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9:1-15 듣는 귀, 받아들이는 마음.... 일보다 사람의 마음이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남았다. 압살롬의 죽음에 몹시 슬퍼하는 다윗에게 요압의 충언인지 협박인지 분별할 수 없는 조언에 정신을 차렸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다윗의 혈율인 유다 지파에게 그를 다시 왕으로 모셔 오는데 앞장서라고 요청하여 마침내 다윗이 왕으로서의 지위로 회복된다.



1.다윗, 듣는 귀가 있다(1-8절)
압살롬을 잃은 슬픔이 다윗을 깊은 통곡으로 이끈다. 그의 슬픔으로 인해 승전하는 군사들이 숨죽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래서 그 날 군인들은, 마치 싸움터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부끄러워서 빠져 나가는 것처럼, 슬며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새번역_3절)

승리의 개선이 아니라 마치 "싸움터에서 도망쳐 나올 때 부끄러워서 빠져 나가는 것 처럼 슬며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대성통곡하고 있었다.(4절) "마침내 요압이 집으로 왕을 찾아가서 항의하였다. 주요 요지는 이렇다. 왕의 모든 부하가 목숨을 걸고 왕과 왕의 아들들과 딸들, 왕비, 후궁들의 목숨을 건져드렸다. 그런데 오히려 오늘 부하들을 부끄럽게 만드셨다. 이는 반역한 무리들은 사랑하고 충성을 다한 부하들은 미워하는 것과 같다. 차라리 우리가 죽고 압살롬이 살았으면 좋았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부하들에게 위로의 말로 격려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에 아무도 왕의 곁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당한 모든 환난 보다 더 무서운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5-7절)

다윗은 요압의 말을 듣고 "일어나(즉시)"왕으로서의 자세를 회복하고 성문에 앉았다.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고대 사회, 성문에는 왕이 재판하는 자리가 있었고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기에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듣는 귀가 분명히 있었다. 요압의 조언을 듣고 "일어나" 통곡의 자리에서 왕의 자리로 돌아갔다.



2.다윗, 용서하는 사람이었다(9-15절)
온 이스라엘은 다윗의 부하들을 제외하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웠다. 특히 다윗이 속한 지파인 유다지파는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압살롬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이제 압살롬은 죽고 온 이스라엘은 참패를 당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 빠진다.

온 이스라엘은 서로 의견이 분분하여 "다윗 왕은 우리를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었다. 블레셋 사람의 손아귀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압살롬을 피해서 이 나라에서 떠나 있다. 우리가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운 압살롬은 싸움터에서 죽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다윗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셔 오는 일을 주저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새번역_9-10절)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들은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묘수를 전달한다. 그것은 자신의 골육지친인 유다 지파 장로들에게 온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소통하여 자신을 모셔 가는 일에 앞장 서라고 한다. 온 이스라엘 지파들의 마음이 이런 상황인데, 자신의 혈육들이 나중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먼저 용서의 마음을 전달한 것이다.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민 다윗의 마음에 도전을 받는다.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은 압살롬이 죽자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고 의견들을 소통하고 있었지만, 반란의 주동 세력이었던 유다 지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때 다윗은 먼저 유다 지파를 용서하고 너그럽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다윗의 이와 같은 마음에 감동한 유다지파는 "마음이 하나같이" 다윗에게로 향하였다. 이렇게 다윗이 모든 유다 사람의 마음을 하나같이 자기쪽으로 기울게 하니, 그들이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부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어서 빨리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새번역_14절)

*먼저 손을 내민 다윗에게 유다 지파가 화답하였다. 먼저 손을 내민 이가 결국 승리한다. 평안을 전하는 이가 이기는 이다.



나는?
-다윗의 "듣는 귀, 용서하는 마음"이 도전이 된다. 묵상하는 시간에 듣는 귀가 더욱 예민해 지기를 바라고, 삶 속에서 말씀대로 순종할 때 먼저 말씀을 따라 순종(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내기를 기도한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들을 수 있을까? 주님께서 나의 귀를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대한다. 어떻게 하면 용서하는 마음을 주저하지 않을까?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너그러이 붙잡아 주시기를 원한다.

-잘 듣는 것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자기 감정과 상황에 취해 적절한 반응의 순간을 놓쳐 버리면 낭패다. 나의 목회가 잘 듣는 귀와 수용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는 여정이었으면 좋겠다. 미워하고 분열하기에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나누고 전하는 귀한 일에 시간이 부족하다.


-반란이 진압되고 압살롬은 죽어서 상황은 일단락 되었지만, 다윗의 마음을 정리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동하게 된다. 승전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을 맞이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큰 슬픔에 빠졌다. 아버지의 슬픔으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왕의 슬픔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왕의 자리가 가장 끈끈한 부자지간의 비극으로 인한 슬픔도 마음껏 표출할 수 없는 무거운 자리임을 보게 된다.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가 아주 가끔 있다. 개인의 슬픔보다 공동체와 성도를 위해 섬기는 것이 더 우선시해야 할 순간들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사명자의 숙명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슬픔이 공동체의 슬픔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나는 지금 슬프더라도 공동체가 기뻐해야 할 순간에는 잠시 슬픔의 고통을 덮고 공동체의 기쁨에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리더십의 자리가 무거운 것이다.


-한편 요압의 행동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든다. 발언의 수위가 정제 되지 않은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목숨을 걸고 반란을 진압한 병사들을 돌아보지 않는 왕의 행동은 백성들의 헌신을 무색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승리를 했지만 패배한 것 같은 마음도 들게 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직언 한다. 발언의 수위가 거의 위협 수준이었지만 다윗은 놀랍게도 그 조언을 받아들인다. 슬픔과 고통을 딛고 백성 앞에 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이 위로를 얻었다.

-나는 상황에 따라 성도들을 향해 직언 해야 할 수도 있고 성도들에게 들어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잘 듣고 잘 말하는 지혜가 나에게 마르지 않기를 바래본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들갑이 눈에 들어온다. 압살롬에게 마음이 쏠려서 다윗을 버리고 그를 따랐지만, 그가 에브라임 수풀에서 죽자 다시금 다윗에게 마음을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모셔와야 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다윗이었지만, 그에 상관 없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인 판단만 내리고 있다. 자기 이익만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대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며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그들이 다시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모셔 와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호들갑을 떠는 모양새가 몹시 씁쓸하다.

*10절은 압살롬을 반란군의 지도자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다윗은 백성들에 의해 폐위 된 것이다. 그러니 다시 왕으로 복권이 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추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지파의 속앓이는 커져 갔다. 다른 지파들처럼 은근슬쩍 호들갑에 동참하면 좋겠지만, 그들은 주동세력 이었다. 고민이 깊을 수 밖에 없다. 다윗도 유다 지파를 고려하지 않고 개선 장군처럼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노련한 정치가이다. 그렇게 하면 유다 지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가 어렵다. 다윗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이런 의중을 유다의 장로들에게 전하게 한 것이다. 유다지파는 다윗이 내민 손을 붙들고 요단강가까지 나와 다윗을 맞이한다.

*다윗에게서 속전속결보다 마음을 다루는 것의 중요성을 배운다. 더디 이루어지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얻으며 가는 것이 정도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혜량이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보인다. 나는 늘 압살롬처럼 반역하는 존재였다. 죄에 죽은 존재였다. 그런데 애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살았다. 나는 늘 나의 이익의 유불리만 따지고 나를 위해서만 변론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셨다. 용서하여 주셨다. 그래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나도 주님의 품에 거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이 아침에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나도 하나님께 이런 사랑, 이런 은혜의 손 내밀어 주심을 경험했다면, 나도 기꺼이 그렇게 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듣고, 이해하고, 먼저 손 내밀어야지... 암 그래야지....



*주님, 다윗의 혜량을 본받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듣는 귀와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십시오.
*주님, 그 사랑 본받아 나도 잘 품고, 먼저 손 내밀겠습니다. 용기를 주십시오!

삼하 18:19-33 자식 농사가 제일 어렵다....

압살롬이 요압과 그의 무기든 청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소식을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재빨리 다윗왕에게 전하려고 한다. 요압은 이를 만류하며 구스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보낸다.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또 다시 자신이 소식을 전하게 해달라고 한사코 청하고 요압은 마지못해 승낙한다.

아히마아스는 구스 사람을 앞질러 다윗에게 이르러 승리의 소식을 전하지만, 압살롬의 안부를 묻는 다윗에게 차마 그의 죽음을 알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내 도착한 구스 사람이 전한 소식에 다윗은 통곡한다.



1.치밀한 요압
요압은 전쟁에서 이기고 압살롬은 사망한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구스 사람을 택하여 보낸다. 왜 그랬을까?

압살롬의 반역의 시기에 다윗에게 주로 보내는 전령은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였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아히마아스는 자신이 이 전쟁의 승리 소식과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요압은 되도록 아히마아스를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먼저 요압은 다윗이 전에 사울왕의 죽음을 전한 아말렉 소년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아히마아스에게 다윗이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요압은 자신이 압살롬을 죽인 것에 대한 노여움을 사는 것을 염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구스 사람이 전령의 역할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달음질을 잘하고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음을 안 요압은 그가 이 소식을 전하므로 다윗에게 받지 않아도 될 대우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2.아히마아스의 회피 혹은 배려?
어찌 되었든지 아히마아스는 다윗에게 먼저 출발한 구스 사람을 추월하여 먼저 그를 만난다. 다윗이 승패 보식 보다 아들 압살롬에 대한 소식을 더 관심을 가지고 묻자 이에 대한 보고는 회피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출정할 때 다윗이 요압과 아비새, 잇대에게 부탁한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말을 그도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탁은 모든 백성들이 들었다고 했다(5절). 아히마아스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요압에게 간청하여 자신이 소식을 전하고자 했고, 구스 사람이 출발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간청하여 달려왔다. 왜 그랬을까? 문맥의 흐름은 아히마아스가 다윗이 압살롬의 신변을 지극히 염려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최대한 충격이 덜하도록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요압이 임명하여 보낸 구스 사람의 보고 내용은 반란을 일으킨 수장에 대한 가감 없는 감정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는 보고이기 보다 대적하여 싸운 원수를 섬멸했다는 기쁨의 보고였다. 압살롬의 죽음과 이에 따른 다윗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는다. "왕이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물었다. "그 어린 압살롬이 평안하더냐?" 에티오피아 사람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의 원수들을 비롯하여,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이 모조리 그 젊은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새번역_32절)

어쩌면 아히마아스는 다윗의 심정을 누구보다 공감한 청년이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전쟁에서의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왕의 치하를 먼저 받으려는 평범한 청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무엘서 저자는 왜 아히마아스의 일화를 이토록 자세하게 기술했을까?

