섬길 때 그 백성의 삶이 얼마나 평탄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는 왕이 없어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알게 하신다.
-돌라와 야일의 업적이 없는 것은 도리어 그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분명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돌라가 분배받은 땅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그 평화가 제한된 평화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야일의 “왕 같은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평화를 누리면서도 다시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 간 사사의 모습이어서 씁쓸하다. 기드온이 이렇게 살다가 아비멜렉이 출현하지 않았던가!
-자녀들에게 풍족한 삶을 남겨 주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남겨 주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넘치도록 풍성한 삶은 아비멜렉과 같은 이단아를 낳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다시 이방 우상들에게로 넘어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평화로움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누릴 때 변질되지 않는다.” 지키라 하신 명령을 꿋꿋하게 지켜 살아낼 때, 지금 누리는 평화가 다음 세대에게도 평화가 된다. 나의 자녀들에게 남겨 줄 세상이 지금 내가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가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입다가 사사로 세워지기 전, 그의 출현 배경을 먼저 설명한다. 극심한 종교적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에서 시작된 암몬 족속의 억압이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역까지 확대된다. 무려 18년 동안의 압제였다. “그때에야(새번역_10절)”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며, 자신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백성에게 신물이 나셨음을 드러내신다. “지금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부르짖고 구원해 달라고 하라(13-14절)”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며 “그러나 오늘만은 우리를 구출하여 주십시오(새번역_15절)”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주님만 섬기겠노라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새번역_16절).
하지만 겉모습은 그렇게 변했을지 몰라도,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누가 먼저 암몬과 싸우겠는가? 그 사람이 길르앗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17-18절).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으나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계획으로 암몬을 물리치려 한다. 이처럼 변화는 참 어려운 것이다.
1. 점점 더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1-5절)
돌라와 야일에 대한 기록은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무난하게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역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로서 과연 합당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먼저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분명한 업적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음에도 ‘에브라임 지파의 산지 사밀’에서 거주하다 그곳에 묻힌다(1-2절). 각기 지파별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는 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그것도 산지에서 살았을까?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분배받은 땅을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하다.
반면 ‘야일’은 사사로서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지 아들 30명을 두었고, 그들이 어린 나귀 30마리를 탔으며, 30개의 성읍(하봇야일_야일의 마을들)을 가졌다고 기록한다. 마치 기드온처럼 많은 부인을 두고, 왕이 누릴 법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암시한다. 특히 사사들 중에서 성읍을 소유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돌라는 분배받은 기업을 떠나 살았고, 야일은 하나님의 땅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하고 축재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사”였다. 혹자는 이들의 사사로서의 업적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그들의 삶을 축약하면서 사사로서의 업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에 더 초점을 두었을 수도 있겠다. 돌라와 야일은 사사로서 특출한 업적이 없다. 그만큼 평안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장 성실하게 지켜져야 할 “가나안 땅” 분배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시며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따라 살겠노라 선언하였던 가나안 땅 정복 전쟁 초입의 “세겜 언약”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맞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지위(직분)에 걸맞은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삶의 열매를 남겼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맺힌 열매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산다!
1. 사사 ‘입다’의 등장 배경(6-18절)
입다가 등장하는 시대는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활동하던 시기와 비교하여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사사기의 전형적인, 하나님을 떠난 징조인 “다시(또)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는 고발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의 대상인 우상이 바알과 아스다롯에 국한되지 않고 확대되었다. 죄는 반드시 전염되고 불어난다. 영향력은 축소되지 않는다. 확대 재생산된다.
먼저 우상의 종류가 그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에 머문 것이 아니라, 아람(시리아)과 시돈(가나안 북부)의 신들, 모압과 암몬(가나안 동부), 블레셋(가나안 남서 해안) 사람의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한다. 가나안 땅을 중심에 놓고 사방의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거침없이 따라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새번역_7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신 것이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런데 18년 동안 억압하고 학대당한 일을, 암몬 족속이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방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다. 블레셋의 억압은 향후 삼손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13:1).
또 암몬 족속의 억압은 단지 요단 동편에 머문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가나안 중앙에서 남단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7-9절).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9절).” “곤고(야차르)”는 “매다, 갑갑하다, 비좁다, 곤란하다”라는 뜻이다. 매우 쓰라린 고통 중에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는 남서쪽의 블레셋과 요단 동편에서 침략하는 암몬 족속의 억압을 함께 받아 그 고통이 배나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0절은 ‘그때에야(새번역)’로 시작해도 무방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기간이 18년이나 지난 “그때에야” 부르짖었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 누린 45년의 평화 이후에 18년 동안 하나님 목전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암몬 족속에게 심한 곤고를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슬프셨다. 벌써 몇 번째인가? 너무도 괴로우셨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곧바로 구원을 행하시지 않는다. 출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여 주셨던 것을 먼저 상기시키신다(11-12절). 그리고는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13절). 너희가 그토록 섬긴 이방 신들에게 가서 구해 달라고 하라(14절)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18년 동안 섬겨 오던 이방 신상들을 깨뜨리며 “오직 주님만 우리를 구하실 수 있으니 구해 주십시오!” 매달리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근심(고심)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15-16절).
*염치 불고하고 이 길밖에 없음을 외치며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으로 둘러싼 이방 우상들을 애초에 쫓아냈어야 했다. 애초에 진멸했어야 했다. 자초한 곤고함에 하나님의 고민이 깊어 간다.
나는?
-사사 돌라와 야일은 아비멜렉의 폭정이 가져온 위기와 혼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45년 동안 안정된 통치를 이룬다(1~5절). 하지만 다른 사사들과 달리 3대에 걸쳐 돌라의 가문이 소개되고, 야일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를 타며 성읍을 소유하는 모습은, 기드온 가문에서 대두된 ‘통치 세습’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지도자임을 암시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조건에서도 자발적인 가난과 그로 인한 불편함을 자청하며, 물질이 우상이 된 이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사사 돌라가 다스릴 때 이스라엘이 누린 평화는 고작 23년이었다. 타락이 반복되고 심해질수록 그들이 누린 평화의 기간은 짧아졌다. 사사 야일은 아들 30명에 나귀 30마리, 성읍 30개를 가졌다. 그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치 기드온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권력 집중이었다.
-이스라엘의 고질병은 어김없이 터졌다. 여호와를 버리고 참 많은 신들을 섬겼다. 여호와는 그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그들을 파셨다. 18년 동안이나 그들의 고통에 침묵하셨다. 암몬은 강성해졌고 이스라엘은 악화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다(6~9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떠나 더 많은 우상들을 섬기면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더 비참한 이방의 노예가 되어 곤고함이 더할 뿐이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방의 헛된 우상들(신 7:4)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더욱 가중된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들의 구원자도, 성민이라는 신분도, 제사장 나라의 사명도 모두 망각한 그들을 향해 분노하신다(17~18절). 하지만 그 불타는 분노가 질투하시는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것이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다시” 악을 행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지만, 자기 백성이 처한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신다(10~16절). 번번이 잘못을 뉘우쳤다가 또다시 죄를 범하는 백성이지만, 못난 자식을 둔 아비처럼 또 받아 주시고 들어주신다. 하지만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용서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빠른 구원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더 진실한 회개를 바라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자신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구원을 호소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택한 신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방 신들을 제거한 후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에 근심하신다. 기억해야 한다. 회개 공식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만이 여호와를 움직인다.
-명백하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의 평화는, 하나님만 온전히 섬길 때 그 백성의 삶이 얼마나 평탄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는 왕이 없어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알게 하신다.
-돌라와 야일의 업적이 없는 것은 도리어 그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분명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돌라가 분배받은 땅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그 평화가 제한된 평화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야일의 “왕 같은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평화를 누리면서도 다시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 간 사사의 모습이어서 씁쓸하다. 기드온이 이렇게 살다가 아비멜렉이 출현하지 않았던가!
-자녀들에게 풍족한 삶을 남겨 주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남겨 주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넘치도록 풍성한 삶은 아비멜렉과 같은 이단아를 낳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다시 이방 우상들에게로 넘어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평화로움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누릴 때 변질되지 않는다.” 지키라 하신 명령을 꿋꿋하게 지켜 살아낼 때, 지금 누리는 평화가 다음 세대에게도 평화가 된다. 나의 자녀들에게 남겨 줄 세상이 지금 내가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가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아비멜렉의 최후 [사사기 9:46-57]
요담의 저주가 성취되었다. 아비멜렉은 가알의 농간에 넘어간 세겜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다. 세겜 망대에 피해 있던 나머지 주민들은 엘브릿 신전의 보루(은밀한 곳)로 피신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그 보루의 입구에 불을 질러 천 명을 몰살시켰다. 이복형제 70명을 몰살시키며 왕에 오른 그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세겜 사람들마저 진멸한 것이다(46-49절).
세겜 사람들의 불의함에 대해 요담이 선포한 대로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20절)” 하신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비멜렉의 불이 세겜을 불살랐다.
아비멜렉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겜과 동맹 관계였던 데베스까지 공격한다. 데베스 주민들은 밀리고 밀려 “어느 견고한 망대”로 도망하여 결사 항전을 벌였다. 아비멜렉은 여기에서도 주민들이 가득 피신해 있는 망대를 불사르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두개골을 깨뜨린다.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 없어, 그는 무기를 든 청년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라고 하여 최후를 맞이했다. 아비멜렉을 따라 세겜을 몰살하고 데베스를 살육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기가 비로소 멈췄다(50-55절).
1. 갚으셨고, 갚으셨으니(56-57절)
사사기 저자는 이 일에 대하여 분명한 해석을 내린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자기 형제 일흔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의 값을 이렇게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죄악도 그들에게 모두 갚으셨다.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이렇게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새번역_56-57절).” “하나님께서 이같이 갚으셨고… 갚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갚으셨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나의 삶이 하나님의 때에 심판으로 갚음받는 인생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 은혜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기를 결심해 본다. 지금 당장의 명분과 이익을 따라 세겜 사람들처럼 “진실과 의로움”과는 상관없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이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붙들어야 산다!
2. 파멸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아비멜렉은 바알브릿 보루에 피신한 세겜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너희도 빨리 그대로 하여라(새번역_48절)” 말하며 나무를 찍어다 쌓았다. 백성들은 “아비멜렉을 따라” 나무를 찍어 쌓고 불을 질러 천 명을 죽인다. 형제 70명을 살해했던 아비멜렉은 이제 세겜 사람들을 몰살하는 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백성들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데베스를 점령할 때도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 주민들은 싸울 능력도 없었다. 그저 “견고한 망대”로 도망가 문만 걸어 잠글 뿐이었다. 어떤 군사적인 대항도 없었기에 아비멜렉은 망대 밑으로 직접 가서 불사르려고 했던 것이다. 방패를 든 자도 따르지 않았다. 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그의 두개골이 깨져 버렸다. 망대에서 던진 맷돌 위짝이었는데 즉사하지 않고 숨이 붙어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가 “한 여인”이었고, 여인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의식이 또렷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이 또렷했기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인의 손에 죽는 치욕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54절)” 이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병사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그저 “한 여인”에게 죽임당했다고 손가락질당할 자신뿐이었다.
그것이 치욕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어쩌면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졌어도 숨이 남아 있을 때, 도리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했다. 요담이 그리심산에서 외쳤던 그 저주를 되돌아봐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언하신 그 저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부끄러워도 “회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아비멜렉은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오직 자신의 이름과 명예만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력에만 집착하고, 그 권력이 여자에 의해 무너지는 것만 두려워하다니. 마지막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릴 정도로 자기 권력에 취한 사람의 말로가 이렇다. “너희도 보았으니… 빨리 따라 하라(48절)”며 자신을 보고 따르라 했던 백성들이 본 그의 최후는, 두개골이 깨진 비참한 시신뿐이었다.
나는?
-세겜 망대 사람들은 잔인한 아비멜렉을 피해 가장 안전하다고 믿은 ‘신전의 보루’에 몸을 숨기지만, 결국 불에 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6~49절). 그들이 세운 지도자에 의해 몰살당하고, 그들이 그토록 따르던 신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이것이 헛된 우상을 섬기고 불의한 자를 왕으로 옹립한 죄악에 대한 ‘참혹한 대가’였다. 이처럼 심판의 날에는 내가 의지하던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지켜 주지 못한다. 도리어 그것은 내 생명을 옭아매는 도구나 나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피해 선택한 최후의 장소는 엘브릿 신전의 보루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보호를 받으려고 신전의 은신처로 도망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보루에 불을 질러 그곳으로 피한 세겜 사람 약 천 명을 몰살한다. 세겜 사람들은 보호받으려고 들어간 신전 안에서,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세운 왕에게 불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긴 바알도, 기드온을 배신하고 세운 아비멜렉도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요담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저주였던 것이다.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은 그 여세를 몰아 ‘영토 확장’을 위해 데베스를 침공한다(50~55절).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데베스까지 침공한 것은 그의 잔학성과 야욕의 끝을 보게 한다. 하지만 자기 욕망 때문에 배반에 배반을, 살인에 살인을 거듭하던 아비멜렉이 무명의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허망하게 죽자, 그를 추종하던 무리도 뿔뿔이 흩어진다. 영원할 것 같던 악인의 위세와 철권통치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22절) 왕권에 취해 살다가 자기 가문과 함께 영원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가 추구하고 또 성공이라고 칭송받는 것들이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아비멜렉은 뚜렷한 이유와 명분 없이 전쟁을 확대했다. 세겜만이 아니라 주변의 데베스까지 점령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그의 폭력적인 본성 그대로였다. 데베스 사람들도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숨었지만, 아비멜렉은 세겜과 마찬가지로 불태워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망대를 불사르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던져 그 머리를 부순다. ‘한 바위’에서 형제 70명을 죽이고 세겜 사람들 천 명을 몰살한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진 ‘한 돌’에 맞아 죽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비멜렉을 심판하셨다.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56~57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의 배반과 반역, 전쟁과 죽음은 모두 그들이 행한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유예된 것일 뿐(3년, 22절) 철회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이 악에 대한 묵인은 아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인간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심판하신다. 이 땅에 여전히 악인이 득세하는 것도 즉각적인 보응이 없거나 용서를 경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죄에 눈감는다고 해서 하나님도 내 죄에 눈감으시는 것은 아니다. 축복이든 심판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고 외쳤던 요담의 질문에 답할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죽기 직전에라도 이 질문에 답했어야 했다. “내가 행한 것이 진실로 거짓되고 불의하다”고 고백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을 따르던 백성들은 요담의 호소가 어떻게 응답되는지 똑똑히 보았다. 세겜 사람들이 불과 연기에 죽어 가는 것도, 아비멜렉이 죽는 것도 보았다. 망대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은 이들도 보았고, 두개골이 깨지고 칼에 찔려 비참하게 죽은 아비멜렉의 시체도 보았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비참한 결말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과연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도 요담의 말대로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까?
