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28-37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주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27절)"고 고백한 마르다는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마리아를 불러내 주님께 보낸다. 슬픔 가운데 있는 마리아를 주님은 위로해 주신다. 한편 마리아는 마르다와 다를 바 없는 고백을 주님께 드리며 통곡한다. 함께 따라온 유대인들도 통곡하고 주님도 그들의 슬픔을 격하게 공감하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마음으로 깊이 탄식하신 것이다. 이 탄식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향한 애민의 탄식이었고 눈물이었다. 마리아에게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는지 묻자, 마리아는 "주여 와서 보옵소서" 인도했다. 그 무덤 앞에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1.마리아의 반응(28-30절)
마르다가 주님과 함께 마을 어귀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알 리 없던 마리아는 집안에서 묵묵히 장례를 감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다가 조용히 불러 주님께서 부르신다는 소식에 "급히 일어나"자신을 부르신 주님께 나아간다. 슬픔과 절망이 온 몸과 마음을 감싸고 있을 때 주님이 찾으신다는 말에 "급히 일어나" 나아가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주님의 존재가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대로 느껴진다. 마리아는 주님을 이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현장에서 위로의 주님이 계시다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된다. 마리아에게 주님은 오라비의 죽음의 슬픔 속에서도 위로가 되는 존재셨다. 주님은 그런 분이시다.


2.함께 아파하고 함께 우시는 주님(33-35절)
마리아가 한 걸음에 달려오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주님은 벌써 눈시울이 뜨거워 지셨을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마음을 다해 슬픔에 공감하시는 사랑 이시다. 마리아가 자신의 발 아래 엎드려서 깊은 슬픔의 고백을 토로할 때(32절). 함께 따라 온 유대인들이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울음(쿨라이오)은 "몹시 슬퍼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나사로의 죽음과 이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모인 유대인들은 나흘이 지나도록 이토록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비통히(엠브리마오마이)" 여기셨다. "매우 분노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나사로의 죽음이 가져온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슬픔과 함께 통곡하는 유대인들의 슬픔을 가져온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그들이 현실에 분노하신 것이다. 죽음이 가져온 슬픔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또 "불쌍히 여기셨다(타랏소)" 이는 죽음 앞에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인생들이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 자신들 앞에 있음에도 주님과 단지 슬퍼만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다. 생명과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없어 충분히 살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그 앞에서 울기만 하는 그들이 안타깝기만 하신 것이다.

*죽음이 가져 온 이별은 쓰라리고 잔인하다. 죽음이 주는 절망과 슬픔의 고통에 몸부림 칠수록 알고 있다면 생명의 주님께서 열어주실 부활의 소망은 그만큼 간절해 질 것이다.

*생명의 주님과 함께 있음에도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슬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창조의 주님이시기에 슬픔을 공감만 해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고 그 앞에서 울기만 하면 안 된다. 울기만 하지 말고 생명의 주님께 맡기라. 더욱 의지하여야 한다. 살아나게 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3.유대인들의 반응(36-37절)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그들은 급히 나가는 마리아가 곡 하기 위해 무덤으로 가는 줄 알고 함께 따라 나섰다가 주님을 보았다. 마리아와 주님의 만남에서 주님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각각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주님이 나사로를 이토록 사랑했다고(36절) 하고 어떤 이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자가 왜 나사로는 죽게 내버려 두었냐고 했다(37절).

주님이 나사로를 사랑했고 주님에게는 맹인을 치유하듯 충분히 치유할 능력이 있었으면서 나사로가 죽도록 내버려 두었냐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죽음이 슬펐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눈물의 의미를 몰랐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애통하고 비통해서 우시지 않았다.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이 이토록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 셨다. 또, 나사로를 사랑했기에 죽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그들의 말도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 그들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바램 만으로 주님께서 왜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 나사로가 살아 있을 때 병을 고치지 않으셨는지 아쉬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주님을 자기 편견대로 바라보았다. 주님이 이제껏 행하셨던 기적과 가르침들을 "알고 있었고, 경험도 했겠지만" 결국 주님이 깨우쳐 주신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이해한 대로 바라본다. 맹인을 치유해 주신 분이신데, 좀 더 일찍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 오셔서 고쳐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단지 이런 아쉬움의 마음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영광스러운 부활과 생명에 대한 기대는 아예 없다. 당연하다. 그들은 아직 생명을 다시 불어 넣으시는 하나님이신 주님을 경험하지 못했다. 경험과 지식의 한계 속에서 자신들의 생각의 편견에 갇힌 그들에게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이런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새 일"이었다. 도무지 이해할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뜻 이셨고, 계획 이셨다. 주님은 온전히 그 길을 순종하며 나아가셨다. 사람들이 이해 못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핫기 위한 걸음은 이런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을 헤치고 나아가셔야 할 길이었다.