그것은 19절에서 요압에게 자신을 전령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때 말한 내용에 힌트가 있다. "그 때에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요압에게 말하였다. "제가 임금님에게로 달려가서, 주님께서 임금님을 원수에게서 구원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새번역_19절) 그리고 다윗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아히마아스가 왕에게 가까이 이르러서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며, 얼굴이 땅에 닿도록 왕에게 절을 하며 아뢰었다. "높으신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을 없애 버리시고, 임금님께 승리를 안겨 주신, 임금님의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새번역_28절)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을 나와 광야로 나아갈 때 사울 집안 "시므이"는 그를 저주했다. 하나님께서 이제야 심판하신 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서는 시므이 개인만의 정서가 아닐 수 있었다. 압살롬에게 이스라엘의 마음이 돌아서고, 다윗 왕을 제거하는 전쟁에 소집된 온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보았을 때 많은 백성들이 이와 같은 정서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에브라임 수풀에서의 승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다윗의 편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다윗에게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승리라는 것이다. 아히마아스는 이와같은 벅찬 감격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3.통곡하는 다윗(33절)
한편 다윗이 기다리는 소식은 전쟁의 승패보다 아들 압살롬의 안위였다. 아무리 승리하였더라도 아들의 신변에 이상이 있으면 안 되는 마음으로 노심초사하고 성문에서 전령을 기다렸다.치열하게 진행된 전장의 소식을 기다리며 군사들의 안위보다 압살롬의 안위를 더욱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마음으로는 이해가 충분히 된다. 하지만 왕으로서 이런 자세는 쉽게 수긍이 안 된다. 그래서 요압이 슬퍼하는 다윗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면보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 그의 고통과 애통이 충분히 공감이 된다.

"농사중에 제일 어려운 농사가 자식 농사"이다. 지금 다윗은 말년에 자식 농사가 완전 망친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이 아니라 벌써 세 번째이다. 암논이 다말을 범했을 때, 이로 인해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 했을 때, 그리고 지금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다 결국 비참하게 죽은 상호아 앞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사무엘서 저자는 자식의 반란을 마주한 다윗의 반응보다 압살롬이 죽은 소식에 반응하는 다윗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곰곰히 되짚어 보면 사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성경 인물들의 자녀들의 실패가 다윗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기드온의 자녀들, 엘리 제사장의 자녀들, 사무엘 선지자의 자녀들, 그리고 다윗의 자녀들... 하나같이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그들이 권력을 쥐고, 부귀를 누렸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한참 벗어난 삶을 살다가 비참한 결말에 이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는 이미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예시들이 제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엘리, 사무엘의 자식 농사 실패를 보며 배웠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했다.

무엇보다 그의 삶 속에서 자식으로 인해 통곡하고 분노한 일이 끊이지 않았는데, 밧세바와의 첫 아이부터, 암논, 다말의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각성하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도리 하지 않고 거의 방임 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급기야 압살롬의 비참한 죽음 앞에 통곡하고 만다.



나는?
-나의 삶의 말년에 다윗처럼 자녀들로 인해 통곡하는 마무리가 되지 않도록 은혜를 구해야 겠다. 자녀들로 인해 하나님께 통곡과 슬픔 고통을 올려 드리는 인생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도록 자녀들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하겠다.

-자식 마음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도우심을 더욱 구하고 의지할 수 밖에...

-적어도 노년에 자녀들을 바라보며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는 상상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믿고 자녀들을 하나님께 의탁해야지... 성경 속 인물들의 실패를 내가 그대로 답습하지 않도록 해야지...

-아무리 구너력과 명예, 부함을 다 가졌더라도 자녀의 마음이 이보다 귀하고 귀한 것을 늘 잊지 말아야지... 믿음으로 양육하는 자녀보다 소중한 것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지....



*주님, 전쟁 결과 보고 이야기보다 다윗의 통곡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혹시 저의 노년이 이렇게 되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 자식 농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주저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주님, 저는 통곡의 노년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노년이 되고 싶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삼하 18:1-18 허영이 가져온 허망한 죽음

압살롬은 아마사를 군지휘관으로 삼고 온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길르앗 땅에 진을 친다. 다윗은 마하나임에 도착한 후 면밀하게 자기와 함께 있는 백성들을 살펴서 군대 조직화 하였다. 모든 백성을 세 떼로 나누어 요압과 아비새(요압의 동생이자 스루야의 아들), 잇대(가드 사람) 세 사람에게 각각 맡겼다. 그리고 함께 전쟁터로 출정하겠다고 선언하였다(1-2절).

이 때 온 백성은 결코 함께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며 성에 머물며 백성들을 도와 줄 것을 요청한다. 당연한 이치다. 아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아가는 데 직접 전장에 서면 안 될 일이다. 다윗은 성문 곁에 서서 출정하는 모든 백성들을 환송한다.

그러면서 특별히 요압과 아비새, 그리고 잇대에게 부탁했다. "나를 생각해서라도, 저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주시오." 왕이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달라고 모든 지휘관에게 부탁하는 말을, 온 백성이 다 들었다.(새번역_5절) 그렇게 진군한 다윗의 군대는 그 날에만 에브라임 숲속에서 이 만명이나 죽였다(7절). 이 전쟁에서 압살롬도 다윗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요압에 의해 결국 죽는다. 압살롬과 그의 군대는 허무하게 단 한번의 전투로 무너졌다. 왜 그랬을까?



1.압살롬 군대의 패전과 전사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다윗과 함께 한 군사는 약 4천명이었다고 한다. 7절에 따르면 압살롬의 군사들 중 에브라임 수풀에서 죽은 병사가 2만명이라고 했으니 최소 이 만명의 군사가 다윗의 4천 군사를 공격한 것이다. 그럼에도 압살롬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에게 완전히 패한다.

압살롬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자신의 군대가 패배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노새를 타고 도망친다. 그러나 큰 상수리나무 가지 아래로 지날 때 자신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매달리게 된다. 다윗의 부하들이 이를 확인하였고 결국 요압이 창으로 찌르고 주변에 있던 열 명의 부하들이 그를 죽였다. 첫 번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 것이다.



2.왜 패하고 전사 했을까?
삼하 17:14은 아히도벨이 제시한 좋은 계략을 물리치고 후새의 계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심판하시기 위함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혈통적으로 보면 이복형인 암논의 죽음 이후 차기 왕위 계승자는 압살롬이었다. 그렇다면 차분하게 다윗에게 왕이 해야 할 수업을 받았으면 될 일이었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다음 왕은 압살롬 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성급함"이 문제였다.

압살롬의 성급함은 놀라우리만치 치밀하게 반역을 준비하여 실행하고 아버지 다윗을 죽이기 위한 첫 번째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 계획대로 성급하게 덤빈다면 결국 실패하고 만다.


또, 압살롬의 죽음은 그의 지나친 자만심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머리 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머리를 깎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달아 보면,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이나 되었다."(새번역_삼하 14:26) 사무엘서 저자는 압살롬의 외모에 대하여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백성들이 칭찬 하는 사람이었음을 강조했다.

특히나 압살롬의 머리털은 너무도 풍성하고 아름다워서 1년에 한 번만 머리털을 자르고 그 머리털의 무게를 왕의 저울로 달아서 자랑하였다고 까지 언급 하였다. 그런데 그토록 자랑하였던 그 머리털이 너무도 허망하게 그가 죽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자랑거리가 죽음거리가 되어 버렸다.

음... 일단 전쟁에 출정하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압살롬의 머리는 전장에 서는 전사의 머리는 결코 아닐 것이다. 준비가 되지 않는 장수가 전장에 나온 꼴이다. 이는 압살롬은 실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전장에서 길고 아름다운 머리털은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기에 이에 대한 대처가 분명했어야 했을 것인데.... 상황이 그랬었는지 모르지만, 압살롬의 준비는 미숙했다.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서 모인 군사들도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물자적인 준비는 매우 풍성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군세는 최소 2만명이었지만, 이에 맞서 나오는 다윗의 군대는 4천명이었다는 것은 이들의 패배가 전략이나, 규모의 문제이기 보다는 정신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여기에 압살롬은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를 이미 만들어 놓았다. 그 기념비를 놓아 둔 곳을 "왕의 골짜기"로 불렀고, 기념비의 이름을 "압살롬의 비석"으로 명명 하였었다(18절). 반란이 성공하자 의기 양양하게 이를 알렸겠지만, 자신감 있게 출정한 첫 번째 전투에서 허망하게 죽고 만 것이다. 기념비에 걸맞는 삶은 살지 못한 것이다.

이로 보건데 압살롬이라는 인물은 허영심이 가득했고 자기 과시의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외모는 특별하고 허세는 가득했으나, 다윗보다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윗을 능가하는 통치철학이나 지도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훗날 압살롬의 난이 평정되고 다시 평화가 찾아 깃들었을 때 사람들이 랍살롬의 비석(기념비)를 바라보면서 어떤 말을 했을까? 왕의 골짜기에 있는 그 비석은 근처를 지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헛된 것을 추구하다, 허영과 과시로 산 삶의 끝이 자신이 자랑하였던 머리채가 자신을 죽게 만든 어처구니 없는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라고 기억하게 할 뿐이었다.

*한편으로 이런 인물이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왕위를 갈망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자기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자리를 탐하다 결국 수치스럽게 죽게 될 것을 그리 왕권을 집착하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해보지도 못하고 죽은 한심한 사람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혹시 나도 이런 무모함에 취하지 않기를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밖의 것을 추구하며 허여외게 살기 보다 나에게 주신 오늘 이라는 삶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며 감사하며 사는 복된 삶이기를 바래본다.