*일어난 일을 보고 “무엇을 보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아침이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망대로 쫓기고 바알브릿의 보루로 쫓길 때, 요담의 저주가 생각나야 했고 그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 바알브릿의 보루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들은 끝까지 바알만 바라보았다. 요담의 선포를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말씀이 잊힌 그들에게 남은 건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세겜 사람들도 한 번에 무너지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주 짤막한 시간이 있었다. 아비멜렉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순간 직전에 아주 짧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은 “회개”의 기회였다. 염치없지만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순간이었다. 어쩌면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의 보루를 택했고, 아비멜렉은 자신의 명예를 택했다. 바알브릿이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 믿었고, 쓸데없는 명예에 집착하여 회개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행한 악행을 돌아보고, 자신이 저지른 죽음의 행보를 후회라도 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
*사사기 9장은 결국 배신을 공모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공멸로 끝났다. 이 모든 것은 요담의 저주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단호하시다. 왕이라도 악을 행하면 보응하신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고 끝까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떠나 치르는 싸움은 끝을 알 수도 없고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가족과 공동체도 바로 설 수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살리고 함께 사는 정결한 싸움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겜 사람들의 불의함에 대해 요담이 선포한 대로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20절)” 하신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비멜렉의 불이 세겜을 불살랐다.
아비멜렉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겜과 동맹 관계였던 데베스까지 공격한다. 데베스 주민들은 밀리고 밀려 “어느 견고한 망대”로 도망하여 결사 항전을 벌였다. 아비멜렉은 여기에서도 주민들이 가득 피신해 있는 망대를 불사르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두개골을 깨뜨린다.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 없어, 그는 무기를 든 청년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라고 하여 최후를 맞이했다. 아비멜렉을 따라 세겜을 몰살하고 데베스를 살육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기가 비로소 멈췄다(50-55절).
1. 갚으셨고, 갚으셨으니(56-57절)
사사기 저자는 이 일에 대하여 분명한 해석을 내린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자기 형제 일흔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의 값을 이렇게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죄악도 그들에게 모두 갚으셨다.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이렇게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새번역_56-57절).” “하나님께서 이같이 갚으셨고… 갚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갚으셨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나의 삶이 하나님의 때에 심판으로 갚음받는 인생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 은혜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기를 결심해 본다. 지금 당장의 명분과 이익을 따라 세겜 사람들처럼 “진실과 의로움”과는 상관없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이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붙들어야 산다!
2. 파멸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아비멜렉은 바알브릿 보루에 피신한 세겜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너희도 빨리 그대로 하여라(새번역_48절)” 말하며 나무를 찍어다 쌓았다. 백성들은 “아비멜렉을 따라” 나무를 찍어 쌓고 불을 질러 천 명을 죽인다. 형제 70명을 살해했던 아비멜렉은 이제 세겜 사람들을 몰살하는 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백성들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데베스를 점령할 때도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 주민들은 싸울 능력도 없었다. 그저 “견고한 망대”로 도망가 문만 걸어 잠글 뿐이었다. 어떤 군사적인 대항도 없었기에 아비멜렉은 망대 밑으로 직접 가서 불사르려고 했던 것이다. 방패를 든 자도 따르지 않았다. 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그의 두개골이 깨져 버렸다. 망대에서 던진 맷돌 위짝이었는데 즉사하지 않고 숨이 붙어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가 “한 여인”이었고, 여인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의식이 또렷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이 또렷했기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인의 손에 죽는 치욕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54절)” 이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병사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그저 “한 여인”에게 죽임당했다고 손가락질당할 자신뿐이었다.
그것이 치욕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어쩌면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졌어도 숨이 남아 있을 때, 도리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했다. 요담이 그리심산에서 외쳤던 그 저주를 되돌아봐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언하신 그 저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부끄러워도 “회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아비멜렉은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오직 자신의 이름과 명예만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력에만 집착하고, 그 권력이 여자에 의해 무너지는 것만 두려워하다니. 마지막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릴 정도로 자기 권력에 취한 사람의 말로가 이렇다. “너희도 보았으니… 빨리 따라 하라(48절)”며 자신을 보고 따르라 했던 백성들이 본 그의 최후는, 두개골이 깨진 비참한 시신뿐이었다.
나는?
-세겜 망대 사람들은 잔인한 아비멜렉을 피해 가장 안전하다고 믿은 ‘신전의 보루’에 몸을 숨기지만, 결국 불에 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6~49절). 그들이 세운 지도자에 의해 몰살당하고, 그들이 그토록 따르던 신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이것이 헛된 우상을 섬기고 불의한 자를 왕으로 옹립한 죄악에 대한 ‘참혹한 대가’였다. 이처럼 심판의 날에는 내가 의지하던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지켜 주지 못한다. 도리어 그것은 내 생명을 옭아매는 도구나 나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피해 선택한 최후의 장소는 엘브릿 신전의 보루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보호를 받으려고 신전의 은신처로 도망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보루에 불을 질러 그곳으로 피한 세겜 사람 약 천 명을 몰살한다. 세겜 사람들은 보호받으려고 들어간 신전 안에서,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세운 왕에게 불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긴 바알도, 기드온을 배신하고 세운 아비멜렉도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요담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저주였던 것이다.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은 그 여세를 몰아 ‘영토 확장’을 위해 데베스를 침공한다(50~55절).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데베스까지 침공한 것은 그의 잔학성과 야욕의 끝을 보게 한다. 하지만 자기 욕망 때문에 배반에 배반을, 살인에 살인을 거듭하던 아비멜렉이 무명의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허망하게 죽자, 그를 추종하던 무리도 뿔뿔이 흩어진다. 영원할 것 같던 악인의 위세와 철권통치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22절) 왕권에 취해 살다가 자기 가문과 함께 영원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가 추구하고 또 성공이라고 칭송받는 것들이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아비멜렉은 뚜렷한 이유와 명분 없이 전쟁을 확대했다. 세겜만이 아니라 주변의 데베스까지 점령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그의 폭력적인 본성 그대로였다. 데베스 사람들도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숨었지만, 아비멜렉은 세겜과 마찬가지로 불태워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망대를 불사르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던져 그 머리를 부순다. ‘한 바위’에서 형제 70명을 죽이고 세겜 사람들 천 명을 몰살한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진 ‘한 돌’에 맞아 죽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비멜렉을 심판하셨다.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56~57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의 배반과 반역, 전쟁과 죽음은 모두 그들이 행한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유예된 것일 뿐(3년, 22절) 철회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이 악에 대한 묵인은 아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인간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심판하신다. 이 땅에 여전히 악인이 득세하는 것도 즉각적인 보응이 없거나 용서를 경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죄에 눈감는다고 해서 하나님도 내 죄에 눈감으시는 것은 아니다. 축복이든 심판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고 외쳤던 요담의 질문에 답할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죽기 직전에라도 이 질문에 답했어야 했다. “내가 행한 것이 진실로 거짓되고 불의하다”고 고백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을 따르던 백성들은 요담의 호소가 어떻게 응답되는지 똑똑히 보았다. 세겜 사람들이 불과 연기에 죽어 가는 것도, 아비멜렉이 죽는 것도 보았다. 망대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은 이들도 보았고, 두개골이 깨지고 칼에 찔려 비참하게 죽은 아비멜렉의 시체도 보았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비참한 결말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과연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도 요담의 말대로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까?
*일어난 일을 보고 “무엇을 보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아침이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망대로 쫓기고 바알브릿의 보루로 쫓길 때, 요담의 저주가 생각나야 했고 그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 바알브릿의 보루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들은 끝까지 바알만 바라보았다. 요담의 선포를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말씀이 잊힌 그들에게 남은 건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세겜 사람들도 한 번에 무너지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주 짤막한 시간이 있었다. 아비멜렉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순간 직전에 아주 짧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은 “회개”의 기회였다. 염치없지만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순간이었다. 어쩌면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의 보루를 택했고, 아비멜렉은 자신의 명예를 택했다. 바알브릿이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 믿었고, 쓸데없는 명예에 집착하여 회개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행한 악행을 돌아보고, 자신이 저지른 죽음의 행보를 후회라도 했어야 했다.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
*사사기 9장은 결국 배신을 공모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공멸로 끝났다. 이 모든 것은 요담의 저주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단호하시다. 왕이라도 악을 행하면 보응하신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고 끝까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떠나 치르는 싸움은 끝을 알 수도 없고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가족과 공동체도 바로 설 수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살리고 함께 사는 정결한 싸움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배신이 배신을 불러왔다 [사사기 9:22-45]
요담이 담대하게 그리심산에서 나무 우화를 선포한 후 3년이 지나, 하나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의 사이를 틀어지게 하신다. 기드온(여룹바알)을 배신한 아비멜렉을 세겜 사람들이 배신한다. 배신을 배신으로 갚게 하신다. 끊이지 않는 살육이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죄의 값을 물으시는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아비멜렉은 형제들의 핏값을 치르고 3년 동안 왕과 같은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을 결코 형통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24절은 “갚되… 돌아가게 하심이라(갚으신 것이다)”라는 형식으로, 아비멜렉의 포악함과 그것을 묵인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지지한 세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포학한 일을 갚되 …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어떻게 갚으시는가?
1. 배신은 배신으로(22-29절)
세겜 사람들에게 들어간 “하나님께서 보낸 사악한 영(23절)”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 “배반”하게 만들었다. 그 구체적인 경위가 25절부터 설명된다. 먼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괴롭히려고 산마다 매복을 시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강탈하려 하였다(25절). 즉, 아비멜렉의 통치에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또 에벳의 아들 가알이 자기 친족들과 더불어 세겜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이내 신망을 얻게 된다. 이후 때마침 추수 때가 되어 세겜 사람들은 추수의 기쁨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를 베푼다. 신전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였다고 기록한다.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것이다. 가알은 이 틈을 타 세겜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세겜 백성을 통솔할 권한을 주면 아비멜렉을 처단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전포고를 하고 만다.
*세겜 사람들의 배신은 의외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셨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지 않으신다면 결코 평안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거역하는 방법은 3년 전 아비멜렉이 자신들의 신전의 돈으로 산 ‘비류들’이 한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이토록 추해지고 비겁해져도 깨닫지 못한다.
*세겜 사람들은 여전히 바알브릿 신전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과 벗하여 즐긴다. 추수 때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키라고 하신 봄의 맥추절(오순절), 혹은 가을의 수장절의 시기와 맞닿아 있는데,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전에서 방탕하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수확의 기쁨을 허비한다. 여기에 자신들이 섬기는 아비멜렉을 저주하며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이제 곧 심판받을 줄도 모른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방자히 행하고 있다.
2. 70명의 형제들도 죽였는데… 배신자들쯤이야…(30-45절)
가알과 세겜 사람들의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비멜렉에게 속한 “스불” 장군의 계략으로 세겜은 아비멜렉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포기할 줄 모르는 아비멜렉의 잔인함은 세겜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그 땅에 소금을 뿌려 버린다. 아예 삶의 거처로 삼지 못하도록 죽음의 땅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비멜렉의 포악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가알의 선동에 화가 난 스불의 말을 따라 지체하지 않고 밤에 세겜으로 출정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가알이 성문을 나서자 그 틈을 타 가알과 세겜 사람들을 단번에 제압해 버린다. “많은 사상자가 성문 앞까지 널렸(40절)”지만 아비멜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다음 날 세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그날 종일 그 성읍 사람들과 싸워서 그 성읍을 점령하였다. 그는 성읍 안에 있는 백성을 죽이고 나서, 성읍을 헐고, 거기에 소금을 뿌렸다(새번역_45절)” 세겜 사람들의 배신을 피로 갚는다.
아비멜렉은 멈출 줄 모르는 피의 폭주 기관차다. 멈출 줄 몰랐기에 멈춰야 할 때도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 배신이 배신을 낳고 또 배신을 잉태한다. 소름 끼치도록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아비멜렉, 그리고 그를 따르는 병사들… 하나님 나라 백성끼리 서로 죽이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뜻이 여지없이 짓밟히고 만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하나님 나라에는 배신과 배신, 피의 향연만 넘칠 뿐이었다.
*죄악이 죄악을 부른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을 배신하고 형제들을 배신하며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자신이 썼던 바로 그 방법으로 세겜 사람들에게 배신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결코 좌시하지 않으신다. 죄를 반드시 물으신다. 지금 당장 어떤 도전이 없다고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범죄함에 대하여 무덤덤해지는 것은 이미 사탄의 궤계에 걸려든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유유상종”일까… 아비멜렉이나 세겜 사람들이나, 가알이나, 스불이나 도긴개긴이다. 더 나아가 서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듯하다. 스불은 아비멜렉과, 가알은 세겜 사람들과 죽이 잘 맞는다. 서로 마음을 모아 상대를 죽이고 억압하는 데 뜻을 모은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지 않다.
*억압하고 죽이는 것에 몰두하는 지도자를 잘 판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지도자든 국가의 지도자든, 백성을 살리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넘어뜨리고, 짓밟고, 무시하며, 외면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상식에 맞고 정의와 법도를 존중하는 리더를 분별하여 선택해야겠다.
나는?
-악한 영을 악인들 가운데 보내셔서 서로 배반하게 하신다(22~24절). ‘진실과 의로움(16절)’이 없는 악인들의 불의한 연합과 연대가 무너진 것은 예언의 성취(20절)이자 ‘하나님의 보응’이다. 아무리 악이 위세를 떨치고 의와 진실이 무너진 듯 보여도,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까지만 허용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에게 오늘의 번영은 위장된 심판일 뿐이다. 그러니 불의한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고 의로운 패배에 절망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의 통치 3년이 지나자 세겜의 반(反)아비멜렉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급기야 산꼭대기마다 매복하여 지나는 사람들의 것을 강탈하는 불법을 자행한다. 그런데 이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있었다. 즉, 일부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아비멜렉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배반은 반역으로 나타났다(25~29절). 반역의 주모자는 세겜 출신 가알이었다. 술에 취한 가알은 아비멜렉의 왕권을 비난하고 비하하며, 세겜인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준다면 그를 몰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호기 어린 허세였을 뿐, 그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줄행랑을 친다(39~41절).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사라지면 우리도 잠깐 있다 사라지는 눈앞의 권력 앞에서 비굴해지거나, 밥줄을 움켜쥔 세상의 눈치를 보며 비겁한 기회주의자처럼 처신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첩의 아들 아비멜렉에게 쉽게 동조하여 반역을 지지했던 세겜이, 이제 다시 종의 아들 가알을 지지하여 아비멜렉에게 저항하려고 한다. 가알은 아비멜렉에게 정통성이 없음을 강조하여, 그를 치려 하는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한다. 아비멜렉처럼 가알도 상대방을 비난하여 지지세를 확보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이용한 방법으로 저항을 받게 된다.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반역의 상황은 물론 대응 전략까지 알려 준다. 이전에는 세겜인들이 아비멜렉을 해하려고 매복하더니(25절), 지금은 아비멜렉이 세겜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매복한다(30~40절). 서로 골육지친이라 부르며 의기투합하던 그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칼을 겨눈다. 의와 진실이 없다면, 즉 하나님 나라와 그 뜻에 어긋난다면, 동맹도 우정도 영원하지 못하며 오늘의 충성이 내일의 배반과 변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은 가알을 공격하고 스불의 도움을 받아 가알을 쫓아낸다. 그러고는 자신을 배신한 세겜을 공격하여 그 백성을 죽이고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린다. 그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처단한다. 세겜은 불의한 세력에 동조하여 억울한 목숨을 죽인 대가로, 한때는 자신들이 세운 왕이었던 아비멜렉을 통해 심판을 받는다. 악과 범죄로 맺어진 관계의 말로가 이렇다.
