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사사 에훗과 삼갈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사기 3:12-31]
이스라엘이 또다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압 왕 에글론의 손에 그들을 넘기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왼손잡이 사사 에훗을 세우시고, 그가 단독으로 왕궁에 있는 에글론 왕을 암살한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아 모압과 전쟁을 하여 크게 승리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측량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또(다시)”(12절)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40년간의 평안이 지나고 또다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사용하셔서 18년 동안 이스라엘이 그를 섬기게 하셨다. 그 깊은 탄식의 시대를 끝낸 사사는 왼손잡이(오른손에 제약이 있는) 에훗이었다. 그는 모압 왕 에글론에게 조공을 바치는 척 접근하여 그를 해치웠다. 그러고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거병하여 요단강 나루를 점령하고, 여리고에서 도망치는 모압 군사 만 명을 죽인다. 모압 땅으로 건너간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후 80년 동안 이스라엘이 평안하였다. 사사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만으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쳐 죽이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1. 사사기 사이클 _ 에훗(12~30절)
12~14절은 에훗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이제 습관이 되었다. 서사에 등장하는 모압 왕 에글론의 이름은 그 뜻이 ‘송아지’다. 12절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모압 왕 에글론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 에글론을 강성하게 만드신다. 이런 서사에 담긴 분명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성을 의미하는데, 요단 동편과 서편 가나안 지역을 잇는 관문으로 예루살렘, 벧엘 등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와 매우 가깝게 연결된다. 이곳을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 동맹군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가나안 전체를 다시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임을 전제한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여리고성을 먼저 점령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강성해진 모압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조공을 바친다. 하나님께 악을 행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에글론을 섬기며 고난받게 하신 것이다. 이는 징벌의 의미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나 왕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15~23절은 에훗이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러 가서 그를 죽이는 이야기다. 모압 왕 에글론의 억압과 착취로 고통을 당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결국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에훗을 사사로 세우신다. 그는 ‘왼손잡이’였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것은 오른손보다 왼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왼손잡이를 뜻한다. 이렇게 묘사한 것은, 그가 공물을 바치는 사절단의 대표라는 점과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사로서 사명을 감당하였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는 왼손잡이만이 가능한 은폐(오른쪽 허벅지에 1규빗(약 45cm) 정도의 양날 검을 숨김)로 에글론을 제거한다. 즉, 에훗이 왼손잡이임을 밝힌 것은 장애나 부족함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에훗은 공물을 바친 후에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가게 한 뒤, 돌 뜨는 곳 곧 우상이 있는 곳에서 다시 돌아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겠다고 한다. 에훗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있는 에글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고, 에글론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일어났다. 이때 준비해 간 칼을 왼손으로 빼어, 망설임 없이 단번에 힘 있게 에글론의 몸을 찔러 죽인다. 이렇게 적의 심장부인 왕궁에서 적의 왕을 죽인 에훗은 유유히 방을 빠져나와 문을 걸어 잠근다. 22절에서 칼이 잠겼다고 번역된 ‘기름’은 ‘대변이나 대장의 찌꺼기’를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24절에서 신하들이 ‘왕이 발을 가린다’, 즉 볼일을 보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신하들이 기다리는 사이 에훗은 스이라로 도망친다. 결국 죽은 왕을 발견하는 것이 신하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왕의 수많은 신하들은 왕궁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지 못하였고, 그를 죽인 에훗은 이미 멀리 도망간 상태였다.
24~29절은 모압과의 전쟁 서사다.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자손을 모았고,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따라 에훗에게로 모였다. 에훗은 모인 자들에게 모압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앞장선다. 여호와께서 모압을 자신들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승리 선언을 통해, 이 전쟁이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임을 선포한다. 에훗과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나루를 점령하고, 요단 동편으로 건너가려는 용사들을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고 죽인다. 이는 여호와 전쟁의 특징 중 하나인 진멸 모티브를 드러낸다. 이렇게 에훗은 충실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여 이스라엘을 모압 왕 에글론의 손에서 구원하였다. 에훗은 사사요 구원자로서 단독으로 적의 왕을 죽이고 성공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한 영웅이었다.
30절은 에훗이 이끄는 이스라엘이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의 에필로그다. 모압이 이스라엘 땅에 복속되었고 80년간 평안하였다고 한 것을 볼 때, 두 세대 동안 이 위대한 여호와의 전쟁 이야기가 전해지며 여호와를 따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평안의 보고는 그들이 적어도 이 기간만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다. 사사기의 다른 사사보다 평안의 기간이 긴 것은, 에훗의 사건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만큼 에훗의 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크고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2. 삼갈(31절)
삼갈과 같이 사사로서 기록의 분량이 매우 적은 이들을 ‘소사사’로, 사사로서의 서사가 풍성하게 기록된 이들을 ‘대사사’로 구분하여 이해하면 된다. 소사사들은 대사사들 사이에 간단하게 소개된다. 하지만 이전 사사들의 특징은 그대로 이어받는다. 삼갈은 이스라엘의 영웅적 구원자인 에훗의 특징을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 소개된다.
‘아낫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갈릴리에 있는 벧아낫 지역 사람으로 해석하였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아낫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로 주로 해석한다. 삼갈은 이방인으로서 소 모는 막대기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 소개되는데, 소 모는 막대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의 직업이 목동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에 사용되는 사람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다고 하실 때 헌신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3. 뼈아픈 배신…… 그럼에도
옷니엘이 죽은 이후 40년간 누린 평안이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끝나 버렸다. 이제 다시 고통의 시대가 도래했다. 모압 왕 에글론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점령한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빼앗고 억압했다. 그리고 이전 압제 기간보다 더 긴 18년 동안 압제한다. 이스라엘의 이런 배신을 저자는 “또(야사프)”라는 단어로 요약한다. 야사프는 ‘반복하다, 추가하다, 다시 하다’라는 의미다. 에훗이 등장하게 된 배경, 곧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의 모습이 “반복되고” 있음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같은 배신을 반복하는 이스라엘은 점점 형식적인 회개의 덫에 빠져드는 듯하다. 40년 전 바알과 아세라에 빠져 구산 리사다임에게 고통을 받았던 것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12절).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사용하셔서 종려나무 성읍을 차지하고 이스라엘을 억압하게 하셨다. 그 후 하나님께서 에훗을 들어 이들을 구원하시고 80년 동안 평안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사 삼갈의 짤막한 기록은, “역시” “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고,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삼갈을 세워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압축된 것이다.
*결국 “형식적인 회개”가 반복된 “또”의 덫에 걸리게 만들었다. 완전한 변화의 회개가 아니라 그저 형식만 갖춘 회개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형식적인 회개가 가져오는 신앙의 매너리즘은 심각하다. 주일마다 형식적인 회개의 기도는 드리지만, 삶의 변화가 없다. 진실한 회개는 확연한 변화를 가져온다. 형식적 회개는 문제를 가릴 뿐이다.
4. 어? 이런 사람으로도?!
에훗과 삼갈은 옷니엘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옷니엘은 갈렙과 함께 아낙 자손을 물리친 역전의 용사다! 갈렙의 사위이기도 하다. 소위 모범생이다. 옷니엘의 활약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에훗과 삼갈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한다.
일단 에훗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안에서 정치적 대립 관계가 된다.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과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 왕의 대립이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베냐민 지파는 다윗에게 비협조적이었다. 또 ‘왼손잡이’는 원문을 직역하면 ‘오른손에 제약이 있는(오른손이 묶인)’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베냐민 사람'(15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문자적으로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는 점이다. 히브리어에 ‘왼손’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음에도 그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에 제약이 있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에훗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삿 20:15~16절에 등장하는 ‘왼손잡이’를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왼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에훗이 군사적인 능력이 특출한 특수부대원(?)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에도 그는 이 특출한 재능을 공물을 갖다 바치는 사소한 일에 활용했다. 훈련받은 대로 살지 못한 사람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는 했지만….
또 삼갈은 아낫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아낫’이 가나안 땅에서 섬기던 전쟁의 여신을 가리킨다면, 그는 이방 신을 섬기던 자다. 그렇다면 그는 심판의 대상이지 하나님의 심판자가 될 수 없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표현이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31절)에서 “그도”이다. 즉,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이는 “소 모는 막대기”로 행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전쟁의 여신 아낫”을 섬기는 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에훗이나 삼갈이나, 전혀 의외의 인물이 이스라엘을 모압과 블레셋에게서 구원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 안에 있는 선입견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을 자주 경험했다. 나 역시 ‘어떻게 그런 사람이……’라는 상황에 수없이 직면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역시 그럴 수 있다. 훈련받은 대로 살지 못하는 에훗을 들어 모압 왕 에글론을 해결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전쟁의 여신 아낫을 섬긴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삼갈이, 그것도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사용하신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하나님의 창의성이 놀랍다.
*”어? 이런 사람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은 막힘이 없다. 하나님은 역시 대단하시다.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을 왜 그리 배반하기만 할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언약이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다.
나는?
-사사 옷니엘 시대가 준 40년의 평화는 이스라엘의 악행으로 깨진다. 하나님은 모압의 에글론을 강성케 하셔서, 그가 암몬과 아말렉 연합군을 결성하여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점령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로부터 18년의 종살이가 시작된다(12~14절). 이스라엘이 자기 욕망의 편에 설 때, 하나님은 모압의 편을 들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다. 세상만큼 강해지려 하기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늘 돌아보아야 한다.
-18년의 고난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세우신 지도자는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지파의 왼손잡이 에훗이었다(15~20절). 그는 구원자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에글론도 조공을 바치러 온 그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심판하신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추구해야 할 것은 세상보다 더 강한 힘이 아니라, 약자를 통해서도 역사를 열어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아닐까?
-이스라엘을 18년이나 다스린 모압 왕 에글론은 굉장히 비둔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자들도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21~25절). 이처럼 그들이 크고 강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압제당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 백성의 삶을 버리면서 비둔해지고 아둔해졌기 때문에, 무력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영적으로 비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에훗이 사사가 되어 모압을 이기고 18년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왼손잡이 사사가 이끌었지만, 하나님이 도우시고 그가 믿음으로 앞장섰을 때, 힘센 장사요 용사인 모압 군사 만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80년의 평화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나로 인해 내 주변이 샬롬을 누리고 있는가?
-“또”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기란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 깊은 사랑의 언약을 따라 오늘도 나를 구원하여 주신다. 그 사랑 안에 내가 거하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의외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사람이기도 하고 몸에 장애가 있을 수도 있는 에훗, 그를 통한 구원 이야기는 통쾌하기 그지없다. 일제 36년을 책으로만 배웠지만, 해방의 기쁨의 현장에 마치 나도 있는 듯 흥분하고 열광할 수밖에 없는 영락없는 한국인인 나도 십분 공감되는 통쾌함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을 ‘에훗’을 통해 이루셨다. 삼갈은 어떤가? 사사기 저자조차도 “그도”라는 표현으로 기록할 만큼 의외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의외성의 도구로 이루어 낸 구원이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이리 된다. 아무리 스스로 엉망이라고 생각하고 제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루저처럼 여겨지는 이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18년의 고통을 끝내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된다. 아무리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마음에 끌리는 대로 다른 우상을 함께 섬기는 듯한 흐물흐물한 신앙을 가졌더라도, 그가 손에 쥔 것이 겨우 ‘소 모는 막대기’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블레셋을 물리치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어떤 것으로도, 무엇으로도 역사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측량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또(다시)”(12절)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40년간의 평안이 지나고 또다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사용하셔서 18년 동안 이스라엘이 그를 섬기게 하셨다. 그 깊은 탄식의 시대를 끝낸 사사는 왼손잡이(오른손에 제약이 있는) 에훗이었다. 그는 모압 왕 에글론에게 조공을 바치는 척 접근하여 그를 해치웠다. 그러고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거병하여 요단강 나루를 점령하고, 여리고에서 도망치는 모압 군사 만 명을 죽인다. 모압 땅으로 건너간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후 80년 동안 이스라엘이 평안하였다. 사사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만으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쳐 죽이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1. 사사기 사이클 _ 에훗(12~30절)
12~14절은 에훗 서사의 프롤로그다.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이제 습관이 되었다. 서사에 등장하는 모압 왕 에글론의 이름은 그 뜻이 ‘송아지’다. 12절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모압 왕 에글론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 에글론을 강성하게 만드신다. 이런 서사에 담긴 분명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성을 의미하는데, 요단 동편과 서편 가나안 지역을 잇는 관문으로 예루살렘, 벧엘 등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와 매우 가깝게 연결된다. 이곳을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 동맹군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가나안 전체를 다시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임을 전제한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여리고성을 먼저 점령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강성해진 모압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조공을 바친다. 하나님께 악을 행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에글론을 섬기며 고난받게 하신 것이다. 이는 징벌의 의미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나 왕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15~23절은 에훗이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러 가서 그를 죽이는 이야기다. 모압 왕 에글론의 억압과 착취로 고통을 당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결국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에훗을 사사로 세우신다. 그는 ‘왼손잡이’였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것은 오른손보다 왼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왼손잡이를 뜻한다. 이렇게 묘사한 것은, 그가 공물을 바치는 사절단의 대표라는 점과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사로서 사명을 감당하였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는 왼손잡이만이 가능한 은폐(오른쪽 허벅지에 1규빗(약 45cm) 정도의 양날 검을 숨김)로 에글론을 제거한다. 즉, 에훗이 왼손잡이임을 밝힌 것은 장애나 부족함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에훗은 공물을 바친 후에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가게 한 뒤, 돌 뜨는 곳 곧 우상이 있는 곳에서 다시 돌아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겠다고 한다. 에훗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있는 에글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고, 에글론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일어났다. 이때 준비해 간 칼을 왼손으로 빼어, 망설임 없이 단번에 힘 있게 에글론의 몸을 찔러 죽인다. 이렇게 적의 심장부인 왕궁에서 적의 왕을 죽인 에훗은 유유히 방을 빠져나와 문을 걸어 잠근다. 22절에서 칼이 잠겼다고 번역된 ‘기름’은 ‘대변이나 대장의 찌꺼기’를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24절에서 신하들이 ‘왕이 발을 가린다’, 즉 볼일을 보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신하들이 기다리는 사이 에훗은 스이라로 도망친다. 결국 죽은 왕을 발견하는 것이 신하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왕의 수많은 신하들은 왕궁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지 못하였고, 그를 죽인 에훗은 이미 멀리 도망간 상태였다.
24~29절은 모압과의 전쟁 서사다.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자손을 모았고,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따라 에훗에게로 모였다. 에훗은 모인 자들에게 모압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앞장선다. 여호와께서 모압을 자신들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승리 선언을 통해, 이 전쟁이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임을 선포한다. 에훗과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나루를 점령하고, 요단 동편으로 건너가려는 용사들을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고 죽인다. 이는 여호와 전쟁의 특징 중 하나인 진멸 모티브를 드러낸다. 이렇게 에훗은 충실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여 이스라엘을 모압 왕 에글론의 손에서 구원하였다. 에훗은 사사요 구원자로서 단독으로 적의 왕을 죽이고 성공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한 영웅이었다.
30절은 에훗이 이끄는 이스라엘이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의 에필로그다. 모압이 이스라엘 땅에 복속되었고 80년간 평안하였다고 한 것을 볼 때, 두 세대 동안 이 위대한 여호와의 전쟁 이야기가 전해지며 여호와를 따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평안의 보고는 그들이 적어도 이 기간만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다. 사사기의 다른 사사보다 평안의 기간이 긴 것은, 에훗의 사건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만큼 에훗의 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크고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2. 삼갈(31절)
삼갈과 같이 사사로서 기록의 분량이 매우 적은 이들을 ‘소사사’로, 사사로서의 서사가 풍성하게 기록된 이들을 ‘대사사’로 구분하여 이해하면 된다. 소사사들은 대사사들 사이에 간단하게 소개된다. 하지만 이전 사사들의 특징은 그대로 이어받는다. 삼갈은 이스라엘의 영웅적 구원자인 에훗의 특징을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 소개된다.
‘아낫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갈릴리에 있는 벧아낫 지역 사람으로 해석하였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아낫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로 주로 해석한다. 삼갈은 이방인으로서 소 모는 막대기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 소개되는데, 소 모는 막대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의 직업이 목동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에 사용되는 사람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다고 하실 때 헌신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3. 뼈아픈 배신…… 그럼에도
옷니엘이 죽은 이후 40년간 누린 평안이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끝나 버렸다. 이제 다시 고통의 시대가 도래했다. 모압 왕 에글론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점령한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빼앗고 억압했다. 그리고 이전 압제 기간보다 더 긴 18년 동안 압제한다. 이스라엘의 이런 배신을 저자는 “또(야사프)”라는 단어로 요약한다. 야사프는 ‘반복하다, 추가하다, 다시 하다’라는 의미다. 에훗이 등장하게 된 배경, 곧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의 모습이 “반복되고” 있음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같은 배신을 반복하는 이스라엘은 점점 형식적인 회개의 덫에 빠져드는 듯하다. 40년 전 바알과 아세라에 빠져 구산 리사다임에게 고통을 받았던 것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12절).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사용하셔서 종려나무 성읍을 차지하고 이스라엘을 억압하게 하셨다. 그 후 하나님께서 에훗을 들어 이들을 구원하시고 80년 동안 평안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사 삼갈의 짤막한 기록은, “역시” “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고,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삼갈을 세워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압축된 것이다.
*결국 “형식적인 회개”가 반복된 “또”의 덫에 걸리게 만들었다. 완전한 변화의 회개가 아니라 그저 형식만 갖춘 회개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형식적인 회개가 가져오는 신앙의 매너리즘은 심각하다. 주일마다 형식적인 회개의 기도는 드리지만, 삶의 변화가 없다. 진실한 회개는 확연한 변화를 가져온다. 형식적 회개는 문제를 가릴 뿐이다.
4. 어? 이런 사람으로도?!
에훗과 삼갈은 옷니엘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옷니엘은 갈렙과 함께 아낙 자손을 물리친 역전의 용사다! 갈렙의 사위이기도 하다. 소위 모범생이다. 옷니엘의 활약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에훗과 삼갈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한다.