나는?
-사무엘서는 유독 특출한 아버지 아래 실패한 아들들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다 전장에서 죽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사였지만 아버지의 길을 따르기 보다 자기 부귀영화에 더 마음을 쏟아 뇌물을 받고 재판하기 일쑤였다. 다윗의 아들 암논은 근친강간하여 결국 이복동생에게 죽임을 당했고,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국이고 왕이 되려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전장에서 도망치다 머리채가 상수리 나무 가지에 얽혀서 수치스러운 모양새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아직 이름을 내세울만한 업적도 없는 상태에서 이미 기념비까지 만들어 놓은 어처구니 없는 행동도 불사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은 엘리 제사장의 이야기, 사무엘의 아들들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자신의 시대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그들의 아들들과 다를 바 없는 추락하는 삶을 살게 되도록 무관심, 무반응하였다.

-나는 어떨까? 성경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을 잘 배우고 이를 삶에서 따르고 있을까? 하나님께서 역사의 기록을 통해 이미 보여주신 교훈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하면 그 교훈이 이 시대에는 나를 교훈할 것이다.

-역사 속의 그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교훈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이 모든 과정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을 복기해야 할 것이다. 왕의 범죄가 불러온 백성들의 혼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다윗이 느꼈을 두려움과 후회를 공감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죄에 농락 당하지 않는다.


**요압의 불순종(9-17절)
-다윗이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요압은 이를 외면한다. 본문의 말씀에 따르면 다윗의 부탁과는 달리 압살롬을 죽이는 자에게 은 열개와 띠 하나(11절)를 주었을것이라는 말에 따르면 현상금까지 걸고 죽이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윗의 왕권에 대하여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왕권에 대한 도전이다. 그럼에도 요압은 압살롬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단창을 들어 그의 심장을 꿰뚫는다. 요압은 압살롬을 그술에서 데려왔고, 다윗의 마음을 풀어 그가 압살롬을 만나도록 주선했던 인물이다. 그만큼 압살롬의 반역은 요압에게도 큰 배신감이 들게 했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치더라도 왕의 부탁을 외면하며 철저하게 압살롬에게 응징하는 요압의 충성은 참된 충성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목적한 바를 이루는 행동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요압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내가 하나님께 이와 같은 태도로 살고 있지 않는지를 되돌아 보게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간곡하게 부탁하신 것을 얼마나 충실하게 지키려고 했는지의 도전이 그것이다.



*주님, 허영이 삶의 만족과 승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허망을 채우는 것을 압살롬을 통해 봅니다. 나의 자랑거리가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음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선한 뜻을 따라 오늘 하루도 꿋꿋하게 순종하며 나가겠습니다. 나의 입술만 앞서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요압의 충성이 진실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 혹시 나도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떠들면서 나의 논리, 기준, 입장을 위해 행동하지는 않을까요? 저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삼하 17:15-29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후새의 전략은 아히도벨의 전략을 무력화 시켰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후새는 위급함을 감수하고 이 소식을 다윗에게 급히 전한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선택에 좌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마하나임으로 피난한 다윗에게 세 사람이 찾아와 필요들을 채워준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1.긴박한 후새와 동역자들(15-21절)
압살롬의 오판으로 다윗은 피난의 시간을 벌게 된다. 후새는 이 소식을 지체하지 않고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아릴고 빨리 사람을 보내서 "광야 나루터"에서 밤을 보내지 말고 강을 건너라고 전한다. 그렇지 않으면 몰살 당할 거라고 경고한다(15-16절).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과 사독의 아들 아하마아스는 성 밖의 로겔 샘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윗왕에게 소식들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압살롬에게 밀고를 당한다.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난 줄 알고 기지를 발휘한 한 여인의 도움으로 우물에 숨어 위기를 모면한다(17-20절). 재빨리 다윗에게 달려가 후새의 소식을 전달하고 날이 샐 때까지 다윗을 따르는 모든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넜다(21-22절). 그리고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러서야 압살롬은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 땅에 진을 쳤다(24-25절).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윗을 위한 충성이 귀하고 귀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반역의 무리에 동참하기를 거절하고 충실하게 다윗에게 충성하는 이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다윗은 후일을 도모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은 헌신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합을 통해 단단히 세워져 간다.

*우리 공동체도 함께 마음을 모으고, 더욱 주님의 뜻에 가까이 서기 위해 서로 도우며 서 나가기를 기대한다.



2.마하나임의 귀인들, 반전의 은혜(27-29절)
한편 요단강을 건너 들어간 마하나임에서 암몬 족속의 도성 랍바에서 소비(나하스의 아들), 로데발에서 마길(암미엘의 아들), 로글림에서 바르실래(길르앗 사람)가 찾아왔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배신 당한 다윗과 그 무리들을 위해 "침대, 이부자리, 대야, 질그릇, 밀과 보리, 밀가루, 볶은 곡식, 콩과 팥과 볶은 씨(28절), 꿀과 버터, 양고기와 치즈(29절)를 가져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들은, 그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치고 목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꿀과 버터와 양고기와 치즈도 가져다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새번역_29절)

"그들이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치고 목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자발적으로 챙겨 온 것이다. 전쟁통에 고통 받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린 것이다.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의 애환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먹을 것, 마실 것 뿐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용품도 챙겨왔다. 즉, 전쟁물자를 챙겨 온 것이다.

*온 이스라엘은 압살롬의 편에 서서 다윗을 배신 했지만, 이방인 암몬 족속은 다윗을 배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도리어 충성한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도움을 역시, 서로 연대하여 힘을 합해 준비해 왔다.

*이스라엘은 다윗을 배신 했는데, 이방인은 충성한다! 이 기막힌 반전의 은혜가 다윗을 충분히 위로하고 격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다윗을 도왔을까? 먼저 소비는 암몬 족속의 나하스의 둘째 아들이다. 일전에 나하스의 장례때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단을 하눈이 조문단의 수염을 깍고 의복을 잘라 조롱하고 내쫓은 사건으로 인해 다윗이 공격하여 정복할 때 소비가 암몬의 왕이 되도록 돠와 주었다. 이 은혜를 기억하고 다윗이 어려운 때 직접 나와 영접한 것이다.

또한 마길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도왔던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울 왕가의 사람이기에 다윗의 대적일 수 있는데,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고 극진히 대우하고 돌보자, 다윗에게 위기가 닥치자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같이 찾아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머무는 마하나임 주변의 성인 로글림의 큰 부자였고 당시 나이로 약 80세의 지역 원로였다. 그는 다윗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다윗의 통치 기간동안 훌륭하게 나라를 통치하여 자신이 사는 지역에 평안을 누리고 있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들이 챙겨서 가져온 물자들은 앞으로 압살롬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될수 있는 군량미과 필수품들이었다. 이 물품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형식적으로 다윗을 영접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며 앞으로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물품들로 채워서 찾아왔다. 다윗의 군대가 충분히 싸울 수 있는 병참이 채워진 것이다.

*다윗의 피난길은 급히 떠나왔기에 모든 부분에서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소비와 마길, 바르실래가 찾아와 그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워 주었다. 그들의 방문은 다윗과 그의 군대들에게 충분한 재정비의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새 힘을 얻어 전쟁 준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윗에게 은인들이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세 사람을 통해 필요를 채움 받은 듯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보내셨음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감람산을 맨발로 오르며 통곡하며 간구한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다. 시편 3편의 간구들에 응답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후새와 사독, 아비아달, 요나단, 아하마아스, 한 귀한 여인, 소비, 마길, 바르실래를 연이어 보내시며 다윗과 함께 하여 주심을 보여 주셨다. 다윗의 간구를 기억하셨고, 다윗의 필요를 채울 이들을 그저 황량한 마하나임의 광야에서 채움 받는 경험을 하게 하셨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아침마다 내리는 만나로 배를 채우며, 낮의 뜨거운 열기를 구름 기둥으로, 밤의 추운 한기를 불 기둥으로 도와 주신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을 채우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3.아히도벨...(23절)
본문에서 간략히 그의 최후를 기술하지만, 꼭 되짚어 봐야 할 인물이 아히도벨이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과적인지만, 다윗에게도 인정 받았던 모사인 그가 압살롬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이치다. 장남은 이미 죽었고 존재감 없는 둘째는 이미 논외가 되었다. 그리고 출중한 외모에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셋째 압살롬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일 터이다.

그렇지만, 방법이 잘못됐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정당한 절차와 방법으로 지도자 경쟁에 서도록 도와 주었어야 했다. 그에게 왕에게 어울리는 성품과 인품을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압살롬의 모사로 서는 것을 선택했다.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선 압살롬은 가까이서 보니 더 형편없는 지도자임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헤브론에서 봉기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예루살렘에서 다윗에 대한 그의 계략을 너무도 가볍게 무시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지도자로서 상호아을 읽고 판단하는 안목이 형편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후새라는 인물이 내놓은 자신이 보기에 너무도 형편없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자신이 선택한 왕이 통치철학도 없고 정세를 바라보는 안목도 없으니 좌절했다.

압살롬이 자신의 계략을 외면하자 그도 미련없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여정서 절망스런 마음과 고뇌를 되새기며 갔는지, 집에 도착하여 집안 일을 정리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사무엘서 저자는 아히도벨이 이렇게 한 이유를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라고 진단했다. 압살롬의 말로가 어떻게 될 지 그의 지혜로운 안목으로 뻔히 보인 것이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그 지혜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올바로 가르치는대 활용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가시질 않는다. 자신이 인정하고 추대한 압살롬의 한계를 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절망감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미련없는 책임을 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압살롬을 겪어보니 희망이 아니라 절망속에 사는 삶이라면 차라리 죽음이 낫다고 여긴 것이다.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도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지혜에 자신이 발목을 잡혀서 너무도 기본적인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또 생각했더라도 그 긍휼을 기댈 용기가 없었다.

*나의 선택과 결정이 때로 절망과 한숨에 휩싸이게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다시"라는 기회를 기꺼이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주님께로 나아가면 언제든지 "다시"라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그러니 주님께 나아감을 스스로 포기하면 안 된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쉽사리 포기하지 말자.