나는?
-주님의 공감해 주심이 위로가 된다. 하나님이신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아셨고, 희노애락을 경험 하셨기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생의 쓰라린 마음을 잘 아셨다. 그리고 함께 눈물을 흘리신다.

-요즘 공감없는 사람, 슬픔을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난다. 자기 욕심에 빠져 이웃의 고통을 이해조차 못한다. 특히나 사회 지도층의 불감과 불통은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맞나 싶기도 하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고정되어 점점 그 차이가 벌어지는 현실 속에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생각하면 주님의 공감과 슬픔이 얼마나 감사하고 힘이 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몰라줘도 주님은 아시고 함께 공감해 주시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된다. 부활과 생명의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아시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된다.


*주님, 우리의 아픔을 알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때문에 비통해 하며 불쌍히 여겨 주시는 모습에 큰 위로가 됩니다. 그 사랑의 마음 본받아 저도 이웃들과 함께 웃고 울겠습니다.

요 11:17-27 마르다의 신앙, 나의 신앙

주님께서 베다니에 올라 오셨다. 마르다는 주님께 달려와 오라버니의 죽음을 애통해 한다. 주님과 슬픔의 대화를 하는 마르다를 통해 나의 믿음의 현 상태를 되짚어 본다.


1.과거와 지식에 묶인 신앙
나사로의 집은 주님과 사이가 각별했다. 예루살렘에 내려 오실때면 그들의 집이 거점이었을 정도로 가까웠다. 삼남매는 주님의 사역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듣고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슬픔과 절망의 현장에서 마르다의 고백은 더 서글프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새번역_21절)" 아.... 주님께서 나사로가 아무리 위중한 병이었서도 살아있을 때 오셨다면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언뜻 주님에 대한 신뢰가 매우 견고하게 들린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런 주님이시라면 지금은 그런 역사를 행하지시 못한다는 것일까? 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마르다는 이미 죽은 나사로에게 그런 일은 아마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규정하고 주님께 말하고 있을 수 있다. 또, 21절의 문장형식은 "가정법 과거완료형"이다. 과거에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하거나 생각하여 표현하는 "가정법" 형식을 사용한 것이라면, 이 고백은 믿음의 고백 이라기 보다 "나사로가 살아 있을 때는 얼마든지...어떤 것이든" 상상의 고백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르다는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고 과거를 기준으로 "그때"에만 역사하실 주님으로 제한하고 있다.

또, 22절과 24절에서 "아나이다"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이 단어는 "알다, 보다, 경험하다"라는 기본 의미가 있다. 즉, 학습된 지식이라는 의미다. 유대인로서의 삶에서 자연스레 학습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여기에 예수님과 함께한 3년 가까운 시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하여 보고 알고 경험하기에 충분해서 쌓은 지식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2.미래만 바라보는 신앙
주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살아날 것이다(23절)"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녀는 주님의 이 단호한 선언에 찬물을 끼얹는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새번역_24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당시 유대인들이 대부분 믿고 있었던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부활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나사로지만, 죽은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그는 '완전히 죽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삼일 동안 그 영혼 떠나지 않고 그 주위에 머문다고 여겼다. 그리고 시신이 조금씩 부패해져 가는 것이 눈에 보일 때쯤...영혼이 완전히 떠난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완전히 죽은 것으로 받아 들였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기에 이제 어떤 기대와 소망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아난다'는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 그 때가 되면.... 이라는 미래에 초점이 맞춰진 신앙이다.


나는?
-주님과 대화하는 마르다의 신앙이 겉보기에는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과거에 경험했고, 주님의 가르침으로 알고 있으면서, 또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굳게 붙잡는 그 믿음이 "지금 현재"의 믿음에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다.

-주님의 죽음가 부활을 예고하는 표적인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행하기 앞서 믿음의 현 주소를 일깨우신다. 그렇게 보았고 알고 있으며, 소망으로 붙잡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지금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현재에서는 어떤 능력을 발휘할까?

-주님을 믿는 믿음이 현재에서 능력을 발휘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과거의 경험, 성경을 아는 지식, 미래를 소망하는 믿음이 지금 현재에서 믿음을 누리게 하는 에너지가 되어야 한다.


