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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7.(토) 낮 12:00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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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교사들이 헤집어 놓은 교회, 자신을 향한 비방들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충분히 낙심할 법도 한데, 바울은 오히려 낙심하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고후 4:1,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고후 4:16, 새번역).” 종종 찾아오는 낙심이 우리의 삶을 심각하게 흔드는 경우가 빈번하다면,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충분히 낙심될 만한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을 지켰을까?
1. 진리를 환히 드러내어(2절)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고후 4:2, 새번역).”
자기 최면이 아니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낙심하는 마음을 이겨낸 것도 아니었다. 구체적인 행동이었다. 먼저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했다(버렸다).” 그리고 간교하게(속임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진리를 환히 드러냈다.
거짓 교사들의 무뢰한 가르침과 교회의 혼란이 바울의 마음을 낙심하게 할 법도 했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직분(사도)을 맡고 있으니(1절)…” 낙심하는 대신에 오히려 더욱 치열하게 정공법으로 사역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정공법은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에 정면으로 직면하는 것이었다.
그런 억측과 말도 안 되는 가르침들 앞에서 오히려 “자신을 변호”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맡겨 주신 “진리”만을 부끄럽지 않게, 간교하지 않게, 상황과 여건에 따라 왜곡하지 않으며 “곧이곧대로” “진리를 환하게 드러냈다.” 그렇다면 이 진리는 무엇일까?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5절)”, “우리 마음속에 비추어 주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6절)”이다.
진리를 철저히 의지하고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 낙심의 어둠을 물러가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든 낙심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끝낸다. 평안의 걸음이 되도록 마음을 확고하게 하신다.
2.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기에(7~9절)
예수님의 주 되심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보배”는 연약한 육체라는 “질그릇”에 담겼다!
낙심하지 않을 가장 간단한 마음가짐은 내가 “보배”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예수님이라는 보배를 담은 그릇, 그것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임을 아는 것이 쓸데없는 낙심과 좌절을 오지 못하게 한다. 왜 그럴까? 위태로움과 어려움은 늘 일어날 수 있고, 그래서 나는 깨질 수 있지만, 내 안에 담긴 보배로 인해 망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깨어져도 오히려 내 안의 보배는 더욱 빛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능력이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안의 보배되신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 4:7~9, 새번역).”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기에……망하지 않는다!”
3. 예수로 말미암아(10~15절)
예수님이라는 보배가 질그릇인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매우 직접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고후 4:10, 새번역).”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고후 4:11,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시 116:10)라고 하였습니다.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고후 4:13, 새번역).”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고후 4:14, 새번역).”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 4:15, 새번역).”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 맡기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이 함께 세워 주시므로,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마음이 낙심할 틈이 없다. 내 마음을 내가 주인 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계셔서, 예수님께 내어 주었기에, 그 예수님이 마음을 이끄심을 믿어, 예수님이 세우시는 것을 바라보며 감사와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마음이다.
4. 속사람이 중요하다(16~18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 새번역).” 맞다. 겉사람은 시간의 흐름을 역행할 수 없다. 그런데 속사람은 충분히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먼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개역개정)”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마음이 환해졌다!
그런데 여전히 환한 주님의 빛이 비춤에도 스스로 ‘나는 마음이 어두워, 심란해’라고 여기면 답이 없다. 이미 환한데, 늘 어둡다고 스스로 여기다니…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뜻(진리)을 알게 하는 빛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마음에 거한다는 뜻이다. 말씀이 마음을 환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 진리가 마음에 있는 자는 이미 환한 마음을 가진 자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자는 마음이 혼미하게 된다. 또 다른 이들도 혼미하게 한다.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고후 4:4, 새번역).” 거짓 교사들은 마음에 이미 담긴 예수보다 이전에 익숙한 것들을 화려한 수사로 포장하여 가르치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혼미”하게 할 뿐이다. 옛 언약에 치중하게 하는 것은 새 언약을 혼미하게 하여 믿지 못하게 한다. 이로 인해 마음이 심란해지고 결국 오직 진리와 각 사람의 양심을 향해 가르친 하나님의 복음이 가리워져 버린다(2~3절). 복음이 가리워지면 사소한 것에서도 마음은 금세 낙심해 버린다. 이미 비추신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도 보지 못한다. 마음의 맹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낙심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내 안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다. 이미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에 비추인 속사람을 믿자. 이렇게 믿어야 할 이유는 선명하다.
겉사람은 낡아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지금의 고난은 가볍지만 장차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이루어 주며,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16~18절). 나의 속사람을 이렇게 다지고 또 다져서 낡아가는 겉사람에게 속지 않기를 결심한다. 겉사람을 낡게 하는 고난은 오히려 이후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을 맞이할 기반이 되고, 겉사람이 낡아가는 것이 보이는 만큼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살아갈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척도가 된다.
나는?
-갖은 반대에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과 믿음에 비해 맡은 사명이 너무 중요했고 받은 긍휼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숨길 것 없이 떳떳하게 사역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야망을 감추거나 환심을 사려고 속임수를 쓰지도 않았고, 인기를 얻으려고 날카로운 말씀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복음이 틀렸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사탄에 미혹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4:4). 그래서 그리스도의 광채가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기를, 가려지지 않기를 바라며 소망한다.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전파하였고 성도들의 종 된 것을 선포하였다(고후 4:5). 그는 그리스도를 섬겼고, 그 은혜로 성도들을 섬긴 것이다. 결코 거짓 사도들처럼 성도들 위에 군림하지 않은 것은 그가 받은 구원의 은혜 때문이었다.
-영광스러운 복음의 보화를 깨어지기 쉬운 바울이라는 질그릇에 담으신 것은, 연약한 자를 통해 강하고 교만한 자를 꺾으심으로써 참된 능력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고후 4:7). 바울은 실제로 예수의 고난을 자신의 몸에 짊어짐으로써 바울 자신은 죽고 늘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서 역사하도록 살아냈다(고후 4:10~11). 아, 그 바울을 얼마나 닮을 수 있으려나….
-고린도후서만큼 주옥같은 바울의 삶이 담긴 어록은 없을 듯하다. 특히 충분히 낙심할 만한 상황에서 오히려 “낙심하지 아니하고(1절)”, “낙심하지 아니하노니(16절)”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그의 확신에 찬 음성이 아침을 흔든다.
-자신이 보배가 아니라 질그릇임을, 보배이신 예수님이 자신 안에 계심으로 “함께” 세워져 감을 확신하여 낡아가는 겉사람에 연연하지 않고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바라보며 낙심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 살아오면서 어찌 낙심이 없겠는가! 하루에도 수많은 낙심이 일어나고, 그 낙심된 마음에서 오는 불안과 염려의 시간들이 더욱 낙심하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특히 사역과 관련되어 낙심하게 하는 것들은 크고 작든 “마음이 혼미해”지면 그 원인이 되고 진행이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사람들의 인정, 눈에 드러난 결과 수치들, 비교할 만한 수많은 지표들… 이런 것에 마음이 빼앗기면 늘상 낙심하기 마련이다. 특히 목회자의 길에서 낙심은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는 길이기에 더욱 분별해야 하는데, 바울의 사역 태도에서 따라야 할 귀한 깨달음을 얻는다.