-아비멜렉은 반역의 주동자를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배반한 세겜 성을 철저히 응징하여 또다시 반역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초토화한다(41~45절). 한때 왕으로 추대하던 자들을 향한 잔혹한 보복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이용하는 관계의 끝에는 비극적인 피의 보복과 파멸만이 남을 뿐이다.
-아비멜렉의 시대에도 이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천태만상이 펼쳐진다. 아비멜렉이 불의하고 교묘하게 왕이 된 지 3년 만에 세겜 사람들이 배신한다. 세겜 사람들이 산에 숨어 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공격한 것이다. 아비멜렉을 속이며 자기 마음대로 불법을 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에 공의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또 세겜 사람들은 ‘가알’이라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그는 세겜 정통주의를 들먹이며 아비멜렉이 세겜과 관련이 없는 존재임을 부각하려 했다. 배반이 배반을 싹틔우고 또 다른 배반을 맺는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 의해 죽임당한 형제들의 피를 기억하신다. 그의 폭력을 또렷하게 기억하신다. 그와 공모했던 세겜 사람들도 벌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악령은 지체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어 간다. 악한 영은 머뭇거림 없이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갔고, 그들은 이내 산을 차지하고 지나는 백성들을 노략한다. 삼 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신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아비멜렉의 돌이킴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참 어렵다. 쉽게 얻은 마음은 쉽게 떠날 수 있음을 각성하게 된다. 돈으로, 힘으로 살 수 있는 마음의 유통기한은 짧다. 진짜 마음은 꾸준하게 마음을 줄 때 얻을 수 있다.
-혼란한 시대의 특징은 혼탁한 인물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을 이어 등장한 가알은 아비멜렉 반역의 근거지였던 세겜의 신뢰를 얻고 아비멜렉을 배반하도록 충동질했다. 이 과정에서 순수한 혈통을 내세웠고, 귀가 얇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결국 세겜의 친아비멜렉계 사람들이 가알에게로 돌아선다. 어쩌면 세겜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지도자를 세웠으니 지도자를 교체하는 것도 자기 손에 달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왕(지도자)은 하나님께 권한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자가 아니었다. 자기들의 이기적인 관심사에 부합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아무리 끈끈하다 해도 하나님이 배제된 연합은 영원하지 않다. 세겜도, 가알도, 스불도, 아비멜렉도 자신을 위해 하나님 없는 자기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이용당할 줄 알면서 손을 잡고, 책임질 수 없으면서도 호언장담을 일삼는다. 이런 관계는 언제든지 틀어질 수 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하고, 그것을 기초로 끝까지 믿고 따르는 공동체를 소망하는 아침이다. 얄팍하고 얕은 인간관계보다 깊고 넓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리라.
아비멜렉은 형제들의 핏값을 치르고 3년 동안 왕과 같은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을 결코 형통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24절은 “갚되… 돌아가게 하심이라(갚으신 것이다)”라는 형식으로, 아비멜렉의 포악함과 그것을 묵인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지지한 세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포학한 일을 갚되 …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어떻게 갚으시는가?
1. 배신은 배신으로(22-29절)
세겜 사람들에게 들어간 “하나님께서 보낸 사악한 영(23절)”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 “배반”하게 만들었다. 그 구체적인 경위가 25절부터 설명된다. 먼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괴롭히려고 산마다 매복을 시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강탈하려 하였다(25절). 즉, 아비멜렉의 통치에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또 에벳의 아들 가알이 자기 친족들과 더불어 세겜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이내 신망을 얻게 된다. 이후 때마침 추수 때가 되어 세겜 사람들은 추수의 기쁨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를 베푼다. 신전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였다고 기록한다.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것이다. 가알은 이 틈을 타 세겜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세겜 백성을 통솔할 권한을 주면 아비멜렉을 처단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전포고를 하고 만다.
*세겜 사람들의 배신은 의외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셨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지 않으신다면 결코 평안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거역하는 방법은 3년 전 아비멜렉이 자신들의 신전의 돈으로 산 ‘비류들’이 한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이토록 추해지고 비겁해져도 깨닫지 못한다.
*세겜 사람들은 여전히 바알브릿 신전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과 벗하여 즐긴다. 추수 때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키라고 하신 봄의 맥추절(오순절), 혹은 가을의 수장절의 시기와 맞닿아 있는데,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전에서 방탕하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수확의 기쁨을 허비한다. 여기에 자신들이 섬기는 아비멜렉을 저주하며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이제 곧 심판받을 줄도 모른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방자히 행하고 있다.
2. 70명의 형제들도 죽였는데… 배신자들쯤이야…(30-45절)
가알과 세겜 사람들의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비멜렉에게 속한 “스불” 장군의 계략으로 세겜은 아비멜렉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포기할 줄 모르는 아비멜렉의 잔인함은 세겜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그 땅에 소금을 뿌려 버린다. 아예 삶의 거처로 삼지 못하도록 죽음의 땅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비멜렉의 포악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가알의 선동에 화가 난 스불의 말을 따라 지체하지 않고 밤에 세겜으로 출정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가알이 성문을 나서자 그 틈을 타 가알과 세겜 사람들을 단번에 제압해 버린다. “많은 사상자가 성문 앞까지 널렸(40절)”지만 아비멜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다음 날 세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그날 종일 그 성읍 사람들과 싸워서 그 성읍을 점령하였다. 그는 성읍 안에 있는 백성을 죽이고 나서, 성읍을 헐고, 거기에 소금을 뿌렸다(새번역_45절)” 세겜 사람들의 배신을 피로 갚는다.
아비멜렉은 멈출 줄 모르는 피의 폭주 기관차다. 멈출 줄 몰랐기에 멈춰야 할 때도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 배신이 배신을 낳고 또 배신을 잉태한다. 소름 끼치도록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아비멜렉, 그리고 그를 따르는 병사들… 하나님 나라 백성끼리 서로 죽이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뜻이 여지없이 짓밟히고 만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하나님 나라에는 배신과 배신, 피의 향연만 넘칠 뿐이었다.
*죄악이 죄악을 부른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을 배신하고 형제들을 배신하며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자신이 썼던 바로 그 방법으로 세겜 사람들에게 배신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결코 좌시하지 않으신다. 죄를 반드시 물으신다. 지금 당장 어떤 도전이 없다고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범죄함에 대하여 무덤덤해지는 것은 이미 사탄의 궤계에 걸려든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유유상종”일까… 아비멜렉이나 세겜 사람들이나, 가알이나, 스불이나 도긴개긴이다. 더 나아가 서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듯하다. 스불은 아비멜렉과, 가알은 세겜 사람들과 죽이 잘 맞는다. 서로 마음을 모아 상대를 죽이고 억압하는 데 뜻을 모은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지 않다.
*억압하고 죽이는 것에 몰두하는 지도자를 잘 판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지도자든 국가의 지도자든, 백성을 살리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넘어뜨리고, 짓밟고, 무시하며, 외면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상식에 맞고 정의와 법도를 존중하는 리더를 분별하여 선택해야겠다.
나는?
-악한 영을 악인들 가운데 보내셔서 서로 배반하게 하신다(22~24절). ‘진실과 의로움(16절)’이 없는 악인들의 불의한 연합과 연대가 무너진 것은 예언의 성취(20절)이자 ‘하나님의 보응’이다. 아무리 악이 위세를 떨치고 의와 진실이 무너진 듯 보여도,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까지만 허용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에게 오늘의 번영은 위장된 심판일 뿐이다. 그러니 불의한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고 의로운 패배에 절망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의 통치 3년이 지나자 세겜의 반(反)아비멜렉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급기야 산꼭대기마다 매복하여 지나는 사람들의 것을 강탈하는 불법을 자행한다. 그런데 이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있었다. 즉, 일부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아비멜렉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배반은 반역으로 나타났다(25~29절). 반역의 주모자는 세겜 출신 가알이었다. 술에 취한 가알은 아비멜렉의 왕권을 비난하고 비하하며, 세겜인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준다면 그를 몰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호기 어린 허세였을 뿐, 그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줄행랑을 친다(39~41절).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사라지면 우리도 잠깐 있다 사라지는 눈앞의 권력 앞에서 비굴해지거나, 밥줄을 움켜쥔 세상의 눈치를 보며 비겁한 기회주의자처럼 처신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첩의 아들 아비멜렉에게 쉽게 동조하여 반역을 지지했던 세겜이, 이제 다시 종의 아들 가알을 지지하여 아비멜렉에게 저항하려고 한다. 가알은 아비멜렉에게 정통성이 없음을 강조하여, 그를 치려 하는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한다. 아비멜렉처럼 가알도 상대방을 비난하여 지지세를 확보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이용한 방법으로 저항을 받게 된다.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반역의 상황은 물론 대응 전략까지 알려 준다. 이전에는 세겜인들이 아비멜렉을 해하려고 매복하더니(25절), 지금은 아비멜렉이 세겜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매복한다(30~40절). 서로 골육지친이라 부르며 의기투합하던 그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칼을 겨눈다. 의와 진실이 없다면, 즉 하나님 나라와 그 뜻에 어긋난다면, 동맹도 우정도 영원하지 못하며 오늘의 충성이 내일의 배반과 변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은 가알을 공격하고 스불의 도움을 받아 가알을 쫓아낸다. 그러고는 자신을 배신한 세겜을 공격하여 그 백성을 죽이고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린다. 그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처단한다. 세겜은 불의한 세력에 동조하여 억울한 목숨을 죽인 대가로, 한때는 자신들이 세운 왕이었던 아비멜렉을 통해 심판을 받는다. 악과 범죄로 맺어진 관계의 말로가 이렇다.
-아비멜렉은 반역의 주동자를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배반한 세겜 성을 철저히 응징하여 또다시 반역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초토화한다(41~45절). 한때 왕으로 추대하던 자들을 향한 잔혹한 보복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이용하는 관계의 끝에는 비극적인 피의 보복과 파멸만이 남을 뿐이다.
-아비멜렉의 시대에도 이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천태만상이 펼쳐진다. 아비멜렉이 불의하고 교묘하게 왕이 된 지 3년 만에 세겜 사람들이 배신한다. 세겜 사람들이 산에 숨어 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공격한 것이다. 아비멜렉을 속이며 자기 마음대로 불법을 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에 공의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또 세겜 사람들은 ‘가알’이라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그는 세겜 정통주의를 들먹이며 아비멜렉이 세겜과 관련이 없는 존재임을 부각하려 했다. 배반이 배반을 싹틔우고 또 다른 배반을 맺는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 의해 죽임당한 형제들의 피를 기억하신다. 그의 폭력을 또렷하게 기억하신다. 그와 공모했던 세겜 사람들도 벌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악령은 지체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어 간다. 악한 영은 머뭇거림 없이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갔고, 그들은 이내 산을 차지하고 지나는 백성들을 노략한다. 삼 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신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아비멜렉의 돌이킴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참 어렵다. 쉽게 얻은 마음은 쉽게 떠날 수 있음을 각성하게 된다. 돈으로, 힘으로 살 수 있는 마음의 유통기한은 짧다. 진짜 마음은 꾸준하게 마음을 줄 때 얻을 수 있다.
-혼란한 시대의 특징은 혼탁한 인물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을 이어 등장한 가알은 아비멜렉 반역의 근거지였던 세겜의 신뢰를 얻고 아비멜렉을 배반하도록 충동질했다. 이 과정에서 순수한 혈통을 내세웠고, 귀가 얇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결국 세겜의 친아비멜렉계 사람들이 가알에게로 돌아선다. 어쩌면 세겜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지도자를 세웠으니 지도자를 교체하는 것도 자기 손에 달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왕(지도자)은 하나님께 권한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자가 아니었다. 자기들의 이기적인 관심사에 부합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아무리 끈끈하다 해도 하나님이 배제된 연합은 영원하지 않다. 세겜도, 가알도, 스불도, 아비멜렉도 자신을 위해 하나님 없는 자기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이용당할 줄 알면서 손을 잡고, 책임질 수 없으면서도 호언장담을 일삼는다. 이런 관계는 언제든지 틀어질 수 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하고, 그것을 기초로 끝까지 믿고 따르는 공동체를 소망하는 아침이다. 얄팍하고 얕은 인간관계보다 깊고 넓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리라.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요담의 우화와 아비멜렉의 악행 [사사기 9:7-21]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형제 70명을 처형할 때 유일하게 탈출한 요담이 그의 잔인함을 세겜 사람들에게 비유로 전한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왕이 되는 대신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신들의 사명에 집중하겠다며 나무들의 간청을 고사한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달랐다. “자신의 그늘에 들어오라”고 외치면서, 그렇지 않으면 불로 태우겠다고 위협한다(7-16절). 요담은 이 우화를 마치고 격렬하게 외친다.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너희도 이와 같이 될 것이라고…(17-21절).
1. 요담의 용기(7절)
요담은 “스스로 숨어서(숨어 있었으므로_5절)” 살아남았다. 형제들을 바위 위로 끌고 갈 때 이미 숨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담의 은둔은 아비멜렉의 몇몇 비류들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요담을 끝내 찾아내지 못하고 세겜으로 돌아가 즉위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요담은 은둔을 거듭하다가 사람들을 통해 즉위식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목숨이 두려워 더 깊은 음지로 숨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선다. 세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리심산에 올라 큰 소리로 그 백성들을 향해 외친다.
이런 행동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안에 아비멜렉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미 세력을 결집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은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7절)”로 시작하는데, ‘스스로 숨은’ 요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면 이미 아비멜렉에 대항하는 세력이 조직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담의 용기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커서 생긴 것이 아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7절 하)”라고 외쳤다. 하나님 앞에서 이 소리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력이 조직을 갖추었다 한들 아비멜렉의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테다. 그럼에도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행한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하던 아비멜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외쳐야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함을 깨닫는다.