*주님, 현재를 믿음으로 이기는 힘을 주십시오.
*주님, 과거의 경험, 성경을 아는 지식, 미래를 기대하는 소망의 믿음이 오늘 현재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게 해주십시오!

삿 20:29-48 이런 전쟁 하지 않아야지...

베냐민 지파는 잔뜩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의 전투는 긴장이 자신감으로 자신감이 교만으로 비약 했을 것이다. 세 번째 전투에 임하면서 이제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어차피 오합지졸로 여겨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기에 이른다. 결국 당일에 25,100명(25,000명_46절)이 죽었고,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불살랐다(48절)"

이스라엘 연합군의 4만명이 전사한 끝에 베냐민 지파 용사 25,000명과 성읍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베냐민 지파나, 이스라엘 연합군이나 큰 상처를 남긴 전쟁이 되어 버렸다.

*같은 동족끼리의 싸움인데 이스라엘 연합군의 전쟁 방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베냐민을 치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35절), 그 심판의 도구였던 이스라엘의 전쟁 방식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산간을 다 태운 격이다.

승리했으나 승리를 누리지 못한 전쟁이 되었다. 가장 막내 지파는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고, 나머지 지파들도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역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특히나 내전은 더더욱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한반도에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정전 중인 6.25 전쟁을 통해 한반도는 심각한 피해뿐 아니라 오랜 시간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이런 전쟁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것이 옳다.

*주님께서 속히 종전선언이 이뤄지도록 은혜 베푸셨으면 좋겠다

*베냐민 지파는 전쟁의 최대 피해를 자초한 것이었다. 자신들 지파 내에서 일어난 악행을 의당 책임지고 해결하려고 했어야 했다. 악행을 척결하여 정의를 세웠어야 했다. 하지만 이를 정치화하여 전쟁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심는대로 거둔 것이다. 어떤 명분이든 정치적이든 죄와 악을 두둔하는 것의 댓가는 반드시 치룰수 밖에 없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도 이를 잘 기억해야 겠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했다. 나의 잘남, 지식, 능력, 경험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 문제를 더욱 키워 버렸다. 그야말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큰 코 다쳤다"

*이스라엘 지파들도 잘한 것은 아니다. 레위인의 거짓 증언에 놀아났다.좀 더 신중하게 문제에 접근했어야 했다. 분별없이 동족에 대하여 서둘러 응징했고, 또한 지나치게 응징했다. 과했다. 과해도 너무 과했다.

*이런 치열한 전쟁 끝에 서로에게 남은 것은 슬픔과 고통 뿐이었다. 어느 편에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 막을 내렸다.....


*주님, 이런 전쟁 한반도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종전선언을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 호미로 막을 수 있을 때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직면하게 하겠습니다.

약 5:7-12 기다림...

시험 가득한 세상에서 주님께서 강림하시기 까지 마음을 굳건하게 하면서 인내해야 한다. 그 인내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그날로 인생이 확 바뀌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해도 인생의 문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과 번민은 여전히 삶을 쥐고 있다. 야고보의 편지가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승천 하실 때 곧 오시겠다는 주님은 오시지 않고 삶의 중심 이었던 예루살렘에서는 박해를 피해 떠나왔다. 계속되는 흉년에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외부에서 위협하는 핍박도 여전하다. 공동체 내부에서는 서로 원망하는 일도 생겨났다.

야고보는 이런 성도들의 삶을 너무나 잘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믿음의 삶을 응원해 주고 싶은데 어떤 것이 좋을까? 그 고민들이 야고보서에 담겨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씀을 권면한다. 무조건 믿고 기다리라 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 사랑의 실천"을 권면한다. "말씀"이라는 생명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기 마련이니 "기다리라"고 한다. 본문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애잔하게 다가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까?


1.열매를 바라보며 "길이 참아" 기다려라(7-8절)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나의 시간표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그 때를(마 24:36)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인내의 동기와 에너지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교회 공동체 안팎의 "여러가지 시험들"과 "시련들"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뿐 아니라 내부에서의 "차별"로 인한 분열의 문제도 있었다. 이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바라보고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한다. 마치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바라보고 인내하며 농사를 짓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실하게 인내해야 한다. "길이 참음"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인내의 상황이 지속될 것을 암시한다.