* 지나오면서 가장 낙심되게 했던 일들이 겉사람은 낡아지게 했지만, 오히려 속사람을 새롭게 했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새벽 예배 차량 운행 중 당한 큰 사고나, 집안에 불어닥쳤던 휘청거리게 했던 광풍들, 막내와 함께 헤쳐왔던 치료의 시간들… 그 지난한 시간들을 보내면서 내 안에 계신 “보배로운 예수님”이 겉사람이라는 질그릇은 낡게 하고 깨뜨려져도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 역설의 은혜는 참으로 신비로웠다.
*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내 안의 보배되신 주님의 이름과 능력이 더욱 빛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주님의 빛이 내 안에서 더욱 빛나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결코 낙심되지 않고 평안하고 평안하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도 마음은 평안으로 날마다 채워지고 새로워진다.
* 그래서 오늘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아니하노니…”
* 10~12절 말씀이 계속 되뇌어진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고후 4:10~12, 새번역).”
* 예수님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님께 내어 맡기어 예수님의 죽음으로 오히려 생명이 “죽을 육신”에게 나타나며, 그 생명이 작용되는 삶—예수님과 도무지 함께하지 않으면 경험하고 누릴 수 없는 삶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생명이 되었음을 오늘도 실제하기를 사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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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이며, 이는 사람이 종이에 먹으로 혹은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말한다(3절). 즉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곧 자신의 추천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임을 분명하게 전한다(4-5절). 이렇게 일하는 방식이 곧 “새 언약의 일꾼”의 방법이며, 이는 “영으로” 되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6절). 자신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보내심을 받았기에 굳이 사람이 써 주는 추천서가 필요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내셨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변화된 삶이 곧 그 증거(추천서)임을 강조한다.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적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읽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판에 쓴 것입니다.(새번역, 2-3절)”
이 일을 맡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소개한다. “율법 조문”,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닌, “영으로 가슴판”에 새긴 새 언약은 “추천서”와 같은 전통과 관행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일한다(6절). 그러면서 옛 언약도 “영광”이 있지만, 새 언약은 더욱더 “넘치는 영광”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조문과 돌판도 이제껏 영광으로 빛났으나, 그리스도는 훨씬 더 빛나는 영광이므로 옛 언약의 영광은 당연히 새 언약의 영광 앞에서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이제 훨씬 더 빛나는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빛을 잃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도 생길 때에 영광을 입었으니, 길이 남을 것은 더욱 영광 속에 있을 것입니다.(새번역, 10-11절)”
옛 언약의 영광은 새 언약의 영광 앞에서 이미 그 빛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전히 옛 언약의 영광을 고집하는 것이 웬 말인가?(13-14절). 그 굴레에 여전히 속박받기를 고집하는 것이 웬 말인가? 그래서 담대히 말한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새번역, 15-18절)”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사하며 자기 배만 불리는 거짓 교사들과 달리, 바울은 순전함으로 말씀을 선포한 참 일꾼이자 사도였다. 본문은 수많은 대조를 사용하여 거대한 산을 이루어 복음의 신비를 이끌어 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과 자유의 복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전한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속사람이 변한(겔 36:26; 렘 31:33) 고린도 성도들을 자신의 추천서로 삼는다.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야말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보내신 사도임을 입증하는 산 증거였다.
-또한 대적자들은 사람들이 써 준 추천서를 요구했으나, 바울에게 부르심의 확신을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능력 주신 하나님과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만나주신 부활의 예수님이셨다(행 9:3-6). 자격증이나 추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인식한다.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4:1)과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갈 1:16)이 있었기에 그가 일꾼이 될 수 있었다. 성실하게 말씀을 전할 준비를 잘 하는 것보다 더 앞서는 것은, 자격 없는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내내’ 잊지 않는 것이리라. 이 세상의 영광보다 사라지지 않는 의의 직분을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이 새 언약의 일꾼의 자격이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모든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실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그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하시기 때문이다(롬 8:3-4). 율법 조문이 아니라 그 율법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내 자아가 죽으면), 내 안에 주님께서 사셔서 그 율법을 내 인격과 삶을 통해 이루어 가실 것이다. 새 언약의 일꾼은 진리가 주는 이 자유함을 전하는 자들이다.
-묵상하는 내내 “관행”과 “전통”, 이제껏 으레 해 왔던 것… 그것으로 인해 새로워진 삶을 스스로 속박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교회 안에서 신분과 능력, 지식과 연륜을 납득시킬 만한 몇 줄의 이력과 첨부된 추천서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관행”이 고린도 교회의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에 마음이 쓰라리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런 “옛 것”의 관행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 성도들의 변화된 삶”이 자신의 추천서라며, 사문화될 종이에 먹으로 기록된 몇 자에 사역을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마음판에 기록되어 삶으로 나타난 역동적인 회심의 삶”을 자신 있게 거론한다.
-그렇다! 사역자를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역자를 따르는 그들의 삶이 곧 올바른 추천서(편지)다! 종이 서식 위에 몇 자 적은 것이 걸어온 길을 대변할 수 있겠지만, 그 몇 줄을 함께 보낸 이들의 삶의 열매가 더욱더 확실한 대변이 될 것이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가 가장 확실한 추천서(편지)인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나의 편지(추천서), 그리스도의 편지(추천서)”라고 한 것은 실로 대단한 자신감이다. “새롭게 변화된 그들의 삶”이 없다면 감히 언급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까지 확신하며 “바로 당신들이 나의 추천서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보내셨고, 그리스도로 인해, 성령께서 분명한 변화를 이끄심”을 믿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보내심도, 각 성도를 구원으로 부르심도, 그들을 구원받은 삶에 합당하게 살아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유명인들이 적어 준 몇 줄로 지식적이고 이성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정작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은 여전히 “옛 것, 율법 조항, 돌판에 새겨진 이미 빛을 잃은 영광의 것들”이었다. 이런 것은 “새 언약”의 은혜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한순간 사람의 인정은 받을 수 있으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정은 받을 수 없다. “변화”는 없다.
* 이렇게 묵상이 되니, 분명한 한 가지가 마음에 결심으로 선다.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18절)을 사모하고 또 사모하는 것이다. 이 일은 ‘너울(관행, 전통, 관습)’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아,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 내 삶에 “예수님처럼, 더욱 예수님처럼” 살아내는 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말씀이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은혜가 마르지 않으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기막힌 하루하루가 지속되기를 소망한다.
* 이것이 곧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어디에 서 있어도 “그리스도의 편지(추천서)”된 삶임을 알기에 더욱 간절하다. 한때 나도 그들처럼 추천서를 중요하게 여겼고, 이력서 몇 줄을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학력과 각종 연구 과정이 나의 사역을 지탱해 줄 것 같았다.