나는?
-다윗이 피난길의 여정을 요단 동편의 마하나임으로 잡은 이유가 무엇일까? 묵상을 하다 왜 요단강을 건넜을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천혜의 자연적인 방어선을 기댄다는 전략적인 이유일 수 있겠지만 왜 "요단 동편 마하나임"이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자리잡은 지리를 잘 이해하고 당시 정치적인 역학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일단 요단 서편,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헤브론이 위치한 유다 지파, 그리고 사울 왕가의 지파 베냐민, 가장 규모가 큰 지파이지만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에 밀려 지도자를 배출하고 있지 못하는 에브라임 등이 자리 잡은 유다 중앙 산지 지역은 압살롬의 반역세력의 근거지이기 때문에 어디로 피신 해도 다윗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암몬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역이었다. 실제로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기다렸다는 듯이 구호물품을 가지고 방문했다는 것도 이 지역의 다윗에 대한 정서가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마하나임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상대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물론 요압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이곳에 머물러 있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흐름들을 주관하고 계셨기에 다윗의 마음에 요단 강을 건널 생각과, 마하나임에 거할 계획을 주신 것이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반란 가운데 함께 계심을 다윗에게 확신시켜 주셨다. 후새와 사독, 아비아달를 통해, 그들의 아들 요나단과 아하마아스, 한 귀한 여인의 목숨을 건 충성을 통해서 보여 주셨다. 또, 소비와 마길, 바르실래를 통한 위로로 확인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주님, 다윗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들을 통해 내가 바라보아야 할 공동체를 봅니다. 서로의 안위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구체적으로 돕기를 "넘치도록 돕는" 하나님 나라 가치에 충성된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자기 지혜에 빠져 스스로 절망을 불러들이는 삶이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주님의 긍휼을 더 의지하는 겸손함으로 "다시"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는 결국 "충성과 헌신, 위로와 격려의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때로 배신하는 이들도 찾아오겠지만, 여전히 함께 있어주는 이와 같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는 증거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삼하 17:1-14 압살롬의 패착... 하나님의 계획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두 번째 전략을 제안한다. 다급히 도망친 다윗과 끄 무리들을 신속하게 뒤쫓아 다윗만 암살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사안으로 볼 때 자신이 직접 1만 2천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겠다고 이야기 한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작전이 매우 좋은 전략임을 알았지만, 웬일인지 다윗의 부하였던 후새에게 다시 전략을 묻는다. 후새는 도망하는 다윗에게 좀 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이 지략을 총동원하여 압살롬이 직접 출정해야하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는 온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해서 다윗의 무리들을 압도해야 한다고 했다. 압살롬은 결과적으로 후새의 전략을 받아들였다. 압살롬은 왜 그랬을까?



1.주인공은 "나"이어야 한다!(1-3절)
아히도벨이 첫 번째 전략에 연이어 압살롬에게 재촉한 전략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전략이었다. 1-3절까지 아히도벨은 자신의 전략을 소개하는 부분에는 "내가"라는 표현이 각 구절마다 1회씩 표현된다. 총 4회의 "내가"라는 표현속에서 느껴지는 아히도벨의 확고한 전략 수행의지가 돋보인다. 압살롬의 안전을 고려한 듯한 지혜로운 전략이었다.

그런데 압살롬은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확고함이 있는 듯 하다. 11절은 이렇게 언급한다. "그러므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을 임금님에게로 불러모아서,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군인을, 임금님께서 친히 거느리고 싸움터로 나가시는 것입니다."(새번역) 이 구절에서 "임금님에게로.... 임금님께서"라는 표현을 통해 압살롬의 허영심과 교만을 자극한다. 역시나 허영심과 교만이 풍성한 그는 "탁월한" 아히도벨의 계략은 외면하고 자신이 한껏 드러날 수 있는 후새의 무모한 계획에 적극 동참한다.



2.하나님의 계획(14절)
압살롬에게는 다윗도 인정한 지혜로운 모사 '아히도벨'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다윗은 피난길에 아히도벨도 압살롬에게 합류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삼하 15:31). 과연 이 기도대로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을 심판하시려고 움직이신 것이다.

압살롬의 마음 속의 깊은 욕망, 다윗을 넘어서려는 욕구에 지혜로운 전략보다 듣기 좋은 전략, 그러나 한 없이 무모한 전략을 선택하게 하신 것이다. 결국 실패는 자신의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돌보는 이는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자신이 좋아하는 말을 취하기보다 지혜로운 이들의 지혜를 받아들인다. 스스로 자충수에 빠지지 않도록 들을 귀를 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당부하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는 당부를 소홀히 여겨서는 곤란하다.


*내가 원하는 그림을 가득 그려놓고 그대로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마음과 선한 뜻을 분별하며 그 가치를 따라살아내기 위해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을 게을리 말아야 한다. 하얀 도화지를 놓고서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대로 스케치부터 시작하자... 이미 채색까지 끝난 그림대로 이루어 달라고 알라딘의 램프처럼 하나님 앞에 서면 안 된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아직 온 이스라엘에 새로운 왕조의 체계를 입히기도 전에 이미 오랫동안 왕좌를 이어온 듯한 무모한 결정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아히도벨의 현실적이고 지혜러운 전략은 자신의 체면과 맞지 않다고 여길 정도로 그의 마음은 교만해져 있었다.

*이런 압살롬의 모습이 오늘날 나에게 숱하게 스쳐간다. 그래서 착찹하다.




*주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이 무모한 전략을 선택하게 했음을 봅니다. 나의 욕망이 아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지혜를 듣겠습니다.
*주님, 결국 말씀대로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기억하여 늘 주의하겠습니다.

삼하 16:1-23 혼란한 시기, 다양한 사람들

다윗의 도피 생활 중에 일어난 마음이 꺾이는 사건들을 다룬다. 특히 이 과정에서 다윗에게 헌신적인 신하들과 적대시하는 이들의 모습을 대조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



1.시바(1-4절)
감람산을 지나 광야로 들어서기 전에 므비보셋의 하인 '시바'가 음식을 챙겨서 나아왔다(1절). 시바는 음식을 싣고 온 나귀 두 마리는 다윗의 가족들이 타고, 빵과 여름 과일은 신하들이 먹고, 포도주는 누구나 광야에서 기진할 때 마시라고 가져왔다고 말한다(2절). 이 말을 듣는 다윗은 감동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바가 섬기는 므비보셋은 압살롬을 지지하고 예루살렘에 있다는 말에(3절) 확인절차도 없이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가 가질 것을 명령한다(4절).

시바는 사울의 신하였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전 재산을 주었고 그 관리를 시바에게 맡겼었다. 그런데 다윗이 압살롬에 쫓겨 예루살렘을 떠날 때 시바는 음식을 한 아름들고 찾아와 다윗을 위로하면서 므비보셋을 모함한다. 결국 자기가 섬기는 주인의 재산을 혼란한 시기에 찬탈하고 만다.

*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 거짓말을 마다하지 않는 전형적인 사람이다. 예사로이 거짓과 친구처럼 지낸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이 당연하게 보인다.

*다윗은 쫓기는 와중에 시바가 가져온 나귀와 음식들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바의 말만 듣고 경솔한 판단을 내린다. 십분 그럴수 있을 것이라 이해가 된다. 눈 앞에 놓인 음식들과 과일, 그리고 포도주 더미들은 이제 막 시작된 도피 생활의 든든한 격려가 될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바의 말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확인하고 공치사를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아쉽다.

*살다보면 마음이 앞서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꽤 있다. 특히나 어려울 때 큰 위로와 격려를 맛보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시바의 행동을 기억하고 조금만 더 신중해 지자.



2.시므이(5-8절)
바후림 마을에 가까이 이를 때 사울 집안의 친척인 시므이가 따라 붙으면서 줄곧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한다. 다윗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 불한당이라고 저주하며 사울의 집안 사람을 다 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 피값을 갚으신다. 압살롬의 손에 넘기신다. 이는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라고 외친다.

시므이도 사울의 신하였다. 그는 사울에게서 다윗에게 왕권이 이전되는 과정에 꽤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다윗이 파난을 가는 길목에 나타나서 험담과 욕설, 돌을 던지며 저주하였다.

*그의 저주는 전혀 맞지 않는 가짜뉴스다. 그에게는 블레셋의 손에 사울왕과 그의 아들들이 죽은 것과 그의 집안에 멸문지화를 당한 것에 대한 왜곡된 뉴스가 있었다. 다윗과 상관 없는 최후였지만, 마치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인냥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 불한당"라고 비방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야 압살롬을 통해 그 죄값을 받으신다고 통쾌해 한다.

*진실을 알고 있어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고 듣고 말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사실보다 자신의 뇌피셜을 더 사실처럼 여긴다. 이런 자세는 말씀을 말씀으로 듣지 않고 자신이 듣고 싶은 뇌피셜로 듣게 한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읽고 들어도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 가능성이 크다. 두려운 일이다.



3.아비새(9-14절)
시므이의 저주는 집착에 가까웠다. 호위병에게 둘러 싸여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 이 모습을 보고 듣고 있던 아비새는 격분하여 당장 그의 머리를 자르겠다고 아뢴다(9절). 하지만 다윗은 이렇게 대답한다. “스루야의 아들아, 나의 일에 너희가 왜 나서느냐?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삼하 16:10 새번역) 그리고 모든 신하들에게 말했다.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저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혹시 주님께서 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한 저주 대신에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삼하 16:11~12 새번역)

*아.... 다윗의 마음이 매우 유연해 졌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에게 보였던 편향된 모습과 또 다르다. 생각이 깊어지고 태도가 매우 유연하다. 이제 막 압살롬을 피해 도피하는 생활을 시작한 짧은 시간들이 흘러 갔지만, 다윗의 성품이나 인격이 성숙 했음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아비새를 만류하며 그의 칼을 내려놓게 한다.