*신앙은 길이 참음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듯 하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제깍 제깍 이루어지는 것 보다, 믿음이 확인되고 확인 되서야 누리는 것을 여러번 경험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실감이 세상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두렵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이 희미해 질 수록 신앙이 메말라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세상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는 것을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길이 참고 기다리는" 신앙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모함과 함께 간다. 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모하는 마음이 메말라 가지 않기를 소망한다.


2.서로 원망하지 말라(9-10절)
마지막이 가까울 수록 서로에 대하여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 날 것이다. 자신이 책임지려는 것 보다, 할 수만 있다면 떠넘기고 외면하는 풍조가 거세질 것이다. 내개 책임지려는 것보다 서로 책임을 묻고 원망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런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9절)"

"원망하다(스테나조)"는 말은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는 뜻이다. 또, "서로를 향해 으르렁 거린다"는 의미도 함께 가진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는 하나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 차별의 문제뿐 아니라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불평과 불만을 쏟아 낸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큼 분열되어 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는 믿음을 지키는 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부터 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표새_10절)"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에 대하여 돌멩이를 던지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짐을 믿고 바라 보았기에, 백성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의 위기 속에서 "주님 다시 오심"을 굳게 바라보고 "원망(불평과 불만)"하지 않고 "길이 참아" 기다리자...


3.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라(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11절)"

끝까지 인내한 욥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고 있고, 십자가에서 끝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보고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해야 한다.

욥이 고난 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의 "길이 참고 기다림"에 모든 부분에서 갑절로 회복 시켜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욥, 선지자들을 앞서 이런 삶을 살게 하셨음을 상기 시키면서 이제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응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이미 살아간 선진들이 있다. 히브리서는 그들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삶도 믿음의 후손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그때 "증인"으로 남겨져야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고, 오늘을 "길이 참고, 원망하지 않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지...인내하는 자가 복 되다!


나는?
-"기다림".... 삶을 살다 보면 무수한 기다림을 경험한다. 그런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때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어땠을까?"라는 후회의 순간이 꽤 많다. 이런 이불킥 할 만한 상황은 놀랍게도 "나의 성급함"으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지만, 그 리스크는 어떤 경우 꽤 오래 가는 것도 있었다.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어떨까? ... 오히려 너무 안이하다 싶을 정도로 의식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의식하지 않아서 "기다림"의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더구나 이단들의 단골 메뉴가 "계시록, 재림" 이런 것이다 보니 되려 더 무감각해 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 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들이 더 많다. "성공, 명예, 재물, 취업, 승진, 성취....." 주님의 재림보다 더 간절히 이와 같은 것들을 기다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필요하다고 여기고 성취 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커질 수록, 주님의 다시오심을 망각하는 지수는 더 확고해 진다. 주님께서 경고하신 대로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새번역_요일 2:15, 17)"

-기다릴 만한 것을 "길이 참으며" 제대로 기다려야지... 이 세상에서 잠깐 지나갈 욕망을 기다리다, 잊어버리면 안 되지... 그럼 그렇고 말고...

-믿음의 길에서 곤고함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사라질 세상의 허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함을 다짐해 본다.

-한편으로는 성급함이 신앙을 망치는 경우도 있음이 생각난다. 내 자신부터 "지긋한 기다림"으로 주님 다시 오심을 바라보는 삶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이 거쳐야 할 "성숙되어 져 가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섣불리 개입하고, 어리석은 가르침을 앞서 행하여서 되려 부담 되어 믿음의 생명이 꺼져 버리는 경우가 왜 없었을까? 메주를 만들자 마자 장을 담그는 식이다.

-나의 성급함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의 호흡을 막고 있지는 않을지...기다림이 없으면 성숙할 수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다. "좋은 장 맛을 내기 위해 충분한 발효, 꼭 필요한 시간을 느긋하게 기다려 보자... 기다림이 좋은 장맛을 가져온다. 기다림이 성숙한 신앙을 영글게 한다.

-나의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 신뢰해야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길이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주님, 기다림 속에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욥과 선지자들을 대하신 주님의 긍휼과 자비도 바라봅니다.
*주님, 나의 성급함이 하나님 나라를 망치지 않도록 분별과 기다림을 주십시오. 남에게 잘 익으라고 다그치는 제가 아직도 덜 익어서 죄송합니다.

잠 20:16-30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것들...