* 그런데 태국의 깊은 밀림 속, 어느 밤,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안절부절못하던 나의 마음에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내가 너에게 나의 일을 맡기기 위해 추천서와 학력 몇 줄 채워 넣는 시간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나와 함께 있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충격이었다. 나는 몇 줄 채워 넣기 위해 성실하게 시간을 채워 가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겼다.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나를 위해, 내가 그리는 목회 인생을 사랑하여 했던 짓이었다.
* “그 날 임하소서…”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고 또 불렀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픈 마음을 성령께서 계속 부어 주셨다. 계속 부르고 또 불렀다. 그 이후 주님은 나에게 맡겨 주신 청년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생기가 돌고 청년들의 마음에 불이 일어나는 것을 매 주일 보고 또 보았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니, 주님께서 사랑하는 나를 위해 일하셨다.
* 바울이 “당신들이 나의 추천서오!”라는 고백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듯하다. 지금 나는 만성동에서 세상을 향해 보내는 “그리스도의 추천서”를 내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작성하고 있다. 좀 부끄럽다. 지금까지 다 주님이 써 주셨는데 주님 이름 빌어 또 써 내려가려 한다. 주님이 또 기막히게 써 주실 것이다. 훗날 달려갈 길을 마칠 때, 더온누리교회 성도들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추천서”요, 나를 위해 주님이 써 주신 추천서였다오, 하고 당당히 고백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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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단편적인 내용이 이어지는 듯하나, 결국 방문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에도 교회를 향한 자신의 진정성 있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은 정말 교회를 사랑했다. 그는 어떻게 교회를 사랑했을까?
1. 방문계획을 변경한 이유_아끼는 마음으로(1:23~24절)
먼저 앞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이 약속한 대로 방문하지 못한 것이 ‘육체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였음을 밝혔다. 혹여나 일정이 변하였음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심으로, 변경되고 미루어지는 방문 일정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예”라고 순종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분명히 고백했다.
이러한 확신 아래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바울 스스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역을 했노라는 엄숙하고 진지한 표현이지만, 동시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렇게까지 자신이 세운 교회에 자신의 진실함을 증명해야 하다니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다. 이토록 신뢰하지 않는 이들에게 구태여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바울은 비장하게 자신의 진실함을 증명한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교회 안에 불거진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이미 고린도전서를 통해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것이 실패했고, 무리를 해서 방문도 했지만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었다. 여기에 예정 없던 방문이었기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것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교인들 중에 바울은 진실하지 못한 거짓 사도라며 심각한 오해를 가지게 되었다. 중간에 거짓 교사들의 역할도 있었지만, 문제는 바울이 가짜 사도라는 오해가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가짜라고 여기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
바울은 자신의 신뢰가 훼손되는 것보다 복음이 훼손되는 것을 더 어려워했다. 이에 대한 “근심”은 바울에게 상당한 것이었다. 자신의 사도직의 오해보다 “복음에 대한 오해”가 더없이 근심스러운 일이었다. 교회 안에 이런 근심되게 하는 주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영향력을 끼치는 이로 인해 그 근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근심과 눈물의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임에도 방문하지 않은 것은 “성도들을 아끼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지배하려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고백한다.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는 성도들이 이 지난한 환난 속에서 모든 위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스스로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1:23~24절).
바울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믿음 안에 굳건히 서 있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다. 회개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어린아이를 대하듯 일방적으로 끌고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씨름하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시는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바울은 자신이 오해를 받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런 시간들을 통해 더욱 믿음이 스스로 자라고 기쁨을 스스로 누리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나도 늘 이런 선택의 갈림길에 서 왔고 앞으로도 설 것이다. 내가 개입해야 할까, 말까를 늘 고민하는 갈림길이 있어 왔다. 나의 명예, 나의 편리, 나의 주관을 입히기에 이만큼 좋은 기회는 없다. 하지만 바울의 선택을 따라가려고 늘 노력했다. 나의 이름, 영향력을 끼치는 것보다 믿음이 스스로 자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나는 주변인이 되어도 괜찮다. 스스로 믿음 안에서 고민하고 싸우고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시는 신비한 경험을 쌓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옳다. 비록 이 과정에서 관심 없는 목사, 사랑 없는 목사, 자기만 아는 목사라는 등의 오해들이 발생해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나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일 게다.
너무 친절한 목사보다 그저 묵묵히 기다리며 기도하며, 하나님 하실 일을 더 신뢰하도록 인도하는 목사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2. 방문 대신 눈물의 편지를 쓴 이유(2:1~4)
24절처럼 바울의 고심과 배려가 담긴, 성도들을 아껴 방문하지 않은 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다. 그의 고심은 ‘스스로 결심했다(1절)’는 표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많은 갈등과 기도와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또다시 고통과 슬픔으로 고린도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해서가 아니다. 바울에게 상처를 주고 불순종하고 있지만,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 백성이 된 영적 자녀들이다. 다시 방문하여 그들과 언쟁하고 서로 상처 받아 기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문제는 처리해야 했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바울이 선택한 것은 방문 대신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4절). 세 번째 편지는 많은 눈물로 썼다. 진리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과하다 싶을 만큼 책망했다(7:8). 바울도 편지를 쓰면서 교회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혹시 계속 거절하면 어쩌나 염려하기도 했을 것이다.
바울은 많은 생각과 기도로 이 편지를 썼다. 바울은 그 선택을 독자를 향한 넘치는 사랑으로 묘사한다. 이것이 방문 계획을 바꾼 이유다.
3. 용서함으로(2:5-11절)
1-4절까지 자신이 방문하지 않고 “눈물의 편지”를 쓴 이유에 대하여 1:24절과 같이 행하여 “스스로 결심(2:1)”했다고 고백한다. 많은 내적 갈등과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의미다. 즉, 또다시 스스로가 근심과 슬픔의 상태에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불순종하며 상처를 주고 있지만 그들을 미워하여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다. 단지 다시 방문하여 또 언쟁하고 서로 상처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로 편지”를 썼다고 했다(2:4절). 고후 2:4에서는 “많은 눈물”로 이 편지를 썼다고 했다. 교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 편지가 더 그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혹시 계속 자신과 복음을 거절하면 어떡하나…. 많은 생각과 기도로 몇 번이고 다시 쓰고 또 썼을 것이다. 순전히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고민하게 했고 눈물 흘리게 했으며, 몇 번이고 펜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면서도 기어이 글을 써 내려가도록 했다. 그렇게 “눈물의 편지”를 썼다.
그런데 5-11절은 그 편지를 받고서 회개하고 회복된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이다. 우리를 그토록 근심하게 했던 “어떤 이들”을 용서하자는 것이다. 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이 바울의 눈물의 편지를 받고 바울에게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소수의 성도들은 불순종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처리가 중요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해 기꺼이 “용서하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기를 권합니다.(새번역_7-8절)”
용서와 사랑은 무엇보다 그리스도 앞에서,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 구체적인 믿음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해 주면, 나도 용서해 줍니다. 내가 용서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용서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넘어가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속셈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새번역_10-11절)”
자신을 비참하도록 힘들게 모함하고 매도하였던 이들을 먼저 용서하여 교회가 사탄의 속임수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자고 먼저 권면하고 성도들을 격려하는 그 모습이 큰 도전이 된다.