일단 에훗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안에서 정치적 대립 관계가 된다.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과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 왕의 대립이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베냐민 지파는 다윗에게 비협조적이었다. 또 ‘왼손잡이’는 원문을 직역하면 ‘오른손에 제약이 있는(오른손이 묶인)’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베냐민 사람'(15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문자적으로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는 점이다. 히브리어에 ‘왼손’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음에도 그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에 제약이 있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에훗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삿 20:15~16절에 등장하는 ‘왼손잡이’를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왼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에훗이 군사적인 능력이 특출한 특수부대원(?)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에도 그는 이 특출한 재능을 공물을 갖다 바치는 사소한 일에 활용했다. 훈련받은 대로 살지 못한 사람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는 했지만….
또 삼갈은 아낫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아낫’이 가나안 땅에서 섬기던 전쟁의 여신을 가리킨다면, 그는 이방 신을 섬기던 자다. 그렇다면 그는 심판의 대상이지 하나님의 심판자가 될 수 없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표현이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31절)에서 “그도”이다. 즉,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이는 “소 모는 막대기”로 행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전쟁의 여신 아낫”을 섬기는 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에훗이나 삼갈이나, 전혀 의외의 인물이 이스라엘을 모압과 블레셋에게서 구원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 안에 있는 선입견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을 자주 경험했다. 나 역시 ‘어떻게 그런 사람이……’라는 상황에 수없이 직면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역시 그럴 수 있다. 훈련받은 대로 살지 못하는 에훗을 들어 모압 왕 에글론을 해결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전쟁의 여신 아낫을 섬긴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삼갈이, 그것도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사용하신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하나님의 창의성이 놀랍다.
*”어? 이런 사람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은 막힘이 없다. 하나님은 역시 대단하시다.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을 왜 그리 배반하기만 할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언약이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다.
나는?
-사사 옷니엘 시대가 준 40년의 평화는 이스라엘의 악행으로 깨진다. 하나님은 모압의 에글론을 강성케 하셔서, 그가 암몬과 아말렉 연합군을 결성하여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점령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로부터 18년의 종살이가 시작된다(12~14절). 이스라엘이 자기 욕망의 편에 설 때, 하나님은 모압의 편을 들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다. 세상만큼 강해지려 하기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늘 돌아보아야 한다.
-18년의 고난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세우신 지도자는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지파의 왼손잡이 에훗이었다(15~20절). 그는 구원자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에글론도 조공을 바치러 온 그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심판하신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추구해야 할 것은 세상보다 더 강한 힘이 아니라, 약자를 통해서도 역사를 열어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아닐까?
-이스라엘을 18년이나 다스린 모압 왕 에글론은 굉장히 비둔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자들도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21~25절). 이처럼 그들이 크고 강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압제당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 백성의 삶을 버리면서 비둔해지고 아둔해졌기 때문에, 무력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영적으로 비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에훗이 사사가 되어 모압을 이기고 18년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왼손잡이 사사가 이끌었지만, 하나님이 도우시고 그가 믿음으로 앞장섰을 때, 힘센 장사요 용사인 모압 군사 만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80년의 평화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나로 인해 내 주변이 샬롬을 누리고 있는가?
-“또”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기란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 깊은 사랑의 언약을 따라 오늘도 나를 구원하여 주신다. 그 사랑 안에 내가 거하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의외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사람이기도 하고 몸에 장애가 있을 수도 있는 에훗, 그를 통한 구원 이야기는 통쾌하기 그지없다. 일제 36년을 책으로만 배웠지만, 해방의 기쁨의 현장에 마치 나도 있는 듯 흥분하고 열광할 수밖에 없는 영락없는 한국인인 나도 십분 공감되는 통쾌함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을 ‘에훗’을 통해 이루셨다. 삼갈은 어떤가? 사사기 저자조차도 “그도”라는 표현으로 기록할 만큼 의외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의외성의 도구로 이루어 낸 구원이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이리 된다. 아무리 스스로 엉망이라고 생각하고 제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루저처럼 여겨지는 이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18년의 고통을 끝내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된다. 아무리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마음에 끌리는 대로 다른 우상을 함께 섬기는 듯한 흐물흐물한 신앙을 가졌더라도, 그가 손에 쥔 것이 겨우 ‘소 모는 막대기’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블레셋을 물리치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어떤 것으로도, 무엇으로도 역사를 이루신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신 목적과 첫 사사 옷니엘 [사사기 3:1-11]
사사기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이다. 본문은 왜 사사기에서도 전쟁을 계속 수행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뉜다. 1~6절은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이자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 사이클을 마무리하는 설명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 남겨 두신 이방 민족의 명단과 그들 가운데 거하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소개한다. 7~11절은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의 업적을 소개한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범죄와 심판, 부르짖음과 구원이라는 패턴 속에서 옷니엘이 사사로 세움을 받는다. 2장 22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 시험은 조상들이 지킨 것처럼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며(1, 4절), 첫 사사 옷니엘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본문의 시험은 ‘유혹, 미혹’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조상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이런 민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새번역_4절)이라고 선명하게 밝히신 것처럼, 현재의 상황 속에서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현재의 믿음의 상태와 수준을 보게 하고, 감사와 개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 만약 이 시험을 통해 교만해지거나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는 일을 회피한다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시험 방법은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분배받고도 아직 쫓아내지 못한 민족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을 핑계로 “쫓아내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게 한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쫓아내지 않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시험 도구로 사용하신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점차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하게 하심으로써 시험(test)하신다.
1. 하나님의 시험 목적(1~4절)
이렇게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들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시험하신다. 먼저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을 남겨 두신 것”(새번역_2절)이라고 밝히시며 “전쟁”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과연 모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순종”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이다(4절).
결과는 참담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쫓아내지 못한’ 그들에게 패배하여 도리어 섬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기는 전쟁을 잊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전쟁” 가운데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쫓아내야 할 민족들과의 전쟁이 남아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나안) 여러 민족의 딸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아내로 삼았고, 또 자기들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새번역_6절). 싸워 물리쳐야 할 상대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도 “……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새번역_7절)라는 기록을 통해, 전쟁도 순종도 모두 참패였음을 밝힌다. 이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고대 전쟁의 ‘국룰’대로 패배한 민족이 승리한 민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 왕인 “구산 리사다임(배나 악한 구산 사람)”에게 8년 동안 압제를 받아야 했다(8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 불순종이, 인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억지로 섬기는 처지로 이끌고 말았다.
3. 왜 이렇게 되었을까?(5~6절)
이렇게 된 것은 “제대로 싸울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전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전쟁을 직면할 때, “편리함과 유익함”의 유혹(시험, temptation)에 적당히 타협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족속만 남겨 둔 자기 꾀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들을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는 적당한 편리함과 유익 속에 감춰진 “전쟁 능력 상실(나태하여 준비를 소홀히 함)”이 가져올 “역전”을 가늠하지 못했다. 여기에 “남겨 둔 가나안 족속들과의 통혼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영적 타락이 더해져, 하나님조차 우상들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하나님에게서 오는 전쟁의 승리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전략과 지혜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결국 가나안 정복의 역사적인 환호가 채 가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빠르게 하나님을 떠나갔다”(새번역_2:17).
3. 옷니엘 사사 이야기(7~11절)
옷니엘 사사 이야기는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이야기다. 그에 관한 인물 묘사는 사사의 전형을 보여 준다. 사사기의 사사 소개에는 그의 성격, 인품,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그가 수행한 전쟁에도 구체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옷니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적의 손에 파시고, 이스라엘이 적을 섬기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평안이 임하였음을 묘사하는 문예적인 틀을 보여 주는 기능만 하고 있다. 이후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 틀을 기본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다른 요소들을 더해 구성된다.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다. 그를 갈렙과 연결시켜 소개한 것은 갈렙과 옷니엘의 세대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옷니엘은 갈렙의 후계자로서 여호수아 세대와 가나안 정착 세대를 연결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지만 갈렙처럼 유다 지파에 속하였으며, 1장에서 가나안과의 전쟁에 유다가 맨 먼저 올라간 것처럼 유다 지파 소속인 옷니엘이 첫 사사로 등장하고 있다.
7~8절은 사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가나안 땅 자체에 빠져서 그 땅에서 더욱 잘살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월절, 무교절, 만나, 성막”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장치들을 마련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기억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경험하고 말씀을 들어야 기억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은 하나님을 섬기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장치와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었고, 그 결과 눈에 보이는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이다. 바알은 신상 형태로 되어 있고 아세라 여신은 나무 기둥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알들과 아세라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신상과 제단이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이스라엘은 그를 8년 동안 섬겼다. 이스라엘이 다시 억압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애굽의 학정을 못 이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부르짖다(짜아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다. 이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 주셨다.
10절의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를 나타내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사가 전쟁을 치를 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신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은 영적 혹은 인격적인 변화를 나타내기보다 탁월한 군사적 힘과 능력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즉 전쟁을 치를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일 뿐, 인격적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입다나 삼손도 여호와의 영을 받았으나 인격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인물들이었다.
옷니엘의 서사에는 “손”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고, 10절에서는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겨주셨으며, 결국 옷니엘의 손이 그를 이겼다. 이런 ‘손 바뀜’을 통해 전쟁의 주권자가 오직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옷니엘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평안하였는데, 40년은 사사기에서 한 세대를 의미한다. 옷니엘의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섬겼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신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거나 진멸하지 않으시고 그 땅에 남겨 두신다. 그 이유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다(1~4절).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회피한 것’이 정착 실패의 이유였기 때문이다(1~2장).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용사이신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2:10). 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기 백성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안전과 풍요는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떠나지 않는 시련이나 가시 같은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넓혀 참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순종의 시험’에 실패한다. 그 땅 민족들 가운데 살면서 이방인과 통혼하며 그들이 믿던 신들까지 섬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을 행한다(5~7절). 이처럼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 그분의 역사를 지우고, 말씀의 권위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샬롬을 잃은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무려 8년 동안 넘기신다(8절). 애굽의 종노릇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을 배역한 그들을 다시 혹독한 통치자에게 넘기신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자초한 종살이다. 약속의 땅에서 자유 없는 속박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옷니엘에게 여호와의 영을 주셔서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게 하신다(9~11절).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는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부르짖자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기신다.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인 구산 리사다임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옷니엘도 모두 ‘하나님의 손(주권)’ 아래 있음을 옷니엘 서사를 통해 보여 주신다.
-나의 삶에 “세상 가치”를 남겨 두신 이유가 분명하다. 세상 속에서 세상 가치와 전쟁하는 법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살아내기 위해 싸워야 할 세상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전쟁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기는 전쟁이다.
-세상 속, 세상 가치의 영향력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정복해 나가도록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성도의 삶이 전쟁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전쟁을 모른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 어렵다. 전쟁을 외면하거나 어설픈 세상과의 평화에 속으면 안 된다. 구원받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합당하게, 그 나라 백성답게 이 세상 나라 속에서 오롯이 살아내야 한다. 이 전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모세는 신명기 8장 3절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새번역)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험한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은 먹는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인생을 광야라고 하고, 우리 삶의 모습을 광야 생활에 빗댄다. 삶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통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고 깨지는 자존감을 꼭 부여잡고 살아내는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살이가 광야살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는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세상살이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세상살이는 먹고살기 위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먹고 산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결국 떡을 쟁취하는 세상살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세상살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7절)…… 1928년 시리아의 우가릿(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법률, 경제생활이 담긴 점토판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연대 측정 결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의 시기로 밝혀지면서, 가나안 문명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점토판들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당시 사회상이 생생하게 드러났고,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적대시하셨는지, 그리고 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신 20:16~17)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은 우가릿이 매우 세련된 문화를 이루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가장 번성했던 주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들은 이미 문자 체계가 완성되어 고유 알파벳 30개를 갖추었고, 성별과 단수·복수·쌍수의 구별이 명확하며 문장 어순이 확립되어 있을 정도로 문명이 발전하였다. 이런 우가릿의 종교관은 건기와 우기의 뚜렷한 구분이 하늘의 변화에서 비롯되고, 그 하늘의 변화는 신들 간의 전쟁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아스다롯) 같은 가족신들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종교적인 제의를 정기적으로 치렀다. 문제는 그 제의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신전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가릿” 점토판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가나안의 문화를 이스라엘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딸들을 맞아들였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에게 주어 통혼하였다. 악의 영향력은 매우 빠르게 끼치는 법인데, “그러나 그들은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음란하게 다른 신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빠르게 떠나갔다. 그들은 조상처럼 살지 않았다”(새번역 2:17)라는 기록이 이를 대변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나안의 악함에 밀린 것이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이 너무도 쉽게 악의 영향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전쟁은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답게 가나안을 새롭게 세워야 할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오늘날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세상 가치에 빠르게 함몰되어 가는 힘없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적당히 세상살이와 타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영적 기개를 “나의 만족과 유익, 편리함”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이 땅의 교회가 세상에 억압받게 된 것은, 사사기의 외침에 무지했거나 세상살이와 적당히 타협하는 것에 맞선 전쟁을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무거운 아침이 되어 버렸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범죄와 심판, 부르짖음과 구원이라는 패턴 속에서 옷니엘이 사사로 세움을 받는다. 2장 22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 시험은 조상들이 지킨 것처럼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며(1, 4절), 첫 사사 옷니엘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본문의 시험은 ‘유혹, 미혹’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조상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이런 민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새번역_4절)이라고 선명하게 밝히신 것처럼, 현재의 상황 속에서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현재의 믿음의 상태와 수준을 보게 하고, 감사와 개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 만약 이 시험을 통해 교만해지거나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는 일을 회피한다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시험 방법은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분배받고도 아직 쫓아내지 못한 민족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을 핑계로 “쫓아내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게 한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쫓아내지 않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시험 도구로 사용하신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점차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하게 하심으로써 시험(test)하신다.
1. 하나님의 시험 목적(1~4절)
이렇게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들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시험하신다. 먼저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을 남겨 두신 것”(새번역_2절)이라고 밝히시며 “전쟁”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과연 모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순종”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이다(4절).
결과는 참담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쫓아내지 못한’ 그들에게 패배하여 도리어 섬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기는 전쟁을 잊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전쟁” 가운데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쫓아내야 할 민족들과의 전쟁이 남아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나안) 여러 민족의 딸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아내로 삼았고, 또 자기들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새번역_6절). 싸워 물리쳐야 할 상대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도 “……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새번역_7절)라는 기록을 통해, 전쟁도 순종도 모두 참패였음을 밝힌다. 이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고대 전쟁의 ‘국룰’대로 패배한 민족이 승리한 민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 왕인 “구산 리사다임(배나 악한 구산 사람)”에게 8년 동안 압제를 받아야 했다(8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 불순종이, 인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억지로 섬기는 처지로 이끌고 말았다.
3. 왜 이렇게 되었을까?(5~6절)
이렇게 된 것은 “제대로 싸울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전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전쟁을 직면할 때, “편리함과 유익함”의 유혹(시험, temptation)에 적당히 타협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족속만 남겨 둔 자기 꾀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들을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는 적당한 편리함과 유익 속에 감춰진 “전쟁 능력 상실(나태하여 준비를 소홀히 함)”이 가져올 “역전”을 가늠하지 못했다. 여기에 “남겨 둔 가나안 족속들과의 통혼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영적 타락이 더해져, 하나님조차 우상들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하나님에게서 오는 전쟁의 승리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전략과 지혜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결국 가나안 정복의 역사적인 환호가 채 가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빠르게 하나님을 떠나갔다”(새번역_2:17).
3. 옷니엘 사사 이야기(7~11절)
옷니엘 사사 이야기는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이야기다. 그에 관한 인물 묘사는 사사의 전형을 보여 준다. 사사기의 사사 소개에는 그의 성격, 인품,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그가 수행한 전쟁에도 구체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옷니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적의 손에 파시고, 이스라엘이 적을 섬기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평안이 임하였음을 묘사하는 문예적인 틀을 보여 주는 기능만 하고 있다. 이후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 틀을 기본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다른 요소들을 더해 구성된다.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다. 그를 갈렙과 연결시켜 소개한 것은 갈렙과 옷니엘의 세대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옷니엘은 갈렙의 후계자로서 여호수아 세대와 가나안 정착 세대를 연결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지만 갈렙처럼 유다 지파에 속하였으며, 1장에서 가나안과의 전쟁에 유다가 맨 먼저 올라간 것처럼 유다 지파 소속인 옷니엘이 첫 사사로 등장하고 있다.
7~8절은 사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가나안 땅 자체에 빠져서 그 땅에서 더욱 잘살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월절, 무교절, 만나, 성막”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장치들을 마련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기억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경험하고 말씀을 들어야 기억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은 하나님을 섬기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장치와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었고, 그 결과 눈에 보이는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이다. 바알은 신상 형태로 되어 있고 아세라 여신은 나무 기둥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알들과 아세라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신상과 제단이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이스라엘은 그를 8년 동안 섬겼다. 이스라엘이 다시 억압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애굽의 학정을 못 이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부르짖다(짜아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다. 이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 주셨다.
10절의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를 나타내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사가 전쟁을 치를 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신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은 영적 혹은 인격적인 변화를 나타내기보다 탁월한 군사적 힘과 능력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즉 전쟁을 치를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일 뿐, 인격적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입다나 삼손도 여호와의 영을 받았으나 인격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인물들이었다.
옷니엘의 서사에는 “손”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고, 10절에서는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겨주셨으며, 결국 옷니엘의 손이 그를 이겼다. 이런 ‘손 바뀜’을 통해 전쟁의 주권자가 오직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옷니엘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평안하였는데, 40년은 사사기에서 한 세대를 의미한다. 옷니엘의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섬겼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신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거나 진멸하지 않으시고 그 땅에 남겨 두신다. 그 이유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다(1~4절).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회피한 것’이 정착 실패의 이유였기 때문이다(1~2장).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용사이신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2:10). 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기 백성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안전과 풍요는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떠나지 않는 시련이나 가시 같은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넓혀 참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순종의 시험’에 실패한다. 그 땅 민족들 가운데 살면서 이방인과 통혼하며 그들이 믿던 신들까지 섬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을 행한다(5~7절). 이처럼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 그분의 역사를 지우고, 말씀의 권위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샬롬을 잃은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무려 8년 동안 넘기신다(8절). 애굽의 종노릇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을 배역한 그들을 다시 혹독한 통치자에게 넘기신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자초한 종살이다. 약속의 땅에서 자유 없는 속박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옷니엘에게 여호와의 영을 주셔서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게 하신다(9~11절).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는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부르짖자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기신다.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인 구산 리사다임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옷니엘도 모두 ‘하나님의 손(주권)’ 아래 있음을 옷니엘 서사를 통해 보여 주신다.