2.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16절)
요담이 용기 있게 그리심산 정상에서 세겜을 향해 외친 말은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16절)”였다.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뽑는 이야기를 통해 아비멜렉이 가시나무 같은 자임을 만천하에 고발한다. 나무들에게 먼저 추대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기름과(9절), 단 것과 아름다운 열매와(11절), 포도주를(13절) 내는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며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9, 11, 13절)”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왕이 되는 것보다 지금 자신들이 감당하는 본연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 의미 있고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시나무는 기가 찰 “호언장담”을 내뱉는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새번역_15절).’ 기름도 없고 열매도 없으면서 날카로운 가시만 내는 나무 주제에 나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선뜻’ 왕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제안을 받는 그 자리에서 “엄포”를 놓는 모습은 앞으로 가중될 백성들의 고통과, 결국 하나님을 떠나 멸망당할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세겜 사람들은 가치 없고 고통과 불편만 주는 해악 덩어리인 가시나무 같은 아비멜렉을 선택한 것이다. 요담은 “이 선택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고 묻는 것이다.
아비멜렉의 삶의 흔적은 왕이 되기 위해 세겜 사람들에게 보여 준 모습 그 자체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열매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런 그가 왕이 되고 싶어 시도한 것은 비겁한 “분노 유발”, 망국의 “혈연과 지연” 붙잡기, “폭력으로 억압하기”였다. 왕이 될 수만 있다면 이런 것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삶의 열매가 없는 그가 다른 이들의 열매를 짓밟으며 그들의 왕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런 해악 덩어리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 사람들의 선택 역시 악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알이 싸우려는 자’의 아들들을 따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기드온이 미디안으로부터 자신들의 조상을 구원하여 준 것도 잊어버린 채, 미디안에게 비참하게 진멸당할 뻔한 지경까지 몰린 자신들을 구해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이 섬기는 바알의 대적을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기드온의 자손이면서 자신들과 혈육인 아비멜렉을 대신 섬기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악함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는 왕의 재목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구미에 딱 맞았기에, 그들은 “악인과 동행”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모든 백성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3. 진정한 왕,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요담의 우화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왕이 되어 달라는 추대에도 자신들의 사명을 따라 사는 삶에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공교롭게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보다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매를 내는 삶을 살고, 그 삶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사 시대의 고통은 “사명 따라” 사는 삶에는 관심 없고 “욕망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하다 반복된 열매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가운데 남겨 둔 이방 민족의 삶의 체계를 눈여겨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힘이 있었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그들이 세력을 키우고 안정되어 이스라엘을 넘보고 나아가 억압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왕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의 강성함이 왕의 존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처럼 우리도” 왕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의 조상의 삶에 평화를 주셨어도 이를 바라보지 못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평안한지, “여호와 샬롬”을 누리지 못했다. 세상 왕의 강성함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스라엘은 “우리도 저들처럼”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반복한 것이다. 특히 이전 네 명의 사사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기드온에게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한 백성들의 간청이 이를 뒷받침한다(삿 8:22).
하지만 요담의 이야기에서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가 돋보인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가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9절)’, ‘내가 어찌 달고 맛있는 과일맺기를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11절)’,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13절)’ “내가 어찌 ~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세상 나라의 삶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사명을 따라 그 안에서 열매 맺고,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이 귀한 사명을 버리고 “어찌 세상을 다스린다며 날뛰겠는가?”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의 산물로 주신 “기름을 내고, 과일을 맺으며, 포도주를 내는”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여기에 행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우리를 통치하시면 된다. 우리는 그의 통치 안에서 사명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 된다. 인간 왕은 필요하지 않다!
나는?
-본문에서 기드온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은 ‘나무 우화’를 통해 아비멜렉 왕권의 부당성과 그를 왕으로 추대한 세겜 사람들의 우매와 불의를 지적한다. 이 비유는 앞으로 이스라엘에 닥칠 일을 예고하는 기능도 있다. 요담은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에서 저주를 선언한다. 기름이 나서 유용한 감람나무, 단 열매를 맺어서 유용한 무화과나무, 포도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나무는 왕의 자리를 거절한다. 이 나무들은 각자 자기 역할을 소중히 여기며 자족한다. 받은 소명 이상을 넘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 리더의 참모습이 아닐까?
-요담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그리심산에 올라 세겜 사람들을 비난한다(7절). 야망을 숨긴 채 유화적인 말(2절)로 사람들을 선동하던 아비멜렉과 달리, 요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듯 그들의 악행을 지적한다. ‘축복의 산’에서 들리는 요담의 저주는 악에 눈감고 불의에 동조하는 뒤틀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처럼 들렸다.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입맛에 맞는 말씀만 골라 듣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말씀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처럼 우리도 흉측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왕을 세우기 위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찾아가지만, 그들은 자신의 자리와 본분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서 우쭐댈 수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8~13절).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신의 소명과 역할을 더 소중히 여기기에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자격 없는 이들(가시나무)은 자리만 탐하지만, 자격을 갖춘 이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제 소임을 다한다. 그러니 주님이 부르신 자리와 주신 은사를 서로 견주어 자랑하지도, 위축되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리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왕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수락하면서 자신의 ‘그늘(통치, 보호)’에 피하라고 말한다. 지키지 못할 공약만 늘어놓으며 허세를 부린다. 또 자기 체제에 복종하지 않으면 불로 태우겠다고 협박까지 한다(14~15절). 왕이 되겠다고 나선 가시나무는 왕이 될 자격과 능력도 없이 왕권을 차지한 아비멜렉을 풍자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상과 인생을 의지하는(4절) 자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탐욕의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56, 57절).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진실하지도 의롭지도’ 못한 일이라고 질책한다(16~21절). 그것은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바친 충정을 배신하는 일이었고, ‘온전함과 진실함(수 24:14)’으로 하나님만 섬기기로 한 언약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진리와 진실을 떠난 그들의 불의한 공모는 잠시 뜻을 이룬 듯 보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57절).
*주제도 모르고 왕이 되겠다는 그를 나의 욕망과 일치한다고 해서 지지하고 세우는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사실 이 외침은 아비멜렉의 악함을 고발한다기보다 세겜 사람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자기들의 이익에 맞기만 하면 어떤 악함이나 악인과도 손잡고 합종연횡하는 그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상태를 성토하는 것이다.
*이런 세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일치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 보여 두렵고 떨린다. 너무나도 심각하게 들어맞는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사기 9장의 이야기가 재현되고 있다. 열매도 없고, 가치도 없으며, 인품도 미천하고, 큰소리치며 호령만 하는 가시나무 같은 이가 “스스로 제왕”이 되겠다고 나서는 이 판에, 세겜 사람들처럼 맞장구치며 추임새를 넣고 있는 이 나라가 개탄스럽다. 과연 이런 현재가 진실하고 의로운가?
*기쁨과 행복의 축제가 되어야 할 지도자 선출 과정에서, “분노와 편 가르기”로 증오와 미움을 양산하며 대립으로 이끌어 가는 “세겜 사람들” 같은 이들의 농락에 반복해서 놀아나야 하겠는가! 과연 이것이 진실하고 의로운가?
1. 요담의 용기(7절)
요담은 “스스로 숨어서(숨어 있었으므로_5절)” 살아남았다. 형제들을 바위 위로 끌고 갈 때 이미 숨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담의 은둔은 아비멜렉의 몇몇 비류들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요담을 끝내 찾아내지 못하고 세겜으로 돌아가 즉위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요담은 은둔을 거듭하다가 사람들을 통해 즉위식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목숨이 두려워 더 깊은 음지로 숨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선다. 세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리심산에 올라 큰 소리로 그 백성들을 향해 외친다.
이런 행동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안에 아비멜렉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미 세력을 결집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은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7절)”로 시작하는데, ‘스스로 숨은’ 요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면 이미 아비멜렉에 대항하는 세력이 조직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담의 용기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커서 생긴 것이 아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7절 하)”라고 외쳤다. 하나님 앞에서 이 소리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력이 조직을 갖추었다 한들 아비멜렉의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테다. 그럼에도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행한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하던 아비멜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외쳐야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함을 깨닫는다.
2.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16절)
요담이 용기 있게 그리심산 정상에서 세겜을 향해 외친 말은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16절)”였다.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뽑는 이야기를 통해 아비멜렉이 가시나무 같은 자임을 만천하에 고발한다. 나무들에게 먼저 추대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기름과(9절), 단 것과 아름다운 열매와(11절), 포도주를(13절) 내는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며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9, 11, 13절)”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왕이 되는 것보다 지금 자신들이 감당하는 본연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 의미 있고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시나무는 기가 찰 “호언장담”을 내뱉는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새번역_15절).’ 기름도 없고 열매도 없으면서 날카로운 가시만 내는 나무 주제에 나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선뜻’ 왕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제안을 받는 그 자리에서 “엄포”를 놓는 모습은 앞으로 가중될 백성들의 고통과, 결국 하나님을 떠나 멸망당할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세겜 사람들은 가치 없고 고통과 불편만 주는 해악 덩어리인 가시나무 같은 아비멜렉을 선택한 것이다. 요담은 “이 선택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고 묻는 것이다.
아비멜렉의 삶의 흔적은 왕이 되기 위해 세겜 사람들에게 보여 준 모습 그 자체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열매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런 그가 왕이 되고 싶어 시도한 것은 비겁한 “분노 유발”, 망국의 “혈연과 지연” 붙잡기, “폭력으로 억압하기”였다. 왕이 될 수만 있다면 이런 것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삶의 열매가 없는 그가 다른 이들의 열매를 짓밟으며 그들의 왕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런 해악 덩어리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 사람들의 선택 역시 악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알이 싸우려는 자’의 아들들을 따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기드온이 미디안으로부터 자신들의 조상을 구원하여 준 것도 잊어버린 채, 미디안에게 비참하게 진멸당할 뻔한 지경까지 몰린 자신들을 구해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이 섬기는 바알의 대적을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기드온의 자손이면서 자신들과 혈육인 아비멜렉을 대신 섬기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악함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는 왕의 재목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구미에 딱 맞았기에, 그들은 “악인과 동행”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모든 백성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3. 진정한 왕,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요담의 우화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왕이 되어 달라는 추대에도 자신들의 사명을 따라 사는 삶에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공교롭게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보다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매를 내는 삶을 살고, 그 삶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사 시대의 고통은 “사명 따라” 사는 삶에는 관심 없고 “욕망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하다 반복된 열매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가운데 남겨 둔 이방 민족의 삶의 체계를 눈여겨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힘이 있었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그들이 세력을 키우고 안정되어 이스라엘을 넘보고 나아가 억압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왕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의 강성함이 왕의 존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처럼 우리도” 왕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의 조상의 삶에 평화를 주셨어도 이를 바라보지 못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평안한지, “여호와 샬롬”을 누리지 못했다. 세상 왕의 강성함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스라엘은 “우리도 저들처럼”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반복한 것이다. 특히 이전 네 명의 사사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기드온에게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한 백성들의 간청이 이를 뒷받침한다(삿 8:22).
하지만 요담의 이야기에서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가 돋보인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가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9절)’, ‘내가 어찌 달고 맛있는 과일맺기를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11절)’,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새번역_13절)’ “내가 어찌 ~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세상 나라의 삶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사명을 따라 그 안에서 열매 맺고,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이 귀한 사명을 버리고 “어찌 세상을 다스린다며 날뛰겠는가?”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의 산물로 주신 “기름을 내고, 과일을 맺으며, 포도주를 내는”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여기에 행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우리를 통치하시면 된다. 우리는 그의 통치 안에서 사명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 된다. 인간 왕은 필요하지 않다!
나는?
-본문에서 기드온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은 ‘나무 우화’를 통해 아비멜렉 왕권의 부당성과 그를 왕으로 추대한 세겜 사람들의 우매와 불의를 지적한다. 이 비유는 앞으로 이스라엘에 닥칠 일을 예고하는 기능도 있다. 요담은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에서 저주를 선언한다. 기름이 나서 유용한 감람나무, 단 열매를 맺어서 유용한 무화과나무, 포도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나무는 왕의 자리를 거절한다. 이 나무들은 각자 자기 역할을 소중히 여기며 자족한다. 받은 소명 이상을 넘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 리더의 참모습이 아닐까?
-요담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그리심산에 올라 세겜 사람들을 비난한다(7절). 야망을 숨긴 채 유화적인 말(2절)로 사람들을 선동하던 아비멜렉과 달리, 요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듯 그들의 악행을 지적한다. ‘축복의 산’에서 들리는 요담의 저주는 악에 눈감고 불의에 동조하는 뒤틀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처럼 들렸다.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입맛에 맞는 말씀만 골라 듣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말씀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처럼 우리도 흉측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왕을 세우기 위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찾아가지만, 그들은 자신의 자리와 본분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서 우쭐댈 수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8~13절).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신의 소명과 역할을 더 소중히 여기기에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자격 없는 이들(가시나무)은 자리만 탐하지만, 자격을 갖춘 이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제 소임을 다한다. 그러니 주님이 부르신 자리와 주신 은사를 서로 견주어 자랑하지도, 위축되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리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왕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수락하면서 자신의 ‘그늘(통치, 보호)’에 피하라고 말한다. 지키지 못할 공약만 늘어놓으며 허세를 부린다. 또 자기 체제에 복종하지 않으면 불로 태우겠다고 협박까지 한다(14~15절). 왕이 되겠다고 나선 가시나무는 왕이 될 자격과 능력도 없이 왕권을 차지한 아비멜렉을 풍자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상과 인생을 의지하는(4절) 자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탐욕의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56, 57절).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진실하지도 의롭지도’ 못한 일이라고 질책한다(16~21절). 그것은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바친 충정을 배신하는 일이었고, ‘온전함과 진실함(수 24:14)’으로 하나님만 섬기기로 한 언약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진리와 진실을 떠난 그들의 불의한 공모는 잠시 뜻을 이룬 듯 보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57절).
*주제도 모르고 왕이 되겠다는 그를 나의 욕망과 일치한다고 해서 지지하고 세우는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사실 이 외침은 아비멜렉의 악함을 고발한다기보다 세겜 사람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자기들의 이익에 맞기만 하면 어떤 악함이나 악인과도 손잡고 합종연횡하는 그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상태를 성토하는 것이다.
*이런 세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일치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 보여 두렵고 떨린다. 너무나도 심각하게 들어맞는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사기 9장의 이야기가 재현되고 있다. 열매도 없고, 가치도 없으며, 인품도 미천하고, 큰소리치며 호령만 하는 가시나무 같은 이가 “스스로 제왕”이 되겠다고 나서는 이 판에, 세겜 사람들처럼 맞장구치며 추임새를 넣고 있는 이 나라가 개탄스럽다. 과연 이런 현재가 진실하고 의로운가?
*기쁨과 행복의 축제가 되어야 할 지도자 선출 과정에서, “분노와 편 가르기”로 증오와 미움을 양산하며 대립으로 이끌어 가는 “세겜 사람들” 같은 이들의 농락에 반복해서 놀아나야 하겠는가! 과연 이것이 진실하고 의로운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아비멜렉의 야망과 기드온 시대의 비극 [사사기 9:1-6]
기드온이 많은 아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세겜 첩(필레게쉬: ‘두 번째 아내’라는 의미이지만 정식 아내이다)의 아들이다. 그는 세겜으로 와서 왕이 될 계획을 세우고 주민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후원으로 형제들을 모조리 몰살하고 세겜의 왕이 된다. 이런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게 된다.
