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28-37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주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27절)"고 고백한 마르다는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마리아를 불러내 주님께 보낸다. 슬픔 가운데 있는 마리아를 주님은 위로해 주신다. 한편 마리아는 마르다와 다를 바 없는 고백을 주님께 드리며 통곡한다. 함께 따라온 유대인들도 통곡하고 주님도 그들의 슬픔을 격하게 공감하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마음으로 깊이 탄식하신 것이다. 이 탄식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향한 애민의 탄식이었고 눈물이었다. 마리아에게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는지 묻자, 마리아는 "주여 와서 보옵소서" 인도했다. 그 무덤 앞에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1.마리아의 반응(28-30절)
마르다가 주님과 함께 마을 어귀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알 리 없던 마리아는 집안에서 묵묵히 장례를 감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다가 조용히 불러 주님께서 부르신다는 소식에 "급히 일어나"자신을 부르신 주님께 나아간다. 슬픔과 절망이 온 몸과 마음을 감싸고 있을 때 주님이 찾으신다는 말에 "급히 일어나" 나아가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주님의 존재가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대로 느껴진다. 마리아는 주님을 이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현장에서 위로의 주님이 계시다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된다. 마리아에게 주님은 오라비의 죽음의 슬픔 속에서도 위로가 되는 존재셨다. 주님은 그런 분이시다.
2.함께 아파하고 함께 우시는 주님(33-35절)
마리아가 한 걸음에 달려오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주님은 벌써 눈시울이 뜨거워 지셨을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마음을 다해 슬픔에 공감하시는 사랑 이시다. 마리아가 자신의 발 아래 엎드려서 깊은 슬픔의 고백을 토로할 때(32절). 함께 따라 온 유대인들이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울음(쿨라이오)은 "몹시 슬퍼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나사로의 죽음과 이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모인 유대인들은 나흘이 지나도록 이토록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비통히(엠브리마오마이)" 여기셨다. "매우 분노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나사로의 죽음이 가져온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슬픔과 함께 통곡하는 유대인들의 슬픔을 가져온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그들이 현실에 분노하신 것이다. 죽음이 가져온 슬픔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또 "불쌍히 여기셨다(타랏소)" 이는 죽음 앞에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인생들이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 자신들 앞에 있음에도 주님과 단지 슬퍼만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다. 생명과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없어 충분히 살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그 앞에서 울기만 하는 그들이 안타깝기만 하신 것이다.
*죽음이 가져 온 이별은 쓰라리고 잔인하다. 죽음이 주는 절망과 슬픔의 고통에 몸부림 칠수록 알고 있다면 생명의 주님께서 열어주실 부활의 소망은 그만큼 간절해 질 것이다.
*생명의 주님과 함께 있음에도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슬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창조의 주님이시기에 슬픔을 공감만 해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고 그 앞에서 울기만 하면 안 된다. 울기만 하지 말고 생명의 주님께 맡기라. 더욱 의지하여야 한다. 살아나게 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3.유대인들의 반응(36-37절)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그들은 급히 나가는 마리아가 곡 하기 위해 무덤으로 가는 줄 알고 함께 따라 나섰다가 주님을 보았다. 마리아와 주님의 만남에서 주님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각각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주님이 나사로를 이토록 사랑했다고(36절) 하고 어떤 이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자가 왜 나사로는 죽게 내버려 두었냐고 했다(37절).
주님이 나사로를 사랑했고 주님에게는 맹인을 치유하듯 충분히 치유할 능력이 있었으면서 나사로가 죽도록 내버려 두었냐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죽음이 슬펐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눈물의 의미를 몰랐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애통하고 비통해서 우시지 않았다.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이 이토록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 셨다. 또, 나사로를 사랑했기에 죽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그들의 말도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 그들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바램 만으로 주님께서 왜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 나사로가 살아 있을 때 병을 고치지 않으셨는지 아쉬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주님을 자기 편견대로 바라보았다. 주님이 이제껏 행하셨던 기적과 가르침들을 "알고 있었고, 경험도 했겠지만" 결국 주님이 깨우쳐 주신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이해한 대로 바라본다. 맹인을 치유해 주신 분이신데, 좀 더 일찍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 오셔서 고쳐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단지 이런 아쉬움의 마음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영광스러운 부활과 생명에 대한 기대는 아예 없다. 당연하다. 그들은 아직 생명을 다시 불어 넣으시는 하나님이신 주님을 경험하지 못했다. 경험과 지식의 한계 속에서 자신들의 생각의 편견에 갇힌 그들에게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이런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새 일"이었다. 도무지 이해할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뜻 이셨고, 계획 이셨다. 주님은 온전히 그 길을 순종하며 나아가셨다. 사람들이 이해 못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핫기 위한 걸음은 이런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을 헤치고 나아가셔야 할 길이었다.
나는?
-주님의 공감해 주심이 위로가 된다. 하나님이신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아셨고, 희노애락을 경험 하셨기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생의 쓰라린 마음을 잘 아셨다. 그리고 함께 눈물을 흘리신다.
-요즘 공감없는 사람, 슬픔을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난다. 자기 욕심에 빠져 이웃의 고통을 이해조차 못한다. 특히나 사회 지도층의 불감과 불통은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맞나 싶기도 하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고정되어 점점 그 차이가 벌어지는 현실 속에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생각하면 주님의 공감과 슬픔이 얼마나 감사하고 힘이 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몰라줘도 주님은 아시고 함께 공감해 주시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된다. 부활과 생명의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아시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된다.
*주님, 우리의 아픔을 알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때문에 비통해 하며 불쌍히 여겨 주시는 모습에 큰 위로가 됩니다. 그 사랑의 마음 본받아 저도 이웃들과 함께 웃고 울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