-나의 삶에 “세상 가치”를 남겨 두신 이유가 분명하다. 세상 속에서 세상 가치와 전쟁하는 법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살아내기 위해 싸워야 할 세상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전쟁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기는 전쟁이다.
-세상 속, 세상 가치의 영향력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정복해 나가도록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성도의 삶이 전쟁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전쟁을 모른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 어렵다. 전쟁을 외면하거나 어설픈 세상과의 평화에 속으면 안 된다. 구원받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합당하게, 그 나라 백성답게 이 세상 나라 속에서 오롯이 살아내야 한다. 이 전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모세는 신명기 8장 3절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새번역)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험한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은 먹는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인생을 광야라고 하고, 우리 삶의 모습을 광야 생활에 빗댄다. 삶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통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고 깨지는 자존감을 꼭 부여잡고 살아내는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살이가 광야살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는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세상살이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세상살이는 먹고살기 위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먹고 산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결국 떡을 쟁취하는 세상살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세상살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7절)…… 1928년 시리아의 우가릿(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법률, 경제생활이 담긴 점토판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연대 측정 결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의 시기로 밝혀지면서, 가나안 문명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점토판들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당시 사회상이 생생하게 드러났고,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적대시하셨는지, 그리고 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신 20:16~17)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은 우가릿이 매우 세련된 문화를 이루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가장 번성했던 주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들은 이미 문자 체계가 완성되어 고유 알파벳 30개를 갖추었고, 성별과 단수·복수·쌍수의 구별이 명확하며 문장 어순이 확립되어 있을 정도로 문명이 발전하였다. 이런 우가릿의 종교관은 건기와 우기의 뚜렷한 구분이 하늘의 변화에서 비롯되고, 그 하늘의 변화는 신들 간의 전쟁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아스다롯) 같은 가족신들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종교적인 제의를 정기적으로 치렀다. 문제는 그 제의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신전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가릿” 점토판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가나안의 문화를 이스라엘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딸들을 맞아들였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에게 주어 통혼하였다. 악의 영향력은 매우 빠르게 끼치는 법인데, “그러나 그들은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음란하게 다른 신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빠르게 떠나갔다. 그들은 조상처럼 살지 않았다”(새번역 2:17)라는 기록이 이를 대변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나안의 악함에 밀린 것이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이 너무도 쉽게 악의 영향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전쟁은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답게 가나안을 새롭게 세워야 할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오늘날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세상 가치에 빠르게 함몰되어 가는 힘없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적당히 세상살이와 타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영적 기개를 “나의 만족과 유익, 편리함”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이 땅의 교회가 세상에 억압받게 된 것은, 사사기의 외침에 무지했거나 세상살이와 적당히 타협하는 것에 맞선 전쟁을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무거운 아침이 되어 버렸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와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사사기 2:11-23]
본문은 사사기의 중심 이야기가 되는 틀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이스라엘의 배교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변국에 파심,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사사를 통한 구원, 그리고 다시 타락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요약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사기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와,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잘 보여 준다.
1. 이스라엘의 배교 역사(11~19절)
11~13절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고발한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 등 가나안 신들을 섬겼고, 그들의 진정한 신인 여호와를 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바알을 섬긴 일을 가리킨다. 12절은 이런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 이들에게 여호와는 조상들의 하나님일 뿐, 자신들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호와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10절).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모르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그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하여 그 신들을 섬기며 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호와도 조상의 신으로 섬기고 가나안의 신들도 함께 섬겨서 더 큰 풍요를 누리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분명한 배교였다. 가나안이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면서 가나안의 신들은 여호와께 완전히 패했다. 즉, 하나님과 비교하여 가나안의 신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무능하고 약한 존재들을 신으로 섬긴 것이다. 이런 모습에 하나님은 격분하셨고, 이런 태도를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멈춘 적이 없었다. 다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가나안의 신들도 섬긴 것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은 상호 배타적인 부부의 언약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다. 이 언약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십계명 제1계명)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삶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값싼 풍요를 더 누려 보겠다고 가나안 신을 섬긴 것이다.
14~15절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노략자들의 손에 넘겨주심을 보여 준다. ‘노략자들’은 가나안 족속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주변의 모든 적을 가리킨다. ‘손에 넘겨주다’라는 표현은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실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적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것이라는 데 사용하신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전쟁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5절에서는 여호와의 징계가 얼마나 심한지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는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광야와 가나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든지 보호하시던 여호와의 손이, 이제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손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재앙 또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28~29장의 저주나 31:16~21의 저주의 말씀들을 성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잘 따르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지만, 또한 공의롭고 신실한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신다.
16~19절은 여호와의 자비와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여 준다. 심판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극심한 괴로움에 빠졌을 때, 여호와께서는 구원할 사사를 보내 주셨다. ‘사사’는 당시 지파를 다스리던 지도자들로, 지파가 적들로 인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사사는 재판관이라기보다 영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셔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따라갔다. 다른 신을 따라 음행한다는 것은, 이방 신을 섬기는 것 자체가 음란할 뿐 아니라 이방 신전의 창녀들과 관계를 가지며 풍요를 비는 행위 역시 음란하였다는 뜻이다.
18절은 왜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의 핍박을 받으며 내는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마음이 약해지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다시 구원하기로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기계적으로 벌을 주고 잘하면 상을 주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가 잘못된 길로 치우치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징계하시지만, 징계를 받는 자녀가 너무 힘들어하면 그것마저 가슴이 아파 참지 못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주신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조금 살 만해지고 자신들을 인도하던 사사가 죽으면 또다시 타락의 길로 돌이키기를 반복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에 보답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배교하였으며, 19절이 이를 잘 요약한다.
2. 여호와의 분노(20~23절)
본문은 반복적인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므로,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하나도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신다. “하나도”라는 말로 강조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대응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 말씀만 지킨다면 다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23절은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신 이유가 하나님의 시험 때문이라고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마무리한다. 시험은 심판과 다르다. 이런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한 훈계의 방편이지 결코 심판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와 하나님의 반복적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살게 하시려는 넘치는 사랑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서사는 사사의 영웅담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3. 사사기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사랑 이야기다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섬기지 않으며 가나안의 우상(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인해 심판을 자초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서도 사사들을 보내 긍휼을 베푸신다. 사실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버리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기 백성의 배신에 진노하시지만,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하심을 사사들을 보내 주심으로 확인시켜 주신다. 왜 이렇게 하실까?
1) 여전히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며 배신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14절). 어디를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여호와의 손’이 재앙을 내리셨다(15절).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대로(출 23:33, 신 7:16, 민 33:55) 흘러갔고, 그 괴로움이 매우 컸다. “보김(통곡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신음 소리는(네아카_슬피 울부짖음) 깊어만 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경고하신 하나님이시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생활과 광야의 결핍된 생활에서, 오롯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탈출하고 그 은혜를 누린 백성들이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빠져들어 하나님을 외면하게 될 것을 우려하셨다. 이에 가나안에서의 복된 삶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재앙도 경고하셨던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복과 재앙”의 하나님은, 풍요로운 가나안의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에게서(불과 가나안 정착 두 세대 만에) 잊히고 말았다. 광야의 결핍된 환경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의 은혜는 가나안의 풍족함으로 인해 잊혔다. 두려운 것은 우리의 환경도 과거 모든 것이 결핍했던 시대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로 변했다는 점이다.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세대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하였던 간절함이,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서 사라졌다. 굳이 믿고 따르지 않고, 오히려 더 넘치는 풍요를 좇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구원의 하나님이 절실했던 세대는 지나갔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 하나님은 잊히고 말았다. 풍요로움을 맛보니 하나님보다 풍요를 더 간절히 좇는다. 이 시대가, 결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누리며 은혜를 붙잡았던 세대와 완전히 다른 세대가 된 것이다. 며칠 전 핼러윈데이에 거리에 넘쳐나던, 핼러윈 복장을 한 젊은이들을 보면서 “아…… 완전히 다른 세대로구나……”를 통감하며, 이 말씀 앞에 깊은 두려움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알고 계셔서 ‘사사’들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나안의 풍요에 빠져든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게 하시려고 쫓아내지 않은 대적들의 손에 넘겨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지만, 그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희망을 걸고 싶다.
*가나안의 풍요를 택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자기 백성의 배신에 대하여 심판하시지만, “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고 싶다.
2) 여전히 함께하기를 바라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11절).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이었다(13절).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배신하고 섬기던 우상들에게 도리어 배신(버림)당하게 하신다. 우상들을 섬기던 가나안 족속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배신하면서 좇아갔던 우상들은 백성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풍요를 노략당하게 하시고, 그들이 쫓아내지 않았던 족속들에게 도리어 복수(?)를 당하게 하신다(14절). 이 재앙은 피할 길이 없었다.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피해 숨어도 노략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제 필요 없다며 우상들에게 달려갔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우상들이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하여 괴로움이 심해지고 나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노와 재앙을 겪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배반하는 자기 백성을 내치지 않고 “여전히 함께” 하시면서 그 고통의 소리에 응답하신 것이다.
*사사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이다. 여전히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사들을 통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세대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18절).
3) 그러나…… 그러므로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돌아서서, 그들의 조상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악한 행위와 완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새번역_1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셨고(20절), “그러므로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21절)라고 선언하신다. 문장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저주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주위에 남아 있는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으신 마음이었다. 하나님과 이방 우상들의 확연한 차이를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다.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이 애굽과 광야를 지나며 경험하고 알았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공급받았던 일용할 은혜의 가치를 깨닫기 원하셨다. 아무리 비옥한 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경작하며 풍요로움을 일굴 수 있다고 착각했을지라도, 광야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전히 필요하며 그 은혜 안에 실제로 거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가나안의 풍요가 언제든지 “노략”당하게 될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깨닫기 바라셨다. 그렇게 깨닫고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22절) 시험하여 보시겠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일상의 “근심거리들”, “고통거리들”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서 자기 힘에 대한 과신과 탐욕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남겨 두신” 것임을 깨닫는다. 이 근심, 그 고통이 없다면 그나마 주님께 부르짖는 것마저 망각하고 “완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될 것을 더 잘 아시기에, 근심과 고통과 결핍을 남겨 두셨다.
*결핍이, 고통이, 근심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 백성의 배신은, 쫓아내라 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음으로” 시작되었다. 남겨진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라가면서 격화되었다.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다른 신들이 왜 이토록 매력적이었을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될 만큼 빠져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알과 아스다롯이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겨진 우상이었다는 데서 짐작할 만한 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한 가나안 땅은 농경 지대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유목하며 양을 치던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2세대가 경험한 광야가 아니었다. 광야는 매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하늘의 양식’이 아니고서는 살아 낼 수 없는 땅이었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물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광야의 땅에서 40년을 보내면서, 옷깃과 신발도 해어지지 않았던 기적을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달랐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며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땅으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광야의 결핍과 절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물줄기는 이어졌고, 뿌리는 씨는 풍성한 수확으로 이어졌다. 이런 풍요가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신들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상은 웅장하였으니, 그렇게 여겨질 법도 했다.
*그런 웅장한 우상들이 준다는 풍요와 다산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세상 신들이 약속한 “풍요로움”은 넘치고 넘쳐 쌓아 둘 수 있는 풍요였다. 더 많이 소유하기 원하는 “탐욕”의 마음은, “일용할 양식”의 풍성함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미덥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매일 아침 내려 주신 만나는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가나안에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그보다 더 많은 소출을 수확하여 “저장(축재)”하며 살 수 있었다. 창고가 부족하면 또 짓고 저장하는 “넘치는 풍요”의 유혹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기막힌 매력에(넘치고 넘치는) 이스라엘은 광야의 하나님을 버렸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했다. 날마다 필요한 것만큼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는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하나님의 공동체가) 골고루 나누어 갖는 풍요임을 간과한 것이다. 가나안의 풍요가 힘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들에게 몰려서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풍요라면, 하나님의 풍요는 모든 백성이 골고루 채워지는 만큼의 풍요였다.
*나무로 깎아 금으로 입힌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는, 썩어 내다 버려도 내 손에서 넘쳐나는 풍요였다. 이 유혹을 이겨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풍요로움이 가나안 땅의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와 다르지 않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즐겁게 누리려 한다. 풍요로움이 주는 넘치는 향락을 추구하고 또 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의 풍요는 “일용할 양식”의 풍요다.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는 풍요다. 매일 아침 거두러 나가는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풍요다. 무엇보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누릴 수 있는 풍요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 마음껏 움켜쥐고 싶고, 내 마음껏 쌓아 놓고 즐기고 싶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을 잊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풍요”의 추구가 노골적이다. 지도자를 뽑는 최우선의 조건은 “경제”이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한다. 그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성공에만 함몰된 세상에서, 실패는 가치를 찾아가고 회복하는 과정이 아닌 것이 된 지 오래다. 실패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다.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와 지금 겪고 있는 각종 이상 기후, 국제 정세의 혼란은, 어쩌면 이런 이기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며 스스로의 삶을 망치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 세상에 “삶의 참된 가치”를 되찾는 화두를 던지게 한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일 수도 있겠다. 하나님 나라 백성부터, 세상의 풍요로움에 함몰되어 보지 못한 하나님과 이웃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작년과 다른 여름을 해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또한 혼란스러워지는 국제 정세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리되고 완성된 세계는 이상일 뿐이다. 우리는 각종 혼란과 이상 기후 속에서 불안정함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상황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들이 지킨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시고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시는 은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도리어 이런 상황이 하나님을 더욱 멀어지게 하고 잊게 만드는 것이 된다면 소망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는? 예배당은? 믿음의 교제의 현장은? 기도의 자리는? 찬양의 자리는? 나눔과 섬김의 자리는? 사역과 헌신의 자리는? 하나님을 더욱 찾고 구하며 예배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내고 있는가?
1. 이스라엘의 배교 역사(11~19절)
11~13절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고발한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 등 가나안 신들을 섬겼고, 그들의 진정한 신인 여호와를 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바알을 섬긴 일을 가리킨다. 12절은 이런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 이들에게 여호와는 조상들의 하나님일 뿐, 자신들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호와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10절).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모르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그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하여 그 신들을 섬기며 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호와도 조상의 신으로 섬기고 가나안의 신들도 함께 섬겨서 더 큰 풍요를 누리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분명한 배교였다. 가나안이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면서 가나안의 신들은 여호와께 완전히 패했다. 즉, 하나님과 비교하여 가나안의 신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무능하고 약한 존재들을 신으로 섬긴 것이다. 이런 모습에 하나님은 격분하셨고, 이런 태도를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멈춘 적이 없었다. 다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가나안의 신들도 섬긴 것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은 상호 배타적인 부부의 언약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다. 이 언약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십계명 제1계명)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삶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값싼 풍요를 더 누려 보겠다고 가나안 신을 섬긴 것이다.
14~15절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노략자들의 손에 넘겨주심을 보여 준다. ‘노략자들’은 가나안 족속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주변의 모든 적을 가리킨다. ‘손에 넘겨주다’라는 표현은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실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적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것이라는 데 사용하신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전쟁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5절에서는 여호와의 징계가 얼마나 심한지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는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광야와 가나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든지 보호하시던 여호와의 손이, 이제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손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재앙 또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28~29장의 저주나 31:16~21의 저주의 말씀들을 성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잘 따르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지만, 또한 공의롭고 신실한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신다.
16~19절은 여호와의 자비와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여 준다. 심판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극심한 괴로움에 빠졌을 때, 여호와께서는 구원할 사사를 보내 주셨다. ‘사사’는 당시 지파를 다스리던 지도자들로, 지파가 적들로 인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사사는 재판관이라기보다 영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셔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따라갔다. 다른 신을 따라 음행한다는 것은, 이방 신을 섬기는 것 자체가 음란할 뿐 아니라 이방 신전의 창녀들과 관계를 가지며 풍요를 비는 행위 역시 음란하였다는 뜻이다.
18절은 왜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의 핍박을 받으며 내는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마음이 약해지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다시 구원하기로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기계적으로 벌을 주고 잘하면 상을 주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가 잘못된 길로 치우치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징계하시지만, 징계를 받는 자녀가 너무 힘들어하면 그것마저 가슴이 아파 참지 못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주신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조금 살 만해지고 자신들을 인도하던 사사가 죽으면 또다시 타락의 길로 돌이키기를 반복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에 보답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배교하였으며, 19절이 이를 잘 요약한다.
2. 여호와의 분노(20~23절)
본문은 반복적인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므로,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하나도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신다. “하나도”라는 말로 강조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대응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 말씀만 지킨다면 다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23절은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신 이유가 하나님의 시험 때문이라고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마무리한다. 시험은 심판과 다르다. 이런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한 훈계의 방편이지 결코 심판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와 하나님의 반복적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살게 하시려는 넘치는 사랑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서사는 사사의 영웅담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3. 사사기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사랑 이야기다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섬기지 않으며 가나안의 우상(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인해 심판을 자초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서도 사사들을 보내 긍휼을 베푸신다. 사실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버리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기 백성의 배신에 진노하시지만,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하심을 사사들을 보내 주심으로 확인시켜 주신다. 왜 이렇게 하실까?
1) 여전히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며 배신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14절). 어디를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여호와의 손’이 재앙을 내리셨다(15절).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대로(출 23:33, 신 7:16, 민 33:55) 흘러갔고, 그 괴로움이 매우 컸다. “보김(통곡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신음 소리는(네아카_슬피 울부짖음) 깊어만 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경고하신 하나님이시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생활과 광야의 결핍된 생활에서, 오롯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탈출하고 그 은혜를 누린 백성들이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빠져들어 하나님을 외면하게 될 것을 우려하셨다. 이에 가나안에서의 복된 삶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재앙도 경고하셨던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복과 재앙”의 하나님은, 풍요로운 가나안의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에게서(불과 가나안 정착 두 세대 만에) 잊히고 말았다. 광야의 결핍된 환경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의 은혜는 가나안의 풍족함으로 인해 잊혔다. 두려운 것은 우리의 환경도 과거 모든 것이 결핍했던 시대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로 변했다는 점이다.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세대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하였던 간절함이,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서 사라졌다. 굳이 믿고 따르지 않고, 오히려 더 넘치는 풍요를 좇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구원의 하나님이 절실했던 세대는 지나갔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 하나님은 잊히고 말았다. 풍요로움을 맛보니 하나님보다 풍요를 더 간절히 좇는다. 이 시대가, 결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누리며 은혜를 붙잡았던 세대와 완전히 다른 세대가 된 것이다. 며칠 전 핼러윈데이에 거리에 넘쳐나던, 핼러윈 복장을 한 젊은이들을 보면서 “아…… 완전히 다른 세대로구나……”를 통감하며, 이 말씀 앞에 깊은 두려움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알고 계셔서 ‘사사’들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나안의 풍요에 빠져든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게 하시려고 쫓아내지 않은 대적들의 손에 넘겨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지만, 그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희망을 걸고 싶다.