*비극의 서막
기드온은 왕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과 같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렇기에 모세의 당부를 잊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이 말씀을 외면하여 뿌린 불순종의 씨앗이 비극의 열매로 다가왔다.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신 17:17-20상)”
*아, 밤에라도 순종했고, 순종하려고 증거를 구하며, 여호와의 영으로 덧입었던 그 기드온은 어디로 갔을까? 승전을 확정한 순간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고 겉으로만 평화를 구가하며 자기 이름만을 남긴 것이, 40년 만에 “또” 우상 숭배의 열매를 낳았다.
9장을 시작하면서 사사기 저자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바알이 싸우려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인 “여룹바알”만 계속 사용한다. 왜 그랬을까? 세겜 사람들은 이미 바알브릿을 충실하게 섬기고 있었다.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 언약의 신”이라는 의미로, “엘브릿”으로도 불리는 가나안 우상이었다. 세겜 사람들은 이미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의 바알을 충실하게 따르는 다른 민족이 되어 버렸다. 추측건대 세겜에는 기드온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바알브릿 신전이 있었을 것이다. 세겜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기드온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세겜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다. 스스로 가장 강한 지파라고 여기는 그들이 기드온의 40년 동안의 영향력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질 수는 없었다.
또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다.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을 아버지로 둔 그는 첩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고향 세겜을 기반으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찾아온다. 이 서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9장에서 기드온의 이름은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 바알과 싸우는 자)”로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무려 15회나 사용된다. 저자는 아비멜렉이 아버지를 기드온이 아닌 여룹바알로 부름으로써, 바알을 “바알브릿”으로까지 숭배하는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를 집어넣어 자기 세력을 만들려 한 것을 의도적으로 꼬집는다. 그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왕이 되고자 했다.
1. 그는 하나님이 아닌 혈연에 호소했다(1-3절).
그는 먼저 “어머니의 친척들과 그들의 외조부의 온 가족”을 찾아가서 말했다.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아 주십시오.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어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과 한 혈육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시오(새번역_2절).” 이 말을 들은 세겜 사람들은 마음이 기울어 “아비멜렉이 우리 형제(우리의 혈육)”임을 선언한다(3절). 아비멜렉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나님의 율법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으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외가 친척들을 의지하여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에 불을 지폈다. 지리적으로도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70명 아들들보다 아비멜렉이 더 가까웠기 때문에, 세겜 사람들은 그의 말에 현혹되고 말았다.
*혈연, 지연, 학연은 객관적인 시각을 왜곡한다.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결국 분별력을 잃게 만든다. 즉,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을 자극하여 자신의 권력욕을 채운다.
*욕망이 이렇게 무섭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객관적인 선택보다 자신의 성향을 따라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왕이 되려는 욕망에 눈먼 자를, 왕의 성읍이 되려는 욕망이 따른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세겜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2. 그는 우상의 돈으로 리더십을 샀다(4, 6절).
아비멜렉의 편이 되기로 한 세겜 백성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비자금 은 70개를 꺼내 아비멜렉에게 건넨다. 무심코 흘려보내기 쉽지만, 바알브릿 신전에서 내어 준 ‘은 70개’가 우상에게 드려진 불의한 돈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아비멜렉은 불의한 바알의 돈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바알이 원하는 대로 산 것이다. 불의한 물질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든다. 그 방탕이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이들을 돈으로 사는데, 그들은 바로 “폭력배”들이었다.
*바알에게 바쳐진 불의한 물질로 폭력배들(비류들)을 사서, 폭력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없앴다. 또 상수리나무 기둥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에서, 우상 앞에서 왕이 된 것이다. 철저하게 우상에 기대어 산 왕이었다.
3. 거리낌 없이 형제들을 몰살하다(5-6절).
아비멜렉은 폭력배들을 이끌고 오브라로 향한다. 그리고 70명의 이복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을 묶어 한 바위 위에 꿇어앉히고서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산 비류들의 손에 죽임당하게 한다. 이런 폭력과 살인으로 할아버지의 고향 오브라의 주민들이 겁에 질려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40년 전 미디안이 사용했던 “진멸하고자” 한 폭력적 탄압과 다를 바 없다.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가족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마을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이토록 깊고 크다!
나는?
-아비멜렉은 40년간 다스린 기드온에 이어, 사사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는다(1절). 왕이 되기 위해 자기 형제를 무참히 살해하고 ‘바알의 힘'(4절)까지 빌린다(6절). 성숙하지 못하고 성화되지 못한 아버지의 야망(8:30)이 아들을 통해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비멜렉은 야망과 욕망을 분별하여 쳐내지 못한 아버지의 길을 떠나지 못했다. 결국 아비의 방심(8:27)이 아들의 방종을 불러오고, 기드온 시대의 종교적 부패(8:33)가 아들 세대의 배역을 낳은 것이다. 부모 된 나, 우리는 지금 나의 자녀, 우리의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첩의 아들이었기에 70명의 자녀 가운데 재산이나 권력을 상속받는 데 매우 불리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어머니의 고향 세겜에 가서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득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을 때 그들이 당할 불이익을 악의적으로 과장한다. 그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짓으로 선동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하나님보다 혈연에 기대어 넘보지 말아야 할 자리를 넘봤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그의 계략은 주도면밀했다.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에 찾아가 외척들에게 혈연과 지연에 호소하고, 실용적인 명분(한 명의 통치자)을 내세워 사람들을 선동한다(1-3절). 우리 사회는 유난히 정을 강조하고, 유독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을 중시하다가 잘못된 온정주의와 파벌주의의 폐해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금 우리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나는 어떤가?
-아비멜렉의 설득에 세겜은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그가 왕이 되면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만 생각한다. 서로의 욕망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이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세겜 사람들은 ‘한 형제’라는 그의 호소에 호응하며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개를 꺼내 정치 자금으로 내어 준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용병들을 고용하여 이복형제 70명을 암살한다(3-5절). 욕망의 노예가 된 자에게 사람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이용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지도자의 야망’과, 자기 욕망을 채워 줄 지도자를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맹목적인 추종’은 위태로운 공생이자 공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아비멜렉은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바알의 상징)에서 왕으로 추대된다(6절). 이스라엘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맹세하던 언약의 장소(수 24장)가 이제 ‘바알 숭배’, ‘자아 숭배’의 자리로 전락한 것이다. 인간의 권력을 절대화하면서 하나님을 절대 왕으로 모실 수는 없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스스로 자기 멸망을 재촉하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기드온 이야기의 연장이다. 기드온에게서 시작된 왕의 모티프가 아비멜렉에게서 실현된다. 즉, 기드온은 말로는 거절했으나 실제로는 왕처럼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마음속에 있던 생각을 실제로 실현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정치적 야망을 위해 형제들을 몰살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감행해서라도 그는 왕이 되고 싶었다. 왕이 되려는 그의 길에서 가족과 하나님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분노”를 심었다는 점이다. 세겜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곳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고, 가나안 정복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언약식을 갱신하신 땅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개인적 야망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런 모든 행동은 그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난” 자임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와 땅에서 스스로 인간 왕이 되겠다고,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을 바탕 삼아 우상의 돈으로 세력을 사서 형제들을 몰살한 것이다. 그것도 “한 바위 위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보란 듯이 악을 행하였다. 철저하게 힘으로 밀어붙이고 공포로 몰아붙여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악이 득세하도록 “자기 소견대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아비멜렉을 지켜보셨다. 이제 곧 그에 대한 심판의 칼을 빼실 것이다. 지금 악을 행하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악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의 책임을 물으신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벌인 판에서 지금 우리의 판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우리도 여지없이 스스로 뭔가를 이루기 위해 관계의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 찬스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공정을 외치지만, 나에게 혈연과 지연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 나의 분노에 동조해 주기를 바라며 공동체는 안중에 없는 경우도 꽤 있다.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공동체의 구조를 바꾸라고 쉽게 분노하고, 이 분노에 동조자들을 끌어들인다. 아비멜렉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아비멜렉이 벌인 판의 중심에 왕이 되려는 자기 욕심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듯, 나의 삶의 판에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욕심만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면, 기회와 여건만 주어질 때 이 시대의 아비멜렉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모습에 내가 투영되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을 ‘분노’하게 하여 자기 세력을 키우는 지도자를 경계해야 한다.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며 세력을 모으는 것도 분별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우상에 기대어 세력화를 꾀하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이용만 하는 지도자도 분별해야 한다.
*우리의 정치 현실과 너무도 닮은 본문 말씀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적어도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게 하셔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니, 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신뢰한다.
*아무쪼록 철학, 비전, 사명도 없이 “분노, 적개심, 지연, 혈연”에 기대어 지도자가 되려는 이들이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는 국민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판에 한숨이 나오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갈망하게 되는 아침이기에 소망을 가져 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기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비극의 서막
기드온은 왕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과 같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렇기에 모세의 당부를 잊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이 말씀을 외면하여 뿌린 불순종의 씨앗이 비극의 열매로 다가왔다.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신 17:17-20상)”
*아, 밤에라도 순종했고, 순종하려고 증거를 구하며, 여호와의 영으로 덧입었던 그 기드온은 어디로 갔을까? 승전을 확정한 순간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고 겉으로만 평화를 구가하며 자기 이름만을 남긴 것이, 40년 만에 “또” 우상 숭배의 열매를 낳았다.
9장을 시작하면서 사사기 저자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바알이 싸우려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인 “여룹바알”만 계속 사용한다. 왜 그랬을까? 세겜 사람들은 이미 바알브릿을 충실하게 섬기고 있었다.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 언약의 신”이라는 의미로, “엘브릿”으로도 불리는 가나안 우상이었다. 세겜 사람들은 이미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의 바알을 충실하게 따르는 다른 민족이 되어 버렸다. 추측건대 세겜에는 기드온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바알브릿 신전이 있었을 것이다. 세겜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기드온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세겜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다. 스스로 가장 강한 지파라고 여기는 그들이 기드온의 40년 동안의 영향력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질 수는 없었다.
또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다.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을 아버지로 둔 그는 첩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고향 세겜을 기반으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찾아온다. 이 서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9장에서 기드온의 이름은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 바알과 싸우는 자)”로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무려 15회나 사용된다. 저자는 아비멜렉이 아버지를 기드온이 아닌 여룹바알로 부름으로써, 바알을 “바알브릿”으로까지 숭배하는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를 집어넣어 자기 세력을 만들려 한 것을 의도적으로 꼬집는다. 그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왕이 되고자 했다.
1. 그는 하나님이 아닌 혈연에 호소했다(1-3절).
그는 먼저 “어머니의 친척들과 그들의 외조부의 온 가족”을 찾아가서 말했다.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아 주십시오.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어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과 한 혈육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시오(새번역_2절).” 이 말을 들은 세겜 사람들은 마음이 기울어 “아비멜렉이 우리 형제(우리의 혈육)”임을 선언한다(3절). 아비멜렉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나님의 율법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으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외가 친척들을 의지하여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에 불을 지폈다. 지리적으로도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70명 아들들보다 아비멜렉이 더 가까웠기 때문에, 세겜 사람들은 그의 말에 현혹되고 말았다.
*혈연, 지연, 학연은 객관적인 시각을 왜곡한다.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결국 분별력을 잃게 만든다. 즉,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을 자극하여 자신의 권력욕을 채운다.
*욕망이 이렇게 무섭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객관적인 선택보다 자신의 성향을 따라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왕이 되려는 욕망에 눈먼 자를, 왕의 성읍이 되려는 욕망이 따른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세겜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2. 그는 우상의 돈으로 리더십을 샀다(4, 6절).
아비멜렉의 편이 되기로 한 세겜 백성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비자금 은 70개를 꺼내 아비멜렉에게 건넨다. 무심코 흘려보내기 쉽지만, 바알브릿 신전에서 내어 준 ‘은 70개’가 우상에게 드려진 불의한 돈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아비멜렉은 불의한 바알의 돈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바알이 원하는 대로 산 것이다. 불의한 물질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든다. 그 방탕이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이들을 돈으로 사는데, 그들은 바로 “폭력배”들이었다.
*바알에게 바쳐진 불의한 물질로 폭력배들(비류들)을 사서, 폭력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없앴다. 또 상수리나무 기둥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에서, 우상 앞에서 왕이 된 것이다. 철저하게 우상에 기대어 산 왕이었다.
3. 거리낌 없이 형제들을 몰살하다(5-6절).
아비멜렉은 폭력배들을 이끌고 오브라로 향한다. 그리고 70명의 이복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을 묶어 한 바위 위에 꿇어앉히고서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산 비류들의 손에 죽임당하게 한다. 이런 폭력과 살인으로 할아버지의 고향 오브라의 주민들이 겁에 질려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40년 전 미디안이 사용했던 “진멸하고자” 한 폭력적 탄압과 다를 바 없다.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가족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마을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이토록 깊고 크다!
나는?
-아비멜렉은 40년간 다스린 기드온에 이어, 사사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는다(1절). 왕이 되기 위해 자기 형제를 무참히 살해하고 ‘바알의 힘'(4절)까지 빌린다(6절). 성숙하지 못하고 성화되지 못한 아버지의 야망(8:30)이 아들을 통해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비멜렉은 야망과 욕망을 분별하여 쳐내지 못한 아버지의 길을 떠나지 못했다. 결국 아비의 방심(8:27)이 아들의 방종을 불러오고, 기드온 시대의 종교적 부패(8:33)가 아들 세대의 배역을 낳은 것이다. 부모 된 나, 우리는 지금 나의 자녀, 우리의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첩의 아들이었기에 70명의 자녀 가운데 재산이나 권력을 상속받는 데 매우 불리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어머니의 고향 세겜에 가서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득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을 때 그들이 당할 불이익을 악의적으로 과장한다. 그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짓으로 선동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하나님보다 혈연에 기대어 넘보지 말아야 할 자리를 넘봤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그의 계략은 주도면밀했다.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에 찾아가 외척들에게 혈연과 지연에 호소하고, 실용적인 명분(한 명의 통치자)을 내세워 사람들을 선동한다(1-3절). 우리 사회는 유난히 정을 강조하고, 유독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을 중시하다가 잘못된 온정주의와 파벌주의의 폐해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금 우리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나는 어떤가?
-아비멜렉의 설득에 세겜은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그가 왕이 되면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만 생각한다. 서로의 욕망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이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세겜 사람들은 ‘한 형제’라는 그의 호소에 호응하며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개를 꺼내 정치 자금으로 내어 준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용병들을 고용하여 이복형제 70명을 암살한다(3-5절). 욕망의 노예가 된 자에게 사람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이용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지도자의 야망’과, 자기 욕망을 채워 줄 지도자를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맹목적인 추종’은 위태로운 공생이자 공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아비멜렉은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바알의 상징)에서 왕으로 추대된다(6절). 이스라엘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맹세하던 언약의 장소(수 24장)가 이제 ‘바알 숭배’, ‘자아 숭배’의 자리로 전락한 것이다. 인간의 권력을 절대화하면서 하나님을 절대 왕으로 모실 수는 없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스스로 자기 멸망을 재촉하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기드온 이야기의 연장이다. 기드온에게서 시작된 왕의 모티프가 아비멜렉에게서 실현된다. 즉, 기드온은 말로는 거절했으나 실제로는 왕처럼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마음속에 있던 생각을 실제로 실현한 것이다.