사랑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 주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용서해야 한다. 교회 안에 사랑이라는 말을 흔히 내뱉지만, 진정한 사랑은 용서라는 열매가 맺혀야 한다. 용서에 인색하면서 사랑의 말만 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다. 속 빈 강정이다. 앙꼬 없는 찐빵이다. 무엇보다 사탄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것이다.
4.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되어(2:14-17절)
자신에게 불순종하고 모함하여 복음의 본질도 흐리게 하는 자들을 교회도 용서하라고 권면하면서 여전히 불순종하는 그들을 설득하고 이후에 언급하는 거짓 사도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사역을 변호한다.
바울 자신을 하나님께서 “사로잡아” 사역자로 살게 했고,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향기로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사로 잡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새번역_14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셨다….”
이렇게 자신의 사역의 정체성을 고백한다.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있기에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새번역_15절)라고 말한다.
하지만 멸망 당하는 이들에게는 이 향기가 죽음의 냄새,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생명의 향기이다(16절). 그래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처럼 말씀을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처럼 살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하나님께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보낸 일꾼” 답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가르쳤다고 확고하게 말한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새번역_17절)”
자신의 호구지책을 위해 말씀을 도용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도록 “순전하게” 말씀을 가르쳤다. 아… 이것이 나의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장사꾼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나도록 순전하게 말씀을 가르쳐야 하리라.
나는?
-고린도전서 16:5~9에 의하면 연보와 관련된 바울의 여행 계획은 마게도냐-고린도-예루살렘이었다. 이후 이 계획은 고린도-마게도냐-고린도-예루살렘으로 수정되었지만, 이마저도 이행되지 못했다. 고린도전서가 거절당하자 예정에 없던 방문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또 다른 방문이 교회에 상처를 줄까 걱정하며 대신 눈물의 편지를 썼다. 이 과정에서 에베소에 문제가 생겼고, 바울은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로 이동한 것이다.
-바울이 방문 계획을 변경하고 대신 눈물의 편지를 써서 호소한 것은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의 발로였다. 억지로 그들을 바꾸지 않고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고 싶었으며, 격한 마음으로 방문했다 되려 그들에게 상처만 줄까 염려했다. 비록 과하다 싶을 만큼 혹독하게 편지(눈물의 편지라고 불리는 서신이나, 전통적으로 발견되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를 썼지만 그 안에는 그들을 향한 사랑과 눈물을 담았다고 한다. 자기의 서운한 감정만을 배설하지 않고 성도들을 중심으로 그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가장 지혜로운 행동과 말을 선택하는 바울의 모습이 큰 도전이 된다.
-바울이 보낸 눈물의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 돌이켰으나, 여전히 바울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을 나타내라고 당부한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받은 벌로 충분하며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지거나 아예 그들이 공동체에서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지혜롭지 못한 방식 때문에 악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에 보낸 눈물의 편지에 대한 반응을 알기까지 바울은 그의 사역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말씀을 가지고 이익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자들과 달리 순전함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씀을 증거했다. 스스로 사역자로 나선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로잡아 사역자로 살게 하셨음을 알고, 그는 자신의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만 전하며 살았다. 사도를 향한 의심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역자로서 어떤 향기가 나고 있을까? 그리스도의 향기가 폴폴 났으면 좋겠다.
-인생이 뜻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진리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본문의 바울이 자꾸 변경될 수밖에 없는 계획 앞에 얼마나 노심초사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럼에도 감당해야 할 사명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나도 걸어가야 할 길임을 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바울의 고백들이 참 아련하게 공감이 간다.
-나의 명분, 이해, 영향력보다 교회를 사랑하기에 혹, 받을 수 있는 오해, 미움, 판단…. 굳이 쫓아다니며 변명하지 않기를 결심해 본다.
-내가 개입하여 신속히 해결되는 깔끔함보다,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시간이 필요할 때에는 기꺼이 오해받아도 그 안에 든든히 서 있는 믿음을 감당하리라.
-용서라는 열매가 없다면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 먼저 용서하는 것이 힘들더라도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서 입술 깨물고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산다.
-말씀을 장사꾼처럼 가르치지 말아야지. 먹고 살기 위해 가르치는 거짓 교사가 되지 말아야 하리라.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함부로, 내 맘에 따라, 내가 원하는 말을 가르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오직 복음의 정수만!), 그리스도의 향기 되어(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치리라!) 순전하게(끝까지, 변함없이, 인내하며, 더 깊이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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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간에 오해가 발생했다. 거짓 선생들이 바울의 교회 방문 약속을 어긴 것을 들어 사역 태도의 불성실함을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일부 성도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교회 안에 형성된 분파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바울의 방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교회 분열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렇기에 눈물의 편지를 통해 교회의 심각한 문제들이 회개와 변화로 이어진 것은 큰 위로와 감사였지만, 바울 자신에 대한 오해가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분명한 해명과 해결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성도와 지도자 간의 갈등을 어떻게 풀까?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 바울이 풀어나간 모습을 바라보며 교회와 복음을 위한 갈등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1. 하나님의 은혜로 걸어온 길(12절)
바울이 가장 먼저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말은, 자신이 약속한 방문 시기와 일정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육체(세상)의 지혜” 즉 내 생각과 내 계획의 변경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고백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거룩함(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매 순간을 육체(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걸음걸음을 이어왔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의 자랑거리는 우리의 양심이 또한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처신할 때에, 특히 여러분을 상대로 처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순박함(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고, 세상의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새번역 12절)” 육체의 지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과 대비된다. 어쩌면 자기 편의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 수 있겠다. 바울은 자기 편리한 대로 사역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순박함(오직 하나님을 위해 마음과 행동을 집중하는 것)과 진실함(이 마음을 이용하지 않고 순박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모든 사역의 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한다.
사실이 그렇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오직 주님만을 위한 길을 걸었다. 자신의 육체를 위한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만약 그러했다면, 고후 11:23-27에서 고백하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했던 방문을 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이기적인 뜻이나 불성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고백한다. 자신의 육체가 편리한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순종함으로 방문이 미루어졌다는 의미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18-22절)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실함을 따라 행한 것에 대한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자신이 원래 계획했던 여정과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에 순종한 길을 분명하게 고백한다.