*가나안의 풍요를 택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자기 백성의 배신에 대하여 심판하시지만, “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고 싶다.
2) 여전히 함께하기를 바라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11절).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이었다(13절).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배신하고 섬기던 우상들에게 도리어 배신(버림)당하게 하신다. 우상들을 섬기던 가나안 족속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배신하면서 좇아갔던 우상들은 백성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풍요를 노략당하게 하시고, 그들이 쫓아내지 않았던 족속들에게 도리어 복수(?)를 당하게 하신다(14절). 이 재앙은 피할 길이 없었다.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피해 숨어도 노략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제 필요 없다며 우상들에게 달려갔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우상들이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하여 괴로움이 심해지고 나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노와 재앙을 겪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배반하는 자기 백성을 내치지 않고 “여전히 함께” 하시면서 그 고통의 소리에 응답하신 것이다.
*사사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이다. 여전히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사들을 통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세대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18절).
3) 그러나…… 그러므로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돌아서서, 그들의 조상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악한 행위와 완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새번역_1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셨고(20절), “그러므로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21절)라고 선언하신다. 문장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저주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주위에 남아 있는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으신 마음이었다. 하나님과 이방 우상들의 확연한 차이를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다.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이 애굽과 광야를 지나며 경험하고 알았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공급받았던 일용할 은혜의 가치를 깨닫기 원하셨다. 아무리 비옥한 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경작하며 풍요로움을 일굴 수 있다고 착각했을지라도, 광야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전히 필요하며 그 은혜 안에 실제로 거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가나안의 풍요가 언제든지 “노략”당하게 될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깨닫기 바라셨다. 그렇게 깨닫고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22절) 시험하여 보시겠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일상의 “근심거리들”, “고통거리들”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서 자기 힘에 대한 과신과 탐욕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남겨 두신” 것임을 깨닫는다. 이 근심, 그 고통이 없다면 그나마 주님께 부르짖는 것마저 망각하고 “완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될 것을 더 잘 아시기에, 근심과 고통과 결핍을 남겨 두셨다.
*결핍이, 고통이, 근심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 백성의 배신은, 쫓아내라 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음으로” 시작되었다. 남겨진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라가면서 격화되었다.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다른 신들이 왜 이토록 매력적이었을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될 만큼 빠져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알과 아스다롯이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겨진 우상이었다는 데서 짐작할 만한 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한 가나안 땅은 농경 지대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유목하며 양을 치던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2세대가 경험한 광야가 아니었다. 광야는 매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하늘의 양식’이 아니고서는 살아 낼 수 없는 땅이었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물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광야의 땅에서 40년을 보내면서, 옷깃과 신발도 해어지지 않았던 기적을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달랐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며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땅으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광야의 결핍과 절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물줄기는 이어졌고, 뿌리는 씨는 풍성한 수확으로 이어졌다. 이런 풍요가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신들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상은 웅장하였으니, 그렇게 여겨질 법도 했다.
*그런 웅장한 우상들이 준다는 풍요와 다산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세상 신들이 약속한 “풍요로움”은 넘치고 넘쳐 쌓아 둘 수 있는 풍요였다. 더 많이 소유하기 원하는 “탐욕”의 마음은, “일용할 양식”의 풍성함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미덥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매일 아침 내려 주신 만나는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가나안에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그보다 더 많은 소출을 수확하여 “저장(축재)”하며 살 수 있었다. 창고가 부족하면 또 짓고 저장하는 “넘치는 풍요”의 유혹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기막힌 매력에(넘치고 넘치는) 이스라엘은 광야의 하나님을 버렸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했다. 날마다 필요한 것만큼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는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하나님의 공동체가) 골고루 나누어 갖는 풍요임을 간과한 것이다. 가나안의 풍요가 힘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들에게 몰려서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풍요라면, 하나님의 풍요는 모든 백성이 골고루 채워지는 만큼의 풍요였다.
*나무로 깎아 금으로 입힌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는, 썩어 내다 버려도 내 손에서 넘쳐나는 풍요였다. 이 유혹을 이겨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풍요로움이 가나안 땅의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와 다르지 않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즐겁게 누리려 한다. 풍요로움이 주는 넘치는 향락을 추구하고 또 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의 풍요는 “일용할 양식”의 풍요다.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는 풍요다. 매일 아침 거두러 나가는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풍요다. 무엇보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누릴 수 있는 풍요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 마음껏 움켜쥐고 싶고, 내 마음껏 쌓아 놓고 즐기고 싶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을 잊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풍요”의 추구가 노골적이다. 지도자를 뽑는 최우선의 조건은 “경제”이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한다. 그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성공에만 함몰된 세상에서, 실패는 가치를 찾아가고 회복하는 과정이 아닌 것이 된 지 오래다. 실패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다.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와 지금 겪고 있는 각종 이상 기후, 국제 정세의 혼란은, 어쩌면 이런 이기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며 스스로의 삶을 망치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 세상에 “삶의 참된 가치”를 되찾는 화두를 던지게 한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일 수도 있겠다. 하나님 나라 백성부터, 세상의 풍요로움에 함몰되어 보지 못한 하나님과 이웃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작년과 다른 여름을 해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또한 혼란스러워지는 국제 정세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리되고 완성된 세계는 이상일 뿐이다. 우리는 각종 혼란과 이상 기후 속에서 불안정함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상황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들이 지킨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시고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시는 은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도리어 이런 상황이 하나님을 더욱 멀어지게 하고 잊게 만드는 것이 된다면 소망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는? 예배당은? 믿음의 교제의 현장은? 기도의 자리는? 찬양의 자리는? 나눔과 섬김의 자리는? 사역과 헌신의 자리는? 하나님을 더욱 찾고 구하며 예배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내고 있는가?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보김과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의 등장 [사사기 2:1-10]
가나안 정복 전쟁 말기에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스라엘의 모습은, 급기야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여호와의 사자의 선언은 가나안 땅에 적응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청천벽력과 같았다. 쫓아내야 할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도록 내버려 두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백성이 큰 소리로 울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끝이 났고, 출애굽 2세대는 가나안 정복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지만 그들도 역시 조상의 길로 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세대”였다는 것이다. 홍해, 광야의 메추라기와 만나, 시내 산 언약식,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공통의 체험에서 오는 일체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없는(여호와도,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은 후의 일이었다.
이처럼 본문은 1~5절의 보김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질책하는 내용을 전한다. 이어 6~10절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죽음,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보고한다.
1. 통곡의 땅(1~5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몇 가지 표현으로 불렸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등이다. 그런데 그 땅에 큰 울음소리가 터졌다. 이제껏 승리의 환호성이 더 많이 울려 퍼지던 백성에게서 깊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다(1절). 길갈은 여호수아 세대가 요단 강을 건넌 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열두 돌기둥을 세운 장소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자녀들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있는 성읍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었다. 성막도 가나안 땅에서 처음 세워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상기시키시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온 힘을 쏟아부어 정복 전쟁에 임하지 않았다. 적당히 현실적인 여건과 타협하며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한 순종으로 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남김없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 하셨지만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길갈에서 올려 보내신 사자를 통해 이런 불순종을 꾸짖으신다.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했던, 여호수아가 이끌던 시대를 회상하게 하신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던 것”(6~7절)을 돌아보게 하신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배신은 순식간이었다. 이에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벧엘)으로 올라와 이렇게 외쳤다.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그들은 결국 너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들은 너희에게,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도록 옭아매는 올무가 될 것이다.”(새번역_3절) 이에 백성이 큰 소리로 울었다! 언뜻 보기에는 진실한 회개의 모습인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진실한 회개에는 몇 가지 증표가 따른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전인격적인 변화의 표현이 나타난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격한 표현에서 멈추지 않는다. 분명한 변화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지 큰 소리로 울기만 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와 기도의 진정성은 반드시 그 후의 삶에서 드러난다. 기도와 예배 후의 모습에서 변화된 행동을 찾아볼 수 없고, 통곡 후에 의지에 찬 변화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보김(우는 자들)”일 뿐이다. “보김”은 회복이 완성된 곳이 아니다. 회복의 시작이어야 했다.
2.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회상(6~10절)
이 단락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여호수아 24:28~31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각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였고, 각 지파는 분배받은 기업으로 돌아가 그곳을 차지하는 전쟁을 수행한다.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그 후 여호수아와 함께한 1세대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큰일, 즉 요단 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한 일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한 전투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의 종으로 존경받던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는다. 본문은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종’으로 호칭하는데, 이는 그 이전에는 오직 모세에게만 붙여졌던 최고의 명예를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즉, 여호수아는 죽은 후에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여호수아가 모세처럼 여호와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는 호칭이었다.
여호수아는 죽은 후 그의 기업인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 헤레스’, 혹은 ‘딤낫 세라’로 불리는 곳에 묻힌다. 이 성읍은 그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자신의 성읍으로 선택하여 받은 곳이었다. 이런 모습을 통해, 그가 비록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왕처럼 이스라엘 땅 전체를 자기 소유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과 동일하게 자기 몫을 받는 데 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실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고, 그와 함께한 사람들도 죽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세대가 죽은 후, 뒤를 이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른 세대’였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7절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본 자들’이라는 표현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3. 다음 세대가 아니라 다른 세대(10절)
“보김(우는 자들)”의 땅이 되어 버릴 원인을, 여호수아 세대의 모습을 회상하게 하시면서 알려 주신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장로들(그 세대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 일어난 세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대였다. “……그들이 죽은 뒤에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새번역_10절)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아 주신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새로운 세대가 여호와와 그분이 하신 일을 알지 못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살필 수 있다. 첫째, 선조들이 다음 세대에게 여호와에 대해 제대로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다음 세대를 모아 놓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언급하면서, 새로운 세대와 언약을 갱신하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대대로 자손에게 잘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부모 세대에게 있다. 하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이런 교육은 점점 퇴색하기 마련이고, 그 결과 자식 세대는 하나님을 잘 모르게 될 수 있다. 둘째, 각 세대는 전해 들은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자식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식은 있어도 하나님을 삶 속에서 체험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신앙은 지식으로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각 세대와 각 개인이 하나님을 체험할 때 형성되기에 세대마다 새로운 하나님 체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던 이전 세대와 달리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이스라엘의 배교를 예고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어김없이 주셨다. 그렇게 받은 땅을 이스라엘 백성도 어김없이 그들의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려주지 못했다.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이다.
*신앙을 물려주지 못한(않은) 채 땅만 물려준 그들의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백성과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이 다른 세대가 물려받은 것은 그저 땅뿐이었다. 출애굽의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는 물려받지 못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에게,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는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기본 선택이었다. 여호수아 세대는 이 땅의 풍요함을 물려주기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물려주었어야 했다.
*결국 땅(물질)만 물려주면 안 된다. 부모와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공통된 경험은, 우리 자녀 세대가 우리와 다른 세대가 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과 세 절기, 곧 유월절(무교절)과 맥추절(오순절)과 수장절(초막절)을 모든 이스라엘이 지키라 하셨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앙 정서를 갖게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자녀와 함께 이를 잘 지키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기도의 자리를 함께하고, 찬양의 자리에서 함께 목청껏 마음을 다해 찬양하는지, 가정에서 혹은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이와 같은 심정으로 함께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미 한국 교회 안에서 다음 세대가 모이는 주일학교의 70퍼센트가 넘게 사라졌다는 보고가 절망하게 한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귀한 신앙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부터가, 다음 세대를 세우는 기초를 쌓는 일이다. 부모가 들려주는 하나님 이야기가 가랑비에 옷 젖듯 마음에 스며들어 있어야 “다음 세대”가 된다.
*모세의 세대가 여호수아의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광야”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함께 만나고 누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오롯이 그 세대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묶어 주었다. 하지만 여호수아 세대는 그토록 소망하던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은혜가 성취되었음에도, 여호수아를 알고 따르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죽자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나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나, 이스라엘은 변절하고 만다(1~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고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지만, 이스라엘은 약속을 어긴 채 가나안 민족을 용납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주민이 도리어 그들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그 사랑은 우리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하나님만 사랑하고 있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서도 가나안 주민과 또 다른 언약을 맺는다. 가나안 주민을 쫓아내지 않고 우상의 단도 헐지 않는다. 그들을 노역자로 삼아 함께 사는 길을 택한다(2~3절). 공존을 도모한 평화로운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불순종이요 그릇된 타협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것이라도 언제든 득이 아니라 독이 되고, 친구가 아니라 원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의 실천보다 실용을 택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선고되자, 이스라엘 자손은 소리 높여 운다(4~5절). 안식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통곡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그 자체로 안전하고 기쁨 가득한 땅은 없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간절히 요청하고 실현하는 곳에 안식과 평강과 희락이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잘못을 정죄하시고 심판을 선고하셨다. 최후통첩이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셨다. 영원히 그 언약을 지킬 태세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자 딴살림을 차려 버렸다. 우상을 용인했다. 가나안을 수용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초한 선택의 결과를 그대로 취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심판 선고를 듣고 보김에서 대성통곡한다. 축복의 땅, 안식의 땅, 번영의 땅 가나안이 슬픔과 통곡의 땅이 된다. 그 자체로 안전한 땅이 있을까? 어떤 곳도 없다. 안식과 기쁨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로부터만 나온다. 가나안은 가능성의 땅이다. 선택의 땅이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지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이중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하나님의 위대한 정복 역사를 경험한 세대와 그다음 세대가 달랐다. 여호수아가 죽고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여호와와 그분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출현한다. 땅은 전수되었으나 신앙은 계승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전수하고 계승해 주어야 할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 오늘 우리는 몸부림치고 있을까?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역사를 기억하던 사람들의 죽음은,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의 행적도 모르는 새로운 세대를 낳았다. 다음 세대는 자신들이 사는 땅이 자격 없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유도 희미해졌다. 다음 세대가 전혀 다른 세대가 되고 말았다.
-여호수아를 알았던 세대는 통곡은 무성한데, 하나님을 붙잡지 않는 땅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은 무성한데, 말씀대로 살아 내는 삶은 없는 자세를 물려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은 물려주었지만, 살아 내는 삶은 공유하지 못했다. 자신들도 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함께한 경험이 공유되지 않고 지식의 말만 무성한 계승은 전혀 다른 세대를 낳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맞은 위기의 진정한 핵심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기존 세대, 이들은 부모의 신앙을 보고 들으며 자라 왔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 아니라 경험의 지식, 정서의 지식을 포함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마음과 뜻과 정성”이 모두 버무려진 “삶의 경험”에서 오는 지식이다.
-다른 세대의 출현은 기록이 전수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땅이 전수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수되지 않아서 출현한다. 복음을 심으면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아는 세대가 하나님을 심지 않았으니, 전혀 다른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사실 나도 부모님에게는 다른 세대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정말 다른 세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부모님에게 내가 다른 세대이듯, 나의 자녀도 이미 다른 세대일 수밖에 없다. 삶의 철학이나 가치, 태도는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중심은 다르면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큼은 다른 세대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그래서 가족이 함께 공유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공통된 경험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기록된 말씀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정 예배로 자연스럽게 말씀을 읽고 묵상을 나누는 시간을 티타임과 곁들여 갖거나, 한창 아이들을 키울 때 잠재우기 전에 기도해 주거나, 함께 교회에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지금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공통 경험의 장”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일을 잘 지키는 일을 아이들과 함께 꿋꿋이 감당해 보는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라면 부모가 삶으로 보여 주고, 그 현장에 아이들과 함께하면 된다. 함께 경험한 신앙의 추억이 “다른 세대”가 되지 않게 한다.
*”보김(우는 자들)”은 나의 세대에서 멈춰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여 “보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모 세대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사사 시대의 특징은 “보김”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는 “보김의 세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늘은 보김이었더라도 내일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함께하시며 앞장서시며” 광야 길을 인도하셨던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김”의 세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호세아 선지자가 외쳤던 말씀에 순종의 걸음을 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끝이 났고, 출애굽 2세대는 가나안 정복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지만 그들도 역시 조상의 길로 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세대”였다는 것이다. 홍해, 광야의 메추라기와 만나, 시내 산 언약식,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공통의 체험에서 오는 일체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없는(여호와도,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은 후의 일이었다.
이처럼 본문은 1~5절의 보김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질책하는 내용을 전한다. 이어 6~10절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죽음,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보고한다.
1. 통곡의 땅(1~5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몇 가지 표현으로 불렸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등이다. 그런데 그 땅에 큰 울음소리가 터졌다. 이제껏 승리의 환호성이 더 많이 울려 퍼지던 백성에게서 깊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다(1절). 길갈은 여호수아 세대가 요단 강을 건넌 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열두 돌기둥을 세운 장소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자녀들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있는 성읍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었다. 성막도 가나안 땅에서 처음 세워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상기시키시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온 힘을 쏟아부어 정복 전쟁에 임하지 않았다. 적당히 현실적인 여건과 타협하며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한 순종으로 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남김없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 하셨지만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길갈에서 올려 보내신 사자를 통해 이런 불순종을 꾸짖으신다.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했던, 여호수아가 이끌던 시대를 회상하게 하신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던 것”(6~7절)을 돌아보게 하신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배신은 순식간이었다. 이에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벧엘)으로 올라와 이렇게 외쳤다.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그들은 결국 너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들은 너희에게,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도록 옭아매는 올무가 될 것이다.”(새번역_3절) 이에 백성이 큰 소리로 울었다! 언뜻 보기에는 진실한 회개의 모습인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진실한 회개에는 몇 가지 증표가 따른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전인격적인 변화의 표현이 나타난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격한 표현에서 멈추지 않는다. 분명한 변화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지 큰 소리로 울기만 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와 기도의 진정성은 반드시 그 후의 삶에서 드러난다. 기도와 예배 후의 모습에서 변화된 행동을 찾아볼 수 없고, 통곡 후에 의지에 찬 변화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보김(우는 자들)”일 뿐이다. “보김”은 회복이 완성된 곳이 아니다. 회복의 시작이어야 했다.