*아비멜렉은 정치적 야망을 위해 형제들을 몰살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감행해서라도 그는 왕이 되고 싶었다. 왕이 되려는 그의 길에서 가족과 하나님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분노”를 심었다는 점이다. 세겜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곳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고, 가나안 정복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언약식을 갱신하신 땅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개인적 야망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런 모든 행동은 그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난” 자임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와 땅에서 스스로 인간 왕이 되겠다고,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을 바탕 삼아 우상의 돈으로 세력을 사서 형제들을 몰살한 것이다. 그것도 “한 바위 위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보란 듯이 악을 행하였다. 철저하게 힘으로 밀어붙이고 공포로 몰아붙여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악이 득세하도록 “자기 소견대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아비멜렉을 지켜보셨다. 이제 곧 그에 대한 심판의 칼을 빼실 것이다. 지금 악을 행하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악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의 책임을 물으신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벌인 판에서 지금 우리의 판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우리도 여지없이 스스로 뭔가를 이루기 위해 관계의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 찬스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공정을 외치지만, 나에게 혈연과 지연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 나의 분노에 동조해 주기를 바라며 공동체는 안중에 없는 경우도 꽤 있다.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공동체의 구조를 바꾸라고 쉽게 분노하고, 이 분노에 동조자들을 끌어들인다. 아비멜렉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아비멜렉이 벌인 판의 중심에 왕이 되려는 자기 욕심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듯, 나의 삶의 판에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욕심만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면, 기회와 여건만 주어질 때 이 시대의 아비멜렉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모습에 내가 투영되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을 ‘분노’하게 하여 자기 세력을 키우는 지도자를 경계해야 한다.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며 세력을 모으는 것도 분별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우상에 기대어 세력화를 꾀하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이용만 하는 지도자도 분별해야 한다.
*우리의 정치 현실과 너무도 닮은 본문 말씀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적어도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게 하셔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니, 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신뢰한다.
*아무쪼록 철학, 비전, 사명도 없이 “분노, 적개심, 지연, 혈연”에 기대어 지도자가 되려는 이들이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는 국민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판에 한숨이 나오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갈망하게 되는 아침이기에 소망을 가져 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기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드온의 황금 에봇과 이스라엘의 영적 망각 [사사기 8:22-35]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금세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기드온은 당연히 거절했지만, 황금 에봇을 만들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다시 배교의 길로 들어선다. 7년간의 미디안 압제에서 해방되어 평화가 찾아왔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위협은 이미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1. 그때에(22-27절)…… 이와 같이 하여(28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완전한 승리를 선언한 그때에 일어난 일이다. 승전 축하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의 집안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다(22절). 기막힌 일이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끝난 그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야 하는데, 또다시 사람(기드온)의 통치를 요청하다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어두움이 매우 심각하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자신의 집안이 다스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라고 선언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드온의 분별력이 고맙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두워진 마음과 눈이 마음에 걸린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망쳐 놓은 듯하다. 승리로 완결된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찬사를 보낸다. 두고두고 아쉽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영적 무감각이 이토록 몰지각하다.
한편 기드온은 왕(통치자)의 자리는 거절했지만, 적어도 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할 물건을 만들 생각은 있었나 보다. 왕으로서 통치하지는 않을 테니, 전리품 중에서 귀고리를 달라고 요청한다(24절). 백성들은 기꺼이(즐거이) 드리겠다며 겉옷을 펴고 탈취한 귀고리를 그 위에 던졌다(그런데 마치 왕에게 드리는 예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모인 금의 양은 자그마치 약 20kg(금 1,700세겔)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초승달 장식들, 패물, 미디안 왕들의 자색 옷들, 낙타 목 장식품 등이 기드온에게 모였다(25-26절). 기드온은 모인 금 귀고리로 “황금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 하지만 이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의 올무가 되어 버렸다(27절).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까지만 좋았다. 딱 여기까지였다. 탈취한 귀고리를 요청하고 그 금으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는데, 이것이 가져올 또 하나의 우상숭배, 곧 보이지 않는 영적 배교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 즉 우상으로 숭배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면 무엇이든 만들어 섬겨 버리는 우상 지향적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역개정에는 “이와 같이 하여”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새번역은 28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와 같이 하여 미디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은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나에게는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힌다. “이와 같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이스라엘 땅에,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일까? 에봇을 의지한 평화가 아닐까?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온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겨서_새번역)” 누린 평화였다. 이것이 진정한 “여호와 샬롬”일까? 여호와 하나님 없이 황금 에봇을 의지하는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겠노라며 만든 물건이 도리어 하나님이 되어 버린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에게도 “하나님처럼” 섬기는 오늘날의 황금 에봇이 과연 없을까?
*가장 큰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할 승전 축하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은 쏙 들어가고, 황금 에봇에 눈길이 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1~3계명을 어기는 것인 줄 정녕 깨닫지 못했을까? 단 한 사람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2. 기드온의 삶(29-32절)
승전하고 돌아온 기드온을 사사기 저자는 “여룹바알”이라고 부른다(29절). 뭔가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기드온의 삶을 소개하면서, “바알과 싸우는 사람”인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감히 바알을 따르지 못했지만,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바알들을 따라 음행하며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33절).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라는 뜻이다. 세겜 지역에서는 “엘브릿(언약의 하나님)”으로까지 불렸다! 언약의 하나님과 비슷한 이름의 신을 자신들이 따르는 “바알들”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저자는 이렇게 된 원인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것”(34절)과 기드온이 자신들을 위해 베푼 은혜를 아무도 기억하지도, 갚지도 않은 것(35절)을 지적한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기드온도 잊혔다. 기드온에게 받았던 은혜를 아무도 갚지 않았다.
*기드온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30절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친아들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새번역_30절).”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승리를 이끈 사람이었으니, 에봇을 만들고 많은 아내를 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가장 잘나갈 때 가장 절제했더라면 어땠을까? 최대의 승리 이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기드온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승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의 백지수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경거망동과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기가 찰 노릇이다.
3. “또”…… 망각이 망국의 시작이다(33-35절)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과도한 자신감은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기념비적인 450:1의 승리 이후에는 승리에 도취하는 것보다 그 승리가 의미 있도록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은 “승리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겨우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전쟁에 임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승리는 앞서 행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사실은 전쟁이 끝난 승리의 현장에서부터 “망각”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위의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 내신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새번역_34절).”
*당연히 하나님께 승리의 전리품들을 올려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승리의 현장에는, 승리에 도취되어 자기들만의 기쁨에 휩싸인 채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망각한 백성들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쏙 뺀 채 기드온과 그의 아들, 손자가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백성들은 마치 기드온이 승리의 영웅(왕)인 것처럼, 겉옷을 펴고 그 위에 예물을 드리듯 귀고리들과 전리품들을 모아 기드온에게 주었다. 기드온은 말로만 왕위를 거절했을 뿐, 행동으로는 이미 왕의 권위를 누리며 군림하고 있다.
*승리의 현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곳에서 정작 하나님은 잊혔다. 450:1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끄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망각”의 망령이 겉으로 찾아온 “평화의 시간” 속에서 망국의 길을 닦고 있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22절). 보복과 처형의 과정을 지켜보며(13-21절) 이제는 미디안보다 기드온이 더 두려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감사 대신 기드온에 대한 찬사만 가득하다. 이전에 헛된 우상을 숭배하던 그들이 이제는 인간 기드온을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또다시 다른 압제와 공멸로 가는 길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기드온은 승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 대신 자기 공적을 내세우며 백성에게 자기 몫을 요구한다(22-26절). 그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행동은 결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기드온처럼 나도 여전히 ‘무시 못 할 존재’이며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려고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입술과 행함이 일치하도록 절치부심해야 한다.
-왕이 되어 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실 것이라며 거절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왕위는 거절했어도 왕이 아니면 요구할 수도, 누릴 수도 없는 막대한 부는 요구한다.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옷을 받아 입음으로써 그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겉으로는 왕이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왕이었다. 이미 권력욕에 빠져 버린 것이다.
-추앙받던 기드온이 한순간에 추락한다. 전리품으로 만든 승전 기념물인 ‘에봇’은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화근이 된다(27-28절). 그는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이었다. 대제사장만 입던 것을 음란한 방식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를 따라 배교하는 길을 열어 주고 만다. 아버지 집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없애면서 시작한 기드온의 사역이, 자기 집에 우상을 세우고 자신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게 하면서 끝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성공은 가장 치명적인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다스리신다며 왕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행동으로는 자신이 다스리려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는 우상(에봇)이 다스렸다. 시종일관(始終一貫)이 이토록 어렵다.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무성한 고백이 교회 안에서만 넘쳐나고, 정작 일상에서는 내가 만든 에봇이 나를 장악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기드온은 말과 행동이 철저히 달랐다. 왕위를 사양했으나 왕과 다를 바 없는 호사를 누린다. 이방 왕들처럼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를 낳는다. 특히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만큼 왕이 되고 싶은 자기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29-32절).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데는 철저히 실패한다. 이 같은 이율배반적인 삶은 그의 선언(23절)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런데 기드온과 같은 모습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모두가 힘을 숭상하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 힘이 지닌 위험성에 주목하여 경계하는 이들은 드물다. 유능한 지도자나 특정 인물이 모든 상황을 바꿔 주리라는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께서 왕이 되지 않으시면 어디에도 참된 희망은 없다.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은 숱한 대적들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고 다시 이방 우상들을 섬긴다(33-34절). 그들은 기드온처럼(6:13)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으니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선택한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22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도움이 안 되면 언제든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도 혹시 내게 득이 되어야 하나님을 대접하겠다는 불경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면 많은 자손과 비옥한 땅, 풍요와 번영이 결코 자신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구하기 전에, 내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실 마음의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가장 우선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드온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기드온의 공적을 기억하지도,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들이 그토록 추앙하던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하고 허망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장차 다윗과 같은 참된 통치자의 도래를 기대하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세상의 모든 지도자와 인생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기드온, 그는 왕관 없는 왕으로 살았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와 이방인 첩,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일흔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두었다. 모두 타락한 왕들이 자행하던 일이었다. 완전한 권력과 힘을 행사하는 삶을 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에는 하나님이 없다. 자기 자신의 왕 됨을 누리는 이에게는 진정한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실 마음의 공간 자체가 없다.
-그런 기드온이 죽는다. 초기에 용맹하고 지혜로웠던 사사가 죽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었지만 왕은 될 수 없었고, 사실상 왕 노릇을 하다 죽었다. 나라를 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나라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사로서 실패의 흔적을 남기고 모든 인생이 가야 할 길로 갔다.
-기드온의 죽음과 함께 여호와 신앙도 죽는다. 아니, 이미 죽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제 또다시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따라 음행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기억하지 않고, 심지어 기드온의 집안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마저 무시한다. 이렇게 잊혀 가는 기드온의 운명이 씁쓸하나, 자초한 일이었다. 그가 우상숭배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감사할 줄도, 기억할 줄도 모르는 백성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꼭 육신의 편안함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화는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더 깊이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해결하시는 모습을 보면 상황은 긴박해도 마음은 잔잔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육신이 편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저주다!
-이스라엘이 “또”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언한 기드온의 말과 그의 40년간의 삶이 일치했다면 과연 그랬을까? 세겜 첩에게서 난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달랐던 사사 기드온이 “또” 이스라엘을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백성들도 할 말이 없다. 기드온이 승전 기념으로 만든(만들어서는 안 되는) 황금 에봇을 마치 눈에 보이는 하나님처럼 섬기는 영적 음란을 기꺼이 행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온 이스라엘(27절)”이 그러했다. 미디안 연합군을 상대로 기막힌 승리를 경험했지만, 정작 그 기막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고작 눈에 보이는 황금 에봇과 바꿔 버렸다. 이런 무지함이라니……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 무지가 결국 “또” 망각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망국으로 치닫는 줄도 모른 채 황금 에봇이 주는 평화에 취했다. 무려 40년 동안 그리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1. 그때에(22-27절)…… 이와 같이 하여(28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완전한 승리를 선언한 그때에 일어난 일이다. 승전 축하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의 집안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다(22절). 기막힌 일이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끝난 그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야 하는데, 또다시 사람(기드온)의 통치를 요청하다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어두움이 매우 심각하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자신의 집안이 다스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라고 선언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드온의 분별력이 고맙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두워진 마음과 눈이 마음에 걸린다. 7년 동안의 미디안의 압제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망쳐 놓은 듯하다. 승리로 완결된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찬사를 보낸다. 두고두고 아쉽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영적 무감각이 이토록 몰지각하다.
한편 기드온은 왕(통치자)의 자리는 거절했지만, 적어도 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할 물건을 만들 생각은 있었나 보다. 왕으로서 통치하지는 않을 테니, 전리품 중에서 귀고리를 달라고 요청한다(24절). 백성들은 기꺼이(즐거이) 드리겠다며 겉옷을 펴고 탈취한 귀고리를 그 위에 던졌다(그런데 마치 왕에게 드리는 예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모인 금의 양은 자그마치 약 20kg(금 1,700세겔)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초승달 장식들, 패물, 미디안 왕들의 자색 옷들, 낙타 목 장식품 등이 기드온에게 모였다(25-26절). 기드온은 모인 금 귀고리로 “황금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 하지만 이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의 올무가 되어 버렸다(27절).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까지만 좋았다. 딱 여기까지였다. 탈취한 귀고리를 요청하고 그 금으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는데, 이것이 가져올 또 하나의 우상숭배, 곧 보이지 않는 영적 배교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 즉 우상으로 숭배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면 무엇이든 만들어 섬겨 버리는 우상 지향적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역개정에는 “이와 같이 하여”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새번역은 28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와 같이 하여 미디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은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나에게는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힌다. “이와 같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이스라엘 땅에,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일까? 에봇을 의지한 평화가 아닐까?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온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겨서_새번역)” 누린 평화였다. 이것이 진정한 “여호와 샬롬”일까? 여호와 하나님 없이 황금 에봇을 의지하는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겠노라며 만든 물건이 도리어 하나님이 되어 버린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에게도 “하나님처럼” 섬기는 오늘날의 황금 에봇이 과연 없을까?