자신이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워 일단 고린도 교회를 가기로 했지만, 마음에 변덕이 생겨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변덕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또는,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기를, ‘아니오, 아니오’ 하려는 속셈이면서도, ‘예, 예’ 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겠습니까?(새번역 17절)”
이를 강변하며 결과적으로 방문하지 못하여 생긴 오해를 풀기 위해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변명을 하지만, 예수님 앞에 서는 날 이 모든 오해가 완전히 풀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지금 여러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써서 보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이미 부분적으로는 이해했습니다마는,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여러분이 우리의 자랑거리이듯이, 우리가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새번역 13-14절)”
이미 발생해 버린 오해를 어떻게 풀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실하심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임”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즉,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따라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갈등의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날 무수한 교회 안의 갈등은 이런 “믿음”의 도전을 사실상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육체의 생각”으로만 서로를 바라본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실하신 성품을 따라 서로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육신의 계획대로,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주장을 위해서만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성품은 없다. 아…. 하나님의 성품이 사라진 교회가 무슨 거룩과 진실함을 세상에 보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바울은 성도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따라 걸어온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들려준다. 그렇게 자신의 편리를 따라 세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인 걸음이었음을 알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셨다가 동시에 ‘아니오’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새번역 18-19절)”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뜻을 “예”만 하며 순종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 ‘아멘(예)’하며 영광을 돌리는 전도여행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걷고 있는 이 복음전도 여행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여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새번역 21절)” 믿음 안에 굳게 세우시고 사명 따라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교회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급박한들, 그 모든 환난을 모든 위로로 다루시는 분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계획은 자신이 세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방문이 늦어졌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 어떤 의미로는 지금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 교회 안의 문제는 바울이 와서 해결될 사안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들을 통해 고린도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도시 속에서 거룩하고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다루시는 시간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진실한(12절)” 성품과 “신실하신(18절)” 섭리에 더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교회 안 갈등은 바울이 와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루신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다루시기 위해 구원받은 각 성도의 “마음에 성령을 주신 것(22절)”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의 모든 갈등은 역시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시는 거룩하고 진실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해결하심을 믿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도우시는 ‘성령’을 주셨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의 선구자로 예수님의 순종을 보여 주셨다.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교회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예” 하며 순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교회다움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갈등은 스스로의 의지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서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나의 “육체의 계획”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려놓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예” 함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제는 늘 생긴다. 갈등도 늘 발생한다. 환난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인 더온누리공동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는 낯뜨거운 자기 홍보가 아니라 변호였다. 고린도 성도들을 대할 때 거룩하고 진실하게 사역하였음을 당당하게 밝힌다.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음을 양심을 걸고 증언했다.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했다고도 고백한다. 남들과 비교하지도 않고, 없는 것을 있다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양심껏 말할 수 있는 바울의 담대함이 참 대단하다.
– 바울은 자신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자신이 성도들에게, 성도들이 바울에게 자랑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어 관계에 얼룩이 남아 있는데, 모든 진실이 말끔히 드러나서 주 예수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각자에게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이 되는 관계가 되고 싶어 했다. 공동체 안에 서로 오해와 편견이 있어 불편한가? 주님 앞에서 볼 영혼들인데,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직면하여 품어야 할 것이다.
– 바울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울의 인격 결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그의 사역의 신실성을 의심받아야 할 것도 아니었다. 가든, 가지 않든, 계획대로 하든, 하지 않든, 바울에게 경솔함을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의 복음 사역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성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예수님이 수행하시고, 성령께서 보증하시는 사역에 참여하였다. 진실한 사역자는 그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 사역을 경험하게 하는 신실한 통로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삶 또한 신실해야 한다.
– 따라 하기 쉬워도 살아내기 어려운 말이 ‘아멘’이지 싶다. 진리에 대한 동의만이 아니라 진리를 살아내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이다. 바울을 힘들게 하는 것은 ‘환난(8절)’만이 아니었다.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의 변경에 대한 성도들의 오해와 비방이었다. 그 거센 비난과 의혹에 맞서 바울은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이 편지(고린도후서) 내용을 그대로 믿어달라고 부탁한다. 계획은 언제든지 수정되고 변경될 수는 있다. 문제는 신뢰 관계마저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진실한 삶’이었다. 진실한 삶의 이력보다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더 확실한 것이 있을까.
– 바울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이유는 자신의 실추된 명성이나 사도직 때문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의혹이 ‘복음에 대한 의심'(18절)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진심도 모른 채 진리를 떠나는 것을 걱정한 것이다. 바울의 담대함이 여기에 있다. 복음의 진리는 거짓 없는 진심을 따라 흐르고 퍼지고 스며든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가능한 담대함이었다.
– 하나님은 모든 약속의 말씀을 ‘아멘’이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게 하셨고, 성령의 보증으로 주셔서 우리도 하나님의 신실한 삶에 동참하게 하셨다. 두말없이 하나님께 늘 “예”만 되셨던 그리스도처럼,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나의 삶은 대가를 감수하는 ‘예’가 구현되고 있을까?
– 진실에 응답하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도 때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진실을 일관되게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은 더 큰 결단과 지속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을 삶으로 풀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에 마음 다해 아멘으로 화답하고, 아멘을 살아내고, 아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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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는 3차 전도여행 중 마게도냐에서 쓴 편지다. 시간을 따져 보면 이미 살핀 고린도전서와 집필 시기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말은 편지를 통해 교회의 아픔과 문제들을 회복시키고자 했지만 이것이 잘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래서 방문 계획도 세우고 실제 방문도 했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디도를 통해 ‘눈물의 편지’를 보냈으나 아쉽게도 이 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뜻밖에도 이 눈물의 편지라고 불리는 서신을 통해 교회에 제시한 여러 해결책과 요구사항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받아들였다. 이에 기쁨과 안도의 마음을 전하고(1-7장), 유대 지역의 극심한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 참여 독려와(8-9장), 교회 안에서 자신을 모함하는 무리들을 향해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해(10-13장) 고린도후서를 쓴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디도를 통해 전달받은 교회의 변화가 준 ‘위로’를 가감 없이 표현한다. 본문에만 무려 10회가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그대로 느껴진다. 교회의 아픔을 생각하며 고통받는 마음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개입으로 받은 그 위로를 넘치도록 표현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책임지신다. 그 책임지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위로함이 절로 솟는다.
1. 모든 환난 중에서 넘치는 위로(3-7절)
“위로”라는 단어 자체가 참 좋다… 힘이 난다. 더구나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다.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해 주신다. 그런데…하나님께 위로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은 사람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할 수 있다(3-4절).
삶 속에서 당하는 모든 환난은, 모든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위로의 은혜를 입은 성도를 통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해 준다. 아!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도를 통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위로가 흘러간다.
이 위로는 “넘치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고난이 넘치는 곳에는 고난을 능히 덮고도 남을 넘치는 위로가 “위로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넘치는 고난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위로가 이를 능히 덮고도 남기에! 넘치고도 남기에!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5절).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 자(구원받은 자)는 능히 이 위로도 넘치도록 받는다. 그러므로 소망의 길을 지킬 수 있다(7절).