2.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회상(6~10절)
이 단락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여호수아 24:28~31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각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였고, 각 지파는 분배받은 기업으로 돌아가 그곳을 차지하는 전쟁을 수행한다.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그 후 여호수아와 함께한 1세대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큰일, 즉 요단 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한 일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한 전투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의 종으로 존경받던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는다. 본문은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종’으로 호칭하는데, 이는 그 이전에는 오직 모세에게만 붙여졌던 최고의 명예를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즉, 여호수아는 죽은 후에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여호수아가 모세처럼 여호와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는 호칭이었다.
여호수아는 죽은 후 그의 기업인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 헤레스’, 혹은 ‘딤낫 세라’로 불리는 곳에 묻힌다. 이 성읍은 그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자신의 성읍으로 선택하여 받은 곳이었다. 이런 모습을 통해, 그가 비록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왕처럼 이스라엘 땅 전체를 자기 소유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과 동일하게 자기 몫을 받는 데 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실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고, 그와 함께한 사람들도 죽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세대가 죽은 후, 뒤를 이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른 세대’였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7절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본 자들’이라는 표현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3. 다음 세대가 아니라 다른 세대(10절)
“보김(우는 자들)”의 땅이 되어 버릴 원인을, 여호수아 세대의 모습을 회상하게 하시면서 알려 주신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장로들(그 세대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 일어난 세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대였다. “……그들이 죽은 뒤에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새번역_10절)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아 주신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새로운 세대가 여호와와 그분이 하신 일을 알지 못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살필 수 있다. 첫째, 선조들이 다음 세대에게 여호와에 대해 제대로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다음 세대를 모아 놓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언급하면서, 새로운 세대와 언약을 갱신하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대대로 자손에게 잘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부모 세대에게 있다. 하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이런 교육은 점점 퇴색하기 마련이고, 그 결과 자식 세대는 하나님을 잘 모르게 될 수 있다. 둘째, 각 세대는 전해 들은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자식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식은 있어도 하나님을 삶 속에서 체험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신앙은 지식으로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각 세대와 각 개인이 하나님을 체험할 때 형성되기에 세대마다 새로운 하나님 체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던 이전 세대와 달리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이스라엘의 배교를 예고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어김없이 주셨다. 그렇게 받은 땅을 이스라엘 백성도 어김없이 그들의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려주지 못했다.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이다.
*신앙을 물려주지 못한(않은) 채 땅만 물려준 그들의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백성과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이 다른 세대가 물려받은 것은 그저 땅뿐이었다. 출애굽의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는 물려받지 못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에게,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는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기본 선택이었다. 여호수아 세대는 이 땅의 풍요함을 물려주기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물려주었어야 했다.
*결국 땅(물질)만 물려주면 안 된다. 부모와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공통된 경험은, 우리 자녀 세대가 우리와 다른 세대가 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과 세 절기, 곧 유월절(무교절)과 맥추절(오순절)과 수장절(초막절)을 모든 이스라엘이 지키라 하셨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앙 정서를 갖게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자녀와 함께 이를 잘 지키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기도의 자리를 함께하고, 찬양의 자리에서 함께 목청껏 마음을 다해 찬양하는지, 가정에서 혹은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이와 같은 심정으로 함께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미 한국 교회 안에서 다음 세대가 모이는 주일학교의 70퍼센트가 넘게 사라졌다는 보고가 절망하게 한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귀한 신앙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부터가, 다음 세대를 세우는 기초를 쌓는 일이다. 부모가 들려주는 하나님 이야기가 가랑비에 옷 젖듯 마음에 스며들어 있어야 “다음 세대”가 된다.
*모세의 세대가 여호수아의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광야”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함께 만나고 누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오롯이 그 세대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묶어 주었다. 하지만 여호수아 세대는 그토록 소망하던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은혜가 성취되었음에도, 여호수아를 알고 따르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죽자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다.
나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나, 이스라엘은 변절하고 만다(1~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고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지만, 이스라엘은 약속을 어긴 채 가나안 민족을 용납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주민이 도리어 그들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그 사랑은 우리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하나님만 사랑하고 있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서도 가나안 주민과 또 다른 언약을 맺는다. 가나안 주민을 쫓아내지 않고 우상의 단도 헐지 않는다. 그들을 노역자로 삼아 함께 사는 길을 택한다(2~3절). 공존을 도모한 평화로운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불순종이요 그릇된 타협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것이라도 언제든 득이 아니라 독이 되고, 친구가 아니라 원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의 실천보다 실용을 택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선고되자, 이스라엘 자손은 소리 높여 운다(4~5절). 안식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통곡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그 자체로 안전하고 기쁨 가득한 땅은 없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간절히 요청하고 실현하는 곳에 안식과 평강과 희락이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잘못을 정죄하시고 심판을 선고하셨다. 최후통첩이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셨다. 영원히 그 언약을 지킬 태세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자 딴살림을 차려 버렸다. 우상을 용인했다. 가나안을 수용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초한 선택의 결과를 그대로 취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심판 선고를 듣고 보김에서 대성통곡한다. 축복의 땅, 안식의 땅, 번영의 땅 가나안이 슬픔과 통곡의 땅이 된다. 그 자체로 안전한 땅이 있을까? 어떤 곳도 없다. 안식과 기쁨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로부터만 나온다. 가나안은 가능성의 땅이다. 선택의 땅이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지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이중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하나님의 위대한 정복 역사를 경험한 세대와 그다음 세대가 달랐다. 여호수아가 죽고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여호와와 그분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출현한다. 땅은 전수되었으나 신앙은 계승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전수하고 계승해 주어야 할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 오늘 우리는 몸부림치고 있을까?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역사를 기억하던 사람들의 죽음은,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의 행적도 모르는 새로운 세대를 낳았다. 다음 세대는 자신들이 사는 땅이 자격 없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유도 희미해졌다. 다음 세대가 전혀 다른 세대가 되고 말았다.
-여호수아를 알았던 세대는 통곡은 무성한데, 하나님을 붙잡지 않는 땅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은 무성한데, 말씀대로 살아 내는 삶은 없는 자세를 물려주고 말았다. 종교적인 형식은 물려주었지만, 살아 내는 삶은 공유하지 못했다. 자신들도 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함께한 경험이 공유되지 않고 지식의 말만 무성한 계승은 전혀 다른 세대를 낳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맞은 위기의 진정한 핵심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기존 세대, 이들은 부모의 신앙을 보고 들으며 자라 왔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 아니라 경험의 지식, 정서의 지식을 포함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마음과 뜻과 정성”이 모두 버무려진 “삶의 경험”에서 오는 지식이다.
-다른 세대의 출현은 기록이 전수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땅이 전수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수되지 않아서 출현한다. 복음을 심으면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아는 세대가 하나님을 심지 않았으니, 전혀 다른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사실 나도 부모님에게는 다른 세대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정말 다른 세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부모님에게 내가 다른 세대이듯, 나의 자녀도 이미 다른 세대일 수밖에 없다. 삶의 철학이나 가치, 태도는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중심은 다르면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큼은 다른 세대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그래서 가족이 함께 공유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공통된 경험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기록된 말씀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정 예배로 자연스럽게 말씀을 읽고 묵상을 나누는 시간을 티타임과 곁들여 갖거나, 한창 아이들을 키울 때 잠재우기 전에 기도해 주거나, 함께 교회에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지금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공통 경험의 장”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일을 잘 지키는 일을 아이들과 함께 꿋꿋이 감당해 보는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라면 부모가 삶으로 보여 주고, 그 현장에 아이들과 함께하면 된다. 함께 경험한 신앙의 추억이 “다른 세대”가 되지 않게 한다.
*”보김(우는 자들)”은 나의 세대에서 멈춰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여 “보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모 세대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사사 시대의 특징은 “보김”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는 “보김의 세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늘은 보김이었더라도 내일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함께하시며 앞장서시며” 광야 길을 인도하셨던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김”의 세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호세아 선지자가 외쳤던 말씀에 순종의 걸음을 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정복과 불순종의 결과 [이사야 1:22-36]
지리적으로 보면,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남부 지역 정복 보고에 이어 북부 지역의 보고가 이어진다. 이들 지역의 전쟁 보고는 암울하다. 요셉 가문(므낫세, 에브라임 지파)의 불완전한 정복에서부터(22~29절) 스불론, 아셀, 납달리 지파의 정복 실패가 이어진다(30~33절). 급기야 단 지파는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하고 아모리 족속에게 산지로 쫓겨나고 만다(34~36절).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을까?
1. 요셉 가문(므낫세, 에브라임 지파)의 성공 속 실패(22~26절)
요셉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이 벧엘을 치러 올라갈 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22절)라고 기록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가나안 북부 지역에서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처음에 거둔 벧엘의 승리(22~26절)는 전투 전 정탐 과정에서, 성읍에서 나온 한 사람의 이기적인 배신으로 가능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목숨을 연명한 그가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벧엘의 본래 이름인 루스로 명명함으로써, 잠재된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아브라함은 벧엘에서 처음으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3:3~4). 야곱은 이곳에서 꿈을 꾸며 여호와의 계시를 받았다(창 28:10~19, 31:13). 가나안 정복 때에는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점령한 후 벧엘을 정복하였다(수 12:16). 이처럼 역사적인 성읍 벧엘을 점령할 때 요셉 가문이 보인 모습은 의외다.
요셉 가문의 벧엘 정복 기사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라고 했는데, 정탐을 먼저 실시한다. 마치 여리고성 정복처럼 작전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것 같지만,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략을 세우고 실행해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요셉 가문의 전략과 실행에는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나도 요셉 가문과 다를 바 없다.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걸음에 하나님을 의지함이 없는 것이다. “정찰병들이 그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붙들고 말하였다. ‘성읍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새번역_24절)
성읍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디인지 알려 주면 “선대하리라”(자비를 행하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에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노골적으로 행한다. 신명기 7:2을 통해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그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라고 명령하셨음에도, 요셉 가문은 벧엘 사람과 약속을 맺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가나안 전쟁의 큰 전투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승리했었다. 그런데 이후 분배받은 땅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망각한 채 전쟁을 치러 나간 것이다.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점점 하나님 없이 전투를 치러 가고 있었다.
요셉 가문의 실패는 “불순종의 실패”였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온전하게 지켜 나가기 위해 힘을 쏟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실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전한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닫는다.
2. 북쪽 지파들의 점령 실패: 쫓아내지 않았다 vs 쫓아내지 못했다(27~36절)
므낫세(27~28절), 에브라임과 스불론(29~30절), 아셀과 납달리(31~33절), 단(34~36절) 지파의 가나안 땅 정복 실패 서사가 이어진다. 여호수아 23:13은 이미 사사 시대로 접어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이 “올무와 덫이 되고 채찍이 되며, 눈에 가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사기 2:3에서 동일한 말씀이 반복되고, 본문 29, 30, 32절에서는 가나안 족속이 게셀과 기드론과 나할롤에서 에브라임과 스불론과 아셀 지파 가운데 거주하였다고 기록한다. 그곳에서 가나안의 우상 문화가 이스라엘에 스며들었다.
“쫓아내지 못하였다”(27, 29, 30, 31, 32, 33절)와 “쫓아내지 않았다”(28절)라는 표현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요셉 가문을 비롯하여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는다. 이로 인한 이들의 실패를 “쫓아내지 못하였다”로 표현한다.
27절과 29절을 보면,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힘이 부족하여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이어지는 28절과 30절은, 이스라엘이 강성해져서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게 “노역”을 시키기 위해 “쫓아내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들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이유를, 28, 30, 33, 35절에서는 그들이 “노역”을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유와 노동력 확보를 위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즉, 경제적인 이득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맞바꾼 것이다. 자신들의 편리함과 이득을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너무도 쉽게 저버리고 만 것이다.
그랬더니 도리어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나 산지로 밀리게 되었다(34절). 아모리 족속은 작심하여 단 지파를 산지에 고립시켜 버렸다. 이후에는 요셉의 가문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노역”을 시키며 가나안 족속과 여전히 그 땅에 함께 거하였다.
문제는 이것이다. 단 지파는 힘이 약하여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 산지에서 위기의 삶을 살았지만, 요셉의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은 힘이 강해졌을 때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게 노역을 시키며 쫓아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복 전쟁 직후 삶의 터전을 세우고 재건하는 일에는 막대한 경제력이 필요했을 터이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 둔 이들에 대한 목적은 분명했다. “노역”은 종전 후 재건 사업에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기에, 각 지파들은 정복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이 유혹을 쉽게 떨쳐 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가나안 족속들을 활용하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현실을 이겨 내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내를 포기하였다. 나의 삶에도 이와 같은 유혹이 왜 없겠는가! 좀 더 쉬운 길을 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에 눈감고 싶은 유혹은 수시로 일어난다. 세상 이치로 판단하면 고민될 것도 없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민해야 한다.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뜻에 부응하며 살아내야 한다. 그 길이 탄탄하게 서는 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좀 더 쉬운 길을 선택했다. 가나안 족속들의 노동력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정착 초기에 모든 것이 낯선 가나안의 기후와 풍토, 환경 등에 적응하기 위해 가나안 족속들의 노동력과 경험이 당연히 필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달프더라도 지켜야 했던 “하나님의 명령”까지 현실적인 이유로 외면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가치와 비중이 삶에서 약화되자,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붙들어 주던 경계선은 쉽게 무너져 갔다.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남겨 두는 행태가 급속히 퍼져 버린다. 그리고 결국 어처구니없게도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분배받은 해안 지대의 땅을 빼앗긴 채 산지로 밀려나 버렸다. 이 기막힌 단 지파의 이야기가, 사사기의 실상을 보여 주는 17~18장 제사장직 매매 사건의 핵심 배경이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처음 어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한 번 어기기 시작한 명령은 이제 그 권위를 잃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난국에 빠지게 된다.
나는?
-본문에서 유일하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는 표현이 나온다(22절). 이것은 다른 지파에게는 함께하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지파는 하나님의 동행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요셉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의 승리는 전술과 전략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라는 것이다. 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상수'(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한 값을 가지는 수, 굳어진 값)일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친히 열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셉 지파가 그렇게 벧엘을 정복한다. 정탐 후 내부 협력자를 포섭하여 성읍의 입구를 알아내고, 들어가서 차지한다(22~26절). 여호수아의 여리고 정복과 비슷한 서사다. 그 협력자와 가족은 여리고의 라합 가족처럼 목숨을 구하고 ‘루스’라는 성읍을 건축하여 살아간다. 요셉 가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였을 뿐 아니라 탁월한 전략과 용맹으로 승리를 얻어 낸 것이다. 하지만 승리의 이면에, 그 협력자 가족이 라합 가족처럼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가나안적인 삶을 계속 살게 해 준 것이 탐탁지 않다. ‘타협’이었던 것이다. 요셉 가문이 승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은 ‘타협’의 함정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좀처럼 가나안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민족을 다 쫓아내어 약속하신 기업을 얻기에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 없는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가나안 민족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장 큰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도 이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강성해진 후에도 쫓아내지 않고 공존하면서 그들을 이용만 할 뿐이었다. ‘쫓아내지 못한’ 전쟁에서 ‘쫓아내지 않은’ 환경에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27~33절). 자기들을 위해 효과적으로 ‘부리는 것’이 힘들여 쫓아내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기들에게 힘이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사기는 결국 이스라엘이 용납한 세력에게 이스라엘이 종속되는 역사다. 타락은 아주 작은 타협에서 시작됨을 간과하면 안 된다.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과 아셀, 납달리 지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언급 자체가 없다. 하나님이 지레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거절한 것이다. 이들 지파는 상대가 너무 강해서 포기했고, 그들을 이용하고 싶어서 포기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현실적인 이유와 실용적인 목적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충성하지 않을수록 승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심지어 아모리 족속은 단 지파를 산속으로 몰아넣고 골짜기로 내려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34~36절). 비록 단은 작은 지파였지만, 문제는 전력의 열세가 아니라 믿음의 부재다.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 속에 단 지파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강렬한 세속주의와 다원주의 사회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수하는 교회를 배타적이고 외골수인 집단으로 몰아붙이며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이런 시대 상황이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도전은,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전에는 쫓아낼 수 있어도 쫓아내지 않았지만,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을 쫓아낼 수 없어서 아예 산지로 내몰린 채 내려오지 못했다. 단 지파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약해서였다. 지파의 규모만큼이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작았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도 산지로 쫓겨 옴짝달싹 못하는 초라한 분이 되실 수밖에 없었다. 나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초라해지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그때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현실에 갇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쫓아내지 못하는 부족한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감당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쫓아내지 않으려는 현실적인 유혹 앞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아무리 급하게 여겨지고 현실적으로 필요하게 여겨지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면서까지 당장의 필요에 급급하다 보면 결국 그 믿음은 무너진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현실 타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내 전략과 실행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맹신해서도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나의 힘과 능력에 함몰되면, 그것으로 역시 망한다. 당장은 달콤한 성취의 짜릿함이 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니 경계해야 한다.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염려하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잠시 태풍을 만난 것이고, 홍수를 만난 것이다. 숨을 고르며 안전하게 피신하여 이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된다. 지금 여기 이곳은 본향을 향해 걷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빠진 “노역”의 유혹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역”을 당했었음을 망각한 비윤리적인 처사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전후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 일상에서 자신들의 노동력을 대체해 줄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야 했고, 가나안 족속과 어떤 약속이나 관계도 맺지 말라고 이미 명령하신 그 말씀을 철저히 지켰어야 했다.
-자신들의 힘과 전략으로 쟁취한 승리의 독이 영적 지각을 마비시켜 버렸다.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승리, 이런 형통은 복이 아니라 저주다.
1. 요셉 가문(므낫세, 에브라임 지파)의 성공 속 실패(22~26절)
요셉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이 벧엘을 치러 올라갈 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22절)라고 기록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가나안 북부 지역에서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처음에 거둔 벧엘의 승리(22~26절)는 전투 전 정탐 과정에서, 성읍에서 나온 한 사람의 이기적인 배신으로 가능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목숨을 연명한 그가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벧엘의 본래 이름인 루스로 명명함으로써, 잠재된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아브라함은 벧엘에서 처음으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3:3~4). 야곱은 이곳에서 꿈을 꾸며 여호와의 계시를 받았다(창 28:10~19, 31:13). 가나안 정복 때에는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점령한 후 벧엘을 정복하였다(수 12:16). 이처럼 역사적인 성읍 벧엘을 점령할 때 요셉 가문이 보인 모습은 의외다.