*한편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들으며 억울했을 것이다. 그의 저주의 말에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의 말은 모함만이 가득한 말들이었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굳이 자신이 직접 하지 않더라도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억울하니 자신의 입장을 전혀 몰랐을 시므이를 불러다 앉혀 놓고 조근 조근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시므이는 다윗의 입장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이런 그를 상대로 얼마나 설명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다윗은 어떤 변명도, 칼을 들어 시므이를 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담담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무엇보다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 자체만으로는 억울하고 틀린 말이지만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더 악한 죄를 기억하고 스스로 그 저주를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계심을 믿으며 자신이 한 일과 당하는 일의 연관성을 굳이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직면하며 자신의 과거로 인해 당하는 억울함을 보시고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 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아마도 감람산을 오르며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 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수긍이 간다. 다윗의 예리하게 날 선 영성이 돌아왔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보고 듣고 생각한다. 시므이의 일방적이고 무식한 저주도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바라는 신앙고백으로 승화시킨다. 나에게도 이와 같은 예리하게 날이 서 있지만, 유연하고 부드러운 영성으로 목회하기를 갈망한다.

*아비새의 충성스러움도 눈에 띈다. 무수한 호위병들이 있었지만 시므이의 저주에 반응한 사람은 아비새 뿐이었다. 묘하게도 이렇게 막장의 저주와 같은 사건이 너무도 허망한 히든 카드로 설명이 끝난다.



4.후새(15-19절)
다윗의 충성스러운 신하 후새가 거짓으로 압살롬에게 전향했다. 자신의 다윗을 향한 복심을 숨기고 예루살렘에 이제 막 입성한 압살롬에게 나아가 충성을 맹세한다. 후새 자신이 다윗의 친구임을 압살롬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친구를 대하는 그대의 우정이오? 어찌하여 그대의 친구를 따라서 떠나지 않았소"(새번역_17절) 라고반응하였다.

*그럼에도 압살롬도 귀가 얇아서 인지 진지한 마음의 판단이 아쉽다. 아마도 다윗이 예루살렘을 빠져 나간 것에 대한 승리감에 고취되어 예리하게 판단하지 못한 듯 하다. 이런 압살롬에게 후새는 "주님께서 뽑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뽑아 세운 편이 되어 함께 지낼 작정"이라고 고백하며 접근한 것이다. 후새는 압살롬에게 자신이 이제 누구를 섬기겠냐고 반문하며 전에 부왕을 섬긴 것 처럼 섬기겠다고 다짐하였다(18-19절).



5.아히도벨(20-23절)
그는 다위싀 모사였지만 압살롬의 모사가 되어 새로운 왕권 창출에 앞장 섰다. 결정적으로 다윗 왕이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둔 부인들과 동침할 것을 첫 번째 정책 건의로 내어 놓는다. 이와 같은 행위는 다윗 왕에게는 패배감을, 압살롬과 함께 하는 무리들에게는 한껏 사기를 드높이고 더욱 단단하게 결집시키는 효과를 가져 올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이렇게 임금님께서 부왕에게 미움받을 일을 하였다는 소문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면, 임금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더욱 힘을 낼 것입니다."(새번역_21절)

사무엘서 저자는 이와같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새번역_23절)

어떻게 이렇게 기막힌 묘수를 생각할 수 있느냐이다. 그런데 이런 극찬의 표현중에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라는 평가가 몹시 씁쓸하다. 이와같은 표현은 그만큼 아히도벨의 지혜와 지략이 뛰어나다는 표현 이겠지만, 당시 관습상 다윗의 후궁들도 엄연히 압살롬의 어머니들이었다. 이방나라에게 점령 당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아들에게 어머니가 그것도 백주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지켜볼 수 있는 가운데 이런 짓을 하라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 여쭙고 받은 말씀처럼 인식하다니.... 몹시도 씁쓸하다.

*설마 진정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의 입에 이런 말을 담아 주셨을리 없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시다. 사람의 생각이나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분이시지만, 인륜을 무시하는 분은 아니시다.

*사람들이나 다윗이나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말을 이와같이 여기는 것은 평소에 그의 지략과 지헤가 그만큼 예측을 불허할 만큼 지혜로웠다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반란의 무리가 예루살렘에 아무런 저항 없이 입성하고 이제 제 딴에는 가장 먼저 중요하게 해야 할 것이라면 내놓은 정책이 다윗의 부인들을 공개적으로 범하게 하여 다윗의 왕위를 계승 했다는 것을 백성에게 보여 주려한 끔찍한 범죄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행위는 밧세바 사건 이후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선언 하였던 하나님의 저주(삼하 12:11-12)의 성취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러한들 압살롬이 이 저주를 성취하는 당사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다윗이 암몬과 다말 사건만 적절하게 처리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을 수 있다.



나는?
-시바의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에서 나라와 민족의 혼란이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기회로 밖에 보지 않는 비열함과 이기적인 모습이 보인다. 자신만 잘 된다면 나라의 흥망성쇠는 아랑곳하지 않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다. 혼란한 틈에 거짓된 모함을 능청스럽게 잘 활용하여 잠시의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런데 아주 잠시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악은 오래가지 못하게 하신다.

-오늘날 시바와 같은 무리들이 드러내놓고 모함과 속임수로 나라와 민족을 혼란스럽게 한다.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기의 시대에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망과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상관 없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한다. 너무도 뻔뻔스럽기에 깊은 한숨만 나온다.


-시므이의 편향된 뇌피셜이 광야로 향하는 다윗을 직격했다. 자기들의 이익과 정치적 야욕을 위해 확성기를 틀어대며 온갖 혐오스러운 말로 난동을 부렸던 이들이 생각나게 한다. 그들의 배후에서 끊임없이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이들도 생각난다.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대로만 해석하는 그들의 뇌피셜이 아비새처럼 분노하게 만든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시므이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질책으로 듣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계기로 삼는다. 겸손하고 유연해진 다윗이 오히려 더 놀라울 지경이다. 얼마나 답답할지 가늠하기도 곤란한 광야로의 도피 생활 초입에 만난 시므이의 인격살인에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므이의 광란의 저주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칼을 빼려는 아비새의 마음을 진정 시키며 이 모든 수치를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모든 것이 잘 되는 권력의 정점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감람산을 맨발로 오르며 통곡할 때 회복된 하나님을 향한 예리한 영성이 인간적인 분노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하였다.

*오랜 시간 자기 마음대로 반응하고 결정하였던 것에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마음과 뜻을 가늠하며 결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하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에서 진정 필요한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을 먼저 회복 시켜 주셨다.


-아히도벨의 첫 번째 정책이 다윗의 왕권의 권위를 백성들 가운데서 철저히 무너뜨리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의 혼란과 분열의 시간 직후 처번째로 내어 놓은 정책이 전 정권 탄압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인격살인"이었다. 세상은 늘상 이런 형태로 권력이 이어져 왔다. 세상에서는 당연한 방법이고 이치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시기에 그 왕권을 대리통치하는 인간 왕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야 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나 다윗,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지혜와 지략을 당연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신뢰하였다.

-그런데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세상보다 더한 추잡스러운 첫 번째 전략적 정책이라니....압살롬조차 "이제 우리가 무슨 일부터 해야 될지 의견들을 내어 보시오(새번역_20절)" 했을 때 예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정책들이 사람들에게는 마치 하나님의 응답처럼 여겨진 것도 통탄스럽다.

*마치 오늘 날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말을 천연덕스럽게 전하는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들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성경과 상관 없는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 양 스스로 자부하고 착각하며 전하는 목사들도 문제인 것이다.

*다윗의 통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별력이 평안한 태평성대의 시간을 지나며 무뎌 질대로 무뎌 진 것이고, 모사로서 자신의 정책 건의 무게를 하나님 앞에서 생각한다면 결코 낼 수 없는 정책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첫 번째로 낸 아히도벨의 마음도 도무지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 없는 것 이었음을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의 입에서 전해지는 말의 무게를 늘 잊지 않아야 하리라.




*주님, 다윗 주변의 사람들의 면면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먼저임을 늘 잊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시바나 시므이 같은 이들이 더욱 우리의 정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럴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올곧게 살아가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나의 이익보다 손해가 되더라도, 나의 명예가 드높여지지 않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말씀에 곧은 생각, 따듯한 성품으로 살기를 결심해 봅니다. 도와주십시오.

삼하 15:24-37 위기와 절망을 직면할 때...

예루살렘 성을 떠나는 다윗의 뒤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충성스럽게 따른다. 사독과 아비아달, 그리고 모든 레위인들은 다윗이 가는 곳 어디나 언약궤를 모시고 동행할 태세였다. 언약궤를 통해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했다(24절).

그런데 다윗은 이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낸다(25-26절). 아비아달은 대제사장이었고, 사독은 그가 대제사장일 때 언약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궤를 수종 들었던 아비아달의 부관이었다. 다윗은 그에게 압살롬이 아무리 나쁜 자이어도 언약궤는 해치지 않을 것이라며 성으로 다시 메어 가라 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전략적으로 압살롬 무리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 제사장 사독을 예루살렘에 돌려 보낸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독이 적임자였던 것은 그가 선견자였기에 압살롬에게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27-29절, 35절). 그는 성 안에서 압살롬의 정황을 다윗에게 알려 줄 것이다.

그리고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편 감람산을 심히 슬퍼하며 맨발로 오른다. 다윗과 함께 한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올랐다(30절). 그때 누군가 반역의 무리에 아히도벨이 있다는 말을 전한다. 다윗은 "주님 부디, 아히도벨의 계획이 어리석은 것이 되게 하여 주시십오(새번역_31절)"라고 기도하였다. 통곡 하며 오르는 감람산은 하나님을 향해 날선 영성이 다시 일깨워지는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른 감람산 꼭대기에는 "아렉 사람 후새"가 슬픔을 못이겨 겉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 쓴 채 다윗을 맞는다(32절). 다윗은 그에게 이중 스파이 임무를 준다. 그리고 사독과 아비아달에 무슨 말을 듣든지 전달 하라고 명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들인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시켜서 자신에게 말을 전달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32-36절). 그런데 사무엘서 저자는 이 후새를 "다윗의 친구"라고 기록한다(37절).

피난길에 오른 다윗은 자신이 직면한 곤란한 상황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지혜를 동원한다. 그는 어떻게 이 상황을 직면하고 있는가?