이 위로는 “자비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다.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 위로의 사전적 의미다. 즉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위로다. 실제적으로 고난을 해결하는 구체적인 조치는 아니다. 환난을 당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특징은 “고난에 잘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환난, 고난”은 모두 슬프고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왜 이 환난을 받는지 잘 안다면 그 환난을 잘 대처할 수 있다. 즉 고난에 잘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주님이 대표적이다. 주님은 고난을 아시고 오셨다. 왜 자신이 그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분명히 아시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잘 참여”하셨다. 그 환난과 고난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고난을 잘 참여하셨다. 분명한 사명과 목적이 고난을 견디게 했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교회와 성도를 대적하는 것을 이미 잘 안다. 왜 성도가 세상에서 고통받는지 이미 알려 주셨다. 주님 때문이다. 그러니 주님처럼 이 고난을 잘 알고 고난에 참여하면 된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것을 잘 하도록 도와주시는 마음의 어루만짐이다. “내가 잘 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조금만 견뎌보자……”
모든 환난이 사라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난을 견디도록 마음에 격려를 불어넣으신다. 모든 환난을 해결하심으로 위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난을 감당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으신다. 모든 환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보게 하신다. 모든 환난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과 마음과 자세를 알게 하신다.
이것을 아는 것이 “산 소망”이다.
2. 위로가 소망이 되어(8-11절)
위로가 마음의 어루만짐이라면 소망은 환난을 견디도록 하는 힘이다. 소망은 주님이 고난 가운데서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가 능력이 됨을 아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것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았던 이유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고백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새번역 8-9절)”
그러면서 이어지는 10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앞으로도 건져 주시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새번역 10절)”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오직 하나님이 건져 주실 것을, 그 희망(소망)을 하나님께 두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모든 환난은 모든 위로를 경험하게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위로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희망을 견고하게 세우게 한다는 것이다.
즉, 위로 속에서만 사는 성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성도이기를 바라고 있다.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모든 환난 중에 모든 위로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알아 견디어 이기는 삶을 누리라고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누릴까?
바로 기도다.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주십시오. 많은 사람의 기도로 우리가 받게 된 은총을 두고, 많은 사람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새번역 11절)” 기도로 함께할 수 있다. 기도가 이 은총(은사)를 누리게 한다. 기도가 고난 중에 감사를 고백하게 한다. 기도가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기는 분명 “모든 환난” 중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도 이 환난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더 나아가 자신이 다시 올 때가 가까울수록 환난은 중해질 것이고, 더욱 노골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환난,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환난 중에 살아야 한다.
– 그래서 바울의 고백이 힘이 된다. 자신도 환난 중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겠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의 은혜로 능히 견디고 있으며, 성도들의 중보 기도로 이를 더욱 선명하게 누리고 있다고 고백하며 감사와 찬양을 올리고 있다.
– 이런 영적 메커니즘을 귀로만 듣는 삶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며 누리는 삶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 오늘은 특히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 참 감사하다. 지치고 지칠 복합위기의 시대를 살면서 이 은혜만큼 절실한 것이 또 무엇이랴. 잠시 숨을 고르며 쉬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줄 몰랐던 우리의 삶을 강제로 멈추게 하신 것을 못 견디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멈춰주심을 기꺼이 누릴 수 있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위로의 은혜”가 우리에게 분명히 임할 줄 믿는다.
– 무엇보다 그 위로의 은혜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들리는 설교를 통해서도 흐르겠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고백한다. “서로를 위한 기도”를 통해, 그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은혜를 누림을 당당하게 밝힌다. 우리 공동체도 이와 같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도를 통해 확인되는 하나님의 위로가 풍성한 교회… 그 공동체가 코로나 시대를 충분히 이기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될 줄 믿는다.
– 그러므로 공동체가 기도하기를, 말씀 앞에 시간 내기를 더욱 사모해야 한다. 비록 함께 모이지 못하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이 “모든 환난” 중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든 위로”를 기도할 때, 말씀으로 구할 때 반드시 넘치도록 베푸실 것을 믿는다.
– 그리스도인은 이 은혜로 산다! 사역의 현장에서 몸과 마음을 채근하며 맞은 오늘 말씀이 “위로”가 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모든 위로”, “소망”이 없다면 나의 걸음에 어찌 힘이 공급될 수 있겠는가!
*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를 더욱 갈고 닦아 위로와 소망이 감정과 환상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힘으로 실제가 되는 은혜,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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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혹은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며(드러내시며, 계시하시며), 이를 통해 인생을 어떻게 도우실까?
1. 창조 세계를 통해 드러내신다(1~6절)
하늘과 궁창이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 알려 준다(1절). 낮은 낮에게, 밤은 밤에게(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말씀하신 대로, 창 1장) 지식을 전한다(2절). 들을 수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지만(3절) 하나님의 소리가(말씀이) 온 땅에 통하고 세상 끝까지 이른다(4절). 그것은 마치 “해”와 같다. 해는 늘 찬란하다(5a절). 하나님의 소리, 곧 말씀대로 기쁘게 달린다(순종한다, 5b절). 늘 일관되게, 정하신 대로 끝까지 움직인다(6a절). 그리고 해의 열기를(뜨거움을) 피할 자가 없다(6b절). 그 강렬함이 모든 것을 꿰뚫는다.
마치 다윗이 창세기 1장을 리메이크하여 노래하는 듯하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자신을 이렇게 녹여 놓으셨다. 인간은 그 소리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피조물은 하나님의 음성(소리)대로 움직인다. 그 세계에서 인간이 산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풍경을 보며 그저 감탄만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모든 피조물에 깃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본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어느 누구도 피할 자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솜씨를 본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새번역_3~4절)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음성을 선명히 듣고 그에 순종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씀하신 대로” 움직인다.
2. 인간에게 “율법”으로 드러내신다(7~11절)
하나님은 율법(가르침), 증거(증언), 교훈, 계명(명령), 경외하는 도, 법(심판)을 주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말씀하신다). 이렇게 드러난 하나님의 가르침(율법)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아(소성시켜) 준다. 그의 증거(증언)는 확실하여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7절). 그의 교훈은 정직하여(올발라서) 마음에 기쁨을 주고, 그의 계명은 순결하여(순수하여)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8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티 없이 맑아서 영원토록 견고하고, 그의 법은 참되어서(진실하여) 한결같이 바르다(의롭다, 9절).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신 율법(하나님의 가르침)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또 귀하다. 금, 곧 순금보다 귀하고, 꿀, 곧 송이꿀보다 달다(10절). 실제적인 기쁨을 준다. 그러니 이 율법을 지키면 “상”이 크다(11절). 무엇보다 먼저 가치 중심의 삶을 깨닫고 그 안에서 만족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율법으로 인해 죄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깨달을 자는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보이신 ‘가르침’ 앞에서는 죄를 감출 수 없다. 율법은 우리를 죄에서 떠나게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새번역_11절) 하나님의 풍성한 상급을 받는다. 율법으로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면 반드시 이렇게 된다.
3. ‘마음의 묵상’에 드러내신다(12~14절)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새번역_14절) 우리는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생각, 노래)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는다. 말씀하시는(드러내시는) 하나님을 깨닫는다.