*가장 큰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할 승전 축하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은 쏙 들어가고, 황금 에봇에 눈길이 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1~3계명을 어기는 것인 줄 정녕 깨닫지 못했을까? 단 한 사람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2. 기드온의 삶(29-32절)
승전하고 돌아온 기드온을 사사기 저자는 “여룹바알”이라고 부른다(29절). 뭔가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기드온의 삶을 소개하면서, “바알과 싸우는 사람”인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감히 바알을 따르지 못했지만,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바알들을 따라 음행하며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33절).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라는 뜻이다. 세겜 지역에서는 “엘브릿(언약의 하나님)”으로까지 불렸다! 언약의 하나님과 비슷한 이름의 신을 자신들이 따르는 “바알들”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저자는 이렇게 된 원인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것”(34절)과 기드온이 자신들을 위해 베푼 은혜를 아무도 기억하지도, 갚지도 않은 것(35절)을 지적한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기드온도 잊혔다. 기드온에게 받았던 은혜를 아무도 갚지 않았다.
*기드온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30절이다. “그런데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친아들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새번역_30절).”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승리를 이끈 사람이었으니, 에봇을 만들고 많은 아내를 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가장 잘나갈 때 가장 절제했더라면 어땠을까? 최대의 승리 이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기드온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승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의 백지수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경거망동과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기가 찰 노릇이다.
3. “또”…… 망각이 망국의 시작이다(33-35절)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과도한 자신감은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기념비적인 450:1의 승리 이후에는 승리에 도취하는 것보다 그 승리가 의미 있도록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은 “승리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겨우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전쟁에 임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승리는 앞서 행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사실은 전쟁이 끝난 승리의 현장에서부터 “망각”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위의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 내신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새번역_34절).”
*당연히 하나님께 승리의 전리품들을 올려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승리의 현장에는, 승리에 도취되어 자기들만의 기쁨에 휩싸인 채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를 망각한 백성들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쏙 뺀 채 기드온과 그의 아들, 손자가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백성들은 마치 기드온이 승리의 영웅(왕)인 것처럼, 겉옷을 펴고 그 위에 예물을 드리듯 귀고리들과 전리품들을 모아 기드온에게 주었다. 기드온은 말로만 왕위를 거절했을 뿐, 행동으로는 이미 왕의 권위를 누리며 군림하고 있다.
*승리의 현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곳에서 정작 하나님은 잊혔다. 450:1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끄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망각”의 망령이 겉으로 찾아온 “평화의 시간” 속에서 망국의 길을 닦고 있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22절). 보복과 처형의 과정을 지켜보며(13-21절) 이제는 미디안보다 기드온이 더 두려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감사 대신 기드온에 대한 찬사만 가득하다. 이전에 헛된 우상을 숭배하던 그들이 이제는 인간 기드온을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또다시 다른 압제와 공멸로 가는 길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기드온은 승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 대신 자기 공적을 내세우며 백성에게 자기 몫을 요구한다(22-26절). 그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행동은 결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기드온처럼 나도 여전히 ‘무시 못 할 존재’이며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려고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입술과 행함이 일치하도록 절치부심해야 한다.
-왕이 되어 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실 것이라며 거절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왕위는 거절했어도 왕이 아니면 요구할 수도, 누릴 수도 없는 막대한 부는 요구한다.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옷을 받아 입음으로써 그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겉으로는 왕이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왕이었다. 이미 권력욕에 빠져 버린 것이다.
-추앙받던 기드온이 한순간에 추락한다. 전리품으로 만든 승전 기념물인 ‘에봇’은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화근이 된다(27-28절). 그는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이었다. 대제사장만 입던 것을 음란한 방식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를 따라 배교하는 길을 열어 주고 만다. 아버지 집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없애면서 시작한 기드온의 사역이, 자기 집에 우상을 세우고 자신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게 하면서 끝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성공은 가장 치명적인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다스리신다며 왕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행동으로는 자신이 다스리려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는 우상(에봇)이 다스렸다. 시종일관(始終一貫)이 이토록 어렵다.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무성한 고백이 교회 안에서만 넘쳐나고, 정작 일상에서는 내가 만든 에봇이 나를 장악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기드온은 말과 행동이 철저히 달랐다. 왕위를 사양했으나 왕과 다를 바 없는 호사를 누린다. 이방 왕들처럼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를 낳는다. 특히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만큼 왕이 되고 싶은 자기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29-32절).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데는 철저히 실패한다. 이 같은 이율배반적인 삶은 그의 선언(23절)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런데 기드온과 같은 모습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모두가 힘을 숭상하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 힘이 지닌 위험성에 주목하여 경계하는 이들은 드물다. 유능한 지도자나 특정 인물이 모든 상황을 바꿔 주리라는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께서 왕이 되지 않으시면 어디에도 참된 희망은 없다.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은 숱한 대적들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고 다시 이방 우상들을 섬긴다(33-34절). 그들은 기드온처럼(6:13)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으니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선택한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22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도움이 안 되면 언제든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도 혹시 내게 득이 되어야 하나님을 대접하겠다는 불경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면 많은 자손과 비옥한 땅, 풍요와 번영이 결코 자신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구하기 전에, 내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실 마음의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가장 우선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드온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기드온의 공적을 기억하지도,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들이 그토록 추앙하던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하고 허망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장차 다윗과 같은 참된 통치자의 도래를 기대하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세상의 모든 지도자와 인생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기드온, 그는 왕관 없는 왕으로 살았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와 이방인 첩,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일흔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두었다. 모두 타락한 왕들이 자행하던 일이었다. 완전한 권력과 힘을 행사하는 삶을 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에는 하나님이 없다. 자기 자신의 왕 됨을 누리는 이에게는 진정한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실 마음의 공간 자체가 없다.
-그런 기드온이 죽는다. 초기에 용맹하고 지혜로웠던 사사가 죽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었지만 왕은 될 수 없었고, 사실상 왕 노릇을 하다 죽었다. 나라를 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나라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사로서 실패의 흔적을 남기고 모든 인생이 가야 할 길로 갔다.
-기드온의 죽음과 함께 여호와 신앙도 죽는다. 아니, 이미 죽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제 또다시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따라 음행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기억하지 않고, 심지어 기드온의 집안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마저 무시한다. 이렇게 잊혀 가는 기드온의 운명이 씁쓸하나, 자초한 일이었다. 그가 우상숭배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감사할 줄도, 기억할 줄도 모르는 백성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꼭 육신의 편안함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화는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더 깊이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해결하시는 모습을 보면 상황은 긴박해도 마음은 잔잔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육신이 편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저주다!
-이스라엘이 “또”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언한 기드온의 말과 그의 40년간의 삶이 일치했다면 과연 그랬을까? 세겜 첩에게서 난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라고 지을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달랐던 사사 기드온이 “또” 이스라엘을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백성들도 할 말이 없다. 기드온이 승전 기념으로 만든(만들어서는 안 되는) 황금 에봇을 마치 눈에 보이는 하나님처럼 섬기는 영적 음란을 기꺼이 행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온 이스라엘(27절)”이 그러했다. 미디안 연합군을 상대로 기막힌 승리를 경험했지만, 정작 그 기막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고작 눈에 보이는 황금 에봇과 바꿔 버렸다. 이런 무지함이라니……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 무지가 결국 “또” 망각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망국으로 치닫는 줄도 모른 채 황금 에봇이 주는 평화에 취했다. 무려 40년 동안 그리했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기드온의 이중성과 요단 동편 정벌의 그림자 [사사기 8:1-21]
에브라임이 자신들을 늦게 불렀다고 불평하였지만, 기드온은 지혜롭게 양보하며 넘어간다. 하지만 전쟁이 요단 동편으로 넘어가면서, 기드온은 자신을 돕지 않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무사히 돌아올 때 그들을 징계하겠다고 맹세한다. 그리고 갈골까지 쫓아가 마침내 미디안 왕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가지고 온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기드온과 크게 다툰다. 전쟁 막바지에 동참한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의 장자인 자신들이 전쟁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거센 항의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의 현장에서 논공행상을 따지는 꼴이다. 전쟁 초기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자칫 승리하자마자 분열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기드온은 지혜로운 말로 이 상황을 잘 극복한다(1-3절). 그런데 정말 지혜로워서일까?
또 기드온에게 대패하여 도망하는 미디안 군대의 세바와 살문나를 쫓아 요단강을 건넌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는, 피곤한 몸으로 숙곳에 이르러 갓 지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했다. 얍복강 가의 브누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거절하며 기드온을 조롱했다. 이에 기드온은 미디안의 세바와 살문나를 붙잡아 그들 앞에 세운 뒤 죽이고,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를 조롱했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징벌한다(4-21절). 에브라임에게 보인 모습과 왜 이리 다를까?
1. 에브라임의 어깃장, 기드온의 소심함(1-3절)
참, 이런 지파라니……. 한심하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작할 때 먼저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툰 것”이다. 에브라임은 왜 어깃장을 놓고 있을까?
본문은 그 원인을 직접 밝히지 않지만, 드보라는 에브라임에 대하여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5:14)”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비유다. 출애굽 직후 시내산으로 행군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후미에 처진 이들을 비겁하게 공격한 아말렉의 치졸함을 에브라임이 닮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은 전쟁 끝 무렵에 참전하여 오렙과 스엡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300명 군사의 활약에 비하면 그 공이 미미하다. 그래서 전리품을 더 얻을 목적으로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 것이다. 그 속이 훤히 보인다. 문제는 이런 비겁한 모습을 보인 것이 이번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후 사사 ‘입다’도 에브라임에 대하여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12:1)”라고 말한다. 훗날 다윗의 찬양대장 ‘아삽’은 그가 지은 시편에서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시 78:9-11)”라고 노래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브라임 지파는 이런 이미지였다.
이런 이미지는 가나안 땅 정복 전쟁과 사사 시대의 혼란한 전쟁들을 거치면서 형성된 듯하다. 드보라가 시스라와 철 병거 900대에 맞서기 위해 불어 소집한 나팔 소리에도 에브라임은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장자 지파의 위치에 있었지만, 장자로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돕지 않았다. 도리어 결정적인 전쟁에서 비겁하게 소집 나팔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패주하는 미디안이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요단 나루터를 장악해 달라는 기드온의 요청을 받아들여 손쉽게 나루터를 장악하고 미디안 군사들을 죽였다. 그리고 두 장수를 쫓아가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요단강을 건너와 생색을 낸 것이다.
*민족의 전투에서 장자의 자리에 걸맞게 적극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장자 지파로서의 의무는 감당하지 않으면서 장자 지파의 영광만 얻으려는 것이다. 비겁하고 얄밉다.
*하지만 기드온의 반응이 정말 놀랍다. 그는 “자신과 자기 지파는 한없이 낮추고, 에브라임의 존재감은 더욱 인정한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기드온의 가문)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절)”,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3절)”, 이 두 문장으로 에브라임의 어깃장을 잠재운다. 그야말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은” 셈이다. 파렴치한 에브라임의 어깃장을 기드온은 겸손한(?) 말로 잠재웠다. 에브라임은 심하게 다툴 기세로 강하게 압박해 왔지만, 기드온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오히려 치하하며 높여 주었다. 그러자 에브라임의 노여움이 풀렸다.
*언뜻 보면 참 너그러운 지도자로구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요단 동편에서 보인 모습을 보면, 그는 강한 지파인 에브라임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동족들 앞에서는 강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기드온은 소인배다.
2.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저주를 자초한 말, 기드온의 찜찜한 말(4-21절)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는 요단강을 건너 도망하는 미디안 왕들을 추격한다. 그 와중에 숙곳과 브누엘 두 마을에 음식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유인즉 “미디안 왕들을 사로잡은 것을 보기 전에는 기드온에게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5-9절).
*이 일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일에는 협조하지 않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진리와 정의와 평화보다 언제나 자기 안전과 이익이 우선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숙곳과 브누엘은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생포하여 돌아오자 그가 말한 대로 징벌을 받는다. 기드온은 숙곳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했고(16절), 브누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다(17절). 그리고 세바와 살문나에게는 그들이 다볼에서 자기 형제들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행한다. “그들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들이다.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너희가 그들을 살려 주기만 하였더라도 내가 너희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새번역_19절).” 형제들을 “살려 주기만 하였더라도” 세바와 살문나를 살려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매우 우려스러운 장면이다. 기드온이 요단 동편으로 건너와 세바와 살문나가 이끄는 15,000명의 패잔병을 평정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동족인 숙곳의 장로들과 브누엘 주민들을 죽인 이유가 “개인의 원한을 갚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구원자로서의 책임을 자신의 복수에 사용한 것이다. 그는 개인의 복수를 위해 300명의 군사를 이용했고, 그 와중에 여호와를 앞세워 보복의 명분을 세웠다(19절). 또 자신의 복수를 위해 숙곳과 브누엘에 거주하던 동족인 갓 지파 사람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처단한다(7, 13-17절).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 확연하게 보인다. 동족의 전쟁에 참여하여 돕지 않는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 제대로 응하지도 않고 공로만 차지하려는 에브라임……. 하나님의 승리를 믿지 않았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여호와의 전쟁을 개인의 원한을 갚는 복수 전쟁으로” 전락시킨 기드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려던 전쟁이 개인의 원한을 갚는 일로 마무리된다.
나는?
-요단 나루터에서 큰 공을 세운(7:24-25) 에브라임 지파는 처음부터 자신들을 미디안 전쟁에서 배제한 것에 대해 크게 불평한다(1절). 그들은 전쟁 끝 무렵에 참전하여 오렙과 스엡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 후에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며 기드온에게 시비를 건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리품을 더 얻기를 원한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 에브라임이 마지막에 한 일을 높이 평가하며 넉넉한 전리품을 약속하는 듯한 말을 하자, 의도된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승리의 영예를 서로 차지하려는 그들의 다툼은 이 전쟁이 ‘누구’의 전쟁이고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를 되묻게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무엇에 기뻐하고 분노하는지를 보면, 내가 무엇을 가장 열망하는지가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보다 내 명예와 유익, 내 교회와 내 교파를 앞세우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리라.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치기 어린 불평에, 일단 자신이 세운 공적보다 미디안의 두 방백을 죽인 에브라임의 공적을 추켜세우며 불화를 누그러뜨린다(2-3절). 자칫 ‘한 지파의 불만’으로 야기될 수 있는 ‘지파 간의 내분’까지 미연에 차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승리를 독점하지 않고 함께한 모든 지체와 영광을 나누는 모습으로 보아도 기드온의 처세는 현명하다. 시기와 경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불평이라도 경청하고 존중해 주어 내분으로 번지지 않게 하는 기드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숙곳과 브누엘에 대한 그의 대처는 사뭇 다르다. 불평하는 에브라임 지파를 뒤로하고 미디안의 두 왕을 추격하는 이스라엘 군대는 피곤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 이 와중에 숙곳과 브누엘 주민들은 기드온과 군사들을 냉담하기 짝이 없게 대한다. 기드온은 그럼에도 미디안의 두 왕을 사로잡기 위해 직접 나서고, 도움 요청에 불응한 그들을 응징한다(4-9절). 이런 모습은 동족들 앞에서 자신을 ‘왕’과 동일시한다는 인상을 충분히 풍긴다. 믿음이 부패하면 인간의 지위와 권력은 언제든 교만을 낳는다. 그리고 이 교만한 힘은 사회적 불의와 혼란을 만들어 낸다. 어떤 형태의 지위나 힘이든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기 위해 맡은 것임을 기억할 때, 그 힘에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요단 동편의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할 만큼 그의 원정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8, 10-12절). 이는 그들의 무심하고 불충한 모습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내재된 분열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이때 기드온의 원정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비전과 야망, 헌신과 혹사, 순종과 추종 사이의 경계를 잘 분별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삶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혹시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즉시 돌이켜야 한다.