요셉 가문의 벧엘 정복 기사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라고 했는데, 정탐을 먼저 실시한다. 마치 여리고성 정복처럼 작전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것 같지만,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략을 세우고 실행해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요셉 가문의 전략과 실행에는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나도 요셉 가문과 다를 바 없다.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걸음에 하나님을 의지함이 없는 것이다. “정찰병들이 그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붙들고 말하였다. ‘성읍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새번역_24절)
성읍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디인지 알려 주면 “선대하리라”(자비를 행하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에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노골적으로 행한다. 신명기 7:2을 통해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그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라고 명령하셨음에도, 요셉 가문은 벧엘 사람과 약속을 맺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가나안 전쟁의 큰 전투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승리했었다. 그런데 이후 분배받은 땅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망각한 채 전쟁을 치러 나간 것이다.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점점 하나님 없이 전투를 치러 가고 있었다.
요셉 가문의 실패는 “불순종의 실패”였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온전하게 지켜 나가기 위해 힘을 쏟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실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전한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닫는다.
2. 북쪽 지파들의 점령 실패: 쫓아내지 않았다 vs 쫓아내지 못했다(27~36절)
므낫세(27~28절), 에브라임과 스불론(29~30절), 아셀과 납달리(31~33절), 단(34~36절) 지파의 가나안 땅 정복 실패 서사가 이어진다. 여호수아 23:13은 이미 사사 시대로 접어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이 “올무와 덫이 되고 채찍이 되며, 눈에 가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사기 2:3에서 동일한 말씀이 반복되고, 본문 29, 30, 32절에서는 가나안 족속이 게셀과 기드론과 나할롤에서 에브라임과 스불론과 아셀 지파 가운데 거주하였다고 기록한다. 그곳에서 가나안의 우상 문화가 이스라엘에 스며들었다.
“쫓아내지 못하였다”(27, 29, 30, 31, 32, 33절)와 “쫓아내지 않았다”(28절)라는 표현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요셉 가문을 비롯하여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는다. 이로 인한 이들의 실패를 “쫓아내지 못하였다”로 표현한다.
27절과 29절을 보면,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힘이 부족하여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이어지는 28절과 30절은, 이스라엘이 강성해져서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게 “노역”을 시키기 위해 “쫓아내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들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이유를, 28, 30, 33, 35절에서는 그들이 “노역”을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유와 노동력 확보를 위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즉, 경제적인 이득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맞바꾼 것이다. 자신들의 편리함과 이득을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너무도 쉽게 저버리고 만 것이다.
그랬더니 도리어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나 산지로 밀리게 되었다(34절). 아모리 족속은 작심하여 단 지파를 산지에 고립시켜 버렸다. 이후에는 요셉의 가문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노역”을 시키며 가나안 족속과 여전히 그 땅에 함께 거하였다.
문제는 이것이다. 단 지파는 힘이 약하여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 산지에서 위기의 삶을 살았지만, 요셉의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은 힘이 강해졌을 때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게 노역을 시키며 쫓아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복 전쟁 직후 삶의 터전을 세우고 재건하는 일에는 막대한 경제력이 필요했을 터이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 둔 이들에 대한 목적은 분명했다. “노역”은 종전 후 재건 사업에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기에, 각 지파들은 정복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이 유혹을 쉽게 떨쳐 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가나안 족속들을 활용하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현실을 이겨 내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내를 포기하였다. 나의 삶에도 이와 같은 유혹이 왜 없겠는가! 좀 더 쉬운 길을 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에 눈감고 싶은 유혹은 수시로 일어난다. 세상 이치로 판단하면 고민될 것도 없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민해야 한다.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뜻에 부응하며 살아내야 한다. 그 길이 탄탄하게 서는 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좀 더 쉬운 길을 선택했다. 가나안 족속들의 노동력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정착 초기에 모든 것이 낯선 가나안의 기후와 풍토, 환경 등에 적응하기 위해 가나안 족속들의 노동력과 경험이 당연히 필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달프더라도 지켜야 했던 “하나님의 명령”까지 현실적인 이유로 외면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가치와 비중이 삶에서 약화되자,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붙들어 주던 경계선은 쉽게 무너져 갔다.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남겨 두는 행태가 급속히 퍼져 버린다. 그리고 결국 어처구니없게도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분배받은 해안 지대의 땅을 빼앗긴 채 산지로 밀려나 버렸다. 이 기막힌 단 지파의 이야기가, 사사기의 실상을 보여 주는 17~18장 제사장직 매매 사건의 핵심 배경이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처음 어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한 번 어기기 시작한 명령은 이제 그 권위를 잃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난국에 빠지게 된다.
나는?
-본문에서 유일하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는 표현이 나온다(22절). 이것은 다른 지파에게는 함께하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지파는 하나님의 동행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요셉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의 승리는 전술과 전략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라는 것이다. 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상수'(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한 값을 가지는 수, 굳어진 값)일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친히 열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셉 지파가 그렇게 벧엘을 정복한다. 정탐 후 내부 협력자를 포섭하여 성읍의 입구를 알아내고, 들어가서 차지한다(22~26절). 여호수아의 여리고 정복과 비슷한 서사다. 그 협력자와 가족은 여리고의 라합 가족처럼 목숨을 구하고 ‘루스’라는 성읍을 건축하여 살아간다. 요셉 가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였을 뿐 아니라 탁월한 전략과 용맹으로 승리를 얻어 낸 것이다. 하지만 승리의 이면에, 그 협력자 가족이 라합 가족처럼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가나안적인 삶을 계속 살게 해 준 것이 탐탁지 않다. ‘타협’이었던 것이다. 요셉 가문이 승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은 ‘타협’의 함정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좀처럼 가나안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민족을 다 쫓아내어 약속하신 기업을 얻기에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 없는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가나안 민족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장 큰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도 이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강성해진 후에도 쫓아내지 않고 공존하면서 그들을 이용만 할 뿐이었다. ‘쫓아내지 못한’ 전쟁에서 ‘쫓아내지 않은’ 환경에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27~33절). 자기들을 위해 효과적으로 ‘부리는 것’이 힘들여 쫓아내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기들에게 힘이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사기는 결국 이스라엘이 용납한 세력에게 이스라엘이 종속되는 역사다. 타락은 아주 작은 타협에서 시작됨을 간과하면 안 된다.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과 아셀, 납달리 지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언급 자체가 없다. 하나님이 지레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거절한 것이다. 이들 지파는 상대가 너무 강해서 포기했고, 그들을 이용하고 싶어서 포기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현실적인 이유와 실용적인 목적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충성하지 않을수록 승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심지어 아모리 족속은 단 지파를 산속으로 몰아넣고 골짜기로 내려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34~36절). 비록 단은 작은 지파였지만, 문제는 전력의 열세가 아니라 믿음의 부재다.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 속에 단 지파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강렬한 세속주의와 다원주의 사회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수하는 교회를 배타적이고 외골수인 집단으로 몰아붙이며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이런 시대 상황이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도전은,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전에는 쫓아낼 수 있어도 쫓아내지 않았지만,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을 쫓아낼 수 없어서 아예 산지로 내몰린 채 내려오지 못했다. 단 지파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약해서였다. 지파의 규모만큼이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작았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도 산지로 쫓겨 옴짝달싹 못하는 초라한 분이 되실 수밖에 없었다. 나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초라해지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그때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현실에 갇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쫓아내지 못하는 부족한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감당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쫓아내지 않으려는 현실적인 유혹 앞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아무리 급하게 여겨지고 현실적으로 필요하게 여겨지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면서까지 당장의 필요에 급급하다 보면 결국 그 믿음은 무너진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현실 타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내 전략과 실행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맹신해서도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나의 힘과 능력에 함몰되면, 그것으로 역시 망한다. 당장은 달콤한 성취의 짜릿함이 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니 경계해야 한다.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염려하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잠시 태풍을 만난 것이고, 홍수를 만난 것이다. 숨을 고르며 안전하게 피신하여 이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된다. 지금 여기 이곳은 본향을 향해 걷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빠진 “노역”의 유혹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역”을 당했었음을 망각한 비윤리적인 처사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전후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 일상에서 자신들의 노동력을 대체해 줄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야 했고, 가나안 족속과 어떤 약속이나 관계도 맺지 말라고 이미 명령하신 그 말씀을 철저히 지켰어야 했다.
-자신들의 힘과 전략으로 쟁취한 승리의 독이 영적 지각을 마비시켜 버렸다.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승리, 이런 형통은 복이 아니라 저주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갈렙과 옷니엘의 승리와 유다 지파의 한계 [사사기 1:11-21]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따라 산지로 올라간 유다 지파가 선봉에 서서, 여호수아 사후 남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함께 싸워 쫓아낸 가나안 지역의 거점들을 중심으로 더욱 맹렬하게 약속의 땅을 공고히 다져야 했다. 또한 아직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지역을 정복하여 기업의 땅을 넓혀야 했다. 이 과정에서 본문은 갈렙과 옷니엘의 탁월한 활약상을 조명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여든다섯 살의 갈렙에게, 그 노령에도 불구하고 헤브론의 아낙 자손(거인족,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_10절)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이후 그의 사위가 된 옷니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워 드빌 땅(기럇 세벨)을 차지했다. 문제는 유다지파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데 있다. 골짜기(평원 지대)는 ‘철병거’가 있어 차지하지 못했다. 이는 철병거가 올라오지 못하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의미다. 정복 전쟁에 있어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겠지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2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그 약속을 믿고 싸운 이들”이 받는 복이었다. 이는 끝까지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계신”(19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채,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불안한 공존을 시작해야 했다.
참고로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이스라엘의 최남단 지역이었다(수 15:1). 이 지역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주로 머물렀던 곳으로, 예루살렘 남쪽과 헤브론, 브엘세바 등이 포함된 지역이었다. (*짐작건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까지 이어지는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지역의 특징은 “척박함” 그 자체였다. 최남단 브엘세바의 경우 연 강수량이 불과 120~250mm였다. 장차 다윗 왕이 나올 지파인데, 그들이 거하는 땅은 이토록 척박하기만 했다. 왜일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왕이 나올 지파이기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환경(높은 산지와 광야의 땅)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전적으로 그분의 도우심을 바랄 수밖에 없는 곳, 인간 능력의 한계가 분명한 지역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땅에서, 장차 이스라엘에서 오직 하나님만 전심으로 의지한 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의 신앙이 뜨겁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는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았다! 힘든 싸움은 애초에 회피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운 것도,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도 이들에게 동시에 존재했다. 이들이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병거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철병거가 더 크게 보였다는 점이다. 40년 전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꾼 사건에서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직면했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창 정복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사 시대를 뒤덮을 불안한 요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1. 승전의 연속, 그러나(11~15절)
유다 지파의 계속되는 승전보 소식 와중에 하나님의 시선이 갈렙 집안으로 모아진다. 본문 11~15절은 여호수아 15:13~19절과 거의 일치한다. 지파별로 각개 전투 식으로 진행되는 정복 전쟁의 와중에, 가장 큰 난관에 직면하게 된 아낙 자손들(거인족들)이 살고 있었던 헤브론과 그 일대, 특히 “드빌”(신탁, 성소), 본래 이름은 “기럇 세벨”(키르야트 세페르_책의 성읍)을 점령하는 이야기이다.
갈렙은 아낙 자손들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성읍이었던 ‘드빌’을 점령하기 위해 자신의 딸 ‘악사’를 내걸고 전투 사기를 끌어올린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갈렙의 마음은 절박하고 확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점이 있다. 2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그의(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 주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4장에서 아무도 올라가려 하지 않던 “아낙 자손”이 거하던 헤브론 지역을 두고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라고 고백하였던 온전한 믿음에, 균열이 간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확신에 차서 시작한 일이 때로 난관에 부딪칠 때가 있다. 헤브론 지역을 점령해 가며 승승장구하던 갈렙에게 “드빌”의 “강력하고 견고한 성읍”은 난관 중의 난관이었다. 아낙 자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삶의 중심지였던 헤브론을 어처구니없게 잃었고, 자신들이 자랑하던 용사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가 죽은 마당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성읍이었다. 저항이 강력했을 것이고, 갈렙은 이들의 완강한 항전에 고전했을 것이다.
난관에 직면할 때 “여호와께 여쭈어”(1절)야 했지만, 갈렙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딸을 걸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걸고 나아갔어야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행동을 탓하지 않으신다. 그렇게라도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는 마음에 긍휼을 베푸신다. 그리고 훗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가 될 옷니엘을 등장시키신다.
옷니엘은 어느 날 갑자기 사사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신뢰하였기에, 가장 강력한 거인 족속들의 최후 항전지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하여 그 땅을 쟁취한 믿음의 용사였다. 그는 사촌 악사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나아갔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을 의지하려는 믿음의 용맹함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지에 몰린 아낙 자손들의 최후 항전을 온몸으로 맞서는 기개가 어찌 가능했겠는가! 그렇다면 갈렙의 드빌(기럇 세벨) 정복기는, 훗날 사사로 세움받는 옷니엘을 등장시키는 무대가 맞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 않는다. 구원받고 바로 찍어내는 제품처럼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시간을 거치면서 믿음의 도전과 실패, 포기하지 않는 응전이 겹겹이 쌓여 서서히 빚어지는 것이다. 옷니엘은 무수한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전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을 깨우치고, 두려움을 넘어선 믿음의 용기와 도전을 배워 낸 사람이다.
나의 믿음의 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정 없는 결과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다져지고 다져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단련된 믿음의 기개는 철병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의 견고함에 짓눌리지 않는다!
2. 갈렙, 옷니엘(악사), 겐 족속…
이들은 모두 정통 이스라엘 유다 지파의 후손들이 아니다. 갈렙과 옷니엘, 악사는 에서의 후손인 그나스 출신이었고,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미디안 족속 가운데 거하던 사람들이었다. 민수기 10:29~32에서 모세가, 이드로의 방문 이후 함께 미디안으로 돌아가지 말고 함께해 줄 것을 요청하여 잔류하였다.
유다 지파의 순혈 후손들이 유대 평지(골짜기)에서 헤매는 동안, 이방인이었던 이들은 아낙 자손들을 직면하여 용감하게 그들의 땅을 정복해 나갔다. 갈렙의 가족들이 아낙 자손들을 물리쳐 줌으로써, 유다 자손들이 시므온의 후손들과 함께 호르마와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점령해 나갔다.
혈통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여 주심을 믿는 어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백성 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약속된 땅을 주저 없이 쟁취하였다. 하나님은 순혈 혈통의 이스라엘 민족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오직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라면 어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가나안 정복에서부터 실현되고 있었다.
3. 철병거, 예루살렘 성(19~21절)
유다 지파는 산지는 점령하고 평지(골짜기_산과 산 사이)는 점령하지 못한다. “철병거” 때문이었다(19절). 또 베냐민 지파도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21절). 견고한 요새 지형 때문이었다.
갈렙은 아낙 자손(거인 족속)의 거센 도전에도 당당히 승리를 쟁취해 나간 반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신통치 못하다. 특히 유다 지파는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지만” 산지는 정복했으나 골짜기(평원)는 정복하지 못했다. 베냐민 지파는 자신들에게 할당받은 땅 가운데 가장 천혜의 요새인 난공불락의 예루살렘 성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철병거가 있으므로”(19절)라고 정확하게 기록한다. 철병거가 쉽게 기동하지 못하는 산지 지역은 점령했지만, 철병거가 위력을 발휘하는 평원 지역은 차지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철병거”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불순종의 기운이 약하게 돋아나고 있다. 유다 지파의 산지에서의 승리가 불안한 이유다.
또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 지역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해 불안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사기의 저작 시기를 가늠하게 하는 표현인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21절)를 통해, 베냐민 지파의 불안정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땅을 너의 손에 넘겨 주었다”(2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데도, 베냐민은 담대하게 예루살렘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여 주심보다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이 더 크게 보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지리적 조건과 환경이 더 커 보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어찌 유다나 베냐민 지파에게만 국한되겠는가? 나와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 철병거를 크게 보는 위축된 마음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다.
나는?
-우상 숭배자 아도니 베섹에게는 수족이 잘린 채 예루살렘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말로에 처하게 하시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여 전쟁에 나선 옷니엘에게는 가나안의 풍요(땅과 샘)를 선물로 주신다. 이처럼 가나안의 삶은 그 땅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달린 것이다.
-유다 지파 갈렙은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어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이 그곳을 점령하여 악사를 아내로 받는다(11~13절). 하나님 나라의 복은 신뢰하고 용기 있게 순종의 길에 나서는 자들의 몫이다. 갈렙은 단호했다. 이방인 출신이면서도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신뢰했던 그는,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정복 전쟁을 완수한 이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할 만큼 확고했다. 그는 승리를 얻었을 뿐 아니라 옷니엘이라고 하는 믿음의 장부를 사위로 얻게 된다.
-악사는 남편 옷니엘을 설득하여 아버지 갈렙에게 땅을 요구하게 한다. 그리고 악사 역시 아버지께 극진한 경의를 표한 후에(14절) ‘샘’을 요구하여 받아 낸다. 받은 땅은 강수량이 부족한 남방 지역이라 샘물이 꼭 필요했다. 이렇게 용감한 옷니엘과 지혜로운 악사가 받은 ‘땅과 샘’은,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할 때 누릴 수 있는 가나안의 축복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준다. 아버지 갈렙의 넉넉함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넉넉함을 반영한다. 믿음으로, 순종으로 겸손하게 구할 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은 늘 우리 기대 이상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약속대로 모세의 장인 겐 족속의 가나안 정착을 보장하고, 갈렙에게는 헤브론을 기업으로 주었다. 유다 지파는 형제 시므온과 함께 호르마를 정복했고,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까지 점령한다.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동행하셨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승리가 있었다.