1.온전한 신뢰(25-26절)
다윗의 피난길을 묘사하는 구절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의 궤를 다시 도성 안으로 옮기시오. 내가 주님께 은혜를 입으면, 주님께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이 궤와 이 궤가 있는 곳을 다시 보게 하실 것이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싫다고 하시면, 오직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이루시기를 빌 수밖에 없소."(새번역_25-26절) 이다.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는 기색이 없다. 도리어 더욱 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 그의 신뢰는 하나님의 궤를 에루살렘에 돌려 보내는 모습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비록 피난을 떠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를 주심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언약궤가 있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피난의 상황의 참담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절망감이나 좌절감을 어떻게 공감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와 같은 참담한 상황에서 원망과 포기의 감정이 북받쳐 오를 법 한데,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믿는다.

아.... 다윗의 날 선 영성이 회복 되었다.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역전 시키실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제어하고 계심을 철저하게 신뢰하였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려 보내는 행동은 눈에 보이는 궤와 함께 하는 것보다, 그 궤를 통해 확인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에 안전이 달려 있음을 보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굳이 가지고 갈 필요 없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증명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안위를 위해 광야로 함께 내어 갈 수는 없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언약궤라는 물건과 함께 있어서가 아니라 언약궤를 통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한다는 의미이다. 나 이렇게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는가?



2.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30절)
"다윗은 올리브 산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새번역)

피난 가는 다윗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저자가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지만, 저자는 우직하게 피난을 떠나는 왕의 모습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세밀하게 그의 모습을 묘사한다.

"머리를 기리고 맨발로 울면서..." 이런 조절과 낙망, 슬픔이 묻어나는 피난길의 묘사가 또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들 압살롬의 무리들을 피해 도망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무책임하고, 무관심했던 자녀들의 문제에 대한 태도들을 깊이 각성하고 회개하고 또 했을 것이다.



3.기도와 치밀한 대응(행동_31절, 32-37절)
12장 이후 다윗에게 간구하는 공식적인 모습이 드디어 등장했다. 암논의 만행에도, 압살롬의 살인에도 그저 분노만 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은 것도 문제였지만, 이 과정에서 고뇌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더 안타까웠다.

그런데 드디어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이 짤막한 기도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곳이 그가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날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편 3편의 간구시이다. 시편 3편은 당장의 문제 해결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인도허심을 신뢰하는 굳센 의지의 찬송이었다.

각지의 전령들이 온 이스라엘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돌아섰다는 보고를 들을 때, 다윗은 감람산을 오르며 고백하고 또 고백했다. '나를 치려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사람들이 하나님도 나를 돕지 않는다고 빈정댑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어도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구원이 주님께만 있습니다!...."(시편 3:1-8)

*진정 놀랍지 않는가!

이렇게 기도한 다윗은 감람산 꼭대기에서 자신을 맞이한 후새에게 전략적 이중 스파이 임무를 맡긴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주신 감동을 따라 놀라우리 만치 침착하게 전략을 풀어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절망으로 내몰려도 그 마음을 평온케 하여 주시고 이성은 차갑게 식혀 주셔서 조급하지 않게 대응하도록 지혜의 영을 부어 주신다. 후새에게 이르는 전략 한 마디 한 마디가 훗날 다윗의 위엄을 신하들에게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들이 되었을 것이다.

*위기와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의지하는 이에게는 이와 같은 "폭풍속의 평안함"과 "치밀한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침착함을 허락 하신다.



나는?
-참담했을 피난길이 하나님과 내밀해지는 찬란한 길이 되었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하나님과 교제하고 의지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사울을 피해 광야를 전전할 때 민감하게 하나님께 반응하던 그 영적감각이 감람산을 오르며 회복되어졌다.

-역시 믿음의 세밀한 결은 여전했다. 다만 지난 세월 동안 갈고 닦여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의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믿음의 결을 예리하게 세웠다.

-고난과 환난, 절망과 한숨이 믿음을 감추려는 덮개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열어진 입과 마음의 통곡에서 오는 눈물은 믿음의 결을 더욱 예리하게 세우는 부싯돌과 같다. "주님 앞에서 통곡하는 눈물을 주님은 외면하실 수 없다."


*피난길이 절망의 길이 아니라 날선 영성의 회복의 길이 되었고 장차 다윗의 나라도 다시 회복되는 입구가 되었다.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시편 3편) 놀라우리만치 침착하게 압살롬의 난을 평정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한다.

*매우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이 때의 판단이 향후 압살롬의 난을 평정할 중요한 결정이 되었다. 믿음으로 되돌려 보낸 궤로 인해 아비아달, 사독은 압살롬에게 별 의심을 받지 않게 되었고, 압살롬이 예루살렘 성에 도착할 때 성에 들어간 후새도 겉으로 보기에 자연스럽게 압살롬의 무리들을 맞이하는 형세가 되어 그들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들의 내밀한 통치정보들이 후새와 아비아달과 사독의 아들들을 통해 다윗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 되었다.

*지피지기이면 백전불패라고 했다. 다윗은 압살롬의 내부를 훤히 꿰뚫을 진용이 갖춰졌고, 압살롬은 다윗에 대하여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 반란은 이 순간 다위에게로 전세가 기울었다.


*이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는다. 백성들도,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더욱 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으며 온전한 신뢰로 나아가는 다윗에게 때를 놓치지 않고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배치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나의 능력, 지식과 지혜, 함께 하는 사람들을 꿰고 꿰어서 적재적소에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아니면 안 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외면치 않으시고 도울 길을 여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무도 감격스럽다.



*주님, 상황은 필패인듯 한데, 그 가운데서 필승을 준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아비아달, 사독, 그리고 그의 아들들, 후새....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무엇보다 다윗이 하나님께 다시 입을 크게 열었습니다. 입을 크게 여니, 그 위급한 상황에서 지혜의 입술을 열도록 해 주셨습니다. 저도 늘 하나님께 먼저 입을 열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입으로 말하겠습니다.

삼하 15:13-23 백성들이 서로 싸우게 하지 않도록 선택한 광야 길....

압살롬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다윗은 신속하게 판단했다. "서둘러서 모두 여기에서 도망가자. 머뭇거리다가는 아무도 압살롬의 손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어서 이 곳을 떠나가자. 그가 곧 와서 우리를 따라잡으면, 우리에게도 재앙을 입히고, 이 도성도 칼로 칠 것이다."(새번역_14절)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의 소식을 듣고 첫번째로 반응한 첫 마디는 "일어나 도망가자(새번역_여기에서 도망가자)" 였다. 다윗은 자신의 무리들과 도성도 칼로 칠 것이 뻔하게 예상되는 압살롬의 행동에 주목했다. 불가피하게 압살롬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예루살렘 성의 파괴 뿐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단 예루살렘 성에서 압살롬의 군대를 맞이하면 '피할 길'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압살롬이 이르기 전에 빨리 성을 벗어나고자 했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백전노장의 혜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 당장의 전투에서 지는 것보다 전쟁 자체를 승리하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불리하고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다윗의 판단은 신속한 도피 결정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과연 다윗처럼 백성들의 안위, 사람의 생명에 가치를 두고 결정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런 가치를 지닌 지도자가 다윗이었다.

*또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압살롬의 군대를 정면으로 대면하기 보다 상황을 지켜보며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결정에 신속한 다윗을 보게 된다. 급하고 어려울 수록 그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좁혀 질대로 좁혀져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윗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고 차분하게 반역 사건을 다루고 있다. 경험 많은 통치자의 연륜이 느껴진다.


그런데 한편으로 급히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였다.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듣고 성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적어도 나단 선지자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저주가 생각나지 않았을까? 칼이 집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의 처들을 백주에 범하리라(삼하 12:10-11)는 말씀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급박한 순간이었지만 아쉽고 아쉽다.


다윗의 피난길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처럼 여전히 죽기까지 충성을 다짐한 충신들이 함께 하였다. 압살롬은 "그저 따라가기만 한(11절)" 사람들이었다면, 다윗을 따르는 이들은 달랐다. 특히 다윗을 다르는 이들을 보면 "그렛 사람, 블렛 사람,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600명"(18절)이 다윗의 앞에서 행진을 하고 다윗의 뒤를 따라 '모든 백성과 모든 신하들'(17-18절)이 따라 나왔다.

*참으로 곤란하고 참담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을 나와 유대 광야로 가는 것만 정했지,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나왔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 속의 다윗 어떻게 이 절망을 맞이하는가?



1.지극히 사람 중심,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14절)
다윗은 매우 현실 적이었고 그 판단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순간의 다윗보다 더 신속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생명 존중"의 마음이 있었다. 속히 피하는 이유는 압살롬의 칼날로 부터 "한 사람이라도 피하지 못할까"하는 것이었다. 또 자신이 성에 머물므로 백성들의 피해가 일어날 것을 원치 않았다. 압살롬의 칼날이 성읍을 칠까(14절) 염려하였다.

어떻해서든지 백성들을 방패 막이 하여 시간을 벌려는 것 보다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성을 떠남으로 인명피해가 나지 않도록 결정한 것이다.



2.충성스러운 신하들과 함께(15, 18-22절)
압살롬의 반역 소식이 들려 오자 다윗은 신속하게 예루살렘 성을 떠나고자 했다. 그때 신하들이 함께 따라 나선다. 그러면서 "모든 일은 임금님께서 결정하신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들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새번역_15절) 라고 말하며 광야로 나서는 다윗과 함께 한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호위하기 위해 그의 용병들도 역시 함께 한다. 대부분 블레셋 사람들이었다. 압살롬을 따르는 이들이 "그저" 따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분명히 비교가 된다.

특히 따로 언급한 "가드 사람 잇대"의 충성심은 남다르다. 다윗의 표현으로 "이제 막 이민 왔으니 정처 없이 떠나는 자신을 따라올 필요 없다"고 할 때 잇대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이스라엘 백성다운 고백으로 충성을 서약한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고, 임금님께서도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이 종도 따라가겠습니다."(새번역_21절)

놀라운 것은 도피의 여정을 떠나는 다윗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신앙고백이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고..." 대단한 신앙고백이다. 그는 다윗의 정처 없는 피난길에 함께 나서면서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동참한다. 이제 막 용병으로 부름받아 가드에서 예루살렘으로 정착하자 마자 이 사달이 났지만, 그는 자신을 부른 다윗 왕을 저버리지 않는다. 더 나아가 다윗 왕의 하나님을 다윗 왕 보다 더 선명하게 믿음으로 고백하며 다윗을 따라 나선다.