-한편 세바와 살문나는 남은 군사 15,000명을 모아 갈골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과 맞섰다. 불과 15,000명만 남았다가 그마저 전멸한 것이다. 게다가 기드온은 그가 따라오지 않으리라 여기며 안심하고 있던 그들을 쳐서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온 진영을 격파하였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보복이 두려워 피곤한 군대에게 마른 떡 한 조각도 주지 않은 숙곳 사람들의 비겁함과 비정함을 ‘질책하며’ 잔혹하게 징벌한다(13-17절). 하지만 동족을 향한 필요 이상의 분노와 징벌은 ‘공의로운 보응’이 아니라 ‘사적 감정에 치우친 보복’으로 보인다.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군림하는 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보복자’가 된 것이다. 우리도 사적인 감정이나 이익에 치우쳐 공평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크고 작은 다툼이 ‘나의 탐욕’에서 시작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적장들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기드온은 ‘왕처럼’ 행세한다. 적장들의 눈에도 기드온의 형제들은 ‘왕자’처럼 보였고, 기드온은 장자에게 적국의 왕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여 자신과 아들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18-21절). 우리도 얼마든지 믿음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데 관심을 둘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로 시작한 일을 통해서는 영광받지 않으신다.
-8장의 요단 동편 정벌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기드온은 가장 은혜로운 기적의 승리 직후에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개인의 원수를 갚는 일에 매진했다. 가장 은혜로운 시간 속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자기 원한을 갚는 일에 사사의 직분을 사용한 것이다.
*나도 언제든지 이 유혹에 노출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절정에 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얹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더욱 박차를 가해 진행할 수도 있다. 기드온처럼 말이다.
*개인의 원한을 갚는 과정에서 결국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소심하고 비겁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 미디안의 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그 소심함이,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절정의 순간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이런 기드온의 모습이 나의 모습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에 감춰져 있던 나의 나약한 모습이 언제든 표면에 드러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은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 드러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하다.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직후 나선 요단 동편 정벌에 하나님이 없다! 기드온의 혈기와 교만만 드러났다!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가지고 온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기드온과 크게 다툰다. 전쟁 막바지에 동참한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의 장자인 자신들이 전쟁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거센 항의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승리의 현장에서 논공행상을 따지는 꼴이다. 전쟁 초기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자칫 승리하자마자 분열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기드온은 지혜로운 말로 이 상황을 잘 극복한다(1-3절). 그런데 정말 지혜로워서일까?
또 기드온에게 대패하여 도망하는 미디안 군대의 세바와 살문나를 쫓아 요단강을 건넌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는, 피곤한 몸으로 숙곳에 이르러 갓 지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했다. 얍복강 가의 브누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거절하며 기드온을 조롱했다. 이에 기드온은 미디안의 세바와 살문나를 붙잡아 그들 앞에 세운 뒤 죽이고,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를 조롱했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징벌한다(4-21절). 에브라임에게 보인 모습과 왜 이리 다를까?
1. 에브라임의 어깃장, 기드온의 소심함(1-3절)
참, 이런 지파라니……. 한심하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작할 때 먼저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툰 것”이다. 에브라임은 왜 어깃장을 놓고 있을까?
본문은 그 원인을 직접 밝히지 않지만, 드보라는 에브라임에 대하여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5:14)”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비유다. 출애굽 직후 시내산으로 행군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후미에 처진 이들을 비겁하게 공격한 아말렉의 치졸함을 에브라임이 닮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은 전쟁 끝 무렵에 참전하여 오렙과 스엡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300명 군사의 활약에 비하면 그 공이 미미하다. 그래서 전리품을 더 얻을 목적으로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 것이다. 그 속이 훤히 보인다. 문제는 이런 비겁한 모습을 보인 것이 이번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후 사사 ‘입다’도 에브라임에 대하여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12:1)”라고 말한다. 훗날 다윗의 찬양대장 ‘아삽’은 그가 지은 시편에서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시 78:9-11)”라고 노래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브라임 지파는 이런 이미지였다.
이런 이미지는 가나안 땅 정복 전쟁과 사사 시대의 혼란한 전쟁들을 거치면서 형성된 듯하다. 드보라가 시스라와 철 병거 900대에 맞서기 위해 불어 소집한 나팔 소리에도 에브라임은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장자 지파의 위치에 있었지만, 장자로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돕지 않았다. 도리어 결정적인 전쟁에서 비겁하게 소집 나팔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패주하는 미디안이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요단 나루터를 장악해 달라는 기드온의 요청을 받아들여 손쉽게 나루터를 장악하고 미디안 군사들을 죽였다. 그리고 두 장수를 쫓아가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요단강을 건너와 생색을 낸 것이다.
*민족의 전투에서 장자의 자리에 걸맞게 적극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장자 지파로서의 의무는 감당하지 않으면서 장자 지파의 영광만 얻으려는 것이다. 비겁하고 얄밉다.
*하지만 기드온의 반응이 정말 놀랍다. 그는 “자신과 자기 지파는 한없이 낮추고, 에브라임의 존재감은 더욱 인정한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기드온의 가문)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절)”,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3절)”, 이 두 문장으로 에브라임의 어깃장을 잠재운다. 그야말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은” 셈이다. 파렴치한 에브라임의 어깃장을 기드온은 겸손한(?) 말로 잠재웠다. 에브라임은 심하게 다툴 기세로 강하게 압박해 왔지만, 기드온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오히려 치하하며 높여 주었다. 그러자 에브라임의 노여움이 풀렸다.
*언뜻 보면 참 너그러운 지도자로구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요단 동편에서 보인 모습을 보면, 그는 강한 지파인 에브라임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동족들 앞에서는 강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기드온은 소인배다.
2.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저주를 자초한 말, 기드온의 찜찜한 말(4-21절)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는 요단강을 건너 도망하는 미디안 왕들을 추격한다. 그 와중에 숙곳과 브누엘 두 마을에 음식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유인즉 “미디안 왕들을 사로잡은 것을 보기 전에는 기드온에게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5-9절).
*이 일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일에는 협조하지 않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진리와 정의와 평화보다 언제나 자기 안전과 이익이 우선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숙곳과 브누엘은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생포하여 돌아오자 그가 말한 대로 징벌을 받는다. 기드온은 숙곳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했고(16절), 브누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다(17절). 그리고 세바와 살문나에게는 그들이 다볼에서 자기 형제들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행한다. “그들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들이다.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너희가 그들을 살려 주기만 하였더라도 내가 너희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새번역_19절).” 형제들을 “살려 주기만 하였더라도” 세바와 살문나를 살려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매우 우려스러운 장면이다. 기드온이 요단 동편으로 건너와 세바와 살문나가 이끄는 15,000명의 패잔병을 평정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동족인 숙곳의 장로들과 브누엘 주민들을 죽인 이유가 “개인의 원한을 갚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구원자로서의 책임을 자신의 복수에 사용한 것이다. 그는 개인의 복수를 위해 300명의 군사를 이용했고, 그 와중에 여호와를 앞세워 보복의 명분을 세웠다(19절). 또 자신의 복수를 위해 숙곳과 브누엘에 거주하던 동족인 갓 지파 사람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처단한다(7, 13-17절).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 확연하게 보인다. 동족의 전쟁에 참여하여 돕지 않는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 제대로 응하지도 않고 공로만 차지하려는 에브라임……. 하나님의 승리를 믿지 않았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여호와의 전쟁을 개인의 원한을 갚는 복수 전쟁으로” 전락시킨 기드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려던 전쟁이 개인의 원한을 갚는 일로 마무리된다.
나는?
-요단 나루터에서 큰 공을 세운(7:24-25) 에브라임 지파는 처음부터 자신들을 미디안 전쟁에서 배제한 것에 대해 크게 불평한다(1절). 그들은 전쟁 끝 무렵에 참전하여 오렙과 스엡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 후에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며 기드온에게 시비를 건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리품을 더 얻기를 원한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 에브라임이 마지막에 한 일을 높이 평가하며 넉넉한 전리품을 약속하는 듯한 말을 하자, 의도된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승리의 영예를 서로 차지하려는 그들의 다툼은 이 전쟁이 ‘누구’의 전쟁이고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를 되묻게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무엇에 기뻐하고 분노하는지를 보면, 내가 무엇을 가장 열망하는지가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보다 내 명예와 유익, 내 교회와 내 교파를 앞세우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리라.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치기 어린 불평에, 일단 자신이 세운 공적보다 미디안의 두 방백을 죽인 에브라임의 공적을 추켜세우며 불화를 누그러뜨린다(2-3절). 자칫 ‘한 지파의 불만’으로 야기될 수 있는 ‘지파 간의 내분’까지 미연에 차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승리를 독점하지 않고 함께한 모든 지체와 영광을 나누는 모습으로 보아도 기드온의 처세는 현명하다. 시기와 경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불평이라도 경청하고 존중해 주어 내분으로 번지지 않게 하는 기드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숙곳과 브누엘에 대한 그의 대처는 사뭇 다르다. 불평하는 에브라임 지파를 뒤로하고 미디안의 두 왕을 추격하는 이스라엘 군대는 피곤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 이 와중에 숙곳과 브누엘 주민들은 기드온과 군사들을 냉담하기 짝이 없게 대한다. 기드온은 그럼에도 미디안의 두 왕을 사로잡기 위해 직접 나서고, 도움 요청에 불응한 그들을 응징한다(4-9절). 이런 모습은 동족들 앞에서 자신을 ‘왕’과 동일시한다는 인상을 충분히 풍긴다. 믿음이 부패하면 인간의 지위와 권력은 언제든 교만을 낳는다. 그리고 이 교만한 힘은 사회적 불의와 혼란을 만들어 낸다. 어떤 형태의 지위나 힘이든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기 위해 맡은 것임을 기억할 때, 그 힘에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요단 동편의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할 만큼 그의 원정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8, 10-12절). 이는 그들의 무심하고 불충한 모습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내재된 분열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이때 기드온의 원정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비전과 야망, 헌신과 혹사, 순종과 추종 사이의 경계를 잘 분별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삶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혹시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즉시 돌이켜야 한다.
-한편 세바와 살문나는 남은 군사 15,000명을 모아 갈골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과 맞섰다. 불과 15,000명만 남았다가 그마저 전멸한 것이다. 게다가 기드온은 그가 따라오지 않으리라 여기며 안심하고 있던 그들을 쳐서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온 진영을 격파하였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보복이 두려워 피곤한 군대에게 마른 떡 한 조각도 주지 않은 숙곳 사람들의 비겁함과 비정함을 ‘질책하며’ 잔혹하게 징벌한다(13-17절). 하지만 동족을 향한 필요 이상의 분노와 징벌은 ‘공의로운 보응’이 아니라 ‘사적 감정에 치우친 보복’으로 보인다.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군림하는 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보복자’가 된 것이다. 우리도 사적인 감정이나 이익에 치우쳐 공평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크고 작은 다툼이 ‘나의 탐욕’에서 시작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적장들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기드온은 ‘왕처럼’ 행세한다. 적장들의 눈에도 기드온의 형제들은 ‘왕자’처럼 보였고, 기드온은 장자에게 적국의 왕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여 자신과 아들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18-21절). 우리도 얼마든지 믿음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데 관심을 둘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로 시작한 일을 통해서는 영광받지 않으신다.
-8장의 요단 동편 정벌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기드온은 가장 은혜로운 기적의 승리 직후에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개인의 원수를 갚는 일에 매진했다. 가장 은혜로운 시간 속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자기 원한을 갚는 일에 사사의 직분을 사용한 것이다.
*나도 언제든지 이 유혹에 노출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절정에 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얹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더욱 박차를 가해 진행할 수도 있다. 기드온처럼 말이다.
*개인의 원한을 갚는 과정에서 결국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소심하고 비겁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 미디안의 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그 소심함이,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절정의 순간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이런 기드온의 모습이 나의 모습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에 감춰져 있던 나의 나약한 모습이 언제든 표면에 드러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은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 드러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하다.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직후 나선 요단 동편 정벌에 하나님이 없다! 기드온의 혈기와 교만만 드러났다!
선교편지 ㅣ
정동준 선교사
정동준 우한나 선교사 기도편지(53)
안녕하세요? 더워지는 한국에서 기도편지를 보내면서 우간다 인사말이 아니라 한국말로 인사드립니다. 우리들의 삶이…
외부보도 ㅣ
노컷뉴스
2026년 05월 16일
‘럭키비키’ 말고 ‘홀리빛키’…전주 교회 축제에 가족 몰렸다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투데이N
2026년 05월 16일
“행운 대신 거룩한 은혜를”… 전주 더온누리교회, 다음 세대 위한 ‘홀리 빛키’ 페스티벌 성료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VERITAS-a
2025년 12월 24일
전주대, 더온누리교회로부터 발전기금 1,000만원 전달받아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노컷뉴스
2025년 10월 22일
전주필그림·밴쿠버합창단 자매결연, 더온누리교회서 연합공연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노컷뉴스
2025년 10월 22일
‘복음과 교사’ 주제 ‘넥스트교사컨퍼런스’ 더온누리교회에서 열려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기독일보
2025년 07월 03일
향기로운 제물, ‘보좌에 앉으신 주님’ 싱글 발매
그동안 EP앨범 1개와 10개의 싱글 앨범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예배 찬양곡을 만들어…
외부보도 ㅣ
기독일보
2025년 06월 26일
향기로운 제물, 열한 번째 앨범 ‘살아도 죽어도’ 발매
전주지역에서 목요모임을 이끌고 있는 ‘향기로운 제물’의 열한 번째 앨범 ‘살아도 죽어도’가 발매됐다….
2026년 9월 20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9월 13일 주보
우리를 더온누리교회 공동체로 부르신 은혜를 지금 여기에서 순종할 때, 어찌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을까요? 분주할수록 기도는 가장

2026년 9월 6일 주보
우리를 더온누리교회 공동체로 부르신 은혜를 지금 여기에서 순종할 때, 어찌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을까요? 분주할수록 기도는 가장


더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교역자 청빙 공고
2026년 05월 23일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동역자를 기다립니다. 전주 더온누리교회(www.theonnuri.org)에서 함께
#더온누리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은혜를 함께 나눠요. instagram에서 "#더온누리교회"를 태그해 주세요:)
검증된 Instagram 보존 화면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