여기서 ‘묵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힉가욘(헤기온)’은 중얼거림, 고백함, 곧 “읊조림”을 뜻한다. 시편 1편 2절에서 “묵상하는도다”로 번역된 동사 ‘하가’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이 ‘마음의 묵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늘 말씀을 읊조리게 하시는 것이다.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마다 거하시는 “성령의 은혜와 역사”로 고백한다.
하나님은 늘 드러내 보이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읊조리도록 간섭하신다. 즉, 보이신 말씀대로 삶의 초점을 맞추도록 늘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곱씹는 중얼거림으로 우리를 선하게 이끄신다.
이렇게 마음에 드러나심으로 나타나는 확실한 결과가 있다. 자기 허물을 깨닫게 하고, 숨겨진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신다(12절). 또 죄를 짓지 않도록, 죄가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지켜 주신다(13절). 죄를 구별하여 깨닫고 보게 하는 말씀에 집중하게 하신다.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하고 구별하게 한다. 그리하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잘못을 낱낱이 알겠습니까? 미처 깨닫지 못한 죄까지도 깨끗하게 씻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새번역_12~14절)
나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는 이 시편을 ‘시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이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서정시 가운데 하나’라고 극찬하였다(『시편 사색』). 하나님 안에서 자연과 율법과 인간의 관계와 영향력을 아름답게 노래한 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에게는 “기록된 말씀(율법)”으로 드러내시며, 인간의 마음을 간섭하셔서 “묵상”으로 더 깊이 드러내신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다 푸릇푸릇 돋아난 새순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느끼는 “감동”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느끼고 싶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언어로 기록되지도 않았지만, “때가 차니” 풍성해진다. 하나님의 섭리는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바로 옆 공원의 가로수들에게서 보인다.
-오늘 펼친 말씀에서 하나님이 드러나신다. 기록된 말씀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며, 마음으로 그린다. 하나님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미 이렇게 허락해 놓으셨다. 읽을수록, 바라볼수록, 그릴수록 더 선명해진다. 확연하다. 하나님은 이미 드러내 보이셨다. 내가 읽지 않고, 보지 않으며, 그리지 않았을 뿐이다.
-하나님은 마음에 드러내신다. 특히 묵상을 통해 풍성하게 깨우치신다. 기록된 말씀이 입술의 말과 마음의 중얼거림으로 늘 머물러 있으면, 하면 할수록 풍성해지고 깨우쳐진다. 중얼거릴수록, 말할수록 단단하게 여며진다.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내 마음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신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내신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이다. 세상 만물에, 기록된 말씀에, 내 마음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내 마음도 함께 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 따라 나의 마음도 가는” 삶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누리는 삶이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오늘도 드러내신다. 알려 주신다.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 마음을 따라가도록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그렇게 되도록 말이다. 말을 이끄는 마음의 생각과 의도가 드러내 보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허물’과 ‘죄’에 편승하지 않고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걸음을 걷게 된다.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살도록 세밀하게 드러내신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말씀으로 내 말과 마음의 묵상을 채워 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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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사랑하는 하나님,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 부르짖을 때 들어주신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고 의지하였다고 노래했다(1~29절). 이제 표제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어떻게” 건지셨는지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원수들과 싸워 이기게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이기게 하셨나?
1. “가르쳐” 이기게 하셨다(30~34절)
다윗은 자신의 승리가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의 증거라고 노래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에 직면할 “용기”를 주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며…”(새번역_32절) 또한 원수들과의 싸움이 거듭될수록 다윗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셨다고 노래한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 만드시고”(새번역_33절) 여기에 싸우는 법(병법)까지 숙달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시니”(새번역_34절)
하나님은 전장에 선 다윗을 먼저 “전사”로서 당당히 맞설 수 있게 “가르치”셨다. 용기, 무술, 검법, 체력, 병법… 전사로서 전장에서 능히 당당하게 맞서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실전에서 이를 더욱 가다듬으셨다. 실제로 실전을 거듭하며 이런 것들이 향상되었겠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이 모든 행동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했다는 것일 게다.
다윗이 평소에 활을 쏘며 연습할 때에도, 실제로 적과 뒤엉켜 싸우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그분의 선하신 권능을 의지하고 또 의지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하나님의 깨우쳐 주심(응답)을 통해 터득한 “가르침”들이었다. 그래서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39절)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2. “보살펴 주셔서” 이기게 하셨다(35~42절)
다윗이 소년에서 용사로, 용사에서 전사로, 전사에서 왕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방패”가 되어 주셨다(30절). 구원의 반석이 되어 주셨고(31절), 안전하게 지켜 주셨고(32절), 높은 곳에 안전하게 세워 주셨다(33절). 다윗은 이를 거듭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지키는 방패를 나의 손에 들려 주셨고, 주님께서는 오른손으로 나를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보살펴 주시니, 나는 큰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새번역_35절)
무기와 방패뿐 아니라 능하신 오른손으로 강하게 붙들어 주셨다고 노래한다. 나는 시위를 진압하는 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시위대에 맞서 방패 줄을 세우고 대열을 정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방패 진압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방패선 뒤 2선에서 뒷받쳐 주는 것이다. 방패를 든 대원의 혁대를 뒤에서 견고하게 붙잡고 밀착하여 대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지선은 힘없이 뚫려 버리고 만다. 겉으로 보기에는 혼자 방패를 들고 막아선 것 같지만, 반드시 뒤에서 고참들이 허리띠를 붙잡고 한 몸처럼 움직여 주었다. 그러면 쓰러질 일이 없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이 실감 난다.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위용 있게 나서는 것보다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기가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꿋꿋이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강한 오른손이 승리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결국 전투에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날랜 순발력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싸우는 지구력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윗은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힘차게 걷도록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발을 잘못 디디는 일이 없게 하셨습니다.”(새번역_36절) 이렇게 “보살펴” 주신 은혜와 힘이 다윗을 전장에서 어떻게 싸우게 했는가?(37~42절) 하나님은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신 것을 힘입어 다윗이 원수를 “뒤쫓아 가서”(37절), “용기로”(“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고”, 새번역_39절) 맞서, 원수를 “완전히”(새번역_40절) 멸하고 “바람 앞에 티끌같이”, “거리의 진흙같이”(42절) 부서뜨리고 쏟아 버려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3. “전장뿐 아니라 일상에서” 이기게 하신다(43~50절)
하나님의 능력은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상의 통치가 온전히 회복되게 하신다. 반역의 무리가 정리되었고, 이방인들도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두려워하며 복종한다(43~45절).
다윗은 그의 승리가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통치로 이어지는 것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한다. 더 나아가 그 승리가 다윗의 후손에게 이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46~50절). 승리가 필요한 곳은 “전장”만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순한 문제 해결이 아니다. 그렇기에 형식과 모양이 다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는 늘 필요하다.
다윗의 노래는 나에게 늘 필요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승리”를 확신하게 한다. 예상치 못한 환난과 고통의 전장에서의 승리뿐 아니라,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영광(영향력)이 변화(복종)를 가져오는 그 승리가 “늘 고프다.”