-유다는 철병거를 당해 내지 못하여 서쪽 지역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베냐민도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여 함께 거주한다(19~21절).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해변 길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 정복이 쉽지 않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전력’이 아니라 ‘약속'(수 17:18)에 대한 믿음이다. 어려울 수 있으나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전쟁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이스라엘의 순종이었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정복할 수 없고 정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변명과 이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작은 타협이 가져올 심대한 영적 오염에 대해 그들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적 태만이 영적 타락으로 이어지고, 머잖아 국가적 재난으로 귀결될 것이다. 아주 미미한 틈이 붕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유다 지파는 헤브론 지역을 점령하고 모세의 명령을 기억하여 그 땅을 갈렙에게 준다(20절). ‘정복’만이 아니라 땅을 ‘분배’하는 일에서도 순종한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는 철병거와 견고한 장벽이 문제가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새가슴 믿음이 문제다!
-이스라엘의 출발은 순혈주의가 아니었다. 이방인에 대하여 폐쇄된 민족이 아니었다. 갈렙의 활약과 옷니엘의 등장은 폐쇄된 순혈주의 집단에서는 결코 가능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할까? 언제든지 믿음의 용사가 우뚝 설 수 있는 공동체이기를 바란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갈렙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용맹함을 떨치고 있었고, 갈렙의 뒤를 이을 옷니엘이 나타났다. 우리 공동체는 뒤를 이을 다음 세대가 충분한가?
-언제든지 새롭게 공동체로 들어온 이들이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는, 품이 넉넉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기회가 주어지는 개방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이런 어울림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건강하고 역동적으로 만든다.
-불완전한 승리가 이어진다. 완전히 점령해야 할 땅이었지만, 불안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쫓아내지 못한 이들과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온전한 믿음의 영역이어야 할 그 땅에, 석연찮은 불순종으로부터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사사 시대는 가나안 땅 정복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그때부터 이미 그 불안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갈렙과 옷니엘의 완전한 승리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온전히 쫓아내지 못한 승리가 비교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여든다섯 살의 갈렙에게, 그 노령에도 불구하고 헤브론의 아낙 자손(거인족,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_10절)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이후 그의 사위가 된 옷니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워 드빌 땅(기럇 세벨)을 차지했다. 문제는 유다지파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데 있다. 골짜기(평원 지대)는 ‘철병거’가 있어 차지하지 못했다. 이는 철병거가 올라오지 못하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의미다. 정복 전쟁에 있어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겠지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2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그 약속을 믿고 싸운 이들”이 받는 복이었다. 이는 끝까지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계신”(19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채,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불안한 공존을 시작해야 했다.
참고로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이스라엘의 최남단 지역이었다(수 15:1). 이 지역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주로 머물렀던 곳으로, 예루살렘 남쪽과 헤브론, 브엘세바 등이 포함된 지역이었다. (*짐작건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까지 이어지는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지역의 특징은 “척박함” 그 자체였다. 최남단 브엘세바의 경우 연 강수량이 불과 120~250mm였다. 장차 다윗 왕이 나올 지파인데, 그들이 거하는 땅은 이토록 척박하기만 했다. 왜일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왕이 나올 지파이기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환경(높은 산지와 광야의 땅)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전적으로 그분의 도우심을 바랄 수밖에 없는 곳, 인간 능력의 한계가 분명한 지역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땅에서, 장차 이스라엘에서 오직 하나님만 전심으로 의지한 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의 신앙이 뜨겁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는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았다! 힘든 싸움은 애초에 회피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운 것도,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도 이들에게 동시에 존재했다. 이들이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병거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철병거가 더 크게 보였다는 점이다. 40년 전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꾼 사건에서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직면했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창 정복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사 시대를 뒤덮을 불안한 요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1. 승전의 연속, 그러나(11~15절)
유다 지파의 계속되는 승전보 소식 와중에 하나님의 시선이 갈렙 집안으로 모아진다. 본문 11~15절은 여호수아 15:13~19절과 거의 일치한다. 지파별로 각개 전투 식으로 진행되는 정복 전쟁의 와중에, 가장 큰 난관에 직면하게 된 아낙 자손들(거인족들)이 살고 있었던 헤브론과 그 일대, 특히 “드빌”(신탁, 성소), 본래 이름은 “기럇 세벨”(키르야트 세페르_책의 성읍)을 점령하는 이야기이다.
갈렙은 아낙 자손들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성읍이었던 ‘드빌’을 점령하기 위해 자신의 딸 ‘악사’를 내걸고 전투 사기를 끌어올린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갈렙의 마음은 절박하고 확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점이 있다. 2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그의(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 주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4장에서 아무도 올라가려 하지 않던 “아낙 자손”이 거하던 헤브론 지역을 두고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라고 고백하였던 온전한 믿음에, 균열이 간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확신에 차서 시작한 일이 때로 난관에 부딪칠 때가 있다. 헤브론 지역을 점령해 가며 승승장구하던 갈렙에게 “드빌”의 “강력하고 견고한 성읍”은 난관 중의 난관이었다. 아낙 자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삶의 중심지였던 헤브론을 어처구니없게 잃었고, 자신들이 자랑하던 용사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가 죽은 마당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성읍이었다. 저항이 강력했을 것이고, 갈렙은 이들의 완강한 항전에 고전했을 것이다.
난관에 직면할 때 “여호와께 여쭈어”(1절)야 했지만, 갈렙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딸을 걸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걸고 나아갔어야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행동을 탓하지 않으신다. 그렇게라도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는 마음에 긍휼을 베푸신다. 그리고 훗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가 될 옷니엘을 등장시키신다.
옷니엘은 어느 날 갑자기 사사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신뢰하였기에, 가장 강력한 거인 족속들의 최후 항전지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하여 그 땅을 쟁취한 믿음의 용사였다. 그는 사촌 악사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나아갔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을 의지하려는 믿음의 용맹함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지에 몰린 아낙 자손들의 최후 항전을 온몸으로 맞서는 기개가 어찌 가능했겠는가! 그렇다면 갈렙의 드빌(기럇 세벨) 정복기는, 훗날 사사로 세움받는 옷니엘을 등장시키는 무대가 맞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 않는다. 구원받고 바로 찍어내는 제품처럼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시간을 거치면서 믿음의 도전과 실패, 포기하지 않는 응전이 겹겹이 쌓여 서서히 빚어지는 것이다. 옷니엘은 무수한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전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을 깨우치고, 두려움을 넘어선 믿음의 용기와 도전을 배워 낸 사람이다.
나의 믿음의 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정 없는 결과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다져지고 다져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단련된 믿음의 기개는 철병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의 견고함에 짓눌리지 않는다!
2. 갈렙, 옷니엘(악사), 겐 족속…
이들은 모두 정통 이스라엘 유다 지파의 후손들이 아니다. 갈렙과 옷니엘, 악사는 에서의 후손인 그나스 출신이었고,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미디안 족속 가운데 거하던 사람들이었다. 민수기 10:29~32에서 모세가, 이드로의 방문 이후 함께 미디안으로 돌아가지 말고 함께해 줄 것을 요청하여 잔류하였다.
유다 지파의 순혈 후손들이 유대 평지(골짜기)에서 헤매는 동안, 이방인이었던 이들은 아낙 자손들을 직면하여 용감하게 그들의 땅을 정복해 나갔다. 갈렙의 가족들이 아낙 자손들을 물리쳐 줌으로써, 유다 자손들이 시므온의 후손들과 함께 호르마와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점령해 나갔다.
혈통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여 주심을 믿는 어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백성 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약속된 땅을 주저 없이 쟁취하였다. 하나님은 순혈 혈통의 이스라엘 민족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오직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라면 어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가나안 정복에서부터 실현되고 있었다.
3. 철병거, 예루살렘 성(19~21절)
유다 지파는 산지는 점령하고 평지(골짜기_산과 산 사이)는 점령하지 못한다. “철병거” 때문이었다(19절). 또 베냐민 지파도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21절). 견고한 요새 지형 때문이었다.
갈렙은 아낙 자손(거인 족속)의 거센 도전에도 당당히 승리를 쟁취해 나간 반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신통치 못하다. 특히 유다 지파는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지만” 산지는 정복했으나 골짜기(평원)는 정복하지 못했다. 베냐민 지파는 자신들에게 할당받은 땅 가운데 가장 천혜의 요새인 난공불락의 예루살렘 성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철병거가 있으므로”(19절)라고 정확하게 기록한다. 철병거가 쉽게 기동하지 못하는 산지 지역은 점령했지만, 철병거가 위력을 발휘하는 평원 지역은 차지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철병거”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불순종의 기운이 약하게 돋아나고 있다. 유다 지파의 산지에서의 승리가 불안한 이유다.
또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 지역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해 불안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사기의 저작 시기를 가늠하게 하는 표현인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21절)를 통해, 베냐민 지파의 불안정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땅을 너의 손에 넘겨 주었다”(2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데도, 베냐민은 담대하게 예루살렘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여 주심보다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이 더 크게 보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지리적 조건과 환경이 더 커 보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어찌 유다나 베냐민 지파에게만 국한되겠는가? 나와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 철병거를 크게 보는 위축된 마음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다.
나는?
-우상 숭배자 아도니 베섹에게는 수족이 잘린 채 예루살렘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말로에 처하게 하시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여 전쟁에 나선 옷니엘에게는 가나안의 풍요(땅과 샘)를 선물로 주신다. 이처럼 가나안의 삶은 그 땅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달린 것이다.
-유다 지파 갈렙은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어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이 그곳을 점령하여 악사를 아내로 받는다(11~13절). 하나님 나라의 복은 신뢰하고 용기 있게 순종의 길에 나서는 자들의 몫이다. 갈렙은 단호했다. 이방인 출신이면서도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신뢰했던 그는,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정복 전쟁을 완수한 이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할 만큼 확고했다. 그는 승리를 얻었을 뿐 아니라 옷니엘이라고 하는 믿음의 장부를 사위로 얻게 된다.
-악사는 남편 옷니엘을 설득하여 아버지 갈렙에게 땅을 요구하게 한다. 그리고 악사 역시 아버지께 극진한 경의를 표한 후에(14절) ‘샘’을 요구하여 받아 낸다. 받은 땅은 강수량이 부족한 남방 지역이라 샘물이 꼭 필요했다. 이렇게 용감한 옷니엘과 지혜로운 악사가 받은 ‘땅과 샘’은,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할 때 누릴 수 있는 가나안의 축복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준다. 아버지 갈렙의 넉넉함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넉넉함을 반영한다. 믿음으로, 순종으로 겸손하게 구할 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은 늘 우리 기대 이상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약속대로 모세의 장인 겐 족속의 가나안 정착을 보장하고, 갈렙에게는 헤브론을 기업으로 주었다. 유다 지파는 형제 시므온과 함께 호르마를 정복했고,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까지 점령한다.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동행하셨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승리가 있었다.
-유다는 철병거를 당해 내지 못하여 서쪽 지역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베냐민도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여 함께 거주한다(19~21절).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해변 길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 정복이 쉽지 않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전력’이 아니라 ‘약속'(수 17:18)에 대한 믿음이다. 어려울 수 있으나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전쟁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이스라엘의 순종이었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정복할 수 없고 정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변명과 이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작은 타협이 가져올 심대한 영적 오염에 대해 그들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적 태만이 영적 타락으로 이어지고, 머잖아 국가적 재난으로 귀결될 것이다. 아주 미미한 틈이 붕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유다 지파는 헤브론 지역을 점령하고 모세의 명령을 기억하여 그 땅을 갈렙에게 준다(20절). ‘정복’만이 아니라 땅을 ‘분배’하는 일에서도 순종한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는 철병거와 견고한 장벽이 문제가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새가슴 믿음이 문제다!
-이스라엘의 출발은 순혈주의가 아니었다. 이방인에 대하여 폐쇄된 민족이 아니었다. 갈렙의 활약과 옷니엘의 등장은 폐쇄된 순혈주의 집단에서는 결코 가능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할까? 언제든지 믿음의 용사가 우뚝 설 수 있는 공동체이기를 바란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갈렙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용맹함을 떨치고 있었고, 갈렙의 뒤를 이을 옷니엘이 나타났다. 우리 공동체는 뒤를 이을 다음 세대가 충분한가?
-언제든지 새롭게 공동체로 들어온 이들이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는, 품이 넉넉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기회가 주어지는 개방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이런 어울림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건강하고 역동적으로 만든다.
-불완전한 승리가 이어진다. 완전히 점령해야 할 땅이었지만, 불안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쫓아내지 못한 이들과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온전한 믿음의 영역이어야 할 그 땅에, 석연찮은 불순종으로부터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사사 시대는 가나안 땅 정복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그때부터 이미 그 불안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갈렙과 옷니엘의 완전한 승리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온전히 쫓아내지 못한 승리가 비교된다.
매일묵상 ㅣ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누가 올라가리이까? [사사기 1:1-10]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정복 전쟁(수 2~12장)에 임했고, 그 결과로 얻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다(수 13~19장). ‘가나안 정복 시대’로 불리는 이 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삿 1:1) ‘사사 시대’로 전환되어 간다. 본문은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복 전쟁을 이어 가던 그들이 어떻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로 기울어 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의 삶을 사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사기 묵상을 통해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사모해 본다.
1장은 사사기 전체 구조에서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전쟁 이야기와 배교를 묘사하며, 이어서 등장할 중심 이야기의 문학적 틀을 제공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가나안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하나님께 물었고, 유다가 가장 먼저 올라가서 자신의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유다는 시므온과 동맹을 맺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베섹과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성공적으로 점령함으로써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로 시작하는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와 연결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 지금까지는 여호수아가 주도하여 가나안 정복을 수행했다. 하지만 여호수아 생전에 가나안을 완벽하게 정복하지는 못했다. 남은 지역에 대한 정복 임무는 이제 그 지역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에게 일임되었다. 사사기는 그 임무를 맡은 지파들이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하는 기사로 시작한다.
사사기(쇼페팀, Judges/재판관들)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약 350여 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사들의 기록이며, 주전 1050~10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유대의 전승은 사무엘을 저자로 전하지만, 사무엘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이 기간의 기록들을 모아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에서 사무엘로 이어지는 시기, 지도력이 유다 지파로 옮겨지는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어떤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라는 말씀이 이를 잘 요약해 준다.
사사기 묵상의 여정 속에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기를 좋아하는지 깨달아, 이런 악행에서 돌이켜 그 하나님을 더욱 내밀하게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1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 펼쳐지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여호수아…… 모세와 함께 광야를 오롯이 견뎌 내며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은 후 갈렙과 함께 가나안 정복을 이끌었던 불세출의 명장이다. 그가 죽었다. 리더십의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더 특이한 것은 여호수아의 뒤를 잇는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한 문제는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면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은 분배받은 지파들이 끝까지 싸워 차지하라고 당부했다(수 23:5). 가나안 정복 전쟁 시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로 단합시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던 불세출의 인간 지도자가 죽은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변함이 없는 듯하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1절)”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 앞서 하나님께 여쭙는다. 이렇게 하여 “유다”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따라(2절) 유다가 올라간다. 그런데 유다는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요청한다. 그러자 시므온도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올라가서 싸우겠다고 한다(3절). 이게 뭔가 싶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지혜롭게 연합하여 싸운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온전한 순종이 아닌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다면 전쟁의 판세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력한 지파였고, 시므온은 가장 작은 지파에 속하였다. 유다 지파만 올라가도 충분했다는 것이다. 또한 유다 지파가 제비 뽑아 차지한 땅은 유대 산지 남쪽의 대부분 지역이었고, 시므온 지파는 그 안의 일부 지역을 분배받았다. 형세로 본다면 유다 지파의 땅 안에 시므온 지파가 자리 잡은 모양새였다. 추측하기로 유다 지파는 가장 약한 시므온 지파를 배려한 것이다. 그들을 위해(3절) 하지 않아도 될 연합과 연대를 해 준 것이다.
유다와 시므온이 먼저 올라가서 차지한 땅은 유다에게 배정된 땅이기에 유다 지파만의 힘으로 먼저 올라가 차지해야 옳다. 그럼에도 그의 형제 시므온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베냐민 지파와의 경계인 북쪽의 예루살렘 지역과 남쪽의 헤브론 지역을 정복하는 쾌거를 올린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다 지파가 지금 차지한 땅은 가나안 중남부 지역으로, 장차 다윗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 지속적인 국지전이 일어나게 될 장소이다. 지금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땅인 베섹을 차지하고 이어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점령하여 유다 산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다윗이 완전하게 평정할 때까지 블레셋 족속과 뺏고 빼앗기는 진흙탕 같은 국지전이 지속되었다. 결국 다윗의 왕권이 서기까지 이 땅은 블레셋 족속의 끊임없는 도발을 감내해야 할 곳이었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금 막 돌아가기 시작했다.
걸출한 지도자가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한 명의 지도자를 하나님께 돌려보내며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붙든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 주는 메시지다. 안정적으로 믿음의 여정을 이끈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다. 40여 년 전 시내산에서 늘 함께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셨다.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차지해야 할 땅이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 전쟁을 도우신다.
그럼에도 지도자의 부재에서 오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그 허전함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잊지 않는다. 차지해야 할 땅 앞에서 함께하시는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울까요?”
2. 위기, 그러나 굳건하게(1~3절)
모세와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었으니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을까? 당연히 제사장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성막이 임시로 머물던 실로에서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성막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이고 가르치시겠다는 말씀을 따라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없는 시대, 그의 부재가 겉으로 드러날 때에도 공백을 느낄 틈이 없었다. 영원하고 유일한 지도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고,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뜻을 구했다. 여전히 가나안 땅에는 물리치지 못한 족속들이 있었고 차지해야 할 땅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이미 세워진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성막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러니 딱히 여호수아의 부재를 느낄 틈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차지하지 못한 땅을 치러 올라가려 할 때에는 누군가가 결정해야 했고, 그 누군가의 통솔을 따라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아마도, 모세와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리더십이 세습되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제비 뽑아 분배받은 땅의 주인 지파가 올라가라 하신다. 이렇게 중요한 시대에, 결정하고 판단해야 할 여호수아가 없다. 그의 지도력이 누구에게 이양되어야 하는지 정해지지도 않은 채 여호수아가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영원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결정이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특출난 지도자보다, 각 지파가 힘을 합하여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차지해 나가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즉 한 사람의 결정권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그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분배받은 유다 산지의 남은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기 위해 누가 올라갈지를 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당연히 분배받은 유다 지파가 올라가야 하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권위와 인정을 통해 이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사사기의 시작은 이런 믿음의 자세가 이어지는 모습으로 출발한다.