다윗은 이 상황에서 시편 3편의 믿음의 고백을 드렸다. 흥미로운 것은 사무엘서의 기록은 밧세바 사건 이후 영적으로 둔감해진 다윗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 시켰다. 13장 이후 다윗 집안의 다툼은 어쩌면 어쩡쩡한 다윗의 태도가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다윗이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결정하기를 이렇게 신속하게 하고, 더구나 그렇게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오면서 시편 3편을 지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감히 상상력을 펼쳐 보자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잇대의 이 놀라운 고백,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계시는데..."라는 이 고백이 다윗의 영성을 일깨우지 않았을까? 야성의 영성이 다시 돌아오도록 영향을 끼친 것은 잇대의 이 망설임 없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진정 놀랍지 않는가!

*더 놀라운 것은 지금 도망하는 다윗을 호위하는 군사들은 유다 지파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인들이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원수처럼 여겼고, 다윗이 무너뜨렸던 블레셋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때 가장 적대적으로 맞섰던 이방인들이 지금은 다윗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고 있다. 수세에 몰렸고, 우군은 아무도 없는, 누구도 편들기를 거부할 때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이라니....

*진정 놀랍지 않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에게 그 마음이 넘어가는 기회주의자들임에 틀림없지만, 끝까지 다윗의 곁을 충성스럽게 지킨 이들은 우직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렇다 이렇듯 나는 끝까지 주님의 뜻에 충성하고 싶다. 이리 저리 기회를 찾아 헤메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 걸음이기 원한다. 끝까지 주님과 주님의 뜻을 지키는 종이 되련다.



3.온 땅 사람이 울다!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다!(23절)
다윗의 삶에 쫓김과 도피가 다시 시작되었다.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이 과정에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사울 왕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실망하여 왕권을 옮기시겠다거나, 다윗의 통치에 제동을 거시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다윗은 도피의 길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였다.

압살롬의 반란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지만, 예루살렘 성을 사수 하기 위하여 신하들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신하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왕으로서의 자존심,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신하들과 가족들을 먼저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게 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고 기록한다(23절). 이 때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다. *압살롬에게 이스라엘 민심이 돌아섰다고 했지만, 여전히 다윗을 위해 우는 백성들도 있었다.

심지어 도피하는 왕을 따라 사나 죽으나 어디든지 가겠다고 맹세하는 이들은 심지어 이방인들이었다. 압살롬이 민심을 등에 업고 반역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피를 결정하다니... 그것은 순전히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았을까? 아니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다시 광야 길로 향하는 무너진 마음이었을까?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압살롬의 반란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언된 저주가 있지만, 구태여 압살롬이 스스로 그 칼이 될 필요는 없었다. 즉, 이 반란은 압살롬의 권력에 대한 야망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압살롬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일어서면서 "반역에 동참하는 백성들이 많아 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고 여기는 증거로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에게도 역시 그와 함께 하기 위해 기꺼이 광야로 함께 나가는 백성들이 있었고, 성을 떠나는 다윗을 위해 큰 소리로 울어줄 백성들도 있었다. 단지 "민심, 여론"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이어서는 안 된다.

-아직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압살롬은 자신들에게 모여드는 많은 백성들을 의지하였고, 다윗은 백성들의 생명과 예루살렘 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예루살렘 성을 비워주는 결정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는 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지 못했다. 또 다윗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백성들과 신하는 압살롬에게 넘어간 백성들의 민심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민심, 여론이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불분명한 때에도 다윗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따라 결정한다. 백성들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결정이다.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생명만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 즉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들의 생명도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예루살렘 성을 수성 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발생하게 될 무수한 생명들의 희생을 먼저 고려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이익이 위는 것과 명분을 지키는 것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였다. 다윗, 그는 참으로 왕 답다!

*이런 다윗에게 가드 사람 잇대와 같은 이들의 충성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닐까!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결정에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신속함을 보고 그의 모든 신하들이 당연히 잇대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큰 소리로 울며 광야 길로 함께 향할 결심을 한 것은 다윗의 이런 마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 나도 언제나 잇대처럼 담대한 신앙고백과 행동의 사람이기를 바래 본다. 누구라도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통곡하고 슬퍼하는 그 현장에서 자신이 다윗과 함께 광야로 나서는 것은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계시고, 그 주님이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믿기에 광야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면 개의치 않는다는 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 없는 도시 예루살렘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황량한 광야에 생명과 구원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삶이기를 바란다.



*우리의 지도자들에게서 다윗과 같은 백성을 위하는 참 마음이 있기나 할까? 지금 우리의 문제는 지도자들에게 대한 이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에 있다. 정치 뿐일까? 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한 세상과 성도들의 시각은 어떨까? 자신만 생각한다는 불신과 실망이 역력하지 않는가?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다윗의 결정과 행동에 감탄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철저히 무능하다고 비판과 모함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위급하고 다급한 그 찰나의 선택과 결정을 자신을 위하여가 아닌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과 신하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내린다.

*나의 걸음에도 위기가 밀려와 찰나의 순간에 결정해야 할 때, 상황에 밀려서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하기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과 생명을 존중하는 결정을 내리기를 결심해 본다. 무엇보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결정 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결정하기 위해 나의 명분과 체면을 기꺼이 내려 놓으리라!

*백성들이 서로 싸우게 될 현장을 지키는 왕 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광야 길로 나서는 다윗의 용기를 본 받고 싶다.



*주님, 명분과 실리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우선 순위었던, 다윗 왕의 결정을 본 받겠습니다.
*주님, 민심과 여론에 기대어 백성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왕권 마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잠시 내려놓는 다윗의 선택과 결정이 신선합니다. 백성들을 이렇게 위하는 지도자를 이 시대에 볼 수 있을까요?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부터 이런 마음을 부어 주십시오!
*주님, 어쩌면 다윗의 영성을 일깨웠을 수 있는 잇대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삼하 15:1-12 마음이 도둑질 당하지 않아야지...

압살롬이 반역한다. 그는 매우 용의주도하에 반역을 준비한다.


그는 왜 반역을 결심 했을까? 짐작하기는 다윗이 자신을 왕위 계승자로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였을 것이다.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한 후 3년 동안 그술 땅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귀환하였고 이후 2년만에 다윗의 얼굴을 뵈었지만 매우 형식적인 만남에 그쳤다. 다윗은 압살롬을 다른 왕자들처럼 왕궁 관료 중의 하나로만 복직 시켰을 뿐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압살롬이 개인적으로 노력해도 다윗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 것을 짐작했다. 왜냐하면 이 시기 즈음 자신보다 20~30세 정도 어린 솔로몬이 왕위 계승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여디디야(여호와께 사랑받는 자)”라는 별칭에 속에 다윗의 속마음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동생의 이름에서 다윗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모습은 압살롬이 얼마나 권력을 다시 잡으려고 애썼는지 짐작하게 한다.



1.치밀한 준비(1-6절)
압살롬은 더욱 치밀하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 그의 목적은 분명했다. 군사를 일으키는 반란보다 백성들의 여론을 기반 삼아 왕위 계승자로 합법적인 지위를 얻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차근 차근 진행 시킨다. 무엇보다 다윗 왕정의 약점을 파고든다. 민심이 다윗으로부터 떠나도록 만들기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여 행동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정치역학에 착실하게 반응한다.

압살롬은 고대 왕정의 기본 덕목인 “친백성 행동”을 꾸준하게 감당했다. 다윗이 주변국에 대한 군사원정과 예루살렘 성과 같은 건축사업으로 이스라엘의 기강을 세운 반면, 백성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통치 기간이 길어질 수록 왕의 재판으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왕이 재판에 소홀히 임하여 피해를 본 것 같은 사례들이 겹치면서 다윗 왕에 대한 호감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압살롬은 이를 잘 공략하였다. 그는 아침마다 자기를 위해 준비한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여 오십명의 호위병과 함께(1절) 성문으로 들어오는 길 가에 서 있었다(2절). 그곳에서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불러 세워 먼저 송사 내용을 듣고 지역 출신과 지파를 물었다(2절). 그리고서 “압살롬은 그에게 “듣고 보니, 다 옳고 정당한 말이지만 그 사정을 대신 말해 줄 사람이 왕에게는 없소”하고 말하였다. 압살롬은 늘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하였다(새번역_3절).”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백성들에게 “누가 나를 이 나라의 재판관으로 세워 주기만 하면 누구든지 소송 문제가 있을 때에 나를 찾아와서 판결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 줄 것이오.(새번역_4절)” 이라고 했다.

매우 악의적인 여론전 이었다. 그의 이런 말은 다윗 왕이 재판에 소홀하다는 인식을 심어 줄 뿐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재판을 행한다는 선입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 문제는 이런 압살롬의 모습은 왕이 감당하는 재판과 동일하고, 무엇보다 백성들이 자신의 일을 송사하러 들어오는 성문 밖 길가에 병가와 말들, 호위병 50명이 수행하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지다 보니 일반 백성들이 보기에 압살롬이 이미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계승자처럼 여겨지게 되는 효과를 불러왔다.

그런 압살롬이 만일 백성이 나아오며 엎드려 절하면 손을 펴서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을 맞춤으로(5절) 매우 친근하고 탈권위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까지 했다. 압살롬은 정치 여론전의 귀재였다. 이런 생활을 무려 4년 동안이나 지속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새번역_6절)”


*압살롬은 치밀하게 반역을 준비했다.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것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을 매일 성문 밖 길가에 행차하여 송사하려고 각지에서 올라오는 백성들을 먼저 만남으로 차근 차근 확대시켜 나갔다. 동시에 왕의 직무인 재판관의 자리에 세워 주기만 하면 이렇게 변함없이 재판을 감당할 것이라고 감언이설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다윗의 약점을 파고들어 민심이 그에게서 떠나도록 만든 압살롬의 지혜가 도드라진다. 그런데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이 만들어 쟁취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시는 자리인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모든 지혜를 짜내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준비한다.