처절한 전장에서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다윗을 바라보며 소망이 생긴다. 나 역시 이렇게 이기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한다.
다윗은 “이 하나님이”(47절) 이와 같은 구체적인 승리를 주셨다고 고백한다.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시며 어느 곳에서든” 이기게 하셨고, 또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아… 얼마나 구체적인 고백이며 노래인가! “이 하나님”은 두루뭉술하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니다. 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천둥과 번개로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시다. “세미한 소리”(왕상 19:12)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나타나셔서 실질적으로 이끄시고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32절)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47절) 이 하나님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기게 하신다.
나는?
-다윗은 승리의 찬가를 이렇게 이어 부른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흠도 없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티도 없다. 주님께로 피하여 오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주님 밖에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밖에 그 어느 누가 구원의 반석인가?”(새번역_30~31절)
-다윗은 “이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전장에서, 그리고 일상을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승리”하게 하셨고 또 하실 것인지 구체적으로 노래했다.
-나이가 들수록 “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구절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인데… 소절은 늘지 않고 후렴만 늘어서는 안 될 텐데… 아… 그렇게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노래하고 싶다. 다윗이 구체적으로 노래한 “이 하나님”은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일상의 하나님이셨다. 그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다.
-나의 하나님도 지난 삶 곳곳의 전장에서 친히 가르쳐 주시며 싸우게 하셨다. 그저 힘만 잔뜩 주고 휘둘렀던 어설픈 전사를 보호하시고 보살펴 주심으로 우쭐한 승리감을 맛보게도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우쭐한 승리가 왜 그리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그때 그렇게 우쭐했던 것들이 왜 이리 낯 뜨거운지 모르겠다. 나의 승리가 아니었음에도 나의 승리처럼 자랑하던 그 어리숙함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성숙하신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다. 세상에나…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그러면 그렇게 하시겠구나!!!
*”가르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 가르침을 더욱 사모하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순종해야겠다.
*”보살펴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야지… 내 힘의 100%를 다 발휘해도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강하게 붙잡아 주지 않으신다면… 원수들과 이방인들의 마음을 돌리지 않으신다면… 에휴… 그러니 자랑할 것도 요구할 것도 없는 것 같다… 보살핌을 그저 누리며 감사하리라.
*”전장에서뿐 아니라 일상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사실 전장에서의 승리는 일상에서의 승리를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 일상이 더 중요한 게지… 예배의 승리가 결론이 아니라, 예배의 승리가 일상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거다… 그러니 예배가 승리하지 못하면 일상도 승리하지 못할 것 아닌가! 일상이 곧 예배라는 말이 더욱 깊게 다가온다.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이 일상에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돌보심이 나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분명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오늘도 구체적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새번역_롬 8:28) 이 말씀이 떠오른다. 그 협력이 구체적인 순종임을 또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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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1월 1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10월 25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2026년 10월 18일 주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합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백성답게 빚어주는 거룩한 습관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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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저녁, 찬양으로 함께 예배해요 2026 찬양예배 마하나임 & 트리니티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마하나임 남성중창단과 트리니티 여성중창단이 함께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나의 피난처 예수’부터 ‘말씀 앞에서’, 그리고 주제 찬양 ‘주 예수 나의 산 소망’까지. 주님을 향한 고백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 오늘, 11월 4일(수) 🕢 저녁 7시 30분 · 수요예배 📍 전주 더온누리교회 🎼 마하나임 남성중창단 · 트리니티 여성중창단 하루의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고, 감사와 기쁨으로 함께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소중한 분들과 함께 오세요. 🙌 #더온누리교회 #찬양예배 #마하나임 #트리니티 #주예수나의산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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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더함공동체 4부 주일예배 🌼 설교 : 이득근목사님 본문 : 고린도후서 1장 1-11절 제목 : 환난 중에 만나는 위로의 하나님 기도 : 김예지 디렉터 🎉 블레싱 생일 : 1일 노진선 3일 김민성 6일 박채린 7일 이연희 등반 : 윤섭네-최보미,최지나 승원네-임형진,김선아 세례 : 학습- 이신옥, 강예지 임명 : 유아부-정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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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윌센터 도즈문화교실 미싱반 . #더온누리교회 #도즈 #굿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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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윌센터 도즈문화교실 커피빈. . #더온누리교회 #굿윌센터 #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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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 더함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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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 더함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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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 더함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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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 더함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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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e The Haam 💕✨ 2026.10.25 가을 야외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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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더함공동체 예배 🩵 설교 : 김종홍목사님 기도 : 곽효승 부장 집사님 🎉 블레싱 생일 : 27일 이득근 목사님 / 30일 최기훈,최재훈 / 31일 황정택 📢 광고 [더함 성탄 데코TF모집안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함께 성탄의 공간을 꾸밀 공동체원을 모집합니다. 꾸미기와 장식 좋아하시는분,아이디어를 나누며 함께 하고싶은분,작은 손길로 기쁨을 더하고 싶은분,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함께 성탄의 기쁨을 만들어가보실까요? 문의 및 신청: 디렉터 [더함 매일성경 11-12월호 책 배부안내] 매일성경 1년 구독 신청자분들의 11-12월호 책이 도착했습니다. 구독 신청하신 분들은 예배 시작 전, 뒤편에서 서명 후 수령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기선교 신청] 2027년 2월에 캄보디아 깜퐁스프와 깜퐁츠낭(스쿤 포함)을 차례로 방문해 의료·미용·어린이 사역으로 섬깁니다. 현지 교회가 세워지고 공동체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선교를 목표로 합니다. 신청기간은 11월 30일 까지입니다. 큐알코드를 이용해서 신청해주세요. 일정 – 전일정 참가: 2/3(수)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1진(깜퐁스프): 2/3(수)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 2진: 2/6(토) 출발~2/10(수) 귀국, 목요일 도착 – 안과팀: 2/4(목) 출발~2/8(월) 귀국, 화요일 도착 문의 – 이홍기 목사 [세례 신청] 11월 1일 주일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아래의 문답 교육 시간에 꼭 참석 바랍니다. 신청은 3층 로비에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신청해주세요. [청장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2(목) 저녁 7시 30분 2회차 – 10/29(목) 저녁 7시 30분 [청소년 : 세례 / 입교 / 학습] 1회차 – 10/24(토) 오후 3시 2회차 – 10/31(토) 오후 3시 [유아 세례] 교육 – 10/31(토) 오후 3시 * 문답식은 10월 31일(토) 오후 5시부터 세례식 참석자를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선교사 선물보내기] 연말 성탄절에 맞춰서 우리공동체가 동역하는 25개국 54명의 선교사와 현지 교역자들에게 선물을 보내려고 합니다. 함께 동참해주시겠어요? 보내드리고 싶은 용품(유통기한이충분한)이나 물질을 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계좌:신협/더온누리13400469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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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10월 25일 더원공동체 예배사진입니다! 야고보가 그린 교회 [야고보서 5:13-20] #더원공동체 #더온누리교회 #더온누리교회청년부 #전주청년부 #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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