의지하던 지도자의 부재가 가져오는 상실감보다 산적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앞에 있었기에, 리더십의 부재를 느낄 새 없이 맞선다. 하지만 모세가 그렇게 했고 여호수아도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믿음에 이상이 없다!
리더십이 부재할 때 직면하는 문제, 하나님께 여쭙고 나아가야 할 길을 구해야지…… 사람을 바라볼 때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쭐 때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 공동체의 위기는 지도력이 상실될 때 찾아오지만,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이양되는 시기를 거쳐도 흔들리는 것이 사회이다. 하물며 인생들이 모여 있는 교회 공동체라고 다를까! 그럼에도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공동체이기에 걱정 없다. 그래서 더온누리교회도 걱정 없다.
3. 그럼에도 우려되는 것은(4~10절)
유다와 시므온은 승승장구하였다. 그 원인은 분명하다. “……내가 그 땅을 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주었다(새번역_2절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약속하신 대로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니(4절)”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런데 우려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사사기의 전체 주제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모습이 여기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유다 지파는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땅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베섹의 주인)을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린다(6절). 문제는 이런 행위가, 잘림을 당한 아도니 베섹의 한탄에서 발견되듯 가나안 족속들의 잔인한 전쟁 문화였다는 점이다. 가나안 땅의 잔인한 행동들을 그대로 따라 행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를 예루살렘에서 자연사하도록 둔다.
가나안 민족과 싸우면서 가나안 민족들의 행태를 따라가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우려스럽게도 가나안 민족과 싸우면서 가나안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는?
-민족의 지도자, 가나안 정복의 선봉자, 신실한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가 죽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 분명하다. 충분히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남은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 어떤 지파가 나서야 할지 하나님께 여쭙는다(1절). 눈에 보이는 지도자는 사라졌지만, 영원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에 낙망의 자리가 아닌 사명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 낼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를 향해 가나안 족속과 싸우러 올라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레아에게서 난 동복형제이자 인접한 지파인 시므온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2~3절). 명분 있는 일에 “협력”하는 것이 그 자체로 그릇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다. 지금은 사소한 것에 그치지만, 사사기 끝에 이르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21:25)” 행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주님은 더 나은 명분보다 온전한 순종을 원하시지 않을까? 순종보다 더 명분 있는 일은 없다.
-유다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이기고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다. 한때 일흔 명의 왕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고 상 아래에서 먹게 하여 수치를 주던 아도니 베섹은 똑같은 수모를 당한 후 예루살렘에서 죽는다. 그는 죽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악행을 갚으셨다고 말한다(4~7절). 그는 생명의 땅, 약속의 땅에서라도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삶에는 죽음만 남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떠난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분의 말씀을 내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을 때, 내 모든 삶의 조건은 ‘혼돈’이 되고 말 것이다.
-유다 지파는 승승장구한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남쪽으로 내려가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우고, 헤브론의 가나안 족속도 정복한다(8~10절). 그래서 그 땅이 유다의 기업(소유)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순종만이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먼저 묻고,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는 곳에 승리가 있고 생명이 있고 안식이 있다.
-본문을 묵상하며 유다와 시므온의 연합을 보게 된다. 힘이 강한 지파가 가장 열악한 지파와 연합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어쩌면 유다 지파의 땅에 인접한 시므온 지파에게도 강력한 위협이 되는 예루살렘과 헤브론 지역의 대적을 함께 제거하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훗날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시므온 단독으로 그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유다는 시므온에게 이 전쟁에 함께 참여할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들도 시므온의 전쟁에 함께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얼마나 힘 있는 자의 배려인가? “우리와 함께 우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을 치자. 그러면 우리도 너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함께 싸우러 올라가겠다(새번역_3절).”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공동체와 공동체가 연합할 때 먼저 힘 있는 공동체가 연약한 공동체를 배려하는 법을 유다 지파에게서 배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 그것이 연합이다. 더온누리공동체가 지역의 교회들을 섬길 때 이런 정신을 기억하고 감당하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의 믿음의 행보도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되 함께 공동체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순종하되 함께 지체로 불러 주신 성도님들과 “함께” 순종해야겠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반응하며 순종해야겠다.
-부정적으로 보면 유다의 온전하지 못한 순종의 모습도 간과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유다 지파를 향해 올라가라고 명하셨으나. 시므온 지파와 함께 올라간 것은 그들의 힘을 키우려는 인간적인 마음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동복 형제인 시므온에 대한 애착과 배려로 실행했을 것이지만, 온전하지 못한 순종이라는 틈이 사사시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아도니 베섹의 엄지 손가락을 자른 것과 그를 예루살렘에서 자연사하도록 둔 것도 하나님의 전쟁 방식이 아니었다. 아도니 베섹이 ’70명의 왕들에게 저지른 일을 그대로 당한다’고 절규한 것은 유다 지파의 전쟁 방식이 가나안화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나안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은 틈이 가나안화를 촉발시켰다.
-지금 한국 교회는 리더십의 교체가 활발하다. 오늘 말씀이 이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하신다. 교회 공동체는 인간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몇 해 전 이 과정을 경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나의 목회 여정에 함께하심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앞으로의 목회 여정도 걱정 없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께서 나의 영원한 기업, 나의 영원한 목자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주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더욱 잘 물으면 된다. 묻고 순종하면 된다.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 공동체의 믿음의 행보도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되 함께 공동체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순종하되 함께 지체로 불러 주신 성도님들과 “함께” 순종해야겠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반응하며 순종해야겠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는 것으로 사사기의 서사가 시작된다. 신뢰하고 의지하던 지도자의 부재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인간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영원한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은 남은 가나안 땅,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 누가 먼저 나서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여쭙는다. 인간 지도자의 자리는 비었으나, 진정한 참 지도자 되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낙망의 자리가 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소망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적인 지도자의 부재에 흔들리지 않고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할 때, 더 깊고 더 넓은 신앙의 지경이 펼쳐진다.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기업 안에 있던 시므온 지파에게 동참을 요구한다. 그리고 싸워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이긴다. 하지만 진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적장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예루살렘까지 끌고 와서 거기서 자연사하도록 둔다.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백성은 작은 타협과 불순종이 전면적인 타락과 국가적 재난의 불씨가 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유다에게 승리를 주신다. 일흔 명의 왕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게 한 잔혹한 아도니 베섹을 이기게 하신다. 북으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남으로는 산지와 남방과 평지, 헤브론까지 장악하게 하신다. 걸출한 여호수아라는 인간 지도자의 죽음에도 역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면서 사사기가 시작된 것이다.
1장은 사사기 전체 구조에서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전쟁 이야기와 배교를 묘사하며, 이어서 등장할 중심 이야기의 문학적 틀을 제공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가나안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하나님께 물었고, 유다가 가장 먼저 올라가서 자신의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유다는 시므온과 동맹을 맺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베섹과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성공적으로 점령함으로써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로 시작하는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와 연결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 지금까지는 여호수아가 주도하여 가나안 정복을 수행했다. 하지만 여호수아 생전에 가나안을 완벽하게 정복하지는 못했다. 남은 지역에 대한 정복 임무는 이제 그 지역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에게 일임되었다. 사사기는 그 임무를 맡은 지파들이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하는 기사로 시작한다.
사사기(쇼페팀, Judges/재판관들)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약 350여 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사들의 기록이며, 주전 1050~10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유대의 전승은 사무엘을 저자로 전하지만, 사무엘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이 기간의 기록들을 모아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에서 사무엘로 이어지는 시기, 지도력이 유다 지파로 옮겨지는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어떤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라는 말씀이 이를 잘 요약해 준다.
사사기 묵상의 여정 속에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기를 좋아하는지 깨달아, 이런 악행에서 돌이켜 그 하나님을 더욱 내밀하게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1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 펼쳐지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여호수아…… 모세와 함께 광야를 오롯이 견뎌 내며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은 후 갈렙과 함께 가나안 정복을 이끌었던 불세출의 명장이다. 그가 죽었다. 리더십의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더 특이한 것은 여호수아의 뒤를 잇는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한 문제는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면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은 분배받은 지파들이 끝까지 싸워 차지하라고 당부했다(수 23:5). 가나안 정복 전쟁 시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로 단합시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던 불세출의 인간 지도자가 죽은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변함이 없는 듯하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1절)”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 앞서 하나님께 여쭙는다. 이렇게 하여 “유다”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따라(2절) 유다가 올라간다. 그런데 유다는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요청한다. 그러자 시므온도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올라가서 싸우겠다고 한다(3절). 이게 뭔가 싶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지혜롭게 연합하여 싸운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온전한 순종이 아닌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다면 전쟁의 판세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력한 지파였고, 시므온은 가장 작은 지파에 속하였다. 유다 지파만 올라가도 충분했다는 것이다. 또한 유다 지파가 제비 뽑아 차지한 땅은 유대 산지 남쪽의 대부분 지역이었고, 시므온 지파는 그 안의 일부 지역을 분배받았다. 형세로 본다면 유다 지파의 땅 안에 시므온 지파가 자리 잡은 모양새였다. 추측하기로 유다 지파는 가장 약한 시므온 지파를 배려한 것이다. 그들을 위해(3절) 하지 않아도 될 연합과 연대를 해 준 것이다.
유다와 시므온이 먼저 올라가서 차지한 땅은 유다에게 배정된 땅이기에 유다 지파만의 힘으로 먼저 올라가 차지해야 옳다. 그럼에도 그의 형제 시므온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베냐민 지파와의 경계인 북쪽의 예루살렘 지역과 남쪽의 헤브론 지역을 정복하는 쾌거를 올린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다 지파가 지금 차지한 땅은 가나안 중남부 지역으로, 장차 다윗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 지속적인 국지전이 일어나게 될 장소이다. 지금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땅인 베섹을 차지하고 이어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점령하여 유다 산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다윗이 완전하게 평정할 때까지 블레셋 족속과 뺏고 빼앗기는 진흙탕 같은 국지전이 지속되었다. 결국 다윗의 왕권이 서기까지 이 땅은 블레셋 족속의 끊임없는 도발을 감내해야 할 곳이었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금 막 돌아가기 시작했다.
걸출한 지도자가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한 명의 지도자를 하나님께 돌려보내며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붙든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 주는 메시지다. 안정적으로 믿음의 여정을 이끈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다. 40여 년 전 시내산에서 늘 함께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셨다.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차지해야 할 땅이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 전쟁을 도우신다.
그럼에도 지도자의 부재에서 오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그 허전함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잊지 않는다. 차지해야 할 땅 앞에서 함께하시는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울까요?”
2. 위기, 그러나 굳건하게(1~3절)
모세와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었으니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을까? 당연히 제사장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성막이 임시로 머물던 실로에서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성막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이고 가르치시겠다는 말씀을 따라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없는 시대, 그의 부재가 겉으로 드러날 때에도 공백을 느낄 틈이 없었다. 영원하고 유일한 지도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고,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뜻을 구했다. 여전히 가나안 땅에는 물리치지 못한 족속들이 있었고 차지해야 할 땅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이미 세워진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성막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러니 딱히 여호수아의 부재를 느낄 틈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차지하지 못한 땅을 치러 올라가려 할 때에는 누군가가 결정해야 했고, 그 누군가의 통솔을 따라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아마도, 모세와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리더십이 세습되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제비 뽑아 분배받은 땅의 주인 지파가 올라가라 하신다. 이렇게 중요한 시대에, 결정하고 판단해야 할 여호수아가 없다. 그의 지도력이 누구에게 이양되어야 하는지 정해지지도 않은 채 여호수아가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영원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결정이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특출난 지도자보다, 각 지파가 힘을 합하여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차지해 나가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즉 한 사람의 결정권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그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분배받은 유다 산지의 남은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기 위해 누가 올라갈지를 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당연히 분배받은 유다 지파가 올라가야 하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권위와 인정을 통해 이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사사기의 시작은 이런 믿음의 자세가 이어지는 모습으로 출발한다.
의지하던 지도자의 부재가 가져오는 상실감보다 산적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앞에 있었기에, 리더십의 부재를 느낄 새 없이 맞선다. 하지만 모세가 그렇게 했고 여호수아도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믿음에 이상이 없다!
리더십이 부재할 때 직면하는 문제, 하나님께 여쭙고 나아가야 할 길을 구해야지…… 사람을 바라볼 때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쭐 때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 공동체의 위기는 지도력이 상실될 때 찾아오지만,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이양되는 시기를 거쳐도 흔들리는 것이 사회이다. 하물며 인생들이 모여 있는 교회 공동체라고 다를까! 그럼에도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공동체이기에 걱정 없다. 그래서 더온누리교회도 걱정 없다.
3. 그럼에도 우려되는 것은(4~10절)
유다와 시므온은 승승장구하였다. 그 원인은 분명하다. “……내가 그 땅을 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주었다(새번역_2절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약속하신 대로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니(4절)”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런데 우려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사사기의 전체 주제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모습이 여기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유다 지파는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땅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베섹의 주인)을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린다(6절). 문제는 이런 행위가, 잘림을 당한 아도니 베섹의 한탄에서 발견되듯 가나안 족속들의 잔인한 전쟁 문화였다는 점이다. 가나안 땅의 잔인한 행동들을 그대로 따라 행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를 예루살렘에서 자연사하도록 둔다.
가나안 민족과 싸우면서 가나안 민족들의 행태를 따라가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우려스럽게도 가나안 민족과 싸우면서 가나안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는?
-민족의 지도자, 가나안 정복의 선봉자, 신실한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가 죽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 분명하다. 충분히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남은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 어떤 지파가 나서야 할지 하나님께 여쭙는다(1절). 눈에 보이는 지도자는 사라졌지만, 영원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에 낙망의 자리가 아닌 사명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 낼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를 향해 가나안 족속과 싸우러 올라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레아에게서 난 동복형제이자 인접한 지파인 시므온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2~3절). 명분 있는 일에 “협력”하는 것이 그 자체로 그릇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다. 지금은 사소한 것에 그치지만, 사사기 끝에 이르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21:25)” 행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주님은 더 나은 명분보다 온전한 순종을 원하시지 않을까? 순종보다 더 명분 있는 일은 없다.
-유다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이기고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다. 한때 일흔 명의 왕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고 상 아래에서 먹게 하여 수치를 주던 아도니 베섹은 똑같은 수모를 당한 후 예루살렘에서 죽는다. 그는 죽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악행을 갚으셨다고 말한다(4~7절). 그는 생명의 땅, 약속의 땅에서라도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삶에는 죽음만 남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떠난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분의 말씀을 내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을 때, 내 모든 삶의 조건은 ‘혼돈’이 되고 말 것이다.
-유다 지파는 승승장구한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남쪽으로 내려가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우고, 헤브론의 가나안 족속도 정복한다(8~10절). 그래서 그 땅이 유다의 기업(소유)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순종만이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먼저 묻고,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는 곳에 승리가 있고 생명이 있고 안식이 있다.
-본문을 묵상하며 유다와 시므온의 연합을 보게 된다. 힘이 강한 지파가 가장 열악한 지파와 연합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어쩌면 유다 지파의 땅에 인접한 시므온 지파에게도 강력한 위협이 되는 예루살렘과 헤브론 지역의 대적을 함께 제거하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훗날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시므온 단독으로 그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유다는 시므온에게 이 전쟁에 함께 참여할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들도 시므온의 전쟁에 함께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얼마나 힘 있는 자의 배려인가? “우리와 함께 우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을 치자. 그러면 우리도 너희 몫으로 정해진 땅으로 함께 싸우러 올라가겠다(새번역_3절).”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공동체와 공동체가 연합할 때 먼저 힘 있는 공동체가 연약한 공동체를 배려하는 법을 유다 지파에게서 배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 그것이 연합이다. 더온누리공동체가 지역의 교회들을 섬길 때 이런 정신을 기억하고 감당하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의 믿음의 행보도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되 함께 공동체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순종하되 함께 지체로 불러 주신 성도님들과 “함께” 순종해야겠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반응하며 순종해야겠다.
-부정적으로 보면 유다의 온전하지 못한 순종의 모습도 간과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유다 지파를 향해 올라가라고 명하셨으나. 시므온 지파와 함께 올라간 것은 그들의 힘을 키우려는 인간적인 마음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동복 형제인 시므온에 대한 애착과 배려로 실행했을 것이지만, 온전하지 못한 순종이라는 틈이 사사시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아도니 베섹의 엄지 손가락을 자른 것과 그를 예루살렘에서 자연사하도록 둔 것도 하나님의 전쟁 방식이 아니었다. 아도니 베섹이 ’70명의 왕들에게 저지른 일을 그대로 당한다’고 절규한 것은 유다 지파의 전쟁 방식이 가나안화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나안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은 틈이 가나안화를 촉발시켰다.
-지금 한국 교회는 리더십의 교체가 활발하다. 오늘 말씀이 이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하신다. 교회 공동체는 인간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몇 해 전 이 과정을 경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나의 목회 여정에 함께하심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앞으로의 목회 여정도 걱정 없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께서 나의 영원한 기업, 나의 영원한 목자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주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더욱 잘 물으면 된다. 묻고 순종하면 된다.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 공동체의 믿음의 행보도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되 함께 공동체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순종하되 함께 지체로 불러 주신 성도님들과 “함께” 순종해야겠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반응하며 순종해야겠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는 것으로 사사기의 서사가 시작된다. 신뢰하고 의지하던 지도자의 부재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인간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영원한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은 남은 가나안 땅,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 누가 먼저 나서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여쭙는다. 인간 지도자의 자리는 비었으나, 진정한 참 지도자 되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낙망의 자리가 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소망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적인 지도자의 부재에 흔들리지 않고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할 때, 더 깊고 더 넓은 신앙의 지경이 펼쳐진다.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기업 안에 있던 시므온 지파에게 동참을 요구한다. 그리고 싸워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이긴다. 하지만 진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적장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예루살렘까지 끌고 와서 거기서 자연사하도록 둔다.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백성은 작은 타협과 불순종이 전면적인 타락과 국가적 재난의 불씨가 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유다에게 승리를 주신다. 일흔 명의 왕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게 한 잔혹한 아도니 베섹을 이기게 하신다. 북으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남으로는 산지와 남방과 평지, 헤브론까지 장악하게 하신다. 걸출한 여호수아라는 인간 지도자의 죽음에도 역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면서 사사기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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