*당시 다윗왕이 행차할 때 호위 무사들의 규모가 약 30여명이었음을 볼 때 압살롬은 드러내놓고 자신의 호위 무사들의 규모를 50명으로 세워 자신이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처럼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압살롬이 아무리 이렇게 노력하여도 “왕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자리인 것을 여지껏 깨닫지 못한다.



2.드디어 결행된 반역(7-12절)
압살롬은 왕이 되기 위해 동일한 일과를 성실하게 4년동안 반복한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그는 ‘헤브론’에서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스스로 선언하려고 했다. 헤브론은 자신이 출생한 지역이자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어 7년 6개월동안 다스렸고 이후에 통일왕국의 왕으로 연결된 의미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당시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있어서 많은 제사들이 그곳에서 드려지고 있었다.

압살롬은 다윗에게 그술에서 망명생활 하고 있를 때 “서원”한 것을 이제 지키기 위해 헤브론에서 가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7-8절). 다윗은 평안히 가라 고 선선히 보내주었다. *압살롬은 서원제라는 제사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완악함을 보여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상광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도 언제든지 활용하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를 가감 없이 보인다.

다윗에게 헤브론에서의 서원 감사 제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압살롬은 먼저 미리 준비한 정탐꾼들을 이스라엘 각처로 꼼꼼하게 보낸다. 나팔소리가 들리거든 지체하지 말고 “곧”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했다. 얼마나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는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맡기는 치밀함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이 반역하면 함께 동조해 줄 수 있을 듯한 200명의 다윗의 신하들을 헤브론으로 함께 데려 간다. 이들은 대부분 압살롬의 반역계획을 모른 채 "그저" 따라간 사람들이다. 맹목적인 추종자들인 셈이다. 오늘날 정치 집회 자리에 "그저" 보이는 부류들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이 합류한다. 그의 존재는 다윗의 최측근 조차 압살롬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춰지고 백성들이 그에 대한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는 원인중의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아히도벨의 합류는 "반역의 일이 커지게"하고 "백성들의 합류가 많아지게"하는 계기 되게 하였다(12절).



나는?
-그럼에도 압살롬의 행동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다고 하여도, 든든한 참모들이 합류하였어도 정치적인 기반이 확실하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왕은 그 미래가 뻔하다. 하지만 압살롬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기의 능력을 더 과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거짓으로 얻은 백성들의 마음은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음을 알아야 했다. 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조차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에서 결코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안타깝다....

-압살롬은 자신의 힘, 배경, 사람들의 평판, 여론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세상적으로 표현하자면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너무도 무지했다. 자신의 권모술수로 얻은 권력을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행동 몇 가지와 들려주는 몇 마디로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서 반역의 기반을 다졌다는 것이 문제다. 압살롬은 사람의 마음을 훔칠 줄 아는 도둑이었다. 아버지 다윗과의 관계회복에 치중하기 보다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하여 백성의 마음을 훔쳐 아버지의 자리 곧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반역의 길을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런 압살롬 주위에 "그저" 따르는 사름들이 모여 든다는 것도 그 시대 오늘날이나 반복되는 문제이다. 이런 측면에서 압살롬의 이야기는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갑작스럽게 말 몇 마디와 포장된 이미지로 국민의 마음을 훔친 지도자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이 형국이 묘하게 압살롬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괜한 생각일까? 아~~ 도둑맞은 민심이 다시 되돌려 졌으면 좋겠다.....



*주님, 압살롬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교훈되어 지금 이 시대에서 다시 보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리석은 이야기의 결말과 같지 않도록 도와주실 거지요?
*주님,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약점을 파고드는 데 시간을 들이는 것 보다 주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하는데 시간을 사용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겉으로 보이는 것, 들려지는 말에 내 마음이 도둑질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제발요....

삼하 14:21-33 돌아오기는 했지만...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지만, 그를 만나지는 않는다. 그술 땅에 머무는 압살롬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간절했으나 데려 오기 위한 명분도, 구체적인 회개의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데려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이런 마음을 잘 알아채고 드고아 여인을 통해 압살롬의 귀환을 결정하게 하였다. 그렇게 3년만에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압살롬을 돌아오도록 허락을 했지만, 다윗에게는 그 다음이 없었다. 돌아오게 한 명령은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라고 쳐도 돌아온 후 압살롬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작 본인이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턱대도 돌아오게 한 듯 하다.

그래서인지 요압이 그술로 직접 가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 왔지만(23절), 다윗은 그를 맞이 하지 않는다(24절). 암논을 살해한 것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여지껏 안되었을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큰 사건을 일으킨 압살롬에 대하여 어떤 처벌도 공식적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또 압살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공적 회개도 없었다. 이렇게 어느 것 하나 3년전 사건에 대한 갈무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귀환을 허락한 것이다.

요압이 그술로 압살롬을 데리러 간 사이 다윗의 마음에 이런 부분이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도록 허락은 하였지만, 환영하지는 않는다.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24절)"는 명령을 압살롬에게 내린다. 요압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며 재빨리 다윗의 마음을 또 알아차린다. 그는 압살롬을 그의 집으로 돌려 보낸 후 일절 만나지 않는다. 다윗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요압이 자신을 그술까지 와서 데리러 왔을 때 모든 일이 해결 된 듯이 여겼을 수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의 다윗의 냉대 앞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2년이 다 되도록 일절 연락조차 없는 상황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술에 거하는 것이나 자신의 집에 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분노했을 수도 있겠다. 3년의 그술에서의 망명생활, 그리고 돌아와서 2년의 "가택연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어야 했을까?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이 시간속에서 압살롬은 어떻게 그이 삶을 돌아보아야 했을까?

사건의 결말을 알고 있는 나는 이 상황에서 압살롬이 근신하며 회개하고, 자신의 지난날의 과오를 철저히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압살롬의 모습은 이와 반대로 펼쳐진다. 어떤 회개나 반성조차 그의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친형을 살해한 큰 죄를 저질렀으니 이에 따른 짊어져야 할 죄책의 무게도 마땅히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압살롬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하다. 오히려 암논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순종한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여기는 듯 하다. 실제로 백성들의 민심도 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문제는 압살롬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는 그저 그의 외모 때문이었는데(25절) 정작 자신은 착각한듯 보인다. 어떤 근신이나 회개와 자숙의 기간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와우이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지려는 이후 행보는 씁슬하기 그지 없다.

백성들의 인기에 압살롬은 다윗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요압을 통해 주선되기를 요청하지만 묵묵부답이자, 또 다시 무리수를 둔다. 요압의 보리밭을 "방화"하여 요압과 만나고 다윗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한다(30-31절). 요압은 이 소식을 듣고 불편한 기색으로 압살롬을 만난다. 한편으로 요압이 압살롬을 만날 수 밖에 없는명분을 만들어 준 것일 수 있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불편한 마음은 2년 동안 일절 상다하지 않았기에 요압에게도 압살롬을 쉽게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압살롬도 정치적 판단력이 보통이 아니다.


요압을 만난 압살롬은 그가 드고아 여인에게 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요압의 입에 할 말을 알려 준다. "...무엇 때문에 제가 그수르에서 왔습니까? 차라리 제가 계속 그곳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제가 임금님의 얼굴을 뵙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죄가 있다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새번역_32절) 요압은 자신이 드고아 여인에게 사용한 방법을 사용하는 압살롬에게 놀랐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2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다시 다윗에게 압살롬을 만나 줄 것을 요청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 판단한 듯 하다.

다윗은 요압의 말을 듣고 압살롬을 5년 만에 만나준다. 5년만의 상봉에 압살롬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다윗은 아들과 입을 맞췄다(33절). 그런데 사무엘서 저자는 이 만남을 매우 형식적인 필체로 기록을 남긴다. 5년만의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이 아니라 그저 형식적인 만남이었음을 애써 드러내는 듯 하다.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압살롬은 5년전 사건에 대한 어떤 사죄도 하지 않았다. 왕가 내에서 자신 스스로 적극적으로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지도 않고 그저 망명생활과 가택연금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산 것 뿐이었다.

특히 압살롬은 요압을 통해 다윗에게 "저에게 죄가 있다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라는 표현 속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자신의 행동과 죄에 대하여 어떤 반성도 없다. 마치 "나는 죄가 없으니 오아자로서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자리에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심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자신이 암논을 죽인 것은 정당한 행위였고 암논은 벌을 받은 것 뿐이다는 것이다. 압살롬은 철저히 자신만을 위한 정치적 계산에 몰두 하고 있었다.



*압살롬의 마음은 "무죄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행동은 늘 정당하다 여기는 인물이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지고 왕위 후계자의 자리에 당당히 서겠다고 요청하는 모습이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다윗은 이런 아들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이 아들이 죄에 대한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까도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윗은 어떤 행동도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묵묵부답은 늘 일만 키웠다. 암논이 다말에게 몹쓸 짓을 했을 때도 화만 낼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망명했을 때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화만 내고, 슬퍼하며 곡만 했을 뿐이다.

*자기만큼이나 큰 죄를 지은 아들 압살롬을 하나님 앞에서 회복 시키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다윗이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또 뒷북만 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답답하고 답답하다....



*어쩌면 다윗과 같은 "묵묵부답"의 모습이 때로는 장점이 될 수 있고 약점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적재적소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자리가 왕의 자리이다. 하나님의 왕권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을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왕은 이러한 순간을 놓치면 곤란하다. 혹시 놓쳤더라도 금새 말머리나 일머리를 잡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결해야 했다. 외면하고 묵인하며 지나온 시간 만큼이나 압살롬은 제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고집불통의 청년으로 성장하고 말았다.

*바로잡을 무수한 기회들을 모두 미적거리다가 놓쳐 버리고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주님, 바로잡을 수 있을 때 바로잡는 결단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압살롬과 같은 자기가 옳다에 함몰된 지도자들이 이끄는 세상이 두렵습니다. 긍휼을 베푸셔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겸손한 지도자를 볼 수 있도록 희망을 주십시오.