지혜로운 이는 대인관계를 어떻게 할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또 어떻게 할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자세는 과연 어떤 것일까? 이와같은 주제들은 결국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가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1.성급함, 조급함을 조심하라(16-20, 25절)
보증을 서는 문제는 성급하게 결정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결정한 보증은 결국 "....자기의 (겉)옷)을 잡혀야 한다". 얼마나 성급했던 어리석은 보증인지 '외인(모르는 사람_표준새번역_16절)'의 보증도 서는 어리석은 삶은 자신의 몸이 담보가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보증 서는 일의 위험성을 각성하고 늘 조심해야 한다.

남을 속여서 얻은 음식물이 맛이 좋다고 하지만 결국 그의 입에 모래가 씹히는 것처럼 느끼는 날이 올 것이다(17절).  속여서 자기의 즐거움을 당장 누리는 것에 취하면 고통의 시간들이 그만큼 속히 올 것을 주의하여 깨달아야 한다.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일수록 사람들의 뜻을 모으고, 함께 전략을 세워 전쟁에 임하라(18절). 독선, 독단은 공동체의 지혜를 신뢰하지 않는 불신에서 비롯된다. 나의 생각이 절대적이다는 오만과 독선은 '함께' 싸워야 할 전쟁에서조차 지혜로운 전략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신의 성급함이 가져오는 필패가 엄습한다.

타인을 험담하는 것과 부모를 저주하는 입을 주의해야 한다. 그런 자는 멀리해야 한다. 부모에게 한 저주가 자신에게 순식간에 들어온다. 어두운 밤중에 갑자기 등불이 꺼지는 것 처럼...(19-20절).

"경솔하게 "이것은 거룩하다" 하여 함부로 서원하여 놓고, 나중에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사람이 걸리기 쉬운 올가미이다.(표새_25절)"

*보증, 속임, 독선, 험담, 부모저주는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나의 삶이 걸리기 쉬운 올가미를 잘 분별하여 이에 걸려 들지 않는 것이 지혜다. 보증, 속임, 독선, 험담, 저주....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나의 인생을 옭아매는, 쉽게 걸려 들 수 있는 올무들이다.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2.한결 같아라(22절)
지혜로운 이는 하나님께 대하여 늘 신실하게 한결같다. "악을 갚겠다" 하지 말아라.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너를 구원하신다.(표새_22절)"

누군가에게 고통을 당할 때, 속임을 당하고, 험담을 당하며, 저주를 당할 때 그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드러나겠지 하며 애써 마음을 진정 시키지만, 한계선에 다다르면 마음은 요동 친다. 가만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 같다. 분노가 표출되고 맞서 싸우기를 지체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지혜자는 이런 나의 힘, 나의 분노로 고통스러운 일을 맞서지 말라 하신다. "기다린다(카봐)"는 "기대하고 바라본다"는 의미다. 억울한 그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의 판단과 보응"을 기대하고 바라보라는 것이다.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겠느냐!(표새_24절)"

하나님이 심판자, 삶의 길의 인도자 이시기에 자칫 나의 감정에 치우쳐 내가 당한 악보다 더 큰 죄악을 저지를 수 있기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기대하고 바라보며 "맡기는" 신실함이 한결 같아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공의로우심에 대한 신뢰를 "한결같이" 유지해야 한다. 나의 한결같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내 힘으로 해결하려는 성금함과 조급함을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나는?
-나는 참 성급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후회하게 된 순간들도 많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성급함이 무수한 연단의 기회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믿음"의 마음으로 갈고 닦여 졌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성급하다. 늘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특히 사람들의 말(험담이든지, 칭찬이든지)에 성급한 행동과 결정들을 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러다 보니 편파적인 결정과 조치들을 어리숙하게 남발했다. 그러면서 일부 지체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힘들어 했다. 여전히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얼마나 후회 했는지 모른다. 그런 고통의 기억들이 이제는 균형잡힌 들음, 판단을 좀더 주의깊게 더 주의깊게 하려는 모습으로 빚어졌다고 여기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여전히 성급하다.

-그래서 오늘 말씀 중에 "여호와를 기다리라(22절)" 말씀이 참 감동이 된다. 기다리면 구원을 베푸신다. 그 구원은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닌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시는 구원의 때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늘 갈망해야 한다. "여호와를 기디리라"


*주님, 성급하고 조급함 마음이 들 때 완전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리게 하소서..
*주님,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로 살게 하소서.

jonghong kim
퍼온 글

지은네 가정모임?

jonghong kim 멋져용!!! 굿! 굿!!

jonghong kim
퍼온 글

0515 더함공동체 리더모임!!
#더함#리더모임

박민지 👍👍👍

Jihee Hwang 좋으다♡♡♡

김이랑 요거 